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흥덕왕
신라 흥덕왕(新羅 興德王) | |
대표명칭 | 신라 흥덕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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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新羅 興德王 |
생몰년 | -836년 |
이칭 | 경휘(景徽), 수종(秀宗), 수승(秀升)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배우자 | 정목왕후 |
부 | 혜충태자(惠忠太子) |
모 | 성목태후 김씨 |
자녀 | 김능유(金能儒) |
전임자 | 신라 헌덕왕 |
후임자 | 신라 희강왕 |
정의
신라 제42대왕.
내용
흥덕왕은 헌덕왕 때인 819년(헌덕왕 11) 김숭빈(金崇斌)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 822년(헌덕왕 14)에는 부군(副君)으로 봉해져 월지궁(月池宮)으로 들어갔으며, 826년(헌덕왕 18) 음력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
왕위에 오른 흥덕왕은 828년(흥덕왕 3) 자리에서 물러난 영공(永恭)을 대신해 대아찬(大阿湌)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내고 돌아온 장보고(張保皐)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했다.[2]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흥덕왕 2)에 왕권강화를 위해 명활전(明活典)을 설치하였다. 834년에 모든 관등(官等)에 따른 복색·거기·기용·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여 골품(骨品) 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기도 했다.[3]
흥덕왕의 재위기간에 신라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다. 827년(흥덕왕 2)에는 여름인 음력 5월에 서리가 내렸고, 금성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828년(흥덕왕 3)에는 음력 3월에 눈이 석 자나 내렸고, 832년(흥덕왕 7)에는 봄과 여름 내내 땅이 검붉게 될 정도로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흥덕왕은 정전(正殿)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죄수들을 사면했다. 하지만 지독한 흉년이 닥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왕은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위무했다.[4]
한편,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했으며, 불교를 신봉해 이를 진흥했다. 827년(흥덕왕 2) 고구려의 승려인 구덕(丘德)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지고 오자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830년(흥덕왕 5)에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기도를 하고 150명에게 승려의 도첩을 주었다.[5]
흥덕왕은 836년(흥덕왕 11) 음력 12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왕비인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되었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경주 흥덕왕릉은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6]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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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 | 신라 경문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흥덕왕 | 김유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혜소 | 신라 흥덕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홍척 | 신라 흥덕왕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경주 흥덕왕릉 | 신라 흥덕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주석
- ↑ "흥덕왕",
『두산백과』online . - ↑ "흥덕왕",
『두산백과』online . - ↑ "흥덕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흥덕왕",
『두산백과』online . - ↑ "흥덕왕",
『두산백과』online . - ↑ "흥덕왕",
『두산백과』online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