"소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가계와 탄생) |
(→출가수행) |
||
40번째 줄: | 40번째 줄: | ||
===출가수행=== | ===출가수행=== | ||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ref> 12쪽.</ref> |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ref> 12쪽.</ref> | ||
+ | {{blockquote| | ||
+ |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 ||
+ | |출처= | ||
+ | }} | ||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이 현화사의 주지가 됨으로써 그도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하였다. 소현은 이 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해린은 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이 법상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하였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ref> 17쪽.</ref> |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이 현화사의 주지가 됨으로써 그도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하였다. 소현은 이 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해린은 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이 법상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하였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ref> 17쪽.</ref> | ||
− | + | {{blockquote| | |
+ | 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礱)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 ||
+ |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扆)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 ||
+ | |출처= | ||
+ | }} | ||
===활동=== | ===활동=== |
2017년 8월 27일 (일) 17:15 판
소현(韶顯) | |
대표명칭 | 소현 |
---|---|
한자 | 韶顯 |
생몰년 | 1038(정종 4)-1096(숙종 1) |
시호 | 혜덕(慧德) |
휘 | 소현(韶顯) |
탑호 | 진응(眞應) |
자 | 범위(範圍) |
성씨 | 이씨(李氏) |
본관 | 인주(仁州) |
출신지 | 황해북도 개성 |
승탑비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혜덕왕사 소현(韶顯)은 자(字)는 범위(範圍)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로, 1038년(정종 4)에 개경에서 태어났다. 소현의 할아버지(祖)는 한(翰)이고, 아버지는 이자연(李子淵), 어머니는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 김씨(金氏)이다. 소현은 이자연의 8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이른바 고려 문벌인 인주이씨 가문의 사람이었다.[1]
출가수행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2]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이 현화사의 주지가 됨으로써 그도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하였다. 소현은 이 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해린은 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이 법상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하였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3]
활동
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59)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內殿에서 열린 法席에서 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서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4]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廣敎院의 설치와 둘째 광교원에서 이루어진 章疏의 간행이다. . 소현은 금산사의 중창과 함께 법상종 관련 장소를 간행·유통할 수 있는 광교원을 두어 법상종단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절의 남쪽 지역에 원을 두고 ‘광교원’이라고 하였다.[5]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여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이 되어서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
입적
12월 금산사 남쪽의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58세, 법랍 47세였다. 숙종은 혜덕왕사(慧德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라 하였다.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