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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이러한 승탑은 부처님의 사리탑인 금강계단의 형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형식에서 기단을 생략한 아주 소규모의 승탑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 승탑이 바로 그 기원적인 작품의 하나로 지목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19&cid=46710&categoryId=46710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이러한 승탑은 부처님의 사리탑인 금강계단의 형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형식에서 기단을 생략한 아주 소규모의 승탑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 승탑이 바로 그 기원적인 작품의 하나로 지목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19&cid=46710&categoryId=46710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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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근|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은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21) [[왕사|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혜근|보제존자]]는 [[순천 송광사|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양주 회암사|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혜근|보제존자 나옹]]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고려 우왕|우왕]]도 할 수 없이 [[혜근|보제존자 나옹]]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혜근|보제존자 나옹]]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ref> | [[혜근|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은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21) [[왕사|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혜근|보제존자]]는 [[순천 송광사|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양주 회암사|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혜근|보제존자 나옹]]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고려 우왕|우왕]]도 할 수 없이 [[혜근|보제존자 나옹]]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혜근|보제존자 나옹]]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ref> | ||
2017년 7월 23일 (일) 15:57 판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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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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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ell-shaped Stupa of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
한자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주소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자 | 여주 신륵사 |
관리자 | 여주 신륵사 |
크기 | 높이 2.1m |
건립시대 | 고려시대 |
관련승려 | 혜근(慧勤) |
관련탑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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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 1320-1376)의 승탑.
내용
개요
신륵사(神勒寺) 뒷편에 모셔져 있는 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의 사리탑이다.[1]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보제존자의 입적과 승탑의 건립
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은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21) 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보제존자는 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보제존자 나옹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우왕도 할 수 없이 보제존자 나옹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보제존자 나옹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3]
신륵사 앞에서 다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회암사에 옮겨진 보제존자의 사리는 8월 완공된 승탑에 모셔졌다. 또 그의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서 1379년(우왕 5)에 따로 승탑을 만들어 모셨다.[4]
화장(火葬)이 끝나고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 ||
출처: "회암사지선각왕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1년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79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1379년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8년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혜근 | 순천 송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혜근 | 양주 회암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
혜근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혜근 | 여주 신륵사 |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 1376년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8쪽.
참고문헌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답사여행의 길잡이: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2-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