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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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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6대 왕 인조의 적장자(嫡長子)이다.
  
 
=='''정의'''==
 
이름은 왕(炡).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내용'''==
 
=='''내용'''==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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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왕(炡). [[조선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세자의 덕을 닦았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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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그 이후===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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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심양(瀋陽)]]에 갔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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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서의 생활===
1644년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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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인조 20)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임금이 둘인 형국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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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의 생활===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다.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로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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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인조 22)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듯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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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인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네이버 지식백과] 소현세자 [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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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중국 생활에 대한 평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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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다.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로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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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경과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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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그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인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7920&cid=46622&categoryId=4662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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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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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 신병주, 『조선후기를 움직인 사건들 : 1645년 소현세자의 죽음부터 1872년 지방지도 제작까지』, 새문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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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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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병주, 『조선후기를 움직인 사건들 : 1645년 소현세자의 죽음부터 1872년 지방지도 제작까지』, 새문사, 2013.
 +
** 류홍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성요셉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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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 박나현, 「소현세자의 심양 경험 고찰」,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 박나현, 「소현세자의 심양 경험 고찰」,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윤석희, 「학질의 개념과 말라리아의 관계 연구 : 소현세자의 질병기록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대학원 기초한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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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원, 「아담 샬, 순치제, 소현 세자 :  아담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 『 인간 · 환경 · 미래』8,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2012, 147-182쪽.
** 김경미, 「소현세자의 ‘청’ 체험과 문화 수용」, 『한국문화연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Vol.10 No.- , 2006,133-167쪽.
+
** 윤석희, 「학질의 개념과 말라리아의 관계 연구 : 소현세자의 질병기록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대학원 기초한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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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심양(瀋陽) 억류와 인질(人質) 체험」, 『韓國思想史學』40, 한국사상사학회, 2012, 143-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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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미, 「소현세자의 ‘청’ 체험과 문화 수용」, 『한국문화연구』10,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6,133-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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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인물]]

2018년 1월 2일 (화) 10:47 기준 최신판

소현세자(昭顯世子)
Joseon prince young.png
대표명칭 소현세자
한자표기 昭顯世子
생몰년 1612년-1645년
본관 전주
시대 조선
유형 인물, 왕자


정의

조선 16대 왕 인조의 적장자(嫡長子)이다.

내용

이름은 왕(炡). 조선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세자의 덕을 닦았다. [1]

병자호란과 그 이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2]

심양에서의 생활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인조 20)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임금이 둘인 형국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3]

북경에서의 생활

1644년(인조 22)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듯하다.[4]

지식 관계망

  • 산성일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선 인조 소현세자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한준겸 인열왕후 A는 딸 B를 두었다 A ekc:hasDaughter B
인열왕후 소현세자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강석기 민회빈 강씨 A는 딸 B를 두었다 A ekc:hasDaughter B
소현세자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소현세자 남한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소현세자 산성일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소현세자 아담 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아담 샬 천주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소현세자(昭顯世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신병주, 『조선후기를 움직인 사건들 : 1645년 소현세자의 죽음부터 1872년 지방지도 제작까지』, 새문사, 2013.
    • 류홍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성요셉출판사, 2010.
  • 논문
    • 박나현, 「소현세자의 심양 경험 고찰」,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안재원, 「아담 샬, 순치제, 소현 세자 : 아담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 『 인간 · 환경 · 미래』8,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2012, 147-182쪽.
    • 윤석희, 「학질의 개념과 말라리아의 관계 연구 : 소현세자의 질병기록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대학원 기초한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허태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심양(瀋陽) 억류와 인질(人質) 체험」, 『韓國思想史學』40, 한국사상사학회, 2012, 143-176쪽.
    • 김경미, 「소현세자의 ‘청’ 체험과 문화 수용」, 『한국문화연구』10,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6,133-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