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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쌍봉사(雙峰寺)는 [[도윤|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의 기록인 동리산 [[곡성 태안사|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혜철|혜철(慧澈)]]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하안거(夏安居)<ref>불교에서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를 지냈다는 내용이 쓰어있다. 이렇게 볼 때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고, 다만 [[도윤]]이 주석하던 기간에 사세(寺勢)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30&cid=42840&categoryId=42849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쌍봉사의 사찰명이 '쌍봉'인 이유는 [[도윤]]의 도호(道號)가 쌍봉(雙峰)이었기 때문이다. | 일반적으로 쌍봉사(雙峰寺)는 [[도윤|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의 기록인 동리산 [[곡성 태안사|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혜철|혜철(慧澈)]]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하안거(夏安居)<ref>불교에서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를 지냈다는 내용이 쓰어있다. 이렇게 볼 때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고, 다만 [[도윤]]이 주석하던 기간에 사세(寺勢)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30&cid=42840&categoryId=42849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쌍봉사의 사찰명이 '쌍봉'인 이유는 [[도윤]]의 도호(道號)가 쌍봉(雙峰)이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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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조광조(趙光祖)]]와 양팽손(梁彭孫) 등을 모신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예속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30&cid=42840&categoryId=42849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조광조(趙光祖)]]와 양팽손(梁彭孫) 등을 모신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예속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30&cid=42840&categoryId=42849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2017년 8월 9일 (수) 17:39 판
화순 쌍봉사 (和順 雙峰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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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순 쌍봉사 |
---|---|
한자 | 和順 雙峰寺 |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산의로 459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창건자 | 도윤(道允) |
경내문화재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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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1]
내용
역사
일반적으로 쌍봉사(雙峰寺)는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의 기록인 동리산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혜철(慧澈)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하안거(夏安居)[2]를 지냈다는 내용이 쓰어있다. 이렇게 볼 때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고, 다만 도윤이 주석하던 기간에 사세(寺勢)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3] 쌍봉사의 사찰명이 '쌍봉'인 이유는 도윤의 도호(道號)가 쌍봉(雙峰)이었기 때문이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도윤은 이 절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4] 고려시대에도 쌍봉사의 사세(寺勢)는 계속되어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중창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명한 승려가 다수 배출되었다. 고려 후기 쌍봉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최씨무인 집권기이다. 최우(崔瑀)는 1219년에 자신의 아들 최만전(崔萬全)과 최만종(崔萬宗)을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혜심(慧諶)에게 보내 출가시켰는데, 최만전이 쌍봉사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여 쌍봉사의 사세는 융성하게 되었다. [5]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趙光祖)와 양팽손(梁彭孫) 등을 모신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예속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6]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버린 후 1628년(인조 6)에 중건했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했다.[7]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사찰령으로 인해 쌍봉사가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편재되어 사격을 잃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사찰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기도 했다.[8]
관련 이야기
쌍봉사의 주산은 계당산(桂棠山)으로 이곳의 터는 배가 떠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돛대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워 돛대를 걸었다고 한다. 또한 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갈 수 없으므로 터 안에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산이 '사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 사자의 침이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사자의 혀를 찾아가 땅을 파니 맑은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9]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화순 쌍봉사 | A는 B에 있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도윤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도윤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혜철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도윤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혜심 | 화순 쌍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화순 쌍봉사 | 사자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사자선문 | 구산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화순 쌍봉사 | 해남 대흥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화순 쌍봉사 | 순천 송광사 | A는 B에 포함된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39년 | 혜철이 화순 쌍봉사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
1081년 | 혜소국사가 화순 쌍봉사를 중창하였다 |
1219년 | 최우가 자신의 아들 최만전과 최만종을 화순 쌍봉사의 혜심에게 보내 출가시켰다 |
1628년 | 임진왜란 후 불타버린 화순 쌍봉사를 중창했다 |
1911년 | 사찰령으로 인해 화순 쌍봉사가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
주석
- ↑ "쌍봉사",
『두산백과』online . - ↑ 불교에서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
『두산백과』online .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쌍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숙, "쌍봉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이영숙, "쌍봉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쌍봉사", 한국의 풍수지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 이영숙, "쌍봉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쌍봉사",
『두산백과』online . - "쌍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쌍봉사", 한국의 풍수지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쌍봉사", 답사여행 길잡이5 -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