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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 ==내용== |
− | ===어머니와의 솜씨겨루기 설화=== | + | ===출생과 즉위=== |
− | {{PAGENAME}}은 서예솜씨가 매우 뛰었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져온다. {{PAGENAME}}가 절에서 글씨공부를 하던 도중에 집으로 오자, 그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자신이 떡을 썰테니 {{PAGENAME}}에게는 글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떡을 정갈하게 썰었는데에 반해 {{PAGENAME}}는 삐뚤빼뚤 글을 써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조선시대 문헌에는 나오지 않으며 그의 고향인 송도(개성) 일대에서 구전된 이야기이다. <ref>이완우, 「석봉 한호」, 『미술사논단』12, 한국미술연구소, 2001, 29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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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GENAME}}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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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풍비박산된 집안에서 한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서경덕]]의 소개로 [[신희남]]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ref>정성경,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1828 죽림 정사에서 한석봉을 길러 낸 어머니]」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 영암향토문화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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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살인 1567년(명종)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조선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의 글자를 정자로 옮겨쓰는 일을 하던 벼슬)으로 국가의 여러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함께 파견되었다.<ref>김응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065 한호]」<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이때 중국에서 명필로 알려지게 되었고 명대 후반의 저명한 학자 왕세정, 명의 사진 주지번 등이 한호의 글씨를 크게 칭찬하였다. 임진왜란이 참여한 명나라 장수와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조선 선조]]의 호평으로 크게 유명해였다. 국왕은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자주 하사했고, 사자관이던 그에게 문반 벼슬을 제수했다. 또 왕실교육용 [[천자문 (장서각본)|천자문]]을 제작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배려로 한호는 정랑(正郞)과 가평(加平)군수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ref>김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623&cid=59015&categoryId=59015 한호]」<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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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GENAME}}의 작품활동===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한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한호는 왕희지, 안진경의 서체를 익혀 각종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한호는 기본적으로 왕희지체를 바탕으로하여 부분적으로 그 후대의 서체를 수용하였다. 특히 큰 글자일수록 후대의 서체를 수용한 경향이 크다. 예를 들면 해서 부분에서는 문진명의 서체를, 초서 부분에서는 회소, 축윤명, 장필 등의 서체를 수용했다. 한호의 서체는 여러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천자문 (장서각본)|석봉천자문]]』등이 조선말까지 수차례 간행되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왕실에서는 선조 이후의 어필을 비롯하여 왕실의 서체에 영향을 주었고, 문인계층에서는 친구와 후손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사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자관들의 서풍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ref>이완우, 「석봉 한호」, 『미술사논단』12, 한국미술연구소, 2001, 318-31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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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경주 옥산서원]]의 현판,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497&cid=40942&categoryId=33383 한호]」,<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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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관계망== | | ==지식 관계망== |
조선의 4대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