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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 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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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재집(樂齋集)』은 서문이 중간서(重刊書)라고 되어 있다는 점과 연보의 내용으로 보아 서사원이 죽고 난 후 다음해에 문인과 사우들이 서사원의 유고(遺稿)와 서찰들을 수집하여 문집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초간된 문집이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후손 [[서택렬]](徐宅烈)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서사원의 시문을 모으고, 손처눌(孫處訥)이 지은 서사원의 행록과 박종우(朴宗祐)가 지은 「이강 서원 상량문(伊江書院上樑文)」 등을 증보·재편하여 1843년(헌종 9)에 『낙재집』을 간행하였다. 박광석(朴光錫)과 서인순(徐麟淳)의 중간서가 실려 있다. 『낙재 문집(樂齋文集)』,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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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태/서지] 『낙재집』은 10권 4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상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7㎝, 가로 20.5㎝, 반곽은 20.7㎝세로, 가로 16.1㎝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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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성/내용] 권1은 시(詩), 권2는 시(詩), 장편(長篇), 만사(挽詞), 부(賦), 권3~4는 서(書), 권5는 묘갈(墓碣), 비문(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권6~7은 잡저(雜著), 권8~10은 연보(年譜)와 연보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시에는 차운시(次韻詩)와 경물을 읊은 시가 많은 편이며, 시체별로 편차되어 연대순으로 실려 있으며, 권2에는 1575년(선조 8) 향시에서 장원한 부 「유덕동천(惟德動天)」이 실려 있다. 권3~4에는 주로 문인 정구, 체찰사(體察使), 방백(方伯)[관찰사]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잡저에는 여러 책을 보면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점만을 기록한 「공부차록(工夫箚錄)」, 입지(立志)·검신(檢身)·독서(讀書) 등 16개의 강학 조건 항목을 제정해 제자들에게 실천을 권하는 「학교모범(學校模範)」, 임진왜란 때 향병을 모집하는 글인 「초집 향병문(招集鄕兵文)」, 정유재란 때 군량을 모집하는 내용이 담긴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 등이 실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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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의와 평가] 잡저에 실린 「공부차록」,「학교모범」,「초집 향병문」,「승차걸속문」 등과 같은 글들은 조선 중기 교육사를 연구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의병 활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
2022년 10월 22일 (토) 14:46 판
낙재집(樂齋集)
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낙재집(樂齋集)』은 서문이 중간서(重刊書)라고 되어 있다는 점과 연보의 내용으로 보아 서사원이 죽고 난 후 다음해에 문인과 사우들이 서사원의 유고(遺稿)와 서찰들을 수집하여 문집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초간된 문집이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후손 서택렬(徐宅烈)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서사원의 시문을 모으고, 손처눌(孫處訥)이 지은 서사원의 행록과 박종우(朴宗祐)가 지은 「이강 서원 상량문(伊江書院上樑文)」 등을 증보·재편하여 1843년(헌종 9)에 『낙재집』을 간행하였다. 박광석(朴光錫)과 서인순(徐麟淳)의 중간서가 실려 있다. 『낙재 문집(樂齋文集)』,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낙재집』은 10권 4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상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7㎝, 가로 20.5㎝, 반곽은 20.7㎝세로, 가로 16.1㎝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은 시(詩), 권2는 시(詩), 장편(長篇), 만사(挽詞), 부(賦), 권3~4는 서(書), 권5는 묘갈(墓碣), 비문(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권6~7은 잡저(雜著), 권8~10은 연보(年譜)와 연보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시에는 차운시(次韻詩)와 경물을 읊은 시가 많은 편이며, 시체별로 편차되어 연대순으로 실려 있으며, 권2에는 1575년(선조 8) 향시에서 장원한 부 「유덕동천(惟德動天)」이 실려 있다. 권3~4에는 주로 문인 정구, 체찰사(體察使), 방백(方伯)[관찰사]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잡저에는 여러 책을 보면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점만을 기록한 「공부차록(工夫箚錄)」, 입지(立志)·검신(檢身)·독서(讀書) 등 16개의 강학 조건 항목을 제정해 제자들에게 실천을 권하는 「학교모범(學校模範)」, 임진왜란 때 향병을 모집하는 글인 「초집 향병문(招集鄕兵文)」, 정유재란 때 군량을 모집하는 내용이 담긴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 등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잡저에 실린 「공부차록」,「학교모범」,「초집 향병문」,「승차걸속문」 등과 같은 글들은 조선 중기 교육사를 연구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의병 활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