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한강(漢江)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국 중부를 동에서 서로 관통해 경기도 김포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개풍군의 경계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한국의 주요 하천이다. 태백산맥의 금대봉 정상부 북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강화해협 부근의 어귀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류로 한다. 대한민국의 관찬 자료집인 《한국하천일람》 2013년 판에 따르면 본류 총연장은 494km 남짓이다.

한강 본류는 경기·관동·해서·호서, 네 지방에 걸쳐 북한강·임진강을 위시한 수백 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 지류들을 기반으로 한 수계망인 한강 수계는 한국을 지나는 모든 하천 수계망 중 두 번째로 넓은 빗물받이(35,770km², 한반도 전체 넓이의 약 1/6)를 가졌다. 길이(494km)로는 압록강·두만강·낙동강에 이어 한반도에서 네 번째,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길다.


한강의 역사[1]

선사시대의 한강

한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유물이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토기, 석기 또는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구릉이나 야산에서 집중적인 채집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원초적인 어로기법인 낚시어법이나 자돌어법이 일찍부터 성행하여 창 또는 작살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찔려 잡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시대의 한강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는 한반도 동북지방(함경 남북도)의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문화, 서북지방(평안남도, 황해도)의 팽이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무늬토기문화청동기문화가 성립되었다. 이들 양 지역의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해 한강유역의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고 한편으로는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문화를 전파시켜 주는 중간 매개지역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민무늬토기 시대에 이르러 신석기이래의 농경이 더욱 발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적지 움집터에서 탄화된 쌀, 보리, 수수, 기장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잡곡농사가 한반도 전역에 일반화되었음은 물론, 벼농사도 서북지방과 남한지역에 상당히 일반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벼농사는 서북지방 팽이토기 주민의 남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남하한 팽이토기인들이 재래의 동북계 민무늬토기인과 접촉 융화하면서 한강유역, 나아가서는 남한지역에까지 벼농사가 일반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한강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를 띠처럼 둘렀다는 뜻으로 대수라 불렀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강을 아리수, 백제는 욱리하라 했고, 동진과 교역하기 시작한 후에는 한수라 불렀다.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 하였다. 현재의 서울 일대는 고구려가 한산군이라 하였으나, 신라의 점령 이후에는 한주·신주·한산주·남천주 등으로 부르며 군주·도독을 두고 다스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한강을 한산하·북독이라고 했다.

이 시기에는 한강유역의 득실이 나라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 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지역이 삼국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더불어 국가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지배했던 사실을 전 역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유역을 점유하면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고려시대의 한강

고려 시대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을 양광도가, 그리고 북한강 유역은 교주도가 관할했고, 지방 3경 중 하나인 남경과 12목 중 광주목·충주목·청주목이 있었다. 당시 한강은 물줄기가 맑게 뻗어 내린다 하여 열수라 했고,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이라고도 불렀다.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문종 21년에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요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말 1382년(우왕 8년) 9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관계의 복잡성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조 마지막왕인 공양왕때(1390년 9월) 다시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한양천도가 있은 후 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고, 인축이 동사했으며 신도의 문화부에 큰 범이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는 등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로서의 한양천도 문제는 종말이 맺어지고 그 완전한 실현은 1394년(조선태조 3년)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의 한강

조선은 한강 유역의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한강의 수운 조건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그리고 정치적 배경 때문인데, 당시에 한강이 교통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도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경창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포백을 운송하는 조운제도의 중심이 되었고, 9개의 조창 중에서 충주의 가흥창·원주의 흥원창·춘천의 소양강창 총 3개소가 한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 한양 근처의 한강은 경강이라 했는데 조운을 통해 경강에 많은 상인이 모이며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울 강(Seoul river)이라는 표현이 외국 문헌에 나오기도 한다. 조선 말에는 프랑스와 미국이 한강과 강화도에 침입했고, 개항을 한 후에는 증기선이 한강에서 운항하기도 하였다.

주석

  1. 출처 :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사이트 (http://hangang.seoul.go.kr/archives/903) 및 위키백과 한강 페이지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cite_ref-hrfco_3-0)

기여

  • 강원규 :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