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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년부터 1961년까지 보성중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종군화가 단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1년 대한미술협회 부회장이 되었고,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으로 피임된 이래 역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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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적 자연주의에 충실한 풍경화를 즐겨 다루었는데, 화풍의 변화가 대체로 1960년을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진다. 1960년 이전의 전기에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확한 데생력과 건실한 색감을 바탕으로 하는 화풍을 구사하였다. 후기에는 페인팅 나이프의 짧은 수직선들이 화면을 점진적으로 뒤덮는 일종의 인상파적 점묘법을 통하여 화려한 색감의 화풍을 보여주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143 이마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6일 확인.</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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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7일 (월) 17:03 판
작가소개
호는 청구(靑駒). 충청남도 아산 출신.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과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에게 그림지도를 받았다. 그 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아틀리에를 설치한 이종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고려미술원과 조선미술원에서도 공부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다.
1931년 도쿄에서 구본웅(具本雄), 김응진(金應進) 등과 백만회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3년 동아일보의 미술기자가 되었다. 1934년에는 목일회 창립에 가담하였고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꽃다발 있는 정물」로 입선하였다. 1938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7회에 걸쳐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39년부터 1961년까지 보성중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종군화가 단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1년 대한미술협회 부회장이 되었고,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으로 피임된 이래 역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에는 목우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 정년퇴직 후에는 명예교수로 있었고, 같은 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사실적 자연주의에 충실한 풍경화를 즐겨 다루었는데, 화풍의 변화가 대체로 1960년을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진다. 1960년 이전의 전기에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확한 데생력과 건실한 색감을 바탕으로 하는 화풍을 구사하였다. 후기에는 페인팅 나이프의 짧은 수직선들이 화면을 점진적으로 뒤덮는 일종의 인상파적 점묘법을 통하여 화려한 색감의 화풍을 보여주었다.[1]
학력
- 1932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 학사
경력
- 1933년 동아일보 미술부 기자
- 1950년 국방부 종군화가 단장
- 1951년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회장
- 1953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 1956년 대한민국 미술협회 회장
- 1962년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 1963년 홍익대학교 교수
- 1965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
- 1968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장
- 1969년-1971년 홍익대학교 학장
- 1970년-1973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 1973년 한국미술협회 회장
전시
- 1932년, 조선 미술전람회, 경복궁 미술관
- 1938년, 개인전, 화신 화랑
- 1957년, 개인전, 중앙공보관
- 1962년, 개인전, 국립도서관 화랑
- 1966년,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 1968년, 개인전, 신세계 화랑
- 1970년, 개인전, 서울 화랑
- 1972년, 개인전, 고베
- 1973년, 한국 현역작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4년, 제10회 아시아 현대미술전, 동경 동경도 미술관
- 1974년, 개인전, 양지 화랑
- 1975년, 개인전, 양지 화랑
- 1977년, 개인전, 송원 화랑
- 1986년, 개인전, 서울 갤러리
- 1997년-1998년, 한국 근대미술: 유화- 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 1998년, 중원 미술의 향기, 대전 시립미술관
- 2003년, 한밭미술의 여정 II-이동훈과 대전화단, 대전시립미술관
수상
- 1928년-1934년, 조선 미술전람회 3회 입선
- 1932년, 조선 미술전람회 창덕궁상
- 1963년, 서울시 문화상
- 197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 1975년, 제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주요작품
- 민족기록화 작가 박석호 어부들, 1992년.jpg
어부들, 1992년[2]
- 민족기록화 작가 박석호 항구, 1986년.jpg
항구, 1986년[3]
- 민족기록화 작가 박석호 한촌, 1993년.jpg
박석호의 유작 : 한촌, 33 x 24, 캔버스에 유채, 1993년.[4]
민족기록화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
이마동 | 이마동-감귤 | A는 B를 그렸다 |
이마동 | 이마동-소득사업(새마을) | A는 B를 그렸다 |
이마동 | 백만회 | A는 B를 조직하였다 |
이마동 | 목일회 | A는 B를 창립하였다 |
이마동 | 목우회 | A는 B를 창립하였다 |
시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관계속성 |
---|---|---|---|
이마동 | 이마동-감귤 | A는 B를 그렸다 | 1973년 |
이마동 | 이마동-소득사업(새마을)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이마동 | 백만회 | A는 B를 조직하였다 | 1936년 |
이마동 | 목일회 | A는 B를 조직하였다 | 1934년 5월 |
이마동 | 목우회 | A는 B를 조직하였다 | 1958년 6월 17일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그래프
참고문헌
- "이마동", 『월간미술』, 월간미술. 2017년 03월 26일 확인.
주석
- ↑ "이마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김재관, "김재관의 현대미술 산책 - 박석호 화백(1919~1994)", 『충북일보』, 2011년 1월 23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박석호의 미술사적 의미", 『옥천신문』, 2004년 7월 16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송유재, "http://bravo.etoday.co.kr/view/atc_view.php?varAtcId=4527 머무는 배, 흐르는 물]",『브라보마이라이프』, 2015년 10월 12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