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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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후수는 직사각형 형태이다. 여러 색이 섞인 직물로 몸체를 만드는데 이를 [[대수|대수(大綬)]]라고 하였다. [[대수]] 위에 두 가닥씩 세 번 여섯 가닥의 [[소수|소수(小綬)]]라는 끈을 드리우고, 그 사이에 왕과 왕세자는 [[금환|금환(金環)]]을 두며, 아래쪽에는 편물로 짠 망수를 드리운다.<ref>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57쪽~61쪽.</ref>
 
조선시대의 후수는 직사각형 형태이다. 여러 색이 섞인 직물로 몸체를 만드는데 이를 [[대수|대수(大綬)]]라고 하였다. [[대수]] 위에 두 가닥씩 세 번 여섯 가닥의 [[소수|소수(小綬)]]라는 끈을 드리우고, 그 사이에 왕과 왕세자는 [[금환|금환(金環)]]을 두며, 아래쪽에는 편물로 짠 망수를 드리운다.<ref>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57쪽~6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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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역할은 옥을 연결하던 것이었는데, 끈의 명칭으로 수 이외에 선진시기에는 수(璲)와 수(繸)가, 한 이후에는 역(縌)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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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역할은 옥을 연결하던 것이었는데, 끈의 명칭으로 수 이외에 선진시기에는 수(璲)와 수(繸)가, 한 이후에는 역(縌) 등이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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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의 명칭은 모두 옥을 연결하던 역할에서 기인하여 역(縌)은 [[수(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해 수(遂)와 역(逆)의 ‘연결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을 취한 것이다. 수(綬)는 승수(承綬)의 의미를 취한 것으로, 한대(漢代)는 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 황제 이하 관원에 이르기까지 각 신분에 맞게 구성요소·색채·길이·밀도 등에 엄격한 제도가 있었고, 이 때 확립된 수의 제도는 이후 제도의 기본 틀이 되었다. 한대의 수는 역(縌)·수(綬)·옥환(玉環)을 신분에 따라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출 수 있거나 옥환이 없이 역(縌)·수(綬)만 갖출 수 있거나 단지 수(綬)만 갖출 수 있었다.  역(縌)→옥환(玉環)→수(綬)의 순서로 배열되어 일직선의 형태를 이루어 [[수]]는 때에 따라 전체 수대(綬帶)를 의미하기도 하고 수대(綬帶)의 일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縌)은 수대(綬帶)의 가장 윗부분으로 혁대에 수대(綬帶)를 매는 역할을 하였고, 그 아래에는 수가 이어졌으며, 역(縌)과 수(綬) 사이에는 옥환(玉環)이 있다. 수대(綬帶)의 길이는 가장 긴 황제의 2장 9척 9촌(609.7cm)부터 가장 짧은 1장 2척(277.2cm)까지 차이를 보여 신분이 높아 수대가 길 경우 고리 모양으로 감아 늘어뜨려 고리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음을 상징한다.  
 
이것들의 명칭은 모두 옥을 연결하던 역할에서 기인하여 역(縌)은 [[수(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해 수(遂)와 역(逆)의 ‘연결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을 취한 것이다. 수(綬)는 승수(承綬)의 의미를 취한 것으로, 한대(漢代)는 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 황제 이하 관원에 이르기까지 각 신분에 맞게 구성요소·색채·길이·밀도 등에 엄격한 제도가 있었고, 이 때 확립된 수의 제도는 이후 제도의 기본 틀이 되었다. 한대의 수는 역(縌)·수(綬)·옥환(玉環)을 신분에 따라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출 수 있거나 옥환이 없이 역(縌)·수(綬)만 갖출 수 있거나 단지 수(綬)만 갖출 수 있었다.  역(縌)→옥환(玉環)→수(綬)의 순서로 배열되어 일직선의 형태를 이루어 [[수]]는 때에 따라 전체 수대(綬帶)를 의미하기도 하고 수대(綬帶)의 일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縌)은 수대(綬帶)의 가장 윗부분으로 혁대에 수대(綬帶)를 매는 역할을 하였고, 그 아래에는 수가 이어졌으며, 역(縌)과 수(綬) 사이에는 옥환(玉環)이 있다. 수대(綬帶)의 길이는 가장 긴 황제의 2장 9척 9촌(609.7cm)부터 가장 짧은 1장 2척(277.2cm)까지 차이를 보여 신분이 높아 수대가 길 경우 고리 모양으로 감아 늘어뜨려 고리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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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정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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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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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권현주, 「접섭대(䪓韘帶)에 관한 연구」, 『中央아시아硏究』, V.11, 중앙아시아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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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下』,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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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궁중기록화 복식 후수 01.jpg|왕의 후수.<ref> 『正祖國葬都監儀軌』.</ref>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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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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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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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칠 외,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 현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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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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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周錫保, 『中國古代服飾史』, 中國戱劇出版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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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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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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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림, 『한국의 관복』, 화성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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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明淑, 「朝鮮時代 冕服의 考察-國葬都監儀軌 服玩圖說을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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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明淑, 「朝鮮時代 王世子 冕服」, 『한국복식학회지』 18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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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明淑, 「朝鮮後期 冕服의 變遷-國葬都監儀軌 服玩圖設을 통한 考察-, 『한국복식학회지, 7권, 1983.
 +
* 金明淑, 「한국과 중국의 袞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 유희경, 「冕服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2
 +
* 전혜숙, 「면복의 십이장문에 관한 연구-상징의의를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최규순, 「綬에 관한 연구」, 『韓國의 服飾文化史』,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6.
 
* 최규순, 「綬에 관한 연구」, 『韓國의 服飾文化史』,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6.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최규순, 「이 시대의 진정한 ‘紳士’를 위하여」, 『전통 의생활 연구』, 제 2집,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 2008.
+
* 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민속원, 2011.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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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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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3일 (일) 01:28 판


후수
(後綬)
『正祖國葬都監儀軌』
대표명칭 후수
한자표기 後綬
이칭별칭 수(綬)
구분 기타
착용신분 왕실, 문무백관
착용성별 남성



정의

수는 ‘인끈’이라는 의미로, 인장의 꼭지[鈕]에 매는 끈을 말하는데, 대례복과 조복 허리띠 뒤에 매어 아래로 늘어뜨리므로 후수(後綬)라고 한다.[1]

내용

복식구성

착용신분

황제, , 황태자, 왕세자, 왕세손이 착용하였다.

착용상황

국가 의례, 혼례 등의 대례복을 입을 때 착용 한다.

형태

조선시대의 후수는 직사각형 형태이다. 여러 색이 섞인 직물로 몸체를 만드는데 이를 대수(大綬)라고 하였다. 대수 위에 두 가닥씩 세 번 여섯 가닥의 소수(小綬)라는 끈을 드리우고, 그 사이에 왕과 왕세자는 금환(金環)을 두며, 아래쪽에는 편물로 짠 망수를 드리운다.[2]

기타

유래
수의 역할은 옥을 연결하던 것이었는데, 끈의 명칭으로 수 이외에 선진시기에는 수(璲)와 수(繸)가, 한 이후에는 역(縌) 등이 있었다.
수(璲)·수(繸)·역(縌)
이것들의 명칭은 모두 옥을 연결하던 역할에서 기인하여 역(縌)은 수(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해 수(遂)와 역(逆)의 ‘연결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을 취한 것이다. 수(綬)는 승수(承綬)의 의미를 취한 것으로, 한대(漢代)는 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 황제 이하 관원에 이르기까지 각 신분에 맞게 구성요소·색채·길이·밀도 등에 엄격한 제도가 있었고, 이 때 확립된 수의 제도는 이후 제도의 기본 틀이 되었다. 한대의 수는 역(縌)·수(綬)·옥환(玉環)을 신분에 따라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출 수 있거나 옥환이 없이 역(縌)·수(綬)만 갖출 수 있거나 단지 수(綬)만 갖출 수 있었다. 역(縌)→옥환(玉環)→수(綬)의 순서로 배열되어 일직선의 형태를 이루어 는 때에 따라 전체 수대(綬帶)를 의미하기도 하고 수대(綬帶)의 일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縌)은 수대(綬帶)의 가장 윗부분으로 혁대에 수대(綬帶)를 매는 역할을 하였고, 그 아래에는 수가 이어졌으며, 역(縌)과 수(綬) 사이에는 옥환(玉環)이 있다. 수대(綬帶)의 길이는 가장 긴 황제의 2장 9척 9촌(609.7cm)부터 가장 짧은 1장 2척(277.2cm)까지 차이를 보여 신분이 높아 수대가 길 경우 고리 모양으로 감아 늘어뜨려 고리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음을 상징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황제 후수(왕실남성) A는 B를 착용하였다
후수(왕실남성) A는 B를 착용하였다
왕세자 후수(왕실남성) A는 B를 착용하였다
후수(왕실남성) 책례 A는 B에 착용하였다
후수(왕실남성) 가례 A는 B에 착용하였다
후수(왕실남성) 제례 A는 B에 착용하였다
후수(왕실남성) 의궤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후수(왕실남성) 왕의 대례복 A는 B의 일습으로 갖춘다
후수(왕실남성) 왕의 조복 A는 B의 일습으로 갖춘다
후수(왕실남성) 왕세자의 대례복 A는 B의 일습으로 갖춘다
후수(왕실남성) 왕세자의 조복 A는 B의 일습으로 갖춘다
후수(왕실남성) 상의원 A는 B에서 제작되었다
후수(왕실남성) 면복각 A는 B에서 보관되었다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57쪽~61쪽.
  2.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57쪽~61쪽.
  3. 『正祖國葬都監儀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고광림, 『한국의 관복』, 화성사, 1995.
  • 金明淑, 「朝鮮時代 冕服의 考察-國葬都監儀軌 服玩圖說을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 金明淑, 「朝鮮時代 王世子 冕服」, 『한국복식학회지』 18권, 1992.
  • 金明淑, 「朝鮮後期 冕服의 變遷-國葬都監儀軌 服玩圖設을 통한 考察-」, 『한국복식학회지, 7권, 1983.
  • 金明淑, 「한국과 중국의 袞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유희경, 「冕服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2
  • 전혜숙, 「면복의 십이장문에 관한 연구-상징의의를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최규순, 「綬에 관한 연구」, 『韓國의 服飾文化史』,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6.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민속원, 2011.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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