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활동) |
(→입적) |
||
85번째 줄: | 85번째 줄: | ||
===입적=== | ===입적=== | ||
+ | 1403년(태종 5)에 무학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금강산응로 들어갔다. 이미 죽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무학이 선승으로서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진불암에 머물던 무학은 1405년(태종 5)에 금장암으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ref>탁효정, 202</ref> | ||
+ | {{blockquote| | ||
+ | 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 ||
+ | |출처= | ||
+ | }}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8월 13일 (일) 23:22 판
자초(自超) | |
대표명칭 | 자초 |
---|---|
한자 | 自超 |
생몰년 |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
호 |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승탑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승탑비 |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
목차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초(自超)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고 후에 숭정문화시랑(贈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다.[1] 자초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그가 충남 서산 간월도(看月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 인물조에 무학신승(武學神僧)이 간월도(看月島)에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2]
출가수행
자초는 1344년(충혜왕 복위5) 나이 18세에 송광사 혜감국사의 수제자인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용문산 혜명 법장국사를 찾아 교시를 받고 부도암이라는 암자 안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인 1346년(충목왕 2)에 이르러서는 능엄경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23세가 되던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진천 길상사에 머물렀고, 25세 되던 1352년(공민왕 1) 여름에 묘향산 금강암에서 정진하던 중 깨우침을 얻었다.[3]
구법유학
그가 26세 되던 1353년(공민왕 2) 가을에 입원하여 법원사에서 지공의 허락을 받고 다음해 1월 법천사에서 혜근을 만났다. 1354년 1월 법천사에 이르러 혜근을 참례하고 무령, 오대산을 유력하였다. 그후 서산 영엄사에 이르러 다시 혜근을 조우하고 두어해 머물면서 혜근에서 사사받았다. 그리고 귀국시 연도 광제선사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아가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4]
활동
자초는 원나라에서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 여름에 경남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았으며 여기서 혜근에게 불자를 받았다. 그가 혜근을 찾은 것은 지공으로부터 받은 수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자초는 귀국 후 두번째로 신광사에 있던 혜근을 찾아가 1361년 10월부터 1363년 7월 동안 머물면서 혜근에게 사사받았다.[5]
자초는 신광사를 나와 고달산에서 도를 닦다가, 1371년 나옹이 왕사에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렀던 때에 혜근에게 의발을 전해받았다. 그리고 1376년 여름에 회암사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1392년(태조 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6]
유원정(柳爰廷)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삼고, 박의중(朴宜中)을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로 삼고, 대성(臺省)의 낭관(郞官)을 모두 체천(遞遷) 하고, 중 자초(自超)를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
||
출처: |
태조는 개국 당시부터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계룡산과 무악, 한양 세 곳이었다. 1392년 8월에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할 것으로 밝히고 삼사 우복야 이염을 한양부에 보내어 궁실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태실증고사 권중화가 전라도 진동현의 산수형세도와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지도를 올리자 태조는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보기로 하였다. 1393년 1월 신료들과 함께 신도(新都)의 후보지인 계룡산의 지세를 살펴보기 위해 태조는 영삼사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참찬문하부사 이지란, 판중추원사 남은 등과 함께 충청도로 향했다. 개성에서 충청도로 향하던 도중 태조는 회암사에 들러 자초도 함께 동행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풍수지리를 파악하는 무학의 안목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신도 후보지를 순행할 때마다 무학의 자문을 구했음을 알 수 있다.[7]
입적
1403년(태종 5)에 무학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금강산응로 들어갔다. 이미 죽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무학이 선승으로서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진불암에 머물던 무학은 1405년(태종 5)에 금장암으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8]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민백
-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189쪽.
- ↑ 황인규 190쪽.
- ↑ 황인규, 191쪽
- ↑ 황인규, 193쪽.
- ↑ 민백
- ↑ 탁효정, 195-196쪽
- ↑ 탁효정, 202
참고문헌
- 고익진, "무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76-207쪽.
- 황인규, 無學自超 硏究
- 황인규, 仁王山寺와_無學大師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