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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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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조(前朝)의 말기에 명리로써 사를 불러 봉하여 왕사를 삼고자 하였으나, 사가 번번이 가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 태조 원년인 임신년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사(師)의 거취(去就)가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 ||
+ |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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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일) 23:07 판
자초(自超) | |
대표명칭 | 자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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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超 |
생몰년 |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
호 |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승탑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승탑비 |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
목차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초(自超)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고 후에 숭정문화시랑(贈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다.[1] 자초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그가 충남 서산 간월도(看月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 인물조에 무학신승(武學神僧)이 간월도(看月島)에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2]
출가수행
자초는 1344년(충혜왕 복위5) 나이 18세에 송광사 혜감국사의 수제자인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용문산 혜명 법장국사를 찾아 교시를 받고 부도암이라는 암자 안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인 1346년(충목왕 2)에 이르러서는 능엄경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23세가 되던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진천 길상사에 머물렀고, 25세 되던 1352년(공민왕 1) 여름에 묘향산 금강암에서 정진하던 중 깨우침을 얻었다.[3]
구법유학
그가 26세 되던 1353년(공민왕 2) 가을에 입원하여 법원사에서 지공의 허락을 받고 다음해 1월 법천사에서 혜근을 만났다. 1354년 1월 법천사에 이르러 혜근을 참례하고 무령, 오대산을 유력하였다. 그후 서산 영엄사에 이르러 다시 혜근을 조우하고 두어해 머물면서 혜근에서 사사받았다. 그리고 귀국시 연도 광제선사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아가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4]
활동
자초는 원나라에서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 여름에 경남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았으며 여기서 혜근에게 불자를 받았다. 그가 혜근을 찾은 것은 지공으로부터 받은 수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자초는 귀국 후 두번째로 신광사에 있던 혜근을 찾아가 1361년 10월부터 1363년 7월 동안 머물면서 혜근에게 사사받았다.[5]
자초는 신광사를 나와 고달산에서 도를 닦다가, 1371년 나옹이 왕사에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렀던 때에 혜근에게 의발을 전해받았다. 그리고 1376년 여름에 회암사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 고익진, "무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76-207쪽.
- 황인규, 無學自超 硏究
- 황인규, 仁王山寺와_無學大師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