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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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축년(辛丑年)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포시(布施)를 하였다. 임금께서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임금께서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부득이 신광사로 가게 되었다. | ||
+ | |출처=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6-36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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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스님들도 공포에 휩싸여 스님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스님께서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스님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스님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의 탱화를 보니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 ||
+ | |출처=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66-36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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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아갔으며, 임금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스님은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 ||
+ | |출처=이지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356-35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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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 (월) 11:07 판
혜근(惠勤) | |
대표명칭 | 혜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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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惠勤 |
생몰년 |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 |
시호 | 선각(禪覺) |
호 | 나옹(懶翁), 강월헌(江月軒) |
성씨 | 김씨 |
본관 | 경주(慶州) |
속명 | 아원혜(牙元惠) |
출신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승탑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승탑비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선각왕사 나옹은 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아씨(牙氏)이고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아서구(牙瑞俱)로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고, 금색(金色)새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나옹을 낳았다고 한다.
출가수행
나옹은 20세에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여러 어른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 하였다. 이에 매우 슬픔 심정으로 공덕산 묘적암(지금의 문경 대승사)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요연선사는 당시 사굴산문 출신으로 깨닫지 못하여 혜근을 지도할 수 없었다.[1]
구법유학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지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1년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양주 회암사지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1379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79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8년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원주 영전사 | A는 B에 있었다 |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혜근 | 개성 광명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70년 |
혜근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44년, 1370년 |
혜근 | 순천 송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71년 |
혜근 | 여주 신륵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1372년 |
혜근 | 문경 대승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39년 |
혜근 | 벽성 신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61년 |
혜근 | 춘천 청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67년 |
지공 | 혜근 | A는 B의 스승이다 | |
혜근 | 원 순제 | A는 B와 관련있다 | |
혜근 | 요연 | A는 B의 스승이다 | |
혜근 | 나옹화상어록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혜근 | 나옹화상가송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2016,142쪽
참고문헌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 김효탄,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연구』, 민족사, 1999.
- 염중섭, 『懶翁의 禪思想 硏究 : 指空의 영향과 功夫選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철헌, 『懶翁 惠勤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황인규, 「나옹혜근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대각사상』11, 대각사상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