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조선 국왕의 회암사 행차) |
|||
33번째 줄: | 33번째 줄: | ||
====조선 국왕의 회암사 행차==== | ====조선 국왕의 회암사 행차==== | ||
[[조선 태조]]는 개국 후 [[무학|무학(無學)]]을 [[왕사|왕사(王師)]]로 삼고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하도록 하면서 그곳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또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태상전(太上殿)을 짓고 기거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불교에 대해 다소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태조를 뵙기 위해 회암사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태종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회암사에 수불을 안치하여 왕실의 복을 빌기도 했다. [[조선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에서의 불사를 후원했고, 풍양(豊壤) 일대로의 강무(講武) 행차 때 회암사를 지나며 시주했다. [[조선 세조]] 또한 정현왕후와 함께 회암사를 방문하고 중창하는 불사를 약속했다는 기록이 있다.<ref>회암사지박물관,『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27쪽.</ref> | [[조선 태조]]는 개국 후 [[무학|무학(無學)]]을 [[왕사|왕사(王師)]]로 삼고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하도록 하면서 그곳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또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태상전(太上殿)을 짓고 기거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불교에 대해 다소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태조를 뵙기 위해 회암사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태종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회암사에 수불을 안치하여 왕실의 복을 빌기도 했다. [[조선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에서의 불사를 후원했고, 풍양(豊壤) 일대로의 강무(講武) 행차 때 회암사를 지나며 시주했다. [[조선 세조]] 또한 정현왕후와 함께 회암사를 방문하고 중창하는 불사를 약속했다는 기록이 있다.<ref>회암사지박물관,『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27쪽.</ref> | ||
+ | |||
+ | ====회암사의 왕실후원자==== | ||
+ | [[조선 태조]]는 회암사(檜巖寺)와 [[무학|무학(無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무학이 회암사에서 능엄회(楞嚴會)를 베풀 때 쌀·콩 등을 내렸고, 무학의 부도를 만들 때 경기지역의 백성을 징발하도록 하고 쌀을 하사하기도 했다. 상왕이 되어서도 많은 전답을 하사하는 등 후원을 계속하였다. | ||
+ | |||
+ | [[효령대군|효령대군(孝寧大君)]]은 1434년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하여 회암사를 중건하고, 이곳에서 불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회암사를 원찰로 삼고 왕래하면서 재를 베풀었고 원각법회를 개최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선 세종]]은 억불정책을 시행하면서도 회암사에 대한 후원만은 묵인해주었는데, 이는 할아버지인 [[조선 태조]]의 회암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
+ | |||
+ | [[문정왕후]] | ||
====정청(正廳)의 위치==== | ====정청(正廳)의 위치==== |
2017년 7월 20일 (목) 23:49 판
양주 회암사 (楊州 檜巖寺) |
|
대표명칭 | 양주 회암사 |
---|---|
한자 | 楊州 檜巖寺 |
주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 1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4년 6월 10일 |
건립시기 | 1328년(충숙왕 15) |
창건자 | 지공 |
경내문화재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
목차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
내용
역사
회암사(檜巖寺)의 건립시기는 사료의 부족으로 잘 찾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2][3]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普雨)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4]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1821년(순조 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指空)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순조 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5]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발굴하고 있다.[6]
회암사와 왕실불교
조선 국왕의 회암사 행차
조선 태조는 개국 후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삼고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하도록 하면서 그곳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또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태상전(太上殿)을 짓고 기거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불교에 대해 다소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태조를 뵙기 위해 회암사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태종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회암사에 수불을 안치하여 왕실의 복을 빌기도 했다. 조선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에서의 불사를 후원했고, 풍양(豊壤) 일대로의 강무(講武) 행차 때 회암사를 지나며 시주했다. 조선 세조 또한 정현왕후와 함께 회암사를 방문하고 중창하는 불사를 약속했다는 기록이 있다.[7]
회암사의 왕실후원자
조선 태조는 회암사(檜巖寺)와 무학(無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무학이 회암사에서 능엄회(楞嚴會)를 베풀 때 쌀·콩 등을 내렸고, 무학의 부도를 만들 때 경기지역의 백성을 징발하도록 하고 쌀을 하사하기도 했다. 상왕이 되어서도 많은 전답을 하사하는 등 후원을 계속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1434년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하여 회암사를 중건하고, 이곳에서 불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회암사를 원찰로 삼고 왕래하면서 재를 베풀었고 원각법회를 개최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선 세종은 억불정책을 시행하면서도 회암사에 대한 후원만은 묵인해주었는데, 이는 할아버지인 조선 태조의 회암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청(正廳)의 위치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암사(檜巖寺)의 가장 중요한 혈처에는 정청(正廳)이 위치한다. 정청은 왕실사찰로서 회암사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건축물이다. 공민왕과 공양왕은 남경(南京) 행차에서 돌아가는 길에 정청에 머무르며 불사를 베풀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또 왕은 탄신 축하를 이곳에서 받기도 했는데, 동행한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정청에서 철야 예불을 올렸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 정청은 조선 태조가 회암사에 방문하면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8]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나옹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나옹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이색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무학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보우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지공 | 양주 회암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
조선 태조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공민왕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공양왕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28년 | 원나라에서 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양주 회암사를 중창했다. |
1378년 |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중건했다. |
1821년 | 이응준이 양주 회암사에서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
1828년 | 양주 회암사에 지공과 무학의 비를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웠다 |
1964년 | 양주 회암사가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
1996년 | 경기도 박물관에서 양주 회암사에 대한 조사, 발굴을 시작했다 |
시각 자료
영상
- TAEMIX STUDIO, "사라진 절터의 비밀,회암사지 - 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YouTube, 게시일: 2015년 6월 3일.
- 622년산 양주, "삼화상과 거대사찰 회암사 양주의 유산", YouTube, 게시일: 2014년 4월 13일.
주석
-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당시 회암사의 규모는 고려 말에 목은 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회암사",
『두산백과』online . - ↑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회암사지박물관,『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27쪽.
- ↑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51-152쪽.
참고문헌
-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43-158쪽.
- 임연태, 「양주 회암사」, 시와세계 제26호, 2009, 163-172쪽.
- 조유선,"양주 회암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