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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4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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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풍납토성|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개로왕|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4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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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A는 B에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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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A는 B가 조사하였다||[[서울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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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54395, 127.102993, [[아차산성]]
37.544119, 127.075353, [[건국대학교 상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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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83730, 126.930229, [[포도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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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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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처음 작성
 
*[[김사현]]: 처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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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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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사현]]
 
[[분류:김사현]]
[[분류: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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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차산성]]

2017년 3월 5일 (일) 10:19 기준 최신판


개관

  • 정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 내용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2]

클래스

  • 유적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아차산성 A는 B에 만들어 졌다 삼국시대
아차산성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아차산성 A는 B에 만들어지다 책계왕
아차산성 A는 B가 조사하였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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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A는 B와 관련 있다 온달
아차산성 A는 B를 포함한다 아차산성 남문지
아차산성 A는 B를 포함한다 아차산성 서문지
아차산성 A는 B를 포함한다 아차산성 동문지
아차산성 A는 B를 포함한다 아차산성 장대지
아차산성 A는 B에 위치 한다 아차산

지도

갤러리

기여

출처

  1.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아차산성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