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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ref>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 + |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ref>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544&out_service=Y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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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2일 (수) 17:37 판
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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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양주 회암사지 |
---|---|
한자 | 楊州 檜巖寺址 |
주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 1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4년 6월 10일 |
건립시기 | 1328년(충숙왕 15) |
창건자 | 지공 |
경내문화재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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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에 있는 절.[1]
개요
역사
고려 시대
회암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1174년(고려 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2]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이 중건하였다 한다. [3] 이 같은 내용은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4]
조선 시대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5]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6]
동영상
- TAEMIX STUDIO, "사라진 절터의 비밀,회암사지 - 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YouTube, 게시일: 2015년 6월 3일.
- 622년산 양주, "삼화상과 거대사찰 회암사 양주의 유산", YouTube, 게시일: 2014년 4월 13일.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722년 | 삼법이 쌍계사(옥천사)를 창건하였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참고문헌
주석
- ↑ "양주 회암사지", 조유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4일 - ↑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 ↑ "회암사", 한정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 - ↑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 ↑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 ↑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