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9번째 줄: | 9번째 줄: | ||
|지정일=1963년 1월 21일 | |지정일=1963년 1월 21일 | ||
|주소=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2 | |주소=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2 | ||
− | |위도= | + | |위도=36.761545 |
− | |경도= | + | |경도=126.600716 |
|찬자=[[김정언|김정언(金廷彦)]] | |찬자=[[김정언|김정언(金廷彦)]] | ||
|서자=[[한윤|한윤(韓允)]] | |서자=[[한윤|한윤(韓允)]] |
2017년 6월 14일 (수) 15:49 판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
|
대표명칭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
---|---|
영문명칭 | Stele for |
한자 |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
이칭 |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 法印國師寶乘塔碑) |
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2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06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김정언(金廷彦) |
서자 | 한윤(韓允) |
각자 | 김승렴(金承廉)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탄문(坦文) |
건립연대 | 978년 |
승탑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普願寺址)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 900-975)의 탑비.
내용
개요
전체 높이 4.25m, 비신 너비 1.2m. 탑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고려 광종의 총애 속에 고려 불교계를 이끌면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융합을 주창하였으며, 국사(國師)가 되어 서산 보원사(普願寺)에 주석하였다.[1] 975년(광종 26) 75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978년(경종 3) 고려 경종은 법인(法印)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탑호를 내렸다.[2] 현재 탑비 옆에는 법인국사의 승탑이 놓여져 있는데, 이 승탑은 법인국사가 입적한 975년과 탑비가 건립된 978년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이 글씨를 새겼다.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이수(螭首)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4]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쓰여졌다.
비문
비문의 내용은 법인국사가 태어나 화엄을 배우고, 고려 태조가 시행한 승과(僧科)를 주관하고, 고려 태조가 고려 광종을 낳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화엄경을 사경하여 강설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광종이 즉위해서는 나라를 교화하는 법을 강설하며 태자를 위해 기도하는 등 기도와 경전 강설을 수차례 거행했던 행적을 기술하였다. 고려초 화엄종의 활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5]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해준, "탄문", 디지털서산문화대전
- ↑ 김세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정영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문화재청
- ↑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