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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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 | {{사건정보 |
+ | |사진=한글팀_병자호란_01_병자호란_침입_경로도.jpg | ||
+ | |사진출처=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27일. | ||
+ | |대표명칭=[[병자호란]] | ||
+ | |한자표기=丙子胡亂 | ||
+ | |영문명칭= | ||
+ | |이칭=병정노란(丙丁虜亂) | ||
+ | |유형=사건 | ||
+ | |시대=조선시대 | ||
+ | |날짜=1636년 12월-1637년 1월 | ||
+ | |관련인물=[[조선 인조]] | ||
+ | |관련단체= | ||
+ | |관련장소=[[남한산성]], [[강화도]] | ||
+ | |관련물품= | ||
+ | |관련유물유적= | ||
+ | }} | ||
+ | =='''정의'''== | ||
+ |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두 번째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 ||
+ | =='''내용'''== | ||
+ | ===[[병자호란]]의 배경=== | ||
+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하였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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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36년 [[용골대|용골대(龍骨大)]]·[[마부태|마부태(馬夫太)]] 등이 [[청 태종|후금 태종]]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리고, [[인렬왕후]]의 문상(問喪)을 위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이들은 조선에 군신의 의를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써 후금은 조선의 후금에 대한 반감을 알게 되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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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발발=== | ||
+ | *[[청 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청군이 평양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는 사이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은 판윤 [[김경징|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도를 수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민회빈 강씨|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조선 인조|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길을 막아 결국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굴욕적인 전쟁의 결과=== | ||
+ |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결국 [[강화도]]마저 점령 당하여 [[조선 인조|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인조|인조]]는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으로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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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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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의 역사적 배경=== | ||
+ |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조선 조정의 반 후금 정서 형성==== | ||
+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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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조정의 반 후금 정서에 [[청 태종|태종]] 전쟁을 결심하다 ==== | ||
+ |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용골대(龍骨大)]]·[[마부태|마부태(馬夫太)]] 등이 [[청 숭덕제 태종|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조선 인조|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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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이 시작되다.=== | ||
+ | ==== 청군의 편성과 매우 빠른 이동==== | ||
+ | [[청 숭덕제|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악탁(岳託)]]·[[호격|호격(豪格)]]·[[두도|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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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인지경으로 진격하는 청군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다==== | ||
+ |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윤방(尹昉)]]과 [[김상용|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세자빈 강씨(姜氏)]], [[원손|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조선 인조|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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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조선 인조|인조]] 거듭 [[강화도]]로 가려는 시도와 좌절==== | ||
+ | [[조선 인조|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조선 인조|인조]]는 [[소헌세자|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조선 인조|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조선 인조|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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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인조|인조]] [[남한산성]]에서 결전을 준비하다.==== | ||
+ | 훈련대장 [[신경진|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조명욱(曺明勗)]], 양근군수 [[한회일|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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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군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원군도 모두 무너지다.==== | ||
+ | [[청 숭덕제|[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정세규(鄭世䂓)]]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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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도]] 함락=== | ||
+ | ====[[강화도]] 수비 책임자의 독단과 불안한 전투준비==== | ||
+ |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김경징(金慶徵)]]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김경징(金慶徵)]]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김경징(金慶徵)]]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 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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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도]] 함락 당하다==== | ||
+ |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인조|인조]] 항복을 선택하다.=== | ||
+ | ====[[조선 인조|인조]] [[남한산성]]에서 나와 굴욕적인 11개 조문에 합의하다==== | ||
+ |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조선 인조|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椵島, 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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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으로 왕족들이 끌려가고, 청에 조선은 완전히 복속되다.==== | ||
+ | 1월 30일 [[조선 인조|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소현세자|세자]]·[[세자빈 강씨|빈궁]]·[[봉림대군|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오달제(吳達濟)]]·[[윤집|윤집(尹集)]]·[[홍익한|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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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더 읽을 거리=== | ||
+ | *논문 | ||
+ | **지두환, 「조선 병자호란 충신 열사에 대한 현창정책」, 『한국학논총』, Vol.34, No.-,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795-815쪽. | ||
+ | **남은경, 「병자호란과 그 후의 기록 『심양장계(瀋陽狀啓)』」, 『한국문화연구』, Vol.14, No.-,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8, 35-62쪽. | ||
+ | |||
+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
+ | **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151 병자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사건]] |
2017년 11월 27일 (월) 09:20 기준 최신판
병자호란(丙子胡亂) | |
대표명칭 | 병자호란 |
---|---|
한자표기 | 丙子胡亂 |
이칭 | 병정노란(丙丁虜亂)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636년 12월-1637년 1월 |
관련인물 | 조선 인조 |
관련장소 | 남한산성, 강화도 |
목차
정의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두 번째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내용
병자호란의 배경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하였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1]
-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리고, 인렬왕후의 문상(問喪)을 위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이들은 조선에 군신의 의를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써 후금은 조선의 후금에 대한 반감을 알게 되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2]
병자호란 발발
- 청 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청군이 평양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는 사이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은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도를 수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길을 막아 결국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3]
굴욕적인 전쟁의 결과
-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결국 강화도마저 점령 당하여 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으로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4]
지식 관계망
- 산성일기 지식관계망
-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지식관계망
- 을병연행록 지식관계망
- 의복목록 지식관계망
- 상례초언해 지식관계망
- 이륜행실도 지식관계망
- 무목왕정충록 지식관계망
-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장군"(신영상)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병자호란 | 조선 인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청 숭덕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묘호란 | 조선 인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묘호란 | 청 태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소헌세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마부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임경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김자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최명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김경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남한산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강화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인조 | 소헌세자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소헌세자 | 민회빈 강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병자호란 | 을병연행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고산유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의복 목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상례초언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이륜행실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산성일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병자호란 | 무목왕정충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27년 1월-3월 |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
1636년 12월-1637년 1월 |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78554 | 127.180369 | 병자호란 시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
37.752417 | 126.485976 | 병자호란시기 조선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지두환, 「조선 병자호란 충신 열사에 대한 현창정책」, 『한국학논총』, Vol.34, No.-,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795-815쪽.
- 남은경, 「병자호란과 그 후의 기록 『심양장계(瀋陽狀啓)』」, 『한국문화연구』, Vol.14, No.-,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8, 35-62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장희, "병자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