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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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 + | 어머니 [[김훈 처 신천강씨 |신천강씨]]가 딸 [[채무이 처 순천김씨 |순천김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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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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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발굴의 의의=== | ===편지 발굴의 의의=== | ||
− |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이 한글을 사용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궁중과 관련된 언문편지가 | + |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이 한글을 사용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궁중과 관련된 언문편지가 대부분이다. 계층상으로 보면 최상층인 비빈뿐 아니라 궁녀까지 국문을 사용하여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모든 궁녀들이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훈민정음이 보급된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실록에서는 적지 않은 국문사용 기록이 발견되는데, 한글이 남녀 또는 궁궐 바깥의 일상생활 속으로 서서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571년 정철의 어머니 '죽산안씨가 쓴 편지글'이 발견된 데 이어 충북지역에서 이보다 2년 이른 시기인 1569년(선조2) 에 작성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543 순천김씨 묘 출토언간]'이 발견되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543 순천김씨 묘 출토언간]'에서 발굴한 편지는 [[김훈 처 신천강씨 |신천강씨]]가 발신자인 한글 편지가 120여 통에 이른다. 이는 현재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사대부가 여성의 한글편지로서 당시 일반 여성의 한글 사용이 빈번하였음을 알수 있다.<ref>정복동, 「'이응태묘 출토'한글 편지의 서체미 탐구」, 『서예학연구』 vol. 13, 한국서예학회, 2008</ref> |
− | === | + | ===[[채무이 처 순천김씨]]의 가족들의 생애=== |
− | + | 김훈(金壎)· 신천강씨 부부와 그 후손은 모든 사람이 알만한 대단한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있었던 임진왜란, 인조반정, 병자호란에 이들 가족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이 인물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 증조할머니가 바로 신천강씨이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ref> | |
− | * | + | *임진왜란의 순절자 김여물 |
− | 김훈과 강씨의 차남 [[김여물 | 김여물(金汝岉, 1548~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신립 | 신립(申砬, 1546~1592)]]의 부장이 되어 [[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다가 | + | 김훈과 강씨의 차남 [[김여물 | 김여물(金汝岉, 1548~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신립 | 신립(申砬, 1546~1592)]]의 부장이 되어 [[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다가 조선군이 패하자 신립과 함께 자결한 인물이다. 탄금대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준비하여 치른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다. 조선 중기의 정치가들은 임진왜란을 정리할 때 김여물을 순절자로 분류하여 기리곤 하였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ref> |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 |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 | ||
− | 김여물의 아들 [[김류 | 김류(1571~1648)]]는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중 한 명이다. | + | 김여물의 아들 [[김류 | 김류(金瑬, 1571~1648)]]는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중 한 명이다. 특히 김류는 인조반정 당시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 | 신경진(申景禛, 1575~1643)]]과도 손을 잡았다. 이후 김류는 [[정묘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扈從)하기도 하고, 청나라와 화약(和約)을 맺는 일에 힘쓰기도 하였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ref> |
*병자호란에 참여한 김경징 | *병자호란에 참여한 김경징 | ||
− | 김류의 아들 [[김경징 |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은 인조 대 [[병자호란]] 당시 왕자와 여러 비빈 등이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때 강화도의 수비책임을 맡은 검찰사였다. 아버지 김류가 아들을 추천하여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한 것인데, 김경징은 청나라 세력이 수전(水戰)에는 약하니 강화도로 들어올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수비를 게을리 하였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탈출하여 김경징은 나중에 처형이 되고 김류는 탄핵을 | + | 김류의 아들 [[김경징 |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은 인조 대 [[병자호란]] 당시 왕자와 여러 비빈 등이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때 강화도의 수비책임을 맡은 검찰사였다. 아버지 김류가 아들을 추천하여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한 것인데, 김경징은 청나라 세력이 수전(水戰)에는 약하니 강화도로 들어올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수비를 게을리 하였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탈출하여 김경징은 나중에 처형이 되고 김류는 탄핵을 받았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ref> |
*정절 논란 | *정절 논란 | ||
− | 이들 가문은 또한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여인들의 행적 문제로 | + | 이들 가문은 또한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여인들의 행적 문제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 신씨, 김여물의 아들 김류의 처 진주 류씨, 김여물의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김여물의 증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가 모두 정절을 지킨다며 자결을 하였다. 이에 대해 국가는 [[사세충렬문 |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을 내렸다. 이 충렬문이 현재 경기도 안산에 있다. 특히 김여물의 후실은 김여울과 함께 죽은 신립의 딸이기도 하다.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이면서 스스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달아나면서 자기 부인을 비롯한 집안 여인들에게는 자결을 강요했다면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국가를 경영한 남성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따져야 할 전후(戰後)에 오히려 여성의 정절논란이 일었는데, 이들 집안 여인들의 죽음은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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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543 순천김씨 묘에서 출토된 간찰]로 보는 [[김훈 처 신천강씨 |신천강씨]]의 성격=== | ||
+ | 김여물은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 [[김훈 처 신천강씨 |신천강씨]]를 강조하고 있다. 강씨의 그 같은 영향력은 유교적인 교화에 집중되어 있다. 강씨는 유학의 가문에서 자라며 배운 대로 유교적 덕의에 맞는 교훈으로 아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여물의 글에 드러난 신천 강씨는 스스로 유교의 가르침을 몸에 체득하여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엄한 스승처럼 자신의 삶을 단속하고 자식도 그렇게 가르친 사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한 여인이자, 충성스러운 무신을 길러낸 훌륭하고 이상적인 어머니로서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간찰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글로 신천강씨의 삶과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 간찰에서 강씨는 재상된 이도 첩 없는 사람이 많은데 60대 말직인 찰방이라는 사람이 첩을 둔다면서 남편을 비난하기도 하였고, 하필 자신이 늙어 죽을 때에 중병이 들어 더욱 서럽다고 하는 등 일상적이고 감정적인 서사가 적혀 있다.<ref>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28-9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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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5일 (금) 00:25 기준 최신판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
영문명칭 | A Korean letter from Gang of Shincheon to her married daughter Kim of Suncheon |
---|---|
작자 | 신천강씨 |
작성시기 | 16세기 |
소장처 | 충북대학교 박물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0.0×42.0㎝ |
판본 | 필사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채무이(蔡無易)의 계배(繼配) 순천김씨(順天金氏)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1977년 충청북도 청주시 내수읍[1]에 있던 순천김씨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한글편지 188건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편지가 120여 건으로 가장 많다. 이 한글편지들은 1550년대에서 1592년 사이에 쓴 것으로 현전하는 한글편지 중 매우 이른 시기의 것으로 그간 생활사, 여성사, 국어사, 서예사 등에서 주목받아온 자료이다. 편지에는 시집간 딸을 그리워하는 모정과 함께 남편의 첩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2]
편지 발굴의 의의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이 한글을 사용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궁중과 관련된 언문편지가 대부분이다. 계층상으로 보면 최상층인 비빈뿐 아니라 궁녀까지 국문을 사용하여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모든 궁녀들이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훈민정음이 보급된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실록에서는 적지 않은 국문사용 기록이 발견되는데, 한글이 남녀 또는 궁궐 바깥의 일상생활 속으로 서서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571년 정철의 어머니 '죽산안씨가 쓴 편지글'이 발견된 데 이어 충북지역에서 이보다 2년 이른 시기인 1569년(선조2) 에 작성된 '순천김씨 묘 출토언간'이 발견되었다. '순천김씨 묘 출토언간'에서 발굴한 편지는 신천강씨가 발신자인 한글 편지가 120여 통에 이른다. 이는 현재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사대부가 여성의 한글편지로서 당시 일반 여성의 한글 사용이 빈번하였음을 알수 있다.[3]
채무이 처 순천김씨의 가족들의 생애
김훈(金壎)· 신천강씨 부부와 그 후손은 모든 사람이 알만한 대단한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있었던 임진왜란, 인조반정, 병자호란에 이들 가족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이 인물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 증조할머니가 바로 신천강씨이다..[4]
- 임진왜란의 순절자 김여물
김훈과 강씨의 차남 김여물(金汝岉, 1548~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1546~1592)의 부장이 되어 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다가 조선군이 패하자 신립과 함께 자결한 인물이다. 탄금대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준비하여 치른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다. 조선 중기의 정치가들은 임진왜란을 정리할 때 김여물을 순절자로 분류하여 기리곤 하였다.[5]
-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
김여물의 아들 김류(金瑬, 1571~1648)는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중 한 명이다. 특히 김류는 인조반정 당시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申景禛, 1575~1643)과도 손을 잡았다. 이후 김류는 정묘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扈從)하기도 하고, 청나라와 화약(和約)을 맺는 일에 힘쓰기도 하였다.[6]
- 병자호란에 참여한 김경징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은 인조 대 병자호란 당시 왕자와 여러 비빈 등이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때 강화도의 수비책임을 맡은 검찰사였다. 아버지 김류가 아들을 추천하여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한 것인데, 김경징은 청나라 세력이 수전(水戰)에는 약하니 강화도로 들어올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수비를 게을리 하였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탈출하여 김경징은 나중에 처형이 되고 김류는 탄핵을 받았다.[7]
- 정절 논란
이들 가문은 또한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여인들의 행적 문제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 신씨, 김여물의 아들 김류의 처 진주 류씨, 김여물의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김여물의 증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가 모두 정절을 지킨다며 자결을 하였다. 이에 대해 국가는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을 내렸다. 이 충렬문이 현재 경기도 안산에 있다. 특히 김여물의 후실은 김여울과 함께 죽은 신립의 딸이기도 하다.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이면서 스스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달아나면서 자기 부인을 비롯한 집안 여인들에게는 자결을 강요했다면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국가를 경영한 남성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따져야 할 전후(戰後)에 오히려 여성의 정절논란이 일었는데, 이들 집안 여인들의 죽음은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8]
순천김씨 묘에서 출토된 간찰로 보는 신천강씨의 성격
김여물은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 신천강씨를 강조하고 있다. 강씨의 그 같은 영향력은 유교적인 교화에 집중되어 있다. 강씨는 유학의 가문에서 자라며 배운 대로 유교적 덕의에 맞는 교훈으로 아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여물의 글에 드러난 신천 강씨는 스스로 유교의 가르침을 몸에 체득하여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엄한 스승처럼 자신의 삶을 단속하고 자식도 그렇게 가르친 사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한 여인이자, 충성스러운 무신을 길러낸 훌륭하고 이상적인 어머니로서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간찰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글로 신천강씨의 삶과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 간찰에서 강씨는 재상된 이도 첩 없는 사람이 많은데 60대 말직인 찰방이라는 사람이 첩을 둔다면서 남편을 비난하기도 하였고, 하필 자신이 늙어 죽을 때에 중병이 들어 더욱 서럽다고 하는 등 일상적이고 감정적인 서사가 적혀 있다.[9]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해독) |
지식 관계망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편집하기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김훈의 처 신천 강씨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김훈의 처 신천 강씨 | 채무이의 처 순천 김씨 | A는 딸 B를 두었다 | A ekc:hasDaughter B |
채무이 | 채무이의 처 순천 김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충북대학교 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김훈 | 김훈의 처 신천 강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김훈 | 김여울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훈의 처 신천 강씨 | 김여울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여울 | 탄금대 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 탄금대 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김여울 | 신립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신립 | 탄금대 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여울 | 김여울의 처 평산 신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신립 | 김여울의 처 평산 신씨 | A는 딸 B를 두었다 | A ekc:hasDaughter B |
김여울 | 김류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류 | 김류의 처 진주 류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김류 | 인조반정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신립 | 신경진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신경진 | 인조반정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류 | 정묘호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류 | 김경징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경징 |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김경징 | 김진표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진표 |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김경징 | 병자호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사세충렬문 | 김여울의 처 평산 신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사세충렬문 | 김류의 처 진주 류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사세충렬문 |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사세충렬문 |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사세충렬문 |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사세충렬문 |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채무이의 처 순천 김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김훈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김여울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세기 | 신천강씨가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를 딸 순천김씨에게 보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28303 | 127.458326 |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
36.723892 | 127.535441 |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서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발굴되었다. |
주석
- ↑ 행정구역상 1977년 당시에는 충청북도 청원군이었으나 현재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 해당한다.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74쪽.
- ↑ 정복동, 「'이응태묘 출토'한글 편지의 서체미 탐구」, 『서예학연구』 vol. 13, 한국서예학회, 2008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13-4쪽.
- ↑ 서신혜, 「김훈의 아내 '신천강씨'라는 한 여성의 삶 재구」, 『동양고전연구』vol.60, 동양고전학회, 2015, 28-9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신성철, "순천김씨묘출토간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