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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79년 6월 29일 세속의 나이 53세, 승가의 나이 39세로 입적했다. 1179년 입적하자 개성 동남쪽 귀법사에 시신을 임시로 모셨다가, 7월 17일 동림산 기슭에서 다비를 하고 11월에 장단현 대탁산에 안치했다. 1179년 명종이 현오국사(玄悟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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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29일 병이 매우 심하여지므로 스님은 손으로 일몰처(日沒處)를 가리키면서 숙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수족(手足)의 굴신(屈伸)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결락) 개경(開京)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유해(遺骸)를 임시 안장(安葬)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장사와 49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16일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충질(任忠質)과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최광유(崔光裕)와 내시(內侍)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 (결락) 등을 보내어 (결락) 국사로 책봉하되, 시호를 현오(玄悟)라고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이 달 17일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毗)하고, 이 해 11월에 장단현(長湍縣) 대탁산(大倬山)에 안조(安厝)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하늘로 뻗은 오색(五色) 기운이 무지개와 같아서 영구차를 따라 갔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상함을 경탄(驚歎)하였다. 자(自) (결락) 골(骨). 개(皆) (결락) 춘추는 53세이요, 법랍은 39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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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9일 (토) 17:36 판
종린(宗璘) | |
대표명칭 | 종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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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ongrin |
한자 | 宗璘 |
생몰년 | 1127년(인종 5)-1179년(명종 9) |
시호 | 현오(玄悟) |
자 | 중지(重之) |
성씨 | 왕씨(王氏) |
승탑비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휘는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은 왕(王)씨로 고려 17대 국왕 인종(仁宗)의 아들이다.[1]
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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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가수행
13세에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의천(義天)의 유풍을 이을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던 인종은 징엄(澄儼)에게 명하여 불일사(佛日寺)에서 1141년(인종 19) 수계(授戒)하게 하였다.[2]
활동
인종이 항상 궁궐 내 도량으로 종린을 초빙하여 강론을 들었다. 이후 의종이 즉위하자 종린을 1146년에 수좌(首座)로 진급시켰다. 그 후 귀신사, 국태사, 중흥사, 부석사 등에 주지하는 동안에도 검소하여 방장실 안에 10전(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으므로 사부대중이 모두 존경하였다. 이에 임금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3]
1171년(명종 1) 임금이 만수가사(滿繡袈裟) 1벌을 하사하고 그해 겨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을 청해 강설을 듣은 후 임금이 좌세(佐世)라는 호를 내리고, 내전에 불러서 가사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때 의종의 아우인 충희(冲曦)를 출가시켰다.[4]
신묘년(辛卯年) 가을에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바탕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으로 하여금 (결락) 월(月)에 조금 몸이 불편하므로 문인(門人)이 의사를 청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결락) 지(之) (결락) 의(矣) (결락) 미(未) (결락)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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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입적
1179년 6월 29일 세속의 나이 53세, 승가의 나이 39세로 입적했다. 1179년 입적하자 개성 동남쪽 귀법사에 시신을 임시로 모셨다가, 7월 17일 동림산 기슭에서 다비를 하고 11월에 장단현 대탁산에 안치했다. 1179년 명종이 현오국사(玄悟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blockquote| 6월 29일 병이 매우 심하여지므로 스님은 손으로 일몰처(日沒處)를 가리키면서 숙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수족(手足)의 굴신(屈伸)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결락) 개경(開京)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유해(遺骸)를 임시 안장(安葬)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장사와 49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16일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충질(任忠質)과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최광유(崔光裕)와 내시(內侍)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 (결락) 등을 보내어 (결락) 국사로 책봉하되, 시호를 현오(玄悟)라고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이 달 17일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毗)하고, 이 해 11월에 장단현(長湍縣) 대탁산(大倬山)에 안조(安厝)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하늘로 뻗은 오색(五色) 기운이 무지개와 같아서 영구차를 따라 갔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상함을 경탄(驚歎)하였다. 자(自) (결락) 골(骨). 개(皆) (결락) 춘추는 53세이요, 법랍은 39였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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