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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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usdl12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18일 (목) 13: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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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백성의 삶 속에서 다져진 민본사상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요동 정벌 주장과 표전문 사건

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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