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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석각(石刻)은 장안성(長安城. 현재의 평양성)을 축성할 때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는 6세기 후반 평원왕대에 평양 안학궁와 대성산성에서 장안성(長安城. 현재의 평양성)으로 궁성을 옮겼다. 현재 5점이 알려져 있는데, 작업을 시작한 연대, 책임자, 담당 구간을 적었다. 이를 통해서 장안성(長安城)의 축조 과정과 공사 책임자의 관등(官等), 공사 구간의 규모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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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일) 12:57 판

개관

평양성 석각(石刻)장안성을 축성할 때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는 6세기 후반 평원왕대에 평양 안학궁와 대성산성에서 장안성으로 궁성을 옮겼다. 현재 5점이 알려져 있는데, 작업을 시작한 연대, 책임자, 담당 구간을 적었다. 이를 통해서 장안성의 축조 과정과 공사 책임자의 관등, 공사 구간의 규모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평양성석각

아차산 4보루 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병술년(566)의 평양성석각에서 이와 같은 용례가 보인다.

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步之
병술년 12월에 한성 하후부의 소형 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두 유물의 시차가 크지 않은 점과 한강유역의 한성이 551년 이후 황해도 신원지방으로 옮겨진 것을 고려한다면 아차산 4보루의 '후부'도 한성의 '후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한강유역이 도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小兄'은 고구려 관직명으로, 일명 ‘실지(失支)’라고도 한다. 고구려 후기의 14관등 가운데 제 11위의 관등이며, 중국의 정7품직에 비정된다.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 고구려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A는 B와 관련된다 평양성석각

갤러리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
  2. 사진출처: 앞의 기사

참고

  • 최종택, <아차산 보루와 고구려 남진경영>, 서경문화사, 2013년.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