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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속한 상궁과 나인들은 공상에 따라 차등된 급료를 지급받았는데, 공상은 온공상, 반공상, 반반공상, 온방자, 반방자로 구분된다. 온공상은 쌀 7두 5승, 콩 6두, 북어 1쾌 10미, 반공상은 쌀 6두, 콩 4두, 북어 1쾌 10미, 반반공상은 쌀 4두, 콩 1두 5승, 북어 13미를 지급받았고, 온방자는 쌀 12두, 북어 2쾌, 반방자는 쌀 3두, 북어 10미를 지급받았다. 쾌는 말린 북어를 세는 단위로, 1쾌는 20마리이다.
 
대전에 속한 상궁과 나인들은 공상에 따라 차등된 급료를 지급받았는데, 공상은 온공상, 반공상, 반반공상, 온방자, 반방자로 구분된다. 온공상은 쌀 7두 5승, 콩 6두, 북어 1쾌 10미, 반공상은 쌀 6두, 콩 4두, 북어 1쾌 10미, 반반공상은 쌀 4두, 콩 1두 5승, 북어 13미를 지급받았고, 온방자는 쌀 12두, 북어 2쾌, 반방자는 쌀 3두, 북어 10미를 지급받았다. 쾌는 말린 북어를 세는 단위로, 1쾌는 20마리이다.
 
본 자료의 특징 중 하나는 나인의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866년의 병인년 발기에서는 나인의 이름만 기재했으나, 1926년에 기록된 이 자료에서는 나인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쓰고 그 아래 니시, 박시 등 성씨를 쓰고 있어 나인들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엿볼 수 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8쪽.</REF>
 
본 자료의 특징 중 하나는 나인의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866년의 병인년 발기에서는 나인의 이름만 기재했으나, 1926년에 기록된 이 자료에서는 나인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쓰고 그 아래 니시, 박시 등 성씨를 쓰고 있어 나인들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엿볼 수 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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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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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혼·명절·탄일·진찬·제향 등의 왕실 행사에서 소요될, 혹은 소요된 물품목록을 적은 문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데, 문서의 제목에는 한글로 '<span style="함초롬바탕">'ᄇᆞᆯ기', '건긔', '단자'</span>, 한자로는 '발기(發記)', '건기(件記)', '단자(單子)' 등으로 적혀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왕실[[발기]]는 한지 두루마기에 쓰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얇고 질이 떨어지는 종이에 메모하듯이 써 놓은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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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주영하, 「1882년 왕세자 척의 혼례 관련 왕실음식발기 연구」, 『고문서연구』48, 한국고문서학회, 2016, 339쪽.</ref> {{PAGENAME}}도 궁중 발기 중 하나이다. [[건성궁]], [[영친왕]]궁, [[운현궁]], [[완화궁]], [[의친왕]]궁, [[경우궁]], [[선희궁]], [[명례궁]], [[육상궁]], [[용동궁]]을 비롯하여  [[침방]], [[수방]],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과방]], [[세답방]], [[세수간]] 등에서 일한 나인들의 공상(功狀:구체적인 공적)에 따라 급료를 지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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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춘(孟春)은 음력 1월을 뜻한다. 경선궁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살던 곳이다. 현재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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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7377&cid=40942&categoryId=33084 덕안궁]">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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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은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로 순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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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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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845&cid=40942&categoryId=33383 서울 운현궁]">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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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궁은 고종과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첫번째 아들 [[완화군]]이 살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3284&cid=43671&categoryId=43671 완화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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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귀인 장씨]]의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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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4051&cid=40942&categoryId=33383 의친왕]">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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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의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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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706 경우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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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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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993 선희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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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궁은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 불리다가 인조 때 명례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순종이 즉위한 후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로 덕수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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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831&cid=41826&categoryId=41826 명례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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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시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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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109 서울육상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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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궁은 [[순회세자]]가 사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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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440 용동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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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방과 수방은 궁중의 바느질을 맡아하던 곳이다. 소주방은 궁궐의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안소주방은 주로 일상음식을 담당하고 밖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담당한다. 생과방은 음료수·죽·다식·약과·전과 등을 만드는 곳이다. 세답방은 빨래·다듬이질·염색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세수간은 왕의 세숫물과 목욕물, 수건·요강·타구·매우틀(변기)을 담당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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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768 궁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ref>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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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5일 (토) 16:15 판

왕실 분뇨도
영문명칭 A list of salary paid to the servants in the public office
작자 미상
간행시기 1926년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2-5040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7.9×16.2cm
판본 필사본
수량 1첩
표기문자 한글



정의

‘병인 맹춘 큰전 분뇨도’는 대전에서 일하는 나인(內人)들에게 지급한 급료의 내역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

‘병인 맹춘 큰전 분뇨도’는 대전에서 일하는 나인(內人)들에게 지급한 급료의 내역을 기록한 것이다. 한지(韓紙)에 물목을 기록한 기존의 자료와는 달리 장지에 기름을 먹여 분판(粉板)처럼 글씨를 쓰고 지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병인년은 1926년이며, 큰전은 고종을 지칭한다. 제목에는 큰전만 언급되었으나, 경선궁, 서상궁, 내소주방, 외소주방, 영친왕궁 등 대전 이외의 나인들에게도 급료를 지급하였다. 대전에 속한 상궁과 나인들은 공상에 따라 차등된 급료를 지급받았는데, 공상은 온공상, 반공상, 반반공상, 온방자, 반방자로 구분된다. 온공상은 쌀 7두 5승, 콩 6두, 북어 1쾌 10미, 반공상은 쌀 6두, 콩 4두, 북어 1쾌 10미, 반반공상은 쌀 4두, 콩 1두 5승, 북어 13미를 지급받았고, 온방자는 쌀 12두, 북어 2쾌, 반방자는 쌀 3두, 북어 10미를 지급받았다. 쾌는 말린 북어를 세는 단위로, 1쾌는 20마리이다. 본 자료의 특징 중 하나는 나인의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866년의 병인년 발기에서는 나인의 이름만 기재했으나, 1926년에 기록된 이 자료에서는 나인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쓰고 그 아래 니시, 박시 등 성씨를 쓰고 있어 나인들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엿볼 수 있다. [1]

부연설명

조선시대 국혼·명절·탄일·진찬·제향 등의 왕실 행사에서 소요될, 혹은 소요된 물품목록을 적은 문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데, 문서의 제목에는 한글로 ''ᄇᆞᆯ기', '건긔', '단자', 한자로는 '발기(發記)', '건기(件記)', '단자(單子)' 등으로 적혀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왕실발기는 한지 두루마기에 쓰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얇고 질이 떨어지는 종이에 메모하듯이 써 놓은 것들도 있다. [2] 왕실 분뇨도도 궁중 발기 중 하나이다. 건성궁, 영친왕궁, 운현궁, 완화궁, 의친왕궁, 경우궁, 선희궁, 명례궁, 육상궁, 용동궁을 비롯하여 침방, 수방,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과방, 세답방, 세수간 등에서 일한 나인들의 공상(功狀:구체적인 공적)에 따라 급료를 지급하였다.

맹춘(孟春)은 음력 1월을 뜻한다. 경선궁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살던 곳이다. 현재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3]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로 순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4]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5] 완화궁은 고종과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첫번째 아들 완화군이 살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6]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귀인 장씨의 소생이다. [7]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의 사당이다. [8]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9] 명례궁은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 불리다가 인조 때 명례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순종이 즉위한 후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로 덕수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시는 사당이다. [11] 용동궁은 순회세자가 사았던 곳이다. [12] 침방과 수방은 궁중의 바느질을 맡아하던 곳이다. 소주방은 궁궐의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안소주방은 주로 일상음식을 담당하고 밖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담당한다. 생과방은 음료수·죽·다식·약과·전과 등을 만드는 곳이다. 세답방은 빨래·다듬이질·염색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세수간은 왕의 세숫물과 목욕물, 수건·요강·타구·매우틀(변기)을 담당하는 곳이다. [13]

관련항목

중심 연결정보 대상
왕실 분뇨도 인물 고종
왕실 분뇨도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왕실 분뇨도 간행년 1926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왕실 분뇨도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37.39197 127.054387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8쪽.
  2. 주영하, 「1882년 왕세자 척의 혼례 관련 왕실음식발기 연구」, 『고문서연구』48, 한국고문서학회, 2016, 339쪽.
  3. "덕안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4. "영친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5. "서울 운현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6.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2002. 온라인 참조: ,"완화궁",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7. "의친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8. "경우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9. "선희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1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온라인 참조: ,"명례궁",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11. "서울육상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12. "용동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
  13. "궁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