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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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7일 (월) 00:28 판

혜근(惠勤)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혜근
한자 惠勤
생몰년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
시호 선각(禪覺)
나옹(懶翁), 강월헌(江月軒)
성씨 아씨(牙氏)
속명 아원혜(牙元惠)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승탑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승탑비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선각왕사 나옹은 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아씨(牙氏)이고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아서구(牙瑞俱)로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고, 금색(金色)새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나옹을 낳았다고 한다.

Quote-left.png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하였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庚申年, 1320)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1-362쪽.


출가수행

나옹은 20세에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여러 어른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 하였다. 이에 매우 슬픔 심정으로 공덕산 묘적암(지금의 문경 대승사)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요연선사는 깨닫지 못하여 혜근을 지도할 수 없었다. [1] 이색목은집에는 "혜근이 1344년(지정 갑신년)에 회암사에 이르러 주야로 홀로 좌선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는 중국으로 가서 스승을 찾으리라 결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혜근의 깨달음은 양주 회암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2]

Quote-left.png 나이 겨우 20살 때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 1344)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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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2-363쪽.


구법유학

1347년(충목왕 3)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승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에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내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평산처림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3]

Quote-left.png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戊子年)3월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스님을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10년 경인(庚寅) 정월(正月)에 지공스님이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처림(平山處林)을 친견하였더니, 평산(平山)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스님을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이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1-362쪽.


원 순제(順帝)는 그를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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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병신년(丙申年) 10월 15일 지공(指空)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혜근스님이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금구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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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1-362쪽.


활동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5] 혜근의 신광사 주석은 공민왕의 귀의와 함께 이루어진 파격적인 인사였다. 승과를 보지 않고 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40대의 젊은 승려에게 신광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를 맡겼기 때문이다. [6]혜근이 주석한 신광사는 1335년경부터 원 순제의 원찰이 되어 순제가 직접 후원하던 사찰이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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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포시(布施)를 하였다. 임금께서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임금께서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부득이 신광사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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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6쪽.


공부선(功夫選)은 1370년(공민왕 19) 9월 16-17일 양일간 광명사에서 개최되었다. 공민왕은 주맹(主盟)으로 혜근을 임명했다. 16일 공민왕광명사에 행차하여 공부선을 참관했다. 이 공부선에는 선종과 교종으로 크게 구분되는 고려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모든 승려들이 참여했다. 유일하게 공부선을 통과한 혼수는 당시 50세의 중년이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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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아갔으며, 임금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스님은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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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56-358쪽.


입적

1374년(공민왕 24) 봄 혜근은 회암사 중수를 시작하지만 9월 공민왕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우왕이 즉위했다. 우왕은 즉위 후 혜근을 왕사로 다시 임명했다. 우왕대 혜근은 공민왕을 천도하는 불사를 주관하기 위해 개경에 머문 것 외 다른 활동은 보이지 않아 회암사 중수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1376년(우왕 2) 4월 15일 회암사에서 낙성식이 거행되었으나, 이 낙성식으로 인해 혜근은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추방되었고, 밀양으로 가던 도중인 1376년(우왕 2) 5월 15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7세였다. [9]


Quote-left.png 대평(臺評)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혹은 지나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나옹스님을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스님이 마침 발병(發病)하였다.

(중략...)

한강(漢江)에 이르러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주(舟))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몇일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스님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 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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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59-361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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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혜근 A는 B를 위한 비이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혜근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381년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혜근 A는 B를 위한 비이다 1379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혜근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379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혜근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388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원주 영전사 A는 B에 있었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있다
혜근 개성 광명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70년
혜근 양주 회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44년, 1370년
혜근 여주 신륵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1372년
혜근 문경 대승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39년
혜근 해주 신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61년
혜근 춘천 청평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67년
지공 혜근 A는 B의 스승이다
혜근 원 순제 A는 B와 관련있다
혜근 요연 A는 B의 스승이다
혜근 나옹화상어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혜근 나옹화상가송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2016,142쪽
  2.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2016,145쪽
  3. 민백
  4. 민백
  5. 민백
  6. 강호선, 126
  7. 강호선, 123
  8. 강호선, 138-139
  9. 강호선, 184

참고문헌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2016.
  • 김효탄,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연구』, 민족사, 1999.
  • 염중섭, 『懶翁의 禪思想 硏究 : 指空의 영향과 功夫選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철헌, 『懶翁 惠勤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황인규, 「나옹혜근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대각사상』11, 대각사상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