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설화
개요
언양읍 대곡리(大谷里)에는 경승지인 반구대가 있는데 연고산(蓮皐山 : 연화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와 이곳에 와서 우뚝 멎으면서 기암 괴석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므로 반구대(盤龜臺)라 한다. 반구대에 대하여 특기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유목민의 생활 풍속도인 암면각화(巖面刻畵)가 1970년대 초에 발견되어 전 세계 인류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래 및 현황
언양읍 대곡리(大谷里)에는 경승지인 반구대가 있는데 연고산(蓮皐山 : 연화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와 이곳에 와서 우뚝 멎으면서 기암 괴석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므로 반구대(盤龜臺)라 한다. 두동면 천전계곡(川前溪谷)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옥류가 이 곳에 모여 호반을 형성하니 절승가경(絶勝佳景)으로 이름이 높다.그래서 옛날부터 경향 각처의 시인묵객들은 이 곳을 찾아 시영(詩詠)으로써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반구대에 대하여 특기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유목민의 생활 풍속도인 암면각화(巖面刻畵)가 1970년대 초에 발견되어 전 세계 인류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이 암면각화는 같은 수법으로 된 것이 소련 바이칼호에서 첫 번째로 발견된 후 이것이 두 번째로 발견된 희귀하고도 소중한 고대각화(古代刻畵)라고 한다. 이 각화는 고대의 북방유목민들이 지금부터 3천여 년 이전에 이미 이곳으로 남하하여 생활했으며, 또 그와 같은 훌륭한 각화를 조각할 수 있으리 만큼 훌륭한 예술과 문화를 가진 유목민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신라 때는 화랑들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면서 고귀한 기상을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던 때에, 이 곳에 와서 훈련하고 야영생활을 했으며, 또 고려 말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 초기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하였다. 그래서 반구(盤龜)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맞은편(시내 건너편)에는 중창한 반구서원이 있다.그런데 울산공업단지가 설정된 후인 1960년대 중반 공업용수를 위하여 범서읍(凡西邑) 사연(泗淵)에다 반구천(盤龜川)의 하류를 막아 댐(사연댐)을 축조하자 집수(集水)로 수위가 높아져서 귀중한 암면각화가 수중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 중 하나는 현재 대곡리 山234-1번지 수중(水中)에 있으며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류의 천변(두동면 천전리)에 있는데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처 : 반구서원 안내판)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반구대는 1978년에 화가 김창락이 그린 민족기록화 김창락의 반구대 풍요제의 소재이다. 민족기록화는 김종필의 주도 하에 시작되고 진행된 사업인데, 민족기록화의 상당수가 새마을운동 관련 작품인데 반해, 반구대 풍요제는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상현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 관계 | 노드 |
---|---|---|
반구대 설화 | ~에 있다 |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
반구대 설화 | ~이 주변에 있다 | 반구대 암각화 |
반구대 설화 | ~이 주변에 있다 |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 |
반구대 설화 | ~이 주변에 있다 | 울주 천전리 각석 |
참고
- 반구서원의 반구대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