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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6월 30일 (목) 23: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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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

해방공간의 초등교육 상황

해방과 학교

조선총독부는 1941년 3월 31일 국민학교규정(조선총독부령 제90호)을 공포하여 국민학교 제도를 실행하였다. 본국의 경우는 국민학교 교육을 수업연한 8년의 의무제로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수업연한 6년의 비의무제 초등교육이었다. 해방 당시에는 1943년에 공포된 제4차 조선교육령에 따른 국민학교 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예년 같으면 여름방학으로 인적이 끊겼어야 할 학교지만 서울의 각급 학교는 미군의 공습경보로 이미 7월부터 전면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교직원들은 교무실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왕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듣고 일본인 교육자들은 통곡을 하였고 함께 있던 한국인 교육자들은 감격의 벅찬 함성을 질렀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사들에 의해 교실 칠판에 쓰여 있던 8월중 훈육계획표가 지워지고, 일왕의 교육칙어를 모셔놓은 봉안전이 불살라졌다. 교실마다 걸려 있던 황국신민서사도 불태워졌다. 미국 측 기록에 의하면 일부 조선인들에 의한 교육기자재 약탈이나 파괴행위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은 교육현장에 이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후 국민학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교들은 9월 혹은 10월까지 휴교에 들어갔다. 그동안 초등교육계를 주도하던 일본인 교장과 교원, 그리고 일본인 학생들은 대부분 본국으로의 환국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이들 중 일부는 중요한 기록과 서류를 소각하거나 교육기자재를 파괴하는 등의 비교육적인 행동도 자행하였다.

교육개혁 움직임

해방이 되었을 때는 방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처에 교육자 자신들에 의한 자치적 단체가 속출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다 민주화교육의 진정한 진로를 탐구하기에 열중하였다. 서울에는 8월 하순에 진보적 교사들에 의해 초등교육 건설회가 민주화교육을 목표로 내걸고 조직되었다. 반면에 보수적 교육인사들 또한 나름대로 신국가 건설에 필요한 교육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갖는 등 다양한 개혁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진주, 그리고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변화를 지향한 자주적 교육운동은 큰 장애에 부딪혔다. 미군정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일본 식민지 교육정책을 답습하였다. 일제가 황민화 노예교육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두었던 교육제도나 정책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중등학교 이하에서 사용하는 공민, 국사, 국어 등 주요 교과서는 관제품 이외에는 사용을 불허하는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학교의 설립, 운영, 교직원의 임면, 공문서 등에 관한 규정이나 제도도 일제의 것을 대부분 답습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부문 주요 직책과 관련한 인적 구성에 있어서의 보수성이었다. 한국민주당 간부 김성수(최고고문), 유억겸(학무국장) 등이 교육계의 주도적 인물로 자리를 잡고 친일 교육자 집단이 이들과 결합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을 주장하던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교육민주화운동은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해방 초기의 학내 자치운동은 이들 보수적 교육지배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이들 보수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교육재편 작업에 착수하였다. 학무국과 각 시도 학무과의 재정비, 조선교육위원회 및 조선교육심의회의 구성이 이루어졌고 이들 조직에 의해 대부분의 주요 문교정책들이 입안되고 처리되었다. 문교행정 조직은 한국인과 미군 관리로 이원화된 체제였으며 두 위원회 역시 한국인과 미군들이 함께 하는 조직이었다.

개학

미군사령부 군정장관실은 1945년 9월 17일 일반명령 제4호를 발표하여 교육에 관한 조치를 내렸으며 이에 따라 공립국민학교는 동년 9월 24일 월요일에 개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6세에서 12세까지의 모든 어린이로 하여금 등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미군에 의해 점령된 교육시설의 경우는 일정 기간 동안 개학이 유보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던 16개의 일본인 전용 1부 국민학교의 다수가 미군에 의해 점령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9월 22일에는 군정청 학무국에서 우선 당면한 교육방침을 결정하여 신교육체제 확립의 제1보를 내디뎠으며 그 핵심은 ‘일본주의적 색채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군정청 학무국의 중등교육과장 비스코 중위는 부임 직후 몇몇 국민학교를 방문한 후 인터뷰를 통해 당시 초등교육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육방법이 극단적으로 형식적(formal)이었는데 한 학급인원 이 60~90명인 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교사들의 질적 수준은 꽤 괜찮은 편이었으며 특히 아주 많은 수의 남성들이 국민학교 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이런 현상은 당시의 미국 상황, 즉 국민학교에서 남성 교사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체벌은 없었고 교사-학생관계는 아주 친근하면서도 예의 바르며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교사 부족이었다. 서울에는 57개의 공립국민학교(이 중 16교는 일본인 학교), 21개의 사립국민학교(우수한 학교), 13개의 각종학교(열등한 학교)가 있었다. 공립학교는 모두(일본학교 제외) 개교하였으며 사립학교들은 개교를 신청 중에 있었다. 통신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지방학교 현황은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군정장관은 10월 21일에 학무통첩 제352호 “Explanation of and Directive on Schools”을 통해 초등교육을 포함한 군정 문교정책의 일반원칙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38이남 한국에서의 학교에 관한 군정의 일반정책은 변경하는 것이 현명할 때까지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학교를 운영 하는 것이 미군정의 기본정책이었다. 신설 공립국민학교의 개학에 관한 사항은 학무국, 신설 사립국민학교의 개학, 국민학교의 판임급(3등급) 교장과 훈도의 임명은 도 학무과, 기존 공사립학교의 개학 및 공립국민학교의 운영, 재산관리는 시 학무과에서 담당하도록 권한을 분배하였다. 그리고 모든 공립국민학교의 교과과정은 학무국이 정하도록 하였다. 공립국민학교의 수업료, 기타 요금의 징수 및 관리는 과거방식 을 지속하기로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총독부 학무국에 초등교육 담당부서가 없었으며, 당연히 전문가도 없었다. 교육과정 변경은 학교장이 주관하였다. 미군정청은 문교부에 능력과 경험을 갖춘 교육자가 있으면 학습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과 동시에 의무교육을 촉진하겠다는 희망으로 별도의 초등교육 전담부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청 학무국 내의 초등교육과는 의무교육에 관한 사항 등 최소한의 업무만을 처리하였고 대부분의 업무는 지방 해당부서에서 전담하였다. 1946년 3월 현재 학무국 초등교육과의 인원은 군정 장교 1명, 한국인 과장 1명, 계장(assistant chief) 1명, 시학관 1명, 그리고 6명의 사무원이 전부였다. 초등교육과는 주로 초등교육 인구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조선교육심의회 초등교육 분과에서 준비 중이던 의무교육제도 수립에 대한 지원 업무를 담당하였다.

초등교육계의 현안과제

이렇게 하여 학교의 문은 열었으나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80% 전후한 문맹률을 낮추고 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인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등교육의 확대와 개선이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당시 교육 부진의 원인은 실로 다양하였다. ① 유능한 인사들의 정치 참여, ② 경제적 대공황, ③ 군정청의 보수적 교육방침, ④ 생활고로 인한 교사직 기피, ⑤ 교재 부족, ⑥ 아동에 대한 서당교육 강요 풍습, ⑦ 일본의 교육시설 파괴, ⑧ 교통 불편, ⑨ 주둔군의 교사 사용 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었다. 특히 초등교육이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는 데 있어서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로는 교육체제의 혼란, 교과서 부족, 교실 부족, 그리고 교사 부족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들 문제들은 미군정 3년간 지속적으로 교육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해결 과제이기도 하였다. 미군정 측의 해석에 의하면 교육체제의 정비는 2년 후에야 해결되었고 나머지 문제들은 군정 종료 시점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학교가 미군에 의해 군용 막사로 사용됨으로써 교사로 이용될 수 없었다. 1945년 9월 29일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학무국이나 지방 정부가 허락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교시설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금지하였으나 이 지시는 제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고, 1945년 11월 1일까지도 많은 학교들이 군대 주둔지가 되어 있었다. “주한 미군사”도 이 문제에 관해 “학교건물들을 미군 시설로 점령함으로써 학교제도의 확대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비록 6개월 후에 미군은 초등교육 시설을 포함한 일부 학교시설을 우리 측에 반환하였지만 그 영향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어 교재들은 불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지는 등 교육현장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한글교재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점령하자마자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어학자 최현배 씨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원고 집필은 가능했지만 인쇄가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글 타자기가 없었으며, 당시 보편적이던 종서는 타자기 개발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요소였다. 게다가 심각한 용지난으로 인해 교 과서 인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초의 교재가 완성된 것은 1945년 11월이었다. 일본인 교사들의 철수로 파생된 교사 부족 문제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좌우익 갈등 속에서 상당수의 좌익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타율적으로 학교교육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것이 해방 초기의 교사난을 가중시켰다. 점령 초기에 미군 정에 의해 취해진 교사 등록 요구에 대해 일부 좌익교사들이 반발하여 등록을 포기하였으며,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단행된 좌익교사들에 대한 탄압, 혹은 학내 갈등으로 많은 진보적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공백은 임시 교사양성소나 강습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교육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초등뿐 아니라 중등이나 고등교육 부문에서도 목격되었던 공통의 문제였다. 초등교육 부문에서는 이들 문제 이외에도 매우 실질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예컨대 도시 아동의 경우 경제난으로 인한 영양실조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농촌 아동의 경우에는 농업경제하에서 불가피하게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군정기 초등교육은 이처럼 교육체제의 정비, 교실난의 해소, 교사부족 현상의 극복, 교과서 보급 확대, 노동과 영양실조로부터의 아동 해방이라고 하는 풀기 어려운 시대적 과제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등교육제도의 변화

학제개편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철저한 복선형 제도였다. 중등교육 단계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일반 교육과정과 취업을 위한 실업계 교육과정이 완벽히 분리되어 별도의 교육기관에서 다루어졌다. 더욱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교육이 제도화됨으로써 형식이나 내용 면에 있어서 분명한 복선형교육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별하여 교육하는 데 있어서는 유럽 계급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복선형 학제가 보다 효율적이었다. 미군정하에서 학제를 정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조선교육심의회였다. 교육심의회 제2분과위원회(교육제도)에서 올린 안건에 따라 1945년 12월 5일 제2차 전체회의에서 신교육제도의 골격이 되는 학교명칭, 종류, 진학계통, 학령, 수업연한 등을 결의하였다. 제2분과위원회에서 정한 교육제도에 관해 유억겸 위원의 설명에 이어 심의를 한 후 원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정해진 6-3-3-4학제는 비록 약간의 조정기간을 거쳐 1950년대 초에 정착되었지만 그 골격이 현재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학제는 국민의 교육받을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지향하였으므로 학무당국은 화제의 운영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초등교육단계를 중시하였다. 학교계통을 학령전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특종교육의 5단계로 하고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원까지의 교육연한을 20년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초등교육은 만 6세 에서 12세까지 6년간 실시하게 되었다. 학기제 또한 종래의 3학기제를 폐지하고 1년을 2학기로 하였으며, 신학년도의 시작을 4월에서 9월로 변경하였다. 종래의 국민학교 고등과를 폐지하고 해당 학생을 신제도에 의한 중학교에 편입토록 하였다. 신제도의 특징은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이 지위, 문벌, 부, 종족, 종교 및 성별의 구별 없이 향유할 수 있는 단선형 제도라는 데 있었다. 단선형 학제의 채택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이던 1부 국민학교와 조선인이 취학하던 2부 국민학교는 통합되었다. 서울 시내의 경우에는 일본인 전용 1부 국민학교가 해방 당시 16개교로 공립학교 전체의 1/4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중 절반 정도의 학교가 미군의 점령시설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1946년 초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경기도 내에도 50개의 국민학교가 일본인을 위한 1부제 학교로 운영되고 있었다. 학제의 변화와 함께 교명의 변화도 있었다. 즉 일제시대에 일본식으로 변경되었던 많은 국민학교의 명칭이 1946년 4월 1일부터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의무교육의 제도화 노력

우리나라에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문제는 이미 일제 강점기 후반에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친 초등교육 확충 계획의 일환으로 1946학년도부터 만 6세 아동을 의무적으로 취학시킴으로써 1951년에는 학령아동 인구 전체를 취학시키겠다는 계획을 마련하였으며, 1943년 10월 13일에 발표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안’에서도 ‘1946학년도부터 실시 예정키로 되었던 수업연한 6년의 의무교육제도를 징병제 실시관계상 기정방침대로 실시’할 것을 재확인하였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일제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조선인들에게 군인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교육을 강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무교육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 지도자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도 의무교육제도의 도입을 국권회복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시급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다수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의무교육을 위한 노력으로 미취학 아동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1945년 9월 6일 한국민주당은 발기 회에서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이라는 정책을 발표하였고, 9월 9일 고려청년당도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9월 21일 고려사회민주당은 ‘의무교육의 실시와 교육비 국가부담’ 정책을 발표하였다. 조선국민당은 10월 17일에 ‘국가책임제의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를 기함’이라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9월 12일에는 경성국민학교 후원회가 결성되어 10만이 넘는 부내의 초등아동을 하루라도 빨리 교육시키고자 미군정 교육담당자를 방문하고 상의하였다. 교육에 대한 이 같은 교육계 및 일반의 기대 속에 군정청 학무국 차장 에레트 소좌는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의무교육 실시에 대한 군정청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피력하였다.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첫째 교사부족, 둘째 교원양성, 셋째 예산 등 문제가 있다. 의무교육 실시를 연구하기 위하여 지금 군정청에서는 교육심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중략) 이 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연구중인데 대체로 현재 전 학령아동의 17%가 취학하고 있고 3년 이내로는 전 학력아동이 모조리 취학할 수 있도록 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리하여 4년 후에는 2학년까지 전부 취학하고 이 계산으로 가면 9년 후면 완전히 6년까지도 전 학령아동이 공부를 하게 될 터이다. 그러나 예산만 있으면 더 빨리 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2부제 야학 등도 실시할 방침이다.

의무교육을 법제화하기 위한 노력이 조선교육심의회를 중심으로 기울여졌다. 교육심의회 초등교육분과위원회는 1946년 1월 24일 분과회의의 검토를 거쳐 의무교육안을 전체회의에 상정하였고 전체회의는 1월 26일에 만장일치로 이안을 가결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 몇 가지였다.

첫째, 1946년부터 6년 이내에 의무교육제를 완성한다.
둘째, 1946년 9월 신학기에 만 6세의 아동은 원칙적으로 전부 수용하고, 그 이상 학령을 지난 아동도 지원하는 경우 전부 수용한다.
셋째, 이렇게 수용하기에는 학급수와 교원 경비 등이 문제인데 학급은 2부제로 하고 교원은 이후 6년간 매년 12,800여 명을 양성하며 경비는 국고보조를 약 6할로 계상하며 시급한 만큼 민력에 의하여 부족액을 보충한다.

학무국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1946년 2월 21일에 그 실시계획을 발표하였다. 즉 1946년부터 1951년까지 6년간 66억 원의 예산을 투자하여 학령아동 400만 명을 모두 취학케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6개년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2배의 학교건물, 매년 1만 명의 교사가 추가로 요구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1946년 3월 초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오천석 문교차장은 맥아더 사령부가 의무교육 실시에 대한 재정 지원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의무교육 추진을 위한 구체적인 연구, 검토가 계속되었고 각 지방별로도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은 1946년 4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장 피텐저의 기자 회견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피텐저는 “의무교육에 대하여는 조선 교육심의회에서 의무교육분과위원회에 그 건의를 하기로 되었고 법령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예산은 원안대로 통과되었으나 시설관계로 의무교육은 고사하고 지원아동도 다 수용될는지 의문이다”고 하였다. 군정장관 러치 소장도 의무교육추진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였다. 문교부에서는 교육심의회에서 제출한 의무교육안을 정식으로 접수하였으나, 아직 공식으로 실시하기로 인가가 되지 않았다. 현재 校舍와 교원수로 보아서 6세부터 12세까지의 조선인 아동의 반수를 수용하고 있는 정도이다. 당국에서 현재 이 의무교육 실시에 응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교원을 양성 중이며 지방행정처에서는 국민학교 校舍의 신축수리, 증축 등을 위하여 금년 예산에 6억 원을 포함시켰다. 비록 현실적인 여건의 부족으로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나 교육에 대한 일반의 관심 속에 문교부는 1946년 5월 28일에 오는 9월부터 의무교육을 시행한다는 의무교육 초년도 계획을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소요총액이 8억 3,809만 2,984원인데 국민학교 신축비가 약 7억 900만 원이며 이에 대한 교원양성비가 970만 원이나 되었다. 신축하여야 할 교실 약 5,258개의 중축 공사는 근근 각 학교에서 착수하게 되었고 교원양성도 제1차로 2,500명가량을 6월부터 각 도에서 3개월간 임시 양성하여 9월 신학기를 앞두고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년도 학동 수용계획에 의하면 만 6세의 적령아동은 원칙적으로 전원 수용할 것을 목표로 하나 지방 실정에 따라 만 7세, 만 8세 아동을 합쳐 약 8할을 수용하는 수준이었다. 이 밖에 학령을 초과한 9세, 10세, 86만 2천 명 중 6할인 51만 7천 명을 수용하고, 만 11세, 12세 아동은 81만 3천 명 중 5할인 40만 명을 수용함으로써 도합 370만 500명 중 7할인 220만 명가량을 첫해에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수용한 아동의 수업은 과도적 조처로서 2부제 수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5,258개 교실의 증축으로 교실부족을 덜게 하기로 하였다. 각 도에서는 의무교육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재정 확보에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지방이 경상남도였다. 각 부, 군, 읍, 면 단위로 의무교육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의무교육재정 확보, 교원 양성, 자재 확보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시의 경우 의무교육의 실시를 위하여 국민학교의 월사금을 일제히 폐지하기도 하였다. 문교부에서도 1947학년도 중점 목표 중 의무교육의 전면적 실시와 학령아동의 전원 수용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교육세의 신설을 연구 하기에 이르렀다. 오천석은 1947년 12월 4일 문교부장에 취임하면서 의무교육제 법령화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1948년에 이르러서도 문교부는 의무교육의 확대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였다. 예컨대 1948년 4월 1일부터 전 학년 아동의 수업료 징수를 폐지하고 3학년까지는 2부제 수업을 실시하는 것 등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의무교육을 향한 제도화 노력 및 완전 취학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국민학교 학령아동의 70% 이상이 취학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의무교육의 법제화는 미군정하에서는 성사되지 못하고 정부수립 이후로 미루어졌다.

법정 교육재정의 부족

교원, 교과서와 함께 교육인구 팽창에 따라 긴급하였던 것은 교실난이었다. 팽창하는 초등교육 인구와 비례할 만큼의 교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육재정은 이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었다. 50만 명의 취학인구가 증가하는 경우 최소한 2부제 수업을 가정하더라도 5,000개의 교실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재정 형편으로는 1년에 5,000개의 교실증축은 사실상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미군정이 당면하였던 교원 부족, 교과서 부족, 그리고 교육시설의 부족은 모두 교육재정과 관련된 문제였다. 교원문제에서 언급하였듯이 교원 부족 현상도 결국 교육재정의 부족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였다. 일제시대의 교육재정은 일본인 교육행정을 주관하는 학교조합과 조선인 교육행정을 주관하는 학교비재정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일본인이 의무교육제도였음에 비해 조선인은 의무교육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미군정의 출범으로 해소되었다. 총 예산에서 차지하는 문교예산의 비중은 1945년의 2.6%에서 1947년의 8.5%, 그리고 1948년에는 5.0%로 변화하였다. 이렇게 교육예산의 규모나 비율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전 기간에 걸쳐 교육재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법정 교육재원의 부족 현상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세나 성인교육세의 신설 등이 계획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1946년도 당시 1개교 신설에 소요되는 자금을 약 650만 원 정도로 추정해 볼 때 1946~1947회계연도 문교부 예산 총액은 전국에 약 50여 개 학교를 신설할 정도에 불과하였다. 법정 교육재정은 지방세인 호별세부가세, 중앙정부보조금,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징수하는 수업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업료는 중앙정부가 결정하였으며 해당지역 거주자와 비거주자 간에 수업료에 있어서 3배 전후한 차등이 있는 제도였다. 1946년의 국민학교 수업료는 월 2원 이내였던 것이 1948년도에는 월 10원으로 인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재정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학교는 불가피하게 기부금, 특별부과금, 사친회비 등 비법정 교육재원에 의존하였고, 이는 결국 학교별, 지역별 교육여건의 차이를 심화시켰다. 비법정 재원에 대한 의존은 학교교육이 전체 지역 주민이 아닌 몇몇 소수 재력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초등교육의 경우 총 재원의 최소 1/3 이상을 법률외적 재원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심한 경우 75% 가까운 재정을 이러한 통로를 통해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비법정 교육비의 과다현상이 무상 보편교육 실현의 가장 큰 장애요소였다. 물론 중등학교에 비해 덜 심하기는 하였지만 국민학교의 경우에도 각종 기부금 강요행위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47~1948회계연도 교육분야의 총 재정규모는 문교부를 통해 배분되는 중앙정부보조금 1,660,242,480원(그중 13억여 원이 초중등교육예산), 지방세인 호별소득세에 부과되는 학교세 수입 516,264,116원이었다. 중앙정부보조금은 문교부에 의해 배정되었고 학교세는 군별로 구성된 학교재정위원회에 의해 각 학교에 배정되었다. 중앙정부보조금이 당시 초·중등학교 운영비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나머지 50%인 13억여 원 중 학교세 수입 5억여 원을 제외한 8억여 원은 학부모들로부터 공식·비공식적으로 징수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즉 초·중등 교육비 중 학부모 부담률이 약 30%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법정 교육재정의 부족 문제는 당시에 당면한 교육문제 해결의 일차적 걸림돌이었다. 풍부한 교육재정이 최고의 교육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적합한 교육재정 제도나 부족한 교육재정은 교육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교육사적 의미

이상에서 해방 직후 초등교육 부문에서의 주요 변화를 제도개혁, 초등교육 인구의 팽창, 이에 따른 교육적 과제, 그리고 다양한 교육개혁 노력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 초등교육사에 있어서 해방 3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초등교육의 보편화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방 당시 50% 미만이던 국민학교 취학률이 3년 후에 70% 이상으로 높아졌고, 미취학 아동의 상당수도 취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국인 고유의 높은 교육열, 의무교육제도의 도입, 2부제와 3부제 수업 등 임기응변식 시설 활용대책의 추진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취학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불가피하게 교사난, 교과서난, 교실난 등을 가중시켰으나, 당시의 열악한 법정 교육재정 형편하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언론에서 표현하였듯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대부분 홍로점설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한국교육이 경험한 많은 교육적 부작용의 출발점이 바로 해방 직후의 급작스런 교육인구 팽창과 이에 대한 임기응변식 대응이었다. 교육인구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육행정체제, 교사진, 교육관행 등의 많은 부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일제 교육잔 재의 전면적 청산을 유보하는 것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미군정 3년간 화제의 정비, 차별적 교육제도의 철폐, 일제식 교명의 환원, 교육용어의 한글화 등 초 보적 수준의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일제교육 유산의 정리를 가능하게 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새 교육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권위주의적·교사중심적·지식중심적 교육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주적·아동중심적·생활중심적 교육을 건설하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대부분 실험에 그쳤을 뿐 실제 교육현장은 일제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교사부족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제식 교사교육을 받은 교사들을 정리한다거나 일제시대의 교육관료들을 전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팽창한 교육인구를 관리해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교육행정 시스템의 전면적 변화 또한 용이할 수 없었다. 이런 속에서도 전면적 교육혁신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인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론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친일 교사나 친일 교육관료 배제운동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함으로써 실천될 수 없었다. 민족주의 교육자를 중심으로 교육내용에 있어서의 일제잔재 청산을 지향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당면한 교과서 부족의 심각성으로 인해 많은 분야 교과서는 일제시대의 것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번역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경험한 일부 미군정 관리들도 인식하고 있었듯이 교육의 양적 성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측면에서 미군정기 교육은 일제시대에 비해 발전된 측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중등교육

중등교육의 확대와 갈등

중등학제 정비

일제 강점기의 학제는 기본적으로 복선형이었다. 즉 중등교육 단계에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복선형 화제의 일반적 특성을 반영하여 교육기관별로 그 성격과 교육연한이 매우 다양하였다. 크게는 인문교육 중심의 보통교육기관인 중학교(5년)와 고등여학교(3~5년)가 있었고, 실업교육기관으로는 실업학교(3~5년)와 실업보습학교(2~3년)가 있었다. 교육연한은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지역특성, 남녀 등의 차이를 반영하여 다양하였다. 물론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은 구분하여 교육을 하였다. 초등교원 양성을 담당하는 사범학교(normal schools)도 중등교육에 속해 있었다. 이 같은 학제의 근간은 1920년의 제2차 그리고 1938년의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서였다. 종전 직전인 1943년에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다시 개정하여 각급 학교별 수업연한을 전시체제에 맞추어 조정하였다. 중학교는 4년, 고등여학교는 2년으로 단축되었고 실업학교도 4년으로 조정되었다. 1944년에는 모든 문과 및 상업학교를 농업 혹은 공업학교로 강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해방 후 학제 개편 논의의 핵심은 중등교육의 연한과 학교 형태였다. 다양한 논의 과정을 거쳐 복선형 화제는 폐기되고 미국식 단선형 학제가 채택되었다. 중등교육 기간을 총 6년으로 단일화하였다. 초급중학 3년 이후 고급중학 3년을 추가로 이수하는 중등교육의 2단계 제도가 채택되었다. 조선교육심의회의 중등분과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분과위원회에서 다수가 미국식 6년제 중등학교 제도를 찬성하지 않았으나 교육심의회 전체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분과위원회의 의견서를 세 번이나 변경한 끝에 이 제도를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중등교육 단계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고 교육기관에의 접근 가능성을 확대함으로써 아동이 지닌 잠재적 능력이 개발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군정 기간 동안 초급 중학교와 고급 중학교의 완전한 분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년제 초급중학교와 초급 및 고급반을 병설한 6년제 중학교가 병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교육심의회는 1946년 2월 학제분과위원회의 건의를 토대로 하여 초급중학의 경우는 인문과 실업학교의 비율을 4 : 6, 고급중학은 3:7로 하는 안을 심의 결정하였다.

중등교육행정

일제하에서는 별도의 중등교육 담당 부서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2월 9일 기구개편에 의해 중등교육과를 별도로 두어 중등교육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1946년 1월 10일부터는 일반 중등학교뿐만이 아니라 실업계 중등학교까지도 중등교육과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당시 중등교육과의 소관 사항은 다음과 같다.

a. 중등학교의 설립, 이전, 폐지의 승인
b, 중등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통제
c. 공립중등학교 교장 및 칙임(勅任, 소닌) 직급의 중등교사 임명
d. 모든 사립 중등학교 교장 임명의 승인
e. 공립중등학교 칙임 직급 교사나 교장의 전보 및 면직
f. 입학시험
g. 공사립학교의 수입 및 지출 검사
h. 공립학교에 대한 정부 보조
i . 학교 일정
j. 교복
k. 대학입학 자격

군정청 학무국은 일제시대에 비해 광범위하게 각 지방 교육관청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예컨대 군정 초기의 중등학교 교장 임명에 있어서 반수 이상이 각 지방 교육관청의 추천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오직 2명만이 학무국에 의해 그 임명이 거부되었다. 학교 신설과 관련해서는 각 지방의 의견이 전적으로 수용되었다. 1946년 2월까지 중등교육 관련 주요 업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167교의 기존 학교 개학
b. 1946년 2월 1일 당시 76,467명의 중등학생이 등록
c. 1946년 2월 20일 기준으로 110명의 공립학교 교장이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교체
d. 일본식 군사훈련, 황제숭배, 민족주의 종식
e. 3교의 사립 중등학교 신설
f. 여자중학교 교복에 관한 학무국 규정 철폐
g. 중등교육분과위원회 지원

초기 중등교육에 관한 개혁안을 준비했던 중등교육분과위원회는 3명의 중등. 학교 교장, 1명의 교사, 1명의 정치인, 1명의 미군장교, 그리고 1명의 학무국 한인 직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의 회의를 가졌다.

학내 갈등

9월 3일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중등교육자대회가 개최되어 중등교육협회를 조직하고 “교육자로서 과거 일제 노예교육에 봉사한 죄를 국민에게 사죄하고 새로운 민주교육을 건설하기 위하여 재래의 교장급은 전부 사직을 단행하고 재래 교직원 또한 총사표를 제출하되 교직원만은 학도를 위하여 학원에 잔류한 후 신정부가 수립된 후에 벌을 기다리겠다”는 성명서를 천하에 공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주둔, 이어진 군정의 시작과 함께 교육계의 주도권은 다시 보수적 인사들에게 넘어갔다. 즉 일제하에서 교육을 주도하였던 보수적 인물들이 대거 군정청 학무국의 주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시작된 교육자치 운동과 충돌이 발생하였다. 경성의 덕수공립상업학교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서울시 학무과에서 임명한 교장을 전직원과 학생들이 일치하여 반대하는 한편 그들이 존경하는 교원을 교장으로 추천함으로써 학교는 무기 휴교가 되고 전 직원은 파면되었다. 이와 같이 미군정 초기에 있어서 일제 잔재가 반영된 교육계 인사는 남조선 각지에서 발생한 교육계 갈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이어진 대부분의 교육 혼란이나 교육현장에서의 불상사는 여기에서 기인하였다. 청주사건도 대표적인 사례였다. 1945년 12월에 청주제2고등여학교의 진보적 교원이 퇴직을 당한 이후 1946년 2월 16일에는 청주제1중학교 교장 이완용 씨가 편당적이라는 이유하에 진보적 교원 3명을 사직시켰다. 이들 사건을 계기로 학교장의 독단을 배격하고 진보적 교원의 복직과 학원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동 중학 교직원의 총사직, 그리고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시작되었다. 이 문제는 점차 확대되어 2월 26일 청주사범, 청주농업, 청주상업, 제2고등여학교, 여자상업, 1중 등 6개교가 전부 맹휴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3월 2일 진천농업, 제천농업, 제천고등여학교, 영동농업이 일제히 동정 맹휴로 들어갔고, 충주중학, 충주농업, 충주고등여학교도 또한 맹휴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초기에는 학무당국의 발표로 원만히 해결을 볼 듯하였으나 3월 26일 돌연히 청주경찰이 동원되었고 결국은 학생 퇴학 3명, 무기정학 35명의 희생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 문교부(학무국의 후신)는 무허가학교 폐쇄령을 발표하여 3월 4일자로 수많은 학교, 학원, 강습소가 폐쇄를 당하였다. 이에 많은 교육가, 학생, 그리고 사회단체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민주학원건설투쟁위원회,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 등이 이러한 운동을 선도하였다. 당시 무허가학교 폐쇄령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불상사 중 중등학교의 맹휴사례 동성상업학교, 광업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광신상업학교, 경제전문학교, 경성사범대학 및 동부속중학, 경성공업전문, 경성공업, 경성농업, 중앙중학 이들 이외에도 공주고등여학교, 경신중학, 조선전기공업학교, 경성전기, 조선공업(2차), 상업실천, 한양공업학교(2차), 숙명여자전문학교, 목포상업, 목포문태중학, 수원문화고등여학교, 성남중학, 경기중학, 경기상업, 광주일중 등에서 맹휴사태가 이어졌다. 해방 후 1년 동안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짖고 일어난 맹휴 사건은 중등학교 약 30개교에서 발생하였고 참가 학생은 3만 명을 헤아렸다.

중등교육의 팽창

해방과 함께 중등교육은 여러 면에서 양적인 팽창을 하였다. 표에 보이는 것처럼 해방 직후 3년간 학생 수와 학교 수에 있어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미군정기 중등교육의 팽창>[1]
  연도  학교 수  증가율  학생 수  증가율
 1945    275      -     79,846     -
 1946    305     25    111,934    40
 1947    406     12    227,449   103
 1948    564     39    278,512    12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중등학교는 1946년 1년 동안 81개교가 신설되었고 학생 수는 76,467명에서 141,097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운 증가를 보였다. 중등교육 팽창의 일차적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미군정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한 노력이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미군정기의 교육부문 예산을 검토해 보면 미군정은 실질적으로 공립학교 신설 등을 통한 교육기회 확대에는 매우 소극적 이거나 관심이 없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946회계연도 예산 중 중등학교 건축신영 및 수선비 보조 예산 총액으로는 중등학교 8개 증설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늘어난 중등학교가 총 101개교였으므로 사실상 미군정에 의한 학교 신설 노력은 매우 미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교육기회 확대에 기여하기보다는 장애물이었다. 미군은 남한의 많은 학교건물을 점령군의 숙영지로 사용함으로써 부족한 교육 수용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1945년 11월 현재 미군은 45,000명의 학생들이 1부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규모의 중등학교 시설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남한의 중등학생의 거의 전부인 76,467명의 학생들이 2부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미군의 교육시설 사용이 갖는 의미는 자명해진다. 교육시설의 원상 회복을 위한 미군정청의 노력이 있기는 하였지만 미군 사용 교육시설에 대한 반환 투쟁은 1947년까지 계속되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홍성고등학교의 경우에 1947년 8월 여름방학까지 미군에 의한 학교시설 이용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루이스(Luise) 대위가 이끄는 주둔군 100여 명 내외의 군인이 모교 본관 1층과 2충 교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나머지 동편 교실과 기숙사를 이용하였으며, 일부 창고를 교실로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했고, 강당은 미군과 공동 관리하였다. 정작 미군이 철수한 시기는 1947년 8월 하기방학 중이었다.”[2]

미군정에 의한 사립중등학교에 대한 재정 지원은 거의 없거나 매우 적었었다. 설립자 부담금이나 재산 수입이 사립학교 재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일제시대에 비해 감소한 반면, 학부모의 수업료가 학교 운영 경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미군정하에서 증가하였다. 중등교육 팽창의 주된 원동력은 일제지배하에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강한 교육열이었다. 잠복해 있던 교육열은 해방과 함께 강하게 분출하였다. 당시 미군정 문교부장 고문이었던 언더우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전적으로 지역사회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학교건물을 짓고 수리”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중등교육 연한의 연장도 중등교육 인구의 팽창을 가져왔다. 해방 당시 4년이던 중등교육 연한이 1946학년도에 1년, 1947학년도에 다시 1년 연장됨으로써 비로소 중등교육 연한이 6년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중등교육 인구의 팽창현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재정의 획기적 증가가 없는 상황에서의 중등교육의 양적 팽창은 단기적으로 교원부족현상을 가중시켰다. 일인 교사의 퇴거 등으로 인해 해방 당시 중등학교 교원은 약 6,000명이 부족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각종 임시 강습소의 운영 등을 추진한 결과 1946년 10월 말 현재 중등교원 수는 총 4,899명으로 1945년 12월에 비해 313.1%가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원부족현상은 지속되었으며, 교원의 질 하락 문제도 매우 심각하였다. 초등교원과 마찬가지로 무경험 교사나 학력부족 교사가 대다수 교단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중등교육 인구의 확대는 또한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등학교 입학을 둘러싼 경쟁의 심화, 이에 따른 각종 교육부조리 현상의 만연도 중등교육의 급속한 팽창에 따른 후 유중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등교육이 지녔던 최종 교육으로서의 성격은 서서히 사라지고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교육으로서의 성격을 점차 확실히 하게 되었다.


고등교육

고등교육의 일원화과정과 갈등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유일의 종합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과 기타 다양한 전문학교로 이원화된 고등교육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군정 지배하에서 이원적 교육체제는 해체되고 4년제 대학 중심의 일원화된 체제로 정비되었다. 미국은 전후 구식민지 민족에 대한 군정의 실시를 이미 1943년경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다. 8월 하순까지 오키나와에서 군정 준비를 하던 여러 명의 교육분야 요원 중 교육담당 책임 장교였던 라카드(Farl N. Lockard) 대위는 한국으로 향하면서 군정 교육정책에 대한 구상을 하였고 그중 핵심적인 것은 한국교육에 관한 정보 수집을 위한 설문지의 작성과 한국인 교육위원회의 구성이었다. 그는 1945년 9월 9일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10일 서울에 도착하여 다음날인 9월 11일부터 구총독부 건물 2층에서 군정교육 업무를 시작하였다. 한국인 교육계 인사들 에 대한 면담을 마친 라카드는 9월 16일 조선교육위원회(Korean Committee on Edducation) 위원 선발을 위한 한국교육자회의를 개최하여 7명의 각 분야별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중 고등교육 분야의 위원은 김성수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9월 22일 라카드의 고문에 임명됨으로써 백남훈이 조선교육위원회의 고등교육 담당 위원이 되었다. 군정 초기의 고등교육정책은 미군정과 조선교육위원회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었다. 군정 초기 고등교육관련 정책의 핵심은 ‘고등교육에 관한 임시 조치’였고 후반기는 국대안을 둘러싼 갈등이 고등교육 분야 최대의 해결과제였다.

해방 당시 고등교육의 실태

미군정하에서의 고등교육은 고등교육과(Department of Higher Schools)에서 담당하였으며, 이는 다시 대학, 의과대학, 대학교, 교원양성을 담당하는 4개의 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중 대학계(Colleges Branch)는 다음과 같은 업무를 관장하였다.

(a) 공·사립대학의 설립 인가
(b) 사립대학의 총장 임명 승인
(c) 모든 공립대학의 총장, 화장, 그리고 칙임(任, sonin)급 이상의 교수 임명 승인
(d) 공·사립대학의 정원 증원 요청에 대한 승인
(e) 공·사립대학에 대한 조사 및 감독 
(f) 공립대학의 예산 및 경비 지출 승인
(g) 사립대학에 대한 보조금 지급 권고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각급 대학은 1945년 9월 말부터 개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이외에 고등교육기관으로 분류될 수 있는 교육시설로는 대구농업전문학교, 대구사범학교, 중앙여자전문학교, 경성천주공교전문학교, 경성음악학교, 국학전문학교, 한국야간대학 등이 있었다. 이들 중 경성음악학교, 국학전문학교, 한국야간대학은 8.15 이후에 설립되었다. 경성법정학교는 1946년 3월에 무허가 학교폐쇄 조치에 따라 문을 닫았다.

<표> 미군청 초기 대학 및 개학 현황
  (1) 서울대학 법문학부      1946년 02월 19일
              의학부        1945년 10월 01일
              이공학부      1946년 03월 05일
              예과          1945년 10월 20일
  (2) 경성법학전문학교       1946년 02월 23일
  (3) 경성의학전문학교       1945년 10월 08일
  (4) 경성공업전문학교       1945년 09월 29일
  (5) 경성광산전문학교       1945년 10월 01일
  (6) 경성경제전문학교       1945년 11월 15일
  (7)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5년 09월 28일
  (8) 경성치과전문학교       1945년 10월 27일
  (9) 경성약학전문학교       1945년 10월 13일
  (10) 연희전문화교          1945년 11월 20일
  (11) 보성전문학교          1945년 10월 05일
  (12) 이화여자전문학교      1945년 10월 22일
  (13) 숙명여자전문학교      1945년 10월 05일
  (14)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945년 10월 19일
  (15) 혜화전문학교          1945년 11월 24일
  (16) 경성사범학교          1946년 01월 21일
  (17) 경성여자사범학교      1946년 01월 21일
  (18) 수원농림전문학교      1945년 10월 01일
  (19) 부산수산전문학교      1945년 12월 01일
  (20) 대구의학전문학교(공립) 1945년 11월 23일
  (21) 광주의학전문학교(공립) 1945년 11월 01일

군정 초기의 대학교육에 관한 조치들은 교육심의회 고등교육분과에서 심의하여 건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대학은 4년 혹은 그 이상의 수업연한을 가진 교육기관으로서 고급중학교 혹은 사범학교 졸업생으로서 소정의 자격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수용한다.
(b) 대학교(university)는 2개 이상의 단과대학을 가진 대학을 말한다.
(c) 대학(college)은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된 학교를 말한다.
(d) 대학 관련 법령이나 제 규정에 관한 최종적 승인은 학무국에서 관장한다. 
(e) 남녀공학은 대학 선택에 맡긴다. 단 학무국은 특정 학교를 남자대학 혹은 여자대학으로 지정할 수 있다.
(f) 국어, 역사와 문화, 자연사, 그리고 체육은 모든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g) 1년 혹은 그 이상의 대학원 과정은 담당할 교수진이 확보된 경우에 설립할 수 있다.
(h) 대학에서는 다음 3가지 학위를 수여한다 : (1) 학사(B.A.; 4년 혹은 그 이상의 과정 이수자), (2) 석사(M.A.; 1년 혹은 그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제출한 논문이 통과되고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자), (3) 박사(Dr.; 3년 혹은 그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제출한 논문이 통과되고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자)

의학대학에 관한 업무는 1945년 10월 15일에 보건후생국으로부터 학무국으로 이관되었고 1946년 5월 31일 전국 대학총장 및 서울대학 학부장 모임에서 대학교육을 4년제로 변경하는 구체적 계획을 토의하였다. 해방 이전이나 이후나 고등교육 부문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것은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당시 경성제국대학 270명의 교수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의 한국인으로의 대체가 시급한 과제였다. 군정청에서는 학교 운영의 원활화를 위해 우선 총장 인선에 착수하였고, 한국교육위원회는 백낙준을 총장서리(acting president)에 추천하였으나 많은 학생과 교수들은 그가 친일 인물이라는 이유로 거세게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 군정청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1945년 10월 16일자로 군정법령 제15호에 의해 서울대학으로 변경하고 같은 날 각 학부 부장을 비롯한 교수들에 대한 임명 작업을 시작하였다. 의학부장에는 윤일선, 법문학부장에는 백낙준, 예과부장에는 현상윤, 그리고 이공학부장(대리)에 최규남 등을 임명하였다. 이어 10월 17일에 현역 해군대위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를 총장에 임명하였다. 교수에 대한 인사는 10월 16일 의학계통 교수 58명(학장 포함, 임명사령 제16호), 11월 3일 예과교수 16명(임명사령 제27호)을 임명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해방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군정청은 서울대학의 총장을 한국인으로 임명하는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육위원회와 서울대학 학부장들의 의견을 들어 학무국에서는 1946년 1월 25일 김준연을 서울대학 총장으로 군정장관에게 추천하였으나 총장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두 명의 미군 장교를 전쟁성에 총장 후보로 건의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학무국에서는 총장문제와 함께 서울대학의 개편안을 마련하였다. 서울대학 총장을 맡고 있던 크로프츠가 1945년 12월 12일 남한의 고등교육 전체를 책임지게 되면서 첫 번째로 추진한 업무가 서울대학을 미국식으로 개편하는 문제였다. 약 8,000명의 학생과 455명이 교수진으로 된 대규모 대학을 구상하였다. 이 계획에 의하면 당시의 4개 단과대학(의학, 법문학, 이공학, 예과)을 확대하여 7개 단과대학(법학, 의학, 문과, 사범, 이과, 공과, 농림)과 1개 대학원 체제로 개편할 예정이었다. 이 대학의 위상에 관하여 대학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이사회를 군정장관 직속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이전대로 학무국장의 관할하에 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945년 말에 대학입학 자격을 규정하기 위한 별도의 위원회가 1명의 사립대학 총장, 서울대학교 학장 1명, 그리고 미군정 요원 1명으로 구성되어 미국 제도를 기초로 하여 대학 입학시 요구되는 각종 기준을 마련하였다. 일제하에서 대학은 중등교육 4년을 마치고 입학하여 3년간 재학하는 기관이었다(11, 12, 13학년), 의과대학은 4년제였다. 유일한 종합대학인 경성대학은 2년의 예과 혹은 2년간의 대학교육을 마치고 입학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경로는 초등학교-중학교-대학(총 13년), 초등학교-중학교-예과-대학교(총 15년)의 두 가지가 있었다. 일제 말경 남한의 고등교육 담당기관으로는 대학예과(2년제), 3년제 대학(의대는 4년제), 3년제 대학교(의대는 4년제) 등 다양한 형태를 지닌 27개 공립, 사립대학이 있었고 이들 학교에 2,882명의 학생들이 등록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 학생, 그리고 소속교원 규모는 아래 표와 같다.

<표> 해방 직후 고등교육 현황(1946. 12)[3]
   연도     학교 수    학생 수    교원수
 1945. 8      21       2,382      257
 1946. 7      27      10,313    1,065
 1946. 10     16      13,434      757
<표> 공립대학 및 대학교(1946. 10)
    학교명                위치   학생 수   교수 수 
 광주의과대학             광주     186       34
 부산대학                 부산     144       22
 국립서울대학(예과 포함)   서울   7,762      312
 대구농과대학             대구      92       21
 대구의과대학             대구     260       23
 대구사범대학             대구     222       15
    총 계                        8,666      427
<표> 사립대학 및 대학교(1946. 10) 
    학교명         위치    학생 수    교수 수
 중앙여자대학      서울      291        23
 연희대학(COC)    서울    1,165        35
 이화여자대학      서울    1,250        76
 고려대학          서울    1,114        39
 서울약학대학      서울      418        24
 서울여자의과대학  서울      361        27
 세브란스의과대학  서울      544        26
 숙명여자대학      서울      304        24
 성균관대학        서울      350        13
 동국(혜화) 대학    서울      971        33
     총계                  6,768       340

고등교육에 관한 임시 조치

교육에 관한 미군정의 최초의 조치는 9월 17일에 내려진 군정장관의 일반명령 제4호(9월 24일 군정청법령 제6호로 대체됨)였고 이에 따라 초등학교는 9월 24일(월요일)부터 재개되었으나 이 명령에 고등교육에 관한 별도의 지시는 없었다. 9월 29일 열린 조선교육위원회에서의 추천을 토대로 학무국은 각 전문학교 및 대학의 교장과 학장을 비롯한 교학 방면의 인사 발표를 하였다. 이를 둘러싼 마찰이 종전 후 최초의 교육계 갈등이었다. 학무국 인사의 주요 내용으로는 학무국장 대리에 김성수, 학무과장에 오천석, 경성대학 총장대리 겸 법문학부장에 백낙준 등이었다. 이에 대해 경성대학 학생자치회에서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학생자치회의 주장은 “적어도 대학 총장과 학부 부장은 심오한 학식과 고결한 인격으로 만인의 흠모를 받아야 하겠거늘 10년 전 연희전문 교수를 사한 일개 뿌러커로 또는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로서 활약한 백씨를 총장으로 맞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법문학부 교수 중심의 조선문화건설중 앙협의회에서도 백 총장의 취임 거부 성명을 발표하는 등 학무국과 교수 및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따라서 10월 10일에 미해군 대위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가 경성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한국인 총장을 임명하려는 군정청의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국대안 파문 이후 한국인 총장이 임명되는 1947년 10월까지 서울대학은 미군에 의해 운영되었다. 숙명여전의 경우에도 자치위원회에서 선출한 교장과 학무국에서 임명한 교장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학생에 의한 교수 폭행, 동맹휴학사태 등이 발생하였다. 해방 당시 남한에 있던 21개 고등교육기관들이 교육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은 9월 28일 학무국이 각 도에 통첩을 보내 “중등학교 이상의 관 · 공립 학교는 10월 1일부터 재개할 것을 지시하면서부터였다. 이 통첩에 따라 가장 먼저 개학을 한 것은 수원농림전문학교였다(10월 1일). 사립학교로서는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가 10월 1일부터 6일까지 특강을 실시한 후 10월 8일에 정상수업을 시작하였다. 서울약학대학은 10월 8일부터 재학생 등록과 함께 신입생 입학 원서 접수를 시작하여 15일에 시험을 실시하는 등 학교마다 상황에 따라 12월 말까지 재학생 중심으로 개학을 하거나 신입생 선발시험을 치렀다. 10월 16일에는 군정 법령 제15호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으로 정식 변경되었고 10월 21일에는 학무통첩 제352호 “학교에 대한 설명과 지시”를 통해 고등교육기관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각 분야별로 대학 설립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그 한 예로 조선의학교육협의회에서는 12월 3일 의과대학 신설 계획을 심의하여 1946년 4월에 예과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고 학무국은 다음날 이를 발표하였다. 12월 19일에는 군정청 학무국의 기구가 개편되어 고등교육과가 별도로 조직되었다. 조선교육위원회와 함께 미군정 교육정책에 영향을 미친 자문기구는 1945년 11월 초에 구성되어 11월 15일에 첫 번째 전체회의를 개최한 조선교육심의회(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였다. 고등교육에 관한 정책은 제8분과위원회에서 주로 심의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의 활동 중 고등교육 관계로 대표적인 것은 대학령 및 학위령의 심의 및 결정, 그리고 ‘고등교육제도 임시 조치’의 심의 및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교육심의회는 1946년 2월 9일 열린 임시총회에서 대학령과 학위령을 신중히 토의하였다. 학위령에서는 학사, 석사, 박사 및 명예박사의 4종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로 포함되었다.

① 수업연한은 4년 이상으로 한다.
② 국어문화사, 자연과학개론, 체육은 필수과목으로 한다.
③ 대학은 국립, 공립, 사립의 3종으로 구분한다.
④ 국립 종합대학의 학부 종류는 국가 원수의 명령으로 정하며 각 대학에는 참의원회를 두어 내부 규정을 정한다.
⑤ 공립대학은 도와 시에 한해 설립할 수 있다.
⑥ 사립대학은 재단법인이라야 설립할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기의 고등교육을 규제할 임시 조치를 심의하고 결정한 것은 조선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가 확대되어 1946년 4월에 구성된 고등교육에 관한 전문위원회였다. 이 위원회에는 전문학교의 교장 등 고등교육 관계자 15명과 문교부 직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차로 고등교육제도 및 입학시험에 관한 임시 조치 내용이 1946년 4월 말에 발표되었다.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예과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에 한하여 행하며 예과를 부설하지 않는 대학에 있어서는 당해 대학에 촌치되는 전문과에 신입생을 모집한다.
② 현행 3년제 전문학교 제도에 의한 1945년도 졸업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는 신제도에 의한 대학 본과 2학년에 시험에 의해 편입할 수 있다.
③ 1945년도 현행 전문학교 제2학년 수료예정자는 신제도에 의한 각종 대학 본과 제1학년에, 동 제1학년 수료예정자는 동 대학에 부속되는 예과 제2학년에 시험에 의해 편입할 수 있다.
④ 경성대학의 경우 1946년도의 각 학부 신입생으로부터 신제도의 대학령에 의한 수업연한을 적용하기로 한다.
⑤ 현행 각종 전문학교의 졸업 시기는 7월 초순까지로 한다.
⑥ 입학시험은 2기로 나누어 제1차 시험은 7월 1~4일에 대구농전 등 11개 교에서, 그리고 제2차 시험은 7월 10~13일에 수원농전 등 12개교에서 실시하며 합격자 발표는 시험 종료 4일 이내에 한다. 편입시험 날짜는 각 학교에서 정한다.
⑦ 시험 방법은 학술시험(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의 필수 4과목과 3과목 이내의 선택과목), 최종 학교 최고 2개 학년의 내신서, 구두시험 및 신체검사에 의한다.

이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946년 5월 20일에는 24개 전문학교가 1946년 9월부터 대학으로 승격될 계획이 발표되었다. 고등교육에 관한 임시 조치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1946년 6월 8일이었다. 4월에 발표된 1차 임시 조치의 보완 성격을 지닌 6.8 임시 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현행 국립 전문학교 중 신제도의 대학으로 승격함에 있어서 전문학교는 동 대학의 전문부로 개편함
 - 1946년도 신입생 모집은 전문부만, 혹은 최종 2개 학년의 중학교 고등과만을 하거나, 양자를 동시에 설치할 수 있음. 전문부 신입생은 1946년도에 한해 모집함, 신입생 모집의 대상은 현행 중등학교 4학년 졸업자 또는 1945년도 졸업예정자나 전문학교 입학 검정고시 합격자, 기타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 1945년도 전문학교 1학년 수료예정자는 동 대학에 부치하는 전문부 2학년에 진급함이 원칙임. 단 수료예정자로서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자는 특별 시험제도에 의한 대학 본과 제1학년 모집에 응모할 수 있음
 - 동 제2학년 수료예정자로서 전문부 졸업 희망자는 전문부 제3학년에 진급하고 대학 진학 희망자는 시험에 의하여 대학 본과 제1학년에 편입할 수 있음
 - 대학 본과 제1학년은 (1) 현행 전문학교 1945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로서 시험에 의해 편입한 자나 (2) 현행 전문학교 1945년 제1학년 수료예정자와 현 중학교 제4학년 졸업 또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로서 특별 시험제도에 합격한 자로서 충당함
 - 대학 본과 제2학년은 현행 전문학교 1945년도 제3학년 졸업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시험에 의하여 편입케 할 수 있음. 단 본과 제2학년의 설치 여부는 각자의 학교에 일임하기로 함
 - 1946년도 전문부 제1학년 신입학자는 동 전문부 제2학년을 경과한 후에 전문부 졸업희망자는 제3학년에 진급, 대학 진학 희망자는 대학 본과 제1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편입할 수 있음
 - 1946년도 대학에 부치되는 중등학교 고등과 제2학년 신입학자는 익년도에 제3학년을 경과한 후 대학 본과 제1학년에 진학하기로 함
 - 신대학령에 의한 학사 학위는 대학 본과 개년에 달하는 총 학점을 취득해야 수여할 수 있음 
② 현행 일반 국립 의학전문학교로서 신제도의 의과대학으로 승격함에 관하여는
 - 1946년 의과대학 입학 자격자는 현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자 또는 1945년도 졸업예정자
 - 1947년 동 대학 입학 자격자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급과의 1946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
 - 1948년도 동 대학 입학 자격자는 1947년도 제3학년 졸업예정자로서 충당함
 - 현행 국립 일반 의학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수료예정자는 신제도에 의한 의과대학 제2학년에 동 제2학년 수료예정자는 제3학년에 동 제3학년 수료예정자는 제4학년에 각각 시험에 의해 편입케 함 
③ 현행 경성대학에 관하여는
 - 현행 경성대학 예과는 존속케 하는 동시에 1946년도 신입학 자격자는 현행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또는 1945년도 졸업예정자,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시험 합격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
 - 동 예과의 제1학년 학과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급과 제2학년의 그것과 같음
 - 동 예과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로서 마지막임
 - 신제도에 의한 1946년도 경성대학 각 학부 제1학년 입학자격자는 
  • 현행 경성대학 예과 1946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 
  • 동 1945년도 제1학년 수료예정자로서 특별 시험에 합격한 자 
  • 현행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또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로서 특별 시험에 합격한 자 
  • 현행 각종 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또는 제2학년 수료예정자로서 특별 시험에 합격한 자
 -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각 학부의 1946년 제2, 3, 4학년은 현 경성대학 본과 제1, 2, 3학년생으로 충당
 - 상기 과도기적 현상은 1948년도까지, 즉 현 본과 1945년도 제1학년생이 졸업하는 때까지 계속함
 - 현행 경성대학의 의학부를 제외한 각 학부(법문, 이공) 현재 학생은 신제도의 제3학년만으로서 졸업할 수 있음
 -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학사의 학위는 신제도 대학 4개년은 물론 현 제도와 신제도의 통산에 의한 4개년에 해당한 전 학점을 수득한 자에 한하여 이를 수여함
④ 기타 사립 전문학교 중 신제도에 의해 대학으로 승격하는 학교는 이 임시 조치에 준거하여 실시하기를 요망함

조선교육심의회 제2차 전체회의(1945년 12월 5일)에서의 6-3-3-4학제의 채택, 2학기제의 도입에 따른 1945학년도 학사일정의 임시 조정(1946년 9월 제1학기 시작)에 대한 학무국통첩 (1946년 2월),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 원칙의 발표(1946년 5월)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고등교육에 관한 임시 조치가 미군정 초기의 과도기적 대학교육의 방향을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임시 조치 시기에 나타난 이 시기 고등교육정책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대학 본과 입학 자격이 매우 개방적이었다. 대학의 전문부로 개편되는 기존 전문학교 2학년 수료자는 물론 1학년 수료예정자도 특별 시험에 의해 대학 본과 1학년에 진학할 수 있게 하였고, 중등학교 4학년 졸업자나 1945학년도 졸업예정자도 특별 시험에 의해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서울대학의 경우에는 예과 2학년 수료자뿐만 아니라 예과 1학년 수료예정자도 특별 시험에 의해 역시 본과 1학년에 진화할 수 있도록 조처되었다. 이러한 입학 자격의 완화로 인해 1946년 7월에 해방 후 처음 실시된 대학입학시험에서 높은 경쟁률이 나타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전문학교 재학생들의 진로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다. 전문학교 재학생들에게 대학의 전문부를 3년 만에 졸업하는 길과 대학 본과 2학년에 편입하는 길, 둘 중에 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였으나 이것이 이후 학사호(학사학위)를 둘러싼 학내 갈등을 야기하였다. 셋째는 정책결정과정의 비민주성 및 졸속성을 들 수 있다. 군정청에서는 기존의 전문학교를 1946년 9월 신학기를 시작으로 4년제 대학으로 일괄 승격시키겠다는 발표를 한 지 불과 2개월 후에 승격 예정이던 관공립 및 사립 전문학교 9개교를 폐지하고 국립종합대학교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군정 후 반기 교육의 혼란을 가져왔다. 그 속성상 이민족에 의한 군정의 정책결정과정이 민주적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더라도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였던 상당수 한국인 교육자들의 무책임성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국대안의 추진과 반대운동

국대안의 배경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은 점령 초기에 미군정청 미국인 관리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고 이의 추진과정에서 악역은 한인 직원들이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교부에서는 당시 이 종합대학안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수 보충문제 등에 대해서는 당시 교수 : 학생 비율이 일본 식민지시대의 전통으로 인해 그렇게 나쁜 상태가 아님을 고려해서 1946년 9월에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졸업생들의 대규모 등록이 있을 때까지는 보류할 것 등을 제안하고 있었다. 잠정적으로 1946년 9월부터 종합대학안을 실행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합대학안은 1947년 초에 고려했던 미국 대학의 한국 내 설치 계획과 함께 미군정이 당시 한국 고등교육의 재편 문제에 매우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1946년 봄은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좌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정치적인 혼란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부문에 있어서도 많은 갈등이 표출되었으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혼란기였다. 고등교육 부문에 있어서의 가장 큰 갈등은 해방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대학자치위원회를 비롯한 교원단체 그리고 학생 단체와 학무국 사이의 마찰이었다. 고등교육기관의 자치위원회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교직원을 중심으로 주로 당시 교육 현실 여건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의 배제, 학생 생활고의 해결, 교수 처우 개선 등이 해결을 요하는 급선무였다. 이에 반해 군정청과 제도권 내 한국인 교육자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제도 정비에 힘을 쓰는 한편 교수 및 학생운동의 정치 운동화 경향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런 갈등상황 속에서 군정청은 1946년 3월 10일에 경무국장 명의로 무허가 학교 폐쇄 명령을 내렸다. 군정청 경무국에서는 “3월 4일 현재로 학무국의 허가 없이 운용되고 있는 학교를 적발하여 폐쇄한 후 교원과 학생의 명부 및 교과서를 몰수하여 경무국에 제출하라”는 명령을 각 시도에 내려보냈다. 이 명령은 1945년 9월 29일 공포된 공립학교의 재개 등을 규정한 법령 제6호의 제2항 “사립학교는 학무국의 허가가 있는 대로 재개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내려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법정전문학교(3월 25일)를 비롯한 많은 교육시설에 대한 강제 폐쇄가 단행되었다. 유억겸 문교부장도 언급하였듯이 교육시설이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수속 불비나 설비 부족” 등의 문제는 이차적이었고 무허가 학교 강제 폐쇄의 실제 이유는 이들이 주로 제도권에서 기대하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법정학교에 대한 미군정의 강제폐교조처는 많은 교육자 및 학생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시위, 성명서 발표, 동맹휴학 등으로 확대된 이들의 저항에 대해 군정청은 경찰력을 투입하여 억압함으로써 대학과 군정청과의 마찰은 심화되었다. 대학 자치위원회들이 연대하여 전문대학교수연합회를 조직하고 미군정 교육정책에 공동 대처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4월 17일부터였다. 이날 전문대학 교수 50여 명이 모여 학원에 대한 경찰간섭 배제, 학생생활 대책의 강구, 전문대학 맹휴사건에 대한 대책 마련 등을 추진하는 구심체로써 연합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연합회에서는 4월 21일에 무허가 학교 폐쇄령에 대한 반대 성명을 냈고 5월 9일에는 학생생활 대책을 발표하였고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6년 5월 23일에 있었던 서울대학 이공학부 도상록 교수에 대한 파면과 구금(6월 4일)조치는 학원의 자치를 둘러싼 갈등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학 자치위원회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도 교수는 당시 민전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진보적 성향의 교육자였다. 이런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교육 관리권과 대학 자치권 간의 충돌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육계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투쟁이었다. 고등교육기관의 통폐합 정책은 대학별 자치위원회 중심의 교육활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진보적 교육 세력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입안되었다. 미군정하에서 시도된 첫 번째 고등교육기관의 통합 계획은 1946년 4월에 시작된 서울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 전문학교와의 통합안이었다. 그러나 관련된 두 학교 모두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부산수산전문학교가 국립부산 종합대학에 통합된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부산수산전문학교 측의 강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국대안에 대한 풍문이 돌았고 공보부에서는 이에 대해 6월 19일 기자회견을 갖고 관련자료를 수집중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즉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포함한 관공립 전문학교는 대학 승격과 동시에 서울대학으로 편입되어 종합대학으로 구성된다는 풍설이 있다는 질문에 대해 공보부에서는 “학생 수용 확대, 그리고 예산 절감 등에 관해 자료를 수집 중이며 좋다고 판단되면 군정장관의 허락을 얻어서 실시할 수도 있다”는 발표를 하였다. 학무국의 미군 관리들이 1945년 말에 마련해 놓고 그동안 검토해 왔던 종합대학안에 대해 오천석 문교부 차장이 유억겸 문교부장 및 라카드 문교부장 고문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이 계획이 외부에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혼란 속에서 1945학년도 학사 일정이 형식적으로 끝나고 1946학년도 대학 입학시험이 고등교육 임시 조치에 따라 1946년 7월 1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홍수로 연기되고 7월 3일에 해방 후 최초의 서울대학 졸업식이 열렸다. 처음으로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된 것이 이때였으며 수혜자는 태평양 연합군사령관 맥아더였다. 해방 후 첫 대학 입학시험은 2차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7월 10~13일에 1차로 경성의학전문학교 등 11개교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인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과 신임 피텐저 문교부 고문은 국립종합대학 설립 계획을 발표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추진 배경과 관련해서 당시 학무국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국대안이 마치 민족적 과제와 교육 현실에 대한 사려 깊은 분석의 결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실제로 이 안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군들이 만들어 놓은 미국식 종합대학안을 가지고 당시 우리나라 고등교육계를 재편하려는 시도였었다.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고등교육에 관한 임시 조치(4월 26일과 6월 8일)나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 계획의 발표(5월) 등은 관공립 전문학교의 전면적인 통폐합을 고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취해질 수 있는 정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피텐저 문교부장이 서울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계획을 공식 발표한 것이 7월 5일인 점에 비추어 보면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주변의 모든 관공립 전문학교의 통폐합안이 확정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걷고 있던 당시의 고등교육기관들에 대한 효과적 통제 장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군정청으로서는 부산수산전문학교와 경성의학 전문학교의 국립대학 통합안에 대한 해당 학교들의 반발이 예상외로 강하게 나타나자 이런 단편적인 통폐합이 아닌 고등교육체제 전반적인 재조직을 주장해 오던 오천석의 견해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그 후 국대안 파동에서 국대안 지지자들이 반대자들에 의해 ‘오천석의 주구’라고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천석이 국대안의 최초 구상자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또한 미군정 정책의 대행자에 불과했었다. 국대안이 발표된 것은 해방 후 처음으로 개정된 학제가 시행되는 1946학년도 제1학기를 불과 2개월가량 남겨둔 시점이었다. 서울대학 이공학부에서 교사 반환 진정서를 제출하였고(7월 6일), 서울대학 의학부 학생회에서 피텐저 고문의 통합안에 대해 철회를 촉구하는 제2호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며(7월 7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직원회에서 통합 반대 성명서가 채택되었다(7월 10일), 전문대학교수연합회에서는 7월 11일에 러치 군정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육현안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① 대학 자치와 교수의 인격을 존중하고 교수의 지위와 연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② 교수와 학생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학생에게 생필품을 배급하고 교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③ 어느 관점에서 보든지 대학의 합동이나 감소는 옳지 못하다.
④ 군정정책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 대한 공명정대한 양해가 필요하다. 군정은 더 솔직하게 대학의 비판적 의견을 들어야 할 것이다.
⑤ 조선을 독립시키고 국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하자면 이공학 교육에 대한 보다 더한 강조가 필요한 것이다.
⑥ 일본적인 교육제도의 청산과 학원 경영에 대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⑦ 교육방면에 능력 있는 신진학자를 등용해야 한다.

이 같은 저항운동을 전후해서부터 제1차 대학 입시 마지막 날인 7월 13일 사이에 고등교육기관의 부분적 통폐합 계획은 유보되고 전면적 통폐합 계획에 대한 군정장관의 최후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종합대학계획을 급히 발표하게 만든 또 다른 외부적 요인으로는 북한에서의 국립종합대학 설립 움직임을 들 수 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부에서는 1946년 9월 개교를 목표로 평양에 종합대학을 설립할 구체적 대책을 연구·달성하고자 7월 15일 북조선 종합대학 창설 사무소를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두고 본격적 창립 업무에 착수하였다는 신문 보도가 7월 18일에 있었던 것을 보면 문교부에서 국대안을 심의 중일 때 이미 북한에서의 국립종합대학 설립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의 종합대학 창설 사무소 설치에 앞서 그 이틀 전에 국대안을 서둘러 발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7월 13일 문교부에서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의 입안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기존 고등교육기관은 식민지정책의 잔재요, 우리 민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므로 신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립서울대학을 설립하게 된 이유 또는 설립에 따른 구체적 이익으로는 다섯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둘째, 교수와 기타 교육전문 기술자를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 국가재정상으로 보아 합리적이다. 적은 예산으로 더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다. 
넷째, 학생이나 교직원이 받는 교화적 혜택이 클 것이다. 다양한 문화적 분위기를 향유하게 된다.
다섯째, 학자 양성에 적합하다.[4]

그러나 이상의 설립 이유는 통합 대상인 학교들이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고, 시설이나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는 비현실적인 구상이었다. 국대안의 입안 및 추진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오천석은 국대안의 설립 배경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였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국대안의 실제적 입안 이유를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로 오천석은 당시 전문학교의 배타적 운영 경향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해방 직후 각 학교별로 조직된 자치회가 재산 관리뿐만 아니라 운영권까지를 주장하는 먼로주의적 배타성을 드러낸 것이 이들 공교육기관의 재조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학생이나 교수 중심의 자치회와 학무국의 고등교육 감독권이 충돌을 한 것은 경성대학이나 숙명여전을 비롯한 일부 학교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대부분 문교 당국이 일방적으로 친일 경향의 인사를 총장이나 교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야기된 갈등이었다. 따라서 오천석의 견해는 교육적인 견지에서의 국대안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기보다는 교육 외적인 측면에서의 국대안의 추진 목적, 즉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의 제도화 필요성을 드러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대안 발표와 함께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억겸 문교부장이 “교수회의 자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한 발언도 국대안의 실제적 의도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미군정 측도 인정하였듯이 해방 직후 교육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자율적 재건 노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는 군정청의 체계적 정책 때문이 아니라 학교별 자치활동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46년 봄에 본격화된 신탁통치를 둘러싼 학교 사회의 이념적 양분화 경향, 좌익에 대한 학교 밖 사회에서의 배제정책 강화 등이 고등교육에 대한 획일적 통제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오천석은 경성대학과 기타 전문학교와의 교육상 정도의 차이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교육상 정도의 차이가 교육기관의 통폐합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등교육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실패를 군정 10개월 동안 경험했던 군정청, 그리고 교육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군정업무에 협조해 오던 당시 체제 내적인 교육계 인사들 사이의 집단이기주의적 타협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국대안이었다. 미군이 입안하고 군정체제에 흡수되어 있던 한국인 교육관리들이 실행에 옮겼던 이 국대안은 입안과정에서 이해 당사자인 한국인 교육자 및 학생들의 의견수렴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민주주의적 교육정책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국대안의 주요 내용

1946년 7월 13일에 발표된 국대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서울대학과 서울 및 주변의 9개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하여 하나의 국립종합대학을 창설한다. 
둘째, 신설되는 국립종합대학은 9개의 단과대학과 1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된다. 
셋째, 대학의 운영은 이사회에서 맡는다. 이사회는 잠정적으로 문교부장, 문교부차장, 고등교육국장(각 미국인 1명과 한국인 1명) 등 6명으로 구성하고 그 임기는 6년으로 하며(2명은 2년), 이사회 밑에 총장, 부총장, 사무국을 둔다.

이와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군정청은 1946년 8월 22일자 군정법령 제102호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폐지된 학교는 다음과 같다.

경성경제전문학교(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관립) 
경성의학전문학교(관립) 
경성광산전문학교(관립) 
경성사범학교(관립) 
경성여자사범학교(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관립) 
수원농림전문학교(관립) 
서울대학(관립) 
경성치과전문학교(사립) 

이상의 10개교 이외에 현제명이 해방 이후에 설립하였던 음악학교는 설립자와의 협의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의 예술대학에 흡수되었다. 법의 공포와 함께 국립서울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는 미군 대위이며 법학박사로서 국대안 전의 서울대학 총장을 지내고 있던 해리 앤스테드(Harry B. Ansted)가 임명되었다.

국대안을 둘러싼 갈등

국대안이 발표되자 이에 대한 태도를 가장 먼저 표명한 것은 역시 언론이었다. 언론 중 일부에서는 처음에 국대안을 획기적인 일로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하였으나 특히 이사회 구성의 관료적 성격으로 인해 비판적인 태도가 강해져 갔다. 조선인민보(7월 14일자), 독립신보(7월 16일자), 동아일보(7월 17일자) 등에서 국대안 반대를 표명하였다. 당시 교육 혹은 문화운동 단체로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대책위원회(7월 15일), 문화단체총연맹(7월 16일), 전문대학교수연합회(7월 18일), 과학자동맹(7월 23일), 조선교육자협회(7월 23일) 등에서 국대안 반대 및 철회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조선어학회장 이극로, 휘문중학 이모 교무주임, 경성광업전문학교 최윤식 교장 등의 반대 의견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당시가 방학 중이었으므로 학생들의 반대운동은 며칠이 경과된 7월 21일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대회를 시작으로 본격화되어 7월 22일에는 경성대학 의학부, 7월 23일에는 경성대학 전체 학생회, 7월 24일에는 이공학부 학생회, 7월 25일에는 서울대학 법문학부 학생회, 7월 26일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 학생회 등에서 국대안 반대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7월 27일에는 국립서울대학교 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7월 27일의 서울대학 이공학부 교수단 국대안 반대 성명에 이어 서울대학 교수, 조교수, 강사 80여 명의 국대안 반대 성명이 7월 29일 발표되었다. 이들의 국대안 반대의 표면적 이유는 대동 소이하였다. 예컨대 조선교육자협회에서 7월 23일에 발표한 국대안 반대 성명 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6명의 관선 이사회에 의한 관료적 교육행정의 강행은 대학의 자치권, 학생의 자치훈련 기회, 학원의 민주적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둘째, 기술 및 정경 계통 학교의 폐지는 기술교육이 절대 요청되는 현실에 반한다. 
셋째, 토론과정을 밟지 않고 기습적으로 강행하려는 태도는 비민주적이며 그 숨은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방학 중 강행하려는 것은 국대안의 탁상공론적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다섯째, 설비의 상호이용, 강의의 자유라는 것도 현 시설 수준이나 학교 간 거리 등에 비추어 비합리적이다. 현 시설에 대한 보완이나 교육여건의 개선 등이 더욱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7월 31일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도 국대안 문제가 긴급 안건으로 토의되어 이에 대한 반대가 결의되는 동시에 ‘국대안반대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대학 학부, 11개 전문학교, 초중등학교의 대표 및 교육계 원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교육자 대회가 끝난 후 대회 대표들은 8월 5일에 군정장관을 만나 국대안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같은 날 경성사범학교 교수회에서도 국대안 반대 건의서를 군정당국에 제출하였다. 8월 22일 법령이 발표되자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단 24명이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로의 취임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9월 5일에는 이공학부 교직원 38명이 총 사직하는 등 국대안을 둘러싼 학생, 교수, 그리고 사회단체들의 반대운동과 문교당국의 국대안 강행정책은 신학제의 도입 첫 학기인 1946년 제1학기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 9월 9~11일로 예정되었던 신입생 등록과 9월 12~13일로 예정되었던 재학생 등록은 학생들의 거부로 9월 18일까지로 연장되었으나 역시 등록은 저조하였다. 9월 18일의 단과대학별 개학식은 학생들의 대거 불참으로 의미가 없는 행사가 된 채 개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문교당국의 수차에 걸친 설득 노력도 국대안의 강행 속에서 효과를 나타낼 수 없었다. 결국 군정청에서는 1946년 12월 18일 서울대학 문리대, 법대, 상대에 대해 휴교 처분을, 그리고 전 학생에 대해 정학 처분을 내리는 등 강경정책을 지속하였다. 1947년 1월 28일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은 2월 3일까지 등교하지 않는 학생은 퇴학 혹은 제명 처분한다는 발표를 함으로써 오히려 국대안 반대투쟁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이후 등교거부사태가 중등학교 등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46년 2월 8일에 있은 우익학생단체인 전국학생연맹의 “맹휴 반대” 성명 발표, 2월 9일의 국립대학 건설학생회에서의 “맹휴 중지 및 합법 투쟁” 선언, 그리고 2월 13일에 이들 우익학생단체에 의해 주도된 맹휴진상 폭로대회 등은 학생운동을 좌우익 간의 이념투쟁으로 급격히 변질시키게 되었다. 2월 13일에 국립서울대학교의 미국인 교수 6명이 전원 사임을 발표함으로써 국립서울 대학의 정상화는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미국 대화의 한국 설립 계획

국대안으로 야기된 갈등에 대해 미국은 정치적인 좌우 대립의 교육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대안 반대 움직임을 미군정의 정치적 구도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보고 경찰력을 비롯한 억압적 국가기구를 동원하여 적극 대처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대응과 함께 미국은 국대안 문제에 대한 교육적 대안도 마련하고 있었다. 국대안 파동이 한창이던 1947년 2월 초에 미군정청에서는 한국에 미국 대학을 설립하여 1947년 9월부터 개교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한국의 고등교육에 관해 1946년 9월 20일부터 연구를 해 왔다고 밝히고 있는 한 미국인 전문가에 의해 47년 1월 27일에 작성된 미국 대학 설립계획은 수신인이 러치 군정장관과 피텐저 문교부장 고문으로 되어 있었다. 한국 고등교육의 역사적 배경, 주요 특성 등에 대해 분석을 한 후 결론적으로 국대안을 둘러 싼 한국 고등교육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미국 대학을 한국에 설립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정책화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미국의 태도를 보여 주는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미국인 교사와 학자의 지도하에 적합한 과학 및 기술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② 교육을 위해 미국식 건물들을 신축해야 하며 특히 미국인 교육자들이 생활할 시설이 포함되어야 한다.
③ 개설되는 교과과정은 한국이 가장 결여하고 있는 분야로 하되 미국의 많은 주립 대학들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④ 학생 수용 규모는 1,000명 정도가 적합할 것이며 남녀공학이어야 한다. 그리고 행정 요원으로는 남학생 처장, 여학생 처장, 상담 직원, 총무처 직원, 보건소 직원들이 있어야 한다. 
⑤ 강의는 영어로 행해져야 한다. 
⑥ 학부과정 이외에 대학원 과정이나 기타 특별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⑦ 이 대학은 반드시 미국 자금에 의해 지원되고 미국 교재나 시설들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이 세계 시장에 흡수되었을 때 미국 상품을 소비하는 진정한 시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미국 물건이나 교재를 사용하던 그들은 미국 상품을 원하게 된다. 
⑧ 이 대학의 성격과 규모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조사가 1차로 이루어져야 한다.
⑨ 대학 설립계획은 가능한 한 조기에 시작되어야 한다. 

당시 미군정이 당면하고 있던 국대안을 비롯한 한국 고등교육정책의 혼란을 극복할 유일한 대안이 바로 이 미국 대학의 한국 설치라는 것이 이 보고서 작성자의 결론이었다. 미군정에 의한 국립종합대학의 설립 계획이나 미국 대학의 한국 내 설립 움직임 등은 미국이 당시 한국의 고등교육 재편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 결코 한국에 대한 점령준비 부족이나 정보부족, 더구나 관심 부족에서 오는 임기 응변식의 교육정책이 한국의 교육민주화를 저해했던 일차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해방 직후 고등교육의 혼란은 미군정의 사전 준비 부족으로 인한 단순한 실수나 방임적 고등교육 정책의 부산물, 혹은 한국인 교육계 지도자들 간의 교육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미군정은 교육민주화를 위한 국내 운동세력들 사이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물리적 국가 억압기구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미국의 전후 구식민지 점령정책의 목표를 교육부문에서도 체계적으로 추진해 가고 있었다.

국대안 파동의 해결과정

1947년 2월 13일 군정장관 러치는 법령 제102호 중 이사 및 총장에 관한 조항을 개정하도록 군정청 각 부처장 회의에 문서로 지시하였으며 이어 열린 부처장회의 그리고 국립대학 학장들과의 연석회의에서 ‘원안고집주의’를 일부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공보부에서 16일 발표하였다. 요지는 현 이사회를 재편하여 한국인 총장 1명과 민간인 이사 9명으로 이사회를 구성 하며 선출 방법은 부처장 회의의 추천과 입법의원의 동의를 거쳐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같은 날 문교부도 군정청 문교부 수뇌와 국립대 총장 및 각 학장과의 연석회의 결과를 토대로 국대안 반대 맹휴의 4대 처리 방침을 발표하였다. 총장 및 이사진의 한국인 임명, 학원에 대한 경찰 불간섭 원칙, 학문연구의 자유 보장, 학생 요구사항에 대한 성의 있는 검토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맹휴사태는 계속되었고 이에 서울대학 교수진은 2월 17일 입법의원에 국대안 해결을 위한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건의안에서 서울대학 교수들은 이사회에 서울대학 교수 3~4인을 참여시킬 것, 대학에 총장 자문기구로 교수평의회를 둘 것, 각 단과대학의 교수회를 부활시킬 것, 교무처와 학생처 책임자는 교수로 할 것, 그리고 학술연구부를 둘 것 등을 요구하였다. 3월 3일에 열린 입법의원 본회의에서도 국대안 진상보고서가 문교후생위 원회 황보익(保經) 위원장에 의해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 역시 법령 제102호의 일부 개정과 교수의 생활보장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다. 1947년 3월 5~7일 사이에 법대 및 문리대 학생들이 태도를 바꾸어 일부 등교하였으나 미등록 학생이 8할 정도 되는 상황에서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에 안재홍 민정장관은 3월 13일에 국대안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3월 14일 오후 5시까지 복교원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등록 상황은 매우 저조하였다. 이후 우익학생들에 의한 등교 결의로 4월 11일 고려대학교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맹휴 대학에서 부분적으로 개강은 시작되었으나 국 립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등록 거부사태는 계속되었다. 법령 제102호가 개정되어 공포된 것은 5월 6일이었고 5월 16일 이사 9명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5월 26일에는 첫 이사회가 열려 최규동 씨를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사회에서는 1947년 6월 13일 제적학생의 전원 복직을 결정하고 8월 9일까지 복교원을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정상화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던 중 7월 11일 국립서울대학교 첫 졸업식을 전후해서는 서울대학 의학부 졸업생들과 전문부 졸업생(구 경성의학전문학교 계통) 간에 학사호(학위명칭)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국대안반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 에서는 7월 31일 4개의 요구 조건을 내거는 성명을 발표하고 복교 투쟁으로 운동 방향의 전환을 표시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첫째, 전제적 학생을 무조건 복교시킬 것, 둘째, 학생 의 자치권을 승인할 것, 셋째, 구 교수를 복직시킬 것, 넷째, 학원에 대한 경찰간섭 중지를 보장할 것 등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학생들은 8월 9일까지 복적 원을 제출하였고 상당수 학생들의 복적이 이루어졌다. 복적 불허자의 규모에 관해서는 국립서울대학 교무처에서는 복적 지원자 중 326명만이 불허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국대학생복교투쟁위원회’에서는 복교 불허자가 805명(4,358명 중 3,553명이 복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언론에 따라서는 복교 불허자를 1천여 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수백 명의 학생과 380여 명의 교수를 희생시키고 1947년 9월 8일에 국립서울대학교 1947학년도 제1학기 개강을 함으로써 국대안을 둘러싼 해방 직후 교육분야 최대의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국립대학의 총장은 미국인 앤스테드였다. 한국인 총장 후보로 입법의원에 추천된 이춘호 씨는 한 차례의 인준 거부 (1947년 9월 23일) 파동을 겪고 10월 10일에 인준이 되어 10월 25일 제2대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국대안 파동 이후 대학의 설립 혹은 승격 등으로 정부수립 당시 남한에는 42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 종합대학교가 4개교(서울, 고려, 연회, 이화여자), 단과대학이 23개교(국립 3, 공립 4, 사립 16), 초급대학이 4개교, 그리고 각종학교 및 특수 고등교육기관이 11개교가 있었다. 이들 기관의 교원 수는 1,265명, 그리고 재학생 수는 약 24,000명 정도였다. 이는 해방 당시의 21개교에 교원 257명, 그리고 학생 2,382명이나 1946년 7월 당시의 27개교, 교원 숫자 1,065명, 그리고 10,313명의 학생 숫자에 비해 비약적인 증가를 나타내 줌으로써 고등교육의 양적 팽창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역사적 의미

종전에 따른 민족 분단과 외세에 의한 군정의 실시는 민족교육의 정상적 발달을 다시 한번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가권력에 의한 인위적인 국립대학의 관철,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운동은 고등교육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이후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내적·외적 성격을 규정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중심의 고등교육체제 관철, 이에 따른 고등교육체제의 전반적인 자율성 약화, 고등교육의 획일화와 서열화, 교육개혁에 있어서의 교사 및 학생집단의 역할 축소 등 미군정의 유산은 이후 우리 교육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되었다.

날짜별 주요 사건

해방 3년 교육일지

출처/참고

  1. 『문교통계요람』, 1963
  2. 『홍성고 50년사』, 1991
  3. Department of Education, “Report on Education in South Korea”, 1946. 12. 3.
  4. 동아일보, 1946년 7월 14, 16,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