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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한동안 [[조선 광해군|광해군]] 정권하 북인의 기세에 눌려 웅크려 지내던 서인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채 남인을 견제한다. 그리고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것처럼 서인 또한 오래가지 않아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등의 사건을 통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당시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송시열]], [[윤증]], [[권상하]],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김석주]] 등의 인물들이며, 그들이 곧 당시 노론과 소론의 영수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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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서인은, [[조선 숙종|숙종]] 재위 당시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등의 사건을 통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송시열]], [[윤증]], [[권상하]],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김석주]] 등은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자, 노론과 소론 분화 초기의 정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내용==
 
==내용==
  
====노론과 소론 이전 : 한당과 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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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의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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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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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ref>
  
====노론과 소론의 분화1 : 경신환국(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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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의 황극탕평론(1683), 노론과 소론 탕평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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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2쪽  .</ref>
  
====노론과 소론의 분화2 : 가례원류시말(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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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화3 : 회니시비(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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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의 신유의서(1684), 노론과 소론 갈등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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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니시비와 관련하여, 흔히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 묘갈명에 대해서 윤증이 불만을 품고 이를 고쳐달라고 청하였는데 송시열이 이를 고쳐주지 않아서 회니시비가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의 일면만을 말한 것이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요청한 것은 윤선거를 칭찬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즉 윤선거와 송시열의 40여 년에 걸친 우정에 비추어 볼 때, 윤선거에 대한 평가를 후배인 박세채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는 것은 윤선거에게 허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송시열 자신 역시 후세 사람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윤선거, 윤증 부자의 모호한 태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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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7쪽  .</ref>
  
====노론의 중심인물 : 송시열, 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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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윤선거가 이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북벌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인조대 병자호란에 이은 1637년 삼전도의 치욕 이후 호서 사림들은 '복수설치'의 방안 모색에 여념이 없었는데, 결국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양보 내지 제거해서라도 국방력을 강화시켜 오랑캐로부터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계, 윤선거 등은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제거할 수 있는 제도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고 북벌을 도덕과 의리의 측면으로 제한하려 하였다. 그리고 제도개혁 주장에 대해서는 이단 논쟁을 제기하여 정치 쟁점을 치환하는 것으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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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쪽  .</ref>
  
====소론의 중심인물 : 윤증,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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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에 대한 태도에서 이들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윤휴 역시 북벌 추진을 위해서는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지주의 기득권을 제거 내지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한 '사문난적'이고 이단이라는 측면을 정치 공세의 쟁점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체제 개혁론을 부정하려 하였다. 이것은 송시열이 주자를 내세워서 북벌을 부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거는 주자학에 대한 작은 차이를 문제 삼지 말고 그의 체제 개혁론을 수용하여 북벌에 적극 나서라고 송시열에게 요구하였다. 송시열이 북벌보다 주자학을 중시하면서 정책 논쟁을 이단 논쟁으로 치환하려 하였다면, 윤선거는 주자학보다 북벌을 중시하면서 당파를 떠나서 체제 개혁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송에서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윤선거는 이들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예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하고, 그로 인해 사림이 분열되어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가 송시열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포용하려고 한 것은 북벌에 대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윤선거는 예송보다 북벌을 중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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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249쪽  .</ref>
  
====반남 박씨와 파평 윤씨와 은진 송씨의 혼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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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맥락에서 표출된 송시열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해, 윤증은 1681년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는데,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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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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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1702), 노론과 소론 탕평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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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명을 작성한 1702년은 남구만이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를 비호한 책임을 지고 아산에 유배되었을 때였다. 여기서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이라고 찬양하고, 그를 모욕한 사람을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송시열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어서 두 사람을 각각 봉황과 올빼미에 비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을 찬양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 탕평론이 좌절된 것을 의식하고 나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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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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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이듬해인 1703년 홍계적 등 송시열 문인들이 상소하여 박세당이 자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을 모함하였으니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상소문에서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것을 들어서 "주자를 능멸하였다"는 죄목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이 사건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주자학 의리론에 입각한 것인데,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자 주석을 비판하더니, 이제는 송시열마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세당이 사문난적인 윤휴를 편드는 무리이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문의 실제 작성자는 김창협이었는데, 그와 그 아우 김창흡은 모두 박세당을 윤휴와 동일시하면서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양란기 이래 주자학 정치론이 분화되어 새롭게 형성된 정치론인 탕평론을 부정하고,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만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표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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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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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화 1 : 경신환국(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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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쪽의 정성공(鄭成功)·오삼계(吳三桂)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윤휴(尹鑴)·허적 등의 주장이 제기되어,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허적은 훈련도감·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귀일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김석주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군영들은 예외적인 존재로 그것에 통속되지 않았다. 이 때 총융사와 수어사는 중앙군영의 하나였으나, 경기도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남인측이 나머지 두 중앙군영의 군권마저 이에 귀일시키려 하자, 김석주 등의 반발을 받은 것이다. 도체찰사부는 1678년 12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나,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실상 중앙군영들은 대부분 서인측에 의하여 창설, 발전되어 온 것이어서, 이에 관한 서인의 관심이 높았다. 이 사건 벽두에 중앙군영의 군권이 서인계에 전격적으로 넘겨진 것이나, 김석주가 서인과 제휴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역 혐의의 주된 내용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이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자 모두가 연루되게 마련이어서 허견과 삼복(三福)뿐 아니라 허적·윤휴·유혁연·이원정(李元楨)·오정위(吳挺緯)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시장을 옮겼다.”거나, “각 사 공물(貢物)을 많이 시장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통용하게 하여 그 값을 나누어 먹었다.”는 등 상인 및 상업과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정파의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시의 정치가 경제의 새로운 변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 이 사건으로 도체찰사부가 혁파됨에 따라 대흥산성의 재물은 김석주가 관리청을 따로 세워 관리사로서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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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37 경신환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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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화 2 : 가례원류시말(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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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숙종 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이다.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80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상기(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고 책의 간행을 위해 관찰사에게 물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왕의 허락를 받았다. 그리하여 1715년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정계에 파문을 크게 일으켰다. 유계와 윤증의 아버지 선거(宣擧)는 송시열과 더불어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서인의 맥을 이루고 있었으며, 더욱이 윤증은 유계·송시열 양인의 문하생이었다. 그런데 1673년 윤증으로부터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받은 송시열이 일찍이 윤선거가 학문적으로 그와 대립하던 윤휴(尹鑴)와 절교하지 않았던 점에 불만, 자신의 글이 아닌 박세채(朴世采)의 행장을 그대로 인용한 뒤 야유하는 뜻의 글을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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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 윤증은 스승 송시열의 학덕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특히, 1681년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에 결함이 있다는 내용의 서신이 송시열에게 전해져 양인 사이의 감정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그리하여 실각한 남인의 처벌을 둘러싸고 윤증을 영수로 하는 온건론자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강경론자로 갈라져, 1683년 마침내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분당되었다. 그러한 배경 아래서 책이 출간되자 윤증의 아들 행교(行敎)는 유계가 책의 저자인 점에 이의를 제기, 그의 할아버지 선거와 공저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정호의 발문에 격분한 소론 측은 노론을 공박,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쟁으로 비화하였다. 소론측의 전라도 유생 유규(柳奎)는 서문과 발문의 삭제를 요구했으며, 노론측의 대사간 이관명(李觀命)과 수찬 어유구(魚有龜)는 유규를 배척하고 정호를 비호하는 소를 올렸다. 『가례원류』의 출간과 더불어 시작된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쟁은 숙종이 정호를 파직시키고 유상기를 나주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일단락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윤선거의 문집 『노서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그 내용 가운데 효종에 대한 불손한 언사가 발견됨에 따라 책은 훼판되고, 윤선거 부자의 관직을 추탈했으며, 정호는 대사헌에, 유상기는 유배에서 풀려나 감찰에 각각 복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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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유승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119 가례원류시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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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화 3 : 회니시비(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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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였다.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숙종 10)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증 자신은 춘추관에 편지를 보내어 율곡(栗谷)은 입산한 과오가 있지만, 자신의 부친은 아무 과오가 없다고 주장하였다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함께 저술한 책인데, 1711년(숙종 37)에 유계의 집안에서 단독으로 간행하였고, 또 송시열의 제자 정호(鄭澔)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한 것 때문에 큰 물의가 빚어졌다. 결국 1716년(숙종 42) 7월에 숙종이 처분을 내려 송시열은 잘못한 것이 없고 윤증은 잘못한 것으로 판정하여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접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회니시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1684년(숙종 10)부터 30여 년간 논란되었던 ‘회니시비’는 사제 간의 사사로운 분쟁이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오래 지속되었던 이 분쟁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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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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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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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증 초상(반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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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 [[은진 송씨]], [[파평 윤씨]], [[반남 박씨]], [[도체찰사부]]
*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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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남한산성 전투]]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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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신유의서]], [[황극탕평론]], [[가례원류]], [[사변록]], [[독서기]], [[이경석 신도비문]]
* 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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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 [[보사공신]], [[사문난적]]
*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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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유산: [[이경석 신도비]], [[대전 남간정사|남간정사]], [[논산 명재고택|명재고택]], [[의정부 서계종택|서계종택]],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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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 의리와 충절의 400년』 저자 이해영 인터뷰(게시일: 2015.05.28.)</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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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일 (화) 19:37 기준 최신판

개요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서인은, 숙종 재위 당시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등의 사건을 통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송시열, 윤증, 권상하,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김석주 등은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자, 노론과 소론 분화 초기의 정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내용

김석주의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초

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1]

박세채의 황극탕평론(1683), 노론과 소론 탕평의 시도

[2]


윤증의 신유의서(1684), 노론과 소론 갈등의 심화

회니시비와 관련하여, 흔히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 묘갈명에 대해서 윤증이 불만을 품고 이를 고쳐달라고 청하였는데 송시열이 이를 고쳐주지 않아서 회니시비가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의 일면만을 말한 것이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요청한 것은 윤선거를 칭찬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즉 윤선거와 송시열의 40여 년에 걸친 우정에 비추어 볼 때, 윤선거에 대한 평가를 후배인 박세채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는 것은 윤선거에게 허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송시열 자신 역시 후세 사람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윤선거, 윤증 부자의 모호한 태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3]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윤선거가 이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북벌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인조대 병자호란에 이은 1637년 삼전도의 치욕 이후 호서 사림들은 '복수설치'의 방안 모색에 여념이 없었는데, 결국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양보 내지 제거해서라도 국방력을 강화시켜 오랑캐로부터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계, 윤선거 등은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제거할 수 있는 제도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고 북벌을 도덕과 의리의 측면으로 제한하려 하였다. 그리고 제도개혁 주장에 대해서는 이단 논쟁을 제기하여 정치 쟁점을 치환하는 것으로 맞섰다. [4]

윤휴에 대한 태도에서 이들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윤휴 역시 북벌 추진을 위해서는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지주의 기득권을 제거 내지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한 '사문난적'이고 이단이라는 측면을 정치 공세의 쟁점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체제 개혁론을 부정하려 하였다. 이것은 송시열이 주자를 내세워서 북벌을 부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거는 주자학에 대한 작은 차이를 문제 삼지 말고 그의 체제 개혁론을 수용하여 북벌에 적극 나서라고 송시열에게 요구하였다. 송시열이 북벌보다 주자학을 중시하면서 정책 논쟁을 이단 논쟁으로 치환하려 하였다면, 윤선거는 주자학보다 북벌을 중시하면서 당파를 떠나서 체제 개혁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송에서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윤선거는 이들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예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하고, 그로 인해 사림이 분열되어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가 송시열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포용하려고 한 것은 북벌에 대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윤선거는 예송보다 북벌을 중시한 것이었다. [5]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표출된 송시열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해, 윤증은 1681년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는데,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하였다. [6]

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1702), 노론과 소론 탕평의 좌절

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명을 작성한 1702년은 남구만이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를 비호한 책임을 지고 아산에 유배되었을 때였다. 여기서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이라고 찬양하고, 그를 모욕한 사람을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송시열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어서 두 사람을 각각 봉황과 올빼미에 비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을 찬양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 탕평론이 좌절된 것을 의식하고 나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7]

이에 대해 이듬해인 1703년 홍계적 등 송시열 문인들이 상소하여 박세당이 자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을 모함하였으니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상소문에서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것을 들어서 "주자를 능멸하였다"는 죄목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이 사건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주자학 의리론에 입각한 것인데,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자 주석을 비판하더니, 이제는 송시열마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세당이 사문난적인 윤휴를 편드는 무리이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문의 실제 작성자는 김창협이었는데, 그와 그 아우 김창흡은 모두 박세당을 윤휴와 동일시하면서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양란기 이래 주자학 정치론이 분화되어 새롭게 형성된 정치론인 탕평론을 부정하고,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만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표출한 것이었다. [8]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문맥요소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송시열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권상하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윤증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당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채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남구만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김석주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80년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시말이 발생하였다.
1716년 병신처분이 발생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700350 127.057418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의정부 서계종택과 관련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영상

예송2차와 환국(게시일: 2014.09.15.)

주석

  1.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
  2.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2쪽 .
  3.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7쪽 .
  4.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쪽 .
  5.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249쪽 .
  6. 이영춘, 회니시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
  8.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

참고 자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