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대
육화대 (六花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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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육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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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六花隊 |
관련개념 | 당악정재(唐樂呈才) |
정의
조선 초기 당악정재(唐樂呈才) 중 하나이다. [1]
내용
『고려사』 악지에는 보이지 않고,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에 그 춤의 절차가 전한다. 따라서 성종조 이전에 창제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400여 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1901년 7월의 진연(進宴)에서 재연되었다. 당악정재이므로 의장대와 죽간자(竹竿子)를 갖추고 있다. 춤은 치어인(致語人), 즉 화심(花心)인 중심무 1명과 죽간자 2명, 육화(六花)를 상징하는 무원 6명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다.[2]
악학궤범과의 차이
『악학궤범』에 따르면 동쪽에는 홍의(紅衣) 3명, 서쪽에는 남의(藍衣) 3명으로 갈라서 각각 「일념시(一念詩)」·「이념시(二念詩)」·「삼념시(三念詩)」를 번갈아가며 차례로 부른다. 그런데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동서 6명의 옷 빛깔이 각각 다르다. 즉, 동쪽 3명은 옥색의·자적의(紫赤衣)·양람의(洋藍衣)이고, 서쪽 3명은 초록의·진홍의·분홍의의 순으로 여섯 가지 꽃의 빛깔을 상징한다. 또, 「일념시」에서 「삼념시」까지의 노래는 『악학궤범』에서는 칠언율시만을 부른다고 되어 있는데, 『정재무도홀기』에서는 원래대로 칠언율시를 부른 다음 번역시를 또 한번 부른다. 『정재무도홀기』에는 「보허자령(步虛子令)」(향악화된 곡)·「향당교주(鄕唐交奏)」 및 가곡 중의 「농락」·「계락」·「편」 등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이후부터 화무라는 것이 있었는데, 「육화대」는 「곡파(曲破)」와 함께 일시 단절되었다가 세종 이후부터 재편성되어 『악학궤범』에 그 무보(舞譜)가 실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81년 국립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로 재연된 바 있다.[3]
지식 관계망
- 홀기류 한글고문서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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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악정재 | 육화대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악학궤범 | 육화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정재무도홀기 | 육화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육화대 | 외진연시 무동 각 정재 무도 홀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장사훈, "육화대(六花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장사훈, "육화대(六花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장사훈, "육화대(六花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장사훈, 『한국무용개론』, 대광문화사, 1984.
-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9.
- 차주환, 『당악(唐樂)연구』, 범학도서, 1976.
- 논문
- 김미영,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사상적 체계를 통한 〈육화대(六花隊)〉 춤절차의 의미」, 『대한무용학회논문집』59, 대한무용학회, 2009, 1-19쪽.
- 이희병, 「《국역 조선왕조실록』》 나타난 전기 궁중 무용사 연구」, 용인대학교 대학원 무용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