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3년 교육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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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945년 8월

  • 1945년 8월 29일 - 9월 4일 오키나와에서 한국군정 준비

주한미군정은 45년 9월 9일 인천상륙 이전에 오키나와에서 이미 군정계획이 시작되면서 출범한 것이다. 군정 계획단계에 교육담당 장교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무국(Bureau of Education)의 역사는 45년 8월 29일 - 9월 4일에서야 시작된다. 오키나와에서 이 기간 동안에 여러 장교들이 훈련을 받았고 이들이 후에 학무국에 참여하였다.

(1) 그중 한 장교가 학무국을 이끌기로 분명히 결정되었었고 그가 실제로 후에 학무국장에 임명되었다.
(2) 상륙전에 한국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관리들의 의견조사를 위해 보내질 질문지에 교육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3) 한국에 파견되는 군정요원 선발대에 교육담당 장교는 1명뿐이었다.
(4) 오키나와에서 인천으로 향하면서 교육담당 장교는 "JANIS on Korea"(Joint Army Navy Intelligence Study on Korea)를 읽고 있었고, 교육분야의 한국인 관리들에게 할 질문들을 구상하였으며, 한국인위원회를 구성하는 문제 등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1]


1945년 9월

  • 1945년 9월 2일 교육문제대책위원회 개최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각교 책임자 40여 명이 모임[2]

  • 1945년 9월 9일 미군정 요원들 인천 상륙[3]
  • 1945년 9월 10일 미군정 요원들 서울도착[4]
  • 1945년 9월 11일 군정청 교육담당 장교 중앙청에서 사무 시작

중앙청 동편 2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군정업무를 시작하였는데 그 사무실은 공보(Public Information) 분야를 담당하는 6명의 장교와 함께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첫날은 무엇을 할 지 몰라 주로 JANIS를 읽으며 낮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간부회의와 민정관(Civil Administrator)과의 대화가 있었다.[5]

  • 1945년 9월 12일 교육담당장교(락카드) 한국인 학무국장 면담

락카드는 한국인 학무국장을 면담하고 한국 학교제도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인들을 1주일간 계속 면담하였다. 찾아오는 모든 한국인들을 만났다. 한국교육의 당면 과제는 우선 학교를 개학하는 것과 다음으로 일본인들을 학무국과 각급 학교에서 내보내고 한국인들을 채용하는 문제였다.[6]

  • 1945년 9월 13일 초등교육자동맹 제2차 대회 개최

초등교육자대회 제2차 대회가 열려 지역적으로 협력할 것과 일반 유지들과의 긴밀한 협조로 인원획득에 주력키로 했다.[7]

  • 1945년 9월 14일 Bureau of Education의 책임자가 Director로 임명됨

일반명령 제2호에 의해 각 국(Bureau)의 책임자를 장(Director)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학무담당 장교가 학무국장이 되었다.[8]

  • 1945년 9월 15일 중등교육자대회 개최

45년 9월 15일 중등교육자대회가 개최되어 조선임시중등교육협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9]

  • 1945년 9월 16일 교육담당장교 초청 한국교육자회의 개최

유능한 한국인들의 조언을 듣기 위한 16인 한국인 교육자 회의가 45년 9월 16일 소집되었다. 교육담당장교가 이미 면담했던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교육담당장교의 요청으로 7개 분야를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교육위원회(Korean Committee on Education)가 조직되었다.[10][11]

- 초등교육(elementary) : 김성달
- 중등교육(secondary) : 현상윤
- 전문교육(professional) : 유억겸
- 교육전반(all levels) : 백낙준
- 여성교육(woman) : 김활란
- 고등교육(higher schools) : 김성수
- 일반교육(unspecified) : 최규동
  • 1945년 9월 17일 일반명령 제4호 발표

미군사령부 군정장관실은 45년 9월 17일 일반명령 제4호를 발표하여 교육에 관한 조치를 내렸다. 주한 미군 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군정장관 아놀드의 이름으로 발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공립학교의 개학
 한국의 공립 소학교는 45년 9월 24일 월요일에 개학함. 6살부터 12살까지의 모든 한국 어린이는 등록할 것. 기타 사립학교의 개학은 후일 발표할 것임.
제2조 : 사립학교
 사립학교는 학무국의 허가를 받아 개학할 수 있음.
제3조 : 인종과 종교
 한국의 학교에서는 인종 혹은 종교에 의한 차별을 하지 못함.
제4조 : 교수용어
 한국의 학교에서는 교수용어로 한국어를 사용할 것. 한국어로 된 교재가 활용될 수 있을 때까지는 외국어를 사용할 수도 있음.
제5조 : 교육과정
 한국의 이익에 반하는 과목은 교수하거나 실습하지 못함.
제6조 : 교사
 모든 한국의 초등학교 교사는 가까운 학무당국에 즉시 등록하고 45년 9월 24일 월요일에 수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기타 조선의 모든 교사들은 45년 9월 24일과 29일 사이에 가까운 학무당국에 등록할 것.
제7조 : 학교 건물
 모든 학교 건물로 미국 육군이 점유한 것을 제외하고 현재 교육 이외의 목적에 사용하는 모든 것은 즉시 인도, 청소, 정돈하여 학교로 사용할 수 있게 할 것.[12]
  • 1945년 9월 18일 한국교육위원회 제1차 회의 개최

한국교육위원회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13]

  • 1945년 9월 19일 중등학교 교사 성명서 발표하고 총사직 결의

9월 19일 전중등교원이 과거 교육의 죄를 사죄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전원이 총사직을 하였다.

 성   명
 역사의 거류(巨流)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해방의 궤도로 달리게 하였다. 온갖 질곡과 모순을 부숴버리고 새 이념 아래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제야 조선 민족은 해방되어 환희와 감격이 이 땅에 팽배(澎湃)하고 있다. 민족해방으로부터 인민 본위의 신흥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성을 가진 것은 교육임으로 교육자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는 바이다.
 그리하여 일본 정권이 붕괴된 이후 사회적 질서와 교육제도의 재편성 과정에 있어서 하루라도 속히 조선 교육계의 총의를 대표하여 통일적인 주체 기관이 자주적으로 결성되기를 요망하던 바 9월 15일 중등교육자대회가 개최되어 조선임시중등교육협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8월 15일 이전의 우리 교육계를 반성하여 볼 때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탄압과 착취아래 부득이 주구적인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양심적이며 산 실천과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교육자로써 마땅히 교육자적 책임을 져야 하겠다 하여 총회의 결의로 조선 중등학교 교육자의 총사직을 斷行하여서 사랑하는 조선 학도들과 사회에 사죄하기로 하였다.[14]
  • 1945년 9월 22일 김성수가 학무국장의 고문(Advisor)이 됨

김성수가 학무국장의 고문에 임명됨으로써 백남훈이 한국교육위원회의 새 위원이 되었다.[15]

  • 1945년 9월 22일 학무국 주간 업무보고

45년 9월 22일 학무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주간 업무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 한국교육위원회 - 8명의 저명한 한국인 교육자로 구성된 - 가 10시간의 회합을 가지고 학무국의 한국인 관리들을 추천하였고, 또한 교육제도 개편 계획을 추천하였다.
2. 김성수가 학무국의 한국인 임시 국장이 되었다.
3. 학무국의 일본인 관리 53명이 해임되었다.(전체는 58명)
4. 초등학교는 9월 24일, 중등학교는 10월 1일 개학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5. 미군은 학교로 사용되지 않을 건물만 쓰기로 하였다.[16]
  • 1945년 9월 24일 교육담당 장교를 학무국장으로 정식 임명함

일반명령 제2호(10월 27일에 임명사령 제3호로 대체됨)에 의해 락카드 대위가 학무국장에 정식 임명되었다.[17]

  • 1945년 9월 24일 초등학교 개학

일반명령 제4호에 의하여 전국의 초등학교가 일제히 개학하였다.[18]

  • 1945년 9월 24일 – 9월 30일 학무국에 군정 장교 보충됨

9월 11일부터 9월 24일까지는 Earl N. Lockard 대위 혼자 학무국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9월 24일부터 인력 보충이 시작되었다. 9월 30일까지 보통교육과 중등교육담당 William S. Biscoe 중위, 고등교육담당 부국장 Glemm S. Kieffer 대위, 사회사업 및 조사담당 Karl L. Rhoads 대위, 총무과 회계담당 Karl J. Bengston 중위, 사범교육담당 Lloyd E. Farley 대위 등이 부임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연말까지 학무국에 배속된 장교의 숫자는 32명 정도였다.[19]

  • 1945년 9월 29일 한국교육위원회 회의

한국교육위원회가 다시 회의를 가졌다. 중등학교, 사범학교, 기타 전문대학들의 교장 및 학장을 추천하였다. 학무국은 이 추천을 참고로 대부분의 남한 중등 이상 학교 교장을 선발하였다. 또한 중등학교 교과과정을 준비하였다.[20]


1945년 10월

  • 1945년 10월 1일 세브란스의대 시민강좌 개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문학, 과학, 음악, 역사, 작문, 기타 지역 문제 등에 관한 일련의 시민 강좌를 10월 1일부터 6일까지 갖기로 발표하였다.[21]

  • 1945년 10월 1일 중등학교 및 전문대학 개학 시작

중등학교 및 수원농림을 비롯한 전문대학이 10월 1일부터 개학을 시작하였다. 경기중(남), 경복중(남), 서울중학(남), 경기여중, 무학여중, 경성기술학교, 경기기술학교, 경성농업학교, 경기상업학교, 덕수상업학교 등 공립중학교들이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원농림학교도 10월 1일 개교하였다.[22][23]

  • 1945년 10월 5일 군정실시 이후 학무국의 업적 발표

군정청 학무국은 군정 실시 이후의 주요 업적은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교육위원회 구성
2. 학무국장 고문으로 김성수 씨 임명
3. 8명의 한국인을 고용
4. 일본인 직원 56명 중 50명 해임
5. 초등학교는 9월 26일에, 중등학교와 기타 고등교육 기관들은 10월 1일부터 개교
6. 교실 및 교과서 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 중임[24]
  • 1945년 10월 5일 중등교육계장 비스코 중위 회견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William S. Biscoe 중령이 45년 10월 5일 상오 11:00 그의 사무실에서 교육과 관련한 간단한 회견을 하였다. 비스코 중위는 필립스아카데미(Andover)를 졸업하고 Amherst College를 1933년에 마쳤다. 전공은 경제학과 영어였다. 그 후 미들베리(Middlebur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1940) 로체스터(Rochester) 대학에서 연구를 했었다. 그 후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있는 쉐디힐 학교(Shady Hill School)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하였다. 비스코 중위는 개학 직후에 초등학교들을 방문했고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소감을 피력하였다.

1. 교육에 사용되는 방법이 미국식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매우 형식적인 것처럼 보였다. 아동들은 완전히 조직적으로 통솔되었는데 이것은 한 교사가 60-90명의 아동들을 다루어야 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2. 교사들의 수준은 꽤 높아 보였고 아주 많은 남자 교사들이 초급 학년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이는 미국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3. 체벌은 없었으며 교사-학생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4. 가장 큰 문제는 교사 부족이었다. 미군이 진주할 당시 채용되어 있던 교사의 절반만이 현재 고용되어 있다.
5. 개략적인 조사에 의하면 현재 서울지역에는 초등학교 57교(16교는 일본인 학교), 21개의 사립학교(우수 사립교), 13개의 각종 학교(저급한 사립교)가 있다. 16개의 일본인 학교를 제외한 모든 공립학교는 현재 개교 중이다. 사립학교들은 개교를 위해 허가를 신청하였다.
6. 현재 지방학교의 상황을 평가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무국에 있는 한국인 관리들은 전화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7. 현재 중등학교들이 수업 중이지만 확실한 조사와 관찰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8. 시설들은 일반적으로 괜찮아 보이지만 a) 보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b) 시설관리제도가 적당하지 않고 c) 서울지역에는 위험하고 방해가 되는 공습대피시설을 제거하기 위한 지원이 요구된다.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38이남의 모든 교육을 관장하지만 이상의 모든 설명과 관찰은 서울 지역의 학교들에만 해당된다.[25]
  • 1945년 10월 6일 학무국 7개 과로 조직

학무국은 10월 6일에 다음 7개 과로 조직되었다.

1) Schools
2) Textbooks
3) Standards
4) Planning
5) Culture and Welfare
6) Meteology
7) Office of Business Management[26]
  • 1945년 10월 6일 학무국 주간 업무보고

학무국의 주간 업무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무국의 조직
 office of director
 office of business management
 division of schools
 division of textbooks
 division of standards
 division of planning
 division of meteology
 division of welfare and culture
2. 중등학교가 10월 1일에 개교하였다.
 학교를 이끌 교육자를 찾는데 어려움이 크다. 교사 부족도 심각하다. 서울에 있는 한 학교는 8명의 교사와 800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교육위원회는 "교사들이 임금이 낮은 정부 관리직을 원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교사 부족은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3. 기타 의대 개교 문제, 미군의 학교 건물 점령 사용, 상급학교로 승격을 원하는 학교들의 문제 등이 남아 있다.[27]
  • 1945년 10월 7일 학무국에 교사훈련 부서 생김

학무국에 교사 훈련 담당 부서(teacher training branch)가 만들어졌다. 이 부서는 3개의 사범 대학과 7개의 사범학교(모두 중등 수준)를 관리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별도의 부서 없이 Department of school inspectors에서 담당하였었다.[28]

  • 1945년 10월 8일 서울藥大 등록 시작

서울藥大는 10월 8일 10시부터 재학생 등록과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를 시작하였다. 10월 13일까지 계속된다. 일본에서 귀환하는 학생은 10월 20일까지 접수한다. 입학시험은 10월 15일 오전 9시에 실시된다.

  • 1945년 10월 10일 미군장교를 서울대학의 총장으로 임명함

한국교육위원회에서 백낙준을 서울대학 총장으로 추천하였으나 학생 및 교수 단체의 "친일파" 시비로 이를 취소하고 미군장교를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백낙준은 법문학부장에 임명되었다.[29]

  • 1945년 10월 12일 학무국 기구 개편

학무국의 기구를 1 Office 와 6 Departments로 바꾸었다. 즉 Office of Director 및에 다음의 6개 과를 두었다.[30]

Department of Schools
Department of Textbooks
Department of Arts and Religions
Department of Welfare
Department of Meteology
Department of Business Management
  • 1945년 10월 12일 허현 Teacher Training Branch의 Head가 됨.

군정청은 10월 12일 허현을 Teacher Training Branch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허현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톤대학에서 2년간 대학원 공부를 하였다.[31]

  • 1945년 10월 14일 - 24일 연합군사령부(SCAP) 군정과장 Crist 장군 한국 시찰

동경에 있는 연합군사령부(Supreme Commander of Allied Forces)의 군정담당(Gvernment Section) 과장 W. E. Crist 장군이 10월 14일부터 24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개인적 면담, 관찰, 그리고 기타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가운데는 군정 교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 (5) 연합군사령부가 미군정청 학무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a) 학교에서 사용할 창문 유리, 종이, 펜, 연필, 기타 문방구류를 제공할 것.
    (b) 미국으로부터 최근에 나온 교육에 관한 서적, 기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반 잡지와 서적을 제공할 것.
    (c) 초등, 중등학교와 대학을 위한 미국 교과서의 복사본을 제공할 것.
    (d) 한국에서 일할 미국인 교육자를 확보해 줄 것.
    (e) 일본 교육을 위한 연합군사령부의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
  (7) (b) 한국에서 일본을 가져간 고서, 유물, 미술품 등을 반환할 것.
    (d) 과학 및 예술 관계 서적의 한국어 번역본을 제공해 줄 것.
    (e) 미국과 유럽으로 가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해 줄 것.[32]
  • 1945년 10월 16일 군정청 법령 제15호 공포

미군정청은 법령 제15호를 발표하여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서울대학으로 변경하는 동시에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바꾸었다.[33]

  • 1945년 10월 18일 <해방일보> 學生들의 拒否 聲明- 城大 不正人事 決定으로
현재 조선이 가진 유일한 대학 경성대학은 삼천만 민중의 국보적 문화재이며 장차 조선 독립 국가의 최고 교육 정책의 표현 기관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조선의 운명을 雙肩에 짊어질 대정치가, 대학자, 대기술가의 양성 기관이란 것이 현재 경성대학에 부여된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거의 반세기에 직한 반동적 반역사적 야만적 정책에 의하여 국가의 모든 부분 모든 기관은 일본의 완전한 노예 기관으로서만 종속되어 왔던 것이다.
이 때 국가 창업 初草에 모든 부문 문화, 정치, 경제의 급속한 개혁과 건설은 무조건으로 요청되는 역사의 사명이다.
우리는 어떠한 곤란이 봉착되더라도 최후까지 극복하여 반동을 개혁하고 정체를 건설하여 우리 국가를 불원한 장래에 세계적 수준에까지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경성대학의 사명은 한층 더 중요한 것이다.
경성대학의 첫 출발은 국가 백년대계에 관계되는 첫 출발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첫 출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와 그의 제도를 소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백낙준 씨, 현상윤 씨 등 기타 조선말하는 일본 사람이 신성한 교육의 전당에 할거한다는 것은 단연코 삼천만 민중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세계 여론이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최고 학부는 이러한 일본적인 잔재의 지배하에는 결코 새 조선을 건설하는 데에는 자기 임무를 遂行할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용감한 반대 투쟁은 노동자, 농민을 위시하여 전 민중의 반대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고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노동자 농민제군!
시민제군!
학생제군!
경성대학을 반동 세력으로부터 옹호하자.
  • 1945년 10월 21일 Explanation of and Directive on Schools 발표

군정장관 아놀드는 학무통첩 제352호 "Explanation of and Directive on Schools"를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군정 문교정책의 일반 원칙
 38이남 한국에서의 학교에 관한 군정의 일반 정책은 변경을 하는 것이 현명할 때까지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2. 학무국 및 각 시도 학무과의 권한
 문관은 3등급으로 되어 있다. 1등급은 칙임(勅任, Chokunin), 2등급은 주임(奏任, Sonin)이라 하는데 이 둘을 합하여 고등관이라 칭하고 3등급은 판임(判任, Hannin)이다.
  (가) 학무국은 공립 초등학교와 모든 공사립 초등이상 신설 학교의 개학, 중등 이상의 모든 기존 학교의 재개, 중등 이상 학교의 교장과 교수의 임명, 중등학교의 주임급 교장과 교유의 임명, 소학교의 주임급 교장과 훈도의 임명(도 학무과의 추천에 의하여), 도 학무과의 과장과 상급 시학관의 임명, 시 학무과의 판임급 이상의 과장의 임명 등을 行함.
  (나) 도 학무과는 초등 정도의 신설 사립학교의 개학, 중등 정도의 기존 학교의 재개, 중등학교의 주임급 이하의 교유의 임명(교장의 추천에 의하여), 초등학교의 판임급 교장과 훈도의 임명(교장이 훈도를 추천할 수 있음), 도 학무과 시학과의 임명(상급 시학관은 제외), 시나 면 학무과 재근 시학과의 임명, 시나 면 학무과의 판임급 과장의 임명을 行함.
  (다) 시 학무과는 모든 기존 공사립학교의 개학, 공립 초등학교의 운영, 공립 초등학교 재산의 관리, 시에 속해있는 중등학교 재산의 관리를 行함.
3.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공립 중등학교와 상급학교(Higher Schools)를 재개할 것을 지시함.
4. 기존 사립학교는 당해 학무당국의 허가를 얻는대로 즉시 재개하되 학무국의 허가를 얻을 때까지는 이미 인정된 등급 이상의 상급학교로 개교치는 못함.
5. 모든 공립학교의 교육과정(Curriculum)은 학무국이 정함. (교과과정 일람표 첨부)
6. 공립 중등학교의 교육과정 또한 학무국이 정함. (교과과정 일람표 첨부)
7. 공립 직업학교의 교육과정은 공립 중학교의 과정을 원용할 것.
8. 공립 사범학교의 교육과정은 사범학교의 기존 교육과정을 참작하고 공립 중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원용할 것.
9. 각 학무과는 그 관할 구역 내의 학교에 관하여 다음 사항을 매월 15일과 말일 현재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차상급 학무당국에 제출할 것.
  (가) 개학한 초등학교의 공사립별 총수
  (나) 초등학교 재적 아동의 공사립별 총수
  (다) 초등학교 훈도(교장을 포함)의 공사립별 총수
  (라) 중등학교에 대하여 이상과 동일한 사항 및 상급학교에 관하여 이와 유사한 사항
  (마) 동맹 휴학 기타 불미한 사건을 포함한 학생 분위기 진술
  (바) 질문, 문제점, 그리고 제안 사항 등
10. 공립 상급학교는 그 자금을 국고로부터 받고 공립 중등학교는 도비와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하되 국고 보조금은 도를 경유하여 받고, 공립 초등학교는 시면세 및 도와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하되 국고 보조금은 도를 경유하여 받음.
11. 공립 초등학교의 수업료 기타 요금의 징수 및 예금하는 것은 그대로 계속하기를 지시함.
12. 공립 중등학교용 교과서는 현재 편찬 중이며 그중 수종은 인쇄 중이다. 한글 교과서의 준비는 장시일을 요하므로 그동안 각 학교는 어떤 교과는 교과서 없이, 또는 일본어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칠 것.
13. 학교문제를 해결하고 학교를 개선하는데 창의와 성의를 다할 것. 그리고 비판과 제안을 권장함.[34][35]
  • 1945년 10월 27일 학무국의 사회복지업무 보건후생국으로 이관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사회복지 업무가 새로 생긴 보건후생국(Bureau of Public Health and Welfare)로 이관되었다.[36]

  • 1945년 10월 30일 미군정 요원을 위한 특강 계획 발표

학무국은 미군정청에 근무하는 미국인 관리들을 위한 한 특강 개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서울대에 개설예정인 이 특강에서는 한국어 회화, 한글(한자쓰기), 한국의 역사화 문화, 한국의 미술과 음악, 한국지리 등이 강의될 예정이다. 강사 지원자도 모집하였다.[37]

  • 1945년 10월 30일 의학교육 관계자 회의

6개 의학교 교장, 한국의학협회 대표들, 의학교육조사위원회 대표, 학무국의 의학교육 담당장교, 보건후생국의 의료담당 장교 등이 참석한 의학교육 관계자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국의학교육협의회(Korean Council of Medical Education)의 회원 자격과 조직이 결정되었다.[38]

  • 1945년 10월 31일 The Council on Educational Aid From America 첫 회의

The Council on Educational Aid From America 첫 회의가 10월 31일 열렸다. 이 위원회는 19명의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국교육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미국인 학무국장이 임명하였다. 이들 이외에 미군정의 정치 고문과 군정 장관의 고문들도 비공식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위원회가 구성되기 여러 주 전부터 실제적으로 교육원조에 관한 업무는 시작되었었다. 이후 11월 22일까지 4회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이미 마련된 교육원조 요청계획을 심의하였다. 현재는 6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된 Korean Educational Commission에 계획이 넘어가 있다.[39]


1945년 11월

  • 1945년 11월 1일 미군은 45,0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중등학교 점령 중

45년 11월 1일 현재 미군은 1부제로 운영할 경우에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등학교 시설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다.[40]

  • 1945년 11월 1일 미군정청 연합군사령부에 교육자료 요청

미군정청 군정장관실에서는 동경에 있는 연합군사령부 Education Division에 교육관계 자료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요청한 자료는 한국 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개발에 필요한 책들이었다. 이 요청은 11월 15일 연합군사령부에 접수되었다. 연합군사령부는 이 요청은 CIE Section의 Joe Brown 씨에게 이첩하면서 국무성에 Radio Signal로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것을 제안하였다.[41]

  • 1945년 11월 3일 Korean Council of Medical Education 위원 임명

Korean Council of Medical Education의 위원들이 11월 3일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1월 15일에 위원장이 임명되었다.[42]

  • 1945년 11월 7일 <해방일보> 蘇聯邦의 敎育制度 소개
1. 소연방 교육제도의 특징
 소연방 교육제도에는 우리나라가 다른 어떠한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근본적인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일체의 교육 기관은 국가에서 시설하여 그것을 관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피교육자의 전 교육비를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데서만 교육을 국가의 목적에 의하여 완전히 통일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요, 전 국민이 모든 교육에 참가할 수 있고 누구나 재능에 따라서 충분히 학구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의 모든 생산 기관을 국가 자체가 소유 운영하고 거기서 생산되는 이익으로서 전부 국민의 경제 생활과 문화 생활의 향상에 쓸 수 있는 제도를 가진 국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부르즈아국가에서는 일반근로 대중으로부터 탈취한 세금과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 이익으로서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지배 계급의 자제들의 독점 기관으로서 노동자 착취의 보조 기관으로서 착취의 기술을 연마하고 반동적 설교를 주의하는 교육과 소연방의 교육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조아 국가에서의 소위 사설 교육 기관이라는 것은 한 개의 영리 기관으로 되어 있다. 이곳의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다.
  2) 교육의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화라는 것은 전 세계를 통하여 소연방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소연방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소연방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는 무산자는 무식자인 것이다. 피지배 계급은 무교육 계급인 것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교육에서 제외되고 있다. 그곳은 허다한 천재가 영원히 그의 발전의 길을 봉쇄 당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소연방은 국민의 누구나 다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천부의 재능에 따라서 마음껏 학구에 종사할 수 있고 어디까지 든지 학구를 계속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사회 제도 자체의 근본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줌도 못되는 지배 계급이 국민의 절대 다수를 지배하는 제도가 아니다. 절대 다수의 근로 계급이 극소수의 반동 계급을 타도 박멸하는 제도를 가진 국가에서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3) 소연방의 학도는 완전히 진리 탐구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종교와 신화와 관념론으로서 과학을 배신하는 것은 소수의 특권 계급이 근로 대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국가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강의한 것은 신을 모독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자본론과 유물사관을 연구하는 자는 악형에 타당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소연방의 학도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없을 뿐 아니라 무한정한 진리의 탐구가 그 나라의 이익에 되는 것이다. 국가는 어디 까지든지 그를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것이 소연방의 문화로 하여금 단 기간에 전 세계의 평균 문화 수준을 초월할 만큼 飛躍적으로 발전하게 한 소이인 것이다.
  4) 교육의 민족적 특수성을 지적할 수 있다. 소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민족공화국에는 민족적 특수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민족의 고유 문화의 향상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각 민족은 각각 자기 자신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소연방 전체의 문화 수준은 장족적으로 향상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할 때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빼앗아 가고 조선 민족 문화의 발전의 길을 완전히 봉쇄하고만 야만적 정책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소연방의 민족 정책과 제국주의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다.
2. 소연방 교육제도의 발전 과정
 소연방 교육의 발전 과정은 대개 전시 공산주의 시대, 신경제 정책 시대, 제일 5개년 계획 시대, 제이 5개년 계획시대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 전시 공산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국내 국외의 모든 반동세력으로부터 아직 어린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옹호하고 종래 뒤떨어진 국민 문화를 향상하고 노동자, 농민의 계몽과 미개민족의 급속한 문화 향상이란 것이 교육의 당면 임무이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임무를 遂行하기 위하여 교육의 중앙집권제 ○○○○교육의 해방 특히 ○○○○학장에 대한 우선권 ○○족의 교육상 자주권 확립 ○의 교육정책을 遂行한 것이다. 특히 노동학교 제도도 정하여 보통교육의 내용을 생산노동에 ○○하였다. 그리고 보통교육의 국민개 교육제도를 실시하여 교육비를 무료로 할 뿐만 아니라 피복, 학용품 등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년소 부랑자들을 수용 교육하여 무학자의 일소를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방하여 그의 계몽을 위하여 학령아의 교육을 발달하게 하고 남여를 공학케 하여 교육상 남여 평등책을 수립하였다. 국내 다수의 이민족의 문화 향상을 기하여 제민족은 교육상 자주권을 확립하여 각자 모국어에 의한 교육의 자유를 향유하였다.
  2) 신경제 정책 시대
   1921년 신경제 정책이 실시되면서 국내의 경제력은 점차 회복되어 급속한 경제적 건설을 위한 기술자 양성의 과제로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직업 교육 기관의 확장 충실에 노력하는 동시에 보통 교육 기관도 아동의 생활과 근로는 일층 더 긴밀한 연결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도 현저히 직업 교육화하여 농촌에는 연소농민학교 도시에는 공장7년 학교와 같은 명칭을 가진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기술자, 학자 등의 대다수는 혁명 전의 ○○으로서 대개 반동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술자들의 건설에 대한 의식적 파괴공작과 고의의 태업으로서 허다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청년 기술자의 양성을 절실히 요망하게 되고 기술자의 정치적 재교육이 필요하여 막스-레닌 주의적 ○○을 ○○화 하였다.
  3) 제일차 5개년 계획시대
   계획 경제의 시대에 들어서서는 신경제 정책시대보다 일층 더 기술자 양성이 긴급하였다. 특히 기술 직업 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보통 교육에도 기술적 전문교육을 받기 위한 기초 지식을 주입하기 위하여 보통 교육 제도의 개혁을 斷行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0년제의 보통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그 기한 내에 있어서 보통교육 기관은 직업교육과 같이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여 노동자, 농민 우선주의를 취하여 종합 기술 교육을 고조하고 학교에는 보통 정비된 작업장을 가지게 되고 또는 학교는 각종 기업공동 농장과 연락되어 있으면서 실제적 기술을 득○하게 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기본 임무 중 하나로 자본가적 요소 또는 계급 일반의 결정적 청산과 계급을 형성하게 하는 모든 원인의 완전한 절멸 계획에 따른 막스-레닌 주의적 정치 교육을 강조하여 국민 의식으로 하여금 유산자적 봉건적 의식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4) 제이차 5개년 계획 시대 이후
   노동자의 문화 기술적 수준을 기술자의 수준에까지 앙양하려는 역사적 과제의 실현과 기술자의 간부를 양성하는 시대라는 것이 한 개의 주요한 특징이다. 종합 기술 교육 제도를 채용하여 기초적 ○학○을 종합 할 수 있는 고급 간부를 대량으로 양성하면서 있다. 그리하여 기술의 일반적 수준을 고도로 인상하여 자연의 심오한 경지에 소연방의 기술자들은 부단히 육박하여 ○○하고 있고 세계 모든 ○○을 조명하는 탐조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소연방 교육제도의 현상
 소연방에서는 사회 의무교육과 고등교육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고저 한다. 소연방에는 유년 교육 시기부터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 기간으로 하고 있다. 국민 전체가 중등교육까지는 의무적으로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의무란 국민에게만 부여된 의무가 아니라 국가 자체가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아동들에게는 아무런 경제적 구속도 받지 않게 하여 전력을 다하여 학습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의무교육은 유년 교육, 초급교육, 초급중학, 중등교육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유년 교육기간을 지낸 아동은 만 8세 되는 때부터 소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에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초등학교 아동의 10월 혁명 전에 대한 증가수를 보면 1914년-1915년의 800만 명에 대하여 1938년-1939년에 2,128만 명으로 증가되어 約 2배 반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동 기간의 학교 증가 수는 10만 6백교에서 17만교로 증가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는 아마 그 기간의 모든 부문 건설의 급속한 템포로 보아 수 배의 증가가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 초급중등학교라는 것이 있는데 과거 조선의 중학교 정도에 유사한 3년제 학교이다. 그곳을 졸업한 학도는 중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것은 중학교와 실업학교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 조선의 전문학교에 유사한 정도의 학교로서 3년간에 졸업되는 것이다. 초급중학교와 중학교 생도수는 1914-1915에는 78만 5천인이던 것이 1918-1919에는 1,207만 6천인으로 격증되었다. 국민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출은 1913년 1억 8천 2백만 留로서 즉 생도 일인당 1留 36○이던 것이 1937년에 2백억留 즉 생도 일인에 대하여 116留이다. 그리고 교사 수를 본다면 초등 중등학교를 통하여 36만 명에서 제1차 5개년 계획기간에 63만인으로 증가되었고, 현재에는 대개 100만 명을 휠씬 돌파하였으리라고 상상된다. 중소학교의 학교부지 면적으로 본다면 사회주의 혁명 후 20년간의 1억여 평방미터가 증가되어 재정 러시아의 2백년 간에 증가된 것보다 다수의 학교를 건설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교육의 이러한 속도의 발전은 부르즈와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러한 飛躍적인 발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등교육에는 대학과 학사원이 있는데 우선 대학의 수로 보나 학생 수로 보아서 세계 어느 국가보다 많은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종류로 본다면 모든 학과를 종합한 국가대학-종합대학 외에 각과의 특수대학이 있고 그중 중공학과대학 경공학과대학 영양학과대학 등의 특색이 있다. 그리고 각 민족공화국에는 민족언어로 교수하는 민족대학이 있고, 동양민족을 위하여 다른 학과와 함께 동양 문제를 연구하게 하는 동양인민대학 ○이와 같은 의미의 북방인민대학 등이 있다. 연구실 기숙사 등 각종 시설의 완비와 학생에 대한 모든 생활필수품, 학용품, 연구자료 학자금 등을 충분히 공금하여 연구에 전심 전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대학에서 최우등생에게는 스탈린 상을 주어서 학구에 노력하게 하고 있다. 학사원은 대학자, 대○○가 등 국가의 모든 부문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이 학사원을 나오면 대학교수나 박사후보의 자격을 국가로부터 얻게 된다. 소연방에서 박사가 되려면 전문 부문에서 신발명과 발견이 있었야 하는 것이다. 학사원에는 58개의 전문적인 학술연구소와 20개의 각종 박물관과 다수의 전문위원회가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막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 국제 농업연구소, 코로킨 기념 세계문화 연구소, ○○스키 기념 중앙 항공역학 연구소 등이 있다. 그리고 박사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학사들로서 소연방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학술연구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하고 있다. 이외에 각종 직업학교 기술학교 공장도제학교 야간학교 단기속성학교 노동학교 등이 전 연방에 그물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고 사회교육 기관으로서 상설적 또는 임시적인 무수한 기관이 있다. 상설적 기관으로서 도서관의 민중화는 철저하다. 각 도시에 완비되 있는 것은 물론 농촌 방방 곡곡에 설치되어 있고, 공장 직장에 유류없이 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구락부 극장 영화관 등이 완비 되어 있다. 그 밖에 임시기관으로서 각종 강습회, 탐험가 연구회, 강연회 등이 무수하게 있게 되는 것이다.
4. 결언
 소연방의 교육제도에 관하여 최근의 상황 보고를 받지 못하여 자세한 것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나 최근 5-6년 간 전쟁 과정에서 교육 제도에도 다수 ○改가 있을 것은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飛躍적인 발전이 있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소연방에는 교육의 飛躍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연방의 교육제도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교육 관계 역시 다른 문화 관계와 같이 정치 관계, 경제 관계의 사회주의적 변혁이 없이는 현재 소연방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幸福스러운 교육제도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소연방의 교육은 가장 진보적이면 민주주의적이며 과학적이며 건설적이며 그 발전은 飛躍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문화의 최고봉을 점령할 것이고 세계 문화의 중심을 형성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인류가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찬란한 문화를 향락할 수 있는 교육제도의 전형을 우리는 소연방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945년 10월 31일 변봉[43]
  • 1945년 11월 15일 한국교육심의회(NCEP) 첫 회의가 열림

한국교육심의회(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 첫 회의가 11월 15일에 개최되었다. 위원 전원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위원회의 목적이 설명되었고, 각 분과위원회가 소개되었고, 각 분과위원회별로 소관 사항이 공고되었으며, 각 분과위원회별로 위원장을 선출하였다.[44]

  • 1945년 11월 15일 해방 후 첫 한글 교과서 "한글" 인쇄

11월 15일 한글학회의 최현배 씨가 쓴 교과서 "한글"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인쇄되었다.[45]

  • 1945년 11월 16일 학무국 조직개편-각 과에 한국인 담당자 임명

학무국의 조직이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다.

Office of the Director
Office of Business Management
Department of Schools
Department of Textbooks
Department of Arts and Religion
Department of Meteology

그리고 각 과에는 미국인 Deputy Director와 함께 일할 한국인 책임자를 두었다.[46]

  • 1945년 11월 19일 Dept. of Schools 담당장교가 각지방 학무국 방문시작

11월의 마지막 2주 동안 학무국의 학교교육 담당 장교는 남한의 각 도청 소재지를 방문하였다. 이를 통해 각 지방 문교 책임자들에게 학무국의 정책을 설명하고 각 지방교육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 방문의 결과로 46년 1월 7일과 8일 양일간 서울에서 각 지방 학무국의 한국인 및 미국인 관리들이 모이는 회의가 열렸다.[47]

  • 1945년 11월 20일 "한글첫걸음", "초등한글독본"이 군정장관에게 증정됨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나오게 된 한글 교과서 "한글첫걸음"과 "초등한글독본" 증정식이 중앙청 군정장관실에서 열렸다. 11월 20일 오후에 열린 이 간단한 기념식에서 한국의 어린이 대표 2명이 위 두 교과서를 받았다. "한글첫걸음"은 국민학교 3-6학년과 중학교 1, 2학년을 위한 것이고 "초등한글독본"은 국민학교 1-2학년용이다. 이 두 교과서는 모두 한글학회 회원들이 집필하였고 군정청 편수국의 감독하에 刊行되었다.[48]

  • 1945년 11월 20일 학무국 Dept. of Schools에 성인교육계가 신설됨

성인교육프로그램을 담당한 부서가 학무국 학교교육과에 신설되었다. 조직은 미군장교 1명, 한국인 계장 1명, 사무관 1명과 사무보조원 1명으로 되어 있었다.[49]

  • 1945년 11월 22일 KCEAFA 마지막(4차)회의 열림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에 관한 한국위원회 제4차 마지막 회의가 11월 22일 열렸다.[50]

  • 1945년 11월 28일 학무국의 Administrative Officer 지방 교육시찰 시작

학무국 Dept. of Schools의 administrative officer가 3주 일정의 지방 도청 소재지 교육 시찰을 시작하였다. 각 지방 학무담당 관리들과 만나서 지방 교육에 대한 정보 등을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시찰이었다. 이를 통해 학무국과 각 지방 학무과와의 관계가 개선되었다.[51]

  • 1945년 11월 30일 全國儒林大會서 成均館大學設立 決議

전국유림(儒林)들이 일치 단결하여 지난 十一월 三十일부터 六일 동안에 걸쳐 시내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고 남북조선 전국의 유림 천여 명의 참집하에 임시의장 김성규(金成圭) 씨 사회로 성대히 進行되었는데 성균관대학의 설치재단 완성 등의 중요안건을 결의하였다.[52]


1945년 12월

  • 1945년 12월 1일 미군정청 SCAP에 한국교육사절단 미국파견 허가요청

미군정청은 일본에 있는 연합군사령부에 Radio Signal TFYMG 406호로 한국인 6명으로 구성된 교육사절단의 미국 파견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 교육사절단은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 정부 및 민간 단체들과 협의할 계획으로 2개월간 위싱턴을 방문할 예정으로 있다. 이들의 파견 경비는 주한 미군정청이 제공한다. 이를 위해 G. Z. Williams를 사절단 인솔업무를 위해 발령을 내줄 것을 동시에 요청하였다. 기타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함께 요청하였다.

가. 10명의 미국 교육전문가 한국 파견
나. 58명의 한국인 학생 미국 유학(undergraduate)
다. 30명의 한국인 의사 미국 파견
라. 2명의 보이스카웃 지도자 미국 파견
마. 220명의 한국인 교육자 미국 견학
바. 15명의 미국 교사 한국 파견

주한 미군정청의 정치고문 랭던도 이 계획에 동의하였다. 이 요청문은 12월 4일 Farr소령에 의해 SCAP의 Government Section에 보고되었으며 Dyke 장군도 이 교육 프로그램에 동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53]

  • 1945년 12월 3일 학무국 “醫科大學 新設”계획 발표

해방 조선의 의학 교육을 확충하고저 조선의학교육평의회(朝鮮醫學評議會)는 수차례 걸처 위원회를 열고 협의 중이었는데 의과대학(醫科大學)을 새로 세울 신설안을 가결하였다. 이 안을 가지고 미군정 학무 당국은 신중히 검토하야 명춘 四월에는 동 예과(豫科)를 먼저 개설하도록 하리라 하며 남녀공학에 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이에 대하여 三일 학무국장 록카-드대위의 발표한 바에 의하면 동 위원회에서는 의과대학 예과 설립안에 대한 것 외에 의학 교과서의 통일 졸업생 연구기관의 설립 계획 의학교 입학에 대한 표준 급 자격도 협의 결정하였는데 위원회의 위원은 다음과 같다. 延禧專門學校長 兪億兼氏 保健厚生局長 李容卨博士 聖母病院外科科長 朴秉來博士 서울醫學專門學校長 ○○○博士 光州醫學專門學校長 崔○○博士 大邱醫學專門學校長 高○翰博士 서울大學醫學部長 尹日善博士 세부란스醫學專門學校長 崔棟博士 女子醫學專門學校長 鄭求忠博士[54]

  • 1945년 12월 5일 SCAP 한국교육사절단 미국파견 계획 워싱턴에 보냄

연합군사령부의 Government Section은 12월 1일 주한미군정청에서 보내온 한국교육사절단의 미국 파견 계획을 Radio Signal로 워싱턴에 보냈다.[55]

  • 1945년 12월 7일 음악인 회의 음악교육문제 협의

음악인들은 회의를 열고 음악교육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들은 Music Advisory Committee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25명의 위원을 임명하였다. 제1차 회의는 12월 18일 열리며 이 회의에서 위원회를 몇 개의 소위원회로 나누어 각 위원회별로 초등, 중등, 그리고 대학 교육과정을 입안하기로 하였다.[56]

  • 1945년 12월 5일 조선교육심의회 제2차회의 新敎育制度 決定

새 조선의 교육 방책으로 전반에 걸친 심의를 하여 민족 자유의 원리를 세우려는 조선교육심사위원회(朝鮮敎育審査委員會)(조선교육심의회를 잘못 표기한 것임=편집자)는 五일 하오 두시 군정청 제一회의실에서 제二차회를 열고 신교육제도에 대하여 학교 명칭 종류 진학계통 학령 수업연한 등을 결의하였다. 본회의는 九개 분과회에서 상정된 안건을 순차 결정하는 것인데 제二차회에는 제一분과회의 교육의 이념(理念) 제二분과회의 교육제도에 대한 두 안건을 상정하여 제一분과회는 안재홍(安在鴻) 주사대리로 김활란(金活蘭) 씨 제二분과의 유억겸(兪億兼)주사가 각 안건의 내용 설명이 있어 교육제도만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교육이념과 임시조치 방책은 오는 十三일 하오 두 시에 열리는 제三회 본회의에서 재심의 하기로 되었다.

中學部와 高等部로 分科- 大學까지엔 十六年 受學
새로운 교육제도를 보면 남녀공통의 안인데 국민학교를 여섯 살에 입학하기로 하여 六년 간, 중등교육 기관은 열두 살에 진학하여 중등부 三년 고등부 三년 도합 六년 간 十八세에 고등교육 기관으로 진학하여 四년(예과 二년 대학 二년) 수학으로 二十二세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전후 十六년을 교육받으며 이 이상은 대학원에서 二년 이상 연학할 수 있게 된다. 이왕의 교육제도로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수학하려면 十五년 專門學校는 十三년 정도로 소위 전력기여라는 명목 아래 이 기간의 수업도 근로 동원으로 허비하여 전혀 수업을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새 조선을 이룩하려면 적어도 十六년 간의 공부는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학교는 누구나 六년 간 공부하고 중등교육에 있어 전기 후기의 중등과 고등과를 나누어 중학 실업 사범교육(중등과를 마치고 진학할 수 있다)을 실시하고 고등교육 기관으로 단과 종합 사범의 세 종류로 분류한 이 제도는 진학상 매우 좋은 제도라 하겠다.[57]
  • 1945년 12월 13일 성인교육자문위원회 조직

6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된 성인교육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Adult Education)가 조직되었다.[58]

  • 1945년 12월 13일 <동아일보> 서북학생사건 대책협의회주최 全國學生大會 개최계획 발표
이번 三十八도 이북에서 발생한 신의주 학생 사건을 비롯하여 함흥학생 사건 등 서북학생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누구보다도 젊은 학도들의 관심이 여기에 모이게 되어 유학생동맹에서는 전국학생 대회를 소집하여 十六일 하오 一시부터 휘문소학교 강당에서 전국학생대회(全國學生大會)를 개최한다. 동 대회에는 전국 각 학교 대표를 비롯하여 시내 각 전문대학 남녀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참집하여 이번 서북학생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여 여론을 환기하는 동시에 그 대책을 강조하고 아울러 순국학생동맹을 결성할 터이다. 그리고 이번 서북학생 사건에 관계로 희생당한 학생의 추도회와 장의의 절차에 대하여 서로 협의하기로 되었다.
  • 1945년 12월 13일 <동아일보> 이리 南星中學 設立계획 보도
李潤桶女史 美談
전북 이리 화성농장주(華星農場主) 고 백인기(白寅基) 씨 미망인 이윤성 여사는 이번 그 부군의 유재를 영육기관이 바치기로 하였다. 즉 이리에는 우리 손으로 된 중학교육 기관이 별로 없음을 통탄하고 임실(任實) 완주군(完州郡)에 있는 시가 300만 원의 토지를 내어노아 재단을 만들어 이 기금으로 이리에 남성중학교를 창설하기로 하고 8일 장석호 이춘기 양 씨가 상경하여 인가 수속을 군정청에 제출하였다. 인가가 나오는 대로 중학은 새로 개설될 터인데 우선 임시로 남중정(南中町) 소화학원(昭和學園) 교사를 빌려 생도 백오십 명을 수용하여 수업 중에 있다.
  • 1945년 12월 13일 조선교육심의회 제3차회의 新敎育의 理念 결정

새로운 교육제도의 수립을 위하여 미군정 학무국으로부터 위촉된 10개 교육분과위원회에서는 앞서 제2회 교육심의회를 열고 교육제도만을 정하였는데 13일 하오 두 시 제3회 교육심의회 본회의가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리었다. 이번에는 교육의 근본 정신에 대하여 안재홍(安在鴻) 씨가 소학교 교수요목에 대하여 이극로(李克魯) 씨가 現行 제도에 대한 임시조치에 대하여 유억겸(兪億兼) 씨가 제1 제2분과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설명을 한 다음 동 五시까지 신중 토의 설명을 학무국에 건의하였는데 이 안은 미구에 학무국장 명의로 결정되어 실시에 옮길 것이다. 교육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사상에 맞는 민주국가의 공민 양성에 중점을 두는 바탕을 삼고 곧 현 제도서 신제도로 전이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며 한 학년도 두 학기로 나누기로 한 것이 새로운데 제의 교육의 근본 방침 수립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朝鮮敎育의 根本精神과 方針樹立.
弘益人間의 建國理念에 基하여 愛國精神이 透徹한 民主國家의 公民을 養成함을 敎育의 根本理念으로 함. 右理念貫徹을 위하여 左記 敎育方針을 樹立함.
 一. 민족독립자존의 기풍과 국제 협조의 정신이 具全한 국민의 품성을 도야함.
 二. 실천궁행과 근로정신을 강조하고 사회생활에 대한 各員의 충실한 책임감과 相互愛助의 공덕심을 발휘케하여 건전한 개성의 발달을 期함.
 三. 고유문화를 化昻揚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圖하여 인류문화에 공헌을 기함.
 四. 優生과 체육에 관한 지식과 理想을 學得케 하여 국민체육본위의 향상을 도하며 堅忽不拔의 氣魄을 함양함.
 五. 숭고한 예술의 감상창작을 고조하며 추후 원만한 인격을 양성함.[59]
  • 1945년 12월 13일 조선교육심의회 제3차회의 現行敎育制度의 臨時措置案 결정

구제도에서 신교육제도로 어떻게 전이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궁금한 일인데 이번에 심의된 안대로 된다면 국민학교 고등과 생도는 중학교로 수용하고 중등학교도 고등부 교육을 마추고 대학 예과로 전입학 할 수 있게 되는데 현재의 학년은 명년 8월까지 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現行制度에 對한 臨時措置案 
 一. 국민학교
  국민학교 현재의 고등과는 차를 폐지하고 고등과의 현재 아동은 신제도에 의한 남녀 각 중등학교에 편입함.
 二. 중등학교
  (가)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로서 졸업 후 상급학교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는 남녀 각 고등중학교 또는 실업고등중학교의 고등과 제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음.
  (나)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는 졸업 후 47년도에 한하여 각종 대학에 존치되는 2년제의 예과를 경유하여 대학에 진학 할 수 있음.
  (다)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는 졸업 후 신년도에 한하여 각종 대학에 존치되는 2년제의 전문부에 혹은 당분간 존치되는 현제도에 의한 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음.
  (라) 1945년도 현재의 남녀 각 중등학교 제 1학년생으로부터 제3학년생까지 신제도를 원용하기로 함.
 三. 전문학교
  (가) 현행 전문학교 제도는 명년 3월에 각 중등학교 4년을 졸업하고 들어간 학생이 그 학교를 마칠 때까지 존속하거나, 또는 신제도에 의한 각종 대학에 3년제 전문부로 개칭하여 둠. 현재 각 전문학교 재학생은 그 학교를 순차로 졸업한 후 신데 각종 대학에 진학케 함. 
 四. 대학제도 (중략)
 학년은 2학기로- 휴업은 夏冬 2기
  한 학년은 ○○○ 두학기로 하는데 제1학기는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제2학기는 3월부터 8월까지 인데 각 학기말의 한달 가량은 방학을 한다.
초등학교 방학 오는 15일부터
 시내 각 학교의 동기 휴가도 12월 하순을 기하여 일제히 개시할 터인데 시청 학무과에서는 시내 각 초등학교의 방학을 오는 15일부터 명년 1월 ○○일까지로 결정하였다 한다. 예년과 같이 연로부족으로 휴가를 연기하지는 않는다고 한다.[60]
  • 1945년 12월 15일 남한의 취학생 숫자 1,722,938명
  • 1945년 12월 15일 현재로 남한의 초등, 중등, 그리고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 1,722,938명이었다. 1939년에 한국 전체의 등록학생수(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모두 포함)는 998,445명이었고 1944년에는 1,555,336명이었다.[61]
  • 1945년 12월 15일 학무국 주간보고서

학무국에서 45.12.8 - 12.15 간의 주간업무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무국은 한국교육위원회의 자문에 따라 유억겸을 학무국장으로 군정장관에게 추천하였다.
2. 각도의 보고서를 종합해보면 학교교육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공립국민학교)
  - 개교 : 3,068교
  - 등록학생 : 1,546,919명
  - 교사 :20,724명
 (공립중학교)
  - 개교 : 205교
  - 등록학생 : 79,825명
  - 교사 :1,909명[62]
  • 1945년 12월 14일 <동아일보> 西北學生親和會 結成
학자송금 문제에도 큰 불편을 자아내고 있다. 이에 서북출신 학생들은 일부 원호단체에서 나오는 학자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만하며 수학하고자 14일 하오 3시 시내 종로 소학교에서 서북학생친화회를 결성하고 금후 갈바를 토의하였다. 동회는 앞으로 출판사업을 하고 음악회를 개최하여 학자를 얻기로 하며 동기휴가에는 서북각지에 강연을 파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선전계몽에 힘쓰기로 되었다.[63]
  • 1945년 12월 15일 <동아일보> 四月 新入生 募集 中止 보도
13일에 열린 제3회 교육심의회에서는 現行 교육제도의 임시조치안만을 결정하고 교육이념은 독립자족의 기풍을 양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되 신중을 다하기 위하여 오는 20일 제4차 본회의에서 재심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현 제도가 명년 8월까지 계속됨으로 4월의 신입생모집은 하지 않게 된다. 명년 9월이 학기초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학교에서든지 4월의 신입생 모집도 하지 않게 된다. 명년 9월이 학기초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학교에서든지 4월에는 모집하지 않고 현재 학년의 수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 1945년 12월 15일 <동아일보> 사설 “新敎育의 理念”게재
一.
 昨十三일 學務局 第三敎育審議會 本會議에서는 新敎育制度의 基本理念을 確立하고 新敎育 方針에 關한 案의 決定을 지였다는 것은 昨日 本紙에 報道한 바이다. 日本의 植民地 敎育에서 構成되었든 一切의 體裁를 破壞하고 새로운 理念에 依한 新敎育 樹立의 要請은 何必 敎育에만 局限된 바 아니로되 新國家 建設의 基本 要素가 人類 文化의 貢獻에 있음이 自由解放의 우리인 것으로 敎育制度의 變革처럼 緊急 重要한 問題는 없는 것이다. 學務當局이 弘益人間의 建國 理念에 맞는 民主國家의 公民養成에 重點을 두고 이에 關한 審議를 急速愼重히 하고 있음에 우리는 謝意를 表하는 바이다.
二.
 從來 日本이 실시한 식민지로서의 敎育 方針은 皇室歸依의 奴隸 敎育이었고 鑄型的 人間養成의 拘束 敎育이었다. 愚昧한 同化 政策은 우리의 傳統的 固有 文化를 抹殺하여 忠實한 皇民 養成을 目的으로 한 人形 模造의 압축 敎育이었든 것이다. 우리의 敎育은 建國 理念에 基하여 次代 國民의 知能 涵養과 人格 陶冶를 目的으로 하여 文化의 繼承과 發展을 期함에 있을지니 독립 국가로서의 건국 정신과 해방 人民으로서의 文化的 이념을 基本 理念으로 한 새 敎育 方針의 樹立은 우리 全 國民의 待望일 밖에 없다.
三.
 이제 (一)基建議案을 보면 민족적 독립자존의 기풍과 국제협조의 정신이 具全한 국민의 풍성을 도야하는 것. (二)실천궁행과 근로정신을 강조하고 사회생활에 대한 各員의 충실한 책임감과 相互愛助의 공덕심을 발휘케 하여 건전한 개성의 발달을 期함. (三)固有文化를 醇化昻揚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圖하여 인류문화에 공헌을 期함. (四) 優生과 체육에 관한 지식과 이상을 學得케 하여 국민체육본위의 이상을 圖하며 堅忽不拔의 氣魄을 함양함. (五)숭고한 예술의 감상창작을 高調하여 醇厚圓滿한 인격을 양성함이라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 건의안에 불과한 것으로 그 안의 확정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또 이것이 군정의 과도기적 교육 방침일 것인지라 완전한 독립 이후에는 독립적인 교육 방침이 다시 강구될 것이며 기대되므로 이것이 우리 교육에 관한 결정요강이 아닌 까닭에 다소의 수정도 있을 법하나 우선 이 안이 내포한 全一的 체계로서 건국조선의 교육 基幹은 명시되었다할 것이니 基 구체적 실시에 관심은 큰 바가 있다.
  • 1945년 12월 17일 <동아일보> 明春 學童 全部 收容 계획임을 보도
從來의  試驗關門 擊碎
 새해를 맞이하면 1월 중에는 시내 학령아동의 입학 지원서를 시청학무과에서 접수하고 2월말에는 입학고사를 실시하여 배우려고 나아가는 천진난만한 어린이 가슴을 애태워 적지않은 불안을 주든 초등교육은 이제야 해방 첫 새해를 맞이함으로써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지원 아동 전부를 수용하기로 되었다.
 시청 학무과에서는 벌써부터 새해의 학령 아동 수용에 맞추어 학급편성, 인력배치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은 종래의 41 조선인 국민학교 1,137학급과 13 일본인 국민학교(16교 중 3교는 당분간 사용불능) 300학급 도합 1,437학급에 적령아동 10만 명을 전부 다 수용하고자 2부제를 확장 실시하여 학령 아동을 희망자에 한하여는 아무런 입학고사가 없이 다만 등록만으로서 전부 수용하기로 되었다.
 따라서 종래와 같이 학령이 되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우울이 일소된다. 그런데 해방이전 소개하였던 3천아동과 9월말 등록으로써 판명된 미취학 아동 4천 7백 64명은 벌써 13의 전 일본인 국민학교와 및 시내 각 국민학교에 각각 안분 수용되어 새 조선의 초등교육은 명랑보를 그리고 있다.
  • 1945년 12월 18일 <동아일보> 月刊 "學生" 發刊 예정임을 보도
서울 시내 남녀 전문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문화사업사(學生文化事業社)에서는 이번에 월간잡지 "학생"을 발간하는 한편 학술강습회 개최 학생생활 조사를 하여 학생에게 이바지 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리고 위원은 연전(延專) 오수창(吳壽昌)외 8명이다.
  • 1945년 12월 18일 <동아일보> 사설 “學童 就學 問題”게재
一.
 過去36년간 日本의 虐政을 回顧할 때 우리의 痛憤은 가지가지 列擧할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의 가슴에 사모친 悲憤으로 學齡兒童의 就學問題를 들 수가 있다. 日本 虐政의 敎育 行政에는 一便 皇民化 敎育의 基本的 要請이 朝鮮人 學歷의 絶對的 强化가 必要하였음에도 不拘하고 다른 한편 朝鮮人의 文化水準 向上을 抑壓하였든 苦惱를 內包한 自家矛盾의 文敎 政策이었든 것이다. 이러한 苦惱的 文敎 行政이었든 까닭에 文敎 施設의 希嗇을 免치 못하게 되었든 것이다. 每年 入學期를 앞두고 배우려는 어린이의 가슴을 초조히 하였던 것은 좀처럼 記憶에서 잊어질 일이 아니다. 
二.
 학령아동의 입학식이 머지 않아 迫頭하였다 하였다. 倭仇되 이제 물러가 버렸고 따라서 倭童의 校舍도 基 全部를 이용할 수 있는 형편인지라 그것의 이용으로 학령아동의 전부를 수용할 수 있을 수는 없다고 하더래도 空間의 塞은 일로서 緩和될 것이 豫想되던 바이어니와 시청 학무과에서는 벌써부터 학급편성, 인원배치 등 萬端의 준비를 갖추고 전학령 아동을 수용하도록 二部制를 확장 실시하여 天眞爛漫한 어린 가슴의 불안을 一掃케 하여 세계의 유래없을 격렬한 취학 경쟁도 없게 되었으니 해방가 가져오는 歡喜는 우선 문교에서부터 찾을 수 있게 되었다. 
三.
 냉정히 성찰하여 우리의 문화적 수준은 세계 문명 諸國의 比肩할 바가 못됨은 유감이나마 사실인 것이다. 군정청 학무과에서는 교육체제의 전면적 개혁으로 그 審議를 급속히 하고 있음과 민간유지들의 최고학부 설립 등, 교육방면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도 우리의 문화수준 향상의 긴급성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려니와 우리는 이와 동시에 전국민의 균형적 문화향상의 필요로서 의무교육의 조속 실시가 요망되는 것이니 서울시의 학령 아동 문제의 해결과 아울러 지방학령아동의 취학 문제에 관해서도 조속 成案됨이 있기를 希望하여 마지 않는다.
  • 1945년 12월 19일 사공환이 Tearcher Training Branch의 Head에 임명됨

사공환이 교사양성과장에 임명되었다. 사공환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동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64]

  • 1945년 12월 19일 유억겸이 학무국의 한국인 Director가 됨
  • 1945년 12월 18일자 인사명령 제54호에 의해 유억겸이 12월 19일부로 학무국의 한국인 국장으로 임명되었다.[65]
  • 1945년 12월 19일 학무국 조직 개편: 2 Office, 9 Department

한국인 학무국장의 임명에 따라 학무국 조직이 개편되었다.

Office of Assistant Director for Liaison
Office of Assistant Director for Administration
Department of Textbooks
    "      of Elementary schools
    "      of Secondary Schools
    "      of Teacher Training Schools
    "      of Higher Schools
    "      of Special Training
    "      of Research and Planning
    "      of Arts and Religion
    "      of Meteology[66]
  • 1945년 12월 22일 초등교원양성소 교원단기 교육실시

초등교원양성소(Institute for elementary school teachers)가 서울에서 45년 12월 22부터 46년 1월 19일까지 4주간 열렸다.

  • 1945년 12월 25일 조선교육심의회 제4차회의 敎育理念을 再修正

교육 문제 전반에 걸친 조선교육심사위원회의(조선교육심의회=편집자) 제4차 본회의는 20일 하오 두시부터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각 분과위원이 모인 가운데 전번 회의에 이어 교육이념 문제를 토의결정하였다. 심의된 교육이념은 전번의 안재홍 씨 제안의 안을 약간 수정하여 弘益人間의 建國理想을 바탕으로 한 民主國家의 公民養成을 主 案으로 한 것인데 決定案의 內容은 다음과 같다.

조선교육의 근본이념과 방침 수립의 件
 弘益人間의 建國理念에 期하야 人格이 完全하고 愛國精神에 透徹한 民主國家의 公民 養成을 조선교육의 근본이념으로 함. 右 이념 관철을 위하야 左記 교육 방침을 수립함.
  1. 民族的 獨立自尊의 氣風과 國際的 友好協力의 精神이 具全한 국민의 品性을 陶冶함.
  2. 實踐躬行과 勤勞力作의 정신을 강조하고 충실한 책임감과 相互愛助의 공덕심을 발휘케 함.
  3. 固有文化를 醇化昻揚하고 科學技術의 獨自的 創意로서 人類文化에 貢獻케 함.
  4. 國民體位의 向上을 圖하야 堅人不拔의 氣魄을 涵養케 함.
  5. 崇高한 藝術의 感想創作을 高調하여 醇厚圓滿한 人格을 養成함.[67]
  • 1945년 12월 25일 <동아일보> 서울시 小學敎員 再敎育계획 보도
시내 소학교 교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서울시청에서는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시내 南山국민학교 강당에서 단기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강습과목은 음악 도화 수예 체조 아동심리 수신 국어 역사 지리 수학 과학 등인데 이번 강습은 우선 새로히 채용된 8백 명 전원에 한정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시일과 기한은 추후 발표한다.
  • 1945년 12월 26일 金九主席 전국학교교원 강습회에서 강연

동기방학을 이용하여 시내 수송국민학교에서 개최 중인 전국학교교원 강습회(全國學校敎員講習會)는 수강자 4백 명이 참집한 가운데에 26일에는 제6일째의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이날은 특히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을 마지하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 즉 김주석은 이날 아침 엄항섭(嚴恒燮) 선전부장을 대동하고 유(兪) 학무국장, 오(吳) 학무과장의 안내로 도착하여 잠시 교장실에서 휴게한 다음 오전 11시 반경 김주석은 강습원들을 앞에 놓고 일장의 훈시의 말을 하시였다. 뒤이어 또한 엄선전부장의 특별강연이 있은 후 주석은 다시 새 조선의 교육이념이 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네 글자를 휘호하시여 교육자들의 나아갈 길은 명시하여주셨고 엄선전부장(嚴宣傳部長) 또한 우리 조선은 우리힘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자력갱생(自力更生)이란 글을 남기고 동 오후 12시 반경 숙소로 귀환하였는데 이날 김 주석의 훈시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여러분 나의 소감의 一부를 풀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15년전 나는 그 때 교육사업에 관계하였습니다.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으므로 교육으로 장래를 흥하게 하여야 되겠다고 느끼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교육 방침은 왜놈에 대한 역선전이었습니다. 내가 37세 때 15년징역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왜놈의 행위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요. 그 때 상황을 말할 수는 없지마는 한 방에 三十여 명을 수용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와사(瓦斯) 중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고 엄동에 귀가 떨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자포자기가 되었을 때 민비(閔妃)가 죽고 또 누가 죽고하여 왜칭(倭稱) 은전(恩典)이라 하여 七년으로 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세상밖에 나가면 무엇을 할까하는 문제가 생기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첫째 왜놈에게 낸 호적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고치고 별호(別號)를 백범(白凡)이라 하였습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김백범(金白凡)이라면 압니다. 어쨋든 세상에 나와서는 오직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려고 결심하였든 것입니다. 여러 선생님들은 이 강습을 마치고 각기 학교로 돌아가면은 공부가르칠 때 정신상으로나 무엇으로나 아동들 마음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게 해 주십시요. 나는 어느덧 七十이 다되었습니다. 완전한 조선을 본다면 어느 때에 죽더라도 좋습니다. 나의 희망은 오직 어린이에게 달려있으니 아동 훈육에 전심전력하여 주기를 한 번 더 부탁하여 두는 바입니다.[68]
  • 1945년 12월 29일 한국기술교육감독위원회 설립

한국기술교육감독위원회(Korean Technical Education Supervisory Board)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미국에서 장학금으로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인을 감독하고 한국에서 비학문분야의 훈련을 감독하는데 있다.[69]

  • 1945년 12월 31일 학무국 주간 활동보고(45.12.23-12.29)

학무국에서는 민정장관실로 주간 업무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부서별 주요업무 보고 형식으로 된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Office of Director
 - 미군 Deputy Director와 Director는 한국인 학무국장 및 부국장과 더불어 학무국내의 여러 부서에 자격있는 한국인들이 필요하다는 것 등에 관해 토론했다.
Dept. of Textbooks
 - 교사들에게 교과서 무상배포(지역별로, 한글 교재)
 - 각종 소위원회 개최(한글, 과학, 교과서 소위원회)
 - 초등한글교과서 제2권과 제3권은 45년 12월 26일에 인쇄에 넘겨졌다.
Dept. of Elementary Schools
 - 4차 초등교육위원회 회의가 45. 12. 26일에 개최되었다.
Dept. of Secondary Schools
 - 지방 중등학교의 배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완성하였다.
Dept. of Teacher Training Schools
 - 3분과 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Normal School 위원회가 열렸다.
Dept. of Higher Schools
 - 법대 임시 장소를 조사하였다. 이전의 신학대학빌딩(죽천정 3번지로 임시 선택)
 - 법대 신입생 입학시험이 있었다.(200명 정원에 1,500명이 지원하였다.)
Dept. of Special Training
 - 국가 성인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고문맹율을 해소하기 위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 45. 12. 27에 성인교육자문위원회가 개최되어 위 계획을 승인하였다.
 - 현재 개교 중인 농업학교는 다음과 같다.
   남자 중등 : 33교
   여자 중등 : 3교
   남자 보습 : 38교
   여자 보습 : 1교
       계    : 75교
 - 농업자문위원회(Agicultural Advisory Committee)가 수원에서 12월 22일 개최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농민 단기 교육에 관한 계획을 심의하였다.
Dept. of Research Planning
 - National Planning Committees의 소위원회가 열렸다. : 학제 1회, 敎育行政 1회, 초등교육 2회, 중등교육 2회, 직업교육 2회, 교사교육 1회, 고등교육 1회, 교재 1회.[70]
  • 1945년 12월 31일 한국교육사절단 6명 미국파견요청이 승인됨

한국교육사절단 6명의 미국 파견을 승인하는 Radio Signal이 SCAP에 접수되었다. 46년 1월 15일경 출발예정이다. Commandor G. Z. Williams(USNR)가 이 위원단에 참여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국무성은 이 위원단의 미국방문과 교육원조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다. 국무성은 군정종료 이후의 갈등과 혼돈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미군정이 어떻게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요구하였다. 연합군사령부의 Government Section의 한국 Division의 Cahill 대위가 Farr 소령을 46년 1월 2일에 방문하였다. 주한미군정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데 동의하였다.[71]


1946년

1946년 1월

  • 1946년 1월 2일 - 3일 專門中等 十九校 學生 反託 會合

2일과 3일 이틀 동안에 걸처 시내 한청빌딩 2층에서 시내 전문 중등 19교 재학생들이 집합하여 탁치반대 학생 통일문제를 내걸고 앞으로 걸어나갈 행동 方針을 결정하였다.[72]

  • 1946년 1월 3일 敎育審議會總會가 延期됨

3일 열 예정이었든 조선교육심의회총회(朝鮮敎育審議會總會)는 10일 하오 2시로 연기되었다.[73]

  • 1946년 1월 3일 全國敎育者大會 準備委員會를 創立

지난 1월 3일 서울안에 있는 교육자 7, 8백여 명이 모여 시내 안국정 豊文高女에서 전국교육자대회준비회를 개최하고 준비위원을 선정하였는데 각 도 준비위원은 2명씩 하기로 하여 그 간 준비위원들이 결정한 바에 의하면 2월 10일 준비위원총회를 서울대학 강당에서 열기로 정하였는데 중앙준비위원의 부서와 씨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中央準備委員 部署
 ▲ 委員長 白南雲(大學)
 ▲ 總務部 金晟鎭(大) 尹日善(大) 陳承錄(普專) 安東赫(工專) 外 七名
 ▲ 連絡部 李泰圭(大) 愼驥範(師範) 崔允植(鑛專) 徐明學(梨花) 外 七名
 ▲ 企劃部 都相錄(大) 崔宗煥(大豫) 白麟濟(京醫專) 外五名[74]
  • 1946년 1월 6일 <동아일보> 音樂 專門校 二月一日부터 開校예정임을 보도

조선의 음악학교(音樂學校)를 창설코자 준비 중이든 현제명(玄濟明) 씨는 12월 말일 학무국의 허가를 얻어 2월 1일부터 개교하게 되었다. 동교는 전문학교령에 의한 것인데 남녀공학으로 하되 위선 본과(本科)와 사범과(師範科)를 두고 성악부, 기악부, 작고부를 둔다. 교장은 현제명 씨이고 교사는 시내 남산정 3정목 28 남산국민학교 구교사인데 입학시험은 1월 하순경에 있게되며 교수진용은 다음과 같다.

▲校長 玄濟明 ▲敎務主任 金聖泰 ▲敎授 桂貞植 文學準 金天愛 李仁範 金元호 金生麗 李在聖 李春秀 李興列[75]
  • 1946년 1월 7일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계획이 SCAP에 접수됨

미군정 학무국에서 작성한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 계획"이 연합군사령부에 접수되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개설
 19명의 한국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에 관한 한국위원회"의 협조하에 군정청 학무국에 의해 이 계획이 승인되었다. 미국의 민간단체 및 정부 기관들이 한국 교육체제의 개편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미국적인 삶과 민주주의의 이상을 고취시키고 양국간의 긴밀한 상호 이해를 가져오는데 있어서 물질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런 목적을 성취할 지금의 기회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2. 프로그램
 a. 한국인 교사 100명을 미국에 3-9개월간 파견한다. 한팀에 30-40명씩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파견한다.(한국인 교사들이 정신적으로 새로워지고 민주교육의 원리와 실제를 이해하고 돌아 오기를 기대한다.
 b. 각 분야 미국인 교육전문가가 최소 1년 단위로 한국을 방문 하여 교육개혁에 대해 자문을 한다.
  (1) 교육심리학 및 교육철학
  (2) 學校行政
  (3) 교과서 집필 및 출판
  (4) 체육
  (5) 유치원 및 초등교육
  (6) 중등교육
  (7) 초등등교원 양성
  (8) 시청각 교육
  (9) 도서관학
  (10) 특별활동
 c. 7명의 미국인으로된 한국교육조사단을 9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교육에 관한 조사 보고 및 의견서를 작성하여 한국정부 및 국무성에 제출하도록 한다. 위원단은 국무성이 미국내 특정 대학 교육학부의 협조하에 선발하며 이들은 국무성의 피고용인 자격을 가지고 주한미군사령과 정치보좌관실에 배속되던지 아니면 미군정청에 배속되게 한다. 군정청 학무국과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단지 협조만 받는다.
 d. 한국인을 미국의 학부 혹은 대학원에 유학시킨다.
  (1) 중등교육 혹은 고등교육을 마친 자로써 아래 분야를 전공할 사람 (귀국 후 16개 사범학교에서 강의할 사람)
   -초등, 중등교육 : 16-32명
   -교육철학, 교육심리학 : 16명
   -체육, 특별활동 : 16-32명
   -실업교육 : 산업미술 32명, 상업 16명, 농업 16명
  (2) 중등교육 혹은 고등교육을 마친 자로써 아래 분야를 전공할 사람(귀국 후 일반 대학에서 강의할 사람)
   -인문학 : 30명
   -사회과학 : 40명
   -자연과학 : 40명
  (3) 15명의 보이스카웃지도자
 e. 한국의 사범학교에서 최소한 1년동안 가르칠 미국인 교사를 초빙한다.
  (1) 영어 : 32명 
  (2) 체육 :16명 
  (3) 수학 :16명 
  (4) 물리학 :16명 
  (5) 화학 :16명 
  (6) 음악 :8명
 f. 도서 및 실험장비 지원
3. 이 원조 계획의 실시는 매우 시급하다. 한국의 현 상황이 갖고 있는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학무국 한국인국장 유억겸
           학무국 미군 국장 Earl N. Lockard[76]
  • 1946년 1월 7일 - 9일 지방 학무과장 회의가 열림

각 지방의 한국인 및 미군 학무과장이 참석하는 회의가 46년 1월 7일에서 9일까지 3일간 서울에서 열렸다.[77]

  • 1946년 1월 7일 <동아일보> 中等敎員 講習會 開催 계획 보도
38이남 중등학교 교원들을 재교육 시키고자 학무국과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9일부터 18일까지 10일간 해방 후 처음인 중등교원 강습회를 정동 京畿高女 교사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 강습과목은 국어, 국사, 공민 3과목인데 각과 담당 강사는 다음과 같다.
 ▲國語科 崔鉉培, 李克魯, 金允經, 張志暎 ▲國史科 黃義敦, 申석호 ▲公民科 安浩相, 金豆憲, 兪鎭午, 崔載喜
  • 1946년 1월 7일 <동아일보> 북조선 교육실태 보도
공장으로 또는 왜병의 병영으로 여지없이 짓밟혔든 우리의 학원은 해방의 서광을 받아 38이북지방에서도 새로운 진발을 하였다. 38선을 경계로 제각기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인데 38이남에서 미국식으로 졸업기를 8월로 변경하는가하면 저곳에서는 소련말을 중학교의 외국어로 정하고 또한 소련식으로 2월을 졸업기로 변경하고 있는 것은 그럼직도 하다. 38선 이북의 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 전문에 진학하려는 때에 첫째 어학시험에 고통이 있을 것이고 둘째 이곳 개학기가 9월인 관계로 귀중한 한동안을 학적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저곳에서는 학교마다 스타린의장의 사진을 걸어 놓고 조석으로 학도들로 하여금 우러러 사모케한다. 또한가지 색다른 것은 학도들이 학교에서 가정으로 돌아가면 아버지도 동무요 어머니도 동무요 언니와 동생도 동무라고 부른다.
  • 1946년 1월 7일 - 8일 各道 學務課長, 師範校長 會議에서 授業料 決定 發表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자주독립과 아울러 교육 문제가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점에 비추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에 비추어 새 교육 방책을 세워 의무교육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7일 8일은 각도 학무과장 사범학교장의 회의를 소집하고 교육 방침과 제도를 천명 지시하였다. 제1일은 상오 9시부터 군정청 제4회의실에서 김원규(金元圭) 경기도 학무과장 외 30여 명이 모여 유억겸(兪億兼) 국장의 새교육 이념과 교육제도의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어 오천석(吳天錫) 씨가 일반 학무 行政에 대한 방침을 천명하고 초등, 중등, 사범교육에 대하여 각각 책임자의 설명과 각 지방의 실정보고로 하오 5시에 끝나고 8일도 속개하였다. 이 회에서 설명된 바에 의하면 초등학교 2원 이내 중등은 2십 원 전문은 3십 원이내로 정하였고 각도의 학무과를 학무부로 명칭을 고치어 기왕의 중앙청 집중주의를 없애고 지방의 실정에 따라 각도 학무부에서 책임지고 학무 行政을 하도록 그 권한을 위임하기로 되었다 한다.[78]

  • 1946년 1월 7일 反託治 學生大會
反託, 獨立運動은 學徒의 一死로
 젊은 학도들은 참다 못하여 마침내 궐기하였다. "반탁" "반탁" 주검과 피로써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고자 하는 순진한 학도들의 그 성스러운 부르짖음 그대들은 듣는가? 이 땅의 학도들은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그 순진한 정열과 양심을 가지고서 반탁의 봉화를 들고 나선 것이다.
 三十一校 學徒參加, 大韓自主獨立을 絶叫
 민족 자결과 완전 자주독립의 깃발을 내걸고 신탁통치 반대를 부르짖는 젊은 학도들의 함성은 7일 아침 서울운동장에서 폭발되고야 말았다. 이날 아침 경성대학, 이화여전대학, 연전세전 등 시내 46개 남녀 전문대학을 비롯하여 15개 남녀중등학교 학생 約 1만 명은 신탁반대를 높이 내쓴 깃발과 교기를 들고서 집합하였다. 오전 11시 반경 반탁치학생대회(反託治學生大會)는 먼저 일동은 국기를 향하여 경례하고 애국가를 소리높여 합창한 후 이철승(李哲承) 군의 개회사로 막이 열리었다.
 이번 신탁통치 반대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연합국가와 학생들의 힘으로 다시 여론을 환기할 것이라는 경지에서 이 대회석상에서 연합국 학생들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여 세전 김덕순(金德淳)이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 학생을 대표하여 성명서를 차례로 발표하여 각교의 결의와 각오를 굳게 피력하였다. 순진한 학도들의 이 시위운동을 격려하기 위하여 반탁국민동원 경기도지부 선전부장 백남훈(白南薰) 씨와 독립촉성중앙청년연맹 김창혁(金昌赫) 씨의 祝辭가 있었다. 이리하여 시위대회를 마치고 계속하여 가두 시위 行進으로 들어갔다.
 決議文
  一. 民族自決 信託統治 絶對 反對
  一. 卽時 自主獨立 要求
  一. 完全國際的 解放 要求
  一. 統一政權 樹立要求
  一. 軍政과 絶對協力
  一. 賣國奴 掃蕩
學生의 自由, 名譽, 祖國을 爲하여 決議함.
                                           大韓民國 二十八年 一月 七日
                                           反託治學生總聯盟
聯合國 學生에게 보내는 멧세지
 大韓民國  學生一同은 親愛하는 情으로 世界의 平和와 解放을 하여 鬪爭한 聯合國 學生에게 感謝의 뜻을 表하며 아울러 우리 消息과 希望을 보내고자 한다. 回顧하건대 過去 40년 동안 日本의 압정하에서 우리 대한민국 학생은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대의 명분을 위하여 싸워왔다. 우리의 투쟁과 정열이 꽃을 맺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폭풍이 있었고 야만적인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 평화를 위한 연합국 청년학도의 성스러운 노력이 우리의 힘을 돕고 꽃을 맺게 되여 우리는 다같이 평화의 날을 마지하게 되었든 것이다.
 그날 대한민국 학생은 연합국 학생 未面의 벗들에게 충심으로 감사하였고 친애하는 情을 禁치 못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독립만을 목표로 분류 노력하여왔다. 그러한 今日 일부적인 인식부족에 의하여 5년간의 信託管理 云云하는 소식이 전하여 짐으로 우리 대한민국학생은 이에 양심적이고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하고 가장 양심적이요 정의만을 위하는 연합국 청년학도 諸友에 대한민국은 4천년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보유한 민족의 국가임을 고하고 우리 대한민국 학도의 즉시 자주독립요구에 助力이 있기를 바라며 이로 그친다.
                                           西紀 一九四六年 一月 七日
                                           대한민국 학생 일동[79]
  • 1946년 1월 9일 - 18일 중등교원강습회 개최

중등교원 양성을 위한 강습회(Institute for Secondary School Teachers)가 서울에서 1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렸다.[80][81]

  • 1946년 1월 8일 전국 초등교육자 대표대회 反託 결의
南北 敎育者 代表 大會- 對內外 決議 宣言
 3천만 겨레를 다시 노예와 같이 지배하려는 신탁통치에 대하여서는 주검으로 반대하겠다고 교육자들도 궐기하였다. 38선 이남 각도를 총망라하여 소집한 전국초등교육자대표대회는 8일 오전 11시부터 시내 수송국민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날은 반탁의 비분을 품고서 38이북에서도 다수히 참가한 가운데에 대회는 이규백(李揆百) 씨 사회로 시작되어 대표로부터 지방상황 보고가 있었고 결의사항 토의에 들어가서 장래 조선의 초석이 될 천진난만한 아동의 교육을 담당한 우리 교육자로서는 철저히 탁치를 반대치 않을 수 없다고 절규하고 직석에서 반탁에 대한 결의를 하여 이 결의문을 관계 연합국에 발송하기로 하였다. 계속하여 민족통일과 자주독립 완성에 대한 금후 투쟁 방법을 협의하고 오후 3시경 성황리에 폐회하였다.
 ▲ 對外 決議文
  一. 삼천만의 갈망하는 조선자주독립을 촉성키 위하여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함.
  一. 우리는 자주독립의 목적이 완수될 때까지 전민족적이며 조직적인 일대 반대 투쟁을 전개함.
 ▲ 對內 決議文
  一.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배격하고 우리 목적이 달성되기 까지는 自決的 태도를 취함.
  一. 각 정당의 주의주장 여하를 불문하고 대내적 투쟁을 절대 배격함.[82]
  • 1946년 1월 10일 - 17일 경남지역 교장 및 영어교사 연수

경상남도 학무과 후원으로 부산에서 46. 1. 10 - 1.17까지 "중등학교 교장연수"가 실시될 예정이다. 한국어 및 역사가 강조될 이 학교는 민주주의 교육 방법을 설명하고 미국식 음악, 체육 수업을 강조할 것이라고 한다. 같은 기간 동안 "영어교사연수"도 열린다. 이 연수에 협조할 사람은 한국인 교육자 윤인구와 강신갑, 그리고 미국 전쟁성 소속의 정개원 박사와 한영교 박사, 기타 여러 미군정청 관리들이다.[83]

  • 1946년 1월 10일 중등학교 점령 미군 타시설로 이전 시작

45년 11월 1일에 미군은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등학교 시설을 점령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6년 1월 10일부터 이들 군대가 학교시설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84]

  • 1946년 1월 11일 군정청 정치고문 한국교육원조계획 국무장관에 보고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는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신을 보내 한국교육원조계획을 설명하였다.

"이 계획은 미군정청의 학무국에서 만들어졌다. 이 계획서는 군계통을 통해 정식으로 전쟁성에 제출될 것이며, 여기에서 승인이되면 공식적 요청 형식으로 국무성에 제출되어 추진될 것이다. 보고서는 19명의 한국교육 지도자들의 협조하에 만들어졌고 미국적인 원칙하에서 한국의 교육체제를 재건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요망사항을 담고 있다. 미군사령관의 정치고문실의 대표가 이 보고서를 초안한 여러 회의에 참석하였고, 따라서 이 보고서가 한국교육 재건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원을 나타냈다는 것이 본관의 의견이다. 국무성이 자체 재원으로 전체 프로그램을 지원할 입장이라고 기대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정부기관이나 사립 교육재단과 교육기관의 지원을 구할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고서는 학무국에 의해 6인의 한국인 위원회에 보내질 것이다. 이 위원회는 다른 분야에서의 미국의 원조를 청원하기 위해 전쟁성의 동의하에 곧 미국에 파견되기로 되어 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한국 교육체제의 개편 책임을 맡도록 미국과 한국에서 훈련시키는데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군정종료 후에도 한국인들에 의해서 계속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85]
  • 1946년 1월 11일 초등교사 강습회 시작

초등교사 강습회가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군정청에서 추진하려는 교육개혁계획이 설명되었다.[86]

  • 1946년 1월 12일 미국으로부터의 교육원조를 위한 한국위원회 세부 보고

군정장관실 민정비서 Robert W. Wiley 대위가 작성한 "Sub-report of Korean Commission for Educational and Technological Assistance from America"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무원 교육의 필요성
2. 공무원 교육 현황
3. 공무원 교육의 목적
4. 교육, 기술 훈련 원조 계획
 a. 한국학생의 미국 파견 : 1946-47
 b. 미국에서의 기술훈련과 관찰
 c. 미국의 기술 및 교육전문가 한국 파견
5. 기타[87]
  • 1946년 1월 12일 학무국에 보내는 문서는 한글 혹은 영어와 한글로 함

학무국 통첩 제1호(Memorandum No.1)에 의해 각 지방으로부터 학무국에 보내는 모든 문서는 한글로, 혹은 영어와 한글로 작성하도록 하였다.[88]

  • 1946년 1월 14일 성인교육관계 각 지방 대표자 회의 개최

각 지방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성인교육에 관한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89]

  • 1946년 1월 15 高敞高女校 設立 認可

전북 高敞 군민은 일직이 군민부담으로 고창중학을 경영해 왔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이채를 띄고 있던 바 또 1월 15일부로 고창고등여학교 설립인가가 되어 동교 기성회 유화종(柳化鍾) 씨에게 군정청 학무국장으로부터 설립인가서를 전달하였다.[90]

  • 1946년 1월 18 反託-贊託 학생 충돌 慘死
反動派의 銃擊에도 不屈코 示威 行進
 반탁, 반탁 오직 자주독립을 염원하여 구랍 29일부터 이땅에 성난 파도와 같이 일어난 탁치반대 운동은 마침내 피를 흘리고야 말았다. 18일밤 "탁치절대반대! 독립만세"를 외치며 市街 行進을 하는 반탁운동 학도대들은 무기를 휴대한 반대 단체의 습격을 받아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유혈의 참사를 이루었던 것이니 그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男女學生四十名 銃傷- 重傷者는 入院加療中
 우리의 강산을 우리의 손으로 찾자고 한 반탁학생 성토대회는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주최로서 18일 오후 2시부터 개최되어 이땅 젊은 학생들의 결의를 더욱 굳게하고 오후 5시경 성황리에 마치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시내 남녀 전문, 대학, 중학생 約 일천여 명은 결의문과 성토문을 휴대하고 그 길로 바로 소련 영사관을 방문하여 이를 수교하고 뒤이어 미국 영사관을 방문하였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여 반도호텔을 거쳐서 조선호텔을 방문하고 여기서 미군측에 결의문과 성토문을 수교하고 示威 行進을 시작하였었다. 그런데 격노된 학도들은 市街 行進을 하든 도중에 황금정 일정목 조선인민보사 편집국과 인민당 서울인민위원회를 차례로 습격하고 그 길로 바로 임시정부를 방문하려고 서대문 2정목을 進行하는 중 돌연 권총과 장총 등을 든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다. 무수히 발사하는 탄환을 맞아 피를 흘리며 거꾸러지는 남녀학생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신탁통치는 절대반대다. 우리에게 독립을 달라 - 대한독립 만세 김구주석 만세를 부르짖으며 行進을 계속하였으나 빗발같은 탄환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를 방문하는 것은 중지되고 말았던 것이라 한다.
四名 危篤- 男女 學生 各 二名
 반탁 시위 行進을 하는 중 습격을 받아 부상을 받은 학생들은 판명된 자만이 40여 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이화여대 이금순(李金順) (假名-20)양외 1명과 세의전(世醫專) 박상국(朴相國)(假名-23) 양정중학 이길준(李吉俊)(假名-18) 군 등 4명은 총탄의 중상을 입고 방금 세부란스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수당을 받고 있으나 모두 생명이 위태하다고 한다.
託治 絶對反對- 全國中等敎員決議
 이번 강습을 마친 전국중등교원 강습회원 일동은 이유의 여하를 불구하고 신탁통치 절대반대와 즉시 자주독립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91]
  • 1946년 1월 20 反託學聯을 包圍- 男女學生 四十餘名 檢束

18일 밤 반탁운동 학도들의 피흘린 참사가 있은 후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19일 새벽 학병동맹 본부를 습격하여 백여 동맹원들을 검거하였는데 20일 또다시 종로서와 본정서를 동원하여 백여 명의 무장 경찰대로 하여금 세부란스의전안에 본부를 둔 반탁치전국학생총연맹을 포위 습격하고 남녀 학생 41명을 검거하였다. 동 반탁 학생연맹에서는 20일 동 본부에 간부와 및 회원들이 모여서 지난 18일밤 피흘린 사건과 行方不明된 여학도들의 선후책을 강구하는 중 상오 10시경 무장경관대에 포위된 것인데 정오지나 본부안에 있던 동연맹 위원장 리철승(李哲承)(普專) 군외 보전 세전 동경유학생 중동 등 남학생 33명과 리화여자대학 중앙여전 등 여학도 8명 도합 41명이 무장경관에게 끌리어 이들은 곧 추럭으로 경기도 경찰부에 압송되었다. 붙들려 가는 이들 학도들은 경찰부에로 압송되는 도중 추럭안에서 탁치반대, 자주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쳐 자주독립만을 원하는 전국 학도의 의기를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경찰부에서는 전원을 형사실에 수용하고 취조하기 시작하였다.[92]

  • 1946년 1월 21일 학무국 조직 개편

학무국 조직이 4 Offices 와 7 Departments 체제로 바뀌었다.

Office of Director
  〃   of Research
  〃   of Special Subjects
  〃   of Administration
Department of Textbooks
     〃     of Elementary Schools
     〃     of Secondary Schools
     〃     of Higher Schools
     〃     of Adult Education
     〃     of Culture
     〃     of Meteology[93]
  • 1946년 1월 21일 학무국에서 한국교육위원단 세부계획 중-일반 교육부문 계획 보고

학무국에서는 한국교육위원단(Korean Educational Commission)의 파견에 따른 세부계획 중 일반 교육 분야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교육의 재건이 가장 중요하다.
II. 남북한에 현재 4,892,418명의 취학 아동(6세-12세)이 있다. 이 중 1,721,873명이 취학 중이다. 나머지 아동들에게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52,843명의 교사와 건물, 그리고 교육기자재가 필요하다. 1944년에 182,089명의 남학생과 64,954명의 여학생이 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현재 336개의 중학교에 대략 40,000명정도가 수용가능하다. 전체 취학 연령의 16%에 불과하다. 교사 및 교육계의 지도자 공급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16개의 사범학교(Normal School)의 정원은 8,000명이며 매년 2,000명씩 배출하게 된다. 기타 영역에서의 전문가도 많이 필요하다. 현재 대학교1, 대학 22개교에서 수용인원은 11,000명에 불과하다.
III. 교육재건을 위해서는 전직 교사, 교육자의 재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수한 교사, 行政家를 3-9개월 정도씩 미국에 파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의무교육의 실시도 필요하다. 현재 국민학교에는 52,000명의 교사가 필요하다. 이를 양성하려면 현재의 사범학교의 최소 15배가 적어도 5년 먼저 설립되어야 한다. 일본에 재학 중인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나 한계도 많다. 미국이 한국 청년들이 유학할 유일한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인 전문가들이 한국에 와서 현지 지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IV. 교육 및 기술 훈련 원조 계획
 A. 한국학생들 미국 유학
  1. 훈련 예정 인원 : 289명
  2. 선발 기준
  3. 재정 조치 : 미국 지원
  4. 유학 대상교 선택
 B. 한국교육자 미국 파견
  1. 대상자
  2. 규모 : 100명
  3. 기간 : 3-9개월
  4. 4팀으로 나누어 파견
  5. 4팀을 순차적으로 파견
  6. 정신적으로 새로워지고, 민주주의 교육 원리와 실제를 습득하여 귀국하기를 기대함.
 C. 미국 기술 및 교육 지도자 내한
  1. 미국 교육전문가(각 분야별) : 최소 1년, 국무성에서 고용.
  2. 교육조사단 내한 : 7명으로 구성. 9개월 일정. 국무성에서 선발. 미국내 특정 대학 혹은 American Educational Assiciation의 협조를 얻어서 실시. 국무성에서 고용하는 것으로 하되 소속은 미군사령관의 정치보좌관실 혹은 미군정청으로 한다.
  3. 미국인 교사의 내한 104명 규모. 최소 1년. 분야별 인원 안배. 모두 16개 사범학교에 배속된다.
 D. 교과서를 비롯한 교육기자재 원조
V. 이러한 계획의 실천은 매우 긴급하다. 한국의 현상황의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즉각적인 조처가 더욱 필요하다.
                             Earl N. Lockard
			      Major AC
                             Director, Bureau of Education[94]
  • 1946년 1월 22일 학무국은 중등 사범학교 교육를 각지방으로 이관하는 안 발표

학무국에서는 학무통첩 제2호를 통해 중등 수준의 사범학교에 관한 관리를 각 지방 학무과에 이첩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95]

  • 1946년 1월 23일 서울시내 전문학교장회의 개최[96]
  • 1946년 1월 24일 조선교육심의회 제8차 본회의 의무교육, 한자폐지, 교과서문제 등 협의
郡邑面에 促進委員會 設置
 제8회 조선교육심사의회(조선교육심의회 =편집자) 본회의는 24일 하오 2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리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심의하였다. 상정된 안건은 제9분과위원회 안의 교과서를 국정으로 할 것이냐에 대한 것과 한자폐지 문제를 주로하여 심의하였고 의무교육안이 상정되었으나 시간관계로 오는 26일 하오 2시에 열릴 제9회 회의에서 신중 심의하기로 되었다.
다만 상정된 안건의 내용을 보면 금년부터 6년 이내에 의무교육제를 완성하려는 의도아래 편성된 안이다. 따라서 오는 9월의 신학기까지에 만6세의 아동은 원칙적으로 전부 수용하고 그 이상 학령을 지난 아동도 지원 아동은 전부 수용할 계획이다. 이렇게 수용을 하기에는 학급수와 교원경비 등이 문제인데 학급은 2부제로 하고 교원은 이후 6년간 매년 1만2천8백여 명의 교원을 양성하며 경비는 국고보조를 約 6할로 계상하되 시급한 만큼 민력(民力)에 의하여 적당한 기금으로서 부족액을 보충강화하기로 된 것이다.
 이에 竝行하여 군정청 도, 부, 군, 도(島), 읍면에는 의무교육제 실시 촉진위원회를 두어 의무교육제 완성에 박차를 가하기로 되었다.[97]
  • 1946년 1월 24일 兪局長 반탁학생 운동에 대한 담화 발표
반탁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이 있은 뒤 23일 상오 시내 남녀 전문학교장들은 학무국에서 임시 교장회의를 열고 이 사건의 선후책에 대하여 신중 심의하였다. 한편 각도에도 통첩을 보내어 금후 이런 불명예스러운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주의하였다. 그리고 兪학무국장은 24일 다음과 같은 담화로서 학생들의 자중심에 의하여 나아가 주기를 청하였다.
언제나 학생은 학생의 본분을 지켜야 할 것이고 교원들 역시 잘못이 없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暴行을 한다는 것은 그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학생이 아니라도 않될 일이다. 이번에는 더구나 학생으로서 정열에 넘처서 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지나친 검정적 행동은 유감된 일이다. 지금은 전과 달라 경무국의 일이라는 불간섭경 주의를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 조선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니 우리는 법의 처단은 부득이 할 것이되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사랑"으로서 잘 지도하고 사표(師表)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학교에 있어서 학문 연구는 자유이지만 연구외 활동은 다른 것이라는 것 또한 알아야겠다. 이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원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권리 의무의 주장 또는 투쟁이 있어서는 않될 것이니 오직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다른 나라에 지지 않도록 학문의 수련을 닦기에만 힘써야 할 것이다.[98]
  • 1946년 1월 25일 <동아일보> 서울大學 한인 總長 임명의 필요성 역설
모든 기관을 점차로 조선 사람의 손에 넘기어 자력으로 運行할 수 있도록 군정 당국이 열의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으나 아직도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조국 재건의 각 분야에 걸쳐 혼돈과 침체를 면치 못하는 상태다. 이미 군정청에서는 농상국장, 학무국장에 조선인이 취임하였고 또한 다른 국에도 적임자를 물색하여 속속 임명될 것으로 보이나 조선의 최고 학부인 서울대학은 총장, 부총장의 자리에 아직도 미군장교가 머물러 있어 언제나 여기에도 조선인의 총장을 맞아들이는가 하야 교육계는 물론이요 일반의 환심을 모으고 있다. 법문학부장으로 임명되었던 백낙준(白樂濬) 씨는 연전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수일전 김영배(金英培) 씨를 부총장의 비서로 임명한 군정 당국에서는 김준연(金俊淵) 씨를 총장으로 초빙하고자 교섭하였으나 김준연 씨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것을 사양하였으므로 당국은 다시 적임자를 물색 중에 있는데 우리의 유일한 최고 학부를 원만히 운영하여 나가기 위하여 하루 빨리 이 학부의 진용을 정돈하여야 할 것이다.
  • 1946년 1월 26일 조선교육심의회 義務敎育案 심의 확정
每年 經費 十一億圓 豫想
 다같이 배우자 - 우리는 무엇보다도 많이 배워야 한다. 이미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26일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교육심의회를 열고 새 조선의 의무교육안에 대한 심의를 하였든 바 의무교육이란 가장 긴급한 문제인 만큼 만장일치로 원만히 가결되었다. 이안은 6년이내에 학령아동을 전부 수용하려는 원칙아래 세운 것인데 해당 경비는 約 11억원 가량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비는 국가도 보조하지만 의무교육제를 예정대로 완수시키기 위하여서는 타력적(他力的)인 보조만에 의존하지 않고 각 지방의 民力과 성력에 따라 자주적인 實行을 하도록 된 것이 가장 새로웁다. 이에 동 회의에서는 그 實行 방침으로 의무교육 실시촉진위원회를 중앙과 각 도, 읍, 면 등 지방에 설치하기로 하여 제1차로 그 준비회를 29일 학무국에서 열기로 되었다. 이로서 의무교육은 弘益人間의 교육이념에 따르고 애국심을 길로 새 나라의 바탕이 되게 하려는 만큼 그 성과는 크게 기대되며 일반의 적극적인 협조가 요청되고 있다.[99]
  • 1946년 1월 27일 <동아일보> 各 部門의 技術 專門敎育 계획 보도
군정 당국에서는 각 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여 조선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각 국(局)을 통하여 신진 양성과 연구에 특수한 계획안을 가지고 있다.
 ▲ 鑛工局
  광공국장 吳정수 씨를 이사장으로 安東赫 씨와 6명을 이사로 하여 새로이 기술교육지도부를 두게 되었다. 이에 동지도부에서는 정식으로 외국 유학생 10명과 견습생 10명을 모집하여 4월 이내로 보낼 터이다.
  이들에는 선발시험을 보이는데 조선안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출신학교를 통하고 일본의 전문대학 출신자는 조선공업기술연맹의 추천장을 얻어 각각 기술교육지도부에 원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는데 시험기일 및 과목은 다음과 같다.
   -시험기일 ; 2월 21일 영어, 수학
              2월 22일 물리, 구두시험
   -장소 ; 서울시 중앙시험소
   -발표 ; 3월 5일 정오
 ▲ 法務局
  이번 조선법관양성소를 설치하고자 준비 중이다. 이 양성소는 중추원 자리를 이용하여 오는 3월 1일부터 개설할 터인데 전문대학 졸업생을 수용하여 1년간 수료한 다음 판검사로 임명된다.
 ▲ 學務局
  기술자를 양성하고자 이방면 외국 유학생으로 20명 내지 25명을 선발모집할 터인데 모집기일은 추후 발표한다.
  • 1946년 1월 30일 보건후생국 한국교육위원단에 보고서 제출, 의학교육 발전방안 제시

보건후생국은 미국에 파견되는 한국교육위원단에 보낼 의학교육 및 의료시설 발전 방안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 파견 계획 및 의학교육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요구를 담고 있다.[100]


1946년 2월

  • 1946년 2월 1일 중등학교 학생수 76,467명으로 보고됨
  • 1946년 2월 1일 현재 중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76,467명으로 보고되었다.[101]
  • 1946년 2월 5일 연합군사령부 군정과장 크리스트 장군 한국방문 보고서 제출

연합군사령부의 군정과장 W.E. Crist 준장은 45년 10월 14일부터 24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 보고서 중 교육관계 내용을 연합군사령부 Education Division의 책임자 Nugent가 메모랜덤 형식으로 Dyke 장군에게 보고하였다. 보고서 명칭은 "Chronological Record of Information Received by Education Division Concerning Korea"이다. 주요 내용은 미국으로부터의 한국 교육개혁을 위한 원조 계획에 관한 것이다.[102]

  • 1946년 2월 6일 京城 工科學校 廢校

경성공과학교는 시내 사직동 전祥明高女 자리로 옮기고 초급실업중학교로 인가 신청을 하는 한편 오는 3월 1일부터 생도 모집을 하리라 한다.[103]

  • 1946년 2월 6일 38이남의 학생수 172만
解放된 學園의 喜消息
 앞으로 6년 이내에 조선의 의무교육을 완전히 실시할 수 있도록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그 구체안을 세우는 한편 교원 교실 부족을 극복해 가며 향학에 불타는 학동들에게 이바지하고 있는데 가장 반가운 징조는 일제(日帝)시대보다 현재 훨씬 많이 취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계로 본다면 작년 12월 15일 현재로 38도 이남에 있는 초등 중등 전문학교의 6세이상 22세 되는 학생수는 172만 2938명인데 그 전해(1944년)는 조선인 일본인 합쳐서 155만 5336명이었고 또 그전해인 1943년에는 불과 99만 8455명 밖에 안되었다 한다. 이뿐더러 교원 수효에 있어서도 많이 증가되었는데 1944년에는 일인 조선인 23,778명이던 것이 해방 후는 조선인 교원만이 23,872명이 된다. 그리고 38도 이남에 있어서 6세로부터 18세까지 가능의 학동수는 約 567만 8,139명인데 그중 3할인 171만 3,247명이 현재 취학을 하고 있어서 해방된 교육계는 우리들 뜻대로 개방되어 연학(硏學)의 길을 걷게하고 있다.[104]
  • 1946년 2월 6일 學徒의 放縱에 斷

나날이 문란해지는 풍기에 단!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장(張) 부장 신임이래 테로, 강절도의 근절에 노력하고 있는데 이제 다시 각 경찰서 정보계에 특히 풍기계를 두어 고래의 미풍양속을 해칠뿐더러 범죄의 온상이 되는 거리의 풍기를 엄중 단속하기로 되었다. 이의 구체적 방침으로는 남녀 학생들의 가페, 요정, 땐스홀, 극장 등 무절도한 행동을 막고 선도하기로 된 것이다. 이렇게 취체를 강화하는 한편 경찰부에서는 각 학교 당국과 긴밀한 연락 아래 사상선도, 무기도적 탈선 행동 방지를 철저히 할 것으로 그 성과가 자못 기대되고 있다.

  • 1946년 2월 7일 <동아일보> 朝鮮 最初의 美術 學校- 來3月부터 開校할 豫定
미술학교설립 기성회에서는 그 동안 동회장 김법린(金法麟) 씨를 중심으로 미술학교를 설립코자 노력하여 왔던 바 제반 준비가 완료되었으므로 3월 15일부터 개교한다.
募集 人員은 本科 東洋畵科에 約 20명, 西洋畵科에 約 30명, 彫刻科 約 20명, 建築科 約 20명 (工藝科는 8월에 모집예정)이고 別科에는 西洋畵科 若干名
  • 1946년 2월 9일 <동아일보> 科學敎育은 小學에서부터
敎育審議會서 李泰圭氏案 採決
 새 조선의 동량(棟梁)을 기르고 바탕이 되는 인재를 널리 길러내기 위하여 의무교육 실시가 가장 긴요한 바인데 이와 아울러 실제 교육에 있어 필요한 것은 실무, 과학, 국어, 국문의 교육을 어떠한 방법으로 실시할 것인가를 정하고 실시하여야겠다는 견지에서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중등교육의 목적에 대한 것을 중심 의제로 14일에 총회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이태규 박사 건의안인 과학교육진흥책은 7일 교육심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이 안은 학교교육으로서의 과학교육과 사회교육으로서의 과학교육을 철저히 하려는 것인데 현재 법문학계와 이공학계의 수학비율의 보면 법문학계통이 훨씬 많은데 이를 25년 계획으로서 일약 3대 1정도로 과학교육진흥을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실시방책으로서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理科 교재를 많이 넣고 사범대학과 서울대학에 임시교원양성소를 두어 고등교원을 양성 혹은 재교육하고 외국인교수 120명을 초빙하도록 한다. 이밖에 실업계의 정규적인 학교외에 야간 실업학교와 직장교육 과학기술 검정제도의 실시로서 과학교육을 진흥하야 뒤떨어진 조선을 세계수준에 닿도록 적극적인 시책을 펴도록 된 것이다.
  • 1946년 2월 9일 <동아일보> 敎育審議 臨總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9일 하오 1시 반부터 군정청 제일회의실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었으니 위원은 전부 참석을 바라고 있다.
  • 1946년 2월 11일 <동아일보> 大學令 學位令도 建議- 義務敎育 促進運動 活潑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누구든지 다 배울 수 있게하는 의무교육 실시계획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는데 9일은 군정청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실시촉진안과 아울러 大學令, 學位令을 신중 토의하여 학부 行政의 기반을 두터웁게 하였다. 의무교육 실시 촉진안으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의무교육제 실시 촉진위원회를 중앙과 지방에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이 회로 하여금 의무교육의 취지를 설명하여 국민의 애국적 협력을 구하는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교육비, 교사건설비 등 재원과 자재를 보충하여 원안대로 의무교육계획을 실천케 한다. 부서는 7부로 하며 3월까지 모든 준비활동을 끝마치고 4월부터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키로 되었다.
大學令
 대학의 수업연한은 4년 이상으로 하고 국어문화사, 자연과학개론과 체육을 필수과목으로 하며 국립, 공립, 사립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국립종합대학의 학부 종류는 국가원수(元首)의 명령으로 정하며 각 대학에는 참의원회(參議院會)를 두어 학과와 강좌의 설치, 폐지 등 대학 내부의 모든 규정을 정한다. 공립대학은 도와 및 시(市)에 한하여 설립하며 사립은 재단법인이라야 된다.
學位令
 학위제도로는 학사(學士), 석사(碩士), 박사(博士), 명예박사의 네 종류로 정하여 대학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학사는 년한 4년이상의 대학 학부졸업자에 석사는 1년이상 대학원에서 연구한 사람에 대하여 교수회를 통화한 사람에 박사는 본인의 청구 또는 대학 총장의 추천에 의하여 수여한다. 학위를 받으려면 현대의 외국어의 시험이 있어야 한다.
  • 1946년 2월 12일 사범학교 관할권을 학무국에서 관련지방관청으로 이관

7개의 사범학교에 대한 관할권을 학무국에서 각 지방의 관련 부서로 이관하였다.[105]

  • 1946년 2월 13일 <해방일보> 民主的敎育制- 朝鮮學徒隊 聲明書 發表
조선학도대에서는 과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결정을 계기로 하여 "미국 모 평론가의 말과 같이 한국민주당원으로 충만한 군정청 학무 당국의 명령인지" 각 전문 및 중등 학교장 이하 교직원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반탁을 선동 조장시키고 있는 자 불소할 뿐만 아니라 소위 반탁학생동맹이라는 명목하에 1월 18일 蠻行的 테로 行爲를 다하여 우리 민족으로서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학병동맹 참사 사건이 발생케 하였고 더구나 미소대표단 환영회에 참가한 학생들을 야만적 언사와 교만한 수단으로 탄압하고 있는 사실은 유감으로 생각하여 학무 당국 및 교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격문을 보내고 맹성을 촉하였다.
 성명서 요지
  진보적 민주주의 제 단체가 주체로 된 민족적 行事에는 항상 “학생의 본분”이니 “학생의 정치적 중립”이니 한 것을 구실로 하여 학원을 사회에서 분리시키는 동시에 반동적 보수적 봉건적 집단인 우익 진영의 언사에는 학무 당국령이라는 혹은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을 역설하여 강제로 동원을 하고 있다. 이것이 데모크리시라는 것인가! 과거 40년간 일제의 억압과 기만으로 무지와 노예를 양성하는 소위 황민화 교육의 독소를 철저히 소탕하고 민주주의적 신교육제도를 건설하는 것이 교직원과 학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긴급한 과업이 아닌가? 학무 당국 및 각 학교 교직원들은 모름직이 각성해야 할 것이니 조선 300만 우리 학생들은 비민주적인 제 경향에 대하여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에 이바지 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조선학도대에서는 일제 시대와 같이 무지와 노예를 양성하려는 학무 당국 및 각 학교 교직원 제 씨의 맹성을 촉하는 바이다.
  • 1946년 2월 16일 초등음악교사 재교육 Institute 시작

초등학교 음악교사의 재교육 강습회가 2월 16일 시작되었다.[106]

  • 1946년 2월 18일 <동아일보> 朝鮮敎育者協會- 17일 京大에서 創立大會 開始

@실제날짜:460217

민족의 문화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꾀하고자 도상록(都相祿) 장윤천(張允千) 조용욱(趙容郁) 씨 등의 발기로 17일 상오 11시 경성대학 법문학부 강당에서 대학전문, 중등, 초등교육자 2백여 명 참석아래 조선교육자협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조용욱 씨로부터 "우리는 새문화를 건설하고 창설하는 교육자의 사명을 다하여 각 방면에 뿌리 밖혀있는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적으로 소탕하고 세계의 선진문화를 흡수하여 새교육의 이념을 세워야 한다"는 개회사가 있고 執行部 선거로 들어가 의장에 도상록, 장을천, 조용욱 3씨가 피선되고 긴급동의로 최규동(崔奎東) 씨가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경과보고, 내빈 祝辭, 현 교육계의 일반정세 보고, 綱領 規約 심의통과, 위원선거 토의사항 등이 있고 하오 4시경 폐회하였다.
  • 1946년 2월 20일 110명의 공립중등학교 교장이 임명됨
  • 1946년 2월 20일 현재 110개 공립 중등학교에 일본인 교장을 대신하는 한국인 교장이 임명되었다.[107]
  • 1946년 2월 21일 <동아일보> 校舍返還 要求- 理工學部서 軍政廳에 陳情

@실제날짜:460218

3월에 개강을 앞둔 서울대학 리공학부(理工學部)는 교사와 실험실을 미국이 사용 중이므로 수차 비공식으로 교사를 다시 쓸수 있도록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18일 서울대학 총의를 모아 교직원 일동이 진정서를 군정 당국에 제출하여 하루라도 빨리 교사를 사용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 1946년 2월 21일 <동아일보> 技術者 敎育에 置重- 敎育審議會서 討議
금년의 국민교 졸업생- 其 중 5분지 3을 실업중학에 진학케
 이 안은 동 제2분과 위원회의 이인기(李寅基) 씨가 설명하였는데 그 요점을 들면 금년 졸업예정의 공사립 국민학교 졸업생이 約 31만 9,691명인데 이 중 3분지 일인 10만 6,513명을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데 그중 5분지 2인 4만 2,605명은 중학교로 5분지 3인 6만 3,907명은 실업중학교로 진학케 한다.
 이리하여 중등학교 졸업생은 3분지 1을 고등중학교에 고등중학교 졸업생은 6분지 1일 대학에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 문과와 실과(實科) 계통 학교의 수용은 중등학교는 문과가 4할에 실과는 6할로, 고등중학교와 대학은 문과 3할, 실과 7할로 하려는 등 전적으로 과학 실업적인 교육을 많이 받게 하여 신생 조선의 바탕을 삼기에 주안점을 두자는 것이다. 이 실시는 앞으로 5년간 점진적으로 실시하되 우선 중학교 교실이 4백6십개를 증설하여야 되고 실업학교는 7백여개의 교실을 증설하여야 되는 만큼 학무 당국은 물론 일반의 물질적인 원조와 협조가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국민학교와 대학에 한하여 남녀공학을 인정하자는 안도 건의되었다.
  • 1946년 2월 21일 <동아일보> 三學期제를 二學期制로- 三月에 一齊 實施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종래의 3학기 제도를 철폐하고 2학기제로 하여 1학기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2학기가 3월부터 8월까지로 결정하였는데 이달말로 첫째 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이에 각도 도학무 당국에 통첩을 보내어 실시에 어김이 없기를 바라며 5일이내의 방학을 각 학교의 실정에 따라 인정하기로 하였다.
  • 1946년 2월 22일 <동아일보> 弘益人間의 敎育理念에- 學務局에서 學制를 改定
학무국에서는 새로이 학제를 정하고 학교 연속 계통을 정하여 弘益人間의 교육이념 아래 과학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각 학교의 칭호를 결정하였다.
국민학교는 종전대로(6년제)이고 중학교는 初級중학과(3년) 高級중학과(3년)로 하고 실업학교 역시 초급실업, 고급실업으로 하는데 다만 사범학교는 초급중학이나 초급실업중학에서 진학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6세에 국민학교에 입학한다면 17세에 고급중학(또는 고급실업,사범학교)를 마치고 18세에 각종 대학(사범대학도 포함한다)에 들어가 4년에 마치고 대학원으로 갈 수 있는데 의과대학만을 6년제로 한다. 이로서 문계는 21세에 의과계는 23세에 순조로이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 1946년 2월 25일 학무국 주간 업무보고(46.2.17-2.23)

학무국에서는 한 주간의 업무보고서를 작성하여 민정장관실에 제출하였다. 각 부서별로 정리된 보고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Office of the Director)
 1. 조선교육심의회 학제분과위원회는 본회의에 인문교육과 실업교육의 비율을 다음과 같이 할 것을 제안하였다.
  (1) 중학교 : 4 대 6
  (2) 고등학교 : 3 대 7
  (3) 대학교 : 3 대 7
 2. 실업교육분과위원회는 실업학교 교과과정을 건의하였다.
 3. 서울대학교 담당 관리와 함께 미군 학무국장은 법문학부를 시찰, 조사하였다. 
 4. 교사양성 담당 관리와 함께 미군 학무국장은 서울사범학교를 시찰, 조사하였다.
(Office of Assistant Director for Administration)
 1. 학무국의 예산을 편성하여 제출하였다. 총액은 당초에 365,096,995.24엔이었으나 개교예정인 두학교 예산이 증액되어 결국 378,384,434.50엔으로 확정되었다.
 2. 사무직원들이 학무국 내의 한국인 관리들에게 돌릴 설문지를 완성하였다.
(Office of Research)
 1. 초등교육분과위원회는 의무교육에 관한 토론을 계속하였다.
 2. 교원교육분과위윈회는 사범학교 교육과정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3. 성인교육분과위원회는 성인교육에 관한 추가 연구를 위해 모임을 가졌다.
 4. 최근의 학교 취학상태를 보여주는 통계자료가 준비되었다.
 5. 학년도의 시작과 끝에 관한 학무국의 통첩을 모든 지방에 보냈다.
(Dept. of Textbooks)
 1. 5학년 지리교과서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2. 교과서를 각 지역에 배포하였다.(도표제시)
(Dept. of Elementary Schools)
 1. 초등의무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지시를 촉진하기 위해 영향력있는 시민들 모임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2. 초등교육과는 서울시내 8개 초등학교를 시찰, 조사하였다. 표준이하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가 시학무국을 위해 준비 중이다.
(Dept. of Secondary Schools)
 1. 학생 풍기 선도를 위한 계획을 마련하였다.
 2.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실업학교를 위해 마련된 20개의 새 교과과정을 승인하였다. 채택을 위해 학무국에 제출될 것이다. 
 3. 2개의 기술중학교를 전쟁전의 상태인 상업학교로 전환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Dept. of Higher Schools)
 1. 대학(Colleges)
  a. 서울에서 경성광업학교까지의 교통편을 위해 트럭을 배정하였다.
  b. 대구농업학교 교사로 쓸 건물을 대구에 구하였다.
  c. 부산수산학교를 조사하였다. 46년 4월 1일까지 현재의 임시 교사에서 영구 교사로 이전할 계획이 만들어졌다.
  d. 대구와 부산 지역의 대학을 방문, 조사하였다.
 2. 의과대학
  a. 공보국으로부터 "Korean Medical Journal"의 출판승인을 구두로 받았다.
  b. 기타
 3. 대학교(Universities)
  a. 법문학부가 172명의 학생이 등록한 가운데 46년 2월 18일에 개학하였다.
  b. 학무국 미군국장이 서울대학의 운동장, 건물, 교실 등을 시찰하였다.
 4. 사범학교(Teacher Training Schools)   
  a. 교사자격시험과 관련된 규정을 만들었다.
  b. 경성사범학교에서 수학, 생물학, 그리고 물리학 교사의 임시 양성계획을 건의하였다. 
  c.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제출된 사범학교 교과과정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대학의 교과과정은 승인하였다.
(Dept. of Adult Education)
 1. 공장 노동자 중 문맹자를 위한 교육계획이 마련되었다.
 2. 성인교육 교사양성소의 설치를 위한 계획이 마련되었다.[108]
  • 1946년 2월 25일 <동아일보> 배우지 못해 우는 未就學兒童 一萬
9月 新學期엔 全部를 收容- 瓔丘(井?)國民學校도 近近 開校 豫定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해방 후 조선인 미취학 아동을 전부 취학 시키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착착 실시한 바 현재까지 2만 7백 20명의 미취학 아동을 수용하여 취학케하고 아직도 취학치 못한 1만 23명의 아동(남자 4,769명, 여자 5,254명)도 오는 9월에는 전부 취학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현재 시내에 있는 초등학교는 공립이 60교, 사립이 18교(강습소와 학원은 제외)인데 그중 瓔井, 元町, 靑葉, 日出외 4교는 방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까닭에 개교치 못하고 영정학교만은 근일 중에 개교될 모양이다. 과거 일인이 있을 때에 소위 제1부 초등교가 시내에 16교나 되었으나 조선인 아동을 수용치 않았으므로 제2부에 무리하게 수용하였기 때문에 창신(昌新)학교와 그외 몇 학교는 44학급이란 실로 혼란한 교수상태에 있었던 것인데 해방 후 제1부를 폐지함과 함께 미취학 아동과 전재민의 전학 아동을 수용하여 차대 국가의 간성이 될 아동의 교육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1946년 3월

  • 1946년 3월 4일 무허가학교 폐쇄령 발표

무허가학교 폐쇄령이 발표되었다.[109]

  • 1946년 3월 4일 <한성일보> 배우려도 책없는 설움-암담한 초등교재
무릇 10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압정 밑에 갖은 고난을 겪어 오던 우리는 심지어 말의 압제까지도 받아○○○○○ 황민화 운동의 간악한 수단에 내 말과 내 글까지도 거의 말살되다시피하여 현재 10세 내외의 아동뿐만 아니라 20대의 청년들까지도 우리나라의 글과 말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으로 해방된 오늘 교육 부문에 있어서의 긴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똑바른 우리의 말과 글부터 배워야 할 것인데 현재의 형편으로는 교원난도 난이지만 첫째 교재 부족으로 말미암아 전조선을 통하야 교육계의 진로도 자못 암담한 상태에 직면하야 식자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프린트"판도 힘들 지경-인쇄 중이나 완성은 不知何歲月, 교재, 인쇄, 編修難
해방 이후 만 6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초등학교에 교재가 아직 완성되지 못하여 경향간 각 학교는 물론이요 아동을 둔 각 가정에서까지 아동 교육에 대하여 그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는 심히 불건전한 현상에 당면하고 있는 바 관계 당국에서는 일찍부터 朝鮮語學會에 임시 교재에 대한 저작을 의뢰하여 그 일부를 朝鮮書籍印刷會社에 인쇄를 회부하였으나 그 부수가 워낙 방대하므로 인쇄의 능력, 자재, 노무자, 기타 문제로 보아 도저히 단시일 내로 인쇄를 완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인쇄 중인 것은 "한글첫걸음", "초등국어독본"상중, 초등공민 1, 2, 3권, 초등음악 뿐인데 겨우 전기 "한글첫걸음"과 "초등국어독본"을 겨우 인쇄하여 서울 시내 초등학교 일부에만 전달하였을 뿐 시골에는 전연 발송되지 못한 형편이다. 그리고 그 밖에 인쇄 중인 교재는 금월 말일내로 일부가 나올 듯 하다. 하나 그 완성은 부지하세월이라는 우울한 처지에 있으며 그리고 문화지대인 서울같은 도회지의 학교에서는 교재를 등사로 인쇄하여 겨우 학생에게 분배를 한다하나 이도 인쇄가 불분명한 탓으로 아동에게는 큰 두통거리로 되어 있으며 이나마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용지, 등사원지 등 자재난으로 등사 인쇄조차 못하는 형편이라 한다. 더구나 38도 이남 전체나마 아직 초등학교의 교사용 교재조차 통일되지 못하여 각 도와 각 군이 모두 그 교재와 교수 방법이 다르다 하니 실로 초등교육계에 커다란 한심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관계 각 방면의 인사의 담화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쇄하는 것도 임시교재- 지금까지 1군에 국사 1권씩 배부
군정청 편수국장 崔鉉培 씨 담
조선어학회에서 저작한 교재를 우리 학무국에서 맡아서 조선서적인쇄회사에 맡기어 인쇄를 시키는 데 원체가 방대한 부수가 되기 때문에 그 완성을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으므로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인쇄를 회부했다는 것이 몇 가지 되지 않은데다가 그것이 임시 교재가 되므로 책임자인 우리로서는 실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원칙으로 38도 이남만이라도 초등학교 교재가 통일되어야 하겠는데 겨우 초등국사만은 세전에 1군에 1책씩 교재로 보냈을 뿐 그밖에는 손이 미치지 못하므로 각 도, 각 군이 모두 독선적으로 적당히 교재를 입안하여 아동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 따라서는 교과서를 등사를 하여 아동에게 분배할 모양이나 이는 과도적 현상으로 부득이한 일이다. 특히 산간 벽지에서 그러한 혜택도 입지 못하는 선생과 아동을 생각하면 실로 마음이 아프다. 이미 인쇄하여 서울 시내 일부에서는 분배했고 나머지도 인쇄 중이므로 계속 분배될 줄로 안다.
시급한 조처를 갈망- 현재 교재는 각교 수의로
校洞國民學校長 趙炳熙 씨 담
우리 학교에는 학무국에서 편찬한 1, 2년급용의 "국어독본"상권과 3년급용 이상용의 "한글첫걸음"이 나왔을 뿐 그밖에는 아무러한 교재를 받은 일이 없으므로 각 과목을 각 학년에 맞도록 적당히 배정하여 아동에게 교수하고 있는데 등사 인쇄로 교재를 만들어 아동들에게 분배하였다. 그러나 인쇄의 불분명으로 아동들이 무한한 고통을 하는 점으로 보아 시급히 정식 교과서가 나와야 되겠으며 또한 통일된 교재가 있어야 하겠다. 국민학교는 한 급에 70명이란 과다한 인원을 수용하는 점과 또 8.15 후에 갑자기 일본인 교원으로 보충하고자 사범교육을 받지 못한 선생을 채용했기 때문에 선생이 다소 미숙하다는 점으로 보아 아동들을 교육시키고 지도하자면 절대적으로 교과서가 필요하다. 학무 당국의 시급한 조처가 있기를 바란다.
우린 책임없다, 조선어학회 鄭寅承 씨 談
우리 어학회에서 군정청 학무국 발행의 초등국어독본외의 임시 교재에 대햐여 저작권만 소유하고 있지 그 발행에 대하여는 일체 군정청에서 담당하고 있다. 어떤 학교 혹은 학부형 측에서 우리에게 교과서가 늦다고 질문을 하여오나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
통일된 교재를, 학부형 모씨 담
우리가 꼭 아동 교육에 교과서 의존주의로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방 직후 참된 민주주의의 교육을 주입하는 과도기에 처하여 교과서가 절대 필요할 줄 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상급에 다니는 아이는 전연 교과서가 없는 듯하니 무엇을 배우고 다니는지 부모된 사람도 알 길이 없고 하급생은 등사한 교재를 갖고 다니는데 종이가 나쁜 탓으로 곧 차열이 되는 데다가 인쇄가 보이지를 않아 큰 두통입니다. 시급히 통일된 교재가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 1946년 3월 7일 <동아일보> 十三專門, 中學 男女學生들 突然히 同盟休學을 斷行

@실제날짜:460227

평양에서 三.一 기념 行事는 학생들에게 한하여 시가 行列을 허락하기로 되었는데 2월 27일 평양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은 돌연 모처에 회합하여 平壤師範, 平壤第二中學, 平壤東明中學, 平壤崇仁中學, 平壤工業, 平壤第一工業, 平壤商業, 平壤農業, 平壤聖化女校, 平壤女子商業, 平壤正義女校 이상 11개 남녀중둥학교 학생 대표 이름으로 서면을 작성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金日成) 장군에게 요구서를 제출하고 27일 오후 7시에 방송국을 통하여 회답하여 주기를 원하였는데 이 요구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 같았다 한다.
▲ 金日成동무에게
 一. 조선 완전 독립 촉진시키는 정치 요구 
  (가)통일정부수립요구
  (나)삼상회담 조선 탁치안 절대반대 
  (다)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반대 
  (라)糧食 問題 
  (마)惡用하려는 三一運動記念行事不參加 
  (바)人民에 대한 壓制禁止 
  (사) 論言, 集合, 結社, 信仰, 出版의 自由 요구
 二. 學生 釋放(學生을 즉시 석방할 것)
 三. 학생에 대한 壓制 禁止
이상의 요구서를 김장군에게 제출한 학생들은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28일부터는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동맹 휴학을 斷行하겠다는 것을 성명하고 연명한 11개 남녀중등학교 전학생은 이날 부터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는데 평양의전(平壤醫專)을 제외하고 대동공전(大同工專), 平壤師範專門까지 여기에 합류하여 3월 1일만은 각자 학교에서 기념식을 뜻있게 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후 5시경 기관총, 권총을 휴대한 학생 일부는 선교리(船橋里) 부영주택 지지부근에서 보안대와 충돌이 되었는데 아직 쌍방의 피해는 알수 없으나 이 사건이 있은 후 2일 현재로 각교 학생 約 3백 명이 보안서에 검거되었다. 2일 현재로 각 학교는 계속하여 휴교 상태에 들어 있고 처처에서 학생의 검속은 계속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 1946년 3월 7일 <해방일보> 奴隸 敎育에 反對 烽火- 淸州一中 生徒들 팟쇼 排擊코저 盟休
일반은 그 파문을 주목시
皇民化 노예 교육의 앞잡이로서 어린 학도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그들을 병정으로 팔고 학원을 병영화하여 제 일신의 욕스러운 영달에 이바지 하던 자는 학도들에게 선생님이 아니라 원수였다. 그들에게 만일 민족적 양심의 편린이나마 남아 있었다면 새 조선의 교육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었지만 청주제일중학교 교장 이완용 씨(일제시대의 視學官)는 동교 부교장 오정현 同교원 윤종섭, 김희정 3씨가 생도를 사랑하고 옳은 지식을 일러주어 신뢰받는 것을 도리어 '편당적 교원'이라 하여 씨와 중학 동창이며 현 학무과장인 고광만 씨와 연락하여 전기 3씨를 돌연히 지난 2월 16일에 파면함에 이르러 젊은 학도들의 분격은 폭발되었다.
전기 3교원은 일제 시대에는 對日 불협력자로서 지목을 받아 왔으며 해방 후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복교를 위하여 전력을 다한 보람이 있어 다른 어느 학교 보다도 먼저 개교를 한 공로자이므로 동 학교 교원 일동도 파면의 부당을 지적하여 삼씨의 복직을 강경히 학무 당국과 교장에 요구하였고 생도측에서는 "우리의 3선생을 돌려달라"고 절규하다가 요구가 관철되지 못함에 드디어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다.
오랜 억압뒤에 비로서 학문의 자유와 진리에 눈 뜨기 시작한 교육계에 던져진 전기와 같은 불의의 돌은 俄然 크나큰 동정과 격분을 일으키어 청주읍내의 농업 상업 사범 고여 여상의 전 생도도 26일에 이르러 '학교장의 독재적 학교 운영과 일중교장 배척'을 부르짓고 총 동맹 휴학에 돌입하였으며 읍내 각 중등학교 교원으로 조직된 청주교원단에서도 분기하여 정당한 요구의 관철을 위하여는 총 사직도 사양하지 않을 기세를 보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 사건은 도내 각 학교에도 파문을 일으키어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는 한 예측할 수 없는 중대한 사회 문제로 발전할 것이며 동 생도들은 우리는 삼 교원의 복직과 일중 교장의 사직 그리고 학무과 내에 뿌리 박고 있는 일제 잔재와 팟쇼적 세력의 철저한 소탕을 기하고 투쟁한다. 우리는 일제 노예 교육에서 벗어나 학문의 자유와 학생자치를 부르짓고 있는데 저들은 또 다시 우리에게 노예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보다도 배우기를 요구하고 있으나 노예 교육은 끝까지 거부한다고 싸우고 있다.
  • 1946년 3월 8일 <동아일보> 正當한 政治訓練은 必要- 兪學務局長 談
경기도에서 발표한 것은 아마 지난 5일 민정과 제노스키 대좌가 각도에 "학교교육에 대하여서"라는 통첩에 의한 것 같다. 원칙으로 학생이라고 전연 정치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안될 것이나 직접 행동에 참가한다는 것은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그 한계를 지정해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요즈음 중국학생들 모양으로 조국을 찾자는 의사표시를 하는 정도이면 젊은 이상 학생들에는 무관할 줄 안다. 그러나 偏黨的인 것은 결단코 안될 것이다. 이번 경기도 발표는 군정청의 방침으로 우리로서는 그 가부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당국으로서는 학생들에 정당한 정치 훈련을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 1946년 3월 8일 <동아일보> 政治運動에 學生의 無斷 參加 不許

@실제날짜:460307

요즈음 수학 중인 학도들을 정당운동의 도구로 쓰는 경향이 농후한 점도 있어 경기도 못토비 중좌는 별항과 같이 엄중 경고를 발하였는데 학무국장 유억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7일 경기도지사 못토비 중좌는 도지사의 특별한 허가 없이 학생 行列 또는 시위운동에 참가지도를 한 교장 또는 교원은 즉시 징계를 하는 동시에 정치 색채를 띤 단체의 行列 또는 시위운동에 학생이 참가는 허가하지 안을 것을 발표하였다.
  • 1946년 3월 9일 락카드 대위(학무국장) 회견

학무국장 락카드대위는 인터뷰를 통해 미군에 의한 학교건물 사용에 따른 문제에 관해 의견을 발표하였다. 미군과 학무국과의 협조부족으로 학교시설에 대한 피해 등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락카드의 견해였다.[110]

  • 1946년 3월 10일 <동아일보> 光州의 敎職員 非行- 純眞한 學徒 毆打코 警察에

@실제날짜:460301

3월 1일 전남 광주에서 擧行된 기미독립선언 기념대회장에서 일어난 광주 제1중학교 교직원의 반탁학생 구타 사건은 동족 상쟁의 불상사라기보다는 조국 광복의 파괴적 행위로 아니 볼 수 없다. 즉 그 진상은 순진한 학생들이 신탁반대의 스로-건 아래 태극기를 들고 시가 行進을 한 것을 본 광주제1중학교 교원들이 학생들을 불법 인치한 후 "너놈들은 지지하라는 신탁을 반대하는 놈들이 어디 있느냐. 너놈들은 그저 볼 수 없다"하고 무수히 구타하여 중경상자를 내인 것인데 이 불법무도한 반역자의 행동에 대하여 광주 시민은 격분하여 그들에게 문책하였으며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전남경찰부 광주경찰서 엠.피에서는 즉시 暴行한 교원들을 전부 취조하였다.
  • 1946년 3월 10일 <동아일보> 無許可 私立校에 斷- 警務局에서 調査

@실제날짜:460304

해방 후 학무국의 허가도 없이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 간간 있다. 배운다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이며 누구나 배워야 할 것이나 질서있는 사회로서는 정당한 수속과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이에 학무국에서는 군정법령 제6호 제2항으로서 학무국의 허가없는 사립학교는 3월 4일 현재로 전부 폐쇄하고 교과서와 교원, 학생의 명부를 몰수하여 경무국에 보고하라고 각 경찰, 치안관에 엄명을 발하였다. 그러나 어느 학교든지 학무국의 허가가 나리는 대로 다시 개교할 수는 있다.
  • 1946년 3월 10일 <동아일보> 成人敎育 講習會
4월 1일부터 1개월간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지방 지도자를 훈련하기 위하여 성인교육강습회를 4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서울에서 개최할 터인데 강의과목은 국어, 국사, 공민, 교육법, 가정개선 등이다.
  • 1946년 3월 10일 <조선인민보> 無許可 學校 閉鎖- 경무국 발표

@실제날짜:460304

군정청 경무국에서는 금번에 치안관과 각 경찰서장에게 3월 4일 현재로 학무국의 허가없이 운용되고 있는 학교를 적발하여 폐쇄한 후 교원과 학생의 명부및 교과서는 몰수하여 경무국에 제출하라는 명령을 발하였다. 그런데 무허가 사립학교 전부를 폐쇄케 하는 것은 법령 제6호 제2항 "사립학교는 학무국의 허가가 있는대로 재개할 수 있다"는 법규와 관련된 것이라 한다.
  • 1946년 3월 10일 <조선인민보> 淸州學生들에게 激勵文- 조선문화총연맹서 전달
학구의 자유와 학원 자치를 확립하라
청주학생 사건에 감격한 조선문화총연맹에서는 그 실○○○를 하기 위하여 조선교육자협회 조사부장 이준하 씨외 1명을 불일 중 파견키로 결정 그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격려의 멧세지도 아울러 보낸다 한다.
 멧세지
 학원에 있어서의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소탕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난 청주학생 제군! 팟쇼 교육의 근절을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충북학생 제군!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은 전국 문화인, 문화단체의 이름으로 제군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번 제군의 궐기는 조선 민주주의 교육의 확립과 학원자치와 학문 연구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하여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교육의 참다운 민주주의 건설은 학원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팟쇼분자들을 하루바삐 숙청하는 데서만 달성될 수 있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제군의 투쟁이 이제 제군 학생만의 문제이랴, 학원에서만 투쟁이랴, 지금 전 조선의 수백만 학도가 제군을 주시하고 있으며 진실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3,000만 인민이 이 투쟁을 성원하고 있다. 제군의 싸움은 평화와 자유를 위한 싸움이요 민족을 위한 투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치 단결 신념을 견지하여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라. 학원자치제를 확립하자. 학문 연구의 자유 만세. 민주주의 교육 확립 만세. 친일파, 민족 반역자, 팟쇼분자를 학원에서 숙청하라. 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 만세.
   조선문화단체 총연맹
  • 1946년 3월 10일 <조선인민보> 學兵事件 一段落- 석방50명 기소29명
학병사건에 관한 검사국 취조는 지난 8일로써 일단락되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반탁학생은 경찰부 송치 인원 14명 중 3명이 폭력 행위로 기소, 소년 심판소 회부 3명 그외는 석방
 1. 학병동맹원은 송치인원 26명 중 불법체포, 무기소지죄 등으로 기소 ○명, 기소유예 10명 그외 석방.
 1. 국군준비대원 송치 인원 5○명 중 불법감금죄 등으로 기소 15명, 소년심판소 회부 18명, 그 외는 석방.
 1. 청총원 송치인원 ○명 중 소년심판소 회부 8명, 기소유예 2명, 도합 구속 79명 중 기소가 29명이고 기타는 9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된 인원 중 26명은 소년심판소로 회부되었다. 이로써 세인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학병사건 취조도 끝나고 근일에 개정될 공판석상에서 참다운 진상이 나타날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이에 관하여 검사총장 이종○ 씨는 昨 9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검사총장담 학병동맹사건으로 인하여 취조한 결과를 따르면 그들은 전부 20세 내외 청소년들이다. 그들의 연령으로 보나 행위로 보나 대개가 단순한 심리로 일반여론에 인하여 부화뇌동하였던 자가 많으나 검사국에서는 신중 고려하여 그들의 전도를 위하여 특히 관대한 처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금후 행동은 ○○감시할 방침이다.
  • 1946년 3월 10일 <한성일보> 성인교육 강습회-두달 동안 농촌지도자를 양성
지방적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려면 첫째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하므로 군정청 성인교육과에서는 오는 4월 1일부터 5월말까지 두달에 긍하야 성인교육 강습회를 열리라는데 과목은 국어, 국사, 공민, 교육법, 가정개선 등이라고 한다.
  • 1946년 3월 12일 <조선인민보> 淸州學生事件 大團圓- 학무당국의 전면적 승인으로
각 학교 학생은 7일부터 등교
학원에 남아있는 팟쇼 잔재의 증오할 素行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청주학생사건이 누차 보도한 바와 같이 그 봉화는 충북 전도를 휩쓸고 그 여파는 전국적으로 파급할 태도를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되는 바 10일 청주로부터 전하여 온 보도에 의하면 학생, 교원단의 전면적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한다.
즉 지난 6일 각 학교 교원대표 1교 2명, 학생대표 20명과 도학무과 유시학과 청주상업학교 강당에 회합 절충하여 사건의 장본인인 청주일중 교장 이완용 씨의 사직, 파면된 3교원의 복직, 이 사건 전에 파면하였던 제2고여 두 교원의 복직, 관계학생의 희생을 내지 않을 것, 종래 학생, 교원단이 요구하여 오던 이상 여러 건을 3월 24일까지 실시하라는데 대하여 학무 당국은 전면적으로 이를 승인한 것이다. 이리하여 청주 각 학교 학생은 7일부터 등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 1946년 3월 12일 <한성일보> 청주 학생 맹휴 사건-道측 양보로 원만 해결
赤色 교원 파면에 발단한 淸州中學 동맹 휴학 사건은 교원 학생단측에서 제출한
 1. 청주중학교장 李完龍을 사직시킬 것.
 2. 파면시킨 3교원을 복직시킬 것.
 3. 第二高女 파면교원 2명을 복직시킬 것.
 4. 학생을 희생시키지 아니하고 7일부터 등교시킬 것.
이상 네가지 요구 조건을 충북도 학무과 당국측에서 지난 6일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승인하였으므로 세평이 분분하던 소위 청주 학생 동맹 휴학 사건은 이로써 원만히 해결되게 되었다고 한다.
  • 1946년 3월 13일 <조선인민보> 强制的 敎育者는 處刑- 러취 군정장관 담
러취 군정장관은 12일 기자단과의 정례 회견석상에서 근자에 빈발하는 학원의 불상사와 청주학생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현재 교원의 대다수는 구사범학교에서 일제식 훈련을 받은 사람들인데 신교육제도에 의한 훈련을 받은 교원을 전학원에 배치하려면 금후 10년은 요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교원으로서 일제시대와 같은 강제적 교육을 하는 자가 있다면 형벌에 처할 것이다.
 청주학생사건은 보고에 의하면 정치적 반향이 있는 것 같다. 군정 당국의 방침으로서는 교육계는 정치 문제에 관여치 말 것이며 여하한 정치 세력이라도 학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하는 바이다.
  • 1946년 3월 13일 <한성일보> 교육의 파쇼화는 부당- 러군정장관 談

@실제날짜:460312

작 12일 "러취" 군정장관은 출입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전략)
 학교 맹휴사건 : 청주 학생 사건도 있고 한데 조선의 지금 형편은 학도는 늘었으나 그 교수진은 아직 부족하고 또 종래 일본 제도의 사범교육을 받은 관계로 일부에는 그들이 "팟쇼"적 교육 방침을 취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도 절대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문제에 학생이 관계하는 것은 부당하다. 학원이 민주주의적 훈련을 완성하려면 10년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후략)
  • 1946년 3월 15일 <동아일보> 各 學校 敎員에 短靴 配給
서울시 경재과에서는 시내 국민학교 이상의 각 학교 교원에게 양화(洋靴)를 배급하기로 하였다. 가격은 한 켤레에 260원 50전인데 희망자는 문수(文數)를 기재한 신청서를 시 경재과 진학계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단체에도 앞으로 배급할 계획이라 한다.
  • 1946년 3월 15일 <동아일보> 國民校 兒童에 牛乳를 無料 配給
장래 국가의 간성이 될 국민학교 아동의 보건 위생에 대하여는 위생 당국과 학무 당국이  긴밀한 연락밑에 노력하고 있으며 또 각 국민학교에는 아동보건 담임부를 배치하여 영양 부족한 아동의 건강 회복에 노력하고 있는데 시 위생과 영양계에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영단적 사업으로 시내 각 국민학교 아동에게 우유를 무료 배급하기로 하고 13일부터 실시하였다.
學務當局서 保健婦도 配置
현재 시내의 55개 국민학교 아동 중 영양이 부족한 아동에 한해서 한 사람 1홉씩 배급하게 되는데 하루의 배급량은 1천홉에 달한다. 그리고 시위생과의 계획을 보면 앞으로 단백질, 광물질, 지방질 카로리가 풍부한 우유의 생산에 힘써 국민학교 아동 전부에게 될 수 있으면 배급하여 "건아조선"의 이름을 날리리라 한다.
그런데 과거 일제시대에도 이런 계획이 있어서 일부 국민학교 아동에게 우류를 배급하였으나 이것은 전부 일본인 아동에 한해서만 배급한 것이므로 조선인 아동에의 배급은 이번이 처음이다.
  • 1946년 3월 15일 <동아일보> 앞길이 期待되는 새 藝術家의 搖籃
國立으로 音樂 美術 學校 創立-ㅍ校舍는 창덕궁 일부로 내정, 9월에 개교
정서교육 실시의 하나로 새로이 국립 음악학교와 미술학교가 새로이 설치된다. 학무국에서는 앞서부터 조선의 예술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분과연구회를 두고 예술진흥책을 조사 준비 중 우선 미술과 음악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여 인재 양성에 이바지 하기로 되었다. 두 학교는 관립으로 모두 구왕궁청 창덕궁안 궁궐을 이용하여 오는 9월 새학기부터 개학을 하리라 한다. 과목은 동서양의 미술과 음악을 교수하며 교수진은 사계의 권위들고서 망라하리라 하는데 조선 예술의 진가를 발휘할 미래의 예술가들 좋은 요람터가 될 것으로 기대가 자못 크다.
  • 1946년 3월 18일 <동아일보> 平壤 學生 盟休는 擴大
기보한 바와 같이 3.1 기념일을 앞두고 평양의 열세 남녀중등전문학교 학생 일동은 돌연 27일 김일성 장군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일제히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는데 15일 개성의 미소(美蘇) 체신대표의 우편물 교환장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점점 사건이 확대되어간다고 들린다. 즉 28일부터 동맹 휴학을 斷行한 이 사건에 가담치 않았던 평의전(平醫專), 평공전(平工專), 광성중학, 협신고女, 서문고女 등의 다섯 학교까지 가담하였다. 이리하여 여기에 가담한 학생은 約 만여 명으로 교육부에서는 이 사건의 확대됨을 우려해 평양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하여 5일까지 전부 등교하라고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항쟁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는 지난 1일부로 발표한 토지개혁법령에 의하여 지난 6일 북조선의 토지 전부를 몰수하여 빈농가에 매호당 1만 5천평씩 분배하여 주었다 한다.
  • 1946년 3월 18일 <동아일보> 學園울리는 食糧難과 物價高- 下宿費만 7,8백圓
식량의 핍박을 참자. 새 조선의 일꾼이 될 우리 학도들의 학창생활에 까지도 일대 협위가 되고 있다. 즉 해방 이후 점점 핍박해 가는 식량사정과 아울러 천정을 모르게 오르는 물가고로 인한 학생 하숙비는 껑충 껑충 올라 한달에 7, 8백 원 내지 천 원 가까이 내어야 되게 되었다.
中學以上 各校에 退學者 續出
이외에 학비까지 합하면 방금 학생 한사람의 한달 비용이 천 원에서 1천 수백 원까지에 달하여 이를 지출할 학부형의 부담은 너무나 과중하며 8.15 해방 후 시내 각 중등학교와 전문학교의 퇴학자가 속출하고 있는 형편인데 최근 통계를 보면 한 학교 평균 30명이 학비로 말미암아 학창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될 사정에 있음은 묵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지난 15일에 열린 경기도내 중등학교 교장회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어 이의 대책으로서 도 학무과가 주관이 되어서 각 중등학교를 망라한 소비조합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과연 얼만한 성과를 거둘는지 자못 주목되고 있다.
消費組合을 計劃- 道 學務 當局 談
16일에 열린 중등학교 교장회에서도 논의되었었다.
생도만이 아니라 생활란으로 교원들도 이동이 있는 모양인데 시급히 소비조합을 만들어 학생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공부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지금같이 하숙비가 많아 가지고서는 학생보다 학부형이 더욱 곤란할 것이다.
  • 1946년 3월 21일 <동아일보> 民主 敎育制度를 確立- 日本에 學務局長을 派遣

@실제날짜:460318

신교육제도를 제정하는 등 의무교육제 실시에 분망한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이번 미국의 교육 시찰단의 도일(渡日)을 기회삼아 락카-드 미국인 국장과 오천석(吳天錫) 부국장이 맥아-더 사령부로 가서 미국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것과 갱생일본의 교육상황을 시찰하기로 되어 21일 상오 금포(金浦) 飛行場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는 미국 각 대학의 유수한 심리학의 권위 숀다이크 박사 등 ○명으로 편성된 교육사절단이 와서 맥아-더 사령부와 협조하여 신 일본의 민주주의 교육을 개편하고자 기왕의 교육제도를 검토하는 한 편 소위 皇道 일본 교육의 근본인 비민주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인 교육정책을 송두리 채 고치려 하는 중이다.
기왕에 오랜 동안 일본적 교육을 받아온 조선의 교학 당국으로서도 새로운 구상 아래 두분이 도일하여 조선의 교육제도와 그간의 사정과 의무교육제도안을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하고 아울러 조선교육의 재건책에 대한 의론을 미국시찰단과 같이 하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두분은 체일 중 일본의 교육실정을 시찰하여 約 3천 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재일 조선학도의 면학 상황을 조사하고 4월초에 미국교육시찰단 1부와 같이 귀임할 예정이다.
  • 1946년 3월 21일 <동아일보> 學園의 自由, 學生釋放을, 北朝鮮 人民委員會서 承認

@실제날짜:460318

지난 2월 28일부터 斷行 중이던 평양의 16개 남녀중등전문학교의 동맹 휴학은 믿을만한 소식에 의하면 드디어 19일만인 18일부터 학생측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북조선인민위원회 당국의 확답을 얻고 등교하게 되었다 한다.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斷行하게 된 것은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절대로 반대한다는 것을 기회로 지난 정월부터 평양에서는 일부 삼백여 학생들이 보안서에 류치되고 있어 3.1 기념일을 계기로 하여 탄압이 심함으로 2월 28일 남녀 중등이상 학교는 일제히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는데 류치된 학생들이 단식을 하며 당국의 반성을 촉구하든 중 지난 16일 공업전문학생 대표 엄순수 군 등이 김일성 장군을 만나 학원의 자유와 류치학생 석방 등 두가지 요구 조건을 수락하기로 하여 드디어 등교하게 된 것이다. 이 요구 조건대로 履行되면 학원의 휴학 사건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고 볼 것이라 한다.
  • 1946년 3월 23일 <동아일보> 祝福받는 地方 中學- 이리, 고창, 대구, 선산에 新設
일제의 악착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우리 학원의 명랑건설보- 네 사립중등학교- 이리 남성중학, 고창고등여학교, 선산오상중학, 대구 용인중학교는 그동안 각각 지방류지의 독지로 설립하여 인가를 수속 중이었든 바 22일 군정청으로부터 정식 인가가 내리어 각각 불원간 개교하기로 되었다.
 ▲ 南星中學 - 리윤성(李潤成) 씨가 수입금 92만 5천 원의 전답 102만 4,220평을 기부하여 설립된 것인데 지난 4일에 벌써 개교하였다.
 ▲ 高敞高女 - 김승옥(金升玉) 씨가 현금 5백만 원과 전답 36평을 던저 설립하였는데 4월 1일 개교 예정이다.
 ▲ 五常中學 - 김차석(金車錫) 씨의 특지로 토지 5만평의 수입금 40만 1,700원과 동 씨가 직물공장으로부터 수입된 것을 희사하기로 되었다.
 ▲ 龍仁中學 - 모절(寺)에서 현금 55만 1,185원을 학교 기금으로 기부하고 앞으로 매년 19만 6,230원씩을 보조하기로 되었다.
  • 1946년 3월 23일 <동아일보> 廢校된 永明學校- 同窓會에서 復校 計劃
그동안 폐교 중이던 공주 영명학교는 동교 출신 인사들이 복교 준비를 進行 중인데 오는 24일 하오 3시 시내 인사정 중앙예배당에서 전교장 우리암(愚利岩) 박사 출석하에 동교 동창회를 열게 되었다. 동창생은 빠짐없이 참석해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 1946년 3월 25일 <조선인민보> 學園잃은 學生 500명- 경성법정학교 드디어 폐쇄
경성법정학교 드디어 폐쇄- 법령 제6호 2항 무허가 학교 폐쇄령에 의하여 지난 19일 도경찰부로부터 25일부로 폐쇄 통첩을 받은 동교에서는 즉시로 교장 이하 전 교원이 연일 학무 당국과 절충하는 한편 학생들도 학원의 존망을 걸고 궐기하여 학무 당국에 선처를 진정하고 학부형회를 비롯하여 학생행동통일위원회, 각 사회 문화단체에서도 적극적 성명을 아끼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이미 정한대로 오는 25일 폐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갑자기 학원을 잃은 재학생 500여 명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 1946년 3월 27일 <조선인민보> 民主的 敎育을 살리자- 민전서 담화 발표

@실제날짜:460326

법정학교 폐쇄에 관하여 26일 민전 교육문화 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전략) 당국이 드는 폐쇄 이유는 1. 학교 무허가, 2. 현 교사 사용이 불법 침입이라는 것, 3. 교수 진용과 이사들이 불량하다는 것, 4. 강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제1의 허가 수속은 작년 10월 30일 부로 수업 재개시의 屆出을 하고 12월 5일에 정식 허가 수속을 하여 구두 승인을 학무국으로부터 받고서 지금까지 그 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며, 제2의 교사 사용 수속은 군정청 법령에 있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조치를 완료하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3, 제4의 문제는 마치 일제가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우리를 가르쳐 불영선인이라고 하여 학대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고 한민당 간부의 보전, 연전 교장이나 여자국민당 당수의 중○ 교장 나아가서는 학원의 총책임자 유학무국장의 당적을 볼 때 1-2인의 좌익 정당원이 강사에 있다고 하여 학원의 정당성을 운운하고 민주주의 강의가 불온하다는 등의 문제는 확실히 반민주주의 진용의 대변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결코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민주주의 교육에서 자라온 미군정 수뇌자의 진의가 아닐 것은 물론이고 민주주의 민족문화건설의 중대 임무에 처한 교육계를 위하여 당국의 맹성을 促求하며 우리는 3,000만 동포와 더불어 이 사건의 처단을 주목하는 바이다.
  • 1946년 3월 27일 <조선인민보> 서울大學 醫學部 제1회 卒業式

@실제날짜:460326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서울대학 의학부 제1회 졸업식을 26일 오전 9시부터 법문학부 강당에서 러취 군정장관, 락카트, 유억겸 양 학무국장 이하 관계 내빈 다수의 참석하에 擧行되었다. 먼저 애국가 합창, 졸업증서 수여가 있은 다음 오랫 동안 형설의 공을 닦고 해방 조국의 후생을 등에 짓고 나서는 의학사 34명을 배출하여 러취장관, 유국장의 간단한 祝辭가 있고 힘찬 재학생의 졸업생을 보내는 송사, 졸업생의 답사로 11시 성황리에 끝났다.
  • 1946년 3월 27일 <조선인민보> 하-지 中將에게 陳情 - 재개교 전취로 법정학생 활약

@실제날짜:460326

경찰당국으로부터 무허가학교폐쇄령의 세례를 받아 눈물로서 학교를 잃은 오백 명 법정학교 학생들은 거리에 방황하며 사랑하는 모교를 다시 얻으려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눈물겨운 애원을 각 방면에 하고 있는데 작 26일 오백학생 일동은 학교를 다시 돌려달라고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눈물의 진정서를 제출하고 탄원, 타방 군정청법령에 저촉되어 폐쇄당한 이유가 부당하다는 것을 허가 관계 건물 불법침입 정치적 색채 등으로 나누어 자세히 기재한 항의문을 당국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법정학교폐쇄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폐쇄명령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번 잃은 학교를 다시 전취할 때까지는 생명을 걸고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는데 과연 앞으로의 법정학교 문제는 어떻게 낙착될 것인지 청천병력같은 이 선풍은 교육계는 물론 일반의 이목을 총집중시키고 있다.
  • 1946년 3월 27일 <해방일보> 京城法政學校閉鎖眞相 (一)
一. 지난 3월 4일 부로 군정청 경무국으로부터 무허가 학교 페쇄령이 공포되어 사회 각계의 비난이 맹렬하고 조선 교육계에 끼친 영향이 자못 중대한 바 있거니와 돌연 지난 3월 19일에는 경성법정학교에 동대문서원이 나와서 경기도 경찰부장의 명령이라 하여 3월 23일 오후 4시까지 학교 인가 서류와 교사 사용 허가 서류를 제출할 것과 만약 不然이면 3월 25일 부터 수업을 정지시키고 학교를 폐쇄시킨다는 요지를 전달하고 갔다. 그러나 본교는 하등 여사한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음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 진의가 奈邊에 잔재하여 있는가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작년 8월 15일 이후 수업을 재개한 이래 금일 까지 본교의 군정청과의 관계를 사실대로 열거하고자 한다.
 그중에도 우리가 이곳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찍이 일제의 폭정 시대에 있어서도 학교의 내용이 재미적다는 이유로 학무국으로서 사전에 일언 반구의 상의나 전달도 없이 경무국으로 하여금 폐쇄를 시켰다는 예는 들어본 기억이 없을 뿐 아니라 현재의 500명 내외의 재학생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크나큰 사회 문제라 아니 볼 수 없다.
二. 본교는 서기 1910년에 창립되어 법정경제 계통의 전문 과목을 교수하여 왔었는데 그 간 다수의 졸업생을 사회에 보내고 경영자도 여러 차례 경질하여 왔다.
 최근에 이르러 서기 1943년에 경성 묘심사 주지 華山大義가 경영권을 인계하는 동시에 교장 겸 재단이사장으로 就任하여 확충에 노력하던 중 서기 1944년에 전시 비상 조치령인 법문계 계통 전문대학 폐지 통합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이 법령에 의하여 본교는 야간 수업으로 변경되고 주간에는 근로 봉사라 하여 강제 노력에 동원케 되어왔던 것이다.그러나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재학생이 징병으로 끌려가고 징용으로 잡혀가게 되니 학생은 안정하여 학원에 열중할 수 없게 되고 1944년 가울부터 시작된 사상범 혐의자 대검거 선풍에 휩쓸려 본교의 단 한사람인 조선인 교원 이응규 씨가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된 후부터는 재학생 중에선 자기고향이나 또는 그 외각처로 피신하는 학생이 속출하였다. 사태가 여사하게 됨에 서기 1945년 봄 신학기에는 잔존 학생이 겨우 80명 내외에 불과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응규 교원이 불구속 송국되어 일시 석방됨에 서기 1945년 4월 1일 부터는 재학생 전부와 이응규 교원을 전매국 공장에 보내어 혹은 석탄회운반 혹은 연초상자운반 혹은 청소작업 등 기타 잡역을 강제로 시켜오던 중 예의 8월 15일을 맞이한 것이다. 8월 15일 즉후 시국이 혼란하자 재학생은 전부 사회치안 작업에 종사하게 되고, 당분간 학교는 휴교케 되었다. 그 사이에 한편 화산이하 일인 교원은 교내의 비품을 매각하고 재단정리금 후원회금, 수업료 등 공금 수십만 원을 횡령하고 증거가 될 만한 서류는 금전출납부를 비롯하여 전부 소각하였다. 한편 재학생과 사회 여론은 학도를 하나라도 빨리 학창으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는 의견이 대두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인 교원의 非行 추궁과 사회여론을 위하여 9월 24일 수십 명 졸업생 출석하에 본교 내에서 졸업생 동창회를 개최하였다. 동회석상에서
  1. 교장이하 일인 교원의 非行 조사 2. 신재단 확립 3. 금후의 학교 운영 방침을 결의하고 만장일치로 재건위원회가 조직되어 수업을 즉시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의 군정청은 사회 여론을 무시하고 일인과 契約하여 일인 재산을 자유로이 매수 또는 대상 혹은 무상으로 양도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하였음으로 재건위원회는 즉시 묘심사측과 교섭하여 군정법령에 근거하여 그들의 횡령한 공금의 대상으로 본교 재단과 묘심사 토지 건물 및 묘심사 교학재단의 토지를 문서로써 契約하여 정식으로 양수하였다. 또 때마침 여사한 법령이 나오자 본교 재건위원의 一人이 기계화 국방협회 조선본부와 문서 契約으로 현재 본교가 사용하고 있는 교사를 무상으로 양수하여 본교에 제공하였다. 일방 재건위원회는 활동을 계속하여 본교에 100만 원을 기부하려는 독지가를 물색하였으므로 교무 처리는 본교 구 교원인 이응규 교원에게 일임키로 하고 10월 22일에 제2회 동창회를 개최하여 종래의 활동 경과를 보고한 바 있었는데 동회 석상에서 이후의 학교운영에 관한 일체의 건은 재건위원회에 일임하기로 만장일치 가결되었다. 이에 앞서서 재건위원회는 잔존 재학생과 징병징용으로부터 돌아오는 재학생, 피신하였던 재학생 등을 망라하여 수업을 재개한다는 학교 방침을 발표하였다. (계속)
  • 1946년 3월 28일 <해방일보> 京城法政學校閉鎖眞相(二)
三. 당시에 군정청에서 발표된 기술 법령에 의하면 일인 가옥이나 기타 재산은 일인과 契約하여 군정청에 屆出할 때에는 정식으로 사용 할 수 있고 2개월 후에는 契約 내용에 따라서 매매, 무상양도, 유상양도가 확정적으로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건위원회는 군정청의 법령을 준수하여 이상의 제 수속을 취하고 특히 본교 현교사 사용에 관하여서는 제출 서류를 가지고 재건위원회의 오규석, 나병주, 정정남, 이응규 4인이 작년 10월 29에 군정청 제211호실 (재산관리과)에 제출하고 특히 계출 서류를 맞혀보는 김태원 씨에게 수리시키고 즉시 사용하여도 좋다는 양해까지 받고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교사를 사용하기는 작년 12월 1일 부터이다. 이와 전후하여 군정청 학무국을 방문하고 학교 수업 재개시에 관하여 문의한 결과 종래 존속하였던 학교가 수업을 재개시 할 때는 간단하게 수업을 재개시 한다는 계출만 한다면 족하다는 것이 군정청 학무국의 당시 태도였다. 이 방침에 따라서 본교는 11월 1일 부터 수업을 재개시 하기 위하여 10월 30일 부로 수업 재개시의 계출을 군정청 전문학교계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본교는 예정대로 11월 1일 부터 구교사에서 수업을 다시 시작하며 한편 보결생과 신입생을 모집하고 구교사로부터 신교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이 사이에 전문교육계장 박종홍 씨로부터 좀 더 자세하게 서류를 꾸며 달라는 전화를 받고 누차에 걸쳐서 전문교육계에 출두하여 지도를 받고 완비된 서류를 12월 5일 12월 9일 양 일에 제출하였다. 이것으로 수속은 완료되었다. 그 후 수일이 지나 박종홍 씨가 경성대학 교수로 전임되게 됨에 잔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법정학교 인가건을 가결하고 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재건위원회에서 이응규, 남병주 양 씨가 박종홍 씨를 방문하자 씨는 오천석 학무과장에게 본교에서 제출한 서류를 가지고 일일히 설명함에 오천석 씨는 쾌히 구두로 인가하고 인가 서류는 이삼일 후에 찾아 가라고 말하였다. 과장실에는 오천석 박종홍 양 씨가 신임 전문교육계장 정○모씨, 재건위원회 남병주 이응규 양 씨 합 오인이 합석하였다.
 또 그뿐아니라 당시 시국이 중대한 만치 본교에서는 동기 휴가를 없애고 수업을 계속하겠다고 학무국에 구두로 보고하였었다. 그러나 고등교육계에서는 다른 전문대학과 동일한 보조를 하여 학무국 방침에 순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었다. 그리고 즉시 12월 7일에는 동계 휴가에 관하여 다른 전문대학과 동일한 공문을 보냈음으로 본교에서도 종래의 예정을 변경하여 동계 휴가를 하였던 것이다. 오천석 씨의 구두인가가 있은 후 약속대로 이삼일 후에 인가 서류를 찾으러 가니까 어느 때는 국장이 회의 중이라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多事하여 결재할 여유가 없다는 등의 구실로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한국민주당원인 유억겸 씨가 국장의 자리에 앉았었다.  씨는 일찍이 연합군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본 비행기를 제작하는 박흥식 일파의 朝飛 기술원 양성소인 광신공업학교장으로 취임한 일도 있고 또 연전서 미국인 교직원이 쫓겨간 후 조선총독부의 추천으로 연전 교장으로 취임도 하였던 분이다.
四. 그 후 인가 서류를 찾으러 갈 때마다 고등교육계에서는 법정학교는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안은가 하고 묻고 또 어느 때는 교수나 강사 중에 정치 방면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최후의 제출 서류는 국장으로부터 각하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경무국으로부터 호출이 있어 본교에서 출두한 교원에게 건물 사용 인가와 학교 인가가 있는가 하고 묻기에 기술한 바와 같이 수속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였다. 여사한 일이 있은 후 삼월 사일부로 경무국에서는 무허가학교 폐쇄령이란 것이 내렸다. 폐쇄령이 공포된 후 경무국 경찰부 동대문서로부터 수차에 ○하여 호출이 있었고 거의 매일같이 출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면에 나타난 이유의 하나는 현 교사 사용이 불법 침입이고 학교가 무허가라는 것이다. 그외에도 학교로서 불미한 점이 다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학교에 교수 진용이 불량하며 이사들 또한 그러하고 학교 강의 내용이 불순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에 관계있는 정태식 씨가 강사로 나오고 학교 개학식에서도 적기를 달았다는 등 기타 대동소이한 제 문제였다.
  • 1946년 3월 28일 <해방일보> 法政學校閉鎖에 對하여 民戰敎育文化委員會 談
법정학교가 폐쇄 명령을 받았다는 것은 극히 유감되는 바이다. 당국이 드는 폐쇄 이유는 1. 학교의 무허가, 2. 현 교사 사용의 불법 침입이라는 것, 3. 교수 진용과 이사들이 불량하다는 것, 4. 강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점 등이라고 하는데 제1의 허가 수속은 작년 10월 30일 부로 수업재개시의 계출을 하고 12월 5일에 정식 수속을 하여 구두 승인을 학무국으로부터 받고서 지금까지 그 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며 제2의 교사 사용 수속은 군정청 법령에 있어서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처치를 완료하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3, 제4의 문제를 마치 일제가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우리를 가르쳐 불령선인이라고 하여 대우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고 한민당 간부의 普專, 연전 교장이나 여자 국민당수의 中保校長 나아가서는 학원의 총책임자 유학무국장의 당적을 볼 때 1, 2인의 좌익 정당원이 강사 중에 있다고 하여 학원의 政黨性을 운운하고 민주주의 강의가 불온한다는 등의 문제는 확실히 반민주주의 진영의 대변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최근 남조선 각지에서 빈발하는 학원에 대한 불상사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며 학무 行政을 통한 친일파 반민주주의자의 毒牙가 학원을 농단하려는 최후적 단말마적 공세를 보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결코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민주주의적 교육에서 자라온 미군정 수뇌자의 진의가 아닐 것을 확신하고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의 중대 임무에 처한 교육계를 위하여 당국의 맹성을 促하며 우리는 삼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사건의 처단을 주시하는 바이다.
   3월 26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 1946년 3월 29일 학무국이 문교부로 승격

군정청 법령 제64호에 의해 학무국이 문교부로 승격되었다. 문교부의 하부 조직도 部(Departments), 局(Bureau), 課(Section), 係(Subsection), 班(Branch)으로 개편되었다.[111]

  • 1946년 3월 30일 <해방일보> 京城法政學校閉鎖眞相(三)
五. 유감이나 이상 이유로써 학교를 페쇄시킨다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본교는  종래 수십년간 존속해 온 학교이며 작년 8월 15일 까지도 학교와 학생이 엄존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군정청 학무국의 의견과 같이 수업 재개시의 屈出만 한다면 족한 것이다. 그러나 재건위원회는 구교원 이응규 씨로 하여금 학무국과 교섭케 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의 군정청 학무국 전문교육계의 지시하에 자세하고 정당한 수속을 완료하고 구두 인가를 받았으며 또 서류 인가도 내주기로 約束받은 것을 言을 좌우로 하여 차일피일 밀기만 하고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요 본교의 책임있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고등교육과에서는 법정학교 인가 문서가 작년 12월 18일로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역분자의 책동으로 내주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었던 것이다.
 교사 사용은 절대로 불법침입이 아니다. 답십리 교사 사용 당시에 군정청에서 발표한 법령에 준수하여 정식 수속을 취하고 사용한 것이다. 그 후의 개정 법령에 의하더라도 관계 사무와 임대차 契約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본교 소재지인 답십리町은 동대문구에 속해 있고 동대문구 내의 일인 가옥은 신탁회사서 취급하고 있지만 신탁회사는 아직도 그 업무를 정식으로 개시하고 있지 않다. 업무를 개시하는 날에는 즉시 임대차 契約을 체결할 것이다. 조흥銀行신탁회사 등의 관계 사무처의 견해는 본교와 같은 경우에는 불법침입이 성립안되니까 현장 조사 나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며 그 후에 契約은 전 법령에 의하여 일인과 契約을 맺고 종래 들어있는 사람이 연고자이니 만치 그들에게 契約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 상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 이유는 본교를 폐쇄시키려는 이유도 되지 않커니와 본교를 페쇄시키려는 진의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백보 양보하여 이상의 이유가 성립된다 하더라도 학무국으로서는 본교가 조선 청년을 교육하는 교육 기관인 만치 어디까지던지 협력 시정하여 본교를 육성하는 것이 당로인이 취할 길일 것이다. 하나라도 교육 기관이 더 생기는 것을 삼천만이 희망하고 있는 오늘 작년 8월 15일까지 수십 년 존속해 온 학교요 현재 500여 명 학생을 수용하는 교육 기관을 없앤다는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 정당한 두뇌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교수진용이나 이사진이 불량하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실로 포복졸도할 일이다. 교수나 이사들이 강도나 절도와 같은 파렴치한 이라든지 가두의 불량배라면 모르거니와 교수나 이사가 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여 그렇다면 이것은 마치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우리를 가르쳐 不逞鮮人이라 하여 학대하던 것과 조금이라도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있어서도 이런 경우에는 교원만 정리하였을 뿐이요 이것을 구실로 하여 학교를 폐쇄한다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지난 3월 5일 38선 철폐 운동을 구실로 반역분자들이 시위 行列을 하고 소련영사관과 서울 신○사에서 暴行을 하였을 때 일제 시대에 일황에게 가장 충성하고 용맹을 날리던 고급장교 김석원이가 暴行 학도의 선도에 섰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을 때도 당국의 견해는 그가 현 성남중학교 교장이 아니고 성남중학의 이사이니까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법정학교 이사는 단지 민주주의적이라 하여 문제가 되고 한발 더 나아가서 학교 페쇄의 문제에 까지도 영향된다는 말인가. 또 당에 관계 있는 사람이 일 주일에 한번 강사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운운하고 학교의 존폐를 운운한다면 학교 강사는 고사하고 현재 정당 당수나 당원이 학교 교장으로 있는 학교는 어떻게 처리하나. 당국의 논법을 빌어서 말하다면 한민당 간부 현상윤 씨가 교장으로 있는 보성전문학교와 여자 국민당 당수 임영신 씨가 교장으로 있는 중학보육학교나 한국민주당에 관계있는 ○대예과나 백낙준 씨가 교장으로 있는 연전은 폐쇄된지가 이미 오래일 것이다. 또한 학원의 정당성을 운운하면 학원의 총책임인 학무국장 유억겸 씨가 한국민주당원임은 無所共知이며 赤旗는 학교에 게양한 일도 없을 뿐아니라 본교에 있는 기는 교기와 태극기 두 개 밖에 없다. 이와 같은 날조의 사실을 열거하여 문제로 삼는다면 한이 없을 것이다. ○○○은 어디까지 든지 민주주의에 입각한 학교라는 것을 선언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8월 15일 이후 아직 반해밖에 되지 않아 학원에는 이때것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음으로 참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베푸는 학교가 드물다. 그러나 본교는 가장 우수한 민주주의학자를 망라하여 어느 학교보다 탁월하게 민주주의 교육을 해왔고 현재에도 하고 있으며 장래에도 할 것이다. 물론 본교는 진리를 탐구하고 과학적 교육을 베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가지고 교수 내용이 불온하다고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六. 이러한 모든 점을 要約해 보건데 본교 페쇄 의도는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장한 분들의 진의는 아닐 것이다. 오로지 친일파 반민주주의적인 자들의 책동일 것이다. 최근 물가 폭등과 교통난으로 생활에 ○○하는 학도들에게 또는 신성한 학원에 까지 친일파나 반민주주의적인 자들의 ○○○가 설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교 학생은 그러한 모든 불순한 유혹을 물리치고 감연히 서서 학업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본교야 말로 가장 민주주의적인 교육을 베풀고 진리를 사랑하며 과학적인 방법을 존중하는 까닭에 학생들이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일파나 반민주주의적인 자들은 이러한 학교를 불유쾌하게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몹시 두려워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럼으로써 이 자들은 본교를 없애려고 이궁리 저궁리를 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염출한 안이 하나는 주택 불범 침입 이요, 또 하나는 무허가 학교라는 부당한 이유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의는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전후 사정을 추측하건데 어디까지든지 민주주의 교육을 하는 학교를 없애자는 배짱에서 나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1946년 3월 21일
  • 1946년 3월 31일 <동아일보> 日本色 學校名- 市서 全面的으로 一掃
시청 학무과에서는 일본 색채를 일소하여 시내 국민학교 명칭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고 4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日出―日新, 櫻井―永禧, 櫻丘―靑邱, 西部男子―太平, 北部男子―昭義, 竹添―金華, 馬場―東明, 三坂―三光, 錦町―錦陽, 元町―南江, 北阿峴―북성, 西孔德―德昌.
  • 1946년 3월 31일 <조선인민보> 日本式 校名 改稱

@실제날짜:460401

학교 명칭부터 일본색을 말소하자고 시내 각 국민학교에서는 4월 1일부터 종래의 일본식 교명을 조선명으로 변경하게 되었는데 개명교는 다음과 같다. (괄호내는 새로운 이름)
 일출(일신), 櫻정(영희), 일공(청인), 서부남자(대평), 남자(소의), 죽첨(금화), 마장(동명), 삼판(삼광), 금정(금양), 원정(남강), 북아현(북성)
  • 1946년 3월 31일 <조선인민보> 學園에 彈壓은 不當- 법정학생들 미소공위에 진정
경성법정학교에서는 폐쇄령을 받은 이후 백방 선후책을 강구하는 한편 당국과 直摯한 交를 거듭하여 왔으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500여 학생은 갈 곳을 잃고 학원을 쫓겨나게 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바, 금반 동교 폐쇄 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비민주적인 학원의 탄압 중지를 호소하고 급히 본교 폐쇄령을 취소할 것을 탄원하였다 한다.
  • 1946년 3월 31일 <한성일보> 倭式校名을 抹消- 市內 13小校名 變更

@실제날짜:460401

서울시내에는 많은 국민학교가 있으나 그 교명은 소위 일본 정신의 구현이란 구역질나는 이름이 대다수이므로 일본적 색채를 일소하여 어린이로 하여금 대국민으로서의 긍도를 배양시키고자 4월 1일부터 다음 학교에 한하여 새로 교명을 변경시키게 되었다.
 舊        -     新
 日出      -     日新 
 櫻井      -     永禧
 櫻丘      -     靑邱
 西部男子  -     太平
 北部男子  -     昭義
 竹添      -     金華
 馬場      -     東明
 三坂      -     三光
 錦町      -     錦陽
 元町      -     南江
 北阿峴    -     北城
 西孔德    -     德昌


1946년 4월

  • 1946년 4월 00일 한국교육 재건을 위한 전문가 회의 개최

한국 교육의 재건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전문가 회의가 미국 워싱턴에서 46년 4월과 5월에 걸쳐 개최되었다. 미국 3개 대학 총장들, 미연방정부 교육국 관리들, 국제교육관계과의 자문위원들, 기타 교육전문가들이 참석하였다. 회의 결과는 최종 건의서인 "Recommendations of the U.S. Office of Education Regarding Educational Reconstruction in Korea"으로 정리되어 한국교육위원단에 전달되었다. 회의참석자 명단은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다.[112]

  • 1946년 4월 1일 <조선인민보> 登校치 않는 學生은 除籍- 충북지사 선언
청주일중학생 사건에 대한 학무 당국의 ○○은 신조선 민주 학원 건설 도정에 재미없는 암영을 던진 것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는데 충북도지사는 "4월 5일까지 등교하지 않으면 무조건 제적한다"는 극히 비민주적인 공문을 ○○하였으며 당지경찰서장 이○○ 씨 등을 구속한 것은 군정포고 제19○에 의한 것이라 하며 생도가 자기 과오를 깨닫고 4월 5일까지 등교한다면 석방하겠다고 말하였다 한다.
  • 1946년 4월 1일 <조선인민보> 全國 學生非常蹶起大會- 민주학원 건설을 갈망

@실제날짜:460330

미소공동위원회에 멧세지 전달. 전국학생비상궐기대회는 지난 3월 30일 오후 2시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각 전문, 중등교 참가 아래 탑골공원에서 개최되었다 하는데 이날도 악질 비민주주의 정치가들의 주구들이 잠입하여 의사 진행에 약간 무리가 있어 장내는 일시 수라장화하여 무장경관대의 발포까지 보게 되었으나 3천만 인민을 위해 죽기를 맹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와 학원 건설을 열열히 희구하여 마지 않는 순정무후한 학도들의 불타는 성의는 끝끝내 모든 ○○과 ○○을 ○하고 백만 조선 학도의 총의를 ○○하여 법정전문학교 폐쇄 반대 성명과 공동위원회에 보내는 멧세지를 다음과 같이 결의하여 이날의 대회를 의의있게 끝마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내는 멧세지
(전략) 8.15 이후의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반민주주의적 팟쇼 분자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반대하는 악질 책동으로서 또다시 조선○○○○○ 인민○○○에 ○○내었다. ○○○○○ 이러한 분자들을 제외하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하여 국제노○을 따르고 있는데 비추어 조선 백만학도도 급속히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확립하고 학교내에서 팟쇼 교원을 숙청하고 민주주의 학원 건설을 갈망한다. (하략)
 1946년 3월 30일 전국학생비상궐기대회
  • 1946년 4월 1일 <조선인민보> 淸州一中 事件 드디어 再燃- 深更에 학생을 속속 체포

@실제날짜:460325

청주 청주일중의 맹휴 사건이 ○의를 몰각한 학무 당국의 기만적 사기로 재현되었다는 것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후 학무 당국은 조금도 반성하는 빛이 없이 도리어 순진한 학생들의 요구를 一蹴하고 더 한층 탄압을 가하고 있는데 결과에 따라서는 당지 전 학원이 총궐기할 태세를 보이고 있어 그 귀추가 크게 주목되고 있다. 즉 지난 3월 25일 兪視學과 더불어 청주일중을 비롯한 각 중등학교 생도대표 각2명, 교유대표 각2명, 그 외 중등 교원단 대표, 청주상업 최교장, 동 사범 김교유 등이 대동 회합하여 토의한 결과 24일까지 학생들의 6개조 요구를 관철시킬 것을 約束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4일에 이르러서는 양심없는 태도로 전언을 반복하고 순진한 생도의 신뢰를 일소에 부친 기만책으로 나오게 되어 분개한 학도들은 학원의 정의를 위하여 지난 25일 재기한 것이다.
학무 당국은 그 익일에 이르러 완전히 태도를 표변하여 탄압을 가하는 수단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 학문연구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 ▲ 5명 선생 절대 복직 ▲ 독재적 교육 행정 절대 배격 ▲ 학무과장(고광만) 절대 배척의 4개조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다시금 학무 당국의 비열한 조치에 대하여 궐기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개입한 당지 경찰에서는정당한 학생들의 요구를 일부 학생들의 선동이라고 하여 26일 심경 10여개소 학생들을 ○○ 수사하고 ○○○숙에서 손지환 군 등(청주일중 4학년)을 체포하는 동시에 청주일중 기숙사에서 오대원, 유치순 양 군을(양 군은 청주일중 4년생)을 체포하여 갔다. 그리고 청주제일고여에서는 전 사건의 관계자 3명을 퇴학 처분하고 35명을 무기 정학에 처하는 등 그 소치는 일제 노예 교육 이상의 탄압으로 학도들의 분개는 날로 높아가고 일반의 물의는 더 한층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 1946년 4월 1일 <한성일보> 배움도 먹고라야- 시내 각 소중교 全月 결석생 5천
하숙은 없고 기숙사는 폐문. 학도들이 오직 학구에만 전념하여야 할 것이로되 쌀이 없어 기숙사가 폐지되며 하숙할 데 없고 하숙하여도 충분히 먹지 못하여 학원에 결식·결석율이 매일 늘어가고 있다. 38도 이남 각 소학, 중학, 전문대학교의 학생 총수는 작년 12월 15일 현재로 1,722,938명으로 일제 시대 즉 1944년에 조선인, 일본인 학생 총수 1,553,336명보다 약 20만 명이 증가되었다. 그러나 38도 이남 각도에 6세부터 18세까지의 인구가 5,687,139명 중에 약 30% 인 1,713,247명밖에 취학되지 않아서 당국에서 학령 아동의 취학률을 훨씬 올리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하나 더 늘기는 고사하고 학자 문제와 식량난으로 말미암아 매일 출석율이 줄어가고 있다. 
서울안에 있는 각 소학, 중학교의 2월 중 출석율을 조사해 보건대 소학, 중학을 합하여 550교 349,518명 중에 全月 결석자 수가 4,922명으로 약 1.4%이고 학교 종류별로 나누면 공립중등학교가 약 10%, 사립 중등학교가 약 5%, 잡종 중등학교가 약 20%, 공립 소학교가 약 7%, 사립소학교 약 4%와 교직원이 정원보다 약 7%가 부족하다.
전월 결석율이 이만큼 많은데 따라 하루 이틀 결석자는 이루 그 수효를 헬 수 없으며 이즈음에는 더욱 심각하여져서 어느 학교는 매일 평균 결석율이 약 30%라는 참담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어 당국의 시급한 조치가 요청된다.
  • 1946년 4월 1일 <해방일보> 學務 當局의 獨裁를 排擊한다. 淸州學生 再蹶起

@실제날짜:460325

요구관철까지 휴학 단행
청주 각 중학교 학생 동맹 휴학 사건은 청주교원단이 학생대표와 학무 당국사이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충한 결과
 一. 일중 교장(이완용)을 해임시킬 것
 二. 면직한 三 교원을 복직시킬 것
 三. 희생자를 내지 말 것
 四. 高女 두 교원을 복직 시킬 것 등 이상 요구 조건을 3월 24일까지 전적으로 승인 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등교를 시작하여 교육계와 학원에 서광이 보일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보도한 바이니와 期日인 3월 24일이 당도함에도 불구하고 학무 당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성의 있는 조처가 없음으로 24일 청주중학교 교원단 발기로 동시내여자상업학교에서 학무과, 교원단, 학생 각 대표 연합회의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학무과 측의 결석으로 유회되었음으로 학생들은 다시금 당국의 무성의 모략적 조치에 분개하여 25일 일중 학생은 별지와 같은 결의문을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다.
  결의문
  금반 학무과 당국의 독재와 사기 行爲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음으로 우리 학생 일동은 좌의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3월 25일로부터 휴학을 斷行함.
  • 1946년 4월 3일 <동아일보> 美國의 敎授團 招聘
3월 15일 인천항을 떠난 문장욱(文章郁) 박사 등 미국에 파견된 조선 교육 시찰단 一行 6명은 무사히 조선과 미국 사의에 處女 航行을 마치고 오는 4일 싼푸란시스코항에 도착되리라 하는 소식이 군정청에 들어왔다. 이리하여 一行은 곧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무성에 들러 조선의 학사보고를 한 후 조선으로부터 금후 류학생을 파견하는 것에 대한 연락 등 학사 시찰을 하고 돌아오기로 되었다. 그런데 금년은 미국의 과학 기술 방면 각 대학은 복원(復員)한 병대들고 미증유의 만원 상태이라 류학생 파견은 여의치 못할 것으로 군정 당국은 미국 각 대학 최우수한 교수단을 조선으로 초빙하여다가 특수학교를 설립하던지 현재의 각 전문대학에 배치하여 교육 조선의 힘있는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로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터이다.
  • 1946년 4월 3일 <동아일보> 中等 敎員 二千名을 短期 養成- 서울大學외 11所서
今月 25일부터 一齊 開講
해방 후 새로운 의기를 가지고 38이남 각 학교는 개교를 하였지만 교원 부족으로 학교마다 큰 곤란을 받고 있는 형편에 있다. 이에 문교 당국에서는 현재 부족되는 6천 명의 중등교원을 응급 보충하고자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시내 각 전문과 지방 사범학교에 문교부 직할로 임시교원양성소 12개소를 설치하기로 되었다. 이는 임시경상비 3백50만 원을 들여 제1차로 2천백 명 가량의 교원을 5개월, 9개월, 1개월, 1년반의 네 단계에 나누어 각각 공민, 국어, 공작, 수학, 생물 등 12과목을 전공케하는데 오는 25일부터 다음의 각 학교에서 개강할 터이다.
檢定試驗도 實施
그리고 이와 아울러 5월 중으로 중등교원 자격 검정시험을 실시하여 질적 향상은 물론 전면적인 보충을 하고 각 국민학교 교원 부족에 대하여는 새로운 구상 아래 보충하기로 되어 있다.
開設 學校와 募集 規程
각 학교에 신설될 임시양성소와 부설 양성과와 학과별 모집인원, 양성기한, 모집규정은 다음과 같다.
 ▲ 모집학과별 모집 인원
  (1) 문교부 중등교원 임시양성소(경성중학교 내) 공민과, 국어과, 국사과(각 5개월, 각 백 명) 
  (2) 경성사범학교, 공민과, 국어과, 국사과(이상 5개월, 각 50명) 체육과, 생물과, 수학과(이상 각 1개년 반, 각 50명, 체육과 100명) 
  (3) 경성여자사범학교 국어과, 국사과, 체육과(이상 각 5개월, 각 50명), 가사과, 지리과(이상 각 1개년, 각 50명) 
  (4) 경성대학 예과, 국어과, 국사과(이상 각 5개월, 각 50명), 생물과(1개년 반, 50명) 
  (5) 경성경제전문학교 상과 (5개월, 100명) 
  (6) 수원고등농림학교 생물과(1개년 반, 50명) 
  (7) 경성공립농업학교 農科(9개월, 100명) 
  (8) 경성藥學전문학교 생물과(1개년 반, 50명) 
  (9) 연희전문학교 국어과, 국사과, 상과(각 5개월 각 50명), 理科 (1개년 반, 50명) 
  (10) 중동중학교 수학과(1개년 반, 50명) 
  (11) 중앙시험소 공작과(1개년, 50명) 
  (12) 공주여자사범학교 가사과(1개년 100명) 理科(1개년 반, 100명, 남녀공학)
 ▲ 應募資格
  가. 二種訓導이상 자격자.
  나. 5년재 중등학교 졸업자.
  다. 중등학교 4년 수료자로서 별도 시험 합격자.
  라. 보육학교 졸업자.
  마. 右와 同等 以上의 학력이 有하다고 인정한 자.
 ▲ 出願節次와 期限
  入學志願書(用紙는 각기 지원소에서 교부함), 이력서, 호적초본, 사진, 면허장 또는 졸업 及수료증명서, 현직 교원은 소속장관의 수험승락서, 시험用費 10원첨부하여 각기 志願所長에게 오는 4월 17일까지 제출할 것.
 ▲ 考査기일과 場所
  自 4월 19일 至 4월 20일, 각기 지원장소에서.
 ▲ 考査科目
  國語, 英語, 及 專攻學科.
  • 1946년 4월 4일 교육에 관한 서울지역 교사 및 학생 여론조사

공보부에서는 서울지역 초중고 교사 521명과 학생 2,542명을 대상으로 교육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113]

  • 1946년 4월 4일 <조선인민보> 한 學校에 經營者 셋?- 전기공업학교는 어데로 가나
한 학교를 싸고 도는 삼각 쟁탈전...
시내 중학町에 있는 조선전기공업학교는 京電, 조선전화, 남전이 공동 경영하던 것인데 8.15 직후 현 교장 장종량 씨가 인계 경영 중 또 다시 전기 삼회사에서 경영하기로 되었던 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의외로 현 건국기술학교 교장(8.15이전 동아일보공과학원 원장) 김연준 씨가 당국의 인가도 없는 교장 자리에 앉게 되어 무리를 일으켰는데 또 한편으로는 동교와 담장 하나를 격한 중동학교 교장 최규동 씨가 씨의 숙원이던 교사 합동을 실현시키고져 역시 학무 당국에 인가를 수속 중이라고 하여 본교 교직원, 생도 및 동창회 대표들은 지난 1일 "동교가 전기기술학교이니 만큼 전기 삼회사에서 경영하여야만 전문적 제설비를 통하여 산 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장래의 발전을 기할 수 있으니 학교 경영은 전기 삼회사 재단에 일임할 것"을 학무 당국에 진정하는 동시에 김연준 씨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였다 하는데 경영주 여하에 따라서는 특수 기술학교로서의 발전에 다대한 영향이 있는 만큼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 1946년 4월 5일 <동아일보> 굶주리는 十萬 學徒위해- 晝食用으로 "빵" 配給
날로 심각하여가는 식량사정 아래 시내 초등학교 학동들을 비롯하여, 중등, 전문이상 학생들은 점심을 잘 얻어먹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번 군정 당국에서는 이렇게 굶주리는 학도들을 위하여 오는 15일경부터 점심용 빵을 각 학교에 특배하기로 하고 방금 준비 중이다. 학도들에게 제공할 빵제조는 경기도 제빵공업조합과 삼강(森岡) 풍국(豊國)제과 등 대회사에서 군정청으로부터 제빵 원료의 특배를 받아가지고 시내 초중등, 전문, 대학 도합 12만 명 분을 만들어 학교를 통하여 점심 시간에 한사람 앞에 두 개씩 돌아가도록 배급한다. 빵값은 두개에 1원 40전 정도이고 당국으로부터 원료 배급만 더 있게되면 차츰 공장, 회사 등 근로층에도 특배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다.
군정 당국은 우선 학생용 제빵을 위하여 장에 사용하고 있던 밀을 돌려주고 장차는 또 미국에서 밀가루가 수입되는대로 제면(製麵)용으로도 제공하여 일반 가정에 식량난을 조금이라도 도울 것이라고 한다.

  • 1946년 4월 5일 <조선인민보> 동성상업 맹휴

@실제날짜:460403

시내 동성상업학교 4학년생은 지난 3일 오후 1시에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는데 하급 학생 전부도 이에 호응하여 전교 맹휴를 일으킬 형세에 있다 한다.
맹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윤병상 선생을 유임할 것.
 ▲ 교무주임 한성우 선생은 사임할 것.
  • 1946년 4월 5일 <해방일보> 팟쇼先生은 退任하라! 民主先生 罷免 反對! 東星商校生 要求

@실제날짜:460403

시내 동성상업학교 4년생은 지난 3일 오후 1시에
 一. 민주주의자인 윤병상 선생의 파면 반대
 二. 팟쇼적인 교무주임 한성우 선생은 사임하라
 三. 교장 장면 선생은 민주의원을 탈퇴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직하라
 四. 식량과 학용품을 학교에서 알선하라 등의 4가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斷行하여 교내 숙청의 봉화를 들어는데 하급학생 전부도 이에 호응하여 맹휴에 가담할 형세에 있다.
  • 1946년 4월 6일 <조선인민보> 學校달라는 피의 陳情書- 법정 학생들 미소공위에 전달
"학교를 달라"고 피로 연명한 법정전문학교 학도들이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내는 피의 진정서...
지난 3월 23일 돌연히 당국으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은 시내 답십리 법정전문학교 500여 학도들은 일치 단결하여 30여년의 전통을 가진 동교의 폐쇄를 절대 반대한다고 그간 관계 각 방면에 진정 탄원을 하여 일반 사회의 심심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본교 학도은 마침내 본교폐쇄 반대투쟁 학생위원회 명의로 전학도가 혈서로 서명 날인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방금 개최 중인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한다.
  • 1946년 4월 7일 <조선인민보> 軍政앞에 무릎끊고 哀願- 학원잃은 법정학생들 총검거

@실제날짜:460406

지난 3월 23일 돌연히 폐쇄 명령을 받고 학원을 쫓겨난 시내 답십리 법정전문학교 500여 학도들이 그간 각 방면을 통하여 모교의 운명을 걸고 피와 눈물의 진정을 하다 못해 드디어 군정청 앞에 무릎을 끊고 최후의 애원을 하였다.
昨 6일 수백 명의 동교 학생들은 당국에 대한 전원의 열정과 성의를 표시하고 간곡한 진정을 비치고져 봄비에 젖은 이른 아침 가두에 비장한 충정을 묶어 법정학교 폐쇄 절대 반대라는 슬로건을 선두로 탑골공원앞에서부터 대오정연한 행진을 시작 종로, 광화문통을 걸쳐 군정청전 광장에 이르자 대표 4인을 문교부장 유억겸 씨에 특파하고서 전원이 굳게 결속한 채 비에 젖은 아스파트에 꿇어 앉아 유부장의 회시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대표측에 대한 유문교부장의 완강한 면회 거절로 인하여 시간이 천연되는 가운데 及時에 동원된 100여 명의 기마경관대와 무장경관대는 장택상 경찰청장의 선두로 앉아 있는 학생에게 즉시 회산을 강요하였으나 스크럼을 짠 채로 철쇠와 같이 굳게 결속한 전 학생을 털끝만한 동요도 보이지 않아 말굽만 울리던 무장대는 드디어 한 사람 한 사람씩 검속, 전원을 트럭에 싣고 도경찰부와 중앙 경찰청으로 인치하였다.
일방 대표측은 유문교부장을 면회하고 당면의 곤경을 호소 진정하려고 하였으나 유부장은 "법정학교 생도는 만나지 못하겠다. 순서를 밟아 고등교육과장에게 말하라"하고 절대 거절함으로 대표측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고등교육과장 정준모와 회견하고 학생 전체로부터 하지 중장, 러취장관, 유부장에 대한 진정서를 수교하고 쓸쓸히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도한 수만 시민과 아울러 도하 각 전문대학 학도들은 그들의 애끊는 염원과 불타는 애교심(에) 크게 감동된 바 있어 쌍수를 들어 성원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동교의 재건 문제에 대한 당국의 조치는 크게 주목되고 있다.
責任 答辯은 月曜日에- 미 관리 휴무 중의 문교부 태도
군정청 기자단에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중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하여 교육 행정에 있어서 조선인으로서 최고 책임자인 문교부장 유억겸 씨의 답변을 듣고져 6일 면회를 청하였으나 이날은 미육군 기념일이라고 해서 미국인 국장이 휴무 부재 중이므로 단독으로서는 책임있는 답변을 할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 오는 8일에야 정식 담화를 발표하기로 했다.
  • 1946년 4월 7일 <조선인민보> 民戰敎育文化對策委員會- 제2차 전문위원회

@실제날짜:460404

민전 교육문화대책위원회에서는 지난 4일 오후 1시 민전 회의실에서 제2회 전문위원회를 도상록 씨 사회로 그간 각 분과위원회에서 개별적으로 연구 검토한 것을 심의 결정하였는데 동 위원회에서는 민주주의 노선에 의한 초창적인 조선의 교육문화 대책에 만족한 결정안을 얻었다 한다.
  • 1946년 4월 7일 <조선인민보> 解決에 努力- 정고등교육과장 담
법정전문학교 문제에 대하여 문교 당국의 의견을 듣고져 달려간 신문 기자단은 문교부장 유억겸 씨에게 회견을 요청하였으나 별항과 같이 "미국인 국장과 동석이 아니고는 신문 기자와 회견할 수 없다"고 일체를 거절하여 다음에 기자단은 다시 고등교육과장 정준모와 회견 다음과 같은 일문 일답을 하였다.
 (문) 오늘 이 사태에 대한 대책은
 (답) 종래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 것이다. 문교 당국으로서는 급속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문) 졸지에 학교를 잃은 수백 학도의 구호책은 여하
 (답) 학생 문제는 학교 문제와는 별개로 취급하여 편입이라도 고려하고 있다.
 (문) 그 보다 법정학교 재건을 위한 학교측의 성의를 고려함이 여하
 (답) 그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당한 복교 수속이 완비하면, 우리로써는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
 (문) 그러면 학교측으로부터 기한을 제출하여 그 기한내에 완료한다는 약속하에 우선 학생들을 구하고 배움의 길을 적극 추진하는 의미에서 임시 조치로 방금 개학만은 허가할 용의가 없는가
 (답) 그것은 일찍이 경무 당국의 폐쇄 기한 연장을 의뢰한 일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무국으로서는 학교측에서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면 충분히 고려할 생각이다.
  • 1946년 4월 7일 <해방일보> 잃었던 學園을 찾으려는 者 모조리 鐵鎖에 메어지다.

@실제날짜:460406

법정교생 진정 중 총 피검
우리의 학원을 도로 달라고 소위 무허가 학교폐쇄령에 의하여 지난 3월 23일 부터 학원을 잃고 거리에 헤메는 서울 답십리 경성법정학교 학생 오백 명은 그간 법정학교 폐쇄반대 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모교의 운명을 雙肩에 짊어지고 당국과의 교섭, 사회에의 호소 등의 방법으로 열열히 투쟁하여 왔으며 일방 전 사회의 여론도 건국 途上의 조선교육계가 受難한 커다란 불상사로서 이 政專 폐쇄 문제에 총 집중되고 있는데 당국은 이 학교를 잃고 헤메는 학생과 일반 사회의 여론에 하등 성의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같은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에 초조함을 느낀 본교 학생 5백 명은 문교 당국에 진정코저 4월 6일 오전 9시 대오를 정연히 애국가를 고창하며 종로와 광화문통 4거리를 거쳐서 군정청 앞에 이르렀다. ○○ ○도○, 정우현, 우을병 외 2명의 대표만이 입청이 허락되어 진정차로 문교부에 들어가 부장 유억겸 씨에게 면회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부득이 고등교육과 과장대리 정준모 씨를 만나 진정하고 당국의 금후 방침을 규명한 후 하지 중장 러취 장관 유문교부장에게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전달하였는데 일방 군정청 정문밖 광장에 남아 있던 학생들은 찬비 내리는 가운데 땅 바닥에 주저앉아 애국가를 고창하며 "대표 동무들아 힘있게 잘 싸워라", "政專 폐쇄 절대 반대 만세", "우리의 학원을 돌려다오"하며 학도다운 질서로써 대표에게 격려를 보내고 있었는데 오전 10시경 학병동맹 사건의 지휘자 장택상 경찰부장이 지휘하는 무장경관 100여 명과 기마경관 수십 명과 사복경찰들이 돌연히 몰려와서 미국 트럭을 대기하여 놓고 학생 진정단에 달려들어 팔을 꺾고 뒷목살을 잡아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군정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 까지 총을 내 흔드는 무장경관과 기마경관이 사냥하는 포수떼와 같이 눈을 붉혀가면 이리 쫓고 저리 달리며 일대 검거 선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수라장화 하였다. 검거되는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검거되는 동무들을 지키었으나 한 사람 두 사람 피검되어 트럭에 끌려 올라가게 되자 남은 학생들은 우리도 함께 간다고 대기되었던 트럭에 뛰어 올랐다. 학생들은 트릭에 실려가면서 "학원의 자유 만세", "政專 폐쇠 절대 반대 만세", "조선 자주독립 만세"와 애국가를 고창하면서 연도의 시민에 호소하여 시민의 눈물겨운 동정과 분개를 자아내었다.
  • 1946년 4월 7일 <해방일보> 血書로 閉鎖 反對- 法政 五百學徒 悲愴한 決意

@실제날짜:460404

지난 3월 23일 돌연 당국으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은 시내 답십리 법정학교 학도 500여 명은 일치 결속하여 30여년의 전통을 가진 본교의 폐쇄는 절대 반대하다고 그간 관계 각 방면에 진정 탄원을 하여 일반 사회의 심심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인데 동교 학도는 마침내 동교의 폐쇄반대투쟁 학생위원회 명의로 전 학도가 혈서로 서명 날인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방금 개최 중인 소미 공동위원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檄을 발표하였다.
 檄
 경애하는 시민여러분!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우리 법정학교 500명 학생은 다시금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우리는 이제야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 폐쇄 이유가 얼마나 부당한 것이며 얼마나 편당적이라는 것은 이미 발표한 진상으로써 동포 여러분이 잘 아실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500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순정과 최대의 성의로써 3월 23일 사전에 학생일동 및 학부형이 학무 당국에 간곡히 진정하였고 폐쇄령이 결정된 후에도 꾸준히 하지 장군 러취 장관에게 진정하였고 학무 당국에 항의 교섭하여 당국의 재고려를 促望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 주일 이상이 경과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하등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당국의 태도 표명이 없습니다.
 경애하는 시민 여러분!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우리는 8.15 이후 자유다, 해방이다 소리높이 부르면서 그 얼마나 날뛰었읍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시민은 ○○ 저녁을 못먹고 쌀에 굶주리어 허덕이고 있습니다. 학생은 사랑하는 학교를 빼앗기고 거리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해방이고, 이것이 자유입니까. 어린 청주중학생들이 옳은 것을 배우고 신망하는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정정당당한 요구를 함이 그다지도 ○○이여서 그네들을 10여 명을 구속하고도 30여 명을 정학시킵니까!
 조선 사람이 한 자라도 더 배워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그 무엇이 나쁘다고 그 무엇이 그리 무서워서 그네들은 이유안되는 이유로 학교까지 탈취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거리에 방황하게 합니까?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교육제도 입니까?
 경애하는 시민여러분!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우리는 조선 교육계를 위하여 민주주의 교육제도 수립을 위하여 5백 학생은 손을 깨물고 혈서를 써서 또 다시 최대의 아량을 가지고 학무 당국의 법정학교 폐쇄령 즉시 철폐를 요구하는 동시에 5백 학생은 최후 투쟁을 敢行할 것을 만천하 동포 앞에 맹서하오니 동포 여러분의 절대적인 후원과 협력을 바랍니다.
 4월 4일
 敎學政法閉鎖反對鬪爭委員會
  • 1946년 4월 8일 <조선인민보> 學徒는 진정한 民主 學園을 찾는다.
진정한 민주주의 조선 건설은 참된 문교 정책으로서만 비로서 그 초석은 견실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 문교 정책이 밝고 있는 현 과정을 돌이켜 보건데 과연 이상과 어그러진 점은 없었던가? 순진한 학도의 지성은 진정한 학원의 진로를 좀먹는 비민주성을 완전히 일소하는데에 최선을 다함에 있어서 더욱 빛날 것이다. 국내 정계는 표면만이 혼란할뿐 한 줄기- 인민을 토대로 인민의 이익을 추진시키고져 하는- 그 한 줄기의 정치적 조류는 어제도 오늘도 다름없이 당당히 이땅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예지를 자랑하는 학생들이 이와 같은 역사적 조류에 불감성일리 없고 더욱 그 역사적 사명에 용감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과거의 타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시대 착오인 팟쇼적 일제 잔재의 무너진 체계를 가다듬어 가며 이와 같은 학도들의 새로운 의욕을 억압하는 경향은 최근 남조선 각지에서 발생하는 학원의 불상사와 거기에 대한 학도들의 순정에 넘치는 외침을 보아도 넉넉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청주학생 사건의 재현, 법정학교 폐쇄에 대한 반대 운동, 경기중학, 동성상업 동맹 휴교 사건 등은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불상사에 대하여 문교 당국자를 물론 일반 사회는 커다란 관심을 기울리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 근원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요청되고 있는 이 때, 광산전문학교 학생 일동은 학생회의 총의로 학원의 자치, 법정전문학생의 옹호, 기타 식량 대책 등의 제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이것이 완전히 履行될 때까지 무기한 맹휴를 선언하고, 지난 6일부터 맹휴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비단 동전문만이 아니라 민주 학원의 자치 확보를 부르짓는 전 학생층의 의욕은 바야흐로 최고로 달하여 드디어 보전도 돌입, 기타 연전 등 각 전문학교에 있어서도 동일한 보조로 나아갈 태세를 보이고 있다 하여 사태의 귀추는 자못 주목되는 바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法政專門 復校를 요구- 鑛專, 6일부터 맹휴에 돌입
 사건내용
 1. 동교 1, 2학년생(3년생은 이미 졸업) 100여 명은 6일 긴급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당면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다.
  첫째, 법정학교 학생들에게 새로이 전개될 사태 즉, 5일 군정청 앞에서 납치된 법정학생의 즉시 석방과 동교의 복교.
  둘째, 청주학생을 즉시 석방
  셋째, 학원 생활을 위협하는 쌀문제 해결, 신임 악질 친일파 교수에 대한 배척, 기타.
 이상이 동교 학생들의 결정 내용인데 이 요구 조건은 학교 당국에 제출하는 동시에 학무 당국에도 제출 6일부터는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는 동맹 휴교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고 즉시 동맹 휴학에 돌입한 것이다.
自治權을 承認하라- 보전도 돌입
6일부터 동맹 휴학으로 들어간 보전 학생회가 학교 당국에 제출한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학생 자치권을 승인하고, 학생회의 언권을 절대 존중하라.
 2. 일본 제국주의적 잔재인 기계적 시험 제도를 철폐하라.
 3. 소비조합은 학생이 그 주동력이 된다.
 4. 학교 책임하에 학생 식량을 확보.
 5. 하숙난, 경비난 등으로 고민하는 학생을 위하여 기숙사를 알선하라.
 6. 운동부 후원.
 7. 서북 학생 및 전재 학생의 구제를 학교 당국에서 후원하라, 또한 일반 학생은 임시학생총회 교섭위원의 지시대로 행동하여야 된다.
學園의 民主化를 促進- 文總 담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서는 7일 학원의 민주화를 확보하자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순진한 학도들이 최후의 결의로써 배움을 거부하면서 까지 열열하게 주장하는 민주주의에의 절규를 볼 때 우리들은 다시금 깊이 현재 조선의 학무 행정과 학원이 얼마나 일제 파쇼 반동 잔재로서 冒瀆 沽渴되어 있는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즉, 양심적 교사는 무고히 쫓겨 나가거나 혹은 갖은 박해를 당하고 있으며 일제와 야합하던 악질 반동 분자와 또는 어떤 반민주주의 정객들과 관련된 팟쇼배 및 그 아류들이 신성한 학원을 전단하여 비양심적, 비교육자적 태도로서 천진스러운 학도들을 오도하여 심지어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말할 여지도 없이, 학문의 자유, 연구의 자유가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또 학문의 자유, 연구의 자유는 학원의 민주화 없이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학원의 민주화는 곧 나아가서 민주적 자주 독립 건설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조선의 민주적 국가 발전과 멀지 않아 세워질 임시정부의 민주적 토대를 튼튼하게 하는 의미에서도 학무 행정과 학원내에 비만되어 있는 일체의 일제 팟쇼, 반동 잔재가 시급히 단호 숙청되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學園의 民主化를 促進- 靑總서도 성명
조선청년총동맹에서는 昨 7일 법정학교 페쇄와 민주 학원 확립에 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 우리 300백만 청년은 학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결의하고 전진할 것을 굳게 맹서한다.
 1. 정치적 의도밑에 학원의 자유를 속박하는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즉시 철폐하고 학원 법정의 문을 즉시 개방할 것.
 1. 학원의 민주화를 좀먹는 일본 군국주의 잔재를 학무 당국을 비롯하여 학원에서 逐出할 것.
  • 1946년 4월 8일 <해방일보> 開城高女 校長을 노리는 反動輩를 一掃하라
개성 일제의 잔재는 학원의 진보적 교원을 퇴직시키려고 온갖 모략적 行爲를 다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 대한 학생의 반대의 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는 이 때 개성 교육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개성고여 교장 이상춘 씨에 대하여 그 곳 반동분자들은 엉터리 없는 술책으로 이교장을 배척코져 독화살을 겨누고 있다. 그것은 지난 3.1 기념 때 시민들이 통일적인 기념식전을 擧行키 위하여 이교장을 의장으로 추천하였던 바 여기에 불만을 품은 반동분자 몇 사람은 혁신청년 예수교회 등 간판만 있는 소위 7개 단체의 이름으로 이교장은 좌익적 경향이 많다는 이유로 서울 군정청, 개성 군정관에게 퇴직 요구의 진정을 하였던 바 개성 군정관은 그들에 대하여 "개성에는 많은 단체가 있음에도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이같은 일방적 요구는 들을 수 없다."하여 一蹴을 하였고 이것을 들은 일반 시민과 교육계에서는 그들 반동 분자의 야비한 行動에 대하여 매우 개탄하고 있다.
  • 1946년 4월 8일 <해방일보> 왜놈을 좋아하는 先生은 싫어요- 親日 先生을 追放한 어린이의 힘

@실제날짜:460407

수원군 오산면 승교리의 광성학교는 주로 무산 노동 인민의 子女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사립학교다. 동교 교장 홍종각(한민당원) 씨는 자파 세력 부식을 목적으로 하여 이사장과의 約束을 어기고 모략적으로 白이라는 자를 5, 6학년의 담임교원으로 채용하였다. 백은 과거는 일본서 代議士 운동에 분망하였고 현재는 한민당과 관계를 가진 표본적 친일파인데 이 자가 취임하여 4일이 지나자 5, 6학년 전생도 80여 명이 일제히 백을 싫다하여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다.
3월 17일 이사장 원 씨는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하여 교장과 생도가 직접 대결하도록 하였다. "왜 너희들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하는 교장의 질문에 생도들은 "선생님은 가짜 조선 사람이에요, 조선사람을 욕하고 왜놈들만 칭찬해요, 저희들은 그런 친일파 선생님은 싫어요, 조선을 사랑하는 열열한 젊은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요"하며 백의 반동적 친일적 行動과 언사를 20조나 열거하였다. 홍교장은 무조건하고 탄압하려고 하였으나 아이들의 "저희들이 이 학교를 그만 두던지 백선생님이 나가시던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하는 강경한 태도에 겁을 내어 그 이튿 날 백의 해직을 선언하고 말았다.
  • 1946년 4월 9일 공보부 학생운동 현황에 관한 조사 실시
1. 각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의 학생 운동 상황에 관하여 4월 9일 조사를 실시하였다. 공보부 여론조사 담당 직원들이 직접 담당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 및 교사들과 대화를 하였다.
2.이미 학생운동이 일어났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학교는 경제대학, 보성대학이다. 학생운동의 원인은 식량의 부족과 학자금문제, 그리고 법정대학 폐교 반대 등이다.
3. 학생운동을 준비 중인 학교는 서울사범대학, 선린상업중학, 그리고 상과대학이다.
4. 조만간 학생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학교와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세화여중        : 비민주적 교사의 사퇴
 여자사범        : 같음
 이화여자대학    : 같음
 경기중학        : 식량부족, 특정 교사의 사퇴, 자치정부 수립요구
 중앙중학        : 좌익 교사의 사퇴 반대
 서울농업학교    : 특정 교사들의 사퇴요구
 동성상업학교    : 윤병상 씨의 교직 사퇴 반대
5. 조만간 학생 운동이 벌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학교는 기타 21개교이다.[114]
  • 1946년 4월 9일 <동아일보> 軍國主義 一掃코 民主 敎育을 實施
日本에 派遣되었던 吳博士의 歸國 談
일본 교육의 개편을 원조하고자 미국교육시찰단의 방일을 기회로 3월 23일 일본으로 학사 시찰을 떠났던 문교부 락카-드 소좌와 동부부장 오천석 박사는 6일 하오 무사히 飛行機로 귀국하였는데 민주 교육을 받던 일본 문교 정책과 재일동포 교육상황을 오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에 맥아더 사령부에 우리 의무교육제에 대한 안을 보고하고 교육 상황을 보고하여 새로운 관심을 자아내었다. 대체로 일본 학생들은 경제 파탄으로 정치 문제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적은 것 같았고 출석율은 7할 내지 8할 정도이었다. 교육은 맥아더 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군국주의, 황실중심주의에 대한 것을 전면적으로 없애버리는데 중점을 두고 권리는 백성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새교원을 양성 배치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 방안으로 미국에서 민주 교육의 책을 갖다가 도서관을 만들었고 40편 가차운 교육영화를 만들어 민주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아르키고 있는데 조선으로도 約 천권의 서적을 구입 알선하기로 하였고 되도록이면 영화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좋을 듯 생각한다.
  • 1946년 4월 9일 <조선인민보> 法政專門 再開시켜라- 민청준비위원회서도 성명

@실제날짜:460408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준비위원회에서는 법정학교 폐쇄 문제에 관하여 금반의 조치는 그 반민주주의적 본질에 있어 일제 때 이상의  탄압이며 이러한 사실은 조선의 청년들로서 도저히 묵시할 수 없다. 학문의 자유없는 곳에 민주주의 국가 건설은 없고, 순진한 학생들에게 학문의 자유와 연구의 자유를 주는 의미에서 법정학교를 재개하라는 성명서를 昨 8일 발표하였다.
  • 1946년 4월 9일 <조선인민보> 學校側 條件을 拒否- 보성전문학교 맹휴 난항

@실제날짜:460407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6일부터 맹휴에 돌입한 보성전문의 맹휴 사건은 그 귀추가 크게 주목되던 바 昨 7일 본 학생회 발표에 의하면 학생대표 교섭위원과 학교 당국사이의 교섭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자치권 승인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교내에서의 언론, 집회, 결사까지도 일일이 간섭하게 다는 것.
 2. 하숙난, 경비난에 고민하고 있는 학생의 기숙사, 합숙소의 알선 문제 또한 노력한다고 하나 금전 문제로 인하여 불가.
 3. 운동부 지원도 금전 문제로 인하여 불가.
 4. 서북 학생, 전재 학생 구제 문제도 기금 문제로 전적으로 부인.
이상과 같이 학생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제조건 부인으로 말미암아 동 학생회에서는 교섭을 계속 중이라고 하는데 일부 반동분자의 책동과 모지에 게재된 바와 같은 사실 왜곡의 기사는 학생 일반의 분개를 사고 있다고 한다.
  • 1946년 4월 9일 <한성일보> 초등 임시교재 편찬
도학무과 연구회 설치 월말까지 완성. 38이남 초등학교의 국정교과서는 현재 군정청 문교부에서 편찬하고 있으나 현재 배부된 이외의 교과서는 다소 지연될 듯 하므로 경기도 학무선에서는 初等學校 臨時敎材 硏究會를 두고 문교부 양해하에 오는 8월까지의 임시 교재를 편집하여 4월 말일까지 도내 각 초등학교에 배부한다는 바 각 학교에서는 각자 임의로 교재를 만들지 말기를 바란다하며 각 부군재근 視學은 각 학교 아동에게 배부할 좌기 교과서의 필요 수를 조사하여 오는 4월 십○일까지 시학회의에 지참하기 바란다고 한다.
 ▲공민(중), 3, 4학년용       ▲공민(하), 5, 6학년용
 ▲국어(중), 3, 4학년용       ▲국어(하), 5, 6학년용
 ▲국사(전), 5, 6학년용       ▲이과(상), 4학년용
 ▲이과(중), 5학년용          ▲이과(하), 6학년용
 ▲산수 각 학년용            ▲체조요목(교사용)
 ▲지리(전), 5, 6학년용       ▲○○, 가사, 공작요목(교사용)
 ▲습자(합본), 3학년 이상 각 학년용
  • 1946년 4월 9일 <해방일보> 法政校閉鎖에 대한 朝鮮靑總의 聲明

@실제날짜:460407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듣고 놀란 우리 청년은 배움의 길을 걷기 위하여 애원하는 학생들을 잡아 가두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불법적 탄압에 대하여 진리의 탐구가요 정의의 용사인 우리 3백만 청년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피에 躍動하는 학생들이여 청년들이여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침범 할 뿐아니라 그 학원의 문을 개방하여 달라고 호소하고 학무 당국의 선처를 바라 학무 당국에 진정하는 학생들을 왜 납치 유치한다는 말이요. 우리 순진한 학생 청년들은 이 비인도적 行動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연코 일어설 것을 맹서하는 것이다. (하략)
 一. 정치적 의도 밑에 학원의 자유를 속박하는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즉시 철폐하고 학원 법정의 문을 즉시 개방할 것
 一. 학원의 민주화를 좀먹는 일본 군국주의 잔재를 학무 당국을 비롯하여 학원에서 축출할 것
  1946년 4월 7일
  • 1946년 4월 9일 <해방일보> 法政 被檢學生 全部 釋放
소위 무허가 학교 페쇄령에 의하여 잃어버린 학원을 차지하려고 혈서로써 탄원을 하고 폐쇄반대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비장한 투쟁을 계속하다가 지난 6일 무장경관대와 기마경관대에게 포위를 당하고 모조리 쇠고랑에 메이게 된 법정학생 사건에 대하여서는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경찰부에서는 반대 운동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위협하면서 창동, 서대문 밖, 영등포 등 시외 경찰서로 끌고가서 임시 유치하였다가 전부 석방하였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검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학생들의 비장한 결의는 총칼과 위협으로서 흩어질 리 만무한 것이며 오직 그들에게 배움을 주어야 할 것이며 학원의 민주주의화를 참으로 실천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 1946년 4월 9일 <해방일보> 學生自治를 承認하라, 普專 學生 蹶起

@실제날짜:460406

4월 6일 普專학생회에서도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는데 무엇보다도 학생 자치권을 승인하는 동시에 학원의 민주주의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힘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요구 조건
  一. 학생자치권을 승인하고 학생회의 언권을 존중하라
  一. 일제 잔재인 기계적 시험 제도를 철폐하라
  一. 교내 소비 조합에는 학생이 그 주동력이 된다
  一. 학생책임하에 학생 식량을 확보한다.
  一. 하숙난으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알선한다.
  一. 운동부를 후원할 것
  一. 서북학생 및 전재 학생의 구제를 학교 당국에서 후원하라. 또한 일반 학생은 임시학생총회 교섭위원의 지시대로 行動하기를 희망한다.
  • 1946년 4월 9일 <해방일보> 學園을 民主主義化하라- 鑛專生 同盟 休學

@실제날짜:460406

4월 6일 鑛專학생들은 긴급 학생 대회를 소집하여 진정한 학원의 진로를 좀먹는 비민주주의적 제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는 동시에 과거 식민지적 문교 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한 팟쇼적 일제 잔재의 무너진 체계를 부지하려고 하는 문교 정책을 시정하고져 당면한 제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법정학교 학생 즉시 복교와 유치 학생의 즉시 석방, 청주 검거 학생 즉시 석방, 학생 생활에 위협을 주는 쌀 문제 및 교통 문제, 책임 악질, 친일 교수 배척에 대한 문제 등 요구 조건을 결정하고 학교 당국, 학무 당국에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즉시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다.
  • 1946년 4월 10일 <동아일보> 高調해가는 向學熱- 3월에도 語學, 文學이 首位
시민의 향학열은 날로 고조되고 있는 현상인데 3월 중의 국립도서관의 열람 상황을 보면 열람책수 33만 9,328책, 열람자 1만 1,906명으로 2월 중에 비하여 어느 것이나 증가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의 독서열은 동도서관 개관이래 한결같이 어학, 문학, 리학(理學), 의학(醫學), 조선, 만주, 몽고문학 등에 집중되고 있는데 3월에도 역시 제1위가 어학과 문학, 제2위가 리학과  의학,제3위가 조선, 만주, 몽고, 서백아문학의 순위로 되어있다.
  • 1946년 4월 10일 <조선인민보> 繼續 交涉中- 보전
보전 맹휴 사건은 지난 9일까지도 학생측과 학교 당국과의 교섭이 進行 중으로 학생교섭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학교측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의와 협력의 태도를 보이고 있어 파란의 맹휴도 해결의 서광이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학생교섭위원회에서는 식량, 숙사 알선 문제의 현상을 현실적으로 서북 학생, 전재 학생 기타 경제 곤란의 학생들이므로 그 해결은 학교 당국의 구체적 보완화 그 실시에 의해서만 그 성의를 볼 수 있다하여 운동부 후원 문제와 아울러 그 구체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당국이 학생측의 요구 조건을 실시할 때에는 학생측은 원칙상 학교 당국과의 동시 성명으로 맹휴를 종료하기로 되었다 하는데 학교 당국은 이 때부터 20일까지의 임시 맹휴 성명을 제의하였다 한다.
  • 1946년 4월 10일 <조선인민보> 法政 閉鎖 反對에 全力- 鑛專

@실제날짜:460409

鑛專맹휴 그 후.....
법정재개, 청주학생 즉시 석방 등 기타 대내 문제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지난 6일부터 맹휴에 돌입한 광산전문학교에서는 그간 학생측과 학교 당국과의 교섭이 진척 중이던 바 동교 교장 최유식 씨의 성의있는 조치로 말미암아
 ▲ 자치회의 승인
 ▲ 친일파 교수 추방(조선이 독립되면 자살하겠다던 정교수를 즉시 파면)
 ▲ 인사 독재 폐지
 ▲ 식량 문제의 대책 강구 등 대내 문제는 전면적으로 해결을 보겠 되었으나 법정전문 폐쇄 반대 등의 대외 조건은 학교 당국으로서는 간섭할 바 못되니 학생의 자유 의사에 일임하겠다는 관대한 도량을 표시하고 있어 학생 측에서는 장차 법정폐쇄 반대 등 학원 전반에 관한 당국의 비민주적 조치에 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지난 8일에는 학무 당국에 昨 9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에 각기 진정서를 제출하여 그 결과를 주시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6년 4월 10일 <조선인민보> 政治색 떠나면 復校- 러취 장관이 문교부에 명령
법정학교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폐쇄된 후 본교 재학생 500여 명은 가두에 방황하며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복교를 당국에 진정 애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등 서광이 보이고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일반의 여론은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러취 군정장관은 9일 군정청 정례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문교부로서는 재정적 기초를 구비하고 유자격 교원을 채용하는 동시에 정치적 색채를 없이 하여 복교 신청을 제출한다면 문제없이 복교를 허가할 것이다.
이 학교에 대해서 일반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로서는 이 학교가 복교 준비를 하는데 원조를 하라고 문교부에 명령하였다.
  • 1946년 4월 10일 <조선인민보> 淸州一中 盟休 支持- 純情 광신상업도 돌입

@실제날짜:460408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는 학도들의 순정의 파문은 드디어 중학생에게도 미치게 되어 청주일중에서 발단한 경찰의 학원 간섭, 법정전문학교 페쇄와 경찰 탄압 등에 반대 봉화를 올린 鑛專,보전, 경제전문의 뒤를 이어 8일 오후 시내 광신상업학교도 드디어 중학교로서 최초로 전교 맹휴로 돌입하였다는데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一. 학원의 민주주의화
   1. 학계에 대한 경찰 간섭 절대 반대.
   2. 법정학교 즉시 복교 요구.
   3. 독재적인 학무 당국의 교육 행정 절대배격.
   4. 학문의 자유를 요구함.
  一. 학생 생활 문제의 해결책 즉시 실시.
   1. 학생에게 매일 4홉씩 정기적인 식량 배급을 요구함.
   2. 학생에 대한 학용품 배급을 요구함.
  一. 학원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영웅적인 투쟁을 하는 청주학생 맹휴를 절대 지지.
  그리고 학생측에서는 학교 당국에 대해서는 추후의 불평도 없다는 것을 언명하였다.
  학교 당국 담
  민주주의적 학원을 찾자는 학생의 열정은 학교로서 말살할 수 없다. 그러나 학생들은 하루바삐 등교하여 합법적으로 행동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46년 4월 10일 <조선인민보> 學園의 盟休 漸次 擴大- 법정전문 무조건 복교하라

@실제날짜:460409

9일부터 경제전문서도 단행. 법정전문 무조건 즉시 복교와 학원 민주화를 부르짓고 500 경제전문 건아도 드디어 일어섰다. 법정학교 문제를 계기로 학원의 자유를 침범하며 민주주의 학원 건설을 좀먹는 관헌적 강압은 도저히 무과할 수 없다고 하여, 鑛專을 비롯하여 보전은 이미 동맹 휴학으로서 법정 폐쇄 반대와 학원의 자치를 부르짓고 반대 투쟁에 돌입하였다.
팽배하게 끌어오르는 학도들의 순정의 불길은 마침내 각 학원에까지 파급되어 가고 있어 그 사태가 자못 중대화하여 가고 있는 이 때 경성경제전문학교에서도 지난 8일 학생회를 개최하고 경향을 비롯하여 지방에서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침범하는 불상사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진전에 따라 그 불가피한 몰락을 보게 된 반민주주의 분자의 책동이라고 규정하고 우리는 학원의 자유, 민주주의를 침범하는 반민주주의 분자의 책동을 절대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일방,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고 昨 9일부터 전교생이 일제 동맹 휴학으로 돌입하였다.
 ◇ 결의 ◇
  一. 학원의 자유, 민주주의를 침범하는 관료적, 관헌적 압박을 배격함.
   1. 학생의 집회, 언론, 연구 발표의 자유를 요구함.
   2. 경찰의 학교에 대한 간섭을 반대함.
   3. 정당한 이유없이 학교 페쇄, 교수 파면, 학생 강퇴를 반대함.
  二. 경성법정학교 즉시 무조건 복교를 요구함
  三. 학원에서 모든 반민주주의 분자의 숙청을 요구함.
  四. 학생의 생활을 보장하고 그 본분을 遂行하도록 그 관계 당국의 성의 있는 대책과 해결을 요구함.
   1. 쌀 매일 일인당 4홉씩 , 학용품 일체를 학생소비조합을 통하여 배급할 것.
   2. 38이북 학생의 생활을 보장할 것.
   3. 38이북 학생의 수업료를 임시 철폐할 것.
   4. 기숙사 설비를 확충하고 지방 학생 및 서북 학생을 수용할 것.
  • 1946년 4월 10일 <한성일보> 미군 서울대학서 영어교수 자원
군정청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앤스테드대위 발표에 의하면 미군정청 장교 세사람이 서울대학 학생에게 영어회화를 교수하기를 자원하였다고 한다. 이 학과는 오로지 학생들의 영어회화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청강은 자유라하며 교수의 이름과 교수 배치 과목은 다음과 같다. 로데스 대위 이공과, 독문과, 홀중위 ○과, 렌탈 씨 文○과
  • 1946년 4월 10일 <해방일보> 光新商業 盟休

@실제날짜:460408

시내 광신상업 학도 450여 명은 4월 8일 학생대회를 개최하여 경찰의 학교에 대한 간섭을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학무 당국의 독선적인 문교 정책을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 학원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일제히 동맹 휴학으로 돌입하였다.
 요구 조건
  결의문
   一. 학원의 민주주의화
    1.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 절대 반대
    2. 법정 학교 즉각 복교 요구
    3. 독재적인 학무 당국의 교육 行政 절대 배격
    4. 학구의 자유를 요구한다.
   一. 학생 생활 문제 해결 대책 즉시 실시
    1. 학생에게 매일 4合씩 정기적인 식량 배급을 요구한다.
    2. 학생에게 대한 학용품 배급을 요구한다.
   一. 학원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영웅적인 투쟁을 하는 청주학생 맹휴 절대 지지
   1946년 4월 8일 광신상업학교 학생대회
  • 1946년 4월 10일 <해방일보> 普專 盟休 續報
普專 학생들이 일제히 동맹 휴학을 斷行한 것에 관해서는 이미 보도한 바 이어니와 그 후 普專 학생대표 교섭위원과 학교 당국사이에 교섭 경과는 다음과 같다.
 一. 자치권 승인 문제에 관해서는 학교 당국은 전혀 강압적 태도로 나와 교내에서 언론, 집회, 결사까지 일일이 간섭을 하 겠다 한다.
 二. 극히 하숙난, 경비난으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있는 학생에 대한 기숙사 합숙소의 알선 문제 또한 노력한다고 하나 금전 문제로 인하여 불가능하다고 거부당하였다.
 三. 서북 학생, 戰災 학생의 구제에 관한 기금 문제도 전적으로 부인하는 태도로 나왔다.
 四. 普專의 전통을 사랑하고 더욱 광채를 빛내는 운동부 후원(시합시) 역시 전혀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금전 문제로 인한다고 한다.
대개 이상과 같고, 一, 二의 문제에 관하여서는 若干 수락한 건도 있으나 학생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위의 제 조건 부인으로 말미암아 아직 교섭은 계속 중이다. 그리고 일부 배반분자의 책동과 대동신문에 개재된 바와 같은 사실 왜곡의 기사는 일반 학생에게 극히 분개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普專 학도에는 봉건적 권위나 몽매한 사상이나 어떠한 모략이나 테러에 동요하는 반동분자는 없다는 것을 천하 諸씨는 알아라. 그리고 일반 학생은 교섭위원의 지시에 따라 行動할 것.
 普專 임시학생총회 교섭위원회
  • 1946년 4월 10일 <해방일보> 眞正한 民主學園을 찾는 學徒들은 蹶起하였다.
진리를 사랑하고 정의에서 살기를 자기의 사명으로 하고 있는 학도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학원을 찾고 있다. 과거 일제의 식민지적 노예 교육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명과 이러한 요구가 완전히 말살되고 있던 우리 학도들이 해방 후 첫 과업은 진리탐구의 길을 찾는 것과 진정한 민주 학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앞으로 빛나는 우리 조선을 걸머지고 나아가야 할 순진한 학도의 지성이야 말로 세계사적 규모에서 발전하는 진전한 민주주의 노선으로 ○○○하고 있다. 정열과 용기로 맺어진 자라나는 이 힘이 진리탐구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데에서만 우리 조선은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할 것이며 또한 발전할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민주주의 학원의 ○○을 좀먹는 비민주성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통하여 학도들의 생장력은 더욱 빛날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아직도 이러한 학도들의 목메인 부르짖음과 억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문교 정책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이뿐이겠는가. 일제 잔재와 팟쇼적 반동분자들의 모략 책동으로 인하여 학도들의 새로운 의욕을 억압하고 있다. 청주학생 재궐기, 법정학교 페쇄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서 탄원 중 피검, 경기중학 동성상업 등 중등학교, 鑛專, 普專, 경제전문 동맹 휴학 등 학원의 불상사는 접종하고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학도들의 순정에 넘치는 외침은 한결같이 학원의 민주화, 일제 잔재, 팟쇼적 교사의 퇴진을 절규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를 담당하고 있는 자 가운데 반민주주의적 분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 1946년 4월 10일 <해방일보> 學園民主化를 좀먹는 非民主성을 排擊한다

@실제날짜:460408

경제전문학생 동맹휴학 단행
4월 8일 경제전문학교 학생회에서는 진정한 학원진로의 ○을 좀먹는 비민주성을 철저히 배격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적 자유 학원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동맹 휴학 선언문과 요구 조건을 斷行하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맹 휴학 선언문
 우리 학도들의 과업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 나아가야만 우리 조선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나아가서 조선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 탐구의 길은 오로지 민주적 자유 학원에서만 보장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학원의 자유와 학원의 민주화를 침범하는 비민주주의적인 조치안에 대하여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결의
   一. (一).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화를 침범하는 관료적 비민주주의적 요소를 철저 배격하라
      (二). 학생의 집합, 언론, 연구, 발표의 자유를 요구한다.
      (三). 경찰의 학원에 간섭을 절대 반대한다.
      (四). 정당한 이유없이 학원 폐쇄, 교수 파면, 학생 퇴학을 반대한다.
   二. 경성법정학교 즉시 복교를 요구한다.
   三. 학원에서 모든 반민주주의적인 분자를 소탕하라
   四. 학생의 생활을 보장하고 그 본분을 遂行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의 성의 있는 대책과 해결을 요구한다.
      (一). 쌀 일인당 4合씩, 학용품 일체를 학교 소비 조합을 통하여 배급하라.
      (二). 38도 이북 학생의 생활을 보장하라.
      (三). 38도 이북 학생의 수업 요금을 임시 철폐하라.
      (四). 기숙사 설비를 확충하고 지방 학생 및 서북 학생을 기숙케 하라.
       경성전문학교 학생회
  • 1946년 4월 11일 <조선인민보> 盟休의 불꽃 遂京師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학원 맹휴의 불꽃은 드디어 교육의 총본산 京師에 까지 비화하였다.전 조선 교육의 모태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지난 9일 학생임시총회를 열고 학생 생활의 확보, 학원의 민주화, 경성법정전문 무조건 복교 등의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는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에 동 요지의 진정서를 전달하고 본과생 1,000여 명과 예과생 700여 명은 일제히 맹휴를 단행 최후까지 요구 관철을 기하여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적극 항쟁을 하게 되었다 하는데, 민주 새조선 문교의 첨병의 보금자리 京師에서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봉기한 것은 요즈음 연발하는 학생 맹휴 사건의 본질을 천명하고 남음이 있어 그 귀추가 특히 주목된다. 다음은 본과생과 예과생의 요구 조건이다.
 본과생 요구 조건
  1. 학생의 생활확보를 요구함
   ▲ 학교소비조합을 통하여 일일 매인당 4홉씩 식량을 배급할 것
   ▲ 기숙사 현 설비를 완비하여 즉시 전면적 경영을 개시할 것
   ▲ 학생에게 학자금을 보조할 것(특히 38이북 학생)
   ▲ 학생에게 일상품, 학용품을 소비조합을 통하여 배급할 것
   ▲ 교수에게 연구비를 충분히 보조하며 교직원 및 용원의 생활 안정을 도모할 것
  2.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함
   ▲ 학교연구, 운동시설을 급속히 완비할 것.
   ▲ 학교내에 외부 세력 침입 절대 반대.
   ▲ 반민주주의 친일 분자를 소탕할 것.
   ▲ 피검 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
  3. 경성법정학교를 무조건 즉시 복교 시킬 것
 豫科生 요구 조건
  1. 생활 문제 해결
   ▲ 하숙생, 고학생을 전원 기숙사에 수용할 것.
   ▲ 학생에게는 매일 일인당 4홉씩 특별 배급할 것.
   ▲ 현물가에 적응한 학자금을 원조할 것.
   ▲ 교원 생활 보장과 연구의 보조.
  2. 학원의 민주화
   ▲ 자치권 완전 확립
   ▲ 출판, 집회, 결사, 연구와 사상의 자유.
   ▲ 신성한 학원에 대한 외부 간섭 배격.
   ▲ 학원의 일제 잔재의 逐出
  • 1946년 4월 11일 <조선인민보> 自初至終 法規의 違背다- 법정전문에 대한 유억겸 씨 태도

@실제날짜:460410

지난 6일 폐쇄당한 학교를 달라고 이른 아침 봄비 내리는 군정청앞 보도에 앉아 외치는 법정학생들의 순진하고도 격렬한 진정을 목격한 군정청 기자단은 문교부 최고 책임자 유억겸 부장을 방문하고 법정전문에 관한 문교부의 정식 태도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즉석에서는 언명을 못하겠다고 대답하고, 결국 정식 표명을 후일에 밀기로 되었던 바 10일 드디어 거기에 대한 확답이 있었다.
그 내용은 얘기하던 것과는 많이 어그러진 것이었고, 문제의 촛점이 복교냐 아니냐 하는 점에 관해서는 이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법정학교는 수속의 불비, 설비의 부족이라는 이유로 폐교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본다. 수속의 불비는 지도하여 정당한 수속을 하도록 할 것이며 설비 운운은 조선 현실에 대한 무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과거 몽매 정치의 잔재이다. 시설과 설비는 우리 사회의 육성과 함께 건실해 지리라 보는데 문교 당국의 의견은?" 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유부장은 "수속의 불비, 설비의 부족은 제2차, 제3차의 문제이다. 요는 무지인지 고의인지를 모르겠으나 자초지종 법규의 위배이다. 민주국가의 공민으로서 사회 질서를 존중하고 책임감이 강한 교육자라면 돌다리를 두둘겨 건너가는 격으로 매사에 주도 면밀한 용의와 행동이 있었야 할 것이었다." 라고 말하였다.
  • 1946년 4월 12일 <조선인민보> 工專도 盟休 突入- 학생 대회 개최코 결의

@실제날짜:460410

학원의 일제 잔재와 반민주주의적 요소의 철저 소탕을 부르짓고 진리 탐구의 자유를 요구하여 연발하는 학원 맹휴의 꼬리를 이어서 工專도 궐기하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는 10일 500건아가 학생대회를 열고 법정학교 폐쇄 기타 학원에 거듭 나타나는 반민주적 반동을 봉쇄하고저 드디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내거는 동시에 맹휴 항쟁에 돌입하였다 한다.
 결의문
  ▲전조선 학원의 민주주의화
  ▲학문과 연구의 자유를 요구함
  ▲정당한 이유없이 학교 폐쇄, 교수 파면, 학생 강퇴, 교재 강요를 반대함
  ▲학원에 경찰, 관료적 탄압을 절대 반대
  ▲반민주주의적 교육자 즉시 소탕
  ▲법정전문학교 즉시 복교의 요구
  ▲학생 생활을 보장하라
  ▲1인당 매일 쌀 4홉씩 배급
  ▲학용품 배급
  ▲38이북 학생 생활 절대 보장
  ▲기숙사 설치와 생활의 전적원조
  ▲일인 서적을 몰수하여 학생에게 배급할 것
  • 1946년 4월 12일 <조선인민보> 北朝鮮 敎育 躍進
일간 자유황해의 보도에 의하면 북조선 임시위원회 교육국에서는 고등교육 시설의 대확충을 연구 중이든 바 드디어 그 성안을 얻어 대학 豫科 등 6 전문학교를 신설하기로 大略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한다.
평양에 대학豫科(문과, 이과) 1교, 정치전문1교, 농림전문 1교, 치과전문 1교, 함흥에 함흥工專(광산과, 기계과, 전기과, 화학과) 1교를 창설할 예정으로 각 학교의 모집 학생수는 大略 대학豫科 합격자 100명, 정치전문, 농림전문, 각 100명, 치과전문 70명, 고등사범 400명, 함흥工專 200여 명이라 한다.
  • 1946년 4월 12일 <한성일보> 서리만난 학원 재단-북조선에 校土둔 학교들
토지개혁령으로 재원이 杜塞. 한 강토안에 있을 수 없는 38의 경계선이 우리 동포의 정신상, 생활상 모든 부분을 유린하여 말못할 협위속에 잠기어 있는데, 그중에도 조선의 장래를 담당할 학도를 양성하고 있는 학원이 그 경영 재원인 토지가 38이북에 있기 때문에 전혀 그 수입이 두절되어 경영난에 빠져있는 학교가 불소한 바 이는 조선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즉 서울시내 淑明女專과 淑明高女를 경영하고 있는 淑明義塾은 그 재원인 년 1만 5천석을 추수하던 토지가 황해도 載寧에 있으며 梨花高女는 鐵原에, 普成專門은 全谷에 각각 2천석을 추수하던 토지가 있으며 徽文義塾은 安州에 약 4천석, 그밖에도 養正中學 사립학교는 재산의 중요 부분인 토지가 전부 38이북에 있는 관계로 작년 가을부터 한푼의 수입이 없고 물가고로 인하여 숙명여전과 같은 학교는 현재 직원의 봉급조차 지불못한 채 있다하며 梨花高女에서는  현재 이화재단의 이사장 소유인 永昌書館을 학교 직영으로 하여 그 수입으로서 보충하는 상태라 한다. 이와같이 각 학교는 경영난 혹은 재원 변용 등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터인데 38선이 시급히 철폐되어 남북이 통일된 경제적 안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일방 경영난○○진 학교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시급한 조처가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숙명의숙 담 : 본 의숙은 황해도 재령에 약 1만 5천석을 추수하는 토지와 麗州에 8백석 추수하는 토지가 있어 이것을 재산으로 숙명여전, 淑明高女 두 학교를 경영하여 왔는데 38선 장벽으로 말미암아 작년부터 재령 토지의 수입이 없어져서 재정 문제에 큰 타격을 맞고 있다. 학무국에서 전에 일본인이 대부분이던 이사진을 ○○하고 다시 개선하여 2월말에 발표한다던 것이 아직 하등의 소식이 없다. 두 학교를 유지해 가려면 100만 원 내지 150만 원의 자본이 필요한데 현재는 교직원의 봉급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朴徽文中學校長 담 : 우리 학교의 재산은 대부분이 토지에서 수입되는데 그 토지가 38장벽으로 연락이 두절되어있는 관계로 재정상 큰 타격을 받고 있으나 설립자이며 상무이사인 閔奎植 씨의 독지로서 우선 난관은 면하고 있다. 모든 형세가 혼란하여 별다른 대책도 없고 참으로 험한 일이다.
  • 1946년 4월 12일 <한성일보> 신년도 군정청 예산발표-세입 80억, 세출 118억

@실제날짜:460411

초과액 38억 염출이 문제. 군정을 반영하는 신년도 군정청 예산은 지난 2일부터 러취장관이 사정 중이었는데 11일 사정을 완료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신년도 예산은 해방전 총독부 예산 30억에 대하여 세입은 8,013,394,000원, 세출은 실로 11,800,202,000원에 달하는 백악관 예산사상 경이적인 방대 예산인데 초과액은 3,786,818,000원의 거액이다. 이번 예산 편성은 조급히 한 관계로 엄밀한 검토를 못하였다고 보이는데 세출의 증가는 물가고에 인한 인건비의 팽창과 아울러 각종 사립 학교에 대한 과대한 보조금, 체신 관계의 前沖電氣 매수, 방송국의 군정관리에 의한 경비가 중대원인이고 38억에 달하는 초과 재원의 염출 방도가 가장 주목된다. 세입 재원은 전매, 체신, 교통 관계가 주로 수입 방도를 연구하여 부족액은 보충한다 하는데 4분의 1에 달하는 초과액은 이 방법으로 염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朝鮮銀行에서 차입하는 모양이다. 38억의 부족액을 낸 금년도 예산은 결코 건전한 예산이라고는 볼 수가 없고 수입 방도에 대해서 엄밀한 연구를 하는 한편 세출에 있어서도 재검토하여 중요하지 않는 신규 사업은 이를 삭제하여 세출입이 부합하는 건전한 실행 예산의 재편성이 요망된다.
  • 1946년 4월 12일 <해방일보> 京城師範도 學究自由 要求

@실제날짜:460409

경성사범학교에서는 4월 9일 긴급 학생회를 열어 열열한 토의를 한 결과 학생문제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학생 생활을 확보하는 동시에 학원을 민주화하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요구 조건
  一. 학생의 생활을 확보하라
   1. 학생소비조합을 통하여 일일 매인당 4合의 쌀을 배급할 것
   2. 기숙사 현 시설을 완비하여 즉시 학생기숙을 개시 할 것
   3. 학생에게 학자급을 보조할 것(특히 38 이북 학생)
   4. 학생에게 일용품 학용품을 배급하여 줄 것
   5. 교수에게 연구비를 보조하고 교직원 및 용원의 생활 안정을 도모할 것
  二.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1. 학원내의 외부 세력 침입을 절대 반대
   2. 교내 반민주주의 친일 분자를 소탕할 것
   3. 교내 연구 운동 시설을 완비 할 것
  三. 경성법정 학교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동교 학생을 즉시 복교할 것
   1. 피검학생을 즉시 석방 할 것
    1946년 4월 9일 경성사범학교 투쟁위원회
부속중학도
사범학교 부속중학에서도 학원의 비 민주성을 지적하는 요지의 결의문을 제출하고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一. 학생 문제 해결
  1. 하숙생, 고학생 전원을 기숙사에 기숙케 할 것
  2. 학생에게 매일 1일 4合씩 쌀을 배급 할 것
  3. 교원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연구비를 보조할 것
 二. 학원의 민주화
  1. 자치권을 완전 확립하라
  2. 출판, 집합, 결사, 연구의 자유
  3. 신성한 학원에 대한 외부 간섭 절대 반대
  4. 학원으로부터 일제 잔재를 逐出
   1946년 4월 10일 경성사범 부속중학 학생문제 투쟁위원회
  • 1946년 4월 13일 <조선인민보> 京畿商業도

@실제날짜:460410

학원의 민주화와 학생의 자치권을 부르짓음은 날로 높아 그 기세는 경기상업학교에도 파급 아래와 같은 조항을 들고 지난 10일 부터 맹휴에 돌입하였다.
 1. 학생자치권 부여
 2. 출판, 결사, 집회, 연구의 자유를 줄 것
 3. 쌀 배급 확보
  • 1946년 4월 13일 <조선인민보> 理工學部 校舍 返還 鬪爭을 展開- 서울대 학생대회에서 결의

@실제날짜:460410

학원의 자치권 확립 위한 통일 기관을 수립. 경성대학에서는 지난 10일 하오 1시부터 법문학부 강당에서 전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학원의 민주성을 억압하는 일체의 반동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대내외적 제반 긴급 문제를 ○상에 올려 놓고 장시간에 걸쳐 열열한 토의를 마치었는데 요즘 빈발하는 학원의 불상사를 반민주분자의 기획적 학원 유린에 대한 반대 투쟁인 만큼 학원 민주화의 최후의 승리는 학생층의 일치 단결한 공동 투쟁으로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동 대학 이공학부 교사 반환 투쟁 등 대내 문제를 3학부의 공동 전선으로 전개하여 여의치 못할 때에는 대회를 소집하여 결정적 수단을 단행할 것을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그리고 법정전문 폐쇄 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동시에 학무 당국의 책임을 추구하고 동 회의 발기로 학원의 자치권 확립을 촉성할 통일 기관을 수립할 것을 가결하고 동 9시에 폐회하였다. 중요한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반민주주의적 도배를 배제하여 통일적 민주주의 임시정부 급속 수립을 요구하여 그의 적극 협력하기를 선언하는 멧세지를 공동위원회에 제출할 것
 ▲ 전 대학 학생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공학부 교사 반환 투쟁을 전개하며 본 대학을 파괴하려는 모든 음모를 분쇄하며 학생자치권 확립을 위한 문제를 해결함에 노력할 것
 ▲ 투쟁 과정에 있어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급속히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써 제네스트로 들어갈 것
 ▲ 학내에 있어서의 학생 집합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할 것
 ▲ 학내 문제에 대한 경찰 간섭을 절대 반대하고 경무 당국에 이를 성명하여 학생 대표를 불법 구금할 시에는 이에 결정적 수단을 취할 것
 ▲ 法專 학교 학생에게 격려문을 전달할 것
 ▲ 학원 민주주의화를 위하여 투쟁하는 학교 및 시내 각급학교의 자치 운동을 고무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것
 ▲ 빈발하는 학원 민주주의화를 위한 학생투쟁에 대하여 그의 해결책을 수립하지 않을 뿐더러 이를 탄압하고 있는 학무 당국에 책임을 추궁할 것
 ▲ 본 대학의 발기로 학원의 자치권 확립 투쟁을 촉성할 통일 기관을 수립할 것
  • 1946년 4월 13일 <조선인민보> 朝鮮工業學校 無期 盟休

@실제날짜:460412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는 중학 맹휴의 제2진으로 조선공업학교 500생도도 昨 12일부터 무기 맹휴로 돌입하였는데 생도측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학원의 자유, 학원의 민주주의를 침범하는 관료적 압박을 배격함
 ▲ 법정전문학교 즉시 무조건 복교를 요구함
 ▲ 학우회의 자치를 인정하고, 학원에서 모든 반민주 분자의 숙청을 요구함
 ▲ 학생의 생활을 보장하며 그 본분을 수행케 하도록 관계 당국의 성의 있는 대책과 해결을 요구함.
  • 1946년 4월 13일 <한성일보> 동경에 온 미교육사절- 조선에 공학제 실시 ○唱
이번 동경에서 개최되었던 미국교육사절단 회의에 조선에도 남녀공학제도를 실시해야 하겠다는 것이 제의되어 주목을 끌게 된 바 그 이유는
한 국가의 납세자는 같은 지방에 있어서 같은 종류 학교 2교의 재정을 부담할 여유가 없음으로 그 결과 남학교는 일류가 되고 여학교는 2류로 떨어지게 될 염려가 있는 것과 소년 소녀는 어릴 때부터 서로 같이 일하고 생활하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데 남녀의 대등권을 주장하는 구체적 시책으로서 이것은 정당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그의 기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터이다.
교육영화도 제작
전후의 일본 교육을 시찰코자 문교부 차장 오천석 박사와 고등교육국장 락카드소좌는 이번 동경기타 각 지를 순방하고 귀국하였는데 양 씨는 연합군총사령부 보도교화과와 교과서 교원의 훈련, 교육영화 등의 문제에 대하여 간담하고 특히 교육 영화 제작에 대하여는 그 방면의 권위자를 조선에 파견·원조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다.
  • 1946년 4월 13일 <한성일보> 학원의 민주화- 남녀공학(전문, 대학)제 실시
조선의 전문대학 각 학교에 교육사상 처음인 남녀공학제가 실시된다. 해방 조선의 새로운 건설은 모든 부분을 통하여 아직도 어느 정도까지의 혼란을 면치 못하고 있거니와 그러한 반면에는 또한 새로운 착상과 건실한 보조로서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신건설의 걸음을 급히 하고 있다. 국가 백년대계의 초석이 되는 우리의 교육 사업은 과거 36년 동안 왜적의 강압과 掠奪정책에 의하여 여지없이 유린당하였거니와 더우기 청순한 학원에 응당히 있어야할 인권의 자유까지도 섬나라 교육 정책에 유린당하여 같은 인간으로서의 절대 평등권을 나면서부터 형유하고 있는 여성에게 향하여서만은 교육에서까지 차별적인 관념을 넣어 소학을 떠나 중학, 전문, 대학은 남녀의 공학제를 부인하여 왔던 것이다. 남녀공학은 서양의 어느 나라를 말할 것 없고 동방 예의의 하나요 또한 가장 보수적인 습관을 존중하는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 벌써 신문화 정책에 의하여 현대적인 교육을 비롯하는 날부터 이것을 실시하여 왔다.
신 건설은 남녀평등에서- 서울대학, 법전 등에 전학청원 遝至
氣焰도 높은 제복의 처녀들
이에 해방을 마지한 우리의 교육계에서는 교육의 전면적인 혁신을 단행하여 학제의 변경, 학년의 개편, 학기의 개정 등 여러 방면으로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고 있거니와 이번에는 학원의 민주주의화에 순응하여 당연한 순서로서 오는 9월 새학기부터는 전문대학 각 학교에 남녀공학제를 실시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최근 서울대학과 법학전문 등 각 전문학교에서 춘기 보결생을 모집하였던 바 이에는 예상외로 다수의 여자 전문교생이 지원하여 또한 이채를 띠었는데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새 조선 건설에 하필 남자만이 일꾼이 되겠느냐고 우리도 남자와 같은 교육을 받아 일하겠노라는 씩씩한 대답이었으며 또 한편 지금까지의 여자전문학교는 남학교에 비하여 학제며 교수진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새 조선 건설의 일꾼으로서 남자와 어깨 동무하여 나아갈 것으로 앞으로의 조선엔 여자 대신, 여변호사, 여성기술자 등의 새로운 일꾼이 많이 나올 것으로 크게 기대된다.
  • 1946년 4월 13일 <해방일보> 自治權을 附與하라- 道商 學徒 궐기

@실제날짜:460411

경기도 상업학교에서는 4월 11일 전교생이 학생대회를 개최하여 열열한 토의를 한 결과 학교 당국에 대하여 자치권 요구서를 제출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과 요구 조건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우리 道商 700명 학도들은 만장일치로 자치권을 요구할 것을 결의하고 학교 당국에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이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생들을 탄압하려고 하였으며 교장선생은 교무주임이 취임 후에는 곧 자취권을 부여하겠다고 約束하였다. 그런데 교무주임이 취임한 지 이미 수 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확답이 없음은 우리 학생을기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구나 교내 변론대회, 級會까지도 탄압하고 맹주천 교장은 비겁하게도 경찰 당국과 연락하여 우리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을 말살하려고 하고 있으나 우리 도상 700명 학도는 학문 연구의 자유를 얻고 학원의 민주화를 획득할 때까지 힘있게 싸울 것을 맹서하는 동시에 경찰이 학원에 간섭을 절대 반대한다.
 요구 조건
  一. 비민주주의적 교육을 숙청하고 우리에게 자치권을 부여할 것
  一. 학문 연구의 자유와 결사, 출판, 집회의 자유를 인정할 것
  一. 학생에게 쌀을 우선 배급할 것
  1. 유명무실한 교우회는 해산하고 새로 조직하는 자치회를 인정할 것
  2. 자치회의 조직운영 및 기타에 대해서는 학교 당국은 일체 간섭하지 말 것
  3. 자치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교원인사, 학생입학, 학교운영 재정 문제는 제외한) 무조건 인정 할 것
  4. 현존하는 비민주주의적인 ○○○을 폐지하고 그에 대한 것은 모두 자치회에다 일임할 것
  5. 학생에 관한 학생행사는 일체 자치회에 일임 할 것
  6. 교우회 기관지는 전적으로 자치회에 일임 할 것
  7. 학생들에게 쌀을 매일 일인당 4合씩 우선 배급 할 것
  8. 操行査定 제도를 폐지 할 것
  9. 각 운동부를 적극적으로 원조(재정적 기타) 할 것
  10. 교내 미화작업은 일체 자치회에다 일임 할 것
  11. 일제 잔재인 시말서를 제도를 폐지할 것
  12. 38도 이북 학생들을 원조 할 것
  13. 보결 시간을 폐지하고 3-4년의 학생의 총의로서 시간표를 선정할 것
  14. 형식적 명예교육을 배척하고 실질적 교육을 실시할 것
  이상 전 요구 조건을 거부하는 시에는 위 조건을 인정할 때까지 전교생은 동맹 휴학함을 선언함
  道商 一同
  • 1946년 4월 14일 <동아일보> 學校 再開와 食糧 要求로 同盟 休學은 不必要

@실제날짜:460413

學徒들의 猛省을 文敎部長이 促求
법정(法政)학교 폐교 문제를 비롯하여 절박해가는 식량 문제 등을 빙자하여 요즈음 시내 각 학교에는 流行病 모양으로 동맹 휴학이 전염되고 있고 한편 남녀 중학생들의 풍기와 학습 태도가 좋지 못하여 사회의 빈척을 사고 있는데 13일 문교부장 핏텐자 중좌는 기자단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여 학원의 맹성을 촉구하였다.
요즈음 학원에 불상사가 나는 것은 사회적 불안과 식량 문제가 절박한데다가 교원과 교장들이 충분한 경험과 제어력이 적은 데도 큰 원인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교원보다 더 나은 교원은 없고 95퍼-센트 이상의 학교가 모든 악조건 아래서 잘 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스트라이크는 부정당한 것을 힘으로 요구 조건을 다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의 요구가 바르다면 동맹 휴학을 하지않고 온건한 수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맹 휴학의 대개는 학생편이 그른 경우가 많이 있다고 본다. 또한 법정학교는 해방전에 이미 폐교되었던 것이고 다시 개교한 뒤는 재산 자금이 없을 뿐더러 유자격 교원의 명부 제출이 없으며 수업연한이 4개월인지 6개월인지도 모르는 전문학교라고 한 것은 학생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언제나 당국의 표준대로 준비한다면 개교시킬 것이나 학교인가에 스트라익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1946년 4월 14일 <조선인민보> 工專 學生 四名 拘禁

@실제날짜:460413

기보 경성공업 맹휴 사건은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던 바 11일에 이르러 돌연 합숙소에서 취침 중이던 학생, 장성우, 한덕기, 자택에 있던 이현기 등 3명이 신분이 불명한 사람에게 납치된 사실이 있어 학생들은 우려하고 있었는데 사방으로 조사한 결과 동대문서에 구인됨을 알고 20일 오후 학생대표 엄항섭외 3인이 동 서에 문의차 출두하였던 바 엄도 구금되었음으로 13일에는 학생대표 5명이 도경찰부를 방문하였는데 정보과장은 검속 이유는 말하지 않고 "구인된 학생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하였으며 장경찰부장은 "학생은 금일 새벽에 석방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동대문서에서는 상부로부터 아직 석방 명령이 없다하여 방금 계속 구금 중이라 한다.
  • 1946년 4월 14일 <조선인민보> 普專 盟休는 圓滿 解決

@실제날짜:460413

학원의 민주주의화와 학생 경제 생활에 대한 학교 당국의 적극적 원조를 요구하고 6일부터 맹휴로 들어간 보전 학생들은 그간 학교 당국과 교섭을 거듭하여 오던 중 13일 드디어 교섭이 원만히 성립 학교 당국은 학생측에서 제출한 자치권 획득, 쌀 문제, 기숙사 개설, 서부학생 원조를 전면적으로 승인하게 되어 15일부터 전교 학생은 일제히 등교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6년 4월 14일 <조선인민보> 義務敎育제에 暗影- 당국의 적극적 조치를 요망

@실제날짜:460414

현재 실력은 지원아동 수용도 염려. 再生 조선의 지적 수준의 앙양과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건에 큰 추진력이 될 의무교육제의 실시는 건국 사업 중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인데 문교부가 제출한 3억 8천 여만 원의 세출 총예산도 결정된 이 때에 의무교육제 실시에 당국이 어느 정도의 성적을 올리게 될 지가 주목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즈음 신임 문교부장 피덴저 중좌의 말에 의하면 당국에서는 의무교육제 실시에 관한 법령 제정을 보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 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장래의 의무제 실시는 고사하고 자진 지원하는 아동도 이를 전부 수용할 수 있을까가 염려된다. 그리고 현재의 실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니 문교부 책임자의 이와 같은 담화는 의무제 실시에 암영을 던지는 것으로 일반에게 적지 않은 불안을 초치할 것으로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가 요망되는 바이다.
  • 1946년 4월 15일 <조선인민보> 民主學園建設鬪爭委員會-전문, 중등 각 학교 규합하여 조직

@실제날짜:460415

예지 조선 건설의 사도 학생들이 조선의 부화된 역사적 사명, 민주주의적 발전에 전 심혈을 경주하고 우선 학원의 자유,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궐기한 지 이미 朔餘 그러나 청주학생 맹휴 사건을 비롯하여 서울 각교에서 봉기하고 있는 맹휴 사건이 외부 간섭으로 말미암아 복잡화하고 이에 대한 순진한 학도의 반발은 점차로 치열화되어 문제는 더욱 확대의 경향을 보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昨 14일에는 鑛專, 工專, 京師본과, 동 豫科, 道商, 朝工(전櫻工), 經專, 광신상업 대표(각 전문학교 각 2명, 중등 상업 각 1명)가 모처에서 모여 서울 민주 학원 건설투쟁건설회를 조직하고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참가 교생 40,000여 명과 더불어 최후까지 공동전선에서 목적 관철을 기하게 되었다 하는데 그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학원의 민주화
  가. 학생의 언론, 결사, 연구 비판의 자유를 요구함
  나. 학생자치권의 인정을 요구함
  다. 학원에서 모든 반민주주의 분자의 숙청을 요구함
  라. 정당한 이유없이 학급 폐쇄, 교수 파면, 학생 강퇴를 배격함
  마. 법정학교 무조건 즉시 복교를 요구함
 2.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을 절대 배격함
 3. 학생 생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함
  가. 쌀 매일 일인당 4홉씩, 학용품 일체를 각 학교 소비조합을 통하여 배급할 것
  나. 학생 및 교수 생활을 절대 보장할 것.(특히 38이북 학생)
  다. 기숙사 설비를 확충하고 지방학생 및 38이북 학생을 수용할 것.
  • 1946년 4월 15일 <조선인민보> 우리들의 自由를 찾자-경성대학 전 학생 대회

@실제날짜:460410

학원의 민주주의화를 부르짓고 바야흐로 지금 각 학원에 전개된 맹휴에 대하여 경성대학 전 학생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멧세지를 발표하였다.
300백만 조선학생 여러분에게
전조선 학생 여러분 8. 15 이후 우리 학도들이 나아가 길은 학생 자유 확보, 학원의 민주주의화 이외에는 없다. 우리들은 전력을 다하여 이 길을 매진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적을 발견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잔존 세력은 우리 학도들이 씩씩한 투쟁을 의식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특히 순진한 여학생, 중학생 여러분에 대한 그들의 반학도적인 봉건적인 태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극도로 분격시키고 있다.
전조선 학생 여러분 우리들은 여하한 희생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자유를 찾아야 하고 민주주의 학원을 건설하고자 한다. 학생은 가장 예민하고 다감하고 열정적이다. 우리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반학도적 분자를 소독하자. 지금 각 학원에서 씩씩하게 투쟁하고 있는 전조선 학도 여러분에게 우리 경성대학 학생 일동은 뜨거운 격려의 말을 보내는 바이다. 
 1946년 4월 10일 경성대학 전 학생대회
  • 1946년 4월 15일 <한성일보> 이래저래 흔들리는 학원들

@실제날짜:460415

경영난, 교재난, 교원난에 식량난, 맹휴까지. 국가의 장래를 담당할 학도를 양성하는 학원에서 식량난, 경영안, 교재난, 교원 부족 등의 갖은 난관이 뒤따라 습격하여 서울안 각 학교는 머지않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먼저 경영 문제로 보면 과거에 관립이었던 학교는 지금도 역시 관비로 운영해가지만 사립학교는 전의 재단 그것만으로 운영하자니 나날이 폭등하는 물가고에 도저히 응변할 수 없고 더욱이 재산의 중요 부분인 토지가 38이북에 있는 학교는 작년 가을부터 전혀 수입이 없어 당국의 재단 알선도 받고 있다하나 현상 유지를 못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 기숙사는 식량난과 경비 문제로 대개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각 남자 중학교가 더욱 곤란한 상태에 이르렀고 여학교는 자기들 손으로 자취를 하는 관계로 곤란하나마 연명하는 듯하다. 9월부터 초등학교 학급 증설이 실시되고 또 중등이상 학교 학제가 변동되면 거기 대비할 교원진 확장도 당연히 요청될 것으로되 예비 문제는 고사하고 현재도 훨씬 부족하다고 하며 학생들 교과서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원용도 완성되지 못한 듯하다. 학원에 이러한 난문제가 중첩하여 있는 일방 法政學校를 비롯하여 서울안 각 학교에 맹휴 문제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며 순진해야 할 남녀 중학생의 풍기 문제가 ○대두하여 사회의 여론이 자못 커가고 있다.
  • 1946년 4월 15일 <해방일보> 敎育者는 壓制敎育에서 民主敎育으로 轉換하라

@실제날짜:460413

학생 맹휴에 대한 미군 문교부장 談
미군 문교부장 피친저 중좌은 13일 군정청 기자단과 회견하고 당면한 학원과 문교 당국의 제 문제에 대하여 기자단의 질문에 대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최근 각 학교에서 맹휴가 속출하고 있는데 이 원인은 불안정한 사회 현상이 학원에 반영된 것과 식량 문제이다. 그리고 또 교육자와 피교육자들이 아직도 일제 제국주의 시대의 군국주의적 압제 교육에서 민주주의 교육에로 자기를 적응시키지 못한 데 있다. 문교부에서는 민주주의 교육 방침에 입각하여 학교를 직접 관리하거나 운용 원칙을 직접 지시하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맹휴는 옳지 않은 요구를 힘으로 관철시키려고 할 때가 많으므로 당국으로서는 이 방법이 아니고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여 주면 조사 선처할 것이다.
 1. 학교교과서에서 한자를 전폐하는 동시에 횡서를 사용하는데 대하여는 방금 연구 중에 있다. 글이란 민주주의 국가에는 전 국민이 단기간 내에 습득할 수 있었야 할 것이다.
 2. 국민학교의 의무교육은 중앙교육심사 위원회에서 연구 중에 있으나 현재는 시설과 인적 자원의 制約이 있으므로 의무교육은 고사하고 지원 아동도 전부 수용 할까 문제이다.
 3. 법정학교에 대하여는 학교 당국자나 학생들을 처벌할 의사는 전혀 없다. 오직 학교 당국이 우리가 요구하는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 준다면 우리는 사회에 이 학교를 추천하기에 주저치 않을 것이다.
  • 1946년 4월 15일 <해방일보> 學徒는 民主學園를 찾는다.- 경성工專생 투쟁 전개

@실제날짜:460410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생들은 4월 10일 긴급학생대회를 소집하고 학문 연구의 자유를 확보하는 민주주의 학원을 확립하라는 것을 외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선언문과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 휴학을 斷行하는 동시에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
 선언문 요지
 학문 연구의 자유는 인류 문화 발전에 커다란 요소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정의에서 살 것을 자기 본령으로 하고 있는 우리 학도는 학구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민주 학원을 건설하고 나아가서는 인민의 자유와 민족의 번영을 보장하는 민주정부가 하루 바삐 수립될 것을 갈망한다. 그런데 일제 잔재는 이것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 학원은 지금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전 학원의 민주화와 법정학교 즉시 복구, 학생 생활 보장을 위하여 총 역량을 집중하고 최후까지 싸울 것을 선언한다.
  요구 조건
   一. 전 조선의 학원의 민주주의화
    1. 학문과 연구의 자유를 요구함
    2. 정당한 이유없이 학교 폐쇄, 교수 파면, 학생 강퇴, 교재 강요를 반대함.
    3. 학원의 경찰 관료적 탄압을 절대 반대.
    4. 반민주주의적 교육자 즉시 소탕
   一. 법정전문학교 즉시 복교 요구
   一. 학생 생활을 보장하라.
    1. 일인당 매일 쌀 4合씩 배급할 것
    2. 학용품 일체를 배급할 것
    3. 38이북 학생 생활을 절대 보장할 것
    4. 기숙사 설치와 생활의 전면 원조
    5. 일인 서적을 몰수 하여 학생에게 배급할 것
   위 결의하에 목적 달성을 위하여 동맹 휴학을 斷行함
   1946년 4월 10일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회
  • 1946년 4월 15일 <해방일보> 學園의 民主化를 위하여 水原 中學敎員 總辭職

@실제날짜:460408

수원 각 중학교에서는 교원들이 총사직을 斷行하여 학도는 물론이고 학부형 일반 시민에게 일대 충격을 주고 있는 사실이 발생하였다.
수원여자상업학교에서는 8.15 후 문화고등여학교라고 명의를 변경하고 수원중학교와 병립·경영하기로 결정하고 順○으로 進行되고 있던 바 읍내 모 사립여학교 책임자와 설립자가 협의한 결과 현 교육제도하에서 남여학생이 동일 교사내에 있으면 인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이것을 분리하려고 책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학생과 학부형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자 이 자들은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이러한 것은 교원직의 책동이라 하여 책임을 교원에게 전가하는 동시에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교무주임을 돌연 파면 시키게 되자 전 교원진은 그 조치에 대하여 반대하고 총사직을 斷行하여 이에 항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원, 학부형, 학교 당국의 談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삼일중학교에서는 교원이 民戰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돌연 3교원을 파면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교원측 談
  1. 여학생 분리 문제는 우리 교원진에게는 비밀히 進行한 것인 만치 이에 협력할 수 없다.
  1. 폐교가 아니고 분리인 이상 그들의 장래를 위하여 현 교명인 문화고여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 지당하다.
  1. 그들의 교육 진전을 위하여 당분간이라도 교원진의 교류를 하여야 한다.
   학부형의 결의
  1. 재학생 만이라도 최후 1인까지 졸업시킬 의무를 移行할 것
  1. 학업 즉시 계속.
  1. 학원의 민주주의 확립, 민주 교원 파면 절대 반대.
 학교 당국의 談
  기정 방침대로 進行할 예정이다.
  • 1946년 4월 16일 <한성일보> 우울 학원에 명랑한 소식- 서울시내 미취학동 2만 월내로 각교에 편입

@실제날짜:460416

시청에서 불일간 수속 방법을 발표. 배움에 굶주린 이 땅에 의무교육을 완성키 위하여 학무당국과 각 학교는 그 구체적 방침을 세워서 하루라도 빨리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예의로벽중에 있는 바 금번 서울시청에서는 의무교육제 실시의 제 1착으로 금 4월내로 현재 시내에 있는 7세로부터 12세까지의 미취학아동 2만 명을 시내 각 국민학교와 미군이 명도하여 줄 일인 국민학교에 수용하여 거리와 가정에서 불우하게 놀고있는 아동들을 한 사람도 없게 하는 동시에 완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명일의 조선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를 씩씩하고 명랑하게, 아름답고 훌륭한 소국민으로 양육코자 목하 그 구체적 성안을 작성하여 그 실시 요령과 수속 절차를 수일내로 발표하리라 하는데 지원은 현 거주지별로 소관학교에 하게될 것이고 입학하면 각자의 지능에 따라 적당한 학급에 편입시키게 되며 특수한 아동들에게 대하여서는 별도로 短縮 특별 교육을 고려하고 있다하며 이에 따르는 교원난은 현재 복직 교원과 전재 교원들의 다수 지원자가 대기하고 있으므로 교원의 질적, 양적 문제는 없다 한다.
그리고 현재 6세의 아동은 금년 9월 신학년 입학의 적령아동이므로 금번 임시 편입에는 제외된다. 이러므로 매년 1만 7천 명의 학령아동이 그 무서운 시험 지옥에서 벗어나서 안심하고 웃으면서 새 학교에 들어가서 마음놓고 거리낌 없이 공부하게 될 것이다.
  • 1946년 4월 16일 <한성일보> 학도는 학원을 지키자- 서울대학 예과학생 奮起

@실제날짜:460416

학원의 자유를 둘러싸고 여론이 분분하여 타율적 동맹 휴학 문제 등을 익기하여 도리어 학원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결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이때 경성대학 예과학생회에서는 학도는 오로지 학문의 길을 지키며 속히 학교로 돌아가라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하여 전 학도에게 경고하였다.
 1.정치 세력의 학원 침범을 배격하고 학원의 자유를 기함. 
 1.동맹 휴학은 최후적 수단임을 재인식하고 학도의 입장과 방법으로써 적극적으로 국가 건설에 기여함.
 1.태만 정신을 투쟁의 미명으로 호도하는 동맹 휴교를 배격하고 此에 경고함.
  • 1946년 4월 16일 <한성일보> 학원의 고민, 학도는 먼저 배우고 보라- 사설

@실제날짜:460416

1. 해방 조선의 과도기적 고민은 정계나 산업 부문에서 각 방면으로 파급되어 이대로 나간다면 중대 위기를 예상치 않을 수 없는 이즈음 순진하게 육성해 나가야 할 학원에서까지 이러한 고민상은 표면화되고 말았으니 작일 본지에 보도한 바와 같은 제반의 난관과 장애는 3천만 국민으로 함께 걱정하며 함께 해결해야 될 중대 과제가 안될 수 없다.
2. 이제 학원이 직면하고 있는 고민을 냉정히 검토해 본다면 교육자의 처지에서 살펴볼 때 재정난, 교원난, 교재난 등이 불가피한 난관으로 되어 있고 피교육자인 학도의 처지에서 살펴볼 때엔 38선 이북에서 와 있는 학도들의 學資難과 정신적 고민을 필두로 기숙사나 하숙의 식량난은 물론 성인 사회에서 구성된 대립분열의 사상적 영향까지 파급되어 순진한 머리와 어린 가슴에 비상한 ○○을 주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3. 이러한 고민, 이러한 난관의 해결책은 교육자나 학도를 중심한 학원에만 기다리느니 보다 우리의 자주적인 독립 정부 수립과 함께 정치, 산업, 경제 등 건설 부문의 급속한 안정을 기다려 비로소 근본적인 방책을 논구할 수 있는 것이니 목전의 안타까움에서 교육자나 문교 당면만을 책함도 크게 삼갈 바이요 그렇다고 하여 순진한 학도들의 흥분하기 쉬운 심정을 몰이해한 눈초리로 대한다든가 이를 자극하는 언동도 좀 더 경계할 일이다.
4. 그러나 가장 솔직하고 가장 양심적이며 용감하고도 현명한 학도 제군에게 충심으로 부탁하노니 그대들의 당면한 고민과 난관을 타개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그르치지 말라! 그대들의 고민이 전 민족의 고민으로 되어 있고 민족적 난관의 일부분이 그대들에게 까지 미치고 있음을 깊이 ○○하랴. 형극의 험로에서 살 길을 찾아야 될 것이 우리 민족의 현실이며 피눈물을 삼켜가면서도 배움의 길을 지켜야될 것이 학도들의 사명이다. 요구할 일이 있더라도 배우며 요구하고 주장할 일이 있더라도 배움을 거부하지 말고 주장하라.
  • 1946년 4월 16일 <해방일보> 學園의 民主化를 妨害하는 反民主主義者를 排擊한다.

@실제날짜:460414

서울민주학생투쟁위원회 조직. 鑛專, 경전, 경사, 工專, 광신상업, 경기도상업, 경사예과, 조공 등 학생대표들은 4월 14일 서울 민주 학원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선언문과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선언문 요지
  해방된 조국의 역사적 사회적 및 필연적인 발전 단계는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의 철저한 소탕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적 발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노선에서 조선의 금일의 역사적 과제는 규정되고 더욱 이 진리를 탐구하며 애국심에 불타는 우리 해방된 조선 학도의 사명은 체득한 진리의 실천에 용감하며 자기자신의 ○○을 충실히 함으로써 시대 조류의 선두에서 조선 사회의 민주주의적 건설에 이바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의 달성을 기하고저 ○○ 진리의 탐구를 갈망한다. 이 진리 탐구의 길은 오로지 민주주의적 자유 학원에서만 보장되는 것이다. 우리 학도가 부르짓는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은 오로지 진리에 충실하며 사회적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심오한 결의와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고 결코 단순한 자의적 자유 방임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현상은 과연 우리의 진실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는가? 아직도 우리 학원의 진정한 민주주의화는 학원내에 숨어 있는 반민주주의적 제 요소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학원의 민주화를 방해하고 그 발전을 침범하는 반민주주의 분자의 책동을 절대 배격하고 나아가서 삼천만 인민 동포와 같이 이러한 반민주주의 분자의 철저한 소탕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러한 굳은 결의와 각오로써 우리의 성스러운 사명 달성을 기하여 서울민주 학원건설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목적 관철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선언한다.
  요구 조건
   一. 학원의 민주화
    1. 학생의 언론, 결사, 연구 비판의 자주를 요구함
    2. 학생자치권의 인정을 요구함
    3. 학원에서 모든 반민주주의 분자의 숙청을 요구함
    4. 정당한 이유없이 학교 페쇄, 교수 파면, 학생 강퇴를 배격함
    5. 법정학교 무조건 즉시 복교를 요구함
   二.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을 절대 배격함
   三. 학생 생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함
    1. 쌀 매일 일인당 4合씩, 용품 일체를 각 학교 소비조합 등을 통하여 배급할 것
    2. 학생 및 교수 생활을 절대 보장 할 것 (특히 38이북 학생)
    3. 기숙사 설비를 확충하고 지방 학생 및 38이북 학생을 수용할 것
    서울 민주 학원 건설 공동투쟁 위원회
  • 1946년 4월 17일 <동아일보> 學園의 民主敎育化- 文敎部에서 審議會에 諮問
앞서 문교부에서는 교육의 이념과 그 목적을 천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이념의 구체적 운영 방침을 세워 弘益人間의 진정한 조선의 민주 교육을 실시하고자 교육심의회와 普通高等敎育局의 초등, 중등, 고등 사범교육위원회에 학교교육 민주화 계획 수립과 실현 방책에 대한 의견을 諮問하였는데 諮問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學校敎育에서 일제잔재를 一掃하는 방책.
 2. 學校 經營의 民主化 방책.
 3. 敎育者의 活動을 민주화하는 방책.
 4. 兒童, 生徒, 學生의 指導 方法을 民主化하는 방책.
 5. 右 諸方策實施에 관한 行政 措置. 
 其他 實施 具體案.
 조선의 교육은 민주 교육에의 일대 전환을 짓게 되었는데 문교 당국으로서 자문위원회 이외의 각 문화 단체에서 좋은 제안이 있기를 바라며 그 완수를 촉진하기로 되었다.
  • 1946년 4월 17일 <동아일보> 解放後 첫 살림 計上- 文敎篇-
敎員을 大量 養成- 국립 음악, 미술교에 천만 원 計上
義務敎育 豫算만은 流産
문교부 예산을 볼 때 언듯 생각나는 것은 의무교육 예산은 어찌 되는가이다. 6개년간 실시 제1년의 의무교육 예산에 대하여서는 기정 방침대로 이번에 10억여 만 원을 제출하였던 만큼 이에 대한 정식 발표가 없음이 적지 않게 궁금하여 하루 빨리 특별예산이 편성되어 무엇보다도 급한 의무교육이 실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터이다.
이번 통과된 예산의 세출은 3억 8천 6백 88만 3원 3백 원이고 세입은 일천 일백 3십 오만 7천 6백 원으로 세출 차액은 3억 7천 5백 5십 2만 4천 7백 8십 4원인데 세출의 대부분이 인건비로 충당되는 것은 금년 군정청 예산의 한 특색이라 하겠다. 특색있는 신규 사업으로는 각 중등학교 교원 부족을 덜고자 서울대학, 연희전문 등 각 전문학교서 국사, 국어, 理科, 생물, 수학교원의 임시교원의 단기양성소 설치비로 천만 원을 계상한 것과 새로히 9월에  개학될 대학령(大學令)에 의한 국립음악, 美術(이는 경복궁안 고옥을 교사로 한 4년제 중학교이다.)의 두 학교를 신설하게 된 것이다.
이의 예산은 한 학교에 5백만 원씩 도합 천만 원을 계상한 것으로 민주 교육과 아울러 조선의 정서 교육 실시에 선편을 걷게 되는 것으로 신조선 학원의 새로운 풍모를 나타내고 있다.
  • 1946년 4월 17일 <한성일보> 군정청 세출입예산-각 부처별 세목 발표
47년도 군정청 각부처와 국, 서, 과 등에 관한 세입, 세출 예산표는 일전 군정장관 러취소장으로부터 승인되었는 바 자세한 것은 아래와 같다.
세출예산액
 농무부        1,497,014,800
 상무부          499,850,300
 체신부          527,900,000
 문교부        ○88,88○,300
 재무부         ○77,467,700
 재무부전매국  1,409,466,000
 사법부        685,○9○,000
 경무부        ○○0,254,500
 보건위생부      415,125,400
 ○○부         22,2○○,500
 운수부        1,983,345,000
 해안경비대      357,540,000
 국방경비대      669,951,800
 회계처           45,099,400
 행정處              385,700
 국방부            ○○5,460
 외무처         ○,○○○,400
 총무처            4,356,900
 인사행정處        3,752,800
 기획처            6,219,800
 관재처           53,273,400
  • 1946년 4월 17일 <한성일보> 학원 불상사 빈발은 문교 당국에 책임있다

@실제날짜:460416

咸尙勳 씨 담화. 학생이 스스로 학교를 배반하여 동맹 휴학이 각 학교에서 발생함에 일반은 크게 우려하는 바 16일 기자단에게 함상훈 씨는 그 이유와 문교 당국의 무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난을 하였다.
근자 일부 단체에서는 학생을 선동하여 시험을 거부케 하며 동맹 휴학을 단행케 하며 이것을 듣지 않으면 수수 불량 학생들이 등교 방해, 구타 등을 하고 있는데 문교 당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하등의 경고도 대책도 없이 수수 방관하고 있으니 이러고야 어찌 문교의 직분을 다 한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유감 천만이다.
  • 1946년 4월 18일 학무국장 피텐져 의무교육제 실시에 관한 계획 발표

학무국장 Aubrey O. Pittenger는 46년 9월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할 계획임을 발표하였다. 한국교육의 문제점으로 첫번째는 교사의 부족이 심각함을 지적하였다. 기타 교실 부족 등으로 의무교육은 1952년정도는 되어야 비로서 제대로 실시될 것으로 예상하였다.[115]

  • 1946년 4월 18일 <한성일보> 한 사람의 문맹도 없도록 전국에 민중학교 창설
1면에 4-5교씩 5개년 계획으로. 의무교육제 실시가 암초에 만나 암영을 던지고 있는 이때 문교부에서는 7백만에 달하는 미취학 문맹자를 일소하여 수년 후에는 "한 사람도 문맹자가 없도록" 민중학교를 설립하고자 방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민중학교는 16세이상 30세까지의 문맹자를 수용하여 3년 동안 국문, 산술 등을 가르치는 것인데 지금 계획으로서는 1면에 3, 4의 민중학교를 설립하여 5년 후에는 문맹자 없는 조선을 만든다는 것이고 그 실시가 요망된다.
  • 1946년 4월 19일 문교부는 남한의 교사가 총 23,872명임을 발표

피텐져 문교부장관은 남한의 교사수가 총 23,872명으로서 이는 1944년의 한국인 및 일본인 교사 총수 23,778명이나 1939년의 20,627명이었던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6세에서 18세까지의 아동 550만 명 중 約 30%가 등록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116]

  • 1946년 4월 19일 <조선인민보> 敎員 三八名 免職- 충남 예산교육회
교원 부족으로 생도들이 참다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 때 충남 예산교육회에서는 초등교원 38명을 일시에 면직시켜 일반 군민의 분개를 사고 있는데 그 원인은 아직 미상이며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 1946년 4월 19일 <조선인민보> 義務敎育의 明朗한 거보- 미취학 전아동을 수용
서울 각교 29일까지 실현. 일본 학정하에 입학난으로 우리 수많은 적령 아동들은 배우고 싶은 공부를 배우지 못하고 적령 연령을 놓쳐서 취학하지 못한 채 교육 기아에 헤매고 있다. 더구나 금년 9월부터 실시될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에 따라 금년도 적령 아동은 교육을 받게 되나 적령을 지난 미취학 아동의 교육은 의무교육에 竝行된 미지수적 중대 문제였다.
이에 서울시 학무과에서는 이 현안을 신중 고려 하여 오던 중 드디어 의무교육제 실시의 일익으로서 만7세 이상 - 만12세 미만의 미취학 아동(1934.9.2부터 - 1939.9.1까지의 출생아동)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29일 까지 구역 지정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기록 결정하였다.
즉 금반 취학 아동은 26일까지 지정 학교에 입학서를 제출하고 각 학교에서는 입학의 가부를 결정하는 전형을 일체 시행하지 않고서 맹아를 제외한 전부를 입학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문맹을 퇴치하며 인민 문화 향상의 기초가 될 의무교육 실시의 거대한 제1보는 서울시부터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통학구 표를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교명, 괄호 외는 정회명)
 통합구역표
  (청량) 이문, 휘경, 회기, 청량, 전농
  (전농) 답십리
  (숭내) 종암, 제기동 북부
  (종암) 제기동 남부, 안암동부, 안암서부, 용두북부, 용두남부, 신설
  (돈암) 돈암동 동선남부, 동선북부, 정화
  (창신) 숭인, 창신동부, 창신북부, 창신서부, 신설동, 고사남부, 고사북부
  (삼산) 성북제일, 성북제이
  (혜화) 동대문, 욱구동, 욱구서, 혜화, 명륜1. 명륜2, 명륜3
  (효재) 충신, 효재, 연진, 종6, 종5
  (창경) 명륜4, 동숭, 연건, 이화, 원남
  (동명) 마장, 마장사근
  (무학) 응봉, 杏당, 하왕동, 하왕중
  (광회) 하왕서, 상왕동, 상왕서, 황학, 용곡
  (청구) 앵구, 앵구유락, 앵구幸, 앵구생구, 앵구문화, 앵구중, 앵구남, 금호북
  (장충) 동무학, 서무학, 북무학, 남무학, 중무학
  (한남) 금호남, 옥수, 한남, 북한남
  (교동) 인의, 종4, 종3, 후정봉익, 낙원, 운리, 와룡, 권농, 수은, 돈의, 경운, 익선
  (종로) 관훈, 견지, 공평, 인사, 종2, 관철, 관수
  (제동) 원서, 계동, 가혜, 제동
  (삼청) 삼청동, 삼청서, 팔판, 화동, 소격
  (수송) 안국, 송현, 사간, 중학, 수송, 청진, 종1, 서린, 광화문, 적선, 도염, 내자
  (청운) 부암, 홍지, 신영, 청운, 신교, 경무대, 효자, 통인, 옥인
  (매동) 누상, 창성, 누하, 필운, 사직, 채부, 통의
  (덕수) 내수, 당주, 서대문2, 서대문1, 평동, 송월, 교남, 홍은
  (방산) 장사, 예진, 황6, 방산, 죽교, 황5, 광희1, 광희2, 병목동, 임정, 병목서, 동사헌, 서사헌, 황4, 초음, 신동
  (청계) 입정, 수표, 수하, 장교, 남대문1, 삼각, 황3, 황2, 명치
  (남산) 본5, 본4, 본3, 배화2, 배화3, 배화1, 일출, 수송, 왜성대, 본2, 남산, 화원, 영정1, 영정2, 약초, 영락1, 영락2
  (서대문) 정동, 태평1, 화천, 의주1, 의주2, 다옥, 무교, 황을
  (남대문) 장곡천, 남대문2, 남대문3, 남대문4, 남미창, 남대문5, 어성, 북미창, 봉래1, 욱정1, 욱정2, 욱정3, 본정1, 길야1, 길야2
  (태평서부男) 태평2, 서소문
  (삼광)(삼판) 고시, 삼판동, 삼판서, 강기, 연병
  (안산) 홍재, 현저동, 현저서, 현저북
  (금화) 중첨, 杏촌남, 杏촌북, 관동, 교북, 복천, 천연
  (위동) 냉천, 죽첨1, 죽첨2, 죽첨3제1, 죽첨3제2, 합미근
  (봉래) 중림, 봉래3, 봉래4서, 봉서남
  (창천) 연회, 창천, 대신, 노고산, 동교
  (북성) 북아현, 북아현남, 북아현북
  (소의)(남자) 공덕동, 아현2
  (서강) 서강동, 서강남, 서교, 합정, 망원, 신수, 구재, 현석
  (용강) 배흥, 염린
  (덕창) 양영, 마포, 도화동, 도화서, 용정
  (공덕) 공덕서, 신공덕남북
  (아현) 아현1, 아현3, 아현4, 아현5
  (금양) 금정, 미생, 대도동, 대도서, 금구
  (남정) 청수, 산수, 원4, 원3, 원2, 원1, 암근
  (효창) 서계, 청염1북, 청염1남, 청염2, 청염3, 감기전차서편
  (용산) 한강1, 한강2남, 한강2북, 신용산, 용산
  (이태원) 이태원남, 이태원중, 이태원북, ○광
  (서빙고) 서빙고, 동빙고
  (은노) 명수대1, 명수대2, 명수대3, 명수대남
  (강남) 본동, 노량진, 노량진동, 노량진서, 상도동, 상도서
  (우신) 번대방, 신길서, 신길남, 신길동, 도림동
  (영등포) 영등포남, 영등포동, 사옥, 도림서, 영등포서
  (당산) 양평남, 양평, 당산제2, 당산중
  (당산분) 영창, 당산제1, 영등포, 영등포중
  • 1946년 4월 19일 <조선인민보> 專門大學 敎授聯合會를 設置- 참된 민주 학원 확립에 대비

@실제날짜:460417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으며 들고 일어선 각 학교 학도들의 맹휴 사건은 누차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직접 제일선에서 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교수진에서는 계속되는 맹휴의 공통적인 성격을 검토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민주주의 학원을 확립하고져 17일 오후 2시부터 시내 각 전문 대학교수 약 50명이 모처에 모여 맹휴 사건을 비롯하여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학원 자치 문제 등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의를 한 바 있었는데 현하 문교 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조선에 있어서 참된 민주 학원의 확립은 상당한 시련 기간이 필요한 것이므로 교수단의 상설적인 기관을 설치하고 대내적, 대외적으로 공동 보조를 취할 필요가 있다 하여 전문대학교수연합회를 설치하기로 결정, 각 학교 대표 1명씩으로 위원 12명을 선정하여 규약과 대외 성명의 기초를 일임하고 동 5시경 산회하였는데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이 연합회의 활동에는 기대되는 바 적지 않다.
  • 1946년 4월 19일 <한성일보> 일곱살서 열두살까지 미취학동은 신고하라
22일부터 26일까지 시청서 접수. 금년부터 우선 서울시부터 국민학교의 의무교육이 실시케 되었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그 실시 요강이 금일 시청 학무과로부터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자격: 시내에 거주하는 만7세 이상 만20세 미만의 미취학 아동으로 함(1934년 9월 2일부터 1939년 9월 1일까지 출생아동)
 2.취학 구역과 지정 학교: 구청과 학교에서 발표함
 3.원서 제출과 마감: 입학 용지는 4월 21일부터 각 국민학교에서 배부하고 취학 해당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4월 22일부터 4월 26일
 4.입학식: 4월 29일 각 국민학교에서 거행함 기타 필요한 사항은 정회장이나 혹은 부근 학교 구청에 문의할 것
  • 1946년 4월 19일 <한성일보> 학원의 민주화를 촉구-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 결성

@실제날짜:460417

진리를 찾고 정의를 사랑하는 젊은 학도들이 맹휴를 단행하여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짖어 사회에 큰 중동을 주고 있음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서울대학을 비롯한 시내 각 전문대학의 교수진도 궐기하여 점증하는 맹휴의 공통 성격을 검토하고 아울러 건전한 민주주의 교육을 확립하고자 작 17일 오후 2시부터 약 50명이 모처에 참집하여 학원의 경찰 간섭, 학원자치, 금반 맹휴의 공동 성격 검토 등의 제문제를 중심으로 진집한 토의가 있었다.
확고한 문교 정책을 갖지 못한 과도기인 현하 조선에 있어서 참된 민주 학원의 확립은 상당한 시련 기간이 되므로 교수단의 상설적인 기관을 설치하여 대내적, 대외적으로 공동 보조를 취할 필요가 있어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의 설치를 만장 일치로 가결하고 각 학교에서 대표위원 1명씩으로 서울대학 이공학부 金志政 씨외 12명을 선거하여 규약과 대외 성명 발표의 기초를 일임시키기로 결정한 다음 동 5시에 폐회하였는데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강력히 발족한 이 연합회의 금후 활동은 매우 주목되고 있다.
  • 1946년 4월 20일 <동아일보> 學齡넘은 二萬 兒童- 今月中에 시내 각교에 收容
22일부터 입학원 접수
다같이 조국 광복의 크나 큰 광영을 입고 자라나는 우리의 어린이로서 배우고 싶어도 배워질 길이 없어 거리로 해매던 서울 시내 2만여 미취학 아동을 전부 수용하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서울시에서는 금년 9월에 실시될 국민학교 의무교육령에 따른 금년도 적령아동은 응당 9월에 취학하게 되나 취학 적령이 넘은 만 7세이상 만 12세 미만(1934년 9월 2일부터 1939년 9월 1일까지의 출생아동)의 서울시내 1만여 아동을 전부 수용하고져 벙어리, 맹아를 제외하고는 지능, 신체의 불구를 구별함이 없이 2부제(4년이하)로 전부 수용하기를 결정하여 오는 22일부터 26일까지 입학원서를 받고 29일까지에는 구역 지정 국민학교에 전부 입학시키기로 되었다.
  • 1946년 4월 20일 <조선인민보> 三八 以北 學生 登錄

@실제날짜:460419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금 19일 ○○일 삼팔이북에서 온 학생들을 중등학교에 편입 알선할 목적으로 학생등록서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등록 장소와 기간은 다음과 같다.
 ▲ 등록장소: 경기도 학무과
 ▲ 등록 기간: 4월 22일부터 4월 25일 4일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 등록 방법에 대한 주의: 1. 우 등록자는 보호자와 동행할 것. 2. 재학증명서와 재학을 증명할 만한 서류를 지참할 것. 3. 전에 등록한 자로써 학교에 입학을 못한 자는 재차 등록할 것.
  • 1946년 4월 20일 <한성일보> 좁은 교문에 들어가도록 38이북 해외 귀환 학생 등록 실시
금번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중국, 일본, 만주, 38도 이북에서 온 학생으로서 중등학교에 입학못한 자를 각 해당 학년에 편입 알선할 목적으로 등록 조사한다는데 그 등록 주지 방법은 라디오, 신문을 통하여 등록자에게 알도록 하며 등록 장소는 경기도 학무과로 등록 기한은 4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4일간(매일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이라 한다. 또한 등록 방법에 대한 주의 사항은 재학증명서와 재학을 증명할 만한 서류를 가지고 보호자와 같이 올 것이라 하며 전에 등록한 자로서 상금껏 학교에 입학 못한 사람도 다시 등록하여야 한다.
  • 1946년 4월 21일 <동아일보> 西北 學生 援護會 組織
38장벽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곤란을 받고 있는 재경 서북학생들의 곤경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가고 이즈음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재경학생들은 경제적으로나마 다소 원조하고자 서북학생원호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되었는데 추대고문과 본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고문 김성수, 유억겸, 현상윤, 엄항섭, 방응모, 안호상, 설의식, 임영신, 이종영, 안재홍, 황신덕, 백남훈
 감사 이선근, 윤택중, 박명환
 役員 회장 김효건, 김상호 이하 략.
  • 1946년 4월 21일 <조선인민보> 京工校生도 盟休 단행

@실제날짜:460417

시내 전문학교의 맹휴 사건이 접종되고 있는 이 때에 17일 시내 ○대방町에 있는 경성공립공업학교 일천여 학생 일동은 3월 말일까지 비워 준다는 미군이 사용 중인 교사의 복귀를 비롯한 하기 요구 조건을 군 당국과 학교 당국에 제출함과 동시에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요구 조건
   1. 교사를 즉시 복귀 비어 줄 것.
   1. 학생대우에 관한 것
      가. 기숙사 설비의 완비와 사생의 생활을 보장할 것.
      나. 경제적 곤란 상태에 있는 학생 생활을 보장.
   1. 학원에 대한 경찰 탄압 절대 반대.
  • 1946년 4월 21일 <조선인민보> 京農서도 맹휴
경성농업 전교생 500여 명은 해방 직후부터 민주 학원 건설을 부르짓고 3차에 걸쳐 맹휴를 단행, 교장과 싸워 오던 중 지난 17일 다시금 전교생 대회를 열고 1. 학생자치회 승인 요구  1. 생도, 직원 생활 안정 보장, 특히 서북 학생 학비 학교부담 등 양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목적 관철까지 무기 맹휴를 단행하였는데 요구 조건 중에는 과거 투쟁에 희생된 학생(2명 퇴학, 1명 무기 정학)을 즉시 복교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어 그 귀추가 극히 주목되는 데 동 학생투쟁위원회에서는 재 등교에 관하여 일반 학생들은 동 회의 지시를 받을 것을 요망하고 있다.
  • 1946년 4월 21일 <조선인민보> 警察의 學園 干涉 反對- 학생통일촉성회에서 성명발표

@실제날짜:460420

서울학생통일촉성회에서는 昨 20일 경무부에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항의문을 문교부에 학생 생활 문제 해결을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에 메세지를 전달하여 학도의 입장으로서 동 위원 제씨에 감사하고 제5호 공동성명을 지지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학생의 지향할 바를 선명히 하였다.
이번 제5호 미소공동성명은 세계 민주주의 조류에 맞는 진정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구체적으로 재확언한 것이다. 이로써 학원에도 자유가 올 것이고, 조선에 독립도 세계의 평화도 있을 것으로 우리들 학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인이 사랑하며 조선인이 애○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초석이 될 것을 맹서한다.
  • 1946년 4월 21일 <조선인민보> 關鍵은 學園 民主化뿐- 교수단연합회 발표, 학생 맹휴대책

@실제날짜:460419

전문대학 교수단 연합회에서 학생 맹휴의 근본적 해결책을 규명하기 위하여 진지한 토의를 거듭한 결과 19일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금반 맹휴는 그 동기와 객관성에서 판단치 않고 그에 대한 대책을 관료적 탄압이나 일시적 미봉으로 임한다면 책임 당국의 과오는 큰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학계의 기본 과제인 학원의 민주주의와 학원의 자유에 반하여 경찰이 학원을 간섭하고 더욱 학교 교육 행정과 학교 문제가 전혀 교수회를 무시하는 류의 비민주적 조치는 사회의 발전을 역전시키려는 愚擧이며 나아가서 맹휴의 성질상 조금도 해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를 비난하였다.
  • 1946년 4월 21일 <해방일보> 京城工業學校 同盟 休學 斷行

@실제날짜:460417

경성공업학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와 요구 조건을 내걸고 4월 17일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다.
    성명서
우리 조선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현세를 보아라. 수많은 동포와 학도는 굵주린 배를 움키고 기아선상에서 방황하고 있다. 배우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비참한 상태 또 선생 중에도 가재 도구를 팔아 생활을 하여가며 우리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다. 선생들은 왜 이렇게 까지 하는가. 교육은 독립의 초석이 되고 특히 공업 교육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들은 이렇게도 조선의 공업을 위하여 헌신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공업계의 영향이 큰 우리 교내의 상태는 어떻한가.
9월 중순 미국이 주둔한 ○○한 ○을 선생과 생도가 온난기구 하나 없이 실습장 일대에서 일천백수십 명이 풍설을 맞아가며 혹은 앉고 혹은 서서 음수와 변소도 없이 공부를 계속하여 왔다. 우리는 3월 말일 까지 교사를 비어 준다는 말을 의심없이 믿었었다. 그러나 그희망은 여지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우리는 최후의 수단을 채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4월 17일을 기하여 일제히 동맹 휴학을 斷行한다. 학생 제군 우리는 서로 서로 원조하여 끝까지 힘차게 투쟁하자. 우리는 반민주주의적인 잔재와 반동세력 일체를 물리치고 완전한 민주주의적 학원과 조선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 학도들은 용감한 투쟁을 전개한다. 경성공립공업학교 학생일동은 좌와 같은 요구가 완전히 해결 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맹서하는 바이다.
       요구 조건
1. 교사를 즉시 복구시킬 것
1. 학생 대우에 관한 것
    가. 기숙사의 설비를 완비시키며 사생의 생활을 보장할 것
    나. 경제적 곤란 상태에 있는 학생의 생활을 보장 할 것
   1. 학원에 대한 경찰 탄압 절대 반대
   경성공립공업학교 투쟁위원회
  • 1946년 4월 21일 <해방일보> 盟休의 解決策을 세우라- 교수단 성명 요지

@실제날짜:460417

교육자는 특별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 사명은 단순히 학술 전달과 인격 도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도의 연구와 생활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이 성립되어 있지 않고 유린당하고 있을 때 그것의 성립과 옹호를 위하여 적극적 노력을 하는 것이 건설적인 교육자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면 금번 접종하여 일어난 각 학교 학생 맹휴(학원의 민주주의화, 경찰간섭 반대, 법정학교 문제, 생활문제 등)의 공통된 요구 조건에서 판단하여 그것이 솔직하게 현하 학원을 등진 청년 학도의 사회적 요구며 또 그 요구가 현실적 타당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책을 다만 책임당국의 조치나 일부 교육 행정의 처리에만 기대하여 오불관원의 태도에 終始하려 한다면 조선의 교육은 누가할 것이며 조선의 교육은 어디로 갈 것인가. 조선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하여 수립될 것인가. 스스로 반성하며 이제까지의 방관적 태도를 스스로 질책하는 바다.
교육자는 오히려 솔선해서 여하한 학생 운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그 의견을 진술하고 일보 나아가 민주주의적 조선 교육 건설에 진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합회에서는 맹휴 요구의 구체적 조건을 중심으로 하여 순차로 교육자적 입장에서 이것을 검토하여 적극적 건설적 주장을 공표하려 한다.
일방으로 금반 맹휴를 그 동기와 객관성에서 판단치 않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관권적 탄압이나 일시적 ○○으로 임한다면 책임 당국의 과오는 클 것이며 또 그 문제의 중심점을 저버리고 ○○末節에 한하다면 맹휴의 성질상 조금도 해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며 태만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학계에 기본 요구인 학원의 민주주의화와 학원의 자유에 반하여 경찰이 학원을 간섭하고 학교 교육 行政과 학교 문제가 전체 교수단을 무시하는 식의 비민주적 조치에는 사회의 발전을 역전시키려는 우○인 것을 성명한다.
  • 1946년 4월 22일 <동아일보> 敎育의 民主化
一. 앞서 문교부에서는 弘益人間의 건국이념에 基하여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정신이 透徹한 민주국가의 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기본 이념과 그 이념의 관철을 위한 기본 방책을 천명한 바 있었고 또 이번에는 이 이념의 구체적 방책으로 진정한 민주 교육을 실시 하여 조선교육의 민주 교육에의 일대 전환을 꾀하기 위하여 斯界의 의견을 통합 참작하고자 학교교육에서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방책, 교육자의 활동을 민주화하는 방책, 아동, 생도, 학생의 지도 방법을 민주화하는 방책 등외 수 항목을 교육심의회와 보통교육국 내의 각도교육위원회에 자문하였고 동시에 이 이외의 각 문화 단체로부터도 좋은 제안이 있기를 요망한 바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斯界 관계 각 방면으로부터 좋은 의견이 제출되리라고 믿거니와 진실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하여 교육의 민주화가 시급한 중대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二. 교육의 민주화는 방금 일본에서도 熾熱히 논의되고 있다. 종래의 교육이 그 소위 황실위주의 봉건적 노예 교육이었으며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幸福을 위하여 황실중심의 사상과 침략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彼 이른바 八宏日宇의 이념을 소탕하여 국제 민주주의의 卽應한 일본의 신문화 건설을 위한 교육의 민주화가 창도됨에 이르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래에 있어서 조선의 교육제도가 이상과 같은 일본의 교육이념에 의존되었든 만치 이를 급속히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유문화의 성질을 밝히고 세계 대세를 알리어 조선의 국제적 지위와 사명을 자각케 하며, 동시에 성실 유능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육성함을 목적으로하야 교육의 민주화가 요청되고 있음은 또다시 공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은 종래의 교육 정신과 그 훈련에 의하야 영위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므로 교육의 민주화가 좀처럼 급속한 실현이 곤란하다는 것이 不誣의 사실이다. 교육의 급속한 민주화는 단적으로 말하여 종래의 교육자를 전면적으로 개체함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것이나 실제에 있어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니 요는 교육자 자신의 자각과 현 교육자에 대하여 교체로서 단기에 강습을 실시하여 민주정신과 조선의 신교육 이념을 체득케 하는 것도 그 방편일 것이며 각 학교간의 人事를 교류하여 학생, 학도에 대한 그간의 신뢰와 위신을 갱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三. 교육의 민주화는 응당 학교경영의 민주화가 문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니 前示 문교부의 諮問 項目 중에 이를 제시하게 된 所以일 것이다. 학교경영 문제에 관하여 일본 교육제도의 폐해로서 지칭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공사립간의 차별적 취급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는 官權萬能 思想에서 胚胎된 것으로 관립학교를 선동하였든 까닭에 그 시설과 내용도 이에 偏頗할 傾向이 있었든 것이니 이로 인하여 각반으로 通弊가 많았을 뿐더러 이것이 또다시 官尊民卑의 봉건적 사상을 縕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립학교 경영에 있어어도 그 시설과 내용을 확충할 필요가 있거니와 공사립간의 차별사상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니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 斯界의 의견을 促하기로 하는 바이다.
  • 1946년 4월 22일 <동아일보> 보라! 地方의 敎育熱을
全州 道에서 2천 국민교원을 재교육
전라북도 학무과에서는 도내 국민학교 279교에 2천6백 명의 교원들을 상대로 강습회를 연다. 제1회로 우선 백 명의 직원을 선발하여 공민, 국어, 국사, 교육, 리과학 등의 과목으로 4월 10일부터 2개월간 개최한다.

靈岩 학교설립에 각방면서 기금 遝至

령암 고등실업학교 설립기성회는 령암공회당에서 결성하고 기금 5백만 원으로서 근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동회장에는 柳成계 씨가 추천되었다. 이번 령암고등실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자 동회 부회장 하남두(河南斗) 씨는 자기 소유의 논 40두락과 밭 40두락을, 또 령암예술동맹은 1만 원을 설립기금으로 기성회에 기부하였다.

珍島 國民校 增築에 5만 원을 寄附

전남 진도군 령유면 응호리 曺寅煥 씨는 도내 국민학교 교실 增築費로 5만 원을 기부하였다.

波州 女學校 新築을 決議

파주에서는 군내 각 관공서 수석급 유지로 십여 명이 파주군 문산공립농업학교 고급실업중학 승격기성회와 파주군 공립여자중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廣州 광주에서는 고등여학교를 설치하고자 얼마 전 읍면대회를 소집하고 백만 원을 거출할 것가 신학기에 개교할 것을 결의한 바 있는데 이것을 달성하고자 방금 적극적으로 활동 중에 있다.
咸安 專修校를 實中校로 昇格 運動
교육열에 부타는 13만 구민의 숙망이던 전수학교를 실업중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이번 승격위원회를 조직하고 기금모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데 총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會長 安泰中, 副會長 金石祈 李仲燮.
林川 임천지방의 敎育熱
부여군 임천면 가림학교에서는 교사가 협찹하여 오랫동안 고충을 받고 있었는데 동면 金成連, 辛在昱, 李馬成, 南相宰 제씨의 후원으로 면민교육계에 반가운 소식을 던지고 있다.
  • 1946년 4월 22일 <동아일보> 北朝鮮서 온 中等生 道學務課서 登錄
중국, 일본, 38이북 등지에서 온 학생으로써 중등학교에 입학치 못한 자를 알선하여 학습시키기 위하여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22일부터 25일까지 등록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등록 방법은 보호자와 더불어 재학증명서 혹은 이를 증명할 만한 서류를 지참할 것이라 한다.
  • 1946년 4월 23일 <동아일보> 朝鮮敎育使節團 美國 當局과 討議 開始
美國 國務省 22일 발표에 의하면 조선교육사절단과 미국 당국과 사이에 조선의 문화·교육에 관한 토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근 華星頓에 도착한 동 사절단은 3개월간 교육시찰 기간에 미국 당국과 민간 각 기관을 방문할 것이라고 한다. 국무성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동 사절단은 국무성의 초청으로 지금 미국에 와 있는데 국무성에서는 조선 교육의 시설과 방침을 계획하는데 관하여 차를 후원하기로 하여 제 경비 등을 도와주게 되었다고 한다. 동 사절단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
 문교부 張利郁, 보건후생부 具永淑, 상무부 羅基湖, 외무부 文章郁, 농무부 金勳, 보건후생부 高鳳京
  • 1946년 4월 23일 <한성일보> 조선교육계의 거인 邊永瑞 박사 환영연

@실제날짜:460416

배움에 굶주린 이 땅의 교육계를 위하여 평양 崇專과 延專을 비롯하여 30여년간 교육계에 공헌하다가 전쟁이 시작되어 1940년에 귀국하였던 삔잉쓰(邊永瑞) 박사는 그동안 비율빈에서 그곳 신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다가 왜적에게 포로되어 2년 6개월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지난 16일에 다시 정든 조선을 찾아온 바 기자의 원로에 오시기 수고하셨다는 인사에 이어 대략 다음과 같은 감회를 말한다.
조선에 돌아오니 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으며 나의 여생도 조선 사람들과 동고동락할 작정이며 조선을 위하여 많이 싸우겠다고 말하는 바 중앙교회와 감리교 유지들은 22일 오후 5시 다육정 미장그릴에서 동박사의 환영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다고 한다.
  • 1946년 4월 24일 <동아일보> 學生 盟休 煽動을 嚴罰- 러-취장관 談

@실제날짜:460423

최근 일부 학교의 동맹 휴학을 비롯하여 부산 지방의 검거 사건 등에 대하여 러-취 군정장관은 23일 오전 10시부터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출입기자단의 질문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학생들의 集會
  종로서에서 검거한 학생들은 석방되었는데 집안에서 질서있게 집회하는 데에 대하여서는 금지하지 말라고 경관들에게 통고하였다.
釜山 檢擧 理由
 이번 경남도경찰부에서 검거한 것은 다음같은 이유다. 첫째 면허증에 대한 료금을 수집하고 둘째는 쌀운반의 허가증을 發行하고 셋째 군정청 창고를 접수하고 넷째 법령 제45호 위반 다섯째 정부기관을 어떤 사람에게 비법적으로 시키거나 명령하는 것 여섯째 미합중국에서 발표한 법령에 위반하라고 각 군의 지도자에게 서한을 발송한 것 일곱째 일본인의 재산을 비합법적으로 접수,사용한 것 여덟째 합법적으로 쌀운반하는 것을 방해한 것 아홉째 군의 직원들이 쌀의 운반을 방해하도록 위협한 것 등이다.
 ▲ 학생 맹휴에
  이 기회에 신문 기자들이 그 보도에 있어서 허위의 발표를 하던지 학생, 생도들을 상대로 선동하며 동맹 휴학을 하게 하면 그것은 맥아더 장군의 포고 제2호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저촉되는대로 처벌할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고와 체포는 분명히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 1946년 4월 24일 <조선인민보> 敎員을 積極的으로 양성- 러 장관 회견 담

@실제날짜:460423

장래 실시할 의무교육에 대비코자. 러취 군정장관은 23일 군정청 기자단과의 정례회견 석상에서 당면한 제반 문제에 관한 기자단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문) 독서를 목적으로 집회한 학생들이 종로서에 체포된 사건에 대하여
 (답) 그 학생들은 이미 석방되었는데 집안에서 질서있게 집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금지하지 말라고 경관들에게 통고하였다.
 (문) 의무교육제에 관하여
 (답) 문교부에서는 아직 의무교육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현재 교사 등 설비와 교원의 수로 보아서 6세 부터 12세 까지의 조선의 아동의 반 수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당국에서는 장래에 필요한 의무교육 제도에 대비하여 적극적으로 교원을 양성하고 있다.
  • 1946년 4월 24일 <조선인민보> 우선 배우자 각校가 登校- 민주화 투쟁은 교내에서 의연히 계속

@실제날짜:460423

말썽 많은 학원의 맹휴가 학생들의 전술 변경으로 복교가 시작되었다. 經專, 鑛專, 京師 본예 양과, 工專, 광상, 조공(前기공), 경기상업 등 각교생들은 학원의 민주화,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절대 배격, 학생 생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부르짓고 맹휴를 단행하여 대동 단결로 민주 학원 건설 공동투쟁 위원회를 조직 동일 전선에서 과감한 공동 투쟁을 계속하여 오던 바 금반 그 전술을 변경하고 학무 당국의 성의있는 반성에 기대하는 동시에 민주적 교수단의 노력에 감사하고 그 분투를 기대하여 昨 23일 부터 요구를 보류하고 등교를 개시 학원내에서 학원 민주화에 부단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6년 4월 24일 <한성일보> 교육심의회 분과위원회 조직
독립 국가로서의 신 교육 제도와 방침에 대한 원리와 준칙을 심의하고 있던 군정청 문교부내에 설치된 교육심의회에서는 수 개월에 걸쳐 심의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동 회에서는 신 교육 제도와 방침에 대한 구체적 실시안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다시 고등, 초등, 중등, 사범의 교육단계별로 분과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어 신 교육 제도의 구체적 실시안을 토의하기로 되었다. 고등교육분과위원회의 위원은 다음의 제씨이다.
 玄相允, 白樂濬, 尹日善, 李泰圭, 安東赫, 李寅基, 趙潤濟, 趙伯顯, 沈浩燮, 鄭文基, 兪鎭午, 愼驥範, 蔡官錫, 金活蘭, 孫貞圭
  • 1946년 4월 24일 <한성일보> 義敎實施는 노력 중- 러 장관과 문답

@실제날짜:460423

러취 군정장관은 23일 기자단 회견에서 의무교육, 기타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의무교육을 위한 15억원의 임시 예산에 대한 검토의 결과는 어떠한가
 답:문교부에서는 아직도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校舍와 교원의 수로 보아서 학령 아동(6세로부터 12세까지)의 반수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장래 할 의무교육 제도에 응하기 위하여 지금 적극적으로 교원을 양성하는 중이다. 지방 행정처에서는 소학교 교사의 신축, 수리, 증축 등을 위하여 금년도 예산에 6억원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문교부에서는 중등학교 교사 신축과 수리를 위하여 8천 5백만 원을 예산에 포함시켰다. (후략)
  • 1946년 4월 24일 <한성일보> 의무교육실시안- 문교부에서 정식 수리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교육심의회에서 제출한 조선의 의무교육안을 문교부에서 정식 접수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이 안이 공식으로 인가될 때에는 조선에서 유사 이래의 처음인 의무교육계획이 될 것이라 한다. 교육심의회에서는 소학교 1학년부터 의무교육을 시작하자는 진보적인 계획을 제의하였는데 6년말에는 초급학교의 의무교육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침을 상급학교에서도 연장 통용하자는 제의도 있었는데 유부장의 말에 지금 문교부에서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학교와 교원이 부족한 것이라고 한다.
  • 1946년 4월 25일 <동아일보> 敎育均等은 언제나 實施되나?- 入學의 좁은 門 열라

@실제날짜:460425

入試 具體案을 委員會서 協議
국민학교때부터 시험을 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조선의 특수현상은 9월의 신학기를 앞두고 다시 시험 지옥을 전개하게 될 모양이다. 새로 실시된 신교육제도는 이제 9월초의 제1학기 시작으로서 신제도에 따른 정상적인 교육이 시작되며 8월초에는 전과 다름없이 입학시험의 난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입학시험에 대하여 문교부에서는 국민학교 입학의 고사 방법을 비롯하여 중등, 전문, 대학의 시험에 대한 구체안을 작성하고자 각 분과위원회에서 협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시험기가 앞으로 3개월 밖에 안남았는데 아직도 구체안이 제시안되었으니 진학할 당사자나 그 부형들의 초조 또한 심상치 안은 바이다.
兒童 收容率은 65퍼-센트, 專門, 대학은 10 對 1의 競爭을 예상
대체 금년도 각 학교 졸업생과 그 수용율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를 살펴 의무교육 실시가 하루라도 빨리 될 것을 바라마지 않으며 특수한 집 자제만이 배울 수 있던 교육의 불균 등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적인 교육 균등화를 촉진하여야 할 것이다.
 ▲ 국민학교 
  학령아동은 적어도 70만을 될 것이며 수용력은 35만 정도인데 서울 등 도시는 전 일인학교 등을 이용하여 거의 지원자를 다 수용하게 되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65퍼-센트는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12세 미만의 미취학 아동이 230만은 될 것으로 이에 대한 긴급대책이 요청되는 터이다.
 ▲ 초급중학, 실업학교
  남녀, 공사립학교가 4백 5십 9교인데 금년도 수용력은 11만밖에 안될 것으로 국민학교 졸업생이 30만만 잡더라도 그 경쟁율은 평균적으로 3대 1이나 전년도 졸업생이 있는 것을 가산하면 실제는 그 이상의 경쟁이 예상된다.
 ▲ 고급중학, 실업학교
  수용력은 3만 명 이내인데 졸업생은 3만 5천정도로서 거의 다 진학 수용할 수 있다고 보겠다.
 ▲ 전문대학
  전부 23교인데 중학교 졸업생은 줄지어 2만만 잡더라도 2천 명의 수용력을 가지고는 10대 1이란 놀라운 경쟁이 예상되는 터이다.
試驗制 硏究中- 李初等敎育局長 談
시험 제도의 새로운 방책 수립에 대하여 문교부 초등교육국장 李浩盛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학교의 입학고사와 중학교 이상 학교의 입학시험에 대하여서는 전에도 그 시비가 많았을 뿐더러 피해가 많았던 만큼 우리는 이에 대하여 근본적 개혁을 斷行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학원의 민주화와 아울러 새로운 방책과 나아가 사회 여러분의 이해와 협력이 없이는 안되는 일로 방금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의 각 분과위원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서도 신중 토의를 하는 중인데 근근 좋은 안이 제시될 것으로 믿는다.
  • 1946년 4월 25일 <동아일보> 國民校 入學의 絶好의 機會
놓치지 말라! 원서접수는 오늘 뿐-38이북과 歸還子弟도 받는다
배우고 싶어도 거리로 헤매는 서울시내 2만여 아동을 전부 수용하고자 이번 서울시에서는 임시 조치로서 4월 22일부터 입학원서를 받아 전부 수용하려는 영단을 내리었는데 25일의 원서 마감이 박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서 제출의 성적을 보면 예상외로 좋지 안하여 시학무 당국에서는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미취학"의 견해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한다. 이에 서울시 張학무과장으로부터 미취학의 견해를 밝키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한다.
張 市學茂課長 談
이번에 수용할 미취학 아동은 오는 9월부터 실시될 의무교육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응당 학교에 다녀야 할 아동으로서 현재 학교에 다니지 않는 만 7세미만 12세까지의 아동을 말한다. 따라서 종래부터 서울 시내에 살던 사람으로서 다니지 않은 아동과 학자 또는 신병 등으로 일단 학적에서 물러난 아동은 물론 해방 후 38이북, 만주, 일본 등으로부터 들어온 아동을 빠짐없이 수용하려는 조치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아동으로서 입학지원서만 제출하면 무조건적으로 입학한 후 실력의 응분에 따라 고급학년에 옮길 수 있는 특전이 있다. 이점 잘 이해하여 미취학 아동은 이번 기회에 전부 취학하기 바란다.
  • 1946년 4월 25일 <조선인민보> 入學 후에 短縮 可能- 未就學 兒童에 特典
서울시 장학무국장은 금 4월 29일부터 실시될 미취학 아동 수용 건에 관하여 금번 입학 아동에게는 몇개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취학 아동이란 금 9월 입학예정자(만6세)를 제외한 만 7세 이상 만 12세 미만으로 마땅히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을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동을 말함이다.
이 범위의 아동은 시내에 약 2만 명이 있는데 강제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9월부터 실시되는 의무교육은 강제적이다. 미취학 아동의 경우 무조건하고 입학시킨 후 의무적으로 모두 6년간을 교육받는 것이 아니고 각 아동의 실력에 의하여 교육기간을 3년 내지 4년으로도 단축시킬 수 있다. 즉 입학하여 교육을 받은 후 그 지능에 따라  2학년으로 혹은 3학년으로 1년 혹은 2년을 건너서 편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취학 아동에게 이번에 입학하지 않고 9월에 입학한다면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있으니 주의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46년 4월 25일 <한성일보> 적령아동은 빨리오라- 서울시내 미취학동 편입 성적 불량
시학무당국 談 : 금추 9월부터 서울시내에 실시될 국민학교 의무교육제를 앞두고 그 실시 요강과 접수 방식을 서울시 학무과에서 발표하여 각 정회장 구청 학교 등에서는 이 취지를 일반 시민에게 주지시키며 방금 각 학교에서는 입학 원서를 접수 중에 있으나 시민 중에는 간혹 미취학아동의 해석과 범위에 대하여 이해가 철저치 못한 분이 있고 또 금번에 자녀를 중간 입학케되면 9월초학기에 입학하는 것보다 연한, 수학, 기타에 있어서 불리한 점이 있지나 않을까하며 의구하는 분이 있는 듯하여 서울시 학무과에서는 이러한 기우를 풀어주는 동시에 적령 아동 전부 수용도처에 대한 취지를 철저히 일반에 전하여 앞으로 실시할 국가의 대업인 의무교육제의 절대 찬조를 요망한다고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번 발표한 미취학 아동이라는 것은 적령 아동으로서 현재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동입니다. 즉 금후 9월에 입학 적령을 초과하는 만7세로부터 만12세까지의 아동(1934년 9월 2일부터 1939년 9월 1일까지)으로서 아직까지 학교 못가 본 아동은 물론 일본, 38도 이북 등지에서 온 전재 아동이나 또는 지방에서 이사하여 입학하지 못한 아동도 이에 해당케 됩니다. 이러한 아동은 해당 학급에 전학, 편입케 되나 전연 초학인 아동은 일단 무조건으로 입학시키고 다각도 연구하여 적당하게 학급을 편성하여 연령, 각자의 지능, 특수 조건 등을 참작하여 진학상 연한 단축의 특전을 주게 되었습니다. 즉 이번에 입학하여 지능 검사나 학과에 우수한 성적을 발휘케 되면 학년 진급에 있어서 의무교육 제도에서는 만 6년에 졸업할 것을 껑충 뛰어올라서 4년이나 혹은 4년 이내에 국민학교를 다른 아동과 같은 자격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번 해당자로서 금번에 입학 지원을 하지 않으면 9월부터 의무교육이 실시되면 그 당시의 적령 아동을 전부 수용하고서 남은 자리가 비어야 입학하게 될 것이므로 본인으로서 입학상 곤란이 더욱 심하게될 뿐 아니라 지금 전력을 다하여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마당에 당국으로 지장이 적지않을 것이니 일반께서는 이를 잘 이해하시고 못 ○○○○○는 입학에 한 사람 빠짐없이 지원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 1946년 4월 26일 <동아일보> 高等敎育 入學試驗 臨時措置를 決定
現行 高等敎育 制度에 대한 臨時措置 事項
一. 現行 전문학교로서 신제도에 의하여 대학으로 승격하는 時 豫科 설치여부에 관하여는 각자의 학교 실정에 鑑하여 適宜히 措處하기로 함. 단 (1) 예과를 附置하는 대학의 예과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에 한하여 此를 行하기로 함. (2) 예과를 부置하지 않은 대학에 있어서는 당해 대학에 存置되는 전문과에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함.
二. 수업년한 2개년의 現行 전문학교 제도에 의한 1945년도 졸업 예정자로서 졸업 후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는 신제도에 의한 대학본과 제2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편입할 수 있음. 단, 대학 본과 진학 희망자로서 진학 학교의 선택에 관하여서는 동일계통의 학교에 한하여 자유로 선택할 수 있음.
三. 1945년도 現行 전문학교(수업년한 3년) 제2학년 수료 예정자는 신제도에 의한 각종 대학 본과 제1학년에, 동제1학년 수료 예정자는 동 대학에 부속되는 예과 제2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각각 편입할 수 있음. 단 (1) 수업연한 4년의 現行 의학계통 학교에 있어서는 당해 계통 기관의 신제도 실시에 관한 그의 임시조처에 준거하기로 함. (2) 現行 전문학교 재학생으로서 각종 대학에 부속되는 전문부 졸업을 희망하는 자는 희망에 의하여 此를 인정하기로 함.
四. 경성대학에 있어서는 1946년도의 각 학부 신입생으로부터 신제도의 대학령에 의한 수업년한을 적용하기로 함.
卒業式
現行 각종 전문학교의 졸업 시기는 7월 초순까지 此를 완료하기로 함.
C. 入學志願者 選拔試驗 時期
   一. 제1차시험
    (1) 시기 自 1946년 7월 1일 至 1946년 7월 4일, 4일간
    (2) 실시학교
       大邱農專, 藥專, 京城醫專, 光州醫專, 京城鑛專, 大邱師範, 京城大學豫科, 普專, 法專, 京城女子醫專, 淑專, 이상  11校
   二. 제2차시험
    (1) 시기 自至 1946년 7월 10일 동 13일, 4일간
    (2) 실시학교
       水原農林專門, 齒專, 世醫專, 大邱醫專, 京城工專, 釜山水專, 京師,  延專, 經專, 惠專, 梨花女專, 京城女師, 이상 12校
   三. 합격자 최후 발표는 시험종료일로부터 4일 이내에 발표하기로 함. 
   四. 신제도에 의한 각종대학의 본과 또는 예과에의 편입시험은 각자의 학교에서 적당한 시기에 此를 실시하기로 함.
四. 入學 志願者 選拔試驗 方法
 一. 學術試驗
 공통표준과목 :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시험. 右記 4과목이외에 각 학교의 내용과 성격에 적응한 과목을 3과목 자유선정하여 실시하되 학술시험 과목 총계 7과목을 초과함을 不得함. 단, 외국어는 영어를 원칙적으로 실시하되 사정에 의하여는 獨, 佛, 中, 露語中 其1을 자유선택하여 실시할 수 잇음.
 二. 최종학교의 최고 2개학년 학업성적, 內申書.
 三. 口頭 試驗
 四. 신체검사
  • 1946년 4월 26일 <동아일보> 百六 學級을 增設- 龍頭, 城北國民校도 新築
의무교육의 준비 단계로서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이번 4월 안으로 2만여 미취학 아동을 수용하게 된 것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따르는 2부제의 폐단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완화코저 신년도 학무과 예산 7천2백만 원 중 3천 2백만 원을 신영비로 계상하였다. 이 신영비는 기설한 용두, 城北町 두 국민학교의 교사 建築費로 계상한 외에 현재 시내 각 국민학교를 增築하여 도합 1백 6학급을 증설하기로 되었는데 이에 충당하게 되었다.
  • 1946년 4월 26일 <조선인민보> 공부하라 交涉해주마- 경공 맹휴에 학부형측이 한몫

@실제날짜:460425

말썽많은 학원 맹휴에 부자 同行. 시내 영등포 번대방정 경성공업에서 발생한 맹휴 사건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문제의 해결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등교하라"는 학부형 회의 권고로 금 25일 부터 일제히 등교하기로 되었다. 동교 맹휴의 목표는 校舍 복귀를 중심으로 경제난 타개, 외부의 탄압 배격 등이었는데 맹휴로 들어가자 학부형회에서도 자제들과 함께 문제 해결에 진력하여 왔으나 해결이 지연될 뿐 하등의 성과가 없었으므로 건국 도상에 긴급한 기술 부분인 동교의 맹휴를 이 이상 더 계속한다는 것은 고려의 여지가 있다하여 부형측에서는 학생들에게 일단 등교함이 옳다고 간곡히 권고하는 동시에 학부형회에서는 이기동 씨외 7인을 교섭위원으로 선출하고 직접 당로자와 교섭을 진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한다.
  • 1946년 4월 26일 <한성일보> 전국고등교육 임시조처안- 넓게 열릴 진학의 문
금추 학제 변경에 따라 획기적 안. 금추 9월부터 획기적인 신 교육 제도가 실시되는 데 따 라 현행 고등교육 제도에 대한 과도적 조치가 긴급 중대한 문제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고등교육위원회를 설치하여 신중한 토의를 하고 전문, 대학 교장회의를 개최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 중이던 바 승인을 얻어 다음과 같은 임시조치 요항을 발표하였다.
이 요항에 특기할 것은 현하 정치, 경제, 산업 각 부문에 대한 인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재학생으로 하여금 하루 바삐 학업을 마치어 실사회의 요구에 응하도록 방법을 강구한 것, 입학 시험의 시기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 교육 정신에 입각하여 과거의 학교 입학에 대해 官先私後의 차별적 악습을 타파하는 동시에 입학난의 해소와 완화를 기하여 자연, 인문 양 과학 계통 학교를 대별하여 입학 지원자로 하여금 동일종 학교에 대한 二校 지원의 기회를 획득하도록 시험시기를 1, 2차로 구분한 것인데 시험 방법에 있어서 종래와 다른 점은 인문, 자연 양 계통을 통하여 공통 표준 과목을 제정하여 중학 졸업자로서 상식 정도를 참작하기 위하여 필답에 의한 상식 시험 과목을 과하고 또 상급 학교 수험준비에 대한 편중적 교육을 피하기 위하여 최종 졸업학교 최고 2년간의 학업 성적을 의참고 신체검사에는 불구자에 대한 종래의 가혹한 취급을 피하여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라면 관대히 취급하는 등 획기적 조치이다.
臨時措處要項
 一. 現行 전문학교로서 신제도에 의하여 대학으로 승격하는 時 豫科 설치여부에 관하여는 각자의 학교 실정에 鑑하여 適宜히 措處하기로 함.
  단 (1) 예과를 附置하는 대학의 예과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에 한하여 此를 行하기로 함.
     (2) 예과를 附置하지 않은 대학에 있어서는 당해 대학에 存置되는 전문과에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함.
 二. 수업년한 2개년의 現行 전문학교 제도에 의한 1945년도 졸업예정자로서 졸업 후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는 신제도에 의한 대학본과 제2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편입할 수 있음.
  단, 대학 본과 진학 희망자로서 진학 학교의 선택에 관하여서는 동일 계통의 학교에 한하여 자유로 선택할 수 있음.
 三. 1945년도 現行 전문학교(수업년한 3년) 제2학년 수료예정자는 신 제도에 의한 각종 대학 본과 제1학년에, 동제1학년 수료예정자는 동 대학에 부속되는 예과 제2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각각 편입할 수 있음.
  단 (1) 수업연한 4년의 現行 의학계통 학교에 있어서는 당해 계통 기관의 신제도 실시에 관한 그의 임시조처에 準據하기로 함.
     (2) 現行 전문학교 재학생으로서 각종 대학에 부속되는 전문부 졸업을 희망하는 자는 희망에 의하여 此를 인정하기로 함.
 四. 경성대학에 있어서는 1946년도의 각 학부 신입생으로부터 신제도의 대학령에 의한 수업 년한을 적용하기로 함.
卒業式 
現行 각종 전문학교의 졸업 시기는 7월 초순까지 此를 완료하기로 함. 
C. 入學志願者 選拔試驗 時期
 一. 제1차시험
    (1) 시기 自 1946년 7월 1일 至 1946년 7월 4일, 4일간
    (2) 실시학교        大邱農專, 藥專, 京城醫專, 光州醫專, 京城鑛專, 大邱師範, 京城大學豫科, 普專, 法專, 京城女子醫專, 淑專, 이상  11校
 二. 제2차시험
    (1) 시기 自至 1946년 7월 10일 동 13일, 4일간
    (2) 실시학교        水原農林專門, 齒專, 世醫專, 大邱醫專, 京城工專, 釜山水專, 京師, 延專, 經專, 惠專, 梨花女專, 京城女師, 이상 12校
 三. 합격자 최후 발표는 시험종료일로부터 4일 이내에 발표하기로 함. 
 四. 신제도에 의한 각종 대학의 본과 또는 예과에의 편입시험은 각자의 학교에서 적당한 시기에 此를 실시하기로 함.
D. 入學 志願者 選拔試驗 方法
 一. 學術試驗
  공통표준과목 :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시험. 右記 4과목이외에 각 학교의 내용과 성격에 적응한 과목을 3과목 자유선정하여 실시하되 학술시험 과목 총계 7과목을 초과함을 不得함.
  단, 외국어는 영어를 원칙적으로 실시하되 사정에 의하여는 獨, 佛, 中, 露語中 其1을 자유선택하여 실시할 수 잇음.
 二. 최종학교의 최고 2개학년 학업성적, 內申書.
 三. 口頭 試驗
 四. 신체검사
  • 1946년 4월 26일 <해방일보> 民主學園 建設 旗발下에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실제날짜:460423

학생투쟁위원회 등교성명.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경찰이 학원에 간섭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학생 생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시내 각 전문대학 및 중등학교 15개교 학생이 총궐기하여 학생 문제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제히 동맹 휴학을 斷行한 바에 대하여서는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가 단순한 자유 방종의 요구가 아니요 조선이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하는데 커다란 추진력이 되는 학도들의 학구의 자유, 학생들의 일상 생활 문제에서 나온 문제인 만큼 학생들의 요구와 투쟁을 그대로 방관할 수 만은 없다하여 시내 각 전문대학 교수들까지 동원하여 학생 문제 연락협의회를 조직하고 당국에 절충하는 동시에 학생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하여 싸우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국에서도 학생 맹휴에 대한 반성이 있고 인식이 새로워진 바 있어 經전, 鑛專, 京師, 경사예과, 道商은 요구 조건이 관철되고 나머지 학교에 대하여서는 당국의 성의있는 노력과 대책이 있을 것을 요구하며 일제히 동교하여 민주 학원 건설의 기치하에 끝까지 싸울 것을 성명하였다. 각교 학생 투쟁 위원회 대표가 23일 시내 모처에서 회집하여 열열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별항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등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만일 학원의 자유를 가로막으면 진정한 민주 학원이 건설될 때까지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맹휴를 斷行하여 싸우고 있는 학교는 다음과 같다. 경전, 鑛專, 工專, 경사, 경사예과, 도상(이상 요구 조건 관철) 光商, 朝工, 普專, 연전, 전기학교, 동성, 경농, 경공, 상공, 실무 등
공동성명서
 우리 학생은 항상 진리를 사랑하고 엄격한 자기 비판과 명석한 개관의 과학적 비판에서 냉정하게 자기 행동을 규정하여야 한다.
 현하 조선이 처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발전 단계는 일제 봉건적 잔재의 철저한 소탕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있다. 삼천만 인민의 최대 요구이며 우리 청년 학도는 이러한 위대한 사명을 자각하고 이것을 달성코저 우선 학원의 자유, 학원의 민주주의를 부르짓는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은 우리 사명 달성의 유일한 첩경이며 또 민주주의 학원은 참된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서만 보장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부르짓던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은 결코 방자한 자유 방임의 요구가 아니고 실로 그것을 통하여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숭고한 사명의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민주주의적 분자들은 심지어 신성한 학원에까지 침입하여 악독한 모략과 책동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학원의 불상사는 오로지 이 흉악한 반민주주의 분자의 책동이라고 규정하고 관계 당국에 진정하고 교섭한 결과 성의있는 대답은 조금도 듣지 못하고 도리어 탄압을 받게 되었다.우리는 반민주주의 분자의 철저소탕을 선언하고 관계 당국의 반성과 해결을 요구하며 학도로써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을 고창하는 조선학도의 궐기는 공통된 목적 관철을 위한 공동 투쟁 전선 결성에 발전하여 어리석은 반동 학생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참말로 자기 사명을 깨닫고 궐기한 전 학도가 적극적인 과감한 투쟁을 계속하여 오던 바 조선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의 여 명을 고하는 미소 공동위원회 제5차 공동성명서가 발표되고 또한 하지 중장의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길을 명시한 구체적이고 간절한 성명서 발표를 보게 되고 군정 당국의 성의있는 노력과 대책, 학교 당국 내지 교수단 연합회의 진지한 노력을 얻게 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의 일로 매진과 아울러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을 위한 우리의 요구 조건에 대한 해결과 대책은 급속도로 진전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맹휴를 위한 맹휴가 아니었다는 것은 우리의 성명과 行動에서 明若觀火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야 말로 여러 관계 당국의 성의있는 노력과 대책이 하루 바삐 우리의 요구를 달성할 것을 전적으로 기대하면서 수강 거부의 전술을 변경하여 꿈에도 잊지 못하는 학원에 돌아가서 진리의 탐구에 전력을 다하는 동시에 서울 민주 학원 건설 공동투쟁 위원회 깃발 아래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을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을 천하에 성명한다. 해방 조선의 학도 제군!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願慮없는 비판과 용감한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우리의 앞길은 탄탄하고 희망에 가득찬 것이다. 조국의 민주주의적인 발전은 約束되어 있다. 해방 조선의 학도 제군! 서울 민주 학원건설 공동투쟁위원회의 깃발 아래 민주주의 자유 학원 건설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쟁하자. 이 길이야 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우리 학도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서울 민주 학원 건설 투쟁위원회
  • 1946년 4월 27일 <조선인민보> 高等敎育臨時措置- 전문, 대예 입시는 칠월
○○한 남조선 전문대학 입학시험 실시에 관한 임시조치는 문교부내 고등교육위원회에서 결정, 잠정적으로 실시를 보게 되었는데 여기 관하여 전문대학 교육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금반 임시조치로 긴요한 인재의 등용, 관선사후의 차별 철폐, 입학난 완화, 동일한 계통에 대한 이교 지원, 수험준비에 있어서의 편재 교육 제각, 불구자도 공부할 수 있는 등 광범한 조치가 실시될 것이다. ◇ 문교부 직할 학교는 모두 대학으로 승격할 것이다. 즉 대구, 수원, 각 농전, 경성, 대구, 광주, 각 의전, 경성鑛專, 대구, 서울, 양 남여사범, 法專, 경성工專, 부산수전, 經專, 14교가 승격하고 지금 대학령에 의하여 수속 중인 학교는 이화여전이 있는데 이러한 학교에서 豫科 전문부 중 어느 것을 부속시키겠는가 하는 것은 각 학교 특수 사정에 일임한다. 대학령은 대략 금년도에는 발표 될 것으로 예측되는 데 사학 방면도 될 수 있는 대로 이 대학령에 의하여 승격될 방도가 취하여 질 것이다. ◇ 現行 전문학교 제도에 의한 졸업자는 대학 2학년에 수험한 자격이 있다. 따라서 현재 전문학교 2년 수료자는 대학 1년생으로 편입할 자격이 있고, 또 현재 전문학교 1년생은 豫科 2학년에 편입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실례를 들어 말하면 서울대학 豫科 理乙 수료생은 연전이 대학으로 승격되면 그 본과 1년생으로 편입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 과거의 5년제 중학 졸업자와 4년제 중등교를 졸업한 학생들과의 자격은 동격이다.
 ◇ 시험기일이 2차로 나누어진 학교명과 그 시험 기일은 다음과 같다.
  ▲ 제 1차 (7월 1일 부터 4일)는 대구농약전, 경의전, 광의전, 경성鑛專, 대구사범, 대학豫科, 보전, 法專, 여의전, 숙전
  ▲ 제 2차 (7월 10일 부터 동13일 까지)는 수원농림, 치전, 세전, 대구의전, 경성工專, 부산수전, 京師, 연전, 經專, 혜전 , 이전, 경여사
 ◇ 공통시험과목은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 시험이고 기타는 각 학교의 성격에 따라 3과목내에 자유 선택으로 결정될 것이다.
 ◇ 금년도 전문학교 입학률이 10대 1 정도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많은 완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 1946년 4월 27일 <해방일보> 問題많던 水原中學 盟休에 突入

@실제날짜:460418

수원 민주교원 파면에 따른 교원진 총사직, 문화고등학교 분리 문제 등 난항 중이던 수원중학교는 저기압속에서 수십일을 지내오던 바 드디어 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지난 18일 부터 다음조건을 걸고 일제히 맹휴에 들어갔다.
 1. 전과목을 규정대로 즉시 수업을 개시할 것
 2. 학교의 반민주주의 교원 배척
 3. 파면 민주 교원 즉시 복직
 4. 신성한 교내에 奸商輩 출입 엄금
 5. 후생부를 학교 경비로 학교관리케 할 것
 6. 학생자치회에 일절 간섭하지 말 것
 7. 민주주의 교육 확립
 8. 강제 도태된 졸업생 중 희망자 전원을 무조건 재편입 시킬 것
 9. 교원의  생활을 보장할 것
  • 1946년 4월 28일 <조선인민보> 校名 改稱 등을 討議- 고등분과위원회서

@실제날짜:460426

문교부 내에 새로 조직된 초등, 중등, 사범, 전문 각 분과위원회(실업부문은 목하 조직 중)는 7월 학년말이 가까옴에 따라 활발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데 26일에는 중등, 고등 각 분과위원희가 개최되어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관한 임시조치, 문교부 직할 각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함에 따라 그 교명, 강좌 내용에 관하여 각각 토의되었다 하는데 더욱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관하여서는 초등교육 분과위원회에서는 독자적 입장에서 실시안을 제출하였다 하는 바 그 내용은 매우 획기적이라 한다.
  • 1946년 4월 28일 <조선인민보> 學校 新建築 不許
문교부장 유억겸 씨의 27일 발표에 의하면 다수의 독지가들이 자기의 지방에 학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큰 돈을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열성은 상상하는 바이나 문교 당국으로서는 교재와 교사가 확대될 때까지는 학교 建築을 허가 할 수 없다. 建築 재료는 신학교를 建築하기 전에 우선 종래 학교 수리에 사용하여야 되겠다고 말하고 있다.
  • 1946년 4월 28일 <조선인민보> 學園의 民主化를 諮問- 분과위원회에 5조목을 제의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맹휴가 속출한 작금의 교육계는 조선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는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으로 문교 당국의 태도가 매우 주목되고 있던 바 금번 문교부에서는 동 부내에 설치된 초등, 중등, 사범, 전문 각 분과위원회에 대하여 문교부장으로부터 학교 교육 민주화 게획 수립 및 그 실현 방책을 자문함에 이르러 구체적 대책이 수립될 것으로 그 성과가 크게 기대된다.
즉 문교부장으로부터 각 분과위원회에 제의된 자문사항은 1. 학교 교육에서 일제 잔재를 일소하는 방책, 2. 학교 교육의 민주화 방책, 3. 교육자의 활동을 민주화하는 방책, 4. 아동, 생도, 학생의 지도 방법을 민주화하는 방책, 5. 이상 방책 실시에 관한 행정 조치 실시 구체안 등 5조목인데 금번 자문안은 교육심의 위원회에서 이미 결정된 조선교육의 이념 및 방침에 의지할 것이라 한다.
  • 1946년 4월 28일 <한성일보> 없어질 입학난의 아우성- 중등교 입시조처안 불원 제정 발표
좁은 學究의 문으로 하여금 가련한 어린이가 숨을 아프게 하고 나중에는 자살까지 초래한 중등학교 입학난이 낳은 비극을 신생 조선 학계는 어찌 해결하려는가. 군정청 문교 당국에서는 기보한 바와 같이 고등교육 임시조치를 발표하여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획기적인 교육안을 수립하는 동시에 수천, 수만 명의 어린이를 울리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 문제에 대하여 신중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여 토의한 결과 구체적인 중등학교 입학 요항이 성안된 모양이고 래 5월 초순경에는 중등학교 입학 조치가 발표되리라 한다. 그 성안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는 모르나 과거의 입시가 나은 비극의 요소는 깨끗이 불식될 것이다. 어린이들이 그 천성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는 구학의 넓은 문이 열려질 것으로 많이 기대된다.
  • 1946년 4월 29일 미연방 교육국 한국교육에 관한 임시개혁안 제출

1946년 4월 29일 미연방 교육국 국제교육관계과(Division of International Educational Relations of the U.S. Office of Education)에서는 한국교육에 관한 임시 개혁안을 자문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한국교육에 관한 과학적 조사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 위원회 의견에 동의하여 연방 교육국에서는 교육조사단을 선정하여 가능하면 이른 시일내에, 아마도 46년 8월 15일까지, 한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117]

  • 1946년 4월 30일 <동아일보> 昨日, 各校서 入學式 擧行

@실제날짜:460429

아직 입학 수속못한 아동 금후도 더욱 수용
의무교육을 전제로 한 서울시 학무 당국의 미취학 아동 수용의 임시조치에 의한 지원마감은 지난 27일에 하였는데 방산(芳山)국민학교 590명을 필두로 광희의 454명, 무학의 425명, 孔德의 478명 등 2만의 예상 수용 아동수에 거의 달하여 29일 각 학교별로 각기 입학식을 擧行하였다.
   각교의 수용 상태
그런데 29일 정오까지의 보고에 의하면 각 학교의 수용 아동수는 다음과 같다.
▲ 南山 295 ▲ 孔德 478 ▲ 江南 326 ▲ 鞍山 187 ▲ 漢洞 163 ▲ 思露 228 ▲ 德壽 163 ▲ 孝悌 164 ▲ 南汀 230 ▲ 錦陽 244 ▲ 蓬采 301 ▲ 校洞 269 ▲ 梅洞 353 ▲ 龍江 277 ▲ 舞鶴 425 ▲ 光凞 454 ▲ 西大門 112 ▲ 壽松 149 ▲ 鐘路 86 ▲ 芳山 590 ▲ 惠化 367 ▲ 西江 348 ▲ 麻浦 234 ▲ 孝昌 191 ▲ 禿山 208 ▲ 靑邱 363 ▲ 阿○ 472.
  • 1946년 4월 30일 <조선인민보> 봄과 함께 中學校 入學難- 면치 못할 시험지옥
당국의 단력적 시책에 기대. 전국을 통하여 금년도 소학교 졸업생은 약 35만 명으로 추산되는 바 38이남만 하여도 약 17만 명이라고 하는 데 거기에 대한 중등학교 총 수용수는 겨우 졸업생 총수에 대한 1할 내지 2할 정도 밖에 되지 않았서 금년도도 역시 일제하에서 보던 입시지옥이 재연될 우려가 농후하다.
여기에 대한 문교 당국의 방침으로 오는 5월 1일 소집 예정인 중등교육 분과 위원회에서 구체안을 작성하여 임시조치로 실시될 모양인 데 초등분과 위원회에서도 독단적 입장에서 의견을 제출한 바 있어 획기적인 개혁안이 더욱 기대된다. 현재 문교 당국에서 가지고 있는 계획안은 (1) 입학시험 과중으로 말미암아 편중되는 준비교육을 철폐하고 (2) 학교 선택에 있어서 협소한 일교 집중을 제거 (3) 도시 집중을 회피하는 데 중심점이 있다.
그런데 가장 관심사가 되어 있는 입학 시험은 금년도도 실시될 것이나 과거와 같이 실력 검증이 아니고 어디까지든지 시험 준비를 필요치 않는 방책이 선택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교사와 교원이 부족하기에 발본적인 시험 지옥을 면치 못할 것인 즉 일부에서 주장하는 야간중학 등을 전면적으로 개설하게 된다면 입학율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이 방면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이 기대된다. 더욱 해외에서 귀국한 아동들을 위하여 탄력성있는 입학 제도가 요망되어 왔는 데 거기에 대하여도 졸업증서가 없어도 수험할 수 있는 방책이 취해질 것으로 추측된다.
  • 1946년 4월 30일 <한성일보> 민주 교육의 철저화- 제4회 고등교육 심사위원회 토의

@실제날짜:460503

학원의 비민주적인 요소에 대한 일반의 여론이 높은 이때 문교부내 고등교육위원회에서는 학원의 민주화를 철저히 하고자 5월 3일 하오 2시부터 동회의실에서 제4회 위원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학교 교육 민주화와 그 실시 계획을 토의할 것으로 학교 교육에 있어서의 일제 잔재 일소, 학교 경영의 민주화 방침, 교육자의 활동을 민주화하는 방책, 학생의 지도 방침의 민주화, 교수 자격 재검토 등 학원 민주화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그 성과가 기대된다.
  • 1946년 4월 30일 <해방일보> 親日校長 任淑宰를 排擊한다- 숙명여전 2백학생 총궐기
해방 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한 학원의 민주주의적 재건이다. 그것은 학원이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 남여를 맡아 있는 민주주의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조선의 민주주의화를 반대하는 친일파 팟쇼의 반동분자들은 제일차 먼저 민주주의 조선 건설의 지적 중추인 학원에 마수를 뻗치어 유린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직후 경성대학 문제를 위시하여 수많은 학원 불상사건이 발생되었고 최근에는 시내 수십교가 학원의 민주주의화와 학원의 자유, 학원의 자치, 학원의 경찰 불가침을 부르짖고 일어서 싸워던 것이다.
조선 여성 교육의 최고 기관의 하나인 숙명여자전문학교에도 이같은 반민주주의의 마수가 뻗치고 있는 사실이 숙전 200학생의 결연한 맹휴 단행으로서 백일하에 폭록되어 사회의 여론과 주위를 환기하고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숙명여자전문학교는 일제의 노예 교육에서 해방되자 해방 조선의 여성문화 건설의 선구로서의 중대한 사명을 자각하고 숙전 사정에 정통하며 양심적 교육가인 김호식 교수를 추대하고 숙적 재건의 과업 수행의 마당에 씩씩하게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재단법인 숙명학원도 학교관계자로서 구성된 이사회를 새로 가지게 되었으며 이 이사회의 이름으로 법적 수단을 밟아 9월 30일 부로 재개학이 인가되어 10월 1일 부터 해방의 진정한 조성 여성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재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만한 운영에 불안을 느끼며 이것을 멸시하던 동○계통의 숙명고여의 일부학부형의 동창생으로 조직된 숙명자치회는 독자적으로 숙전과는 별관계도 없는 자들로서 별개의 방응모를 이사장으로 하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숙전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소위 숙명자치위원회장 유기동의 私印으로 학무 당국에 이사회 인가 신청을 제출하여 학무 당국의 숙전 학부형회, 동창회, 교수단, 학생의 총의를 보인 진정조차 무시하고 자치회가 신청한 이사진을 인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학원내에는 풍파가 일기 시작하여 신이사회와 당국의 불합리한 처사로 풍파는 점차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이사회는 전교의 지지로 추대되었던 김호식 씨를 파면하고 친일파의 거두 임숙재를 교장에 취임케 하였다는데 이에 교수진과 학생측은 일치하여 친일교장 임숙재를 배척하고 일어서서 이를 학내에서 추방하고 당국은 이사회를 해체시키고 장학관 김상필 씨를 교장대리 겸 감독으로 파견하게 되자 학교측은 학원의 자유와 불가침을 부르짓고 김상필 씨를 또한 배척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자 경성대학 문제의 현상윤을 위시한 3씨의 관선이사와 숙전부형회측에서 1명, 숙전 졸업생 대표 1명, 숙전과는 관계없는 숙명여고 졸업생 대표 2명으로 관제 이사회를 재조직하여 완전히 숙전측의 ○○○를 거세하고 이차에 걸쳐 추방당한 임숙재 씨를 다시 교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 불합리하고 무성의한 처사에 분기한 숙전 200학생은 지난 25일 드디어 다음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결연히 맹휴를 斷行하여 요구 조건의 관철을 기하여 당국자의 반성을 촉하고 있다고 한다.
        요구 조건
1. 임숙재 교장은 절대 배척
1. 정연모 선생을 학교장으로 즉시 승인할 것을 요구함
1. 관선이사 배척
1. 현교수직 절대 지지
1. 숙명이사회 구성에 관하여는 숙전측과 숙고측을 동등으로 할 것
1. 이사회는 학교 운영 재단의 구체안을 명백히 제시할 것
  • 1946년 4월 30일 <해방일보> 學生은 復校 하였다. 當國은 誠意있는 言明을 주라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 성명. 광범하고 장기에 걸쳤던 학생의 맹휴는 본 교장단의 수습 노력의 주효도 있어 문교 행정의 성의있는 개혁에 기대하며 복교 성명의 발표에 이어 전 맹휴 교생의 일제 등교를 보게 되었다. 문교 책임 당국의 성실한 노력이 내재 하면서도 아직은 학생의 요구 조건에 대한 방책이 언명되지 않았으며 또 구체적으로 해결된 것도 없다. 학원의 민주화와 민주주의적 학원 건설에 대한 강렬한 정책의 실현은 오직 금후의 태도에 달렸다. 학원에 대한 감찰 문제, 학생 생활난에 대한 경제 行政, 법정학교 문제 등 관계 당국의 방침 천명과 처결 여하에 학생의 금후 동향이 좌우될 것이다.
본교장단 연합회는 건국 교육과 신문화 건설에 중책을 지며 학원의 불상사가 재발치 않도록 만전의 노력을 계속했으나 權勵性있는 책임 관계 당국의 실로 민주주의 조선 건설에 대한 학원의 책임 획득 여하에 달려 있다. 문제는 금후에 尙在하며 고식적인 수수책으로 해결되었다고 과시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1946년 5월

  • 1946년 5월 1일 <조선인민보> 淑專서 盟休-임교장을 배척
한 때 잠잠하던 학원에 맹휴의 선풍이 여성교육의 최고 기관의 하나인 숙명여자 전문학교에 불었다. 숙명여자전문학교 200 여자 학생들은 매사에 비민주적인 학원내의 불상사에 대하여 단연코 총궐기하여 지난 25일 부터 드디어 맹휴에 돌입하였다 하는 데 학생들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임숙재 교장 절대 배척.
▲ 정열모 선생을 교장으로 즉시 승인할 것.
▲ 관선이사 배척.
▲ 현교수진 절대 지지.
▲ 숙명이사회 구성은 숙전. 숙고측을 동등으로 할 것.
▲ 이사회는 학교운영 재단의 구체안을 명백히 제시할 것.
  • 1946년 5월 4일 <독립신보> 試驗 偏向主義를 離脫- 9월의 中等校 入試 方針 不日 發表
민주주의 새교육 제도에 따라서 오는 9월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전문대학, 중학, 국민학교의 신입학생을 맞이하게 되는데, 특히 학교 시설 관계로 입학난이 예상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대하여 문교부에서는 그 대책을 벌써부터 연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에는 전 일제 시대의 시험 편향주의를 一掃하기 위하여 시험전의 준비를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불일내로 발표하기로 되었다. 이로써 어린 아이들의 가슴을 타게 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도 이제는 우리의 손으로 공정하고 민주주의에 일치게에 출발하게 된다.
  • 1946년 5월 4일 <한성일보> 예술대학이 탄생- 9월 개교
국도 서울에 예술대학 탄생?-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서울에 미술과 음악을 전공하는 국립예술대학을 창설하고자 계획, 지금 장소를 물색 중인데 적당한 교사만 있다면 오는 9월경에는 조선에 처음인 예술대학이 발족될 예정이다. 미술, 음악의 예술대학 창설에는 일천만 원의 예산이 통과되어 교사 예정지로 군정청 뒤의 건물과 기타 적당한 건물을 물색 중인데 머지않아 결정할 것이다. 조선에는 미술, 음악학교가 없었느니 만치 예술대학의 탄생은 미술, 음악 학도들의 큰 복음이고 문교부에서는 개교를 속히 하고자 착착 준비 중이라 한다.
  • 1946년 5월 5일 <조선인민보> 富平東民校에 檢擧 旋風- 이교장 의견충돌을 폭행이라 고발
팟쇼교장의 독선적 행위로 경찰 문제까지 일으킨 사건이 있다.
인천 부평동국민학교에서는 종전에 6년 담임 주상곤 씨외 7, 8명의 양심적 교원과 이를 이해못하는 동교장 이환구 씨와의 감정이 대립되어 오던 바 지난 26일 이유도 없이 돌연 주교원을 평택으로 전근하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었다. 때 마침 6년생의 졸업기가 박두하였으며 학교 입학 준비로 막대한 지장이 있음으로 28일 학부형과 교직원 40여 명은 6학년생들과 같이 당국에 주교원의 유임 진정을 하고 권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동 교장은 무책임한 답변으로 이를 거부하고 퇴장하려 함으로 학부형 5-6명이 이를 제지하느라고 다소의 충돌이 있었던 바 이교장은 이를 폭행이라 하여 경찰에 구두 고발하여 경찰서에서는 5월 1일에 김용흥 씨외 3명과 학교에 까지 와서 주상곤 씨외 3명을 검거 구속 중이라 하는 데 적어도 학교 교장의 신분으로 사소한 감정 충돌을 문제삼아 경찰에 까지 고발하여 학원내의 불상사를 야기케 한 데 대하여 학부형들은 물론 주민의 비난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 1946년 5월 5일 <한성일보> 百年樹人의 대계를 세워- 日新月盛하는 국학전문교
처진 사제애에 뻗치는 국학열. 8.15의 해방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고유 문화를 찾을 힘을 주어 오래 동안 사장되어 왔던 "국어와 국문"을 다시 살리게 되었으나 아기의 첫 걸음같이 서툴기 짝이 없고 더욱이 사회 인텔리 계급 혹은 교육자로서 재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진다. 이에 국학의 전문 교육에 아울러 성인 교육을 목표로 창립된 것이 이곳 "국학전문"이다. 동교 李相助교수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다른 학교에 볼 수 없는 미담을 들려주었다.
최초에 모집 정원이 3백 명이었는데 지원자가 1천8백여 명이란 방대한 숫자에 달하여 부득이 정원을 늘여서 주간에 4백 명, 야간에 6백 명을 입학시켰다. 주간에는 여학생 若干명과 38 이북 학생이 약 80명이 있고 야간에는 여학생이 약 40명이 들어있는데 37-8%는 직장을 가진 사람이며 한 학생은 현재 중학 교원으로 40세된 자가 있다. 다른 학교에서는 동맹 휴학이니 선생을 배척한다는 등 불상사가 자주 나지만 우리 학교에는 학생들이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가지고 남녀별로 역원을 선출하여 매일 출석 점검도 교직원이 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등교하면 자기 이름과 번호를 써서 자치위원회에 제출하면 해당 위원장이 모아서 교무실에 낸다. 그리고 선생이 간혹 사고가 있어 못나오든지 또는 집이 멀어서 시간전에 오지 못할 때에는 학생들이 맞으러 가며 38이북에서 온 학생들이 숙소에 곤란받는 자가 있으면 다른 학교에서 강사로 오는 선생에게 청을 하여 그 학교 기숙사에 들여주기도 하며 운동도 교정이 좁은 관계로 다른 학교 운동장 또는 공설운동장을 빌어쓰고 있다. 현재 학과는 문과 1, 2부로 나눠서 국문, 영어, 한문, 서양사, 윤리, 국사, 생리학, 영문, 수학, 중국어, 심리학, 논리학, 수사학 등인데 특히 어학, 고전, 시, 문학(고전, 시문학) 등에 중점을 두며 과외 강의로 자치위원회에서 편집, 웅변, 연극, 음악, 미술, 문학, 사학, 어학, 철학, 교육학, 종교학, 윤리학, 체육 등 13부를 따로 두고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받으며 학생의 3분의 1이 한글보급회 회원이나 그중에도 국어와 역사가 불충분한 자에 한하여 한글보급회 주최로 하루 한시간 40분 동안의 특별한 강의도 있다. 주간 학과 시간은 월, 화, 금, 토요일은 여섯 시간, 그밖에 날은 다섯 시간이고, 야간은 매일 다섯 시간 뿐이며 교재는 노트 필기, 프린트 또는 좋은 책자를 지정하여 주며 대부분은 교수들의 장서를 이용한다. 재단은 전 華山小學校 재산 일체를 인수하여 이사진도 그대로 있는데 재화의 대부분이 노지이고 그중 일부분은 38이북에 있어 수입, 지출이 전혀 맞지 않으나 이사진의 노력으로 현상 유지는 문제없다. 현재는 단과 학교로 국문, 국어 중심으로 할 수 밖에 없으나 오는 9월부터 대학으로 승격되면 학년도 4학년으로 될 것이고 문과 계통으로도 사학부, 철학부 등 학과를 두어야할 것이다. 현재 교수진은 교장 鄭烈模, 敎頭 李亨雨 씨외 14명의 전임 교수와 야간에 梁柱東, 李熙昇, 申奭鎬, 金晉燮 제씨가 있다.
  • 1946년 5월 5일 <해방일보> 女子師範大學 敎育科 新設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진출을 추진하는 동시에 여성들의 정치 경제 사회과학 방면에 있어서도 남성에게 손색이 없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여자사범대학에 교육과를 신설하였다. 이것은 과거 일제 고등사범 교육과와는 형식과 내용이 판이한 것으로 정치 철학 국가학 경제학 사회과학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 독특한 점이다.
1. 입학자격: 전문학교 졸업자 혹은 구사범연습과 졸업자에 한함
1. 지원기일: 5월 10일
1. 시험기일: 5월 11일
  • 1946년 5월 6일 <조선인민보> 광주일中 또 盟休

@실제날짜:460427

학원의 민주화가 절실히 요망되고 있는 이 때 학생 투쟁 사상에 빛나는 전통을 가진 광주일중에 불상사가 속출하여 식자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광주일중에서는 지난 3월 1일 기념 행사에 자미롭지 못한 계기로 일어난 5교원의 기소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간 분규를 계속하여 오던 바 지난 4월 27일 여자국민당 당수요 현재 민주의원 비서국 차장으로 있는 임영신 여사의 편당적 강연으로 학원의 불만은 드디어 폭발하였던 것이다. 박제양 씨 (현재 광주일중 교장) 말에 의하면 5교원 기소사건을 두고 당국과 그간 상당한 절충이 계속되고 있었는 데 4월 27일 임여사는 도학무과 요원을 대동하고 래교하여 청강을 강요하매 교원 일동은 교육자의 입장으로 동 여사의 편당을 지적하고 강경히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강연을 强行하였다 한다. 이에 교원 일동은 학원을 침법하는 정쟁의 물결을 막지 못하는 책임을 통감하고 전부터 문제 거리가 되어 있는 5교원의 기소 취소를 요구하는 동시에 학원의 진정한 민주화를 부르짓고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다.
일방 동교 생도들도 27일 학생대회를 열고(후략)
  • 1946년 5월 6일 <해방일보> 惡質 校長 李환求는 信任할 수 없다- 담임선생 유임을 승인하라
부평동국민학교생 및 학부형 결의. 교육은 한 나라 국력의 추진과 발전의 기초이며 일국의 교육의 고도는 일국 문화와 국력의 바로메타이다. 그러므로 각국이 교육에 대한 보호와 관심은 지극한 것이다. 과거 일제의 야만적 노예 교육의 시대에 있었서도 그들은 자기내가 미개국이 아님을 가식하기 위하여 그 교육 정책은 언제나 학원의 자유와 학원의 경찰 불가침을 표방하고 표명상만이라도 경찰이 학교 문제에 간섭함을 피하여 왔던 것이다. 해방 조선의 교육 재건에 있어서 학원의 신성과 학원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더욱이 조선의 학원은 조선 국가 건설의 유일한 이념인 민주주의 온상, 후진적인 조선 문화 재건의 온상임을 생각할 때 학원의 경찰 불가침은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재출발한 조선의 학원내에는 일제 시대의 노예 교육의 정신 소유자가 그대로 남아서 아직까지도 그 정신을 청소할 줄 모르고 재건되는 조선의 교육을 좀먹으며 밖으로는 경찰이 법규에만 拘泥하여 학원내에 간섭을 뻗치어 학원의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일반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이 때 또 다시 경기도 인천부 부평역전 부평동 동소학교에 경찰의 간섭이 뻗치어 교내에서 교원을 구인하고 학부형을 검속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부평동 동국민학교 이환구 교장과 동교 6학년 일조 담임 주상곤 훈도를 중심으로 한 7-8명 교원사이에는 늘 의사의 대립이 계속되 오던 중 지난 4월 27일 돌연히 이환구 교장은 승리의 만족에 넘치는 미소와 함께 주상곤 훈도에게 전근사령장을 수교하였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된 6학년 일조 50여 명의 아동들은 28일 교장에게 눈물로서 선생님의 유임을 탄원하였다. 그리고 주선생이 가시면 우리는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하게 되자 이 교장은 "주 선생이 아니고도 좋은 선생이 있다. 주선생의 유임은 될 수 없다. 너희가 공부하고 안하는 것은 너희 마음대로 하라 "는 의미의 대답으로서 교육자적 애정과 성의를 표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선생 유임을 탄원하는 아동에게 조차 적의를 나타내게 되었다. 아동들은 이 전말을 부형에게 애소하게 되자  29일 부형들은 아동들과 함께 1사람 2사람하여 삼십여 명이 학교에 몰리게 되고 이에 자연히 6학년 1조 학부형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주선생을 위시하여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교원과 교장의 참석하에 이 문제의 해결책을 중심 주제로 하여 좌담이 있었는데 학부형들은 교장에게 '아동들의 졸업기도 앞으로 2개월 밖에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동의 상급학교 입학 시험 준비도 최종 단계에 들어간 이 때에 돌연히 담임교원을 바꾸는 것은 아동의 진학상 또는 그 밖에 여러 가지 방면으로 보아 지장이 심대할 것이며, 또 아동의 희망도 있고 하니 아동들이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주선생의 전근을 보류하도록 교장께서 노력해 주기 바란다고 진정하였으나 頑冥無能하고 私怨에 불타는 교장은 학부형의 온건한 건의조차 일언하에 거절하고 학부형에게 까지 적의를 나타내게 되자 이에 학부형과 교원의 분개는 높아갔다.
그러자 주교원은 교장의 과거의 非行을 열거하여 교장의 교육자로서의 이 태도를 논박하고 아동들에게도 공부하고 안하고는 너희 마음대로 하라는 교장의 언사를 공개하여 교장의 무성의와 무인격에 대한 학부형의 분개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교장은 학부형을 남겨두고 분연 퇴장하게 되니 몇 학부형은 이 교장을 붙잡아다 자리에 도로 앉히고 악질 교장 불신임과 주훈도 유임을 당국에 진정하기로 결의하고 교섭위원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그 날은 헤어져 갔는데 그 후 교장의 보고에 의하여 5월 1일 부평경찰서 수사과원 수명이 학교 교장실에 출근하여 주상곤, 김○錄, 신경래, 현○회 4교원을 교장에게 불르라 하여 교장의 면전에서 구인하여 갔다. 그리고 다시 경찰은 가택을 수사하는 일방 아동 학부형인 이판옥, 김용흥, 김백석, 이명업 4명을 검속하였다 하는데 이 같은 교장의 처사에 대하여서는 일반 국민까지도 분개하여 금후의 추이를 주목하고 있다 한다.
  • 1946년 5월 7일 <조선인민보> 無期 休學 處分-광주일중 맹휴에 도지사 명령
광주일중이 재차 맹휴에 재돌입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후 전남도 학무 당국에서는 사건 해결에 전력을 기울여 왔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어 지난 2일 프라이스 지사는 동교에 대하여 무기 휴학 처분을 명하였다 하는데 유학무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중 사건이 이상 악화할 수 없을 것이니 단지 해결이 있을 뿐이다. 학교가 없어질리도 만무하고 사회의 요청에 의한 새로운 출발을 볼 날도 멀지 않은리라 믿는다.
  • 1946년 5월 7일 <한성일보> 이동교육반- 남조선에 순회

@실제날짜:460506

군정청에서는 배우, 연사, 기술사 등으로 "조선인 이동교육반"을 조직하여 이동 교육을 실시하기로 되었는데 이 이동 교육반은 6일 서울을 출발 남조선으로 향하였다. 교육반은 공보부 이동교육과장 김○원 씨, 스미스대위 인솔 아래 각 도청 소재지를 방문 "태평양의 분격", "자유의 교육"이란 미국 영화와 한일 합병 이후의 조선 역사를 테마로 한 연극을 실연하리라 한다.
  • 1946년 5월 8일 <동아일보> 今年에 4만 兒童을 더 收容
皆學의 目標로 세운 敎育費
그리고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작년까지 一切 嚴秘에 부치고 수작하든 교육비의 특별예산으로 종래 제1부 교육비(日人)와 제2부 교육비(朝鮮人)를 합한 것이다. 의무교육 실시를 전제로 종래의 제1부에 속한 교사를 통합한 59교 외에 성북, 용두를 신설하여 61교로 현재의 학급수 1,345학급을 1,658학급으로 증설하고 현재 취학 아동 8만 2천 명을 금년도에는 12만 명을 목표로 획기적 국민교육 질의 쇄신을 斷行한 것과 학교 위생에 163만 2천9백 10원을 계상하여 각 국민학교마다 校醫(악제사와 간호부)를 상시 배치하는 외에 남대문에 아동건강상담소를 설치하여 「렌트겐」검진을 하야 자라나는 어린이의 건강을 적극적으로 보살피는 것 등이다.
  • 1946년 5월 8일 <해방일보> 敎育家의 良心을 가지라- 부평 동국민학교 사건 속보
교육자에게 있지 못할 교내의 세도 다툼으로 아동의 면전에서 추태를 폭로하고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1,000여 아동의 진학상의 지장도 무구한 동심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할 여지 조차 없이 경관을 신성한 교내에 들어오게 꾸미 자기 수하의 현재 교원 4명과 자기과 맡은 아동의 학부형 4명까지도 불온 부당한 복수의 일념에서 경찰에 고발하여 교육자로서 더욱이 교장으로서 무지무능한 태도를 폭로하며 신조선 교육 재출발의 첫걸음에서 학원의 신성을 모독하여 전민족의 분개의 중심이 되고 있는 부평동 東小學校의 불상사건은 기보한 바어니와 당 이교장은 특파된 기자단에게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장 이환구 씨 담
상사의 지시를 따르면 그 뿐이다. 학부형회 석상에서는 나는 더 답변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퇴장하였는데 학부형들은 학부형을 무시하며 무성의하다고 4-5명이 쫒아 나와서 아동과 여러 사람의 면전에서 폭력으로 억지로 끌어 들여갔다. 교육자로서 이같은 모욕을 당한 것은 위신과 교권을 위하여 절대 묵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내교한 경찰 서원에게 폭행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이번 경찰의 교원 학부형 검거 사건이 이 말에 의한 것인지 그 여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그리고 朱교원과 언행을 같이 하는 교원 7-8인에게 대하여는 다른 지방 학교에 가서 일하도록 상사에 요청할 작정이다. 여하간 내가 당한 모욕에 대하여서는 끝까지 복수를 해야 겠다. 그뒤에 나는 인책사직할 각오이다.
  • 1946년 5월 9일 <독립신보> 新學位令 不遠間 決定- 從來 獲得한 學位는 그대로 保有
새 조선의 학위 제도는 어떻게 되나. 또 이왕의 일제 때에 얻은 학위는 어찌되나. 문화 조선을 위해서 매우 궁금하던 차에 이번에 군정청 문교부에서 그 방침을 결정하였다. 지금 학도 중에는 전쟁 중 불어 연구 논문을 만들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학위 청구 기구가 정돈되어 그대로 있는 의학 부문을 위시해서 해방 후 급작히 향상하는 민주주의적 학구에 불타는 문· 농· 공학 등의 학위 논문이 편성 중에 있는데 문교부에서는 이 학도들을 위해서 지난번 교육심사회에서 결의한 학위령을 불원 실시하게 된 것인데 이로써 조선의 학위 청구는 논문을 서울대학에 제출하게 되는 것이며 이 논문을 받을 서울대학에서는 철저한 교수회진을 조직하여 세계에 자랑할 만한 새조선의 학위 권위를 세우게 된다 한다. 그리고 이왕의 일본 정치 시대 때에 얻은 각 부문의 학위는 그대로 그 자격을 보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 1946년 5월 10일 <독립신보> 私立 學園 自治의 蹂躪- 淑專 盟休 事件에 敎授團서 發表
淑明女專의 맹휴 사건에 대하여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의견을 발표하여 이러한 불상사가 다시 발생치 않기를 강조하였다. 즉 淑專의 전임교장 김호식 씨가 해방 이후 동교의 경영을 담당하며 교수회 및 학생회의 절대 지지를 받고 학원 건설에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여자학교에는 여교장이이어야 한다는 공식적 여성 존중의 방침으로 부적당한 인물을 재차 교장 취임을 반복하며 또 김호식 씨가 분규에서 인퇴한 후 교수회와 학생회가 절대 지지하며 교육계의 인격자 정열모 씨의 교장 취임을 不肯하는 태도는 사학의 육성이 아니라 관권에 의한 학원 침범의 강압의 표현이다.
(中略)문교부와 이사의 이러한 태도는 동교의 교수회를 蹶起시키며 학생회를 맹휴케 함에 이르렀으니 본회로서는 이 원인은 전혀 私學에 대한 관권적 강압적 간섭에 있음을 지적하며 다시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되지 않을 것을 경고한다.
  • 1946년 5월 10일 <독립신보> 安心코 工夫하도록- 學生 生活 對策을 樹立

@실제날짜:460509

해방 후 쌀을 비롯하여 일용품 등 온갖 물가는 날로 폭등하고 있어 일반 소비 대중은 물론 특히 학생 생활의 위협은 날로 더하여 가고 있어 학생 생활의 대책 수립이 요청되고 있다. 이 요청에 호응하여 專門大學敎授團聯合會에서는 학생 생활의 대책을 확립코저 예의 연구 중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대책을 결정하고 9일 발표하였다.
▲ 대책 제안 
  가. 문교부에 대하여 
    문교부는 솔선 학생 생활 대책 강구 실시의 강력한 종합적 기관을 수립하여 각 관계 관청, 기관, 학교를  망라 동원하고 (一) 학생에게 식량 우선 배급 (二) 생활 필수품 물자의 직접 학생에 대한 불하 (三) 學資 補助策 (四) 기숙사 주선 등에 효과적 시행을 하라 
  나. 생산공장, 都賣에 대하여 
    가급적 유리한 조건으로 학생소비조합에게 물건을 판매하라. 
  다. 사회일반 有志에 대하여
    학생 생활에 온정과 후원을 아끼지 말고 육영 사업에 적극적 활동을 하라. 
  라. 각 학교 당국에 대하여 
    학생소비조합을 後援하고 그것이 未設立의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하여 직접 결성케 하고 적극적 후원을 하라.
  • 1946년 5월 10일 <독립신보> 初等敎育 敎科書- 每日 七千部式 印刷
남조선 각 초등학교에 배급할 교과서는 현재 매일 7천부씩 인쇄되어 이미 문교부를 거쳐 각 학교에 배급된 것이 이십만 부이다. 그리고 교과서는 매 종류마다 오십만 부씩 인쇄된다고 한다.
  • 1946년 5월 10일 <조선인민보> 공부할 사람만 登校- 광주1중 휴교 처분을 변경

@실제날짜:460506

푸라이스 전남도지사로부터 무기 휴교 처분을 당한 광주일중의 귀추는 크게 주목되는 바 프지사는 지난 6일 前言을 번복하여 "출근하는 교원에게는 여전히 봉급을 지급할 터이니 전부 복직하고 교편을 잡기를 바란다."고 언명 또 도학무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번에 부득이 휴교 처분에 처한 광주일중학교 생도와 교원에게 고한다. 생도에 있어서는 배우고 싶은 사람은 등교하여도 좋고 교원은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빨리 학교로 돌아와 우리와 협력하여 이전과 같이 교편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 1946년 5월 10일 <해방일보> 崇文商業 盟休 突入

@실제날짜:460508

시내 숭문상업학교(구○실)교장 서기윤과 교무주임 김병순은 생도들이 ○○하는 바에 의하며 전형적인 친일파로서 8.15이전 황민화 교육에 광분하여 생도들이 조금이라도 우리나라 말을 사용하기만 하면 비국민이라 하여 정학 처분 등 가혹한 처벌을 하던 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전 죄에 대한 반성이 조금도 없이 왜적의 주구적 역할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다. 이 자들은 제 마음대로 반동적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교원이며 생도들이 경모하여 마지하는 김일선 씨를 비열한 수단으로 퇴직케 하였다. 이 사실에 격분한 전교 생도 일동은 5월 8일 학생대회를 열고 다음의 4개조 요구가 전면적으로 관철될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기를 결의하고 돌연히 맹휴에 돌입하였다.
   요구 조건
1. 친일파 친파숏파 교원 배격(특히 서기윤과 김병순)
2. 학원의 민주주의화
3. 김일선 교원을 위시한 진보적 민주 교원 절대 지지함
4. 학교 경영을 명확한 조직체를 통하여 할 것. 동창회 경영이라는 가면하에 一二 개인의 비밀 경영을 배격함
  • 1946년 5월 11일 <독립신보> 금년 中等校入試는 어찌 되나- 十對一 競爭은 不免
上下公平한 銓衡策을 樹立中. 오는 7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보게 된다. 교사 시설과 교원 부족으로 여전한 입학난이 예기되고 있는데 이번에 졸업할 국민학교생은 21만이나 되고 이를 받을 중등학교의 힘은 2만 밖에 안된다 하니 그 비율이 10대1이나 된다. 지옥같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하여 민주주의 교육의 첫 출발을 어떻게 하나.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이 중등학교 입학 시험 방침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고 벌써부터 대책을 강구 중인데 그 근본적인 이념을 보면 전의 일제 시대 때의 시험에만 중점을 둔 시험편향 제도를 폐지하고 또 시험전의 준비를 못하게 하여 공평한 시험 제도를 세우고자 하는데 지금 입학을 시키고저 하는 각 국민학교와 신입생을 받으려 하는 각 중등학교의 새 입학 이념과 방침은 어떠한가. 그 의견을 타진하여 보자. 
시험준비 안시킨다- 수송국민교장 이규백 씨 담 
별로 입학 시험 준비는 시키지 않습니다. 그날 그날의 학과에 중점을 두고  국민 소질 향상에 힘쓰고 있습니다. 한가지 바라는 바는 입학 시험 시기가 여름이 되어서 시험 기간이 길면 아동 건강상 해로운데 될 수 있으면 기간을 단축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종학적 고사를 하겠다- 휘문중학교장 박술음 씨 담 
일제 시대 소위 추천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다. 중학교가 부족한 이상 입학 경쟁은 피치 못할 사실이나 어느 일부분에 편벽되지 않는 지· 덕· 육 종합적으로 고사함이 좋겠다. 
실업가 기질을- 경기도상 맹교장 담 
실업학교이니 만큼 장래 실업계에 나갈 수 있는 덕성이나 기력에 중점을 두고 고사할 작정이다. 
두뇌 명석자에- 숙명고녀 최교장 담 
중학교를 확충 설립해서 국민학교 졸업생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이상이겠으나 졸지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건국 도상에 있는 현재로서는 학과 시험에 중점을 두어 될 수 있는 한 두뇌 명석한 사람을 입학시켜서 외국에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는 과학부문을 진흥시키고 싶다. 
인물 본위로- 진명고녀 이교장 담 
당국의 발표가 아직 없으니까 무어라 말할 수 없으냐 당국의 발표가 있으면 구체적 방침이 설 것이다. 종래의 학과 중심인 것보다 인물 중심으로 당국의 발표되는 방침에 보조를 같이 할 생각이다.
  • 1946년 5월 11일 <독립신보> 학생의 메데 참가는 평화 行事인 만큼 온당- 시 학무국고문 마틴 씨 담
학원 문제 경찰 의뢰는 중세기 교육. 메데날 남산공원 기념회장에 나갔다는 이유로 경찰의 학생 검거와 각 학교의 학생 처벌 무네는 아직도 여파가 계속되고 있어 그 추이가 주목되는데 책임 당국인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그 대책을 고려 중. 경찰당국 또는 학교축과 교섭 절충을 마친 학무국 미국인 고문 마틴 씨는 10일 기자단의 질문에 대하여 학생의 메데 참가는 조금도 잘못이 없고 경찰의 학생 검속은 부당하며 경찰에 의뢰하는 교육은 중세기적 교육이며 금후 학원의 민주화와 학생의 자유로운 권리의 옹호를 위하여 싸우겠다고 다음과 같이 중대한 언명을 하였다. 씨는 오는 월요일부로 각 학교에 이 뜻의 지시를 보내고 처분된 학생의 전원 복교를 요구하겠다고 언명하였다.
  • 1946년 5월 11일 <동아일보> 地方에 맡기는 學務 行政
문교부에서는 이번에 각도 학무과를 학무부로 승격시켜 교육 行政의 地方分權制를 실시하고자 법령을 제정하고 있다.
13일부터 學務課長會議 開催
이는 학무 行政의 중앙집권제를 타파하여 그 권한을 지방청으로 이전함으로써 기왕의 일제 시대와 같은 일방적인 지시, 훈시를 施行하여오든 지방 학무 行政을 쇄신하여 교육의 민주화를 촉진하는데 중앙과 지방청의 활발 강력한 의견 교환를 하게 하는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그리고 오는 13, 4, 5일 각도 학무과장회의를 소집하여 학무 行政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중등학교 교과목 제정, 의무교육 실시에 대한 특별 협의를 하기로 되었다.
  • 1946년 5월 11일 <조선인민보> 官廳 學校 등 網羅하여 綜合消費組合 樹立하라
교수단연합회서 당국에 제의. 전문대학 교수단 연합회에서는 날로 곤경에 빠지고 있는 학생 생활에 대처하여 그 대책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고 문교 당국 및 관계 관청의 적극적 방책을 요망하였다.
▲ 문교부 당국은 솔선하여 각 관계 관청의 종합기관과 학교를 망라한 학생 소비조합의 종합기관을 수립할 것.
▲ 상기 종합기관은 학생들에게 좌와 같은 편의를 줄 것.
   가. 식량의 우선 배급
   나. 생필물자의 직접 양여
   다. 학자보조 및 기숙사 주선
▲ 생산공장 도매상은 학생, 소비조합에 대해 가급적 유리한 조건으로 물건을 판매할 것.
  • 1946년 5월 12일 성인교육협회 조직

46년 5월 15일 성인교육협회가 조직되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의 면과 읍에 지회가 조직되었다. 이 협회의 기능은 성인교육에 관한 각 지방에서 성인교육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성인교육 프로그램의 추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118]

  • 1946년 5월 12일 <조선인민보> 各道 學務課長 會議- 13일부터

@실제날짜:460513

신교육제도 실시에 따라 문교행정, 학원의 민주화, 의무교육 등 광범위한 과제를 협의하는 남조선 각도 학무과장회의는 13일 14일 양일에 걸쳐 군정청에서 개최된 예정인 데 금반 회의에서 토의될 사항 중에서도 더욱 주목되는 문제는 학교 교육의 민주화 촉진을 위한 중앙과 지방의 적극적 의견의 교류로 문교 당국의 본회의 진행에 대한 방침도 종래와 같은 훈시니 지시니 하는 독단적 태도를 일척하고 중앙 지방 할 것없이 참신 활발한 민주적 방식을 취하리라 한다. 13일 부터 개시되는 본회의에 있어서 15일에는 특히 의무교육에 관하여 협의할 예정인 데 일반의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의무교육 실시를 일부에서는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만치 강력한 시책이 이 회의를 통하여 맺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바 크다.
  • 1946년 5월 13일 <독립신보> 교원의 소질 향상 위해- 免許制 실시를 준비- 군정청 문교부에서 검정회 조직
건국 조선의 새교육을 건설하는 선결 조건으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학교 교원의 소질 향상을 꾀하여 교원 검정회를 조직하는 한편 교원의 면허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의 준비가 진행되어 검정회도 거진 그 기구가 완성되었으므로 불원간에 교원의 면허제 실시에 착수하게 되었다. 해방 후 조선의 교육계는 급작히 향학열이 비등하여 많은 학도수를 보게 되었는데  이반면 교원이 부족하여 자연 교원의 소질이 저하된 경향이 있어 혹 지방에는 이 상태가 현저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문교부서 교원 자격 검정회를 조직하고 면허제를  채용하게 된 것인데 획기적인 이 제도가 실시되면 조선 교육계의 질적 향상이 기대된다.
  • 1946년 5월 13일 <조선인민보> 京大와 京醫專 合同?- 전 학부 총궐기로 반대 진정
조선의 의료시설 및 의학교육 시설은 조선 인민의 보건 후생을 위하여 급속도의 확대 강화가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조선의 의사수를 보면 인구 1만 명에 대하여 의사 1명의 비율이며 선진 국가의 미국 인구 8백인에 대하여 1인 소련 인구 6백인 1인에 비할 때 너무나 손색이 많으며 패망 일본에 있어서도 인구 천 명에 대하여 의사 1인의 비율임을 알 때 얼마나 조선 인민의 의학시설 확대가 긴급한 문제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해방된 오늘날 건국 도상의 필수 조건인 후생 시설의 확충 및 그 교육 기관의 증설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부터 경대 의학부와 경의전의 합동설이 대두하고 그에 따라서 지난 번 군정장관의 언명으로 그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띠우고 진척 중이라는 것이 재확인되자 학계는 물론 일반 여론이 분분하여 갈피를 못잡고 있는 형편에 있다.
이제 당국이 제창한 합동 문제의 이유를 보면 경의전의 교사부족 및 동 부속 의원의 설비 불안정, 대학의 의학연구실 및 부속의원, 입원실의 여유, 합동이 가져오는 교수진 강화, 재정난 해결 등등인데 당국은 아직 구체적인 결정은 안하고 있다고 하나 합동설이 일어나면서 전후 수차에 걸친 조사위원이 왕래하고 있어 그 귀추가 동 학부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 문제인 만큼 동 학부에서는 수차 교수회를 열고 토의한 결과 2차나 반대 건의를 당국에 제출하고 현재 전 학교내에 맹렬한 반대 운동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 학부측이 말하는 반대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다.
"조선의 의학 시설의 확대가 요망될 때 기존 교육 기관을 폐쇄함은 부당하며 대학 의학부의 시설을 겨우 4-5백 명의 학생을 수용할 ○○이며 아직 일본에 있는 의과대학의 학생을 수용못하고 있는 것과 연구실 및 부속병원은 일제 시대에 파괴되어 완전치 못함에 빠져있는 것"이라 한다.
  • 1946년 5월 13일 <조선인민보> 合同할 理由없다- 경의전의 학생 교수들도 반대
일방 합동 문제의 주인공의 하나인 경의전측의 ○○을 보면 수 일전 합동 문제에 관하여 학생의 여론을 듣고져 합동 찬부 투표를 하였는데 그 결과 95%가 합동에 반대하고 있으며 경의전의 조교수 및 강사도 구성된 경의전중견회에서도 전부 이에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랜 전통을 가진 경의전이 없어지는 것을 아끼는 것이고 조선의 의사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이 때에 의학 시설을 확충시키지 못할망정 의학교를 하나라도 줄이는 것은 조선 의학계를 위하여 불행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 1946년 5월 13일 <해방일보> 反動分子는 各處의 學園에도 드러왔다

@실제날짜:460506

大邱女高의 事件
해방 후 경향 각 지역에서는 학원의 민주주의화를 표방하고 학원 내부에 잔존하고 있는 친일파적 친팟쇼적 교육 태도에 용감한 투쟁을 계속하였다는 것은 세인이 다아는 바이다. 대구에서는 대구의전, 여상 등의 맹휴 사태을 비롯한 수다의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금반 대구경북여고에서도 이명석교장 배척 문제로 말미암아 교원 21명이 사표를 제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이 문제의 발단은 이명석 교장이 취임 이래 일본 제국주의적 팟쇼적 교육 태도를 고집하였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난 4일 교원들이 직원회를 개최하고 교장의 승인을 얻으러 갔는데 교장은 교원의 의사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음에 교원은 직원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5명의 교원을 제외한 21명의 교원은 지난 6일에 이르러서 일제히 학무 당국에 진정서와 사표를 제출하고 학무 당국에서는 사표를 수리하였다. 이에 선생을 잃은 생도들은 7일 오후 1시 30분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일제히 도청에 가서 학무과에 탄원을 하였으나 당국에서는 냉정하게도 순진한 少女들의 탄원을 一蹴하여 버렸다. 뜻을 이루지 못한 생도들은 격분의 눈물을 흘리면서 귀교하였다.
學父兄會를 解散하다
학교에서는 오후 3시 부터 강당에서 約 300여 명의 학부형이 참석하여 학부형회를 개최하였다. 처음 직원 대표가 교장의 무성의한 비민주적인 태도 즉 이 학부형회에 직원 21명과 생도들은 참가못한다는 주장을 보고하자 학부형측의 맹렬한 반대 의견은 완전히 일치되어 일부 반동분자와 교장의 주장은 마침내 분쇄되고 교원과 생도 참석하에 회의를 進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장지지인 역원 회장과 학부형 측과의 의견 대립은 분분하였으며 10분 후에야 비로서 참석한 교장 독특의 경과 보고가 끝나자 경찰 당국으로부터 무허가 집회는 군정청 법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산회하기를 명령하였다. 학교를 사랑하며 子女를 사랑하는 학부형은 경찰의 학원 간섭과 일련의 모략적 공갈적 行爲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학무과로부터 5일간 휴교하라는 통지가 오게 되고 역원은 전부 퇴장하여 버렸다. 이리 하여 학부형들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사건 해결을 토론하였다.
武裝警官의 學園 干涉
돌연히 무장 경관 約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와서 회의장 강당을 포위하고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에 생도들은 퇴장하려는 선생을 잡고 대 통곡을 하였는데 경관은 나이어린 少女의 손을 물리치고 총을 가슴에 겨누면서 위협적으로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성한 학원에 경찰 간섭의 부당성과 탄압적인 일제시대에도 보지 못한 경찰들이 생도들에게 취한 태도의 부당성에 분격한 생도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태를 우려한 선생은 교육자의 입장으로서 생도들에게 퇴장을 권하게 되자 생도들은 퇴장하였다. 생도들을 퇴장시킨 경관은 회의장에 들어와서 학부형을 조사한 후 학부형 11명을 트럭에 싣고 경찰서로 가버렸는데 敎場을 잃은 생도와 학부형의 격분은 물론 사회의 비난은 흉흉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1946년 5월 14일 <동아일보> 學園에 謀略의 魔手- 京醫專生들이 團結로 一蹴
신성한 학원을 붉게 물들이려는 마수가 있다. 장차 새 조선의 일군이 되려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학도를 선동하여 자기들의 정당전의 수단으로 쓰려는 무서운 음모가 조국 재건을 앞둔 오늘 이곳 저곳에서 발각되었다.
경성의전은 얼마 전부터 누구의 선동 모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학생의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교원 배척 문제를 위시하여 탁치지지 식량 문제 등으로 동맹 휴학을 하는 사실이 있어 이에 분개한 동교 동지회에서는 조선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려는 불순분자의 소탕을 誓約하고 그들의 비밀 음모를 탐색하기에 노력 중 돌연 지난 10일에 독서회(讀書會! 일명 五六會)의 회원이 모정당의 지령을 받는 여러 가지의 모략 음모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그래서 동 동지회에서는 11일에 학생 전체대회를 긴급 소집하여 사건 발단인 모학생으로부터 사건의 진상을 고백시켰는데 그 학생으로부터 정당과의 연락과 지령들에 대한 사실 전부를 말함과 동시에 과거를  청산하고 조국 재건을 위하여 손을 잡겠다고 맹서한 사실까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실로 놀라운 조직적 침략 공작이 백일하에 폭로되었으니 그것은 즉 모정당으로부터 독서회에 지령한 비밀 서류증 학년 학급을 단위로한 공작상 주의와 교내의 여론조사, 반탁학생에 관한 정보, 식량관계 조사 등인데 그 지령의 주요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공작 책임자는 친소관계를 따라 결정할 것. 대상 학생을 따라 인간적 이론적으로, 영향력이 많은 대상 학생들은 중점 공작할 것(특히 운동부 “왈패”를 꼭 동맹군으로 삼을 것), 공작 日割을 예정하되 수회 거듭하여 공작 방법 성과를 검토할 것, 공작표는 두 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상부에 제출보고 할 것.
학생 생활 문제(기숙사 쌀문제), 학생들의 민주 학원 건설에 대한 의욕, 학원내의 “파쇼”잔재와 반소 선전 교원 政專문제에의 반응, 과거 투쟁 사건(8.15 이후), “○스트”조건 성숙여하, 기타 학생 여론조사.
  • 1946년 5월 14일 <한성일보> 문교 행정을 대혁신- 각도 학무과장 회의 개막

@실제날짜:460513

교육의 민주주의화 등 문교 행정 문제를 중심으로 협의하는 각도 학무과장회의는 13, 14 양일간의 일정으로 소집되었다. 첫 날인 13일은 오전 9시부터 군정청 문교부 회의실에서 개최, 유문교부장의 개회사에 이어 토의로 들어가 학교 신축과 예산 등의 문교 행정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협의 후 중등 학교 교과목 제정에 관하여 토의, 동 4시경 제1일의 일정을 마치었는데 오늘 14일은 교육 행정의 민주화, 교육자의 직능, 남녀 생도의 기회 균등, 국민 개학 운동과 신조선의 교과서 문제, 국어 문제, 교육 행정의 지방 분권 문제, 청소년 학생 단체에 대한 문제, 미국의 조선교육 원조, 교원 양성 등 특별 교육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기로 되었다.
  • 1946년 5월 15일 <독립신보> 각도 학무과장 회의- 敎育의 民主化를 지향

@실제날짜:460513

교과서, 교과목, 교원자질 등 토의. 교육의 민주주의와 교육 행정의 대혁신을 기하여 소집된 각도 학무과장 회의 제1일인 13일에는 문교 행정의 제문제와 중등학교 교과목 제정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제2일의 14일에는 오전 9시부터 문교부 회의실에서 개회, 교육 행정의 민주주의화, 교육자의 직능, 男女 生徒의 기회 균등에 대하여 토의가 있었고 이어 신조선의 교과서 문제, 국어 문제, 교육 행정의 지방분권 문제, 청소년 학생단체 문제와 교원양성, 미국의 조선에 대한 교육원조 등 특별 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 전 일정을 마쳤는데 그 성과가 기대된다.
  • 1946년 5월 15일 <동아일보> 敎員들을 再敎育- 제2차 성인교육 강습회
오랜동안 일제 시대의 교육에 젖은 성인들에 새로운 민주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 조선을 민주화 시키는 데 가장 첩경이 되는 일이다.
이에 문교부 성인교육국에서는 각 지방 남녀지도자에 성인교육을 실시하기로 되어 앞서는 남자단의 강습회를 마치었는데 지난 8일부터는 제2회는 여자들만의 강습회를 시내 三청정 전교학연수소에서 하고 국어, 국사, 공민, 위생, 교양, 상식, 실업에 대한 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회는 오는 22일까지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계속된다. (사진은 강습회장)
  • 1946년 5월 15일 <동아일보> 初等敎員을 短期 養成- 學務課長會議서 具體案을 討議
초등학교 교원 부족을 면하게 하고자 6월부터 3개월 간에 단기 양성을 行한다. 문교부에서 세운 의무교육제는 오는 9월 신학기부터 실제로 실시에 들어가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큰 곤란은 校舍와 교원 부족이다. 이에 각도 학무과에서는 2부제 실시화 아울러 측탁교원의 다량 양성으로서 임시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필요하게 되는 신학기의 교원 부족을 타게하고저 문교부에서는 각도에 각 남녀 중등학교에 임시로 단기 교원 양성소를 두기로 되어 그 구체안을 13일부터 열린 각도 학무과장들과 협의하기로 되었다.
  • 1946년 5월 15일 <동아일보> 學園의 謀略을 粉碎하라
一.
신성한 학원을 ○○○하려는 음모가 백일하에 들어났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소위 공산당계의 所行이다. 최근 京鄕을 막론하고 학원의 불상사가 빈발하는 그 배후에는 共係의 觸手가 있으리라고 일반은 의심하여 오든바 今番 京醫專에서 발간된 共係의 工作 지령은 이 사실을 실증함에 있다. 고도남 8.15해방 이후 來共系의 언동과 방법은 일관한 犯過의 연속이어서 조국 재건을 방해하고 민족 분열을 조장한 사례가 허다하였다. 이 犯過의 연속을 보고 민중은 무엇으로 對應하였던가? 물론 離脫이 있을 뿐이다. 形勢 이에 이르매 남은 것은 自暴自棄의 길밖에 없었던지 그 행동과 거치는 無所不爲에 이르고 있으니 三讓하여 外勢는 我를 자청함과 같음은 거론하는 것부터가 불유케 하거니와 지폐를 위조하야 경제계를 ○亂하고 맹휴를 선동하야 학원을 혼란케 하는 등 그 파괴의 수법을 가지고 각 방면으로 ○○하고 있다. 또 위 민족국가의 차기를 託할 청년학도를 驅使하여 정쟁의 앞잡이로 삼고 있음에는 실로 痛憤 호탄할 뿐이다.
二.
우리는 학원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리하여 (후략)
  • 1946년 5월 16일 <독립신보> 새 교육 조선에 일대 낭보!- 來九月 新學期부터 義務敎育制 實施
문교부의 과단으로 획기적 성안. 교육의 중대성에 비추어 13, 4 양일간 소집된 각도 학무과장회의는 15일 하오 1시부터 문교부 회의실에서 속개되어 현안의 의무교육 실시와 기타 조선 교육계가 당면한 중대 문제에 대하여 토의를 하여 획기적인 성안을 얻은 모양이다. 즉 속개한 학무과장회의는 벽두 의무교육제 실시안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 일시 암초에 오른 의무교육안은 문교 당국의 과감성과 러-취장관의 지대한 이해로 도리어 통과되어 오는 9월부터 대망의 의무교육제도가 실시될 모양이다. 
이어서 동 회의는 어린 학생들이 가슴을 조리고 있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문제를 의제로 토의로 들어가 과거의 입시제도에 대한 엄밀한 검토와 해부를 한 결과 신 입시 제도에는 과거의 제도를 청산하여 실력있고 유능하면 좁은 문을 넓히는 동시에 불구자에 꽉 닫혔던 구학의 문도 실력만 있으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등 민주주의적인 입시 제도를 수립한 후 조선에 대한 교육 문제에 대하여 협의 조선 교육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을 구체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의무교육 실시안과 입시 문제에 대한 구체안은 금명일간 발표되리라 한다.
  • 1946년 5월 17일 <독립신보> 公私立中學에 夜學制- 이만 생도를 더 수용할 수 있다
올 여름에 국민학교를 졸업할 아이는 군정청 문교부 조사로 약 30만이나 된다는데 이를 받을 새학년의 각 중등학교의 힘은 약 2만 밖에 안된다. 그러면 남은 28만만이나 많은 아이는 어디로 가나. 공부할래야 할 수 없는 이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문교부에서는 공사립 중등학교에 야학 제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지금 준비 중에 있다. 중등 야학이 실현되면 주학과 같이 2만은 더 수용하게 되어 주야학을 통하여 약 4만의 아이들이 중등 교육을 받게 되는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에는 교원 증가 문제도 있어서 극력 이 방면에도 힘을 쓰고 있다.
  • 1946년 5월 17일 <독립신보> 미국에 留學生 派遣- 미교육권위·교육자 인사교류
문교부에서는 조선 교육의 고도한 발전을 위하여 심원한 교육 정책을 세우고 있는데 우선 조선의 교육자의 미국 파견, 미국 교육 권위자의 초빙, 일반 유학생 파견 등을 계획 중이다. 
교육 관계자 파견! 
이것은 전조선에서 교육자를 선발하여 120명을 3회에 걸쳐 3개월동안 미국에 유학시키는 것인데 미국에서 교육학 심리학 교수법 등의 이론 및 실제를 연구하는 것이고 미주에 가서 2개월 간은 우수한 대학에 배치하여 또는 중등학교 현장에서 연구케 하고 그뒤 1개월은 타주의 학교에서 교육의 비교 연구를 한다. 
파견자의 선출 방법은 각 도 추천 4명(내1명은 여자)인데 자격은 교육 사업, 교육 행정에 5개년 이상 경험있는 자로 6월 15일 까지 선발하여 서울서 1개월 동안 준비 훈련하고 1월 초순에는 출발 예정이다. 
미국 교육 권위자 초빙! 
미국인 교육권위자 5명을 초청하여 조선 교육 건설 전반에 대하여 지도 원조를 받을 예정으로 방금 미국무성에 교섭 중이라 한다. 
일반 유학생 파견! 
교육방면 교육학(행정교수이론) 철학 농상공 가사 청소년 단체 등 각부문 교육에 136명을 선출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에 120명을 합하여 256명을 6월 중에 선출하여 늦어도 명년 초에는 실현할 예정으로 이 三개월은 매년 계속하여 조선 교육의 급진적 발전을 기하게 되었다.
  • 1946년 5월 17일 <독립신보> 中學校 入試要綱 發表
어린이 가슴을 아프게 한 중등학교 입학시험 문제는 어찌되는가. 새로 국민학교를 떠나는 30만의 어린이들이 마음을 조마조마 시키고 기다리고 있던 바,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 요항을 발표하였다. 금년도 입학자의 선발 방법은 출신학교장의 추천서, 필답시험, 구두시험, 신체검사에 의한 종합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합격되도록하였고 필답시험에 있어서는 아동의 지능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정도로 부과하고 시험시간도 2시간을 초과치 못하게 하며 종래의 입학 시험 준비를 못하도록 한 것이 특점이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오는 7월에 실시된다. 금년도(1946년)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 요항은 다음과 같다. 
금년도 중학교 입학자의 선발은 출신 국민학교장의 추천서, 필답시험, 구두시험, 신체검사에 의하여 이를 행함. 단 그 판정은 출신 국민학교의 추천서와 필답시험, 구두시험, 신체검사, 적성을 종합 판단하여서 함. 
一. 출신 학교장의 추천서 
  1.국민학교 제6학년 학급 학년 성적 일람표 
  2. 학교장의 소견표 (별지양식에 의함)   
二. 필답시험 
  1.국민학교에서 수업한 내용을 기초로 한 종합적인 것으로 대체적으로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함 
  2. 시험은 일회로 하고 二시간을 초과치 않을 것 
三. 구두시험 
  지원아동의 지조 품격 기타 인물에 관하여 고사함. 
四. 신체검사 
  수학상 지장있는 난치 감염성 질병의 유무, 기타 신체 상황에 관하여 검사함 
五. 입학지원 수속 
  입학원서 의견서 학급 학년 성적 일람표를 지원 학교에 제출함
  • 1946년 5월 17일 <독립신보> 學齡 兒童의 九割 收容
의무교육 문제는 조선 교육계의 최고 과제인데 문교부에서는 만난을 해제하고 교사 건축 문제, 교원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 중이고 9월에는 실질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 1946년 5월 17일 <조선인민보> 美國 遊學生 派遣을 決定
문교부에서는 대거 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교육 권위자를 초빙하기로 되었는데 교육 관계 유학생은 교육 사업 행정에 5개년 이상 경험있는 자로서 영어 독해력이 있는 자로 각도에서 4명(1명은 여자) 총계 120명을 6월 15일까지 선발 3회로 나누어 分遣. 유학기간은 3개월이다. 일반 유학생은 사회과학, 자연과학 학도 약 120명을 6월 중에는 선발하여 명년 초 파견할 예정이라고 한다.
  • 1946년 5월 17일 <조선인민보> 卒業式은 6월 20일- 신제도에 대한 중학특별조치

@실제날짜:460516

문교부에서는 신교육 제도에 따라서 중등학교 조치에 관하여 16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현 제도 중등학교 제 3-4학년 생도의 조치
제4학년 생은 현 제도에 의하여 졸업케하고 졸업증서를 수여한다. 희망자는 신제도 중등학교 고급 제2학년에 편입된다. 현 4년제 중등학교 제3년생은 진급한 자에 한하여 신제도 고급 제1학년에 편입하고 특별조치로서 진급자 전부에게 수료증서를 수여한다.

졸업식, 수료식 및 학년말 휴가 ▲ 졸업식은 6.27- 7.10 擧行 ▲ 수료식은 7.20 ▲ 학년말 휴가는 7.21 - 8.31까지 40일간 현제도 각 학교 수업년한에 관한 조치 ▲ 현4년제 공립중등학교는 9.1일 부터 수업년한을 6년으로 하여 신제도에 의한 고급과 초급을 병치한다.▲ 현3년제 공립중등학교, 실업보습학교는 9.1일 부터 초급중학으로 한다. 단 1학급편성의 학교는 각 학년마다 2학급으로 편성한다. ▲ 사립 중학교는 수업년한을 변경할 시 문교부장의 인가를 요한다.

  • 1946년 5월 17일 <조선인민보> 推薦, 口答等으로 決定- 7월의 증등학교 입학 선발 요항
주목되는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 선발 방책은 15에 끝을 막은 각도 학무과장회의에서 심의한 결과 드디어 그 대강이 결정되었는데 기대되던 대 영단은 없었고 일제하에서 맛본 쓰라린 입학난은 또다시 해방된 이 마당에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 바 금후 각 학교 실시에서나마 탄력성있는 운용이 요망된다.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요항
◇ 선발방법: 출신국민학교 교장은 추천서, 구답시험, 신체검사의 결과를 종합하여 판정을 내린다. 
 ▲ 출신학교장의 추천서는 국민학교 6학년 학급, 학년성적, 일람표, 학교장의 소견표
 ▲ 필두시험: 국민학교에서 수업한 내용을 기초로한 종합적인 것을 대관적으로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함. 시험은 1회 2시간을 초과하지 않을 것.
 ▲ 구두시험: 지원아동의 지조, 품격, 기타 인물에 관한 고사.
◇  시험기일 1기= 7월 6일 부터 10일 까지  2기= 7월 11일 부터 15일 까지,  1기와 2기는 각 도별로 나누되 경기도는 근간에 결정될 것이다.
  • 1946년 5월 18일 <동아일보> 國民大學 設立準備- 新民同志會서 期成會 結成
조국의 역군이 될 인재를 배양하고자 시내 운현궁 안에 본부를 둔 신민동지회가 중심이 되어 趙素昻 씨를 명예회장으로 申翼熙 씨를 회장, 尹白南, 玉善珍양 씨를 부회장으로 국민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는데 창립 기금으로 3천만 원을 모집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우선 제일기로 야간부만을 두고 근근 예과와 전문부 학생을 모집하리라 하며 학제는 다음같다.
▲ 專門部 ▲ 豫科 ▲ 法文學部 ▲ 政經學部 ▲ 理工學部 ▲ 醫學部
  • 1946년 5월 18일 <동아일보> 東洋大學 設立- 興民會서 期成會
경성신사에 준비 본부를 둔 흥민회에서는 금 18일 하오 한 시부터 동 본부에서 결성식을 擧行한다. 동회의 사업은 장학부, 교육부, 의숙부, 건설부, 문화부, 후생부를 두고 정치, 문화, 경제 각 방면의 향상 발달을 기하고 세계 선진 각국에 학습원을 파견하는 일방 동양대학을 설치한다.
  • 1946년 5월 18일 <동아일보> 美國에 敎育視察團 派遣
학원의 민주화를 하루라도 빨리 이루기에 도웁고자 문교부에서는 3백만 원의 예산을 계상하여 금년 안으로 우수한 교육자 120명(그중 남자 60명)을 미국에 유학시켜 여러 조사 시찰하게 한다. 이 연구파견단은 3개로 나누어 교육 行政, 교육학, 심리학, 교수법과 등의 이론과 그 실제에 대하여 3개월간 미국의 각 대학과 중등학교에서 연구하기로 한다. 파견단은 각도 추천자로 6월 1일까지 선발을 마치어 1개월간 준비한 후 떠나게 된다. 이밖에 미국으로부터 교육계의 권위자, 교사를 초빙하여 우리나라 교육 재건에 대한 지도 원조를 받도록 할 터로 교섭 중이다.
그리고 교육, 농업, 상업, 광업, 인문과학, 자연과학의 각 부문의 전문 유학생 236명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되어 6월 안으로 전형을 하여 명년초에 보내기로 되어 젊은 학도들에 명랑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 1946년 5월 18일 <동아일보> 中等校를 二級制로 分離- 文敎部서 轉移 規定 決定
신교육제도 실시에 따라 국사립 남녀 중등학교는 9월부터 고급, 초급의 두 가지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문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신제도로 전이하는데 대하여 규정을 정하였다.
(ㄱ) 현재 4학년 생도는 신제도에 의하여 졸업 증서를 수여한다. 그러나 희망에 따라 고급중학 2학년에 편입 진학할 수 있다.
(ㄴ) 현 4년제의 3학년 생도는 고급중학 제1학년에 진학시킨다.
(ㄷ) 각 학교의 졸업기는 6월 20일 부터 7월 10일 사이에 적당히 擧行한다.
(ㄹ) 각 학년의 수료식은 7월 20일로 정한다.
(ㅁ) 학년말 휴가는 7월 21일부터 8월 30일까지이다.
(ㅂ) 4년제 학교는 9월 1일부터 6년제 중학교로 전환하여 고급과 초급으로 나누어 수업한다.
(ㅅ) 현 3년제 중학교와 실업보습학교 등은 모두 초급중학교로 되고 신설 학교도 초급학교로 인정한다.
  • 1946년 5월 18일 <조선인민보> 羅州民中서도 盟休
항쟁 중 김군의 애처로운 희생. 羅州 民中은 해방 직후 국민의 총의로 설립되어 그간 신조선의 일군을 길러 내기에 힘을 다하여 오던 바 지난 2월 1일 돌연히 일어난 민주 진영 검거 선풍에 휩쓸려 최교장 교두이하 3교원 및 기성회 박준삼 씨가 부득이 학원을 떠나게 되자 학원의 방침이 돌변하여 학생의 자치권을 무시하고 편당적 교육을 강요하게 되며 이에 분개한 전 학도는 학원의 민주화와 때마침 맹휴 사건으로 말썽이 되어 있는 청주1중 맹휴 절대 지지를 목표로 지난 6일 부터 맹휴에 돌입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번 맹휴 사건에 애처로운 것은 학생회의 간부로 있던 김경남 군(18세)이 지난 10일 영산강변에서 두 동무와 맹휴 해결책을 협의 중 정체 모를 인물(경찰 측에는 경관이 아니라고 부인)의 추격함으로 영산강 피안으로 피하려 하다가 무참히도 익사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인데 김군은 자기 몸이 부자유하게 되자 구원하려는 두 동무에게 "동무들만 먼저 건너가서 내 몫까지 일하여 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만 물결 속에 휩쓰려 들어가고 말았다.
김군의 시체는 2일 후에야 발견되어 수많은 동무들의 오열속에 장의를 마치었는데 비민주 교육과 항쟁끝에 1명을 희생한 김군의 참사는 일반 사회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어 당로자들의 맹성을 촉구하고 남음이 있다 한다.
  • 1946년 5월 18일 <조선인민보> 淸州서 또 學生 多數 檢擧- 사건의 원인, 유학생동맹과 충돌

@실제날짜:460512

청주에서는 유학생동맹원과 청주중등 재학생과의 유혈이 참상을 보이고 있고 사건은 발전되어 드디어 무장 경관과 충돌까지 되었다 한다.
사건은 5월 12일 오후 1시 청주1중 삼학년 재학 중인 이달기 군을 유학생동맹원이 구타 중상시킨 것이 도화선이 되어 1중, 청롱, 청사, 청상생 300여 명은 유학생동맹 주최의 국민 대회에 참가하여 유회시켰다. 익일 오후 1시 유학생들은 전 1중 부교장 오정현 씨댁을 습격하여 학생들을 선동 동원시켰다고 난타하여 중상 입원케 하였다. 경관들이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하여 학생들은 격분한 끝에 드디어 무장 경관과 충돌까지 하게 되어 청농생 중심으로 13명이 검속되었다고 한다.
  • 1946년 5월 18일 <한성일보> 5천만 원 재단으로 국민대학을 창설
학계에 쾌보-본부는 덕수궁내에 설치하고 활동. 건국의 초석이 될 유위한 인재를 배양하고자 금번 서울 德壽宮안에 본부를 둔 新民同志會가 중심이 되어 趙素昻 씨를 명예회장으로 회장 申翼熙 씨, 부회장 尹白南, 玉선珍 양 씨로 국민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는데 창립 기금으로 5천만 원을 모집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동 대학의 학제는 다음과 같으며 우선 제1기에는 야간부만을 두고 근근 예과와 전문부 학생을 모집하리라 한다.
 전문부, 예과, 법문학부, 정경학부, 이공학부, 의학부
  • 1946년 5월 19일 <독립신보> 부산수산전문 단과대학 승격 진정
전국수산대책협의회에서는 수산물의 증산과 어민의 복리를 도모코저 군정청에 수산대책에 대하여 건의키로 되어 동건의 위원 김동주 씨 등 20명은 군정청 이 수산국장을 방문하고 부산수산전문을 단과대학으로 승격할 것, 일본인이 점유하였던 연안 어장의 운영 문제 등에 대하여 건의하였다고 한다.
  • 1946년 5월 19일 <독립신보> 서울에 國民大學 設立- 우선 야간부만 두고 학생 모집
새 조선 건설의 기둥이 될 지도자를 양성코저 新民同志會가 중심이 되어 국민대학을 새로 설치키로 되어 趙素昻 씨를 명예 회장으로 창립기성회를 결정하였는데 기금으로 50만 원을 모집키로 되었다. 우선 제일기로 야간반을 두고 근근 예과와 전문부 학생을 모집키로 되었다.
  • 1946년 5월 19일 <독립신보> 日式 교수방법을 해부- 신조선 교육 참고로 제공
맥사령부에서 문교부에 도래. 조선의 40년 가까운 일제 시대의 노예교육은 노예 정책의 제일 큰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해방된 후 오랜 동안에 일본물든 일본 교육으로부터 조선 새교육으로 어떻게 개혁해 나가는가. 지난번 일본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서는 미 본국으로부터 교육시찰자를 일본에 오게하여 전후의 일본 교육을 분석하였는데 그 해부 결과가 일전에 일본 교육 사찰을 하고 돌아온 문교부 오천석 차관에게 전하여 왔다. 이것은 지금에 일인 학교의 화식(화식교수법)을 비판한 것으로 일제 교육 잔재를 일소시킬 조선 교육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일인학교의 교수법은 고도로 획일적으로 되어 있다. 
2. 교수법의 중심은 교과서와 선생의 강의에 있고 보충적 교재는 얼마 사용되어 있지 않다. 
3. 강의 또는 설화가 각층의 일인 학교에서 통용되는 교수법이다. 
4. 창의적 자주적 사고의 계발보다 학과 내용의 기억에 교수법이 중점을 두었다. 
5. 용어의 특수성 뿐만이 아니라 교재의 성질상 어의(語)의 설명에 선생은 막대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6. 교과는 다수 과목으로 편성되고 각 과목의 교재는 다른 교과 교재와 무관계로 교수함이 보통이다. 
7. 개인과 단체의 훈련은 학교 수업의 중대한 요건이었다. 
8. 일인 아동은 방과 후 다대 시간을 암기에 허비치 않으면 안된다. 
9. 모방과 암송은 학습 활동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10. 화식 교육은 의식화 형식을 중시한다. 
11. 사제 관계는 아메리카보다 일층 형식적이다. 
12. 생도의 개성적 차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 
13. 교수법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별로 없다.
  • 1946년 5월 20일 <독립신보> 7월에 실시할 중등교 입시의 특색- 公私立 差別感을 撤廢
학력 편중에서 종합 실력을. 해방 후 처음으로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오는 7월 6일부터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이념밑에 민주주의에 입각한 이번의 입학시험 요강은 일전의 군정청 문교부에서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일제 때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 이를 해부해 보면 
1. 전에는 여자 중등학교를 먼저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 인제는 남녀가 같은 기간에 하게 되는 것이고 또 남자 중등학교는 공립이 먼저 보고 이에 낙제한 아이가 사립에 다시 시험을 보던 것이 공사립이 한 기간에 보게 하여 공사립의 대립과 차별을 없애서 균등을 도모하여 민주주의적인 교육 제도를 확립한 것. 
2. 전에 학과 편중을 폐하고 종합적인 실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 
3. 필답 시험은 국민학교에서 온 아이들의 지능 정도를 판단할 수 있게 시험시간을 짧게 하여 두시간으로 한 것. 이것은 전회 입학시험 준비에 몰두하여 아동 교육을 해독하게 하는 모순을 일소시킨 것이다. 
4. 권력과 금력만 있으면 입학에 우선권이 있다는 봉건적인 사상을 없애기 위해서 학부형의 재산이나 직업 사회적 지위 여하를 입학 자격에 두지 않은 것. 이상의 새 제도로 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필답 구두 신체검사로 종합적으로 하여 건전한 민주주의 교육의 새출발을 하는 것이다.
  • 1946년 5월 20일 <독립신보> 歸國 學生들 就學에 萬全
해외로부터 돌아온 전재 학생과 38이북의 학생을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지난 4월 25일까지 등록한 650명의 학생을 각 학교에 취학시켰거니와 문교부장 오천석 씨의 말에 의하면 계속하여 귀국하는 학생을 위하여 이부제나 혹은 야학부라도 설치할 계획이나 현재 상태로는 어려우며 또한 시험기도 오는 6월 20일 경부터 시작되는 곳도 있으므로 7월말부터 수속하여 신학기에 입학되도록 주선하리라는데 신입생과는 다르게 금후도 우선적으로 편리를 보아 주리라고 한다.
  • 1946년 5월 20일 <동아일보> 建國 棟梁의 새 搖籃- 大學으로 昇格되는 24 男子 大學
씩씩하게 자라나는 우리 육영계의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24개 관공 남녀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서 승격됨으로 더 한층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이리하야 문과계통은 4년제 대학으로 자연과학계통은 6년제대학으로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내용 충실을 도모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나게 되는 대학은 서울대학교를 제외하고 관공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된 것이 14교, 민립대학이 9교이고 여자대학만도 이화대학을 비롯하야 여자사범 여자의과 숙명여자대학 등 5교나 된다. 그리고 입학시험을 제1기로 7월 1일부터 4일간 제2기로 7월 13일부터 4일간 각기 모집하는데 금년은 기왕에 이학교 저학교 시험치던 폐단까지도 없이하고 다만 두 번만 수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학도의 불타는 연학의 좁은 길을 열어주기로 되었다.
女子에도 最高學府- 男女 各 大學의 入試는 7月
이미 결정된 대학 중에 가장 그 이름부터 특이한 학교는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라 한 것이고 그밖에는 대개 전 교명에 단과대학으로만 고치었다. 연희전문은 연희종합대학으로, 중앙전문은 중앙여자대학으로 각각 승격 준비를 하는 등 각 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우로 있는 터이다.
이제 각 대학의 신 교명, 시험 기일, 모집 인원 등을 조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 시험(7월 1일  - 4일)
  ▲ 경성대학예과
  ▲ 고려대학예과(前 普專)  法科, 經濟科, 文科 각 100명, 文科 補缺 約 60명
  ▲ 경성의과대학(前 京城醫專)  同豫과 100명,(物理, 化學), 전문부 100명(同) 
 昇格준비 중인 학교
  ▲ 大邱農業大學(전 대구농전) ▲ 光州醫科大學(전 광주의전) ▲ 京城鑛山大學(京城鑛專)
  ▲ 大邱師範大學(대구 사법) ▲ 京城法科大學(法專) ▲ 京城女子醫科大學(경성여자의전)
  ▲ 淑明女子大學(숙전) ▲ 京城藥學大學(藥專)
 제2차 시험(7월 10일 -13일)
  ▲ 세부란스 醫科大學(前世醫專) 大學예과 100명(物理, 화학, 생물) 전문부 80명(同)
  ▲ 延禧綜合大學(前延專) 文科豫科, 政治科豫科, 經濟科豫科,外交科豫科, 數理科豫科
  ▲ 京城師範大學(前京師) 同豫科 文科 150명, 理科 150명(同學部 敎育科, 國文科, 史學科, 英文科, 體育科(이상 각 40명)▲ 京城女子師範大學(前女師) 國文科豫科, 영문과예과, 국사과예과, 교육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신설준비) 이상 각과 50명
  ▲ 京城經濟大學(前高商) 예과 100명, 專門部 200명, 동각학년 보결생 若干
  ▲ 京城齒科大學(前齒專) 예과, 전문부
  ▲ 梨花大學(前梨專) 문과예과, 음악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예과, 보육과예과, 의학과예과(각모집인원 미정)
 昇格준비 중인 각교
  ▲ 水原農林大學(수원농전) ▲ 大邱醫科大學(대구의전) ▲ 京城工科大學(경성공전) ▲ 釜山水産大學(부산수산전문) ▲ 惠化大學(惠化전문)
  • 1946년 5월 20일 <동아일보> 女子成人敎育- 제2회 특별 開講
군정청 문교부 성인교육 지도자 강습회 제2회 여자부 강습에 본보 주간 薛義植 씨는 20일부터 4일간 특별 강연을 하기로 되었다.
  • 1946년 5월 20일 <동아일보> 戰災學徒 650명 就學- 今後도 우선적으로 斡旋
吳 文敎部長 談
해외로부터 돌아온 전재 학생과 38이북에서 온 학생들을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지난 4월 25일까지 등록한 650명의 학생을 각 학교에 취학시켰거니와 문교부장 오천석 씨의 말에 의하면 계속하여 귀국하는 학생을 위하여 2부제나 혹은 夜學部라도 설치할 계획이나 현재 상태로는 어려우며 또한 시험기도 오는 6월 20일부터 시작되는 곳도 있음으로 7월 말일 부터 수속하여 신학기에 입학되도록 주선하리라 하는데 신입생과는 다르게 금후도 우선적으로 편리를 보아주리라고 한다.
  • 1946년 5월 22일 <한성일보> 고유문화를 향한 발전- 동양대학기성회 발족

@실제날짜:460518

東洋大學을 창설할 興民會와 동양대학기성회 발기식을 5월 18일 오후 1시 남산 전 경성신사 자리에서 거행하였는데 설립자인 李根澤 씨의 소감이 있고 학생 대표의 감사문 낭독과 내빈 祝辭 등이 있어 하오 5시경 폐회하였는데 이 흥민회의 취지와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英美德佛伊丁 등 각국에 1만 명 학습원 파견
2. 조선에 고유한 특수 문화를 향상 발전케 하기 위하여 각종 특수 대학 경영
3. 세계평화에 기여하며 조국 만대의 영화를 圖하기 위한 각종 문화 사업
4. 기관지 발행 及 출판 竝 농촌도서관 1만개소 경영
5. 최고 학부 간부와 민간 학자의 연락 집합소 경영
6. 건국과 민족 번영을 위한 최고 학설을 연구, 토의, 비판, 발표, 보급하며 교화 기본이 되는 義塾 경영
7. 국민 지도의 최고의 人生 不生 神을 養得하기 위하여 儒佛仙 ○經會를 함 
8. 전국 요지에 각각 1천평 건물을 건설하여 영구히 각기 적시 흥민본부로 사용함
9. 施藥 시○ 기타 후생 사업 경영
10.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제 행위
11. 기타 흥민상 필요한 부대사업
  • 1946년 5월 23일 <독립신보> 初等서 大學院까지의 새 朝鮮 學校令 制定- 敎育審議會 分科會 終了 在邇
민주주의 교육 확립과 아울러 일제 잔재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조선교육심의회는 지난번에 기본 방침을 결정하고 끝낸 다음 한 달 전부터 분과회를 군정청에서 개최하여 왔는데 열의있는 토의는 예정보다도 빠르게 성과를 이루어 이달 안으로는 분과회를 끝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난번의 각도 학무과장회의에서 결정한 의무교육, 중등학교의 교육제도와 함께 초등 중등 고등 대학 대학원 각 학교령과 학위령도 최종적으로 결정을 보게 되어 해방 후 새 조선의 교육 이념은 완전한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다.
  • 1946년 5월 25일 <동아일보> 敎科書 10種 각교에 配付
8.15 이후 급속도로 치열하여 가는 교육열에 비하여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교과서난으로 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를 타개하고자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임시교재연구회를 조직하고 지난 4월 중순부터 約 3백만 원 예산으로 교과서를 연구하여 오던 중 이것이 완성되어 지난 10일부터 동 22일까지에 도내 각 국민학교에 30만권을 배부하였다. 이번 배부된 교과서는 국민학교 아동이 배우는 과목 전부인데, 즉, 지리부도, 리과, 산수, 체조요목, 도화, 공작, 가사재봉요목 등 10과목으로 저번 군정청으로부터 배부한 공민과 국어 교과서를 합치면 이로써 초등교육 일반의 교과서가 완비된 셈이다.
  • 1946년 5월 25일 <동아일보> 男女共學의 師範校- 9월부터 京城과 開城에 新設
의무교육 실시에 앞서 국민학교 교원 부족을 면하고자 남녀공학의 공립사범학교가 서울과 개성에 설립된다. 문교부에서는 교육의 남녀균등화를 위하여 그동안 국민학교와 전문대학은 물론 중등학교에서라도 남녀공학을 실시할 계획으로 토의하여 그 실시책을 강구하여 오던 중 우선 첫시험으로 신설되는 두 사범학교에 적용하기로 되어 9월부터 개교하고자 근근 생도 모집을 하게 되었다. 이 사범학교 명칭은 경기사범과 개성사범인데 모두 초급남녀중학(3년제)을 마치고 들어가는 3년제 학교로 졸업 후는 국민학교 교원 자격을 받게 된다.
▲ 京畿師範
 신용산중학교 교사를 이용하는데 당분간 경기도 학무과장 李軒求가 겸임한다. 생도 모집정원은 모두 200명, 임시교원강습과와 속성과정 각각 백 명이다.
▲ 開城師範
 개성국민학교 교사를 이용하며 교장은 李尙春 씨이고 모집정원과 학과는 경기사범과 같다.
  • 1946년 5월 25일 <한성일보> 문맹퇴치 운동 전개- 韓靑 김박사 추대하고 계몽대 조직
각계 각층의 청년을 널리 망라하여 청신한 조직으로 출발한 韓國靑年會의 동향이 매우 주목되는 바 이번에 金奎植 박사가 명예 회장으로 취임을 승락하여 박사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동 청년회에서는 이번에 夏期啓蒙隊를 조직하여 18세이상으로 우리글을 모르는 전 인구의 87%에 달하는 불행한 동포를 위하여 희생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계획 중인데 교재와 동원 방법에 있어서는 군정청 문교부의 후원을 얻어 이미 착수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회의 임시 사무소는 金九선생의 숙사인 竹漆莊에 두었으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고문)李承晩, 金九
 (명예회장)金奎植 (부회장)嚴堯燮 金泰○ (총무)李圭錫 林炯善
  (조직)金益俊 李明河 (정훈)鮮于基成 李○ (연구)劉基天 白碩基
  (勞農)李台現 崔正東 (선전)金東里 崔興朝 (문화)金光洲 徐廷柱 (지방)洪泉 安卜淳
  (사업)金○ 黃泰○ (체육)金恩培 金源權 (재정)徐廷翰 金柔吉
  (조사)張俊河 金俊燁 (중앙집행위원)姜元龍 金秉旭 金熙雲 金祐銓 金英主 金○植 盧星煥 林聖福 李啓玄 李道淳 李○森 孟基永 朴容○ 申均 申忠鉉 孫基○ 申光○ 安○○ 吳○浚 尹在賢 ○然明 趙得俊 鄭載定 崔永○ ○基○ 洪九杓 黃○○(외 23명)
  • 1946년 5월 26일 <조선인민보> 校庭 無斷 使用한 學生을 警察 印度- 청구국민학교

@실제날짜:460516

교정에서 운동하는 인근 중학생들을 허가 없이 운동장에서 볼을 차고 놀았다고 경찰에 인도하여 학부형과 인근 주민의 비난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교장이 있다.
즉 지난 16일 오후 6시 30분경 시내 청구국민학교(전영구소학교) 교장 이광천 씨는 사범학교 2년생 최기열(15세), 동 3년생 신모(18세), 조선공업 2년생 김영대(16세) 외 2명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허가 없이 운동장을 사용하였다 하여 퇴장을 명하였는데 소년들은 이에 항변하다가 결국 교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이 학교 야경원을 시켜서 파출소에 고소 무장경관 2명이 출동하여 상기 5명을 인치한 것을 신당정 377의 11호에 거주하는 학부형 김혜수 씨가 파출소에 급히 가서 교섭한 결과 석방을 받았는데 상기 5명 중학생들이 취한 불손한 태도는 물론 질책할 필요가 있거니와 15-16세가 되는 중학생을 교장 자신의 힘으로 훈계하지 못하고 경찰까지 폐를 끼첬다는 데에 대하여 일반 학부형 측의 비난은 적지 않다고 한다.
  • 1946년 5월 26일 <한성일보> 국어교육연구회
시내 남대문통에 있는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29일 오후 ○시부터 사범대학 강당에서 국어교육연구회를 개최하였는 바 특히 각 중등학교 교원이 다수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 1946년 5월 28일 <동아일보> 實施되는 義務敎育- 6년간 計劃으로 全員 收容
너도나도 배우자! 이나라 公民되게
누구나 다 배워 이 나라의 훌륭한 공민이 되게 하기 위한 의무교육제 실시는 그동안 문교부의 특별한 열성으로 실시의 단계에 이르르게 되었다. 즉, 1946년 9월부터 6년간 지속적으로 준비 실시하여 1951년에는 전원 수용의 완전한 의무교육 실시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特別豫算 11億圓- 文敎部서 軍政長官에 認可 申請
義敎實施促進委員會本部도 設置
이리하야 문교부에서는 특별예산으로 約 11억원을 쓸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군정장관에 제출하는 한편 문교부안에 의무교육실시 촉진위원회 본부를 두고 각 도, 각 군, 각 면에 동 지부를 두어 민간의 적극적인 원조를 구하고 있는데 우선 오는 9월부터의 준비 실시 첫 년도의 계획이 요즈음 결정되었다. 이에 의하면 소요총액이 8억3,809만 2,984원인데 국민학교 신영비가 約 7,900만 원이며 이에 대한 교원 양성비가 970만 원이나 된다.
이리하여 신영하여야 할 학급 約5,258개의 增築 공사는 근근 각 학교에서 착수하게 되었고 교원 양성도 제1차로 2,300명 가량을 6월부터 각도에서 3개월간 임시 양성을 하여 9월 신학기를 앞두고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는 터이다.
初年에 220만 명을 收容- 수업은 2부제로 전면실시
금년도 학동 수용 계획에 의하면 6세의 적령 아동은 원칙적으로 전원 수용할 것을 목표로 하나 지방 실정에 따라 만 7세 만 8세 아동 합처서 約 8할을 수용케 한다. 즉 만6세아동은 約 72만 6천 명으로 58만 명을 수용하고 7,8세는 76만 8천 명 중 61만 4천 700여 명을 수용한다. 이밖에 학령을 초과한 9,10세 아동 86만 2천 명 중 6할인 51만 7천여 명을 수용하고 만 11,12세 아동은 81만 3천 명 중 5할인 40만 명을 수용하므로써 도합 370만 5백 명 중 7할인 2백 2십만 명 가량을 초년도에 수용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수용한 아동의 수업은 과도적 조치로서 2부제 수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5,258개 교실을 增築으로 교실 부족을 면하게 하기로 되었다.
  • 1946년 5월 28일 <한성일보> 구태의연한 교수법- 우선 교재 문제가 긴급

@실제날짜:460526

문교부 장학관 金容河 씨는 지난 16일부터 10여일에 걸쳐 경남북도의 학사 시찰을 마치고 26일 귀임하였는 바 동 시찰소감을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학관 김용하 씨 담
이번에 부산, 동래, 대구 등지의 국민학교 45처를 돌아 보았는 바 일반적으로 교육자들이 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여서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러나 무자격 교원이 많아서 구태의연한 교수법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긴급한 것은 교재 문제로 학교에 따라서 도, 시에서 배부한 교재 혹은 교원이 자작 만든 교재를 뒤섞어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물론 그 교재를 누가 만드는가는 별문제고 그 내용 여하가 문제인데 교원들이 스스로 만든 교재에는 역시 구태가 여전한 것이 많아 눈에 띄었다. 또 과거에 일인 교육 기관이던 초등학교가 대개 우리의 교육 기관으로 전환되었고 2부제 교수를 하고 있는 학교도 있어서 그 전보다 아동의 수용 등은 훨씬 늘었으나 되도록 모든 학교가 2부제 교수를 실시하면 좀더 아동을 수용할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 1946년 5월 29일 <동아일보> 成人敎育에 公民學校
학령이 지난 일반 미취학 성인을 계몽 지도함으로써 의무교육과 발맞추어 전국적인 남녀의 계몽운동을 전개하고자 문교부에서는 각 군, 면에 공민학교를 설치하기로 되었다. 이 학교에는 초등정도인 13세 이상을 상대로 한 2년제 또는 3년제의 소년과, 18세 이상을 상대로 한 成年科(1년 또는 2년제), 이밖에 1년제의 보습과를 두어 공민, 국어, 산수, 직업, 음악을 가르쳐 민주국가의 공민으로서의 자질 형성에 이바지하게 한다.
공민학교는 공립이 아니라 부읍면 또는 동리나 회사 단체에서 부윤, 군수, 島司의 승인을 얻어 개교할 수 있는 만큼, 동 문교부 성인교육국에서는 되도록 많이 설립되어 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 1946년 5월 29일 <조선인민보> 公民學校 設置- 각종 강습소, 학원 등 정리
미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금반 일반 미취학 아동을 선도 계몽하여 문맹을 일소하고 국민개학의 내실을 기하고저 전국에 상설 기관으로서 공민학교를 설치하기로 되었다. 이와 함께 종래의 각종 강습소 학원 등은 정리되어 공민학교로 통일하게 된 모양인데 공민학교에는 소년과, 성년과 ,보수과을 두고 13세 이상의 미취학 아동을 수용하고 1-3년간 수학키로 되었으며 단체 혹은 독지의 개인이라도 승인을 얻어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 1946년 5월 29일 <조선인민보> 釜山水專校에 異狀- 종합대학 1분과화를 반대
조선 유일의 수산전문학교에 이상이 있다. 즉 경상남도에서는 학무과를 중심으로 돌연 학무 당국과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부산수전 시설을 이용하여 종합대학 창립을 계획 중에 있다는 바 동교 교수 학생일동은 지방 수산업자와 일치 단결하여 절대 반대 운동을 전개 각 방면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당국의 선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그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원래 자연과학 교육이란 특수한 내용과 시설을 필요로 하는 데 특히 수산과학에 있어서는 그 시설 여하가 교육성과의 여하를 결정하는 만큼 종합대학의 한 분과로서는  도저히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없다.
2. 현 교사는 과거 화재로 인하여 장래 입학자 및 시험실 설비로 보아 큰 불편을 느끼고 있는 실정인데 이 시설에 종합대학을 설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일 뿐더러 나아가서는 수전 자체의 파괴를 초래할 것이다.
3. 종래의 수전의 경비 대부분은 수산업자의 호의적 기부로 충당하여 왔는데 업자들은 종합대학의 1분과가 되면 기부를 중지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 1946년 5월 29일 <한성일보> 각지에 공민학교- 성인 문맹을 철저 계몽
문교부에서는 학령을 초과한 미취학자들에게 공민 교육을 실시하고자 각지에 공민학교를 설치하게 되었다. 동교에는 소년, 성년, 補修 3과를 두기로 되었는데 소년과는 수업 기간이 2년 내지 3년으로 초등학교 미취학의 13세이상, 성년과는 수업 년한이 1년 내지 2년으로 초등학교에 가지 못한 18세이상, 보수과는 수업 년한이 1년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13세 이상을 수용한다.
  • 1946년 5월 30일 <한성일보> 國大 기성회 결성-정씨 5백만 원을 희사
華山財團에서는 國學專門을 대학으로 승격시키고자 國學大學基成會를 결성하였는데 우선 현 교주 鄭義采 씨가 전 재산 5백만 원을 희사하였으므로 동 기성회에서는 일반 유지로부터 5백만 원의 기부를 모집해서 1천만 원의 재단을 만들기로 되었으며 동 기성회 임원은 다음과 같다.
 ▲명예회장 金奎植 (후략)
  • 1946년 5월 31일 대학 총학장회의 개최

4년제 대학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토론을 하기 위해 대학 총학장회의가 1946년 5월 31일에 개최되었다. 군정청 문교부에서 제출한 대학개편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현재의 전문학교 및 대학과정을 미국의 대학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임.
(2) 현재 3년으로 되어 있는 대학 과정을 1년 연장함.
(3) 각 고등교육기관에 단일한 교과과정 채택.
(4) 4년제 대학에만 예과 설치하고 기간은 2년으로 함.
(5) 현재의 대학 혹은 대학교로부터 새로운 체제의 대학교로의 자연스러운 진급을 허용함.

이 안에 대한 토론 후에 5명의 한국인과 3명의 미국인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임명되어 원래의 안과 이에 대한 토론 결과를 평가하여 학무국장에게 최종 건의를 하기로 되었다.[119][120]


1946년 6월

  • 1946년 6월 1일 <동아일보> 延禧專門에 曙光- 5천만 원 財團 確立, 大學으로 昇格
한강을 반닷이 안고 푸른 숲에 싸여 있는 연희전문은 대학 승격과 5천만 원 재단 확립 계획으로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개교는 31주년을 맞이하고 1,500여 명의 졸업생을 來引, 동교는 그동안 미국에 있는 재단에서 송금이 안되어 오는 8월까지 동교 동문회원들이 경상비 100만 원을 염출해 내는 등 경영상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던 중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대학 승격을 계기로 시가 3,565만 원 가격의 토지 2,112,400여평의 함안 농장을 쾌히 내놓은 청년실업가의 의거로 재단 확립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의거의 주인공은 경남 부산출신인 시내 남대문통 대한화재보험회사 사장 河元俊(35세) 씨이다. 그는 현재 신당정에 거주하며 세개 고무공업회상 등, 10여 회사의 사장으로서 자수성가한 분이다. 동 학부를 문학원으로 상과, 경제과, 외교과를 상경학원, 이학, 수리과를 이학원, 이밖에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원 등 4년제 수업의 4종류 학부를 문○대학으로서 9월부터 발족을 한다. 이리하여 4년 후는 다시 졸업생의 연구기관으로 대학원을 설치하여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1946년 6월 1일 <조선인민보> 中等學校 入學試驗날 決定- 1기 7월 6일, 2기는 11일

@실제날짜:460530

금년도 각 중등학교 입학 시험 기타 학원 문제는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숙원이던 제1, 제2기 시험 학교의 결정은 5월 30일 경성중학교 강당에서 경기도내 남자 중학교장협회석상에서 추첨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 제1기 (7월 6일 - 7월 10일) 시험학교
  동성중학교(전동성상업학교), 영창, 성남, 보성, 경동, 경복, 양정중학교.
▲ 제2기 (7월 11일 - 7월 15일) 시험학교
  휘문, 경신, 배재, 중앙, 중동, 한성, 경기, 경성중학교.
  • 1946년 6월 1일 <한성일보> 延禧大學 新發足- 30여년의 숙망을 달성

@실제날짜:460901

각계명사 義捐遝至로 재단확립. 延禧專門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서 문학원, 상경학원, 이학원, 신학원의 4학부를 두고 오는 9월부터 당당히 ○○○을 하게 되었다. 이 성사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후원이 답지하고 있는 바 金春園 씨가 시가 10여만 원의 도서 5천권을 기증한데 이어서 학부형 모씨가 현금 50만 원을 희사하였으며 한편 동교 동문회에서 모교 경상비 100만 원 거출 계획을 세워서 벌써 50여만 원에 도달하였는데 이번에 청년 실업가 河元俊 씨가 싯가 3천5백65만 원으로 연수 3만 5천석이나 되는 함안농장 토지 2,112,403평을 제공하였다. 이것으로 동교 在美財團 42만불과 아울러서 확고한 재단의 성립을 보게되어 명실상부한 대학으로서의 동교의 양양한 전도에 커다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 1946년 6월 1일 <한성일보> 중등학교 입시문제에 관한 문교부 발표

@실제날짜:460531

준비 교육의 악습을 타파- 평소의 성적에 치중.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 시험은 오는 7월초에 2기에 나누어 일제히 실시하게 되어 제1기는 7월 6일부터 5일간 제2기는 동 11일부터 5일간 각각 시행하며 따라서 지원자는 두번 응시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 바 동 입학 시험 방법과 시험 문제에 관해서 문교부 차장 吳天錫 씨는 작 31일 다음과 같이 해설해서 발표하였다.
중등학교 입학 시험방법과 출제
1. 출신학교장의 추천서 (1) 국민학교 제6학년 학급의 학년성적 일람표 (2) 학교장의 의견서
2. 필답시험 (1) 국민학교에서 수업한 전학과의 내용을 기초로 한 종합적인 것으로 지원아동의 지식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 (2) 시험은 1회로 하고 2시간을 초과하지 않을 것
3. 구두시험: 지원아동의 지조, 품격, 기타 인물에 관하여 고사함
4. 신체검사: 수학상 지장있는 난치 감염 질병의 유무 기타 신체 상황에 관하여 검사함
이번에 이렇게 과거 입시 방법을 개정하여 인선에 있어서의 운의 위험과 아울러서 입시 준비 교육의 악습을 제거하려 함
이리해서 국민학교 제6학년 성적표를 제출케하여 평소의 성적을 중시하게 되었다. 한두번의 입시보다는 평소의 학업 성적이 그 아동의 학력을 측정하는데 보다 믿을만한 증거와 표준이 되는 까닭이다. 다음에 국민학교에서 배운 전학과를 기초로 한 종합적인 시험을 보아 대체로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즉 아동의 학력은 대체로 국민학교 시대의 평소 성적을 통하여 알 수 있으므로 엄격한 의미의 학술 시험은 그 이상 필요가 없고 이것을 보충하는 의미로 지원자의 일반 지력을 측정하기 위하여 상식적인 것을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 시험법에 의하여 시행하려는 것이다. 이 시험은 짧은 시일의 입학 시험 준비 교육이 있다고 하여 그 성적이 좋아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成表的으로 지능이 우수하여야할 것이요 평소의 꾸준한 학업에 의하여야만 오직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1946년 6월 2일 <조선인민보> 在學成績을 重視- 중등교 입시에 새 방법
박두한 중등학교 입학 시험에 관하여 문교부 오차장은 1일 다음과 같이 그 주안점을 말하였다.
종래의 방법으로 보면 특정 과목에 관한 입시 결과를 중요시하고 다른 조건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평소 학교 성적이 우수치 못하였다고 하여도 입학에만 성적이 좋으면 입학할 수 있는 관계로 참으로 그의 실력을 측정하는 데 큰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시험 문제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 고사자의 주관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공정을 잃은 위험도 적지 않았다. 겸하여 특정 과목의 학과 내용의 기억을 강요하는 시험 문제였기 때문에 학과 과목만을 중시하고 입시○○을 ○○하게 되고 다른 과목은 경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이번 실시되는 안은
1. 국민학교 제6학년 성적을 제출하게 하여 평소의 성적을 중요시 하게 되었다.
2. 국민학교에서 배운 전 학과를 기초로 한 종합적인 시험을 쳐서 대체로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알아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지원자의 일반 지력을 측정키 위해 상식적인 것을 실시하려는 것이다. 이 시험은 짧은 시일에 입시 준비 교육이 있다고 해서 그 성적이 좋아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생래적으로 지능이 우수하여야 할 것이요 평소의 꾸준한 학업에 의하여야만 오직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1946년 6월 3일 <독립신보> 文盲退治에 快報, 미취학자를 전부 교육- 경향 각지에 공민학교 신설
국민학교 교육도 못받고 나이를 놓친 남녀 청소년을 위해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이번에 공민학교를 신설하여 민주 조선 국가의 유익한 공민 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소년, 성년, 보수의 세과로 나누어 문맹을 일소하고 국민의 자질 향상을 도모하는데 있다. 
그런데 이 三과 중 소년과는 2년 또는 3년, 성년과는 1년 또는 2년, 보수과는 1년의 수업 연한으로 하여 각 지방 실정에 적합하게 연한을 신축할 수 있다. 입학 자격의 연령은 소년과는 초등학교 미취학의 13세, 성년과는 28세, 보수과는 초등학교 졸업한 30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으로 1학급의 수용인원은 60인 정도로 한다. 
교과목과 매주 시간수는 소년과엔 공민 2시간, 국어 10시간, 국사· 지리 3시간, 산수 5시간, 이과 2시간, 음악· 재봉 2시간, 직업 4시간으로 합하여 30시간이며, 성년과는 공민 1시간, 국어 7시간, 산수 4시간(합 12시간), 보수과는 공민 1시간, 국어 6시간, 국사 5시간(합 12시간)인데 성년과와 보수과는 야간 수업으로 하여 특히 농촌의 공민학교는 농번기에 적당히 휴학하여 농촌에서 일하며 공부하도록 융통성있는 교육시책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훈육의 중책을 맡는 교직원은 국민학교 교원의 자격을 가진 자와 이 이상의 실력을 가진 자 또는 학교장과 교원을 따로 지정한 교원으로 한다.
  • 1946년 6월 3일 <독립신보> 白·都 兩敎授 留任 運動-경대 교수단 러장관에게 진정?
건설기에 있는 조선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수석교수 도상록 씨와 동 대학 경제과 교수 백남운 씨의 돌연한 퇴진으로 동대학이 받는 타격도 클쁜더러 조선학계의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이공학부 교수단에서는 연일 회합을 거듭하고 그 대책을 협의해 오던 터인데 이 결과 도·백 양교수를 유임시키기로 결정을 보아 동 교수단은 3일 군정청에 러취 군정장관을 방문하고 양 교수의 유임을 진정하기로 되였다 한다.
  • 1946년 6월 4일 <독립신보> 兩敎授 留任 陳情- 이공학부 교수단 대표가, 유문교부장 방문코
경성대학의 이공학부 수석교수 도상록, 동대학 경제과 교수인 백남운 양교수 유임운동에 궐기한 동이공학부 교수단대표 김동일 한인석 김재을 김지정 등 네교수는 4일 오전 9시경 군정청 유 문교부장을 방문하고 양교수 퇴진에 대한 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양교수의 유임을 진정하였다 한다.
  • 1946년 6월 4일 <독립신보> 漢陽工業 將來가 우려- 학교 책임자들의 무성의로
한양공업학교 생도 800여 명은 이원철교장, 김동길 부교장의 학교 경영의 무능에 의하여 재정적 곤란이 극도에 달하고 교육 방침에 하등의 대책이 없는 것을 지적하고 교장선생의 성의있는 처치를 요구하였으나 여전히 이교장은 군정의 요직에 김부교장은 개인 의사인 관계로 학교일에는 너무나 무성의하였다. 그로 인하여 일어난 동맹 휴학이 네 번이나 일어나고 사태는 악화되었으므로 학부형회 工友會 교원단이 협의한 결과 한양공업학교 경영대책협의회를 조직하는 한편 이교장의 선처를 요구하였으나 이교장은 “나는 교무에 전력할 수 없으니 재단을 확립하고 후임 교장을 추천만 한다면 나는 이사회에서 사임하고 경영권도 인계하겠다”고 하던 이교장은 대책협의회측에서 독지가 장남진 씨로부터 기본재단으로 100만여원 이외 월액 4만 원을 제공함으로써 장남진 씨를 중심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후임 교장을 추대하고 이교장의 사퇴를 요구한 즉 이교장은 차일 피일하면서 확답을 하지 않는 한편 학무과 적산관리과에 허위 신고로 학교 경영권 일체를 자기 수중에 넣고 우물쭈물하므로 진급기를 앞두고 학생들을 위하여 협의회측은 사회의 동정을 요구하며 학무진 당국에 해결을 청하고 있다.
  • 1946년 6월 4일 <동아일보> 朝鮮唯一의 釜山水專- 綜合大學에 編入을 反對
부산수산전문학교는 이번에 학제 변경을 기회로 부산종합대학으로 편입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동교 학생들은 물론 교수진 일동은 수전은 독자적인 학교로 존속시켜 달라고 열렬히 대학편입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야 반대진차로 서울에 온 교수단 동창회 대표들은 지난 28일 문교부에 진정서류를 내놓고 교섭하는 한편 각 방면으로 편입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조선 정세로 보아서는 이런 류의 종합대학도 좋겠지만 수산관계를 전공할 수 있는 명실이 상부한 단과대학 설립보다 더 긴급한 것으로 부산수산전문을 종합대학의 일분과로 만들려는 것은 지방과 중앙과의 연락이 불충분한 것과 수산에 대하여 일부 이해가 적은 분들만의 탁상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편입반대차로 상경한 동교 대표단과 문교 당국의 의견을 들어 새로운 대책 강구를 촉구하는 바이다.
單科大學이 所願- 교수단 대표 金炳哲 씨 談
부강 조선의 수산을 담당하는데에는 진실한 수산인의 전문적 양성 기관이 있어야 한다. 이러기 위하여서는 명목만 좋은 종합대학의 일분과로 편입되느니 보다는 단독대학으로서 기왕의 부족을 보충하고 강화하여 권위있는 기관으로 갱생시키는 것이 수산 조선을 위하여 좋을 줄 압니다. 따라서 수산전문은 독립한 단과대학으로 하고 따로 종합대학이나 인문계통학교를 세우는 것은 얼마든지 무방할 것이니 수전 문제만은 재고려하여 주기를 간망하여 마지 않습니다. 수산계통이 종합대학의 분과로서는 가차운 일본에서도 전적으로 실패한 것만 보아도 부당함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정 방침대로 鄭교육국장 談
수전이 종합대학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도 잘 아는 만큼 구체적인 점을 연구, 협의하려 한다. 그러나 대학이 되어 해양과 수산방면 교육이 등한하여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국으로서는 다만 기정 방침대로 나갈 예정이다.
  • 1946년 6월 4일 <조선인민보> 公金 橫領의 陋名을 쓰고- 이공학부 도상록 교수 파면
해방 직후부터 미묘한 인사 문제로 물의가 계속되고 또 최근에 이르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사문제, 동교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동 문제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경성대학에서는 요즈음 동교 이공학부의 중진 교수 도상록 씨의 의외의 파면과 조선 경제학계의 ○○ 법문학부 교수 백남운 씨의 사표 수리 문제 등으로 동교 내외의 일대 파란을 던지고 있다.
즉 도상록 씨는 지난 23일 동 대학 안총장으로부터 공금 횡령이라는 뜻하지 않은 이유로 파면을 당하였는데 소위 공금 횡령이라는 죄명을 쓰게 된 진상은 해방 후 혼란기를 악용하여 동교 이공학부 운전수 모외 1명이 학교 소유 트럭 1대를 44,000여원에 팔고 작년 11월 죄상이 발각되어 양주경찰서 ○촌 주재소에 검거된 사건이 있어 당시 이태규 학부장이 출두하여 경찰 당국과 범인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약속하고 4만여원은 학교로 회수하였다. 그 후 이 돈은 조선인 총장이 임명될 때까지 이공학부 교수회에서 보관하고 유용한 곳에 사용하기로 교수회에서 결정하였는데 작년 12월 하순 조선에 신탁 통치 문제가 발생되자 동교에서는 전학○회를 개최하고 반탁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도상록 씨가 피선되었다. 그리고 반탁운동의 경비로 약 6,000원을 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6,000원이 도상록 씨가 공금 횡령의 누명을 쓰게 된 원인이라 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동 대학 교수회에서는 이 책임을 교수회 당시의 반탁투쟁위원회 전원이 져야할 것이라고 도상록 파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일방 백남훈 씨는 해방 후 경성대학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동 대학 경제과에서 조선경제사와 재정학 강의를 담당하여 청년 학도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오던 바 수일 전 돌연 사표를 제출 즉시 수리되어 학년 시험을 한 달여 앞두고 동 대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돌연 양 중진 교수를 잃은 경성대학에서는 양 교수의 복직을 희망하는 진정운동을 전개 중이라 하며 학계를 아끼는 인사는 다 같이 양 씨의 복귀의 실현을 기대한다고 한다.
  • 1946년 6월 5일 <조선인민보> 無道! 敎授때린 女學生- 전대미문 숙전생들의 亂行
경성대의 인사 이동을 비롯하여 경향에 벌어지고 있는 학원의 불상사는 학원의 민주주의화 촉진에 일대 지장을 초래하고 있어 그 귀추가 우려되고 있는 이 때 이번에는 난데 없이 교수를 때린 전대 미문의 여학생의 亂行이 일어나 당로 지도 책임자의 맹성이 요망되고 있다.
즉 숙명여자전문학교 내에는 지난 4월말 부터 동교 교장 임숙재 배척 문제를 중심으로 배척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절대 다수인 학생회와 반대학생연맹에 가입한 오세임을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는 약 20명의 숙전재건학생동맹의 두 파가 대립되어 오던 바 지난 27-28일 양 일에 걸쳐 김제순, 오세임 등은 양심적인 교수 이삼실, 이창순, 양 씨를 배척하자는 삐라를 살포한 사실이 있어 교수단의 결의는 이상의 2명의 학생을 무기 정학에 처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반감을 품은 소위 동맹파학생 홍진옥은 19일 드디어 이삼실교수를 보고 "너같은 놈은 선생될 자격이 없다. 어서 나가라"고 무도한 폭언을 하며 빰을 때리고 갖은 暴惡한 행동을 하고 이어서 6월 1일에는 또다시 김제순, 홍진옥, 황흥숙, 박선영 외 4-5명이 결탁하여 이삼실, 이범애 양교수에 대하여 暴行을 감행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기 양 교수는 이와 같이 무엄한 학생들의 亂行에 대하여 하도 어이가 없어 본교의 명예를 위하여서도 일체 함구하고 사건이 낙착되는 데로 사직할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나 일방 반동여학생들은 조금도 반성하는 점이 없이 몰상식하게도 오히려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광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조선 지식 여성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금반 문제에 관하여 각 방면의 여론이 분분하며 금후의 동향이 주목된다.
  • 1946년 6월 5일 <한성일보> 중등학교 입시기일 결정
남녀 중등학교 시험기 박두.(내용생략)
  • 1946년 6월 6일 <독립신보> 文盲退治 學生 봉사대- 준비위원회를 결성
지난 4일 오후 1시부터 경성사범대학 미술교실에서 시내 각 중등 전문 대학 남녀재학생 대표자 백여 명 참석하여 건설적인 순진한 학구적 입장에서 열렬히 토의가 있은 후 학생운동의 첫 사업으로서 문맹퇴치를 위하여 학생봉사대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부서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盧榮奎 (師大) 부위원장 鄭賢澤 (京專) 동 朱貞一 (女師)
  • 1946년 6월 6일 <조선인민보> 都,白 兩敎授 復職을 主張- 경대 인사 부당성을 민전서 발표
민전 선전부에서는 4일 경성대학 도상록, 백남운 양교수의 파면과 사임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경성대학에서는 도상록 교수를 파면하는 동시에 백남운 교수의 사임원을 수리하였다. 도교수를 파면한 이유는 공금 횡령이라고 하나 이공학부 자치위원회의 진상 발표에 의하면 하등의 부정한 공금 횡령이 아닌 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우리는 경성대학내에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양 조류가 있어 알력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알력이 노골화하여 민주주의적 진보적 교수를 공금 횡령이라는 허구의 누명을 씌워서 추방한다는 것은 앞으로 민주주의적 교육과 건설을 위하여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민주교육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양교수를 당연히 급속히 복직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 1946년 6월 6일 <한성일보> 학원의 자유를 절규- 제복 處女 총 기립
시내 淑明女專에서는 얼마 전에 동교 이사회에서 任淑宰 씨가 교장으로 추천되자 좌익 색채가 농후한 동교 교수단의 영도하에 있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임씨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서 배격하자는 것이 결의되었던 바 이 배후의 흉계를 탐지한 일부 학생들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편당 교육을 배격한다는 뜻을 교수단에 전달하자 동 교수단에서는 선생을 인신 공격하였다는 이유로서 洪鎭玉, 金在順 양양을 퇴학 처분에, 林應蘭양을 무기 정학 처분에 처하게 되어 신성하고 자유로워야 할 학원에 소아병적 적색 교원이 잠입하여 학원의 자유를 유린함에 분개한 학생들은 숙전재건학생동맹을 조직하고 적색 교원 박멸을 위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하는데 특히 교수 중 오모는 교단에 오르면 "칠판의 자유"를 구실로 공산주의를 해설하는 것이 일과라 한다. 그리하여 전기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은 3명은 이 억울한 사정을 문교 당국에 진정하는 한편 작 5일에는 경기도 경찰부로 張澤相부장을 방문하고 눈물겨운 호소를 하였다 한다.
  • 1946년 6월 7일 <독립신보> 敎職員을 재교육- 경기도내 각학교서 이백 명 뽑아
건설기에 있는 교육의 중대성에 비추어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도내 중등학교와 고등여학교 교장 교두 2백 명을 모아 오는 21일 오전 9시부터 2일간 시내 경기중학 강당에서 교원 재교육을 실시하리라는데 그 요항은 다음과 같다. 
 ▲ 연구조항 : 민주주의 각 학교경영의 실제와 생도 보도의 현상 
 ▲ 참관학교 : 경복중학교 및 숭문고등여학교 
 ▲ 교육과제 : (1) 신교육의 이념
              (2) 민주주의 교육의 이념
              (3) 과학교육의 진흥
              (4) 미영 교육의 일반
              (5) 국사교육
  • 1946년 6월 7일 <독립신보> 不良 學生 肅淸을 결의- 숙전생의 교수구타사건 後報

@실제날짜:460606

시내 숙명여전 학생의 교수 구타 사건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사건의 발단인 즉 지난 4월 이래 동교 학생의 대부분은 임숙재 교장의 취임을 동 씨가 정당 관계자이며 또 신병이 있다는 것 등을 이유로 거부하고 동맹 휴학을 하였던 바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들에게 선처할 것을 약속해 맹휴는 일단락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몇몇 학생은 드디어 임교장 환영을 표명하고 나서 학생간의 알륵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과 일년생 홍진옥 등 10여 명의 학생은 수차에 걸쳐 교수를 작당 구타하는 난행을 감행하고도 조금도 반성함이 없이 도리어 자기들의 처사를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등교해 가지고 교정을 문란케 함으로 학교 당국은 드디어 일주일 동안 휴교를 선언하게 까지 된 것인데 6일 동교 학생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여 불량배 학생들의 맹성을 요구하였다 한다. 
결의 
一. 우리 숙전 삼백 여학생은 현 교수진 지도밑에 숙전을 사수한다. 
一. 우리는 현 교수진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아울러 현 교수회는 하등의 정당색이 없는 것을 확인한다. 
一. 홍진옥, 김재순, 임응○의 처분을 정당하다고 결의하고 박선영 박애주의 반성을 요구한다. 
一. 모든 정치 문제에는 학생 전체로는 엄정 중립임을 성명하고 학원의 평화를 탐내어 행하는 모든 불순 행위에는 단호 투쟁한다.
  • 1946년 6월 7일 <독립신보> 學園의 自由란 무엇이냐- 사설-
사회 생활의 전 영역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활발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 민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요 慶賀할 일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 사회의 차대를 담당할 학생들이 풍부한 학식과 고아한 품성을 단련하면서 날마다 생활하고 있는 학원이 그들 젊은 학도들이 수업하기에 호적한 조건을 구비한 정말로 민주적 환경과 시설로 개조되어야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곳 학원이야말로 흉악한 일제가 우리 민족을 도덕적 정신적 수단으로 마비시키고 동화하려는 무서운 책원지였던 것을 생각할 때 해방의 길이 열린 오늘날 우리 학도들이 이 곳에서 모든 일제적 요소와 구사회의 찌꺼기를 청소하기에 용감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실로 숭엄한 건국 사업의 일익으로서 임무를 다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학원의 자유는 확보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또 그것을 위하여 싸우는 학도 제군에게 滿腔의 원성을 보내는 바이다. 그런데 사회의 다른 부면에서도 한결같이 보는 바지만 학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학원내에서 오히려 학원의 자유와 순진한 학도들의 애국열을 그릇 인도하는 정치적 편당 운동을 공공연히 시작한 것은 우리 성실한 애국 학도들의 자존심과 명○을 위하여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그 현저한 예는 근일 모여자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기로에 선 우리 학원 전체의 부정적 면의 여실한 반영인 점에서 교훈적인 일이며 또 진실한 학원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方角이 어디 伏在해 있는가를 지시한 점에 깊은 의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원의 자유란 첫째, 오늘날 우리에게는 학원 내에 남아있는 일제적 잔재의 청산이요 둘째, 연학과 수련의 민주적 조건의 확립을 위한 교내의 모든 구성원의 의사와 행동의 화합한 협동에 있는 것이다. 셋째 생경한 정치적 색체를 외부에서 주입하여 생장기에 있는 학도들의 자주적 판단, 건전한 교양을 저해하는 정치주의의 배격에 있지 않으며 안된다. 
이것은 학도들의 정치적 관심이나 연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것을 건전하게 발육케 하고 그들이 이윽고 실 사회에 나서서 정치에 진출할 때를 위한 행동과 비판에 확실한 기초를 닦어주는 진실한 방법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여자요 학도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구한 장래를 負荷한 전 학도의 프라이드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한 학원의 자유를 위하여 이번 사건을 철저히 사회적으로 비판하여 문교 정책 전체에 귀중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요 다음으로는 학생 제군의 진지한 양심적인 자기 반성을 하여 민주 사회에는 민주 사회대로의 질서와 사제애는 존속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주기 기대하는 바이다.
  • 1946년 6월 7일 <동아일보> 中等學校의 入試- 7월 6일부터 2회 시행
경기도내 공사립 남녀각 중등학교에서는 금년부터는 2회로 나누어 입학시험을 행하는데 제 1회는 7월 6일부터 10일까지이고 제 2회는 7월 11일부터 15일까지로서 각 학교의 시험기일은 다음과 같다.(내용생략)
  • 1946년 6월 7일 <조선인민보> 서울大學校 都敎授 遂逮捕

@실제날짜:460604

한성경찰처에서는 지난 4일 돌연 과반 경성대학에서 파면당한 이공학부 교수 도상록 씨를 체포하였다는데 이유는 미상이다.
  • 1946년 6월 8일 <독립신보> 都敎授에 책임 없다!- 이공학부교수단서 재고 요망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경성대학 도상록교수의 파면에 대하여 동 대학 이공학부 교수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여 문제의 발단인 '트럭'대금을 반탁 운동에 쓴 것은 도교수의 책임이 아님을 지적하는 동시에 당로자의 재조사와 선처를 요망하였다. 
성명서(略文) 
 근일 경성대학에 있어서 법문 의학 이공의 삼학부와 예과의 전교직원이 상호 연락하여 조선 대학 건설의 근본적요망인 자유와 자치를 확립하여 연구 노력하고 있는 차제에 이것을 금지시키는 사건이 유감히도 본 학내에 발생하였으니 도상록교수의 파면 문제이다. 이유는 공금사용에 관한 문제인데 그 경위는 이미 신문 지상에 대략 보도되었거니와 이공학부 소유 트럭 대금을 도교수가 자의로 반탁 운동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은 트럭대금 일부를 반탁운동에 사용키로 결의한 것은 정교수회에서 선출된 반탁투쟁위원회에서 한 것이며 또 도교수는 임시위원장의 책임으로서 이 결의를 이부장과 상의없이 집행하였다는 것이다. 도교수는 이를 상의하였다는 것이고 전후사실에 있어서 상의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사후 1월 11일에 정식교수회에서 반탁투쟁에 사용한 금액, 이공학부 전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이부장에게서 차용한 것으로 하자는 이부장의 주장대로 결의한 만큼 그 책임이 있다면은 교수회에 있는 것이니 법리상 당시 의장인 이태규부장에게 최대의 책임이 있을 것이며 만일 공금을 대학회계에 납입하지 아니하고 교수회에서 보관된 점에 책임이 있다면 이 역시 최대의 책임이 이부장에게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반탁투쟁위원회의 결정을 연락한 도교수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조리에 어그러지는 일이며 돌연히 도교수만에 파면을 보는 것은 우리의 양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로자의 재조사와 재고려를 요구하는 바이다. 도교수는 수일전 경찰에 구속되어 본문제로 취조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니 그 결과에 따라 사건의 정체가 명백히 될 것이며 정당한 처분이 있을 것을 믿는 바이다. (下略)
  • 1946년 6월 8일 <조선인민보> 都敎授 罷免 問題의 眞相

@실제날짜:460607

경대이공학부 도상록 교수 파면 문제는 동교 유사 이래 초유의 불상사로서 학교는 물론 일반의 중대 관심을 끌고 있던 중 동 교수의 피검에 이르러 드디어 문제는 표면화하여 그 귀추가 극히 주목되는 바 7일 동교 이공학부 교수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책임의 소재를 명백히 하는 동시에 당국의 선처를 요망하였다.
대학자치에 암영, 경대 이공학부교수단 성명

성명서 요지

(前略) 도상록교수의 파면 문제의 이유라는 것은 공금 사용에 관한 문제인데 그 경위는 이미 신문 지상에 대략 보도되었거니와 (중략) 반탁운동 자금 운운 사건은 사후 1월 11일 정식 교수회에서 반탁 투쟁에 사용하자는 이부장의 주장대로 결의한 만큼 그 책임이 있다면 교수회에 있는 것이니 법리상 당시 의장인 이규택 부장에게 최대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반탁투쟁위원회의 결정을 연락한 도상록 교수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조리에 어그러지는 일이며 돌연히 도교수만의 파면을 보는 것은 우리의 양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당로자의 재조사와 재고려를 요구하는 바이다. (중략)
동시에 대내적으로 이택규 부장은 모든 대학 자치운동에 성의를 보이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교부된 자치제의 실현을 요청한 교수단의 권고문을 문교부에 제시하여 문제를 의외의 방면으로 확대함으로써 동료간의 공기를 악화시키고 이번 도교수 사건에 관한 조사가 진행됨을 사전에 알고도 고의로 묵살하였고 파면 명령이 나온 후에는 중요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교수에게만 전가하며 교수단의 간절한 요청에 대하여도 하등의 성의있는 처리를 보이지 아니한 것은 도의상으로 용납못할 동료에 대한 부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중략)
이는 건설 도상의 우리 대학에 있어서 학내 단합과 협동 정신이 절대로 요청되는 이 때에 불미한 기풍을 뿌리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교수단 일동은 이부장의 맹성을 요구하는 바이다. 오늘날 조선 대학의 재건이 필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누가하며 또한 어떠한 방향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이다. 조선의 전사회가 민주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한 대학의 재건도 이 방향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학의 총의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자치의 영역은 더욱 넓어져야 할 것이오 이러한 결정에서만 정당한 방향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자치에 지장을 가져오는 모든 행동은 허용할 수 없으며 금반 사건과 같은 것은 대학 자치 건설 도상의 일대 암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우리 사회와 대학을 위하여 사건의 정체를 명백히 하며 최후까지 불순한 원인의 제거를 위하여 싸울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 1946년 6월 9일 <동아일보> 高等敎育制度의 臨時措置

@실제날짜:460608

新制의 大學, 專門- 진학과 편입방법을 발표
신교육제도 실시에 따라 9월부터 각 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음으로 문교부에서는 이번 남녀 학생이 자유로이 교육균등의 은택을 입게 하도록 현 전문학교생의 진학 방법과 각 대학 신규 모집에 대한 임시조치를 결정, 8일 발표하였다.이에 의하면 인문계통 전문학교는 4년제 대학과 전문부, 이밖에 신제도에 맞는 고등중학교(2,3학년)를 병치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부는 금년도만 두는 것이다.
의학계통은 대학으로 승격되는데 현재 1년생은 대학 2년으로, 2학년은 대학 3년으로 각각 진학 편입시키고 서울대학 예과는 그대로 두는데 신제도에 의한 금년도 대학학부 1학년 입학 자격자는 동예과 2학년 수료자와 규정에 의한 특별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 한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립 각 전문학교로서 신제도에 따라 대학으로 승격하고자 하는 학교도 이번의 임시조치에 준거하여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시조치는 다음과 같다.
專門部. 高級 2年制 中學 臨時措置
一. 現行 일반 국립전문학교, 現行 일반 국립학교로서 신제도의 대학으로 승격함에 관하여는 종래의 전문학교는 此를 동 대학의 전문부로 개편함.
 1. 1946년도 신입생 모집에 대한 임시조치로서는 각자의 학교 실정에 준하여 전문부만을, 혹은 최종 2개학년의 중학교 고등과만을, 혹은 양자를 동시에 설치할 수 있음.
  (가) 대학에 附置되는 전문부의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에 한하여 此를 行하기로 함.
  (나) 신입생 모집의 대상은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자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 전문학교 입학자검정시험 합격자, 又는 此와 동등 이상의 學力이 有하다고 인정된 자로 함.
 2. 1945년도 現行 전문학교 제1학년 수료 예정자는 동 대학에 附置되는 전문부 제2학년에 진급함을 윈칙으로 함. 단, 右 수료 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 희망자는 특별시험 제도에 의한 대학 본과 제1학년 모집에 응모할 수 있음.
 3. 同 右제2학년 수료 예정자로서 전문부 졸업 희망자는 전문부 제3학년에 진급함을 원칙으로 함. 단, 대학에 진학 희망자는 시험에 의하여 대학 본과 제1학년에 편입할 수 있음.
特別試驗制度로 大學本科에 編入
 4. 대학 본과 제1학년은
  (가) 現行 전문학교 1945년도 제2학년 수료 예정자로서 시험에 의하여 편입케 할 수 있음.
  (나) 現行 전문학교 1945년 제1학년 수료 예정자로와 現行 중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로서 특별 시험제도에 의하여 모집할 수 있음.
 5. 대학 본과 제2학년은 現行 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졸업 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시험에 의하여 편입케 할 수 있음. 단, 右記 본과 제2학년의 설치 여부는 각자의 학교에 일임하기로 함.
 6. 1946년도 전문부 제1학년 신입학자는 동 전문부 제2학년을 경과한 후에 전문부 졸업 희망자는 제3학년에 진급하고 대학진학 희망자는 대학본과 제1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편입할 수 있음.
 7. 1946년도 대학에 附置되는 중등학교 고등과 제1학년 신입학자는 익년도에 제3학년을 경과한 후 대학 본과 제1학년에 진학하기로 함.
 8. 신 대학령에 의한 學士의 학위는 대학본과 4개년에 ○하는 총 학점을 취득한 자가 아니면 此를 수여함을 不得함.
中等校 入試- 두 곳 다 볼 수 있다.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관하여 문교부장 통첩으로서 발표된 조목 중 도의적 견지에서 兩期 校에 이 중 합격됨을 발견하는 시에는 양교에 모두 합격을 취소키로 된 것을 삭제하고 제1기 합격자도 제2기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두 학교에 다 합격된 때는 임의로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 1946년 6월 9일 <조선인민보> 專門大學 入試에 臨時措置- 대학에 전문부 설치

@실제날짜:460606

고대하던 전문대학 입학시험에 대한 임시조치는 지난 3일 결정 6일 드디어 각 학교장에 대하여 통첩을 발하였다. 금반 특색은 (1) 대학으로 승격된 각 학교에는 전문부 또는 고급중등 2-3학년을 설치한다. 희망에 따라서는 병치할 수도 있다. (2) 특별시험제도의 설치 (3) 4년제 중학교 신졸업생은 원칙상 전문부 1학년 또는 고급중학 2년에 편입하나 특별시험 합격자는 대학 1학년에도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4) 경성대학, 새로 승격되는 의과대학에 관해서는 각각 따로 임시조치가 제정된 것 등이다.
  • 1946년 6월 9일 <한성일보> 고등교육제도 임시조치안- 전문,대학 실천 방안 결정
문교부에서는 각종 전문대학의 제반시설관계와 그 실제 운영상의 복잡성에 비추어서 종개의 처치 요항을 기초로 임시 처치인 구체적 실천 방책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文敎部發表
 一. 현행 일반 국립학교
  현행 일반 국립전문학교로서 신제도의 대학으로 승격함에 際하여는 종래의 전문학교는 차를 동 대학의 전문부로 개편함
   1. 1946년도 신입생 모집에 대한 임시조치로서는 각자의 학교 실정에 鑑하여 전문부만을 혹은 최종 2개학년의 중학교 고등과만을 혹은 양자를 동시에 설치할 수 있음
    단 (가) 대학에 부치되는 전문부의 신입생모집은 1946년도에 한하여 차를 行하기로 함 (나) 신입생 모집의 대상은 현행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자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시험 합격자 又는 此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유하다고 인정된 자로 함
   2. 1945년도 현행 전문학교 제1학년 수료예정자는 동 대학에 부치되는 전문부 제2학년에 진급함을 원칙으로 함. 단 右 수료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 희망자는 특별시험 제도에 의한 대학본과 제1학년 모집에 응모할 수 있음.
   3. 同右 제2학년 修了 예정자로서 전문부 졸업희망자는 동 전문부 제3학년에 진급함을 원칙으로 함
    단 대학에 진학희망자는 시험에 의하여 대학 본과 제1학년에 편입할 수 있음
   4. 대학 본과 제1학년은
    (가) 現行전문학교 1945년도 제 2학년 수료예정자로서 시험에 의하여 편입케 할 수 있음 (나) 現行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수료예정자와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로서 특별시험 제도에 의하여 모집할 수 있음
   5. 대학 본과 제2학년은 現行 전문학교 1945년도 제3학년 졸업예정자로서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시험에 의하여 편입케 할 수 있음
    단 우기 본과 제2학년의 설치 여부는 각자의 학교에 일임하기로 함
   6. 1946년도 전문부 제1학년 신입학자는 동 전문부 제2학년을 경과한 후에 전문부 졸업희망자는 동 제3학년에 진급하고 대학 진학희망자는 대학 본과 제1학년에 시험에 의하여 편입할 수 있음
   7. 1946년도 대학에 부치되는 중등학교 고등과 제2학년 신입학자는 익년도 동 제3학년을 경과한 후 대학 본과 제1학년에 진학하기로 함
   8. 新大學令에 의한 학사의 학위는 대학 본과 4개년에 달하는 총학점을 수득한 자가 아니면 차를 수여함을 부득함
 二. 現行 일반 국립의학전문학교
   1. 現行 일반 국립의학전문학교로서 신제도의 의과대학으로 승격함에 際하여는
    (가) 1946년도 의과대학 입학자격자는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자 又는 1945년도 졸업예정자로 (나) 1947년도 동 대학 입학자격자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등과의 1946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로 (다) 1948년도 동 대학 입학자격자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등과의 1947년도 제3학년 졸업예정자로서 각각 충당케 함
   2. (가) 現行 국립일반의학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수료예정자는 신제도에 의한 의과대학 제2학년에 (나) 동 1945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는 의과대학 제3학년에 (다) 동 1945년도 제3학년 수료예정자는 의과대학 제4학년에 각각 시험에 의하여 편입하기로 함
   3. 신제도의 의과대학 4개년간의 의학연구 혹은 現行 의학전문학교와 신제도의 의과대학에서의 수학기간을 통산하여 4개년간의 계속적인 의학연구에 해당한 전학점을 수득한 자에게는 의학사의 학위를 수여하기로 함
 三. 現行 京城大學
   1. 現行 경성대학 예과는 現行 경성대학의 기설부속기관인만큼 차를 종래와 如히 존속케 하는 동시에 1946년도 신입학 자격자는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 전문학교입학자검정시험합격자 又는 차와 동등이상의 학력이 有하다고 인정된 자로서 함
    (가) 동 예과의 제1학년 학과과정은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등과 제2학년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을 요함 (나) 동 예과의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로써 최후로 함
   2. 신제도에 의한 1946년도경성대학 각 학부 제1학년입학자격자는
    (가) 現行 경성대학 예과 1946년도 제2학년 수료예정자 (나) 동우 1945년도 제1학년 수료예정자로서 특별시험에 합격된 자 (다)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예정자로서 특별시험에 합격된 자 (라) 現行 각종 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又는 제2학년 수료예정자로서 특별시험에 합격한 자로 함
   3.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각 학부의 1946년도 제2, 제3학년은 現行 경성대학 본과 제1, 2, 3학년생으로써 이를 충당케 함
   4. 現行 경성대학 본과의 상기 과도기적 현상은 1948년에 졸업하는 시까지 계속하게 함
   5. 現行 경성대학의 의학부를 제외한 각 학부재학생은 신제도의 동학 제3학년만으로써 차를 졸업할 수 있음
   6.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학사의 학위는 신제도 대학 4개년은 물론 혹은 現行제도와 신제도와의 통산에 의한 4개년에 해당한 전 학과를 수득한 자에 한하여 차를 수여하기로 함
  • 1946년 6월 10일 <동아일보> 高等敎育制度의 臨時措置

@실제날짜:460609

二. 現行 一般國立 醫專
 1. 現行 일반 국립 의학전문학교로서 신제도의 醫科大學으로 승격함에 관하여는
  (가) 1946년도 의과대학 입학 자격자는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자 又는 1945년도 졸업 예정자로
  (나) 1947년 동 대학입학 자격자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급과의 1946년도 제2학년 수료 예정자로
  (다) 1948년도 동 대학 입학 자격자는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등과의 1947년도 제3학년 졸업 예정자로서 각각 충당케 함.
 2. (가) 現行 국립 일반 의학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수료 예정자는 신제도에 의한 의과대학 제2학년에
  (나) 동 1945년도 제2학년 수료 예정자는 의과대학 제3학년에
  (다) 동 1945년도 제3학년 수료 예정자는 의과대학 제4학년에 각각 시험에 의하여 편입하기로 함.
 3. 신제도의 의과대학 4개년간의 의학 연구 혹은 現行 의학전문학교와 신제도의 의과대학에서의 수학기간을 通算하여 4개년간의 계속적 의학연구에 해당한 전학점을 修得한 자에게는 醫學士의 학위를 수여하기로 함.
  京大 豫科는 今年만 募集
三. 現行 京城大學
 1. 現行 경성대학예과는 現行 경성대학의 기설 부속 기관인 만큼 此를 종래와 如히 존속케하는 동시에 1946년도 신입학 자격자는 現行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시험 합격자, 又는 此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有하다고 인정된 자로써 함.
  (가) 동 예과의 제1학년 學課科程은 신제도에 의한 중등학교 고등과 제2학년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을 요함.
  (나) 동 예과의 신입생 모집은 1946년도로써 최후로 함.
 2. 신제도에 의한 1946년도 경성대학 각 학부 제1학년 입학 자격자는
  (가) 現行 경성대학예과 1946년도 제2학년 수료 예정자
  (나) 동 右1945년도 제1학년 수료 예정자로써 특별시험에 합격한 자.
  (다) 現行 중등학교 제4학년 졸업 又는 1945년도 제4학년 졸업 예정자로써 특별시험에 합격한 자.
  (라) 現行 각종 전문학교 1945년도 제1학년 又는 제2학년 수료 예정자로써 특별시험에 합격한 자로 함.
 3.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각 학부의 1946년도 제2,3,4학년은 現行 경성대학 본과 제 1,2,3 학년생으로써 각각 此에 충당함.
 4. 現行 경성대학 본과의 상기 과도기적 현상은 1948년도까지, 즉 현재의 동 대학 본과 1945년도 제1학년생이 졸업하는 時까지 계속하게 함.
  法文, 理工 學部는 卒業期間 3年으로
 5. 現行 경성대학의 의학부를 제외한 각 학부 현 재학생은 신제도의 同學 제3학년만으로써 此를 졸업할 수 있음.
 6. 신제도에 의한 경성대학 학사의 학위는 신제도 대학 4개년은 물론 혹은 現行 제도와 신제도의 통산에 의한 4개년에 해당한 전학점을 修得한 자에 한하여 此를 수여하기로 함.
  私立 專門도 臨時措處에 準據- 京大 學部生 募集엔 特別試驗 實施
 ▲ 附記
  現行 私立 각종 전문학교로써 신제도에 의한 대학에 승격코자 하는 학교는 상기 現行 국립 각종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임시조처에 준거하여 실시함을 요망함. 
  • 1946년 6월 10일 <한성일보> 9월부터 국민개학- 넓어진 남녀중학의 문
성장하는 학원, 경기도내의 승, 신설 계획 내용. 오는 9월 1일의 신학기를 앞두고 초등교육은 국민개학을 목표로 남조선 3천9백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의무교육제 실시 준비 중이며 중등교육은 전 중등학교를 초급중학과 고급중학으로 개편하게 되는데 이 획기적 처치에 따른 경기도내각 중등학교의 고급중학 설치 급 동 설치 계획과 공사립 신설 계획은 다음과 같다.
고급중학학급설치 급 증설 계획
(상은 1년 하는 2년, 괄호내 장래증설계획)
 중학
  ▲京畿 4(4) 2(4)  ▲景福 4(4) 2(4)  ▲京東 4(4) 2(2)  ▲京城 4(4)
  ▲仁川 1(1) (1)  ▲開城 2(2) 2(2)  ▲培材 3  ▲中央 3 2  ▲敬新 2 
  ▲中東 2  ▲松都 3 1  ▲普成 2 2  ▲徽文 3  ▲城南 1 1  ▲東星 2
 高女
  ▲京畿 4(4) 2(3)  ▲舞鶴 3(3) 2(2)  ▲第三 1(1)  ▲仁川 1(1) 1(1)
  ▲水原 1(1) 1  ▲開城 2(2) 1(1)  ▲明德 2  ▲東明 1 1  ▲淑明 3
  ▲培花 2  ▲豊文 2 1  ▲祥明 1  ▲中央 1  ▲進明 2  ▲梨花 4 4  ▲同德 2 1  ▲德成 3
 농업
  ▲京城 3(2) 3(2)  ▲水原 1(1)  ▲安城 2(1) 1(1)  ▲汶山 2(1) 1(1)
  ▲議政府 2(1)  ▲延安 1(1) 1(1)
 공업
  ▲京城 5(3) 3(2)  ▲京畿 3(3) 1(2)  ▲仁川 3(2) (1)
 상업
  ▲京畿 3(3) 1(2)  ▲仁川2(2) 2(1)  ▲開城 2(2) 2  ▲德壽 2(2) 2
 공립중학 신설예정
  (숫자 상은 학급, 하는 수용생도)
  ▲고급중학 1년 53  2854, 2년 37  2040, 계 90  4894
  ▲인문중학(6교) 1년 18  1000, 2년 13  690, 계 31  1690
  ▲高女(6교) 1년 12  607, 2년 8  409,  계 20  1016
  ▲농업(9교) 1년 7  372, 2년 6  273, 계 13  645
  ▲공업(3교) 1년 8  451, 2년 5  341, 계 13  792
  ▲상업(4교) 1년 7  378, 2년 5  326, 계 12  704
  ▲여자실업(3교) 1년 1  45
 신설사립중학교
  ▲建國技術(西大門町 二丁目 89)  ▲朝鮮畜産(高陽郡 恩平面 水色里)
  ▲文星女商(阿峴町 304)  ▲光東中學(楊州郡 ○接面 富坪里)
  ▲泰成中學(龍仁郡 龍仁面 南里)
 승격전환한 중학교
  ▲大同商業(舊大東女子商業)  ▲詳明高女(구詳明女子商業)
  ▲漢城中學(구漢城工業)  ▲中東中學(구中東學校)
  ▲東明高女(구向上女子商業)  ▲誠信高女(구誠信女子商業)
  ▲德成高女(구德成女子實業)  ▲中央高女(구中央女子商業)
  ▲光新商業(구光新工業)  ▲漢城高女(구女子技○)
  ▲輔仁商業(구輔仁女子商業)  ▲東星中學(구東星女子商業)
  ▲大新商業(구大新農業專修급 동商業專修)
  ▲崇文商業(구京城商業實○)  ▲城東工業(구京城工業專修)
  ▲水原中學(구水原商業專修)
  • 1946년 6월 10일 <한성일보> 淑專재건학생동맹 성명- 학원의 불의를 탄핵

@실제날짜:460603

淑專에서는 루보한 바와 같이 분규를 거듭하고 있어서 드디어 경찰 당국에서 손을 뻗쳐 그 진상을 규명하고 있는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궐기한 淑專再建學生同盟에서는 지난 3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내었다.
 성명서
  8.15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로 10朔여의 장구한 시일을 두고 우리 학생들을 괴롭히우며 불타는 향학열과 진리를 동경하는 아름다운 꿈을 잔혹하게도 유린하고 오히려 집요하게 도전하여 기어이 흉계를 달성하려는 악당을 철저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 학생들은 정의의 투쟁을 선언하는 바이다. 일찍이 숙전의 자칭 교수라고 하는 ○○○○○○○○○○○○○○○○○○그리고 그들의 주구가 되어 전위적 역할을 하는 기개의 학생의 결탁 음모로 형언할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을 때 우리 학생들은 유지를 규합하여 숙전재건학생동맹을 결성하였다. 당시의 숙전 사정에 비출 때는 너무도 큰 모험이었다.
  우리가 진격하면 할수록 적은 더욱 ○동하고 음모의 선이 한층더 굵어진다. 그들은 우리의 제일선을 붕괴할 심산으로 위험한 반동 전술을 썼다. 그것은 우리 진영에서 중견학생 2인을 퇴학 처분에 1인을 무기정학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목적의 과반을 달성하였다. 우리의 지하 운동은 일단 종말을 고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깃발을 표면에 걸고 호호탕탕한 대도로 투쟁의 선진을 옮기었다. 즉 지난 29일을 기하여 악당의 수모자인 자칭교수 李王實을 끌어내어 전교생의 면면에 그 추악한 과거를 폭로시키고 공산당원이라는 것과 그 사심을 포장한 음험한 가면을 벗기어 놓고 6월 1일에 다시 즉시 퇴임을 육박하였다. 그는 마침내 굴복하였다. 정의의 鐵樹秋霜같은 명령에 그는 힘없이 "나가겠소"라는 최후의 고백을 토한 것이다. 보라 정의와 진리의 심판대 아래 비굴하게 머리숙이는 자의 추악한 자태를! 그자가 가장 양심적인 체하고 가장 진보적인 체하여 李承晩 박사를 "개승만"이라고 모욕하며 공산주의를 고취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별별 폭언을 날조하여 신성한 칠판아래서 외친 것이다. 그자는 그렇게 하는 것을 "칠판의 자유"라고 불러왔다. 모두가 "교수의 자격"으로 행해진 것이다. 교수라는 허울좋은 간판으로 "칠판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소위 강의는 숫채 번역물의 낭독 그것이고 시간의 태반을 정치 모략과 공산주의 선전에 소비하는 것이다. 신탁통치 지지의 변이며 xx國備護의 변으로 종시 일임한 것이다.
  이 사이비 교육자와 결탁한 자칭 교수들-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는 그자들의 行狀은 어떤가? 소위 윤리 선생이란 方모와 자칭 가사 교수 李모와의 불의의 관계며 일본 동경에서 "短氣刑事"로 유명한 金모와 결혼하여 그의 스파이가 되어 수많은 조선 학생을 울린 李모 교수며 소위 수학 교수라는 자가 3=5를 못풀고 자기가 풀어놓은 문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任모(그 주제에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학생들더러 배우기 싫으면 숙전에서 나가라고 호령하는 것이다) 그자들이 뻔뻔스럽게 "共産大學"을 꿈꾸며 감언이설로 학생을 꾀어서 동맹휴학을 강행한 것이다. 그런 민족반역자, 친일파, 非倫背德者, 賣笑婦의 동류- 그자들을 교수라고 사사하기에 우리는 너무도 양심적이오 도덕적인 것이라기보다 더 우리의 향학의 념은 그런 엉터리 교수들을 용인하기에는 너무도 치열한 것이다. 일언으로 要約하면 오늘의 숙전은 "이름만 전문학교"지 실상은 "유물론실천여학교"인 것이다. 그렇다. 숙전의 윤리학은 선생과 선생이 추악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생도까지 삼각관계에 일 분자가 되는 교육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非行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 여성의 길을 모독하는 악당들이여! 우리는 생명을 걸고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악당들을 완전이 驅逐하는 날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단기 4279년 6월 3일    숙전재건학생동맹 일동
  • 1946년 6월 11일 <조선인민보> 文盲退治에 學生奉仕隊- 부서 결정하고 活躍 준비

@실제날짜:460604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문맹퇴치 하계 학생봉사대 준비위원회 결성회는 지난 4일 오후 1시부터 경성사범대학 미술교실에서 시내 남여 중등, 전문, 대학 재학생 대표 100여 명 참석하에 개최하였는데 이날 조직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사대 노영규, 부위원장 經專 정현택, 여사 주정일, 총무부: 世專, 여의전, 약전, 국학, 혜전, 정전, 사대, 法專, 기획부: 연전, 경대, 세전, 선전부: 보전, 대예, 치전, 교섭부: 工專, 鑛專, 이대, 치전, 동원부: 보전, 혜전, 工專, 여사
  • 1946년 6월 12일 <동아일보> 서울대학 양교수 퇴진의 이유- 러-취장관 언명

@실제날짜:460611

러-취 군정장관은 11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서울대학 양교수의 퇴진에 대한 이유를 비롯하여 식량대책 등 당면한 사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서울대학 양교수의 퇴진에 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상록 씨는 서울대학의 공금을 권한이 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면직을 당하였는데 도교수 말에 의하면 서울대학 자치위원회에서 그 공금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문교부에서는 이 공금 불법 사용으로서 도교수를 처분케 되었는데 서울대학은 그 금액을 다시 찾고 도교수를 파면시킨 것이다. 백남운교수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써 자원하여 사임하였다. 첫째 서울대학에서는 법문학부를 법학부, 문학부로 나누자는 계획이 실패하였다. 둘째 문교부에서는 교수자치 문제를 거부하였다. 세째 동 교수는 어떤 정당에 직무를 맡아 보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
  • 1946년 6월 12일 <동아일보> 中學校長도 再敎育 實施

@실제날짜:460611

과거의 그릇된 교육 정신을 일소하고 참다운 민주 교육 이념을 과학화하여 동교육의 철저를 기하기 위하여 11일 상오 9시부터 시내 경기중학 강당에서 도내 각 중등학교 교장 교두강습회를 시작하였다. 이날 兪 문교부장, 경기도이지사 참여하에 150여 명 청강생과 더불어 식을 간단히 마치고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豊文高女와 경복중학의 교수 상황을 실지로 견학하고 오후에 들어가서 경기중학 강당에서 신교육의 이념, 과학의 진흥, 체육에 관한 교육 등 여러 가지 연구 강연의 발표로 제1일을 끝마쳤다.
  • 1946년 6월 13일 <독립신보> 學園에 警察 干涉- 가급적 안하겠다고 장총장 언명
최근 학원에 불사상가 속출하여 학원내에서 마땅이 해결할 문제라도 경찰에서 검거 조사하는 사건이 많아 건설기에 있는 학원에 암영을 둔 바 크거니와 이에 대하여 제일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원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문교부에서 해결하도록 할 것이며 집회, 교내 대회 같은 것은 허가가 요하나 경찰에 간섭은 최소한도로 그칠 것이며 말단 경찰에 명령하야 금후에 간섭이 없도록 하겠다.
  • 1946년 6월 13일 <조선인민보> 警察은 學園에 不干涉- 장부장 출입기자단에 언명
학생들의 집합·행위는 절대 자유.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해독이 될 뿐만 아니라 감수성이 많은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한데 비추어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씨는 경찰의 절대 불간섭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찰이 학원 문제에 간섭하여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추악한 일제 경찰도 학원 간섭은 의식적으로 회피하여 왔는데 하물며 조선 경찰에서 그러한 일을 할 리가 없다. 방금 항간에서 그러한 비난이 있는 모양이니 학원 내부에서 어떠한 집회 혹은 행위를 하든지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취임 이래의 나의 결의를 재차 강조하여 두며 이후 그러한 불상사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 1946년 6월 13일 <청해> 學園에 警察 干섭은 不當- 장경찰부장 기자단에 언명

@실제날짜:460612

요즈음 학원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학교 문제는 경찰의 간섭으로 많은 불상사를 발생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장경찰부장은 12일 출석기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최근 학원내에 여러 가지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학원내의 문제는 문교 당국에 일임하고 부득이한 사태가 아니면 경찰은 절대로 간섭치 않겠다.
  • 1946년 6월 14일 <독립신보> 都敎授 罷免을 反對- 경대 이공학부 학생대회서 결의

@실제날짜:460611

학계에 파문을 던지고 있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도상록 교수의 파면 문제 등 기타를 해결하기 위한 동대학 이공학부 학생대회는 11일 오전 11시 부터 동대학 법문학부내 이공학부 강의실에서 100여 명의 학생이 출석한 가운데 열려 도교수 파면 문제를 비롯해서 미군이 현재 쓰고 있는 이공학부 교사의 반환, 출판물 검열 문제 등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만장 일치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는 동시에 교섭 위원으로 金秉九 씨외 13인을 선정하고 동 교섭위원으로 하여금 동 대학 총장과 및 학무당국을 방문케 하여 결의를 관철토록 교섭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一. 도상록교수 파면을 절대 반대하고 그 복직을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 
一. 교사 반환을 강경히 요구할 것 
一. 광고 출판물 검열제를 절대 반대할 것
  • 1946년 6월 14일 <독립신보> 未久에 世界 水準 到達- 朝鮮 敎育 現狀에 兪文敎部長 談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조선 교육의 현상에 대하여 가까운 장래에 조선 교육 수준은 세계적으로 飛躍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의 교육 제도도 불원한 장래에는 미국의 학원 제도와 비견할 만한 수준에 달할 것이다. 현재 남조선 6 전문대학의 수학 년학은 3년간인데 1년을 연장시켜 학위 수여 제도를 구체화하는 신계획을 실시 중이다. 초등학교제도는 종전과 같으나 4년제 중등학교는 1년 연장시켜 5년제로 하였는데 후일 또 연장시킬 것이다. 경성대학 예과는 장차 폐쇄할 것이나 금년으로 한하여 신입생을 모집한다.
  • 1946년 6월 14일 <동아일보> 敎育界 一大 盛事- 카도릭大學, 藥學大學 期成
카도릭대학에 盧씨 千五百萬 提供
해방 후 이땅에 진정한 평화의 문화 수입에 이바지 하고자 시내 천주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복안을 가지고 오던 바 경북출신 젊은 실업가 盧陰達(32) 씨로부터 영등포의 30만평토지 시가 1천 3백만평의 사재를 희사하여 왔으므로 이를 기본 재단으로하여 9일 하오 5시부터 동교 사무소에서 노(盧基南)주교를 비롯하여 유지 다수 참석하에 카도릭종합대학 창립기성회를 조직하였는데 동 대학 교수진은 멀리 미국으로부터 예수회를 초빙할 예정이라 한다.
藥學大學으로- 기성회를 조직
藥學專門에 새로운 서광
사립학교로서 조선 藥學의 과학적 연구에 이바지하여 온 藥學專問도 신교육제도에 의하여 9월부터 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어 이번에 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동 기성회는 이사장에 신동우, 부이사장에 張一星, 金一泳 제씨이고 都逢燮, 沈學鎭 씨 등 제교수의 노력으로 명실이 상부한 대학이 되게 되었다.
  • 1946년 6월 14일 <동아일보> 聾啞들에 福音- 4년제 교육을 6년제로 실시
귀먹어리와 벙어리인 아동들에게도 일반 국민 아동과 같이 6년제의 교육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과거에는 10세이상 20세까지의 아동만이 입학하여 그것도 3년간에 기초 교육을 받게 한 것을 이번에는 6세부터 20세까지의 아동이 국민학교의 6년제와 동등한 교육을 받게 되어 방금 국립농아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교육방법을 실시하고 있다 한다.
  • 1946년 6월 14일 <조선인민보> 敎授없는 學園, 淑專의 近聞- 두 가지 고소는 전연 무근
누명을 쓸 하등의 이유도 없다. 임교장 배척 사건, 일부 학생의 교수 구타 사건 등등으로 세목을 끌어 오던 숙전은 정열모 씨 이하 수명 교수가 경찰에 검거되어 교수없는 학원에 등교하는 학생들은 영문모르고 방황하고 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아 13일 오전 11시 기자단은 어머니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청파정 동교를 방문한 바 있었는데 동교 유지회 상임간사로 있는 김홍범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펴하고 수일 내로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고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상식으로는 좀 판단하기 어려운 일부 학생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었는데 교수들에게 하등 그러한 죄가 없는 이상 불일내로 원만히 해결될 줄 믿습니다. 실은 재건학생동맹 학생들이 고소를 두 가지로 한 모양인 데 하나는 군정법령에 저촉되는 언사를 하였다는 것과 학교로 나온 쌀을 횡령하였다는 것인 데 전자에 대하여서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질의하여 본 결과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대답이었고 쌀문제에 대하여서는 내가 상세히 알고 있지만 전혀 그러한 누명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昨 장경찰 부장도 방문하여 그 두 가지 고소가 전혀 무근하다는 것을 해명하였고 내일 용산서장도 만나러 가려고 합니다만 2-3일 내로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재건학생동맹을 낸 성명서가 오자 하나 없는 명문인데 학생들이 쓴 것이라고 하면 숙전 학생의 실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배후에 무슨 세력이 있느냐구요 그 유무도 차차 알게 되겠지요.
  • 1946년 6월 14일 <조선인민보> 都敎授 罷免에 反對- 경대 이공학부 학생들 궐기

@실제날짜:460611

도교수 파면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경대 이공학부에서는 지난 11일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현안의 교사 반환건과 아울러 학원 자치의 근본 문제라 할 학부내의 언론자유를 부르짓고 만장 일치로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한다.
1. 도상록 교수의 파면을 절대 반대하고 그 복직을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
1. 교사 반환을 강경히 요구할 것.
1. 광고 출판물 검열제를 절대 반대할 것.
그리고 이공학부 학생들은 이상 결의 사항의 실천을 위하여 집행 위원을 선출하고 전번 대회에서 결의하였던 이부장 유임과 대학 자치를 위한 교수자치제 확립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첨부하여 문제 해결의 강력한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한다.
  • 1946년 6월 14일 <조선인민보> 서울大學 豫科를 廢止- 문교부장 발표
조선의 교육 제도도 점진적으로 미국식으로 개편되고 있는 데 문교부장 유억겸 씨 발표에 의하면 남조선에 있는 26전문대학 수업 연한 3년을 1년 연장하여 학위 수여를 구체화 시킬 것이며 또 4년제 중등학교를 1년 연장하여 5년제로 한 것을 다시 더 연장시킬 것이고 대학 豫科를 폐지하게 될 터인데 경성대학 豫科는 이에 따라 재학생만 수업시키고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으리라 한다.
  • 1946년 6월 14일 <조선인민보> 鄭敎授 等 釋放토록 命令- 장경찰부장 언명
경찰은 학원 문제에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언명한 장경찰부장은 숙전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검거된 정열모 씨 외 3명의 교수는 학원 문제와는 별개로 미곡 기타 일군 물자 소비에 관련된 것이다. 대강 취조는 일단락 되었으므로 일건 서류를 제출케 하고 전부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 1946년 6월 14일 <청해> 反動輩의 策動에 사로잡힌 철없는 女學生 盲動
숙전 불상사건의 이모저모. 여학생들이 작당하여 교수에게 욕설과 구타로 폭행을 한 가경할 사실이 발생하여 또 다시 사회의 파문을 던지고 있는 숙명여전에서는 지난 4월부터 임숙재 씨 교장 취임 거부 문제를 중심으로 학원의 민주화를 가져오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어 왔는데 반동배들의 교사와 책동을 받은 오세임, 김재순을 중심으로 한 불과 17명 밖에 안되는 이른바 숙전 재건 학생동맹이란 단체가 절대 다수의 학도가 굳게 단결하고 학원민주화에 가장 용감히 싸워온 학회에 반기를 들고 학원의 민주화를 막기 위한 갖은 ○○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난 ○○ 양일 동안 이 철모르는 여학생 오세임, 김재순 등은 進萬○인 교수 이삼실, 임창순 배격의 삐라를 살포하고 흑판에다가 개인공격문을 쓴 사실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학교 당국에서는 이상 2명을 무기 정학에 처분하여 그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재건동맹에 가입하고 있는 여학생들은 29일 이삼실 교수에게 달려들어 갖은 욕설과 폭행을 가하였다. 특히 김재순 학생은 이삼실 교수의 넥타이를 쥐고 너와 내가 죽어야 숙전이 된다고 말하면서 빰을 때리는 등 폭행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김재순 학생은 드디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6월 2일 김재순 외 수명의 반동 학생이 학생회의장 이수○ 학생을 명치정 예배당으로 끌고 가서 무조건 구타하고 감금까지 당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일제 대항을 하지 않고 폭행이 끝난 후 김재순에게 무슨 이유인가를 질문하는 동시에 책임을 물었으나 상대자는 일언반구의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 1946년 6월 15일 <독립신보> 水專 四 敎授 停職 處分- 재학생들 동맹 휴학코 복직 요구
부산수전 교수회에서는 동 수전의 종합대학에의 편입을 반대하여 문교 당국에 반대 진정을 해오던 중 이 반대 운동에 가담한 수산학과의 유경열 이방규, 양재목, 김병철, 최신호 등의 4교수에게 돌연 지난 1일부로 정직 처분이 내리였는데 이 처사는 비민주적이라 하여 동교 학생 전원이 궐기 하여 지난 10일 동교 기숙사에서 120여 명 학생이 출석한 가운데 학생 자치대회를 열고 대책을 협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는 동시에 11일 부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학생자치회 대표 김갑연, 오세훈, 김계오 삼 군은 13일 오후 3시경 군정청에 (유)문교장을 방문하고 결의서와 성명서를 제출하고 그 결의의 관철을 요망하였다 한다. 
一. 종합대학 설치는 불합리하므로 그 문제는 취소를 요청함 
一. 수산 학과 담당 교수에 관한 처단은 수전의 멸망을 의미하며 따라서 조선수전을 부인함이니 그 근본 원인인 종합대학 설치를 취소하는 동시에 수산학과 담당 교수에 대한 처단은 비민주주의적이므로 취소 복교시킬 것. 
一. 이상 결의문에 문교부 당국의 해결이 있을 때까지 수전생 일동은 동맹 휴교를 단행함.
  • 1946년 6월 15일 <동아일보> 만들지 못하는 地歷 敎科書
東海냐? 日本海냐? 見解다른지 於焉 半年
국민학교와 중등학교의 지리, 역사, 공민 교육은 어찌되는 것인가. 해방 후 10개월이나 된 이제 각 중학교는 새로운 기분을 가지고 마음놓고 우리말로써 배움의 길을 닦고 있다. 한편 문교부 편수국에서는 국어 교본을 필두로 각종 교과서를 편찬 중에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 인쇄 사정 등 사정도 많았지만 그 수용량은 너무나 貧弱하고 겨우 국민학교용 국어와 공민교과서뿐으로 지방학교 아동이나 생도들의 공부 지장이 말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이뿐더러 요즈음 문교부 미군측에서는 지리, 역사, 공민을 사회과학이란 이름아래서 한 단위의 교과교목으로 하자는 안과 새 교과 편찬위원들과의 의견상 상위로 공부를 시작한 지 어언 반개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교과요목을 정하지 못하고 교과서 편찬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그리고 東海를 日本海로 하라는 등 용어 문제와 자주적인 정신에서 본 조선 지리를 확립함에 있어서 일부의 의견 상위로서 지리 교과서가 선뜻 못나고 있는 것이다.
敎材는 自主的으로- 학생들의 공부에 큰 支障
李 編修官 談
이에 대하여 문교부 편수국 지리편수관 李鳳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수요목을 정하지 못하여 교과서 편찬에 지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것은 조선의 실정과 미군인들과의 견해의 차이로서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미구에 해결될 문제일줄 안다. 그러나 교과요목을 못 정했다고 각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으로 이에 대한 통일된 임시 정책을 곧 세워야 할 것이다. 기본 방침이 없기 때문에 지방학교는 학교마다 교재를 만들고 경기도 같은 데에서는 6백여만 원이나 들여 교재를 편하하고 있으나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동해라고 한다든가 조선을 대륙에의 陸橋的 존재라고 혹은 남방진출의 한 고지역에 불과한 듯이 외국지리서 교육받은 것은 우리 자주정신에 맞지 않는 그릇된 지리관인만큼 단연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 若干 미군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나 잘 양해될 줄 믿고 있다.
  • 1946년 6월 15일 <동아일보> 釜山 水專 盟休- 五 敎授에 停職 處分

@실제날짜:460611

종합대학 반대로 물의가 분분한 부산수산전문학교 교수 金炳哲, 李方圭, 梁在穆, 柳昊烈, 崔외 5씨는 6월 1일 돌연 정직처분을 당하였는데 이밖에 梁, 全, 孟 3교수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동교 학생자치회에서는 이날 학생회를 열고 종합대학의 불합리를 지적하며 전기 교수에 대한 처분의 취소 등을 내걸고 11일부터 동맹 휴학을 개시하였다.
  • 1946년 6월 15일 <동아일보> 優秀 學生 美國留學 은애- 中央女專 中央大學으로 昇格
시내 명수대 중앙여자전문학교는 금년에 대학령 실시를 계기로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하여 동교장 任永信 씨 활동으로 미국에 있는 재단과 국내에 있는 재단을 합하여 장차 삼천만 원 예정으로 재단법인을 만들어 조선에 우수한 여자대학원을 계획 중이라 한다.
위선 전문부 문과 50명, 보육과 50명, 경제과 50명 3과를 모집하게 되었으며 학부에는 문학부에 문학과 보육과, 경제학부에는 경제학과 상학과를 설치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장학비로 미국에 유학까지 보낼 예정이라 한다.
  • 1946년 6월 15일 <조선인민보> 三敎授는 아직 拘束 중- 숙전 학생 대회서 대책을 강구
어제 보도한 바와 같이 숙전 문제는 동교 유지회 상임간사 김교수가 언명한 바와 같이 구금 중에 있는 교수들에게 하등 죄가 없음을 경찰 당국에 해명하였다 하며 불원간 석방이 예상되는 바 13일 오후에는 정열모, 임창순, 이정원 제교수는 석방되고 이삼실, 김충선, 박현모 3교수는 아직도 계속 구금 중이라 한다. 이에 동교 학생회에서는 15일 9시 본교 강당에서 학생회를 개최하고 금후 대책을 강구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6년 6월 15일 <조선인민보> 子女들 暴動은 歎息할 일- 민전서 숙전 사건 대책을 요망

@실제날짜:460614

누차 보도한 바 숙전 사건에 대하여 민전 선전부에서는 14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여학생의 신분으로서 선생을 구타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혀 무근한 사실을 날조 모함하여 선생을 경찰의 손에 묶어 놓는 악덕 행위는 실로 사회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패륜 행위이다. 그런데 성명서 기초가 여학생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의심되는 사실로 보아 이러한 ○○의 행위을 감행한 ○○에는 어떠한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 확연하다. 역사를 거스르는 반동 정객들은 순진해야 할 자기의 자녀들인 학생들까지 선동하여 양심적인 교수들을 박해 추방하려 하니 이는 민주 조선의 교육을 더럽히는 악행이니 그대로 묵고 할 수 없는 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교 당국과 학부형과 교수단의 이 불순 책모에 대한 철저한 대책이 요망되는 바이다.
  • 1946년 6월 15일 <한성일보> 大豫 신입생을 모집- 중학4년은 졸업, 진학 자유
중등학교 수업 연한이 현재 4년에서 1년 연장되고 또 다시 연장되며 서울대학 예과에서 금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것이 각 신문에 보도되어서 일반에게 의아한 감을 주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 문교부차장 吳天錫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문교차장 담
 중등학교가 고급중학의 설치로 인해서 현재의 수업 연한 4년이 6년으로 연장되는 것은 사실이나 지금의 4학년 재학생은 자기의 의사에 따라 그대로 졸업할 수도 있고 혹은 고급중학 2학년에 진급할 수도 있다. 또 서울대학 예과에서는 금년에 한해서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되어 있다.
  • 1946년 6월 16일 <독립신보> 敎授要目査定委員會
새 교육 제도에 입각한 초등, 중등학과 과정에 대하여 협의하고자 15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숙명고녀에서 교수요목사정위원회가 개최되어 학과 과정에 대한 토의를 하였다.
  • 1946년 6월 16일 <동아일보> 現 中等校 4年生의 卒業, 進學은 自由
신중학제도에 兪文敎部長이 言明
지난 14일 문교부에서 발표된 새 중등학교 제도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여 해당 학교 당국은 물론 졸업을 앞둔 학도 당사자들로 하여금 갈팡거리게 하였는데 15일 兪億兼문교부장은 문제를 일으킨 오해점에 대하여 거듭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중등학교 4학년생은 금년에 졸업할 수도 있고 또는 신설 제5학년, 6학년에도 진학할 수 있어서 반드시 5학년의 과정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경성대학 예과는 오는 9월에도 신입생을 모집할 것이다. 장래에는 중등학교에서 예과의 과정을 교수하게 될 것이나 당분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1946년 6월 16일 <조선인민보> 그런 先生님들 아냐요- 淑專生들 敎授 釋放 要求

@실제날짜:460615

학생대회 열고 전원이 날인. 임교장 배척, 일부 학생의 교수 구타, 정교수외 수명 교수의 검거 사건으로 사회의 중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숙전 문제는 동교 학생회의 애끓는 수 차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항간의 풍문이 구구하던 차에 학교를 사랑하는 200여 학생의 연명으로 드디어 그 ○○이 알려지게 되어 문교 당국은 물론 일반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즉 동교에서는 지난 15일 오전 9시 아침부터 100여 명 학생이 집합하여(연락 불충분으로 전원 미참가)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학생회의 정당성을 사회에 재차 천명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금후 동교의 방침을 결의하였다.
 1. 피검 교수의 즉시 석방을 요구할 것.
 2. 사회 문화 단체  및 대학, 전문, 중등교에 진상을 보고.
 3. 문교부, 경무부, 러취장관, 동교 이사회에 진정할 것.
그리고 불순 학생들의 무고로 인한 양심적 교수 피검에 대하여서는 학생대회에 참가한 전원이 서명 날인으로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부당성을 규탄하였다. 더욱 전후 석방될 동교 정교수는 석방 익일부터 등교하여 학원에 대한 애착심을 여지없이 나타내고 있는데 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번 사건은 순진한 학생의 본의가 아닌 것을 믿고 싶다. 상부에서 무슨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교수로서 학원을 지킬 의무를 느끼는 바이다.
  • 1946년 6월 16일 <조선인민보> 釜山水專校서 盟休- 문교 당국 조치에 반대

@실제날짜:460612

부산수산전문학교에서는 종합대학 편입을 절대 반대하고 단과대학 설립을 교수, 학생일동이 요망하여 오던 바 금반 돌연 수산학과 담당 5교수에 대하여 등교 중지의 명령이 내려 본교 학생 자치회에서는 문교 당국 조치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일반에게 발표하고 지난 20일 부터 일제히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 종합대학 설치는 불합리하므로 취소를 요망함.
 ▲ 수산학고 담당 교수에 대한 처단은 수산의 멸망이니 즉시 이를 취소 복교 시킬 것.
 ▲ 이상 결의를 문교 당국이 해결할 때까지 동맹 휴학을 단행함.
  • 1946년 6월 16일 <조선인민보> 卒業 進學은 마음대로- 현재 중등 4년생들의 갈 길

@실제날짜:460615

문교부 성명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구 중등학교 제도에 관하여 15일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첫째, 중등학교 제4학년생은 금년에 졸업한 수도 있고 또는 신설될 제5학년 또는 제6학년에도 진학할 수 있으며 반드시 제5학년의 과정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서울대학 豫科는 오는 9월에도 신입생을 모집할 것이다. 장래에는 중등학교에서 豫科의 과목을 교수하게 될 것이나 당분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1946년 6월 16일 <청해> 官廳과 學校는 反動에 加擔할 것인가- 삼척에서 일어난 사건

@실제날짜:460527

대한독립촉성회니 우국동지회니 하는 것이 모두 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파숏 분자 따위의 소굴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또 이런 것이 이승만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으며 민주 진영을 파괴하기 위하여 온갖 야만적인 테로 행동을 감행하는 불량배들의 음모라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삼척에서는 지난 5월 27일 이것들이 외람스럽게도 독립전취대회라는 것을 열었는데 당지의 관공서는 공무를 집어 던지고 이에 참가하기를 직원에게 강요하였고 소학교, 중학교, 여학교에서도 학원을 정지하고 교직원과 생도 전원이 이에 참가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경찰서는 삼척유지 공장에 경관을 파견하여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전부 체포한다고 위협하여 강제로 노동자를 동원시켰다. 가장 공정하여야 할 관청, 경찰, 학교 등이 이러한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악질 도당에 신성한 사명을 망각하고 가담한 반동적 태도에 대하여 삼척 인민의 분노는 대단히 심각하다.
  • 1946년 6월 16일 <청해> 釜山水産專門의 動搖- 교수학생이 결속, 수산교육의 독립을 요구
수산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수산 교육의 중대성이 무조건적으로 요청되는 이때 지방 수계인사의 공명심에 회생되어 한 개의 종합대학 일부분으로 편입되어 수산 교육의 독자적 발전을 저해하려는 것이라고 하여 해당 학교 교수와 학생은 그러한 방침을 절대 반대하였으나 그 불합리한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어 반대하는 교수 5명을 파면함에 이르러 학생은 동맹 휴학을 단행하고 학생대표가 상경하여 문교 당국에 교섭하는 동시에 좌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부산에 종합대학교 설치!
대체로 일 국가의 흥망 성쇠가 그 교육 방침에 좌우되는 바 지대하며 그 방침의 선택에는 再思三省 국가 대계를 건설함에 천추의 유한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반 문교부의 이 조치가 과연 타당할까?
 1. 조선 수산과 그의 교육문제
 (전략) 주위에 수산 개발의 호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생산물의 판로인 광대한 대륙을 배후에 두고 있으니 수산의 기술과 학문을 확장하고 충실히 하여야 될 것은 이미 식자간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의 수산계를 살피면 이 방면에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는 50명에 불과하며 세계 열국에 비하여 아직 원시적 수산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해방의 종소리를 울린지 이미 1개년! 다대한 희망을 품고 조국을 위하여 기쁨의 투쟁을 감하는 이때 수산전문학교가 부하하고있는 책무는 지대지중하며 그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여 충분한 훈련과 기술과 학문적 연구로서 조선 수산의 확고한 건설을 촉성시켜 조선 경제를 좌우하는 중책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지위에 있는 수전을 종합대학교 내에 편입시켜 그 독자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인가. 전조선 수산인 60여만인이 모든 힘을 다하여 수산 교육에 이바지 한다 하여도 십 년이나 걸려야 궤도에 오른다고 하는데 도리어 수산을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인문과의 설치를 위하여 수산 교육을 장해한다면 그야말로 조국의 장래가 우려되며 통탄하여도 천추의 유한을 찾지 못할 것이다.
 1. 문교방침
 고등교육 심사 위원회에서 이미 벌써 교육 방침을 세워 현재의 국가 상태에 있어서 인문과는 전 조선내 7校면 충분한데 2校를 초과하고 있는 상태니 용납지 않기로 결정되고 수산 교육에는 3校를 신설할 작정인데 현재 하나밖에 없는 상태니 2校를 더 신설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문과를 종합대학이라는 가면하에 수산 교육을 망쳐가면서도 신설하자는 것은 기정 방침에 반한 것이며 도저히 용납치 못할 것이다. 더구나 수산 교육에 관한 문제를 수산에 관계없는 지방 인사 수명의 의견으로 결정하지 못할 것이며 조선 수산의 수산 교육인 만큼 전 수산인과 전 교육자의 의견을 종합할 것이다. (후략)
  • 1946년 6월 17일 <독립신보> 今年度 國民校 卒業式- 래28일부터 7월 4일까지
잘있거라 정든 교실아. 육년 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수만 아동들이 사회에 혹은 상급학교에 각각 뛰어 나가는 금년도 국민학교 졸업식은 이달 18일 부터 7월 4일간에 거행하기로 되었는데 학년 종업식은 7월 20일 여름방학은 동 21일 부터 8월 31일 까지 42일간으로 결정되었다.
  • 1946년 6월 17일 <독립신보> 實力 本位로·競爭은 如前- 7월의 각 중등교 입시일자 결정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많은 소년 소녀들은 어린 가슴을 조마 조마 시키고 있는데 경기도 각 男女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다음과 같이 2기에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다. 금번 입시는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자기가 희망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역시 지원자에 대한 학교의 부족으로 상당한 경쟁이 예상된다. 
제1기시험교(7월 6일- 10일)
 남자부 
  ▲ 중학 - 경복, 경동, 양정, 보성, 성남, 동성, 영창, 인천, 개성
  ▲ 실업 - 경성공, 경기공, 경성농, 경기상, 선린상, 인천공, 수원농, 인천상, 개성상 
 여자부 
  ▲ 고녀 - 무학, 숙명, 진명, 성신, 동명, 상명, 명덕, 인천, 수원, 동덕, 배화 
  ▲ 실업 - 경성여상, 인천여상, 문산, 개성, 의정부, 연안, 여주 
제2기시험교(7월 11일 - 15일) 
 남자부 
  ▲ 중학 - 경기, 경성, 배재, 휘문, 중앙, 경신, 한성, 송도 
  ▲ 실업 - 대동상, 덕수상, 광신상, 보인상, 숭문상, 소화공, 조선전공, 강화농 
  ▲ 고녀 - 경기, 제3, 덕성, 중앙, 한성, 풍문, 이화, 개성, 인천소화 
  ▲ 실업 - 문○여상
  • 1946년 6월 18일 <독립신보> 입학기 앞두고 학부형에 경고!, 敎職員 響應하면 엄벌

@실제날짜:460617

장택상부장 단호한 태도 표명. 경기도내 각 남녀 중등학교 입학 시험은 불과 20여일을 앞두고 박두하였는데 지원학교에 제출하는 내신서를 싸고서 학부형과 담임선생 사이에 불미한 행동이 많아 신성한 교육계에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즉 내신서를 실력 이상으로 잘 만들기 위하여 학교 선생을 요릿집 또는 환락장으로 불러내어 향응을 하는 부형이 간혹 있는데 이에 대하여 제1관구 경찰청 청장 장택상 씨는 17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일반의 경고를 환기한 바 있었다. 
일제 시대에는 돈만 있으면 실력을 불문하고 입학이 되는 수가 있었을지 모르나 건설기에 있는 조선의 현상에 비추어 실력있는 남녀를 많이 입학시켜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욱 교육가로서 부형들의 청으로 요릿집 같은 데 출입을 한다든지 금품의 뇌물을 받는다든지 하면 시험기를 앞두고 심히 유감있는 일이다. 금후 이러한 일이 있으면 엄벌을 할 방침이다. 그리고 요정 출입은 금후 철저히 취체할 터이다.
  • 1946년 6월 18일 <동아일보> 다같이 배우자! 읽자!- 成人敎育協會를 組織

@실제날짜:460612

민족적 의식을 향상시키며 7할 이상의 문맹을 상대로 국문을 읽고 쓰게하여 나아가서는 공민으로서의 품격을 높이고자 성인교육 관계 유지들이 지난 12일 군정청 제2회의실에서 성인교육협회 총본부를 조직하였다. 이 협회는 군정청 성인교육국에 사무소를 두고 도·부·군·면·동·리마다 회 또는 분회를 조직하여 순민단체로써 발족하는데 역원 진용은 다음과 같다.
 ▲ 명예회장 兪億兼 ▲ 회장 梁柱三  ▲ 부회장 洪秉璇 鄭廣朝 ▲ 간사 金善琪 金佑秤 李哲源 朴錦 朴順元 薛義植 黃愛德.
  • 1946년 6월 18일 <동아일보> 入試期 앞두고 敎職員의 饗宴, 收賄
張警察部長이 團束을 言明
중등, 전문, 대학의 입학시험기를 앞두고 매년 발호하는 학부형과 학교 교직원 사이의 금품 수뢰사건이라든지 또는 이때가 되면 요리점을 중심으로 갖은 향연이 벌어지고 육저에 아름답지 못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오는 7월 입학시험을 앞두고 학무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경고와 단속을 하고 있거니와 경기도 張경찰부장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학무 당국으로부터 주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학기를 이용하여 학교 교직원들이 부당한 금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부정 사실이 있을 때에는 경찰에서도 엄중히 취체를 하겠다. 일반은 주의하여 주길 바란다.
  • 1946년 6월 18일 <조선인민보> 成人敎育協會 新發足
민족의 7할 이상이나 되는 문맹을 퇴치하고 대○○의 공민적 품격 앙양과 아울러 그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조직된 성인교육협회에서는 문교 당국의 협조를 얻어 민간 단체로서 발족하리라 하는 데 앞으로 부, 군, 면, 동 ○부회를 설치 ○○○○교육, 성인교육, ○○ 다음과 같이 ○○ 명예회장 유억겸 씨, 회장 양주삼 씨, 부회장 홍○성 씨, ○광조, 이사 김선기 씨 외 18명
  • 1946년 6월 18일 <조선인민보> 學園의 反動 分子 肅淸하라- 숙전 문제에 婦總서 담화

@실제날짜:460616

不祥과 유린의 숙전 문제는 동교 학생들의 애끓는 고통과 아울러 사회의 반향이 분분한 바 있었는데 16일 부총에서는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신성한 학원을 풍미하는 반동분자의 숙청과 교육계의 정당색 일소를 요망하였다.
요즈음 숙전에서 벌어진 은사 구타 사건과 허위의 사실로 선생을 무고하여 마침내 구속케한 불상사는 도덕상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하물며 이 불상사에 순진하고 겸손해야 할 여학생들로서 이 파렴치한 짓을 감행케 한 증오할 배후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솔직히 지적하며 학교 당국의 맹성은 물론 학부형과 일반 사회인들의 철저한 항의와 규명을 바라며 문교, 경찰 양 당국에서는 사건의 정당한 처리와 신성한 학원의 풍미하는 반동 분자의 철저한 숙청과 교육계의 정당색 일소를 요망하는 바이다.
  • 1946년 6월 18일 <한성일보> 吳天錫, 崔鉉培 등 3씨에 러장관 감사장

@실제날짜:460617

해방 조선의 신교육 건설 전 분야에 있어 많은 공헌을 남긴 문교부 吳天錫 차장과 교과서편찬에 노력한 崔鉉培 편수국장과 직업교육 건설에 애쓴 裵熙星 실업교육계장은 금번 "러취"장관으로부터 그 공헌에 대하여 표창이 있어 작 17일 오전 9시에 군정장관실에서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 1946년 6월 19일 <한성일보> 서북학생 전학 가능- 民議 함공보부장 談

@실제날짜:460618

18일 정오 민주의원 공보부장 함상훈 씨는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1. 전일 독촉국민회대표대회에서 이박사가 연설한 것을 일부에서는 대소전쟁을 도발했느니 이박사를 추방하라니 등 극도의 독설을 토하여 이것을 게재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지도자를 중상할 뿐 아니라 민족 해방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전민족적 입장에서 警告한다.
   1. 해외로부터 귀환한 동포로서 중국인에 대하여 가해하는 일이 있는데 대국민의 ○度로서 이런 행동이 없기를 바란다.
   1. 서북학생으로서 남조선 학교에 입학 또는 전학하려하나 증명서가 없어 수속치 못하는 사람은 본 의원의 추천과 군정청 문교부의 증명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
  • 1946년 6월 20일 <독립신보> 서울 각 專門의 大學 編入- 자료 수집 후에 결정

@실제날짜:460619

구구한 항간의 억축에 당국의 답변. 경의전을 비롯하여 법전, 경제전문 등 관립 전문학교는 신 교육 제도에 따라서 오는 9월부터 단과대학으로 승격될 예정이었는데 이들 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서울대학으로 편입되어 종합대학에 구성된다는 풍설이 있는데 대하여 기자단의 질문을 공보부에서 19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시내 관립대학을 서울대학에 병합시킨다는 문제는 문교부로서는 편입 정책을 씀으로서 더 많은 학생을 수용시키는 것과 질적 향상, 학교 당국과 학부형의 비용을 감소할 수 있도록 고려하여 이 방면의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리하여 실시하여 좋다고 생각될 때는 군정장관의 허락을 얻어서 한다.
  • 1946년 6월 20일 <동아일보> 市內 各 專門學校長 會合- 學生啓蒙隊 出動을 協議

@실제날짜:460618

문교부에서는 7, 8월의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國文皆學 運動을 힘차게 전개하여 문맹퇴치에 박차를 가하기로 되었다. 이에 지난 18일 하오 2시 군정청 207호실에서 시내 각 전문학교장, 대학총장, 동예과부장, 각계 단체 대표가 모이어 학생계몽대 출동에 대한 협의회를 열고 효과적인 계몽운동을 일으키기로 신중 협의하였다.
  • 1946년 6월 20일 <동아일보> 神學校도 大學으로- 長老敎會에서 昇格 準備

@실제날짜:460612

남조선 각지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지난 12일부터 4일간 시내 승동예배당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를 열고 장로교회 금후 사업 방침에 대한 것을 토의하였는데 그중에도 반가운 것은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하고 조선유일의 장로교회 신학대학으로 승격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동교는 시내 고시정에 있는 전 천리교당을 이용하여 머지않아 기독신학연구의 최고학부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 1946년 6월 21일 <한성일보> 샌즈 씨 조선 관계로 재등장- 한말 미국인 황실 고문
(華盛頓 20일 UP발 조선) 구한국 황실 특별 고문으로 있던 윌리엄 프랭트린 샌즈 씨(당년 72세)는 今般 국무성 내부의 조선 교육 사업 담임자에 임명되어 또 다시 조선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동경대사관 이등 서기관을 겪어 한국 주둔 미국 대리대사로 서울에 있다가 일로전쟁에 앞서 일본인에게 추방을 당하여 그간 悠悠自適하고 있던 것이다.
  • 1946년 6월 22일 <독립신보> 京大 醫學部와 京畿專 合同 反對 鬪爭委員會 結成

@실제날짜:460619

요즈음 다시 재연되고 있는 경성대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동 문제에 대하여 협의코저 경성대학 의학부학생 일동은 지난 19일 오후 1시부터 동 의학부 제3강의실에서 의학부 학생대회를 열고 신중히 토의한 결과 합동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는 동시에 위원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합동 반대 투쟁을 전개키로 결정,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上略) 현재 조선의 의사수는 3천 명에 불과하다. 만 명에 일 인당이란 의사수는 세계 어느 문명국을 보더라도 찾아낼 수 없다. (蘇 600에 1인, 美 700에 1인, 日本 천에 1인) 이러한 견지에 전통있는 경의전을 폐쇄한다는 것은 상식적 판단을 초월한다. 대학은 설비에 비하여 학생수가 적다고 하나 이것은 과도기적 현상이요, 9월부터 신입생과 편입생의 다수 모집으로 인하여 이 문제도 자연히 해소되고 말 것이다. 병원에 환자수가 적다고 하나 이것도 석탄이 부족하던 昨冬의 현상이요 오늘날 병실의 만 원으로서 이 병실 확충에 노력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목격할 것이다. 예산 문제로써 1도시에 관립 대학을 1개교 이상 두지 못하겠다고 하나 건국 도상에 있는 오늘 누구나 그것쯤은 각오하는 바이겠고 또 현존 학교를 폐쇄함으로써 일시 곤란을 벗어난들 장차 이런 학교를 신설할 때의 부담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추측할 때 이 이유는 너무 (근)시안적 폐단이라 않을 수 없다.
  • 1946년 6월 22일 <독립신보> 敎材用 國史 完成
문교부에서는 해방된 우리 조선의 중학생들이 배울 모든 교본을 편찬 중인데 이번 진단학회 편찬으로 된 新國史敎本의 완성을 보아 우선 5만부를 인쇄하여 배부하였다. 해방 후 중등 국사 교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이라든가 하는 일본인이 제작한 그릇된 조선 역사를 근본적으로 개정한 순전한 조선 역사책인데 이외에도 방금 신학년용 국어, 국사, 이과, 수학, 공민 교과서도 준비 중이다.
  • 1946년 6월 22일 <독립신보> 在日同胞 子弟위해서 朝鮮서 敎科書를 發送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 동포 수는 아직도 많고 그 자제들의 교육이 문제인데 이제 일본에 있는 우리 아동들은 일본 교육에 의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들은 모국어와 모국의 문화 습관에 어둔 현상으로 우려되는 점이 있음으로 군정청에서는 이역에 있더라도 휼륭한 조선의 어린이가 되라고 초등학교 교과서의 등본을 이번 일본에 송부하였다. 이 교과서는 재일본 조선 학교의 기본 교재로 사용될 것인데 이로서 과거 조선말을 모르고 모국 사정에 어둡던 우리 어린이들도 조선안에 있는 동무들과 같이 이 책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 1946년 6월 22일 <동아일보> 慶南學界의 반가운 消息- 三千浦 中學, 高女를 正式 認可

@실제날짜:460621

우리 교육계에 던진 반가운 소식
경남 삼천포에서는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를 설립하고자 재단법인 普興義塾을 결성하여 준비 중, 21일부로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되어 9월부터 개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교 교장은 鄭甲柱 씨이다.
  • 1946년 6월 22일 <동아일보> 渡美 朝鮮敎育使節團- 오는 8월 1일경에 着京 豫定
현재 미국 각지를 시찰 중인 조선교육사절단은 7월 1일경 美輸送船으로 桑港을 출발 귀국할 예정인데 동 一行의 서울 도착은 8월 1일경이 될 터이라 한다. 방금 동 교육사절단은 현재 미국 각지 교육 시설과 공장 시설을 각각 분담한 전문분야에 있어서 잔존기일을 이용하여 분주히 시찰 중인데 이 사절단의 旅程을 계획하고 引導에 當하였던 윌리엄. 프랭크링. 선쓰 씨는 不幸히 지난 18일 革盛頓에서 逝去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씨는 前 李王시대의 皇室顧問이었고 조선과 일본에 있어서 다년간 국무성 대표로 주재하였었으며 미국무성에는 約 30년간 재직하였었다.
  • 1946년 6월 22일 <동아일보> 醫專과 合同- 京大 醫學部生들이 反對 聲明

@실제날짜:460619

요즈음 서울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합동하려는 말이 떠돌아 교육계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터 萬若 사실이라면 절대 반대한다고 지난 19일 서울대학 의학부 학생회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는 동시에 사회 일반에 호소하였다.
  • 1946년 6월 22일 <동아일보> 中等用 國史- 震檀學會서 編纂
문교부에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중등학교용으로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우리말 국사교과서 5만부를 인쇄하여 각 중등학교에 배부하였다. 이밖에 4학년용 국어, 국사, 이과, 수학, 공민교과서도 인쇄 준비 중이라 한다.
  • 1946년 6월 22일 <조선인민보> 中央中學校서 盟休- 교원들의 부정 행동에 격분

@실제날짜:460620

얼마동안 잘 참아 온 학원은 요즈음 교원들의 부정한 행동으로 인하여 순진한 학생들이 다시 분격하여 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시내 중앙중학교 생도들은 수뢰, 야비, 이유 없는 구타 등 부정한 선생들의 행동에 격분한 나머지 20일 졸업반을 제외한 전교 생도들이 생도 대회를 열고 온 종일 교정에서 비를 맞아 가며 격렬히 토의한 결과 마침내 다음의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체출하는 동시에 학교에서 그 요구 조건을 승인할 때까지 단연 동맹 휴학하기를 결의하였다.
 1. 학생 자치권의 전면적 승인을 요구한다.
 1. 학생의 뇌물을 받고 또 학생을 무단 퇴학시키는 현 심형필 교장을 절대 배척한다.
 1. 야비 부정한 김창기, 박광선, 최병련, 최○해 제선생의 즉시 퇴직을 요구한다.
 1. 38이북 생도에게 철저한 원조를 요구한다.
   1946년 6월 20일 중앙중학교 학생자치회
  • 1946년 6월 22일 <조선인민보> 學園不干涉을 再言明- 장경찰부장 취지를 천명
최근 학원의 불상사가 빈발하여 새조선 문교 재건에 있어서 저으기 우려되는 바 크며 또 학원에 대한 경찰 당국의 간섭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경향이 보여와 명랑하지 못한 공기가 있었는데 장경찰부장은 이에 언급하여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은 절대로 아니 하겠다고 재언명한 바 있었는데 아직 그 취지가 철저치 못한 현상에 비추어 장경찰부장은 昨 22일 경찰은 형사에 관계된 사건 이외에는 절대로 학원의 간섭을 아니 하겠다고 거듭 언급한 바 있었다.
  • 1946년 6월 23일 <독립신보> 學位令 九月부터 實施
그 동안 조선교육심의회 분과회에서 연구 중이던 학위령의 건의가 불원 군정청 문교부에 상정되어 오는 9월부터 실시하게 될 예정에 이르렀다. 대개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의 학위는 학사, 석사, 박사의 세 부류로 나누어서 학사는 대학부 출신, 석사는 대학원에 1년이상 수학 연구한 자로서 그 대학에서 자격을 인정한 자이며, 박사는 학위 청구 논문이 대학 교수 위원회에서 통과된 자로서 각각 그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인데 박사 학위 논문은 각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는 오는 9월부터 경성대학을 비롯하여 각 대학에서 교수위원회가 조직되어 즉시 수리하게 될 것이라 한다.
  • 1946년 6월 23일 <동아일보> 學徒여 다함께 參加하자- 農山漁村의 啓蒙運動
삼천만은 다함께 우리 글부터 알고 쓰게 하고자 오는 7월부터의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교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의 대운동을 일으켜 우선 학도를 동원하여 농,산,어촌의 방방곡곡에 파견한다. 지난해의 학도들은 방학도 없이 소위 전력 증강이라하여 귀한 몸을 헛되이 빼앗든 것을 생각할 때 해방 후 처음되는 이 운동은 十五,六년전에 이땅을 휩쓸던 브나로드 운동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 의의는 더욱 새로웁고 참가 대원의 임무 또한 크다.
해방된 첫 방학에 문맹퇴치에 동원 -문교부에 본부 두고 학도대 파견
이에 동 성인교육국에서는 지난 18일 시내 각 전문대학교장과의 연락회의를 열고 학도들의 출동 방침에 대한 신중 협의를 하였다. 회의의 결과에 의하면 학도계몽대는 일괄적으로 문교부에서 참가대교를 통일하여 규율있고 조직성 있는 기획 아래서 활동을 하여 단기간에 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기에 주안을 두고 우리말 보급에 새로운 기치를 올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계몽대는 각도, 부, 군 단위로 출동대를 오는 25일 안으로 각 학교 교장의 추천에 의하여 편성한다. 따라서 그 본부는 문교부에 두고 각도 학무부에 지부를 두어 대원의 훈련소집, 연락, 교재 제공을 하게 되었다. 22일 현재도 여러 학교가 신청을 하고 있어 성과가 기대되는데 보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성과를 거두고자 시내는 물론 각 지방 학교의 다수 학도의 참가를 바라고 있다.
  • 1946년 6월 24일 <동아일보> 小國民敎育에 萬全
의무교육제 실시를 앞두고 문교부에서는 만반의 대비와 준비를 하는 한편 38선 또는 일본, 북지, 남지 등에서 돌아온 전재 아동의 교육 방책에 대하여도 특별 고려를 하여 만전을 다하고 있다.
戰災 學童 위해 敎員 萬名을 養成
지난 달에는 38선을 넘어온 중학생 7백여 명을 시내 각 중등학교에 편입시키었으나 현재 전재학동은 불과 50퍼센트밖에는 수용못하고 있다. 이는 교사, 교원의 부족으로 부득이 한 것으로 문교 당국에서는 건물, 비품 등 시설을 확충하고, 따라서 임시로 교원 1만 명을 양성하고자 방금 각 도별로 각 중등학교에서 특설 교원양성과를 두어 9월 신학기에 대비하고 있다. 이밖에 유자격 교원들이 수입 많은 방면으로 전직하는 경향이 있어 이의 적극 방지와 복직 협력을 구하고 있다.
  • 1946년 6월 24일 <한성일보> 즐겁다 졸업식- 정든 교문을 떠나는 어린이들
시내 각 소교 졸업식 일정. 해방 이후 처음 맞이하는 시내 각 초등학교 1회 졸업식 일정은 다음과 같다.
 ▲ 26일 오전 9시- 종암, 계동, 남정, 우신. 오후 2시- 숭증, 아현, 금양.
 ▲ 27일 오전 9시- 혜화, 능동, 용산, 은로. 오후 2시- 삼산, 재동, 이태원.
 ▲ 28일 오전 9시- 창신, 창경, 북성, 가명. 오후 2시- 방산, ○문, 아○화광, 경○女
 ▲ 29일 오전 9시- 청계, 청운, 마포, 한남. 오후 2시-동명, 삼청, ○창.
 ▲ 7월1일 오전 9시- 돈암, 매동, 용강, 금화, 서빙고. 오후 2시- 효제, 덕수, 창천,안산.
 ▲ 2일 오전 9시- 광희, 남대문, 서강, 효창. 오후 2시- 무학, 태평, 공덕, 삼광.
 ▲ 3일 오전 9시- 장충, 청계, 계성, 소의, 수송. 오후 2시- 청구, 남산, 화광, 운화, 연화봉, 종로
 ▲ 4일 오전 9시- 동광, 협성, 공옥, 대명. 오후 2시- 흥인, 동덕, 봉래.
  • 1946년 6월 25일 <독립신보> 여전히 入學은 좁은 문 -八對一의 收容力
중졸생 반수 이상 진학을 희망. 해방 조선의 새 일군이 될 전문대학을 비롯하여 초등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이번의 학도들은 얼마나 되는가. 문교부에서 조사한 계산을 보면 초등학교가 22만(남 15만,여 7만), 중등학교 2만(남 1만 5천, 여 5천), 전문대학 3천(그중에서 여자 略 3백)인데 이들 학도들의 진학 생태를 보면 초등학생은 중등학교에 입학 수용력이 3만 명 밖에 없음으로 19만이 중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가게 되는 형편에 있다. 그리고 중등학교 졸업생은 약 5할 즉 1만 명이 상급 학교에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 1946년 6월 25일 <동아일보> 新敎育制度에 文敎部 進級 自由를 再釋明

@실제날짜:460624

중등 4년생은 高級 2년에
신교육제도는 드디어 9월부터 실시케 되었는데 중등학교가 고급, 초급으로 나누어 6년제로 된 데에 대하여 일반에 若干 오해가 없지 않아 문교부에서는 24일 다음과 같이 그 견해를 설명하였다.
남녀 중등학교에 있어 초급 3년, 고급 3년제로 하였는데 금년에는 임시조치로써 기왕의 4년제의 4년생은 원칙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으나 희망에 따라서는 고급중학 2년에 진급할 수도 있다. 4년제 3년생은 초급 3년제로써 수업할 수 있고 고급 1년에 진할 할 수도 있다. 이로써 사실상 각 학교는 신제도에 의한 고급, 초급학교, 구제도(4년제) 학교의 두 가지가 병존하고 있는 지음으로 현재의 1학년생이 졸업할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직업, 농업, 실업학교는 원칙으로는 일반 중등학교와 같으나 종전의 그 학교 교육 방침에 따라 다른 학교보다 職業科를 1주일에 10시간 내지 15기간 정도로 더 수업시키기로 되었다.
  • 1946년 6월 25일 <조선인민보> 非民主敎育은 버리라- 민전서 학원내 명랑화를 요망

@실제날짜:460624

요즘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의전 기타와의 통합문제, 동대학 도상록 교수 파면 문제, 학생 자치 문제, 숙전 학생들의 선생 구타 사건 등 교육계의 불상사가 속출하는 유감된 사태에 대하여 민전 선전부에서는 24일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여 교육계의 명랑화를 기한 바 있었다.
학교 통합 문제는 그 구실이 재정난이라고 하나 그 실은 진보적 교수를 축출하여 교수진을 재편하려는 음모이며 도교수의 파면 역시 공금 횡령이라는 누명으로 학자의 존경을 손상하는 해괴한 이유로 동 교수의 진보적 경향을 혐오한 것이며 학생의 자치 문제는 일제의 노예 교육에 유린되어 온 조선 학생의 정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함은 반민주적 팟쇼 정책에서 유래한 것이며 숙전 사건과 같은 여학생의 선생 구타란 전대 미문의 만행 역시 배후에 흑막이 확연하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랴. 문교 당국은 이러한 비민주적 교육 정책을 단연히 배제하고 민주주의적 교육 정책을 수립하여 교육계의 명랑화를 꾀하기를 요망하여 마지 않는다.
  • 1946년 6월 25일 <조선인민보> 우리 學園은 옳은 길로 가자

@실제날짜:460620

학원의 민주화 외침이 치열한 요즘 경성대학에서는 관립 전문, 대학 합동 문제를 에워싸고 반대 투쟁하는 의학부, 미군이 사용하는 교사 반환 운동과 도교수 복직을 요구하는 이공학부 사건 등으로 자못 주목의 的이 되어 오던 바 지난 5월 23일 돌연 파면당한 도교수에 대하여 동 학부 교수단 재학 전 학도가 일속되어 그 부당성을 지목하는 동시에 동 교수의 복직을 위하여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 왔거니와 20일에는 동 학부 학생대회 집회위원회 대표 6명을 군정청에 파견하여 아래와 같은 제의와 진정을 하였다 한다.
도교수 파면할 이유없다
서울대학 학생총권기로 호소
이미 16일 학생대회에서 결의된 1. 도교수의 파면의 아무런 근거가 없다. 2. 미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공학부 교사를 반환하라. 3. 학생에 대한 광고 출판물 검열제 반대 등등의 결의를 전달하고 그 길로 유문교부장 오차장과 전후 약 1시간에 걸쳐 회견, 이에 관한 경과 보고문과 동시에 22일 도교수 파면 이유가 된 공금 횡령은 근거없는 일이니 당로 제위의 적극적인 노력을 충심으로 진정한다는 성명서를 거듭 발표하여 그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유문교부장과 회견한 결과 다음과 같은 3조목을 지적하고 이후도 투쟁을 더욱 계속할 것을 선언하였다.
 1. 도교수의 파면의 이유가 일정하지 못하고 應○變動하며 또 문교부가 한 일이니까 무조건으로 신봉하려는 점.
 2. 조선 공업의 중추가 될 이공학부 교사 문제를 사소한 지엽 문제라고 등한시하는 이성과 성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점.
 3. 문교부에서 내리지 않고 전혀 모르는 지령이 다른 학교, 다른 학부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이공학부에서는 공연히 문교부 지령이라고 하여 실시되어 있는 점.
이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면을 우리앞에 제시되니 우리는 문제의 옳은 해결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 1946년 6월 25일 <조선인민보> 學生을 退學 處置- 중앙중학 맹휴에 학교측 태도

@실제날짜:460621

지난 20일 폭우 중에 운동장에서 학우회를 개최하고 "우리에게 인격있는 선생을 달라"는 등 기보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맹휴를 단행한 중학중학생 일동(졸업생과 그 외에 약 40-50명을 제외한) 600여 학생은 학교 당국의 양심적 처결을 기대하고 있던 바 그 다음날 21일에 이르러 강심호(4학년) 이하 11명을 퇴학, 이선봉(3학년) 이하 11명을 무기정학에 처하고 기숙사생 김기진(3학년) 이하 7명을 (서북 학생으로 의지할 곳 마저 없는) 맹휴에 가담하였다는 명목으로 동일 기숙사로부터 축출하는 등 문제는 차츰 재미없는 형세를 보이고 있는 데 학생측 대표 수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교측에서는 라디오를 통하여 혹은 학부형에게 편지로 "일부 학생 선동으로 맹휴"운운하고 역선전하는 것은 우리 선생님들 체면을 보아 대단히 유감한 일입니다. 20일 강당에서 학우회 정기 총회를 하려고 하다가 비오는 운동장에 쫓겨나서 5시간이나 토의를 거듭한 결과 600여 학생은 모두가 다 손도장까지 찍고 맹휴에 들어간 것입니다. 신형필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전창기(교무계), 박광선, 최형련, 최덕해(음악) 선생님들을 배척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만은 인격없는 행동의 실증으로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일례로는 5월 하순경에는 기숙사 학생들이 쌀이 없이 쩔쩔 매는 때 교수와 그 가족용으로 6트럭 240叭을 반입하면서도 조금도 돌보아 줌이 없었더라는 일이라던지 우리가 인격이 있고 학생을 사랑할 줄 아는 선생님을 바라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교장은 내가 지금까지 스트라익 18회나 당하였으며 학생의 폭행으로 고막까지 터졌다고 항상 뽐내며 이번에는 우리의 요구를 즉석에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정당한 비판과 옳은 해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 1946년 6월 26일 <조선인민보> 學園 問題 續發의 眞因 奈邊- 교수연합회에서 당국에 맹성 촉구
요즈음 계속되는 학원의 불상사에 대하여 전문대학교수연합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당국자의 맹성을 촉구하였다.
(전략) 최근 경성대학, 숙명여전을 위시하여 빈번히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학원의 불상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일전에 잔악 무도한 일제도 차마 하지 못하던 잔혹한 방법인 교수의 파면, 투옥, 위협이 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중략)
지상의 보도와 항간의 소문을 종합하여 볼 때 당국의 처사가 반드시 나에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가 있은 즉, 사건의 진의는 표면에 나타난 그러한 종류인 것 보다도 오히려 당국자의 일종의 편견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략) 만일 오인의 억측이 千憂의 一得을 얻어다고 하면 이것은 오직 현명한 당국자가 가장 대국적인 견지에서 대학의 진보성과 학자의 존중이라는 개념을 정당히 인식하고 三思四思함으로써만 가장 옳은 해결을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문화는 지금 퍽이나 뒤떨어지고 조선의 학원은 너무나 이러한 일부에서는 현하의 조선의 학도를 혹 과소 평가하는 이가 있을런지 알 수 없으나 학원의 자유를 옹호하고 학도의 신분을 보장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 1946년 6월 27일 <조선인민보> 淑專 被檢 敎授 釋放- 영접에 모여든 학생들 백여 명

@실제날짜:460625

교육계를 비롯하여 일반 사회의 이목을 끌고 있는 숙전 사건으로 피검되었던 동교 교수 김충선, 박현모, 김홍봉 제씨는 지난 25일 밤10시에 백여 명의 학생과 동료의 영접을 받어 석방되었는데 현 교장 임숙재, 오숙자, 정열모, 이봉애, 이정원 제교수를 이어서 증인으로 취조 중이라 한다.
  • 1946년 6월 29일 <독립신보> 成人 國文 皆學 運動 展開
지식은 힘이라고 문교부 성인교육국에서는 방금 성인 문맹자를 조사 중인데 8월을 기하여 성인 국문 개학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조선으로부터 문맹자를 완전히 퇴치하게 되었다. 이 국문 개학 운동은 학교 교원, 관리, 회사원, 종교자, 학생을 총동원하여 실시하는 것인데 이 운동에 앞서 7월 19일부터 25일까지 성인교육 강조 주간을 실시하게 되어 문맹자 없는 조선을 건설하게 되었다.
  • 1946년 6월 29일 <청해> 學園에 팟쇼 侵入을 防止하자! 京大 조부장을 파면하라!!

@실제날짜:460628

학원의 민주화와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28일 서울대학 법문학부 교수회에서는 반동적이고 팟쇼적인 동 학부장 조윤제 씨의 용퇴를 요망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조부장 취임 이후 항상 독선적인 태도와 학도적 양심이 마비된 언동으로 교수들의 경멸을 사고 있었는데 더욱 근래에 와서는 동 학부에는 교수회라는 교원의 자치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수회에 대하여 강압적인 기행을 더욱 노골화 하였다. 그런데 지난 17일 입학 수험 과목 문제로 드디어 교수회와 정면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즉 교수회에서 입학 수험 과목에 국문과 한문을 제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조씨는 개인의 의사로 무단히 변경하였다. 이에 교수회에서는 분개하여 그 독선적 태도를 힐난하였더니 조씨는 자기의 과오를 반성할 생각도 없이 도리어 '교수회가 무어냐 어찌해서 부장의 말에 복종치 않느냐'하는 의미의 말을 하고 특히 이병도 씨에게는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까지 하고는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다. 그 후 24일 교수회에서는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교수회를 개최하였는데 파렴치하겠도 조씨는 그 날 미인 학장을 동반하고 교수회에 임석하여 '나는 여러분과 총장의 요청에 의하여 유임하겠다. 그리고 금후에는 교수들은 나에게 무조건 협력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미없는 일이 있으리라 그리고 교수회는 정직하라'고 선언하였다 한다.
그리고 미인 총장에게는 어떠한 무고를 하였는지 총장도 교수회의 행동을 오해하여 '조씨에게 사과하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에 교수회에서는 분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러취장관 문교부 총장에게 진정서를 보내였다 하는데 금후의 사태가 주목되는 바이다.
  성명서 
 금차 본 학부장 조윤제 씨의 경망한 사표 제출로 인하여 신성한 학원 내 불미한 사태가 돌발하자 학문의 연구와 교육의 중책을 진 우리 일동은 학부 내의 자주적 해결안을 강구하는데 협조의 정신을 다하였고 또 문교 당국에 그 선처를 진정하는데 성의를 다하였으나 아직 그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였다. 이제 이 이상 시일을 遲延함은 오히려 대학 건설과 학문 발달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구한 억측과 불순한 유언이 학계의 명랑화를 해하는 바 지대할 것으므로 심사 숙고한 나머지 마지 못하여 이것을 공포하는 바이다.
  1. 금차 사태는 교수회에서 정식 결정한 입학 시험 과목을 조부장이 私意로 변경하였음에 대하여 그 후 그 선처 방침을 토의하는 중에 조부장이 공연한 감정을 가지고 격분한 나머지 존경할 만한 모모 교수들에게 공석상에서 비신사적 언사를 폭발하여 의석을 문란케 하고 즉석에서 사의를 선언한 후 그대로 총장과 문교 당국에 사표를 제출한 데서 발단하였다.(중략)
  1. 그 후 우리 일동은 협조의 성의를 가지고 조부장의 반성을 촉진하고 타협의 선후책을 강구하였으나 조부장은 여하한 사태에 이르든 간에 불문에 처하고 오직 독선적 태도와 보복적 감정으로서 사의를 고집하여 결렬되고 말았다. (중략)
  1. 조부장은 매양 언행이 조잡하고 태도가 비신사적이므로 인하여 공연한 마찰을 야기하며 제반 처사가 독단적이여서 前後서齬가 모순이 빈번하고 부장으로서의 역량이 결여 되므로 인하여 문교 당국 및 총장과 학부내와의 의사전달이 원활치 못하였다. 금번 사태는 다만 일단에 불과한 것이다. 자에 본 학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조부장의 용퇴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1946년 6월 28일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이병도, 김상기, 이상백, 김두헌, 박종홍, 유행중, 신기석, 강정태, 김갑수, 서재원, 이종갑, 유동진, 황준연
  조교수: 이본영, 최호진, 이명선, 이태종, 주재황


  • 1946년 6월 30일 <독립신보> 專門入試 延期- 수해로 지방 수험자 위해
7월 1일로 박두한 고등 전문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이번 비로 인하여 교통이 두절되어 지방 지망자는 수험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음으로 문교부에서는 시험 시기를 다음과 같이 7월 10일로 연기하게 되었다. 즉 제1차 시험은 10일부터 13일까지의 4일간. 이에 해당한 학교는 대구농전, 藥專, 경성의전, 광주의전, 경성광산 대구사범, 경대예과, 보전, 법전, 경성여자의전, 숙전의 11교. 제2차 시험은 동 20일부터 23일까지의 4일간인데 이에 해당 교는 수원농전, 치전, 世醫專, 대구의전, 경성공전, 부산수전, 京師, 연전, 經專, 惠專, 이화여전, 京女師의 12교이다.
  • 1946년 6월 30일 <독립신보> 趙 京大 法文學部長의 勇退를 敎授陳서 陳情

@실제날짜:460628

경성대학 법문학부장 조윤제 씨는 금년 3월 취임 이래 그 보수적 사상과 독단적 행정으로 교수간에 많은 물의를 일으켜 오던 바 지난 5월 22일 동 교수회에서 입시 과목을 결정한데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국한(國漢) 과목을 독단으로 추가하여 변경 발표하여 교수회의 반대를 받게 되자 지난 17일에 자진 사표를 제출하여 교수들이 국어(自國語)를 반대한다고 '안스테트' 총장에게 교수들을 무고하고 나서 또 다시 지난 24일 총장 입회 아래 교수회에서 사의를 자진 취소하고 나서 교수측에 대하여 협력안하면 불명예스러운 일이 난다고 협박적으로 나왔다 한다. 이와 같은 조부장의 경망한 태도는 대학 건설과 학문 발달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될 뿐 아니라 학계의 명랑을 해롭히는 것을 지적하여 법문학부 교수 이병도 씨 외 12명, 조교수 최호진 씨 외 4명은 연명하여 2일 그 용퇴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 일동은 협조의 성의를 가지고 조부장의 반성을 촉진하고 타협의 선후책을 강구하였으나 조부장은 여하한 사태에 이르던 불문에 처하고 오직 독선적 태도와 보복적 감정으로서 사의를 고집하여 결열되고 말았는데 그 후로 조부장은 교수회를 소집하여 총장 입회하에 사의를 번복하고 '만일 나에게 협력을 아끼는 이가 있을 경우에는 학교를 위하여 명예스럽지 못한 일이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의연 군림적 태도와 강압 방침을 취하고 당분간 정례 교수회의 중지를 선언하여 우리 일동으로 하여금 아연 자실케 하였다. 조부장은 매양 언행이 조잡하고 태도가 비신사적임으로 인하여 공연한 마찰을 야기하며 제반 처사가 독단적이어서 전후 齟齬와 모순이 빈번하고 부장으로서의 역량이 결여함으로 인하여 문교 당국 및 총장과 학부 내외의 의사 전달이 원활치 못하였다. 금번 사태는 다만 그 일단에 불과한 것이다. 玆에 본 학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조부장의 용퇴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1946년 6월 28일 
京城大學法文學部 敎授 李丙燾 金庠基 李相佰 金斗憲 朴鍾鴻 尹行重 申基錫 
姜정澤 金甲洙 徐載元 李鍾甲 尹東直 黃道淵 助敎授 李本學 崔虎鎭 李明善 李泰鎭 宋宰璜


1946년 7월

  • 1946년 7월 4일 <독립신보> 京大 卒業式- 하지 중장도 임석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경성대학 졸업식을 3일 오전 10시 동대학 강당에서 '하지' 중장의 임석, 다수 내빈 참석 아래 거행하였는데 졸업생 수는 법문학부 63명, 리공학부 38명이라 한다. 이날 졸업장 수여에 이어 경성대학교수회에서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는 법학박사 학위장을 미인 총장으로부터 '하지' 중장에게 전달하였다.
  • 1946년 7월 4일 <독립신보> 趙 法文學部長 勇退?- 경대 법문학부 분규 해결 在邇
입학시험 과목 문제를 계기로 물의를 일으킨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부장과 동 학부 교수들과의 대립은 표면화하여 그 동안 동 학부 교수진이 총궐기하여 군정장관을 비롯한 문교 당국과 동 대학 미인 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조부장의 용퇴를 요망하였든 바 결국 조부장의 용퇴로 원만히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 1946년 7월 5일 <조선인민보> 맥元帥에 法學博士 學位 授與- 경성대학서

@실제날짜:460703

경성대학에서는 3일 태평양 방면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명예 법학박사의 학위를 하지 중장을 통하여 수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 원수는 미-比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동양에 거의 한 평생 있는 동안 언제나 동양의 장래는 동양 제 민족의 독립함에 있다고 믿었고 또 믿고 있다."
  • 1946년 7월 6일 <조선인민보> 좁기도 하다 學園의 門- 각 중등교 입시 오늘 개막
지원자는 모집의 평균 5·6배. 오늘은 해방 후 처음 맞는 각 중등교 1기 입학시험날이다. 과거의 학교기구란 총독 정치하에서 오직 식민적 노예 교육과 소위 내선 일체란 동화 정책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된 이 마당에 학교 기구는 아직도 만전을 갖추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일제 교육 정책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 버렸다고는 볼 수 없다. 오늘의 학원이 참으로 생도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인가? 더욱 해방된 오늘에 있어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빠짐 없이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인데 학원의 문은 여전히 좁고 또 좁다. 금년엔 또 몇만 명의 소년들이 시험에 낙제하여 애처러운 눈물을 뿌릴 것인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학무부내에 학원의 합동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우리 교육계의 통탄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시내 각 중등학교 입학 지원자 및 모집 인원을 조사하면 다음과 같은데 2기 수험 학교의 지원 기일 마감도 그 대부분이 끝났으므로 그중에는 중복 지원자도 상당한 숫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7월 6일 현재)
   학교명      모집인원        입학지원자
   경기중학    200             1713
   경성중학    200             1600
   경복중학    200             1856
   중앙중학    150             830
   휘문중학    150             1400
   배재중학    150             1350
   중동중학    180             450
   영장중학    120             453
   경동중학    200             933
   보성중학    180             837
   사범부속중학 80             412
   동성중학    100             526
   경기고녀    200             1185
   숙명고녀    150             819
   풍문고녀    120             427
   이화고녀    240             1250
   성신고녀    150		458
   덕성고녀    200		556
  • 1946년 7월 8일 <독립신보> 夏期 保育講習
유치원과 탁아소 보모, 국민학교 저학년 담임 교사 등을 망라하여 해방 기념 제1회 하기 보육강습회를 朝鮮保育社, 서울유치원장회, 中央女專 공동 주최와 군정청 문교부 후원으로 오는 21일부터 27일까지 시내 중구 明町 1정목 3번지 중앙애육원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강습 과목과 강사는 아래와 같음. 
 ▲ 保育理論  楊○林 
 ▲ 敎育舞踊  徐英彩, 咸貴奉 
 ▲ 兒童音樂  羅運榮 
 ▲ 兒童美術  李仁星
  • 1946년 7월 8일 <동아일보> 京大 醫學部와 醫專 合同
신학기부터 실시를 문교부서 표명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 문제에 대하여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어 오든 바 군정청 문교부 군정관 오-부리 핏텐가-(Aubrey O. Pittinger) 중좌는 5일부 편지로서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에게 회답을 보내어 합동이 부득이한 조치를 표명하였다. 이 회답 내용에 의하면 현재 경성의전은 그 설비에 비하여 학생수가 많은 편인데 비하여 대학의 설비는 학생수에 비하여 병원과 학교 설비 여유가 있으므로 합동하면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며 또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실시될 것이라 한다. 이러한 회답을 받은 동 의학부 학생 일동은 어제 7일 2호 성명서를 내어 합동안이 타당치 않음을 지적하여 합동안을 철회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1946년 7월 8일 <조선인민보> 當局 見解는 심한 誤解- 경대 학생측 발표
반대 결의를 견고히 하는 바다. 군정청의 의사를 알게되어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우리의 반대 결의를 다시 한번 시도하는 바이다.
 1. 문교 당국의 성명에는 하등의 원칙에 언급치 않고 그 견해에 있어서 오직 독선적이요 또는 심히 오만한 태도로 나온 것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2. 일전 유문교부장은 합동이 오직 경제적 이유에서 귀결되었다는 언사를 하였다고 득문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금반 書面에는 그 이유는 지엽적이라고 하여 문교부내의 합동에 대한 무원칙, 무○○성을 證左하는 것.
 3. 이미 수차 조사 위원을 파견하여 숙지하는 바와 같이 본 학교의 설비는 상상한 바와 같이 그리 거대한 것은 아니오, 경의전과 합동함으로써 240명 이상의 수용력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현재 수용력에 차지 못하는 학년은 오직 과도적이요 내학년 신입생 부터는 당연히 해소될 것이다.
 4. 합동 문제와 삼팔선을 비하여 운운함은 논의의 기본 원리를 모르는 것으로 현명한 문교 당국자는 스스로 그 오류임을 알 것이요 본 학교는 조선 교육계를 위하여 두 학교가 각각 그 개성을 살려 장차 세계 어느 학교에 비하여서도 손색없는 것을 만들자는 것이다.
 5. 이상 요컨대 조선 교육의 장래를 위하여 합동안을 철회하여 국가적 견지에서 당국의 재고려를 원한다.
  • 1946년 7월 8일 <조선인민보> 波蘭의 京大 醫專 合同
거 5일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일동에 문제의 경대 의학부와 경의전 합동은 사실 현재 문교부 하에서 기성된 것이라는 요지를 서면으로 언명하고 합동 이유를 밝혔는데 경대 의학부 학생 일동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합동 이유를 일일히 반박완강 반대할 결의를 표명하여 문교 당국의 재고를 바라고 있는 데 문제가 조선 최고 권위의 학부인 만큼 그 동안 일반 여론은 긴○한 가운데 문제의 발전을 주시하는 한편 반대를 ○○함도 있었거니와 최종적 단계에 있어 문제의 거취는 실로 중대시 되고 있다.

문교부 발표- 대강은 이미 결정하였다

신학기부터 시작, 3년 후 완성
경성의전과 대학과의 합동에 관한 제위의 간절한 의문에 대답하노라.
제위의 여론에 의하면 적은 두 학교가 일개의 학교 보다 의사를 더 많이 양성할 수 있다고 하나 이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하여 보자. 많은 사람과 많은 ○○을 가진 비교적 큰 ○○을 가정하자. 완전히 두 단위로 분리될 때 인민이 더 번창하고 살기좋은 나라가 될 것인가. 가령 38선에 분활이 생길지라도 제위는 두 개의 소 단위를 주장할 것인가. 두 단위가 일 단위보다 좋으면 왜 또 다시 쪼개어 네 개로 만들지 않은가.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의전을 각 2개로 분활하여 더 작은 4학교로 할 때에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할 것인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즉 모든 시설을 평등히 놓을 수 없으니까, 어떤 점에는 편리하나 한편 어떤 점에는 불편을 느낄 것이다.
현재 경의전은 그 시설에 비하여 학생 수가 많다. 그런데 대학의 시설은 학생수에 비하여 병원 학교에 있어서 여유가 있다고 믿는다. 고로 한 학교로 합동하면 서로 분활하는 것보다 더 우수한 의사를 다수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재 양교는 문교부 아래에 합병되어 있다. 고로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 1개에서 타교의 시설을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양교의 시설은 조선의 것이고 어느 단체나 교수 또는 학생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어떤 소집단의 이익을 무시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두 학교를 ○관리하에 두면 운용상 능률이 향상하는 동시에 문교부의 직접 처리보다 ○히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 양 교는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만일 동일한 수준에 있었더라면 금○에 ○○ 즉시 합병하여 많은 의사를 양성할 것이다. 그러나 양교는 수준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경의학전 재적자가 그 과업을 말료할 때까지 학업을 각각 별개로 유지아니 할 수 없다. 경의전이 대학에 학문적으로 동일 수준에 빨리 도달하면 할 수록 의사양성은 더 속히 될 것이다.
○○문제에 관하여서는 아무도 언급이 없다. 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장 빈약한 이유의 하나이다. 크고 굳세고 좋은 설비와 우수한 교수진을 갖춘 대학○○부는 불충분한 2교보다 ○○○ ○○하고 더 다수의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시작될 것이며 완성하기에는 3년을 요할 것이다.
  • 1946년 7월 8일 <조선인민보> 合同보다 增設을- 文聯서 성명
조선의 의사수가 부족한 것은 문교 당국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대 의학부와 경의전을 합동함으로써 의사를 더 많이 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의 논리이다. 합동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증설하여야 한다. 학교를 증설하라. 의학 시설을 충원하라. 조선 인민은 무엇보다 그 부담을 기뻐 응할 것이다.
  • 1946년 7월 9일 <독립신보> 京城醫專과 合同 反對- 경대 긴급 학생대회서 성명
京大 醫學部와 京醫專 합동설이 있어 이에 대해서는 양교가 반대 의사를 표시하여 그 귀추가 주목되던 바 핏텐카 문교부장은 수일전 경대 의학부 학생자치위원회에 '새학기부터 양교가 통합한다'는 멧세지를 보내어 여론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즉 핏텐카 문교부장의 서신은 작은 2학교보다 큰 1학교가 좋다고 하며 양교가 합동하면 많은 의사를 양성할 수 있으며 신학기 9월부터 합동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경대 의학부에서는 긴급 전체 대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문교 당국은 그 과오를 청산하고 조선 교육의 장래를 위하여 합동안을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문교 당국의 합동안에 절대 반대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유 문교부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하였다. 
많은 의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현재의 각 의학 계통 학교의 재산을 종합할 필요가 있다. 이 방책에 의하면 더욱 과업을 충실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의학 계통 각 학교 당국 교수자에 있어 약간 희생될 것이나 이 안을 실천함으로 편익이 많을 것이다.
  • 1946년 7월 9일 <독립신보> 校舍 返還 陳情- 경대 이공학부서

@실제날짜:460702

京城大學 理工學部 교사가 미군 병원으로 (중략) 이공학부 학생들은 교사 반환을 당국에 진정해 오던 바 지난 2일 동 학생 대표가 하지 중장을 방문하고 교사 반환에 대한 진정서를 전 학생의 연서로 제출하였는데 그 진정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一. (上略) 
 二. 더구나 과학 기술의 빈약성과 공장 운영 상태의 비조직적인 원인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산업부흥은 도무지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기술자 양성이 가장 긴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공학부의 사명은 극히 중대하다. 
 三. 그러나 이공학부의 발전은 현재 도저히 기할만 하지 못하다. 교사가 없고 연구 시설이 없는 까닭에 기술자의 양적 질적인 양성이 불가능하다.
  • 1946년 7월 9일 <조선인민보> 大學合同問題와 文敎政策- 李康國(경성대학동창회장)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동 계획은 그 확정 여부는 단언할 수 없으나 학원의 물의와 일반 사회의 여론을 통하여 동 문제의 중대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또한 경성대학 동창회원의 1인으로서 특히 경성대학의 운명에 관하여 깊은 관심과 적지 않은 책임을 갖는다. 오늘날 조선의 의료시설의 현상에서 의사의 대량 생산이 절대로 요청된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사실이며 그러므로 의학 교육 기관의 증설 확대가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서 제기될 지 언정 설비에 대하여 학생수의 과소가 합동의 준거로서 고려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평범한 현실이다. 본래 일본인의 교육을 위하여 시설되었던 조선의 전문대학이 일본인이 물러난 오늘날 설비와 학생수의 불균형은 과도적 현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며 이 문제는 학생의 증가 모집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이곳에서 이것을 이유로 합동에 문제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나는 이것을 문교 정책의 일반의 일 표현으로 보며 오늘날 문제되어 있는 학원의 입학 자치 등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신조선 건설과 자주 독립 완수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 잔재의 숙청이 선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라면 이 임무의 수행은 어느 곳에서 보다도 먼저 학원에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 학원은 장래 조선 건설의 일꾼을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학원이 일본적 해독을 가장 심하게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학원에 있어서 만일 비판의 정신이 몰각되고 상상의 자유가 금지되며,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다면, 씩씩하고 활발하여야 할 조선의 신건설을 庶畿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적 ○○의 계승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학 자치는 일본 제국주의도 최후 순간인 전쟁 강행에 이르는 직전까지 보장하려던 자유이다. 문교 관료의 일비 일소에 그 진퇴과 달려 있어서야 연구의 자유가 어찌 보장되며, 연구의 자유가 없는 곳에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으랴, 사물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면 비국민이라 규탄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요구되면 불령선인으로 탄압되었던 우리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오늘날 해방조선에 있어서 좌익 교수, 적색 학생이라는 표현으로 학원의 자유가 유린되는 현실에 상도할 때, 나는 일본적 독해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자치의 부인, 도교수의 파면, 조부장 전횡을 둘러싼 법문학부 문제, 숙전문제 등과 관련하여 대학 의학부 합동 문제 또한 문교 정책 일반의 일환으로써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며 일본적 독해인 비민주주의의 일 요소로서 배격되어야 하는 것이다.
  • 1946년 7월 9일 <조선인민보> 理工學部 校舍 問題로 하지 중장에 陳情- 경대학생들 최후적 노력

@실제날짜:460706

지난 5일에 문교부 군정관의 멧세지로 경대 의학부와 경의전과의 합동 문제가 표면화하고 또 미군사용 중인 대학 이공부 교사 반환 문제로 경성대학에서는 학생대회를 열고 누차 반대하여 오던 바 지난 6일 동 대학 이공학부 학생대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학생의 최후적 노력으로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교사 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정서를 전 학생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한다.
과학기술의 빈약성과 공장 운영 상태의 비조직적 원인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산업 부흥은 도무지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기술자 양성이 가장 긴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공학부의 사명은 극히 중대하다. 그러나 이공학부의 발전은 현재 도저히 기하지 못할 만하다. 교사가 없고, 연구 시설이 없는 까닭에 기술자의 양적, 질적인 양성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경대 이공학부 교사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아무 답도 없고 또 이공학부가 사용하기로 되었던 제2호관까지 병원으로 사용하게 된다 하니 유감하기 비할 데 없다.
미군 당국은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하는 의미에서 이공학부 교사를 명도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충분한 연구를 할 수 있게 하여 주기 바란다.
  • 1946년 7월 11일 <독립신보> 敎育界에 一言함 -社說
一
 8.15 후 1년 가까이 세월이 경과한 동안 우리들 건국사업은 우여곡절하면서도 각 방면에 성실한 노력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영역, 산업경제적 부면, 문화적 예술적 등의 제 과업은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국가 건설의 기초공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생활의 ○○과○○운동과 의식○○○ ○○○○을 주체적으로 ○○○○○을 인간 ○○○○○○○○는 생각할 ○○○일이다.
二
 이것은 교육의 영역에 속한 과제이나 이러한 의미의 교육은 의식을 닥고 ○○적 ○○을 하여 그 소위 지덕체 발달을 ○하는 협의의 학교교육일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광과 오욕의 ○○○한 자기의 처지를 돌보아 앞으로 자기의 책임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를 ○○할려면 먼저 우리 민족의 사명과 지위를 인식하고 전체의 국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 정열 의지를 가진 국민을 ○○하는 위대한 ○○○하지 않으면 안된다.(이하 생략)
  • 1946년 7월 11일 <독립신보> 師範校 新設

@실제날짜:460710

문교부장 유억겸 씨 10일 발표에 의면 문교 당국에서는 부산과 충주에 사범학교 (중략) 할 예정인데 9월 1일부터 개교하는 상기 학교는 조선에서 교사를 재교육시키고 우수한 교사를 충원시키는데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 1946년 7월 11일 <독립신보> 趙 部長 辭表 受理하라- 경대학생 관계 당국에 진정

@실제날짜:460702

경성대학 법문학부 학생 일동은 우리 학원에 일대 암운을 던지고 있는 조법문학부장과 교수단과의 마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저 지난 2일 2차 학생대회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결정하고 관계 당국과 교섭을 전개 중인데 그 귀추는 자못 주목된다. 
 一. 조부장은 7월 10일까지 사표가 수리되도록 자신 노력하여 주고 사표가 수리 안되는 경우에는 部長 事務 處理를 하지 말고 다만 양심적인 학자가 되어줄 것. 
 二. 총장 및 교수는 극소수 학생 및 교수의 조부장 유임 소동을 거부하고 부장의 사표를 7월 10일까지 수리할 것. 
 三. 교수단은 학생의 동의 없이는 1인이라도 개인적으로 사직치 말고 시급히 교수회에서 후임 부장을 추천할 것. 
 四. 학생의 總意를 반대하고 대회 파괴를 기도하였던 소수 학생에 대해서는 최후 1인까지 抱擁할 것.
  • 1946년 7월 11일 <조선인민보> 趙部長 辭表를 受理하라- 법문학부 학생회서 결의

@실제날짜:460709

서울대학 법문학부에서는 동 부장 조윤제 씨 문제로 학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인데 동 부 학생들은 부장과 교수단과의 마찰을 해결하고 암운에 쌓인 학원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저 지난 6월 28일, 7월 2일에 학생대회를 거듭 열고 7월 9일에 또 대회를 열어 신중 토의하였든 바 드디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가지고 관계 당국과 교섭 중이라는데 그 귀추가 주목된다.
 1. 조부장은 7월 10일 까지 사표가 수리되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부장사무 처리를 하지 말고 양심적 학자가 될 것.
 1. 총장 및 문교부는 극소수 학생 교수의 조부장 유임 운동을 거부하고 부장의 사표를 7월 10일 까지 수리할 것.
 1. 교수단은 학생의 동의 없이 개인적으로 사직하지 말고, 교수회에서 후임 부장을 시급히 추천할 것.
 1. 학생의 총의를 반대하고 대회 파괴를 기도하는 소수 학생에 대하여는 최후 1인까지 포용할 것.
  • 1946년 7월 11일 <조선인민보> 合同에는 끝가지 反對- 경대 의학부 전체 대회서 결의

@실제날짜:460708

경성대학 합동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의 물의가 분분한데 이에 대하여 지난 8일 하오 2시 동 의학부에서는 의학부 강당에서 긴급 전체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학생, 교수, 간호원 등 관계자 500여 명이 참석하여 신중 토의한 결과 각 부문에서 6명씩 위원을 선출 합동반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적 견지에서 합동을 끝까지 반대하기로 만장 일치 가결한 후 동 5시경 폐회하였다 한다.
  • 1946년 7월 12일 <동아일보> 美國 兒童이 보낸 膳物- 文敎部서 各 國民校에 傳達

@실제날짜:460711

미국 국민학교 동무들이 조선학동들에 2천 갑의 선물을 보내왔다. 이것은 칼포니아주 소년 적십자지부 학동으로부터 보내온 것으로 비누, 작난감, 편지지, 칫솔, 치분, 크레용, 연필, 빗 등속인데 이 중에는 미국 아동들의 주소지명을 적어 넣은 봉투도 있어 이로써 조선 아동과 새로운 친선의 길이 열릴 기회도 갖게 되어 문교부에서는 11일 우선 시내 63개 국민학교 아동들에 전달하였다.
  • 1946년 7월 12일 <동아일보> 釜山, 忠州에 師範校를 設置
9월 1일부터 부산과 충주에 사범학교를 설치하게 된다고 兪문교부장이 10일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두 학교는 앞으로 교사의 재교육, 우수한 교사의 양성에 중대한 역할을 하리하고 한다.
  • 1946년 7월 12일 <동아일보> 十日부터 實施된 第一期 入試風景
男子大學에 女子도 多數- 國語, 歷史에 달린 登落線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들 손으로 施行되는 전문, 대학의 입학시험은 과연 어떠한가
더구나 기왕의 남조선 각 전문학교가 거의 다 대학으로 승격하게 된 이제 각 학교의 좁은 문은 새 일꾼을 맞기에 10일부터의 제1기 시험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첫째 지원자 수에 있어 법문과 계통이 평균 9대 1의 거센 경쟁율을 보이고 이공학부와 의학계통이 버금가는 차례로 되어 있다. 또한 남자 대학에 여자들의 대량 지원이 있는 것도 남녀 공통 교육의 좋은 예이었다.
그리고 시험과목에 있어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우리말 시험을 비롯하여 국사에 관한 것이 등락의 주요점으로 채점된다는 사실과 국어 시험에 있어 우리의 고전문학에 대한 것과 시조와 "사나운 개 코등 아물 날이 없다"는 등의 속담이 출제된 것 또한 금후 시험문제의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九 對 一의 競爭率- 醫, 理工系보다 法文系 多數
이제 각 학교의 모집인원과 지원자 수는 별항과 같다. 제1기 시험의 합격자 발표는 17일 경이고, 제2기는 20일 부터 일제히 施行된다.
  第 1 期 (括弧內는 募集人員)
   ▲ 京大 豫科 : 文科 1,612명(120), 理甲 1,329명(160), 理을 528(120), 계 3,469명(400)
   ▲ 高麗大學 : 經濟科 1,118명(100), 文科 608(100), 法科 870(100), 계 2,596명(300)
   ▲ 京城醫科大學 : 990명(100)
   ▲ 法科大學 : 男 1,200, 女 50(150)
   ▲ 藥學大學 : 580(150)
   ▲ 女子醫科大學 : 134(100)
  第 2 期
   ▲ 延禧大學(조사 중)
   ▲ 京城師範大學 : 425(100)
   ▲ 世富蘭媤醫科大學 : 1,200(180)
   ▲ 經濟大學 : 專門部 1학년 1,920(300), 同2년 73(若干), 學部 1년 41(若干), 同 2년 65(若干)
   ▲ 女子師範 : 1,000(국문, 영문, 지리, 생물, 교육, 가사, 예술 각 50명)
   ▲ 梨花大學(조사 중)
   ▲ 齒科大學(조사 중)
   ▲ 東國大學(조사 중)
  • 1946년 7월 12일 <동아일보> 合同은 消滅을 意味- 京醫專 敎職員會서 聲明

@실제날짜:460710

방금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합동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는데 경성의전에서는 이에 순응할 수 없다고 지난 10일 하오 6시부터 동병원 신강당에서 교장 沈浩燮 씨, 원장 白麟濟 씨 이하 교직원회를 열고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성명서
 우리 학교는 이미 광희 3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기 전부터 국립의학교로써 창립되었고 그동안 량으로나 질로나 우리 민족 보건에 공헌한 바가 크고 많을 뿐 아니라 현재의 교수 진용으로 보거나 교직원의 향학열과 상호 화합의 공기를 보거나 우리 학교는 가장 우수한 학원으로 자부하는 바이고 우리들은 경성의전의 발전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느끼는 바이다. 진구한 교사는 그나마 소실되고 병원은 협해해서 해방 조선의 시급한 요구의 하나인 의육의 중책의 완성을 기하기에는 절대적 곤란을 느끼는 바임으로 필요한 시설을 문교 당국에 요구했을 따름이고 역사깊은 우리 학원의 소멸을 의미하는 합동설을 인정할 의사는 위로는 교수진으로부터 밑으로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추호도 없을 뿐 아니라 학원의 발전을 해코자한 사실은 물론 그러한 생각조차 없음을 성명하는 바이다.
   7월 10일 경성의전 교수직원 일동
  • 1946년 7월 13일 <독립신보> 中等校 敎員 講習會 開催
중등 교원의 질을 한층 더 향상시키고저 문교부에서는 7월 29일부터 8월 24일까지 하기 중등교원 강습회를 경성사범대학에서 개최하는데 학과는 國語, 國文學, 社會科學, 代數, 物理, 英語, 기타 과목으로 희망자는 사범대학에 제출하면 된다.
  • 1946년 7월 13일 <조선인민보> 民主學園 建設을 要望- 민청서 학계 분규에 담화 발표

@실제날짜:460712

계속되는 분규 불상사로 말미암아 세인을 의아케 하는 학원 문제에 관하여 민청 중앙선전부에서는 12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을 발표하여 하루 빨리 명랑한 민주 학원 건설을 주장하였다.
일제의 야만적 교육 정책은 고등교육 기관으로 하여금 다만 조선 착취의 도구를 만드는 설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 오늘에 있어서는 향학열에 불타는 조선의 청년으로 하여금 활발하고 자유스러운 진리 탐구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학원 내지 문교 당국의 역사적 사명이거늘 도리어 학교를 페쇄하여 500학도를 가두에 방황케 한 법정학교 폐쇄 사실, 경비 문제라는 이해하지 못할 구실로 경대 의학부와 경의전과의 합동 문제 등 유감된 사실이 있다.
특히 의료기관과 의원의 불충분으로 남조선 일대를 휩쓰는 병마는 수 많은 인민의 생명을 빼앗고 있는 현상으로 보아도 의사의 손을 고대하는 바 큰 현하 의과 학교의 증설은 그만 두고라도 기설 학교를 폐합함은 도무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는 절대 반대하는 바이며 하루 빨리 학원을 정치적 모략의 대상으로 하는 친일파 팟쇼 분자를 몰아내고 명랑한 민주 학원 건설에 힘쓰기를 고대하는 바이다.
  • 1946년 7월 14일 <독립신보> 이. 엔. 락카드 고등국장 귀국
조선교육계에 공헌이 많은 전 학무국장 현 고등교육국장 이. 엔. 락카드 소좌는 이번 귀국하게 되었다 한다.
  • 1946년 7월 14일 <독립신보> 綜合大學 遂 實現
문교부에서는 조선이 나은 영재를 많이 배출하고자 이번 경성대학을 비롯하여 경성과 그 부근에 있는 관립 전문대학을 전부 폐지하는 동시에 새 조선을 창조하는 새 리념과 새 구상 아래 조선 교육의 전당, 거대한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어 가을 9월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官立大, 專門校 廢止코 九大學, 1大學院 新設, 9월 개교, 학생 7천 명을 수용
조선 처음으로 탄생하는 국립서울대학교의 구성은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상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외 9대학과 1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조선 교육계의 획기적인 조처이다. 종합대학의 설치에 따라 학생 수용 능력은 현재보다 훨씬 늘어 9월부터는 총 7천여 명의 학도를 수용하게 된다는데 교수 배치에 대해서는 방금 신중 인선 중이라 한다. 이번 조치로 폐쇄되는 전 대학은 경성대학, 남녀사범대학, 법전, 경제전문, 공전, 광전, 경의전, 수원고농 등인데 신설할 학교의 장소에 대해서도 지금 연구 중이다. 대학원은 현 경성대학에 둘 모양이고, 이과대학은 현 경성대학의 일부, 사범대학은 현 사범학교, 법과대학은 현 법전, 상과대학은 현 경제전문, 공과대학은 현 공전, 예술대학은 새로이 탄생하는 것인데 음악과 미술로 구성되어 장소는 군정청내 경회루 근방이 예정되고 있다. 의과대학은 현 경성대학 의학부, 치과대학은 현 치전, 농과대학은 수리대학은 수원고농이 예상지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외의 관립 전문학교의 설비는 새 대학의 분과 대학으로 존속할 것으로 1대학원과 9대학 위에는 총장과 부총장이 있어 그 위에 이사회가 조직되어 군정하에 있어서는 美人 3명 조선인 3명 계 6명이 이사회의 이사로 '국립서울대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 1946년 7월 14일 <독립신보> 學者 養成에 큰 寄與와 學生 收容 能力 增大 期待- 핏·유 양문교부장 담
국립서울대학교 창립에 대하여 문교부장 피텐쟈 中佐, 유억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왕국을 형성하고 군웅 할거하고 있는 현 교육 기관을 혁신하여 오는 9월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관립 전문대학을 폐교하는 동시에 종합대학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로서 학도의 수용력은 훨씬 늘 것이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종합대학의 학생들과 교수는 많은 문화적 혜택을 받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학자 양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이 고등 교육 기관의 설치로서 우리는 외국과의 문화 교류도 용이케 될 것이며 모든 점에 있어서 적절한 조치로 본다. 과거의 명목의 전통을 고집하여 원대한 국가의 방침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1946년 7월 14일 <동아일보> 國立서울大學校 設立에 對하야(文敎部 發表) 1

@실제날짜:460713

一. 解放 이후 文敎部의 첫 일은 위선 닫혔던 학교를 재개하는 일이었다. 국민학교를 열고 순차로 중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열었다. 이것은 일정시대로부터 있어온 학교가 완전하여서보다도 백여만 학생의 학업을 중단할 수 없어 임시 응급조처로써 旣設 학교를 그대로 열은 것이다.
二. 기설 학교를 재개한 뒤 문교부는 조선교육 제도와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교육정책이란 것은 물건을 제조하여내는 공장과 달리 이것을 그대로 접수하여 무비판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문교부는 부내 직원은 물론 널리 사회에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교육계의 저명한 인사를 초빙하여 교육심의회를 열어 교육제도를 고치고 그 내용을 개선하기에 노력하여왔다.
三. 문교부에서는 고등교육 기관의 중요성에 鑑하여 교육심의회 이후에도 계속하여 수개월을 두고 신중히 전반적 검토와 연구를 하여왔다. 이동안에 문교부의 행동을 지도하는 유일한 원칙은 "어떻게 하면 우리 고등교육 기관이 우리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봉사를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문교부로서는 일정시대로부터의 유물인 기존 고등교육 기관을 그대로 존속시켜야 할 아무런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는 기존 고등교육 기관은 일정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속화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잔재요, 우리 민족을 위한 교육 기관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이상하는 신국가에 부합한 고등교육 기관을 건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四. 이러한 정신과 원칙하에서 신중히 연구하여 본 결과 기존 고등교육 기관을 그대로 두어가지고는 도저히 우리의 목적하는 바 이상적, 능률적 교육을 실시할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기설 일정시대의 고등교육 기관에는 일관한 교육적 안도 계획도 없이 조선의 진정한 복리를 무시하고 그때 그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만들어진 무익한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거기에는 無用한 중복과 경쟁이 있서 국가의 재정을 濫費하고 形跡이 심하고 나아가서는 적은 독립한 기관들이 각기 소왕국을 형성하고 군웅할거하여 있어 피차간에 아무런 연락도 협력도 없음을 차젓다. 이상과 같은 불행한 현실을 발견한 문교부로서는 드디어 경성과 그 부근에 있는 관립 전문대학을 전부 폐지하고 새 이념과 새 구상아래 우리 국가의 전 학계를 대표할만한 거대한 종합대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신 고등교육 기관은 국립서울대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발할 것이고 학부 9대학과 1대학원으로 조직된다.
(1) 문리과대학 (2) 사범대학 (3) 법과대학 (4) 상과대학 (5) 공과대학 (6) 의과대학 (7) 치과대학 (8) 농과대학 (9) 예술대학 (10) 대학원
이상과 같이 재조직함으로써 현재 각 학교가 분립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학생수효보다 수배를 수용할 수 있는 동시에 그 교육적 질을 數段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 1946년 7월 14일 <동아일보> 最高學府를 統合 改編- 9월 신학기부터 실시

@실제날짜:460713

교육균등의 새로운 이념아래 문교부에서는 앞서 제정한 신교육제도에 맞춰 기왕의 서울대학과 도내의 각종 관립 전문(예외로 치과의전도 포함) 학교를 통털어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로 기구와 내용을 고쳐 9월 신학기부터 새로운 출발을 짓게 되었다.
國立서울大學校 傘下 9개 단과대학으로 新출발
즉, 새로운 대학제도는 국립대학교의 총칭아래 문리과, 사범, 법과, 상과, 공과, 의과, 치과 등과 예술과 등 9개의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을 두어 유기적인 연결아래 운영되는 것이다.
이는 9월 신학기부터 실시되는데 현존한 서울대학은 물론 각종 전문학교는 시설이 그대로 이관되는 동시에 종전의 전문은 전문으로써 신입생만은 신제도에 의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과대학은 대략 다음같이 제한되며 지금 문제되어 있는 서울대학 의학부의 경성의전 합병 문제도 합병이 아니라 기구의 개편으로 해석된다고  할 것이다.
 ▲ 9개 단과대학명 : 문리과대학(경대예과와 경대 문학부, 이공학부의 일부가 주최) 사범대학(京師와 京女師) 법과대학(법전) 상과대학(경제전문) 공과대학(京工과 광전 일부) 의과대학(경대 의학부와 경의전) 치과대학(사립경성치전) 농과대학(수원농전) 예술대학(신설로 미술과 음악을 전공) 등 구종이다.
理事會 두고 운영 - 關係當局을 網羅
이 국립서울대학교의 운영에 대하여서는 문교부장, 동차장, 동고등교육국장(이상 미군,조선인책임자 각 2명) 6명으로써 조직된 잠정적 이사회를 두고 그 아래에 총장, 부총장, 사무국을 두는데 이사회 임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중 두 사람만은 2년으로 한다.
이렇게 종합대학을 설치함에 대하여서 문교부에서는 13일 별항과 같이 이유서를 발표하였고 이어 문교부장 兪億兼 씨는 다음과 같이 기자단에 말하였다.
合同아니라 改編- 兪문교부장 談
국립종합대학교를 두는 것은 기왕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서로 활용하고 유능 교수의 상호 교류와 교수의 연구 시간을 많이 갖게 한다. 그리고 국가 재정상으로 보아 2중, 3중으로 분리되는 재정을 가급적 줄일 수가 있고 다른 학교의 장점을 누구나 받을 수 있게 하는 점으로 보아 반드시 유능한 인재와 학자를 양성하고 교육을 균등하게 받을 수 있게 하기에 있어야 할 제도이고 조치이다.
이뿐더러 한개의 대학은 5만권 이상의 연구 참고도서가 있어야 하겠는데 현재의 각 전문은 그러하지 못하고 유독 서울대학만은 六, 七十만의 장서를 가지고 몇백 학생만이 그 혜택을 입고 있는 형편이다.
수용인원에 있어서는 기왕은 이번에 포함된 12부문의 학교 재적생 총수는 約 6천 7백 명이었는데(그중 일본인이 4천 5백 명) 현재는 재적생 3천 3백 명과 신입생 約 3천 3백 명 도합 6천 6백의 조선인을 수용할 수 있어 언듯 보면 수용인원이 줄은 것 같으나 종전에는 임시 교원양성소 생도까지 합친 것이기 대문에 숫자상으로만은 많으나 기실은 지금이 훨씬 늘은 셈이다.
현재도 교원 단기양성은 따로히 하고 있는 터이니 일반은 이번 조치를 합병으로 오해말고 일정시대의 것은 전적으로 폐지하고 새로히 종합대학교를 세워 각 분과의 대학을 두는 것으로 알아 주기를 바란다. 이밖에 자세한 문제는 이사회와 각 교수회 등에서 부분적으로 연구토의하여 운영, 결정하려 한다.
  • 1946년 7월 14일 <조선인민보> 8 敎授에 辭職 勸告?- 재연된 숙전사건, 당국 처사 주목

@실제날짜:460713

숙전교수 구타 사건은 구금되었던 교수의 석방으로 일시에 해결의 서광이 보이는 바 지난 11일 이삼실 교수의 피검으로 다시금 재현되어 12에는 정열모 교수외 7인의 교수가 검사국에 호출되어 장시간에 互하여 심문을 받았다. 검사국에서는 이 8교수에 대하여 사직 권고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일방 숙전 이사회에서는 임숙제 교장의 복임을 결정하여 任이 임명되었음으로 문교 당국에서도 8교수를 승인하여 사건을 원만히 해결지우든가 그렇지 않으면 기여히 이들을 사직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극히 주목되고 있다.
  • 1946년 7월 14일 <조선인민보> 官立大學, 專門 全廢코 國立서울大學校 新設

@실제날짜:460713

이사에 현문교부장 등 6명.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의전 합동 문제에서 발단한 소위 경성대학 합동 문제에 관하여 수차 보도한 바 있거니와 13일 유문교부장이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계기로 이 합동 문제는 새 방면으로 발전한 감이 있다.
즉 문교부의 금반 발표를 보면 소관 각 전문대학을 서울대학에 합동하느냐 않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경성과 그 부근(수원)에 있는 관립 전문대학을 전부 폐지하고 새로 거대한 종합대학교를 신설한다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는 근본적 이념에 있었서나 그 규모에 있어서 조선 문교 정책상 획기적 처사라 할 것이나, 이사회 구성같은 조항은 앞으로 많은 사회 비판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에 의하여 금번 설립될 국립서울대학교의 조직 내용은 문리과 대학을 중심 기초 대학으로 하여 사범, 법과, 상과, 공과, 예술, 의과, 치과, 농과의 8개 단과대학외에 한개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종합대학의 운영은 6명으로 구성되는 이사회로서 할 것이나 그 임기는 6년으로 한정되어 2년마다 2사람의 이사를 개선 임명키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군정하에 설립된 이 학교의 이사회는 임시 편법으로 군정장관의 임명으로서 미국 문교부장, 동차장 및 고등교육국장 3인과 조선인 문교부장, 동차장, 고등교육국장 3인의 합계 6명의 관선이사로서 구성키로 되어있다.
  • 1946년 7월 14일 <조선인민보> 敎授들의 任命權은 理事會에 있다- 유문교부장 담

@실제날짜:460713

유문교부장은 종합서울대학교 신설에 대한 기자단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실시 시일은
 답: 9월 부터 실시할 예정이다.
 문: 현재 각 학교 재학생은 어떻게 되느냐
 답: 현재 재학생은 현재의 제도에 따라 졸업하게 될 것이고 3년 후면 신제도에 의한 중학교 졸업생이 나올 것이니 이에 따라 각 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다.
 문: 종합대학은 다른 지방에도 설치한 예정인지
 답: 서울 이남에다 1, 2쯤은 두고 싶으나 결국 그 지방 인사들의 전적 찬조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문: 종합대학교 설치에 따라 수용 학생수는 감소될 우려는 없는가.
 답: 없다. 도리어 수 배를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 대학교라는 校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답: 종합대학만을 대학교라고 하기로 되어 있어 장차 校가 붙으면 종합이고 校가 안 붙으면 단과라고 해석하게 될 것이다.
 문: 교수의 임명권은
 답: 이사회에 있다.
 문: 그렇다면 학원의 자치는 위협받을 염려가 있는데
 답: 학원의 자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교수회를 학원의 자치 기관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 1946년 7월 16일 <독립신보> 敎育界 獨裁化를 招來- 綜合大學制에 民戰서 談話

@실제날짜:460715

民戰 교육대책위원회에서는 15일 국립서울종합대학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하였다. 첫째 이 안에 의하면 서울 및 그 근방에 있는 각 관립 전문대학을 총병합하여 1종합대학으로 하고 교수의 임명과 파면을 포함한 모든 교육 행정의 운영을 6인의 관료로 구성되는 이사회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 이는 고등교육계를 관료적으로 통제함으로서 학원의 자유와 교육의 민주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으며 교육계의 독재화를 초래할 우려가 농후하다. 둘째 우리는 현재 각 전문학교는 단과대학으로 그 독자성과 전통을 살려서 발전시키고 경성대학은 종래대로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킴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함으로서만 우리는 필요 없는 혼란을 막을 수 있으며 학생을 많이 수용할 수 있고 학원의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1946년 7월 16일 <독립신보> 북조선은 시험지옥해소, 학교 증설로 응모자 전부를 수용
평양 14일발 해방 진학의 권리가 보장된 북조선에서는 신입학기를 맞이하여 희망에 넘치는 가슴을 안고 중학의 문을 두드리는 어린 세대의 입학 지옥을 절멸하는 것이 강건한 국민 양성의 근본이라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그 결성이래 이 문제를 중대시하고 학교 증설과 학급의 대대적 증가 등 학제의 대개혁을 단행하여 어린 자제를 갖은 학부형으로 하여금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는데 지난 12일 평남 교육부에서 발표한 12일 현재 평양 시내에 있는 사범, 남여중학, 남녀 상업·공업·농업 등 19교의 입학지원자 상황을 보면 모집생도 3,200명에 대하여 응모생도 3,465명이라는 숫자를 보이어 북조선에 있어서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 지옥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판명되어 학부형을 환희시키고 있다.
  • 1946년 7월 16일 <독립신보> 綜合大學 實施와 그 反響
민주주의적 새 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되는 교육의 쇄신을 단행하여 새 문화 조선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대학 전문학교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경성대학을 비롯해서 경성과 그 부근에 있는 관립 전문대학을 전부 폐지하는 동시에 조선으로는 처음으로 종합대학인 국립대학을 설립하게 되어 오는 9월부터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 국립서울대학은 문리과, 사범, 법과, 상과, 공과, 의과, 예술 등 九大學과 1大學院으로 구성되리라는 데 이는 조선 교육사상에 새 기원을 근 획기적 조치로서 우리 학계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물론 이 땅의 문화 건설 면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하다 할 것이다. 이에 본사는 교육계에 지도자를 찾아 종합대학 실현에 대한 반향을 듣기로 한다. 
민주주의 정신에 모순- 朝鮮語學會長 李克魯 씨 談 
국립종합대학을 이사회에서 운영한다는 것은 중앙 집권적이며 전체적이며 학자 단독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학원에 민주화를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학원의 자유가 있는 곳에 학술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 정신과 인간의 자치성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는 점에서 반대한다. 
특색을 말살- 李 微文中學 敎務主任 談 
다른 학교와 경쟁심이 없게 되고 학교 특색을 살릴 수 없다. 장점이라고 생각할 점은 하나도 없다. 정당 사회 단체의 통합과 달리 교육계를 오히려 萎縮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여론을 조사하고 민의를 존중한다면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교육계의 장래를 위하여 우려할 일로 생각한다. 
조선실정 무시- 人民黨 文化部 咸鳳石 씨 談 
소위 6-6-4의 학제를 기초로 각 전문학교를 전폐하고 종합대학으로 통일한다는 안은 조선의 실정을 무시하고 만연한 외국 모방에 흘러 방대한 구상과 형식만 갖추는 것이다. 또 대학 운영에 있어서도 군정 관리 6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전단하게 될 모양이나 이러한 문교 정책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대학의 자치와 학문의 연구를 위하여 자유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學園의 自治에 背馳- 京大 理工學部 金在乙 씨 談 
조선 현실로 보아 단기간에 급속도로 많은 기술자를 요청하는데 이렇게 장기간을 요하는 대학원을 통합하면 산업시설에 많은 지장이 될 것이다. 임정수립을 준비하는 임시적 현 군정하에 이와 같은 큰 문제를 결정한 것은 옳지 못하다. 理事制는 학원 자치제와 배치된다. 조선과 같이 貧弱한 후진 국가로서 私大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으로 官大 발전을 강력히 추진함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이때 그 전부를 합하는 것은 국가적 사회적 요구인 다양성에 의한 각 학교의 특징과 전통을 말살시켜서 조선 교육의 본질적 근본적 위협을 줄 염려가 있다. 
성과를 기대- 沈경성의전교장 談 
관립 전문대학을 폐쇄하는 동시에 새로운 구상을 가진 서울종합대학교로 새 출발한다는 안뿐이지 구체적 방법에 있어서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좌우간 좋은 안이라고 나는 찬성한다. 종합대학이 된다면 쓸데없는 대립 관계도 해소될 것이요 서로 좋은 시설을 활용할 수 있고 그럼으로 교수나 학생이나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결과에 있어서 이 안이 좋은 성과를 낼 것을 확신한다. 
학문향상에 큰 저해- 京城鑛專校長 崔允植 씨 談 
조선의 실정으로 보아 전부 종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종합에 있어서 구태여 장점을 든다면 교수진 실력 강화와 국가 재정상 합리적이라는 것일지 모르나 각 단과대학만으로 서도 통일 운영이 잘 안되는 현실에 추어 보아 전부 한 덩어리로 만든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 문제이다. 통합으로서 첫째 손실은 각 학교마다 특징이 있는데 이를 이를 살릴 수 없고 경쟁심이 없으니 발전성이 없게 되어 학문 향상 발전상 크게 저해될 것이다. 교수진을 강화하여 최대 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하나 실제 문제로 이렇게 된다면 사제지간에 연구할 기회도 없게 되고 자기 학교라는 책임감이 없게 되니 지적 향상은 있을지 모르나 인격 향상은 기대할 수 없다. 그밖에 많은 교수가 도태 당하게 되어 실업자를 만들 것이며 반드시 분규를 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러지 않아도 교수 부족인 우리 조선에 유감된 일이며 재정상 합리적이라 하나 교수의 부수입(시간강사 등)이 없게 되니 적어도 지금 보수에 2배는 주어야 생활 보장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학교마다 있는 재래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주어야 되며 수많은 선배를 잃게 되니 만일 문교 당국에서 이 종합대학안을 기어코 실현하려면 각 단과대학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으로 나는 생각한다.
  • 1946년 7월 16일 <독립신보> 體育 敎員 會議

@실제날짜:460717

조선의 체육 향상을 목적으로 군정청 교화국(敎化局)에서는 十七일 오후 1시부터 군정청 제일 회의실에서 체육 교원 회의를 개최한다.
  • 1946년 7월 16일 <동아일보> 國立서울大學校 設立에 對하야(文敎部 發表) 2

@실제날짜:460713

상기한 바와 같은 종합대학교를 신설함에 따라 左記하는 바와 같은 이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一. 종합대학교를 만듦에 의하여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어떤 귀중한 설비 같은 것은 한 독립한 학교의 소속이 되있는 까닭에 1년에 몇 번밖에 사용되지 않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학교에서는 이 설비가 없어 충분한 교육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 이러한 모든 설비를 종합대학교의 소유로 한다면 상기한 바와 같은 모순이 없어 전교수, 전학생이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금일과 같이 물자난으로 당분간 둥요한 교육설비를 구할 수 없음에 鑑하여 이 필요를 통감한다.
 二. 교수와 기타 교육전문 기술자를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극히 적은 수의 유능한 교수와 기술자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가장 능률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학과목에는 자격있는 교수가 1,2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귀한 존재를 一전문학교나 단과대학에 두는 것보다 종합대학교의 교수로 두어 십분 活躍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三. 국가재정상으로 보아 합리적이다. 일정한 계획하에 통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며 국가 재정으로 가장 유효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2중, 3중의 설비로 말미암은 금전의 낭비가 없을 것이며 人件 급 일반 行政 비용에 다대한 節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활용함에 의하여 현재보다 수배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국가에 주는 유익이 재정상으로 보더라도 막대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節約한 경비를 다른 고등교육 기관에 쓸 수 있는 一石二鳥의 이익이 있는 것이다. (계속)
  • 1946년 7월 16일 <동아일보> 淑明女專에 任淑宰氏 就任

@실제날짜:460717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는 교내 기구를 정돈하고 교장으로 임숙재 씨를 맞이하기로 되어 17일 상오 10시 동교에서 교장 취임식을 거행키로 되었다.
  • 1946년 7월 16일 <동아일보> 春川에는 農科大學- 각도마다 대학설치를 준비
문교부에서는 9월부터의 서울대학교 설치와 아울러 앞으로는 부산 대구 광주 춘천 대전 등도 각 지구별로 지방의 여론에 따라 국립대학을 설치할 복안을 가지고 현지와 접종 연락 중에 있다.
이 춘천에서는 농과대학을 세우고자 거금이 모집되었다 하며 대구 또는 경주에서도 많은 금액이 모여 기초가 튼튼한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各道 學務課을 部로 昇格
의무교육 실시 준비, 중등교육의 확충강화 등 각 지방 학무 행정이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문교부에서는 기왕 각도 내무부안에 있던 학무과를 부로 격승시키고저 준비하여 오던 바 지난 13일 폐회한 입의에서 드디어 이를 결정하고 이를 금명간에는 각 도로 통첩을 발하게 될 모양이다. 이에 따라 중앙청으로부터 많은 권한이 각도에 이양될 것으로 보인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建設的인 實情을 망각 -인민당 담화

@실제날짜:460715

인민당 선전부에서는 15일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 교육의 신체제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본 잔재를 숙청하고 가장 합리한 민주주의 이념과 가장 건설적이며 실제적인 교육방침 아래서 이것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기본적인 준비도 없이 돌연히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하여 학부제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학교는 국가적 건설에 곧 나아갈 수 있는 것인데 이같은 건설적인 면을 망각하고 이것을 모조리 대학화시킨다는 것은 조선을 모르는 중대한 착오이다. 이것은 공상적 체제주의이므로 반대한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官僚的獨裁化의 憂慮- 종래 방침이 타당

@실제날짜:460715

민전의 국립서울대학안 견해. 기보한 바와 같이 13일 문교 당국에서는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였는데 민전 교육대책 연구위원회에서는 이 안을 신중 검토한 결과 15일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첫째, 이 안에 의하면 서울 및 근방에 있는 각 관립 전문대학을 총 병합하여 한 종합대학으로 하고 교수 임명 파면을 포함한 모든 교육 행정의 운영을 6명의 관료로 구성되는 이사회에서 하게 되었으니 이는 고등교육계를 관료적으로 통제함으로써 학원의 자유와 교육의 민주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으며 교육계의 독재화를 초래할 우려가 농후하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는 현재 각 전문학교는 단과대학으로 그 독자성을 살려 발전시키고 경성대학은 종래대로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킴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함으로써만 우리는 필요없는 혼란을 막을 수 있으며 더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고, 학원의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敎授의 社會 地位 保障을- 교수단연합회 러장관에 제안

@실제날짜:460711

학원의 비판적 의견을 들어 달라. 이번 당국의 교수 임면 조처를 둘러싸고 발단한 대학자치 문제를 비롯하여 교수의 신분 보장 문제와 전문대학의 합동 계획 등 현하 교육 행정에 관련된 제문제에 대해서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에서는 11일 러취 군정장관과 회담하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여 당국의 선처를 요망하였다 한다.
 1. 대학자치와 교수의 인격의 존중, 교수의 지위와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가) 교수의 파면이 신중할 것을 요망한다. 대학 총장이나 부장이 조정의 권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교수회의 의견을 참작해야 할 것이요, 또 교수회의 결정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해야 할 것이다. (예,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사건) (나) 교수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될 것을 희망한다. 우리는 교수가 그렇게 처리될 말한 아무런 중요 이유도 없이 파면되고 구금당한 사건을 알고 있다. 만약에 그들이 진실로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높이 평가되는 사회적 지위와 그의 영향을 고려하여서 보다 더 온당한 조처가 있었야 할 것이다.(예, 서울대학 이공학부 도상록 사건과 숙명여전의 數교수사건)
 2. 교수와 학생의 생활보장 (가) 우리는 학교 일용품- 특히 학생에 대한- 항상 배급될 것을 희망한다. (나) 교수에 대한 대우개선이 있었야 한다. 생활보장이 없으면 그들로 하여금 교수나 연구에 헌신적 노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3. 대학의 합동과 감소 계획에 대한 이의. 우리는 대학 합동에 대한 어떠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있다. 그러나 어느 관점으로 보든지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현재 더 많은 대학의 설립과 정부에 의한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예, 서울의전과 서울대학 의학부 합동문제)
 4. 군정 정책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 대한 공명 정대한 양해. 군정은 보다 더 솔직하게 대학의 비판적 의견을 들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육 방면에 있어서 그것이 건설적인 한
 5. 이공과 교육의 적극 증진. 장구한 낡은 봉건주의의 인습과 일본의 자유로운 교육의 탄압은 조선으로 하여금 문약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독립시키고 국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하자면 이공학 교육에 대한 보다 더한 강조가 필요한 것이다. (예, 서울대학 이공학부 교사문제)
 6. 일본적인 교육 제도의 청산과 학원 경영에 대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
 7. 교육 방면의 능력있는 신진 학자의 등용.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民主主義 學園의 確立을 위하여(上)- 박극채
세계 민주주의화 운동은 세계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하여 민주주의 원칙에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근대의 인류 사회가 단기간에 비상한 발전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나 이 발전의 성과를 일부 민족과 일부 특권층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독점이 지속되는 한 인류 사회의 발전의 앞길이 막혀있는 것이다. 기성 문명을 특권층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 반민주주의의 기본 내용이며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이 이상의 문명 발전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세계적 반민주주의의 필연적 경향이다. 그리하여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독점된 문명을 후진층에게 개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후진층에 새로운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전은 민주주의 원칙에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후진층이 부르짓는 발전의 요구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적 신발전이 과학의 힘으로써만 달성된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조선의 민주주의화 운동은 조선의 비약적 발전의 태동이며 그것은 과학 조선의 육성을 기다려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것이다.
학원의 민주주의화는 조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과학 조선의 승리를 달성하는 기본적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과학과 절연되어 있었으며 진리의 탐구와 실천을 거부당하고 있었다. 후진 몽매의 상태에 억매어 있지 않을 수 없던 소이연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교육을 통하여 과학 조선의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초미의 급무로 한다. 민주주의적 교육은 위선 교육의 내용이 새로운 과학 지식의 체계화이어야 할 것이며, 인민대중의 생활 향상에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지식의 보급이어야 한다. 다음 교육기관의 조직이 진보적 학도의 광범한 동원으로서 민주주의적으로 무장하는 동시에 교육 대상을 뒤떨어진 인민 대중에 치중하여 널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데 유감없기를 기하여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학문 체계에 있어서 과거의 비과학적 신비주의적(특히 사회과학 부문에 있어서) 반 인민적 요소를 철저히 소탕하여 그야말로 민족=인민 해방의 양식이 될 만한 진정한 민주주의적 과학 체계를 급속히 수립하는 것과 또 기관의 재편성에 있어서 일제 중독적 신화 전파자와 반인민적 독선주의자로 충만된 사이비 교육자군을 장차 과학의 전당이 되어야 할 학원에서 일소하는 것이 조선의 민주주의 교육의 제 일보가 된다. 이 제 일보를 踏出을 위하여 학원의 반민주주의적 독선에 대한 민주주의 세력의 개방 건설의 요구가 최근 빈발한 학원의 불상사로 나타난 있는 것이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受驗地獄은 掃滅- 평양 19교 지원자 전부 입학

@실제날짜:460714

평양 14일 발 해방 진학의 권리가 보장된 북조선에서는 신입학기를 맞이하여 희망에 넘치는 가슴을 안고 중학의 문을 두드리는 어린 세대의 입학 지옥을 절멸하는 것이 강건한 국민 양성의 기본이라고 갈파한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는 그 결성이래 이 문제를 중대시하고 학교 증설과 학교의 대대적 증가 등 학제의 대개혁을 감행하여 어린 자제를 가진 학부형으로 하여금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는데 지난 12일 평안남도 교육부에서 발표한 12일 현재 평양 시내에 있는 사범, 남여중학, 남여상업, 공업학교 등 19개교의 입학지원자 상황을 보면 모집 생도 3,200명에 대하여 응모생도 3,465명이라는 숫자를 보이고 북조선에 있어서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지옥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판명되어 학부형을 기쁘게 하고 있다.
  • 1946년 7월 16일 <조선인민보> 淑專學生 緊急 大會
숙전 현교수들의 사임의 설을 들은 동교생들은 昨 15일 숙전 학생 긴급대회를 본교 강당에서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한다.
 첫째로, 임숙재 선생의 교장 취임은 현교수 전원을 유임하여 줄 조건하에 환영한다.
 둘째로, 소위 재건학생 처리에 관하여서는 임교장을 포함한 교수진에 일임한다. 등등
이삼실교수 기소
학원의 불상사로 세간의 주목을 이끌어 오던 숙전 사건은 일부 취조를 끝내고 보석 중이던 이삼실 교수를 13일 다시 구금하였었는데 포고령 2호 위반 혐의로 15일 드디어 기소되었다.
  • 1946년 7월 17일 <독립신보> 大學 改革에 一言함

(전략)

二
좋건 글렀건 대학 교육에 한 개의 근본적 목표를 세우고 그 위에 기구와 연구의 전 체계를 整制하려는 意識的 공부를 한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구체적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이 안은 그 여러 면에서 비판되고 시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첫째, 대학의 기구와 체제 변경은 다만 행정적 조치로서가 아니라 대학의 연구와 권위를 여하히 하면 확립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諸學의 이념은 어떠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대학의 사명에 대한 높은 인식이 전제되고 豫料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인식과 사명의 건실한 수행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전 국가 시정의 방향과 이상에 합치한 민주주의적 대학령의 발포가 있어야 할 것이요 이것은 물을 것도 없이 국민의 총 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입법기구와 책임있는 정부의 존재가 앞서야 할 것이다. 
셋째, 이러한 일체의 절차를 밟아서 제정된 대학 교육의 실제 운영은 학원의 자유 즉 연구와 학내 자치가 확보되지 않으면 일체의 이상과 개혁도 官學化의 邪道를 防衛할 길은 없을 것이다. 
三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현재 남조선 미군정의 권한에 이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교육뿐 아니라 모든 생활 부면의 쇄신과 향상을 위한 군정의 조치는 늘 앞으로 세워질 우리 정부의 기초를 닦고 그것에 계승할 유산으로서 의미가 기본적이라는 것을 强調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학원 및 문화 일반은 정책과 일 행정 기구에 예속 좌우되어 기계적으로 전환할 수 없는 체계성과 전통성이 존중되는 것인 만큰 방편적·임시적 조치로 이번과 같은 광범한 변혁의 단행이 앞으로 올 교육 이념과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吾인은 이 안의 지나친 과단성을 경계하는 바이니 그것이 아무리 군정하라 하더라도 교수와 학생에서 隔絶된 이사회에 권한 집중은 관학적 경향이 너무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국 백년지계를 생각하여 우리 문교부 諸彦의 더 한층 신중한 연구를 바라는 바이다.
  • 1946년 7월 17일 <동아일보> 國立서울大學校 設立에 對하야(文敎部 發表) (完)

@실제날짜:460713

4. 종합대학교를 설치함으로 하여 학생이나 교직원이 받을 수 있는 교화적 혜택은 실로 큰 것이다. 단과대학, 특히 직업적 단과대학의 학생은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 소수의 교수밑에서 ○히 제한된 문화적 분위기 중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일방적이기 쉽고 跛行적이기 쉽다. 이에 반하여 각 방면의 학문을 가르치는 종합대학교의 학생은 多○○○한 문화적 시설과 行事 밑에서 많은 각 방면의 교수와 더불어 ○○으로 자유스럽게 문화를 즐길 수가 있다. 이러한 교화적 혜택은 오직 종합대학교안에서만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혜택은 오직 학생들에게뿐만 아니라 교직원 내지 일반 시민에게까지 미칠수 있는 것이다.
5. 학자양성에 적합하다. 九대학 위에 대학원을 두어 각 방면의 권위있는 교수를 초빙하여 우수한 학자를 양성해 내려는 것이다. 이것은 각 ○○를 ○立한 단과대학으로 하여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 더구나 금일과 같이 우수한 교수가 희귀한 때에 있어서는 분산적 노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도 이제 잃었던 독립을 회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여 세계만방에 명예있는 일원으로서 출발하려한다. ○○○○ 우리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우리 ○○○○○○○ 우리 ○○을 ○○○○○할만한 최고교육 기관이 필요하다. 이러한 권위있는 교육 기관이 있으면 각국의우수한 대학과의문화적 교류를 용이케 하는 동시에 우리 문화를 외국에 선양하는데 있어서도 편리할 것이다.
6. 이상과 같은 이유와 이익을 고려하여 문교부는 금번 이 종합대학교를 설치케 하였다. 무릇 우리 고등교육 기관은 국민의 소유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이요, 금후도 국민의 부담에 의하여 ○○되어갈 것이다. 이들은 결코 독립한 각 기관의 소유거나 그안에 있는 교직원이나 학생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럼으로 이 기관은 국가의 요청에 의하여 국민에게 최대한도의 교육적 봉사를 완수할 때에 비로서 그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각자의 ○○을 ○○하며 ○○的 特○, ○○를 固○○하여 이 대국적 원대한 국가의 방침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종래의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의 유산이었던 ○○○들을 신국가 건설의 ○○○○○○○○하고 새로운 지혜와 원대한 계획하에 종합대학교를 신설하려는데 ○하여 일반 국민은 쌍수를 들어 贊意를 표하고 협력하여 줄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끝)
  • 1946년 7월 17일 <동아일보> 綜合大學의 再編成
一.
 서울대학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 문제로 當路者는 물론 일반 여론 또한 상당히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本欄에서도 조선 교육이 실용 방면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아니될 이 때 이 방면의 교육 기관이 중등, 전문의 각 ○○을 통하여 혹은 自進, 혹은 문교부의 방침에 의하여 점차 감소되는 경향에 있음은 유감된 현상이라 생각하여 京醫專이라는 우리 교육계의 커다란 존재가 또 다시 그 ○○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에 봉착하고 있음을 볼 때 이 不幸과 애석감으로써 이에 대한 논평을 전한 일이 있었다. 이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대한 문교부 발표로서 본다면 서울대학 의학부와 경의전의 합동에 대한 본란의 논평은 이와 같은 단순한 사실에 의거하였던 오해이었고 또 기우이었던 것이어니와 이것은 이처럼 여론이 분분하고 오해가 많았음에 불구하고 문교부로서의 명확한 성명이 그 처럼 선택하였다는 데 기인하였다고 할 수 있는 만치 이에 대한 문교부의 책임도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을 일이다. 
二.
 서울대학 의학부와 경의전 합동 문제를 구체적 대상으로 한 문교부 방침에 대한 일반적 논의, 그리고 그 논의에 기인한 바 현상적 사실에 의거한 오해의 책임으로 문교부 발표의 ○○ 등 문제의 여하는 막론하고 현단계의 문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하면 우리 고등교육 기관이 우리 국가에 대하여 최대한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지도 원칙을 기초로하여 조선교육 제도와 그 내용에 대한 전면적 검토는 드디어 일제 시대의 유뮬인 기존 고등교육 기관은 우리를 예속화하기 위한 식민지 문교정책의 잔재로써 이를 청산하는 방편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음에 대하여 하등의 이론이 없을 뿐만아니라 문교부의 ○○한 노력에 다시금 그 勞가 많음을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문교부에서 이미 검토 지적한 바와 같이 기설의 고등교육 기관에는 일관한 교육안과 계획이 없었고 조선의 진정한 복리를 위함이 아니고 임시의 형편과 사정에 의하여 형성된 우연의 산물인 만치 무용한 중복과 경쟁과 국가재정을 낭비한 결과를 만들었고 각자의 기관은 또다시 분거주의에 흘러 피차의 연락도 협력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나아가서는 각기관 각자가 공허한 자존심과 전통을 자랑하여 ○○의 ○○과 學閥을 형성함으로 幾多의 폐풍을 ○成하였던 것은 不○의 사실이었다. 이제 이와 같은 폐풍을 청산하기 위하여 관립전문대학을 전부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로서 재편성하자함이 문교부의 방안이라 함이어늘 ○○한 전통과 ○○한 학벌의 미련을 고집하여 이를 반대하려는 여론의 근거도 다시금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三.
 교육의 민주화를 기간으로 하고 고등교육 기관이 국가에 대한 최대 봉사를 가능케하려는 원칙으로 국립서울대학교의 재편성을 기획한 문교부의 방안은 그 ○○과 내용이 뚜렷한 만치 앞으로 오직 그 추진에 대한 기대가 많다 하려니와 이에서 다만 ○○되는 점은 대학의 구체적 운영 원리라 할 것이다. 대학의 운영기관으로 소수의 이사회를 편성하여 그 운영을 이에 일임하게 됨에는 그 이사회의 권한이 ○大하니만치 그운영상 폐단을 예상할 수 있게 함이다. 대학의 기능과 목적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사회의 인선과 운영에 신중한 ○○가 있기를 요망하고자 한다.
  • 1946년 7월 17일 <조선인민보> 民主主義學園의 確立을 爲하여(下)- 朴 克采
그런데 금반 문교부에서 돌연히 발표한 종합대학안은 학원의 민주주의화에 대한 원조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 대한 일대 저지 작용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하여 깊이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문명의 건설에 있어서 과학의 중요성이 심대한 까닭에 민주주의 연합국은 물론 이거니와 팟쇼화의 일로을 밟은 일본에서도 대학에 있어서의 연구의 자유, 학문의 자유, 학생의 자치, 교수 임명 사임의 교수회에 의한 결정 등은 최근 까지 확립되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정부의 반민주주의적 간섭이 경도대학에 있어서 河上교수 사건, 통천교수사건 등으로 폭발한 것은 필자가 친히 경험한 바이다.
내가 이 사건에 언급하는 것은 팟쇼 일본에서 까지라도 대학의 민주주의적 운용이 견고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진보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을 재인식하고저 함에 있는대 민주주의적 지도 원리로 일관한 미소양국의 문교 정책이 더한층 민주주의적인 점에 대하여서는 부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민주주의 연합국에 있어서는 다른 부분이 민주주의화 된 이상으로 학원이 더 한층 민주주의 원칙에서 운용되는 것은 누설한 바와 같이 과학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있어서의 비중과 또 과학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입각하지 아니하면 성립되지 못한다는 심각한 이유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제 발표된 종합대학안은 고등교육 기관의 거의 전체를 일개의 대학에 통합하되 그 운용권을 위로부터 입명된 소수인의 이사회에 일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교육계의 현상으로 보아 반민주적 통제에는 이상적일런지 모르나 학원의 민주주의적 발전과는 그 거리가 대단히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종합대학안이 나오게 된 경로는 전혀 학내의 반민주적 요소와 학외의 반동 요소와 서로 호응하여 교육 부분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원칙을 왜곡 혹은 말살하려는 강력 체제를 수립하려는 책동에서 된 것은 최근의 학원의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동향에서 넉넉히 간파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학내의 사이비 교육자가 일종의 파렴치적 특권욕에서 그 지위를 강화하려는 불순한 주관적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학 체계와 이러한 대학의 탄생 과정은 세계가 넓다 하더라도 우리 조선의 반동 노력에서만 계획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비유해 말하면 목전의 풍우를 막기 위하여 이곳 저곳 널려 있는 雜然한 재료를 되는 데로 무원칙하게 주워 모아서 급속히 대건물을 조성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대학 조직은 다만 팽배한 민주 세력을 막을 길이 없는 반민주진영에게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학원에 대한 강압 수단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이 역할을 통하여 대학이 전체 반민주 세력의 교두보가 될 것을 경계한다. 미소 공위의 재계에 의한 임시 민주주의 정부수립 이전에 이러한 반민주적 교육제를 강행하고저 하는 것은 오직 학내, 학외의 반민주세력의 의도인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는 이러한 의도의 실현을 민주주의 원칙에서 엄정히 비판하는 것이며 문교 당국이 이러한 불순한 의도에 대하여 적정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대학으로 하여금 반민주적 독재 기관으로 일탈시키는 대신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민주기관이 되도록 과학 조선의 전당이 되도록 재 출발 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 1946년 7월 18일 <독립신보> 아는 것이 힘. 배우자- 國文 皆學 運動을
문맹자 없는 문명국 조선을 건설하고자 군정청 성인교육국에서는 오는 8월 1일부터 일 개월간 전선적으로 국문 개학 운동을 도시 농촌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국문 모르는 사람을 퇴치하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각도에서는 19일부터 25일까지의 일 주일간 국문개학 강조 주간을 전개하는데 경성부에서는 22일부터 1주간 국민개학 강조기간을 열게 되어 강연으로 혹은 라디오 신문을 통하여, 극장의 막간을 이용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로 국문개학의 필요성을 고취하게 되었다.
  • 1946년 7월 18일 <독립신보> 平壤에 綜合大學 設置- 기술전문도 7교 신설을
평양 16일발 해방 해방 이후 전정한 민주주의 교육 제도의 확립을 위하여 힘써 오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온갖 방면에 걸쳐 飛躍的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북조선 최고 학부를 설치코저 민주주의적 각 정당 및 사회 단체의 건설적인 의견을 듣는 등 구체적 방책을 연구해 왔는데 마침내 평양에 북조선 종합대학을 설치키로 결정을 보아 오는 9월 개교를 목표로 준비를 실행하고 있다 한다.
평양 16일발 해방 평남도 인민위원회 교육부 16일 발표에 의하면 민주주의 조선 건설에 중견이 되며 경제 재건의 토대가 되는 우수한 청년 기술인을 대량 양성하기 위하여 평양을 비롯한 도내 각지 각종 기술전문학교 7교를 설립하기로 되었는데 신설 학교는 다음과 같다. 
 △北朝鮮技術專門, △平壤遞信專門, △平壤農業專門, △平壤鑛業專門, △平壤經濟專門, △平壤藥學專門, △平壤工業專門
  • 1946년 7월 18일 <조선인민보> 순전한 정치적 입장에 學園의 從屬 招來

@실제날짜:460716

文聯서 국립서울대학안 반대. 전일 군정청 문교부에서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을 싸고 도는 사회의 논의가 구구한데 16일 문화단체 총연맹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전에 발표된 국립서울대학교안은 문교 정책과 그 행정의 무정견성과 시대 착오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하 조선 교육 정책에 관한 전민족의 요청은 학원의 관료주의적 봉건 잔재를 청소하고 학원의 자치를 보장해서 교육자와 학도의 활발하고 능동적인 교육과 연구를 기할 것이며, 교육을 통한 민주주의적 건설을 위해 교육 기관의 확충을 도모하며 학생의 자치 훈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국립대학교안은 단과대학으로 각각 특색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11개 학부를 한 개의 관료 이사회가 교육적 입장을 떠나 순전한 행정 입장에서 기관에 예속시키여 각 학원의 자유와 그 창의성 능동성 자치와 민주화를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학생 수용력에 있어서도 감소를 결과할 것이다. 또 소위 6-6-4제도 발표이래 각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안은 유야 무야 했고 경의전과 경대의학부 합동설이 전체적 합동안으로 전환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와 같은 모순과 불투명성은 일반으로 하여금 의아심을 품게 할 뿐만 아니라 당국의 본의와는 별개로 일반 여론에 어그러짐이 크다. 당국은 전민족의 요청 밑에 학원을 확충시키여 연구의 자유와 교육의 창의성을 보장하며, 진정한 교육적 견지에서 적절한 새 조치가 있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 1946년 7월 18일 <조선인민보> 우리의 條件을 들어 주시오- 임 숙전교장 부임에 학생들 요구

@실제날짜:460717

일시 세목을 끌고 있는 임숙제 교장 취임 문제를 발단으로 일어난 숙전사건은 교수진의 사임을 계기로 일단락지은 듯한 바 말썽거리던 임숙제 씨가 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방금 하계 휴가로 대부분의 학생이 귀향한 17일에 교장부임식을 하게 되었는데 식이 열리기 전에 사표를 제출한 교수진을 지지하는 학생측에서는 현 교수진을 유임하여 줄 것을 조건부로 임교장의 부임을 환영한다. 그리고 소위 재건파 학생들의 비행에 대한 처분은 임숙제 교장을 포함한 교수진에 일임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열기한 결의문을 제출하고 응락을 요구하였는데 동 교장은 부임식을 마친 후에 회담하겠다고 일축하였으므로 그 학생들은 부임시 참석을 거부하여 취임식은 소위 재건파 학생 23명과 내빈 淑女 회원 13명 만으로 이루어져 학생회와 임교장 사이에 대립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후의 임교장의 학교 수습 문제에 대한 태도는 극히 주목된다.
  • 1946년 7월 18일 <조선인민보> 專門學校 7敎도 新設
평양 16일발 해방 평안도 인민위원회 교육부 16일 발표에 의하면 민주주의 조선 건설에 중견이 되는 경제 재건의 토대가 되는 우수한 청년 기술인을 대량 양성하기 위하여 각종 기술전문학교 7개교를 평양을 비롯하여 도내 각지에 설립하기로 되었다 한다. 신설 학교는 다음과 같다.
   북조선 기술전문학교
   평양 농업 전문학교
   평양 체신 전문학교
   평양 철도 전문학교
   평양 경제 전문학교
   평양 藥學 전문학교
   평양 공업 전문학교
  • 1946년 7월 18일 <조선인민보> 平壤에 綜合大學- 9월 개교 목표로 사무에 착수
평양 16일발 解放 해방 이후 진정한 민주주의 교육 제도의 완성에 노력 중인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의 길을 걸고 있는 북조선의 최고 학부 설치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민주주의적 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등 구체적 대책을 연구하여 왔는데 마침내 북조선 종합대학을 평양에 창설하기로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부에서는 금년 9월 개교를 목표로 그 상세한 구체적 대책을 연구 달성하고저 15일 북조선 종합대학 창립사무소를 평양의학 전문학교에 두고 본격적 창립 사무에 착수하였다.
  • 1946년 7월 19일 <동아일보> 國立大學準備會 設置- 職員은 適材 適處에 配置
문교부에서는 신교육제도의 취지에 따라 9월부터 관립대학과 전문학교를 통합 개편하여 종합대학으로 국립서울대학교를 신설하기로 되었는데 우선 현재의 서울대학에 봉직할 교직원과 신제의 대학교 설치에 협력하려는 사람들을 총망라하여 설치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착수하고 있다.
그런데 현 직원에 대하여는 국립화령의 효력이 발생하는 날부터 60일간은 봉급을 계속하여 지불할 것이며 앞으로는 직원의 임명과 직무 배치상 정리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학교 당국의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노력하리라 한다.
  • 1946년 7월 19일 <조선인민보> 現敎·職員의 進退는 學校側 必要에 따라 配置

@실제날짜:460718

국립대학에 유문교부장 담. 국립서울대학교 신설안은 문교부가 계획대로 구체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한데 동 대학 설립에 관한 법령은 조만간 발포될 것으로 보인는 바, 18일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동 대학 설립 진척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립경성대학에서는 현재까지 동교에서 봉직하고 있던 교직원과 신 개혁 운영에 협력하고자 하는 자를  총망라하고저 노력 중이다. 현 교직원에 대하여는 국립대학 설립 법령의 효력 발생일 부터 60일간은 봉급을 계속 지불할 것이다. 장차 직원의 임명과 임무 배치의 정리가 필요할 것인데, 학교 당국의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 1946년 7월 20일 <동아일보> 이번에는 全部 就學- 시내 國民校 25부터 原書 接收
해외에서 온 아동도 수용
9월 1일 새학기를 앞두고 서울시내 공사립 각 국민학교에서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일제히 국민학교 입학지원자의 원서를 접수하기로 되었다. 이번의 적령은 만 6세로부터 7세까지(1939년 9월 2일부터 1940년 9월 1일까지)와 만 7세이상부터 12세까지(1934년9월 2일부터 1939년 9월 1일까지)의 아동으로 이 연령에 해당한 아동은 외지에서 돌아와 국어를 잘 모르는 아동도 빠짐없이 각 국민학교에서 發行한 원서 용지의 해당난에 기입하여 거주소 회장(정○장)의 경유증을 받은 다음 취학 국민학교에 제출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번 입학할 아동의 예상수는 一만 ○천여 명에 달하고 있는데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취학하도록 일반에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 1946년 7월 20일 <동아일보> 일반학생의 道外 旅行은 허가
도외 旅行 제한을 하여오던 경기도 보건후생부에서는 학생들에게 한하여만 20일부터 도외 旅行을 허락하기로 되었는데 검면증과 주사증명서외 소속학교장의 증명서를 첨부해야 旅行 증명서를 내주기로 되었다.
  • 1946년 7월 21일 <독립신보> 어린이에게 열린 배움의 문- 미취학 아동 전부 수용
대망의의무교육 실시의 첫 걸음. 해방 후 처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조국의 동량이 될 학령 어린이들이 우리말 우리글로 공부하는 희망의 학교문은 열리었다. 경기도 학무국에서 9월 府內 각 공립학교에 취학할 아동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모집한다. 그리고 府에서는 적령 아동은 물론 적령기를 넘는 미취학 아동도 빠짐없이 출원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 出願適齡 
    가. 1946년 9월 1일 현재 만 6세이상 만 7세까지의 아동 (1939년 9월 2일부터 1940년 9월 1일까지에 출생한 아동) 
    나. 1946년 9월 1일 현재 만 7세이상 만 12세까의 아동 중 미취학 아동 (1934년 9월 2일부터 1939년 9월 1일 까지에 출생한 아동) 
▲ 出願期間 
    自 1946년 7월 25일 至 同 8월 10일 
▲ 出願節次 
    가. 원서 용지는 7월 21일 부터 각 공립 국민학교에서 교부함. 
    나. 지원자는 용지 서식 소정 사항을 기입한 후 거주 町 會長의 經由證을 受하여 취학 구역 국민학교에 제출할 것 (취학할 학교는 町會 또는 구청)에 문의할 것. 
▲ 入學式 
     1946년 9월 2일(月) 오후 2시
  • 1946년 7월 21일 <동아일보> 넓어지는 進學의 좁은 門- 公私立 夜間中學制
문교부에서 9월부터 실시를 준비
국민학교는 물론 중등학교의 좁은 문은 해방 후도 좀처럼 넓어지지 않고 입학시험이란 난관은 여전하게 어린 학동들, 학부형들의 가슴을 조리게 하고 있다. 금년도의 초등학교 졸업생은 대략 30여만 명을 그중 約 2할 가량이 중등학교에 진학하고 그 나머지의 대부분은 시험의 좁은 문에 걸리어 교육균등의 혜택도 못받고 헤매고 있는 터이다.
이렇다고 예정대로 학교를 늘릴 수도 없고 정원외로 수용할 수도 없는 만큼 문교부에서는 남조선 각 초급 공사립 남녀 중등학교에 야간중학을 설치하여 거리에 헤매이는 학동에 진학의 길을 열어주고자 방금 획기적인 방책을 세워 근근 그 결정안을 발표하는 동시에 9월 신학기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여 개학할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남조선만이라도 각 학교에서 다 야간 중학을 설치하게 되면 혜택을 입을 학동은 約 2만 명 내지 3만 명으로 그 성과는 의무교육 실시와 아울러 크게 기대되고 있는 터이다.
李中等敎育課長 談 : 科目等도 制定하고-각 중등교 교장들과 협의
이에 대하여 문교부 중등교육과장 李興鐘 씨는 다음과 같이 야간부 설치안의 개략을 말한다.
중등학교에 야간부를 준비 계획을 세우고는 있으나 아직 정식 결정이 안된것이나 상부의 정식 발표가 근근 있을 줄 안다. 우리는 그 동안 이의 계획을 세우고 우선 시내 각 중학교 교장들가도 협의하여 실시에 대한 것을 토의한 일은 있으며 교과목과 수업시간도 작성 중에 있다. 야간중학은 공사립 남녀 중등학교에 두는 것으로 우선 초급중학에만 한하려 하는데 적은 시간에 주간 중학생과 같은 실력을 갖게 하려니까 실시에 있어 저윽이 어려운 점이 있기는 있으나 이점을 최대 한도로 덜하여 가며 점차로 실시 학교를 늘려가 볼까 한다.
五 中學에 夜間部- 인가되면 신입생 수용- 道 學務課서 申請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우선 주간과 동등으로 취급하는 야간부를 새로히 설치하기로 계획하여 군정청 문교부에 신청 중이다. 교육균등의 정신 아래 중등교육의 문을 열어주는 야간부 설치안은 우선 경기도내 5개 공립중학교에 9학급을 설치하고 또한 주간부의 단학급 학교에 2학급제를 실시하려는 것인데 이게 실현되면 1천 5백 명 가량은 더 취학할 수 있다. 문교부로부터 승인만 하면 이번 9월 학기부터 실시하도록 도학무과로서는 만반 준비 중이다.
  • 1946년 7월 21일 <조선인민보> 單科大學 그대로 存置하라

@실제날짜:460718

교수단연합회 국립서울대학설립안에 성명. 13일 문교부장 유억겸 씨가 기자단에게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은 각 방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거니와 더욱 현재 고등교육에 직접참여하고 있는 각 학교 교수로서 조직된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에서는 이 안이 발표되자 신중한 토의를 거듭하여 오던 바 18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군정장관 및 문교 당국에 건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째,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안은 11개의 전문대학의 자치권을 빼앗아 1개의 독재적 관료 이사회의 통제하에 두려는 데 본의가 있는 것으로 교직원 뿐만 아니라 학생의 자치권은 근본적으로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11개의 전문대학 중 사실상 경대 이공학부, 정경상학부, 경제전문, 鑛專, 의학부를 폐지 혹은 축소하게 되므로 건국 도상에 가장 필요한 과학 정경 부분이 위축됨이 확실하다. 이것은 일제 시대의 문교 정책의 잔재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 수를 줄이고서 학생 수를 더 많이 양성한다는 것은 억설이며 학계를 혼란시킬 뿐이다. 8.15 이후 혼란 중에서도 현재 잘 발전되고 있는 대학 전문교육의 폐지 개편을 실시하여 교직원을 대량적으로 개편하여 평지 풍파를 일으킴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가 우리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원칙을 주장한다.
 1. 10개의 전문대학은 그 학교의 장구한 역사와 특색을 살리고 그것을 존중해서 그대로 단과대학으로 발전시킬 것. 농과는 농장 부근에 공과는 공장 부근에 두는 것이 옳다.
 2. 경성대학은 종래와 같은 종합대학으로 하고 다시 몇 과를 증설하거나 확장시켜서 완비한 대학으로 발전시킬 것.
 3. 비인격적 팟쇼적 학장 부장들을 민주적으로 파면하고 교육 행정을 명랑화 시키며 관료적 파면을 없앨 것.
  • 1946년 7월 23일 <독립신보> 單科大學으로 하라- 경성공전 학생회서 반대 성명

@실제날짜:460721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회에서는 지난 7월 21일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과반 문교부에서발표한 국립서울종합대학에 관한 학제 개혁을 토의하였는데 그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반대결의를 하였다 한다. 
 一. 국립서울대학으로 합동이 되면 현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대부분은 현 상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우리 학교로 통합케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학교 현 재학생 4백여 명, 신입생 3백여 명 계 7백여 명 이것으로도 현 우리 학교의 교실 수 실험 설비 등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다. 
 一. 대학 교수는 강의의 기계가 아니요 항상 교수와 학생은 일체가 되어 진리를 탐구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수 수의 여유가 있어야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수 수가 부족한 이때 교수를 정리하여 교수 수를 감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一. 거대하고 유일한 규모를 가진 이 최고 교육 기관을 6명의 행정 관료인 이사회에 일임하는 것은 총장 이하 전교수의 지위가 종속적 관계에 있게 되고 학원의 자치성은 교수 뿐만 아니라 학생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말살될 것이다. 그럼으로 현 대학 기구는 현 경성대학은 완전한 종합대학으로 不備한 점을 증설 확대하고 10개 대학은 단과대학으로서 발전하게 하여 그 학교의 특색을 살려야 할 것이다.
  • 1946년 7월 23일 <독립신보> 夜間 男女 中等校- 9월부터 개교, 2만 명 수용
교육의 기회균등을 꾀하고저 군정청에서는 男女 중등학교에 야간 교육 제도를 설치한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후 문교부에서는 교육 새제도 밑에 오는 9월부터 야간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기본 방침을 세웠다. 즉 이번 7월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해가 약 30만이나 되는데 이에 대한 중등학교의 입학 수용 능력은 약 2만 밖에 못되었으므로 결국 나머지 28만은 여전한 입학난에 진학의 길이 막혀 버렸다. 
그러하다고 해서 지금 당장의 사정으로는 중등학교를 신설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선 급한대로 야간부를 설치하게 된 것인데 문교부로서는 男女 공립 초등·중등학교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야간부를 만들어 이에 약 2만의 생도를 교육하기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교원이 제일 문제가 되어 있다. 이는 초등학교와 달라서 중등학교는 그 교육 정도로 보아 주야겸임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까닭으로 이의 조절을 철저히 한 교원의 인적 구성을 연구 중에 있다. 그리고 이미 경기도에서는 제1단계적인 중등학교 야간부 설치안을 세웠다하며 문교부로서는 결정된 야간부 설치 요항을 불원 발표하게 되었다.
  • 1946년 7월 23일 <동아일보> 독립에 불타는 학도의 결합- 강력한 통일 전선을 조직
25日 全國學生總聯盟大會
국토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정계는 좌우로 대립되어 조국의 완전 독립은 요원할 뿐으로 국민으로 하여금 비분통탄을 금치못하게 하는 이 때 애국의 열정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의 역사적 통일전선이 해방 1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결성되는 것이다. 즉 지난 12일 독립학생전선을 비롯하여 유학생동맹 등 각 학생총연맹의 13개 학생단체와 普專, 水原高農, 京大, 京師, 梨專, 世專, 延專외 28개교 대표 138명이 시내 남산정에 모여 전국학생총련맹 결성발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날 모인 대표 전원은 한 사람의 이의자도 없이 새로 출발하려는 련맹 결성의 기본 원칙과 통일된 구체적 방침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찬성하여 드디어 현맹 결성의 가결을 보았다.
그리하여 오는 25일 오후 한시부터 시내 정동례배당에서 동련맹 결성식을 하고 자주독립촉성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표로 한 전국적 일대 학생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는데 련맹결성 후에는 첫 行事로써 해방 1주년 기념 전국학생대회를 개최하리라 한다.
  • 1946년 7월 23일 <동아일보> 放學동안엔 職場을- 西北學生會에서 要望
방학이 되어도 길이 막혀 고향에 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헤매는 서북학생에게 따뜻한 원호의 손을 뻗치자고 시내 광화문통 구동아일보 사옥내에 있는 서북학생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여름방학이 되어 기숙사로부터 거리로 나오게 된 서북학생에게 직업을 주고 또한 금품을 주어 그들을 기아에서 구출함으로써 새학기에 다같이 씩씩하게 취학하도록 일반의 눈물겨운 동포애를 바라고 있다.
  • 1946년 7월 23일 <동아일보> 二次 試驗 實施- 中央女大서 應試못한 학생들 위해
中央女子大學에서는 이번에 제일차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수해와 호열자 관계로 지역적으로 교통이 두절되어 시험 못본 학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2차 시험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한다.
   ▲ 원서제출기한 : 7월 22일부터 8월 11일까지
   ▲ 입학시험 : 8월 12일부터 3일간 이라한다.
  • 1946년 7월 24일 <독립신보> 京城附 成人敎育協會 結成式

@실제날짜:460722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을 일소하고 일반 대중의 공민적 수준 향상과 생활 개선 향상을 기하려는 경성부 성인교육협회 결성식은 지난 22일 하오 2시 부내 덕수국민학교 강당에서 金부윤, 張부학무과장을 비롯한 각 정회장, 교육가, 사회 유지 등 4백 여 명 참집 아래 거행되었다. 金부윤 개회사에 이어 張부학무과장의 동협회 취지 설명이 있었고, 안재홍 씨를 의장으로 추대하여 동협회 회측을 심의 검토한 후 임원 선거에 들어가 회장에 김부윤, 부회장에 장부학무과장, 홍병○ 씨, 이사에 안재홍 씨와 44씨를 선정하고 동 하오 5시 반 폐회하였다.
  • 1946년 7월 24일 <독립신보> 러장관 기자단과 談- 서울대학 理事會에 政黨色 없다

@실제날짜:460723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국립서울종합대학교 문제를 비롯하여 쌀을 대량으로 은익하고 있는 모리배 등에 대하여 러취 군정장관은 23일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 - 9월부터 새 출발하는 국립서울종합대학 이사회의 인선 방침과 그 기능, 교수회의 관계는 어찌 될 것인가. 
 답 - 가. 현재 계획으로서는 조선에 국민 정부가 수립된 때에는 대통령이 이사회의 인선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고로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이사회는 문교부 대표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나. 이사회는 서울대학 운영 기관이므로 이는 교수 임명을 포함하고 여러 문제의 최후적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나는 6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대한 의구를 피력한 것을 여러 신문의 사설 중에서 보았는데 모신문 사설에는 '이러한 조직체는 독재주의를 초래하는 것이다'라고 라고 기재되고 또 어느 사설에는 '특수기관이다', '파시즘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나는 종합대학이나 단과대학을 운영하는 수인의 조직체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실제 미국에서도 공사립을 막론하고 모든 고등 교육 기관은 이러한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교육가와 저명 인사가 이러한 운영 기관에 임명되는데 그들은 각종 의견과 각 정당을 대표한 자이다. 실제 문제로써 이러한 이사회는 정당 색채를 띠운 기관이 아니다. 이 대학을 운영하는 실제적 방법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즉 6명으로 구성된 이 조직체는 취급하기에 그리 곤란한 정도 인원 수가 아닌 동시에 전제적 결정을 방지하기에도 역시 충분한 인원수이다. 이것이 미국 각 대학에 있어서 민주주의적 방법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나로서는 결코 이 기관이 조선에 있어서 민주주주를 위하여 그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실로 이 기관은 우리가 가장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미국의 방법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夜間 中等校 問題 
 문 - 이번 중등학교의 지원자수는 입학 허가 인원의 5배 이상이나 되는데 이들을 위하여 현존 국민학교 중등학교 교사를 개방하여 양심적 교육가로 하여금 중등 정도 야학 교육을 실시케 할 생각이 없는가. 
 답 - 여러가지 경우에 있어서 각 학교에 2부제를 실시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 중요 문제는 유자격자, 교원, 교과서, 학용품, 재정에 관한 문제이다. 성인 교육국에서는 야간에 다수의 초등학교 교사를 차용하여 조선에 맹인을 일소하고저 하고 있다. 이렇게 문교부에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야간학교를 설치하도록 노력 중이다.
  • 1946년 7월 24일 <독립신보> 夏季 敎員講習會

@실제날짜:460729

하기 교원 강습회를 남녀 경성사범대학 공동 주최로 다음과 같은 요항에 의하여 개최하는데 다수한 참가를 요망하고 있다. 
   ▲ 參加資格 : 현 중등교원 및 자격을 가진 男女 
   ▲ 講習日字 : 7월 29일부터 1개월간 
   ▲ 學課 : 朝鮮語, 朝鮮文學, 社會硏究, 數學, 物理化學, 
       體育, 英語, 英文學, 博學, 家庭經濟, 美術工藝(任意選擇) 
   ▲ 志願接受 : 7월 28일부터 사범대학으로 
   ▲ 授業料는 무료이며 寄宿은 사범대학 기숙사
  • 1946년 7월 24일 <동아일보> 京大以外는 單科大學으로- 京工專 學生會서 決義文 發表

@실제날짜:460721

시내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회에서는 21,2 양일 두차례에 걸치어 학생대회 명의로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로써 현 서울대학은 완전한 종합대학으로 할 것이고 다른 10개 대학은 단과대학으로서 발전하게 하여야 한다고 사회 각당에 결의문을 보내었다.
   一. 공업전문은 다른 학교 생도까지 수용할 능력이 없다.
   一. 대학교수는 강의하는 기계가 아니다. 몇 분 안되는 교수에 의한 많은 학생의 질은 저하된다.
   一. 6명의 行政官으로 된 이사회가 운영한다는 것은 학원의 자치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 1946년 7월 24일 <동아일보> 京城府 成人敎育會
성인교육을 철저히 하고자 경성부에서는 22일 경성부 성인교육협회를 조직하고 각 정회장, 교육자들로서 성인교육에 대한 실천 방책을 연구하기 시작하기로 하였다.
  • 1946년 7월 24일 <조선인민보> 中學二部制 計劃, 이사회 정당색채 배제- 러長官 談

@실제날짜:460723

러취 군정장관은 23일 기자단과의 정례 회견석상에서 신설될 예정인 서울대학교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 수산 경제에 관하여 출입기자단과 다음과 같은 일문 일답이 있었다.
 문: 9월 부터 새출발하는 국립서울대학교의 이사회의 인선 방침 내지 그 기능 또 이것과 교수회의 관계는 여하.
 답: 현재 계획으로서는 국민 정부가 수립될 때에는 대통령이 이사회의 인선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 수립까지는 동 이사회는 문교부 대표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이사회는 서울대학교 운용기구이므로 동 회는 교수 임명을 포함한 제반 문제의 최후적 결정권을 갖고 있다. 나는 6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대한 위구를 피력한 것을 여러 신문의 사설 중에서 보았는데 나는 한 종합대학이나 단과대학을 운용하는 수인의 조직체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실제적 문제로서 이러한 이사회는 정당 색채를 띠는 기관은 아니다. 6명으로 구성된 이 조직체는 취급하기에 그리 곤란한 정도의 인원수가 아닌 동시에 전제적 결정을 방지하기도 역시 충분한 인원인 것이다. 나로써는 결코 이 기관이 조선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문: 중등학교 정도의 야간 교육을 실시할 의도는 없는가?
 답: 각 학교에 이부제를 실시할 것을 고려 중이다. 문제는 교과서와 재정 문제인데 성인교육국에서는 야간에 다수의 초등학교를 사용하고 조선에서 문맹을 일소하고저 하고 있다. 문교부에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야간학교를 설치하도록 노력 중이다. (후략)
  • 1946년 7월 25일 <독립신보> 科學 發展을 沮害- 京大 醫學部學生會서 反對 聲明

@실제날짜:460722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 일동은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이 발표되자 이에 대하여 신중히 검토해 오던 중 지난 22일 동 의학부 학생대회를 열고 토의한 결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반대 결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聲明書 
 一. 11교를 1개의 종합대학으로 통합하여 관선 이사로서 관료적 통제하에 이를 지배하려 함은 학원의 자치권을 탈취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이다. 
 一. 종합대학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학교수는 감소되고 이것은 불가피적으로 학생수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 
 一. 학부 조직의 결함은 조선 장래의 과학 발전에 심대한 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一. 본 종합대학안에 있어서 우리 학문 발전상 간과치 못할 것은 대학이 연구 기능을 상실케 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조항으로 인하여 본 의학부 학생 일동은 본 종합대학안에 대하여 全的 반대를 표명하는 바이다.
  • 1946년 7월 25일 <동아일보> 苦學會 設置- 博愛院 本部에서
시내 御城町 박애원 본부에서는 귀환 전재 고학생, 극빈으로 취학을 못하는 학생, 또 고향을 38이북에 둔 학생들을 구하자고 고학회를 설치하여 이에 가입시켜 배움과 굶주림에서 구하기로 하였다.
  • 1946년 7월 25일 <동아일보> 大學案에 反對- 京大 學生會서 聲明

@실제날짜:460723

京城醫專과 서울대학 醫學部 합동 문제가 나자 서울대학에서는 반대 운동을 계속하여 오던 중 지난 13일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표된 후 다시 2차나 학생대회를 열고 이에 반대 운동을 계속, 23일에 재차 다음과 같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一. 11교를 1개의 종합대학교로 통합하여 관선 리사회로써 통제, 지배하려함은 학원의 자주권을 탈취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
   一. 학교수가 감소되고 이것은 불가피적으로 학생수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
   一. 경제학부와 정치학부의 폐쇄와 리공학 계통의 縮小는 조선 과학 발전에 장해를 가져오는 것.
  • 1946년 7월 25일 <동아일보> 培英大學 創立 期成會를 結成
시내 리화정 구철도학교 교사에 있는 培英大學院은 1천만 원 재단으로써 李始榮 씨를 회장으로 배영대학창립기성회를 결성하고 방금 3백여 명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 1946년 7월 25일 <동아일보> 西北 學生에 獎學金- 趙俊호 씨의 特志
매월 7만 5천 원 제공
문교부에서는 시내 북아현정 사는 조준호 씨의 특지로써 월 7만 5천 원의 장학금을 전문대학에 주기로 되어 재단법인을 조직할 계획이라 한다. 이 장학금은 전문대학생 제3학년 이상의 학생으로 38이북 학생 約50명에게 매월 1인당 1천 5백 원 가량을 지급하여 고학하는 인재의 육영에 이바지하기로 된 것이라 한다.
  • 1946년 7월 25일 <조선인민보> 각 學園의 傳統을 살리라- 과학자동맹 談

@실제날짜:460723

국립서울대학안에 대하여 조선과학자동맹에서는 7월 23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학원은 각각 특수한 전통과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을 무리하게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만든다는 것은 이상일런지 모르지만 시기 상조이면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통합시킨다 해도 전 학생을 한 교사에 수용할 수 없고, 설비 이용도 불가능한 것이며, 교수 부족도 현상대로 두고 여유있는 분으로 타교에 겸임토록 하면 좋지 않은가.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는 통합을 이해하기 곤란하다.
  • 1946년 7월 25일 <조선인민보> 學園의 自治성을 抹殺

@실제날짜:460723

鑛專, 工專서도 國立서울大學設立案에 反對. 9월 부터 실시한다는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의 창안자인 문교 당국은 이에 관한 법령까지 방금 준비 중이라고 하나 경성대학을 비롯하여 각 정당단체에서는 이미 반대를 표명, 이와 같은 반대론은 날이 갈수록 더욱 높아 가고 있는 이 때 23일에는 다시 鑛專, 工專 양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대하고 별항과 같은 결의의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과연 이와 같은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교 당국은 계획안대로 실시할 것인가 매우 주목되는데 신학년에도 가까워 오는 이 때 학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문교 당국에 대하여 민주주의적인 조치를 과감히 희망하고 있다. 24일 鑛專, 工專에서 발표한 결의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鑛專
 1. 기술적 문제에 있어서는 교사 시설이 먼 거리에 분리되어 있다는 점. 각 학교 교사 설비가 부족한 현상에 비추어 증설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이공학부와 같은 것은 교사가 없으므로 도리어 금년부터라도 교사 협소에 의한 다대한 곤란을 느낄 것이며, 따라서 집적되어 있는 시설을 설비한 곳이 없으므로 시설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2. 이번 통합 방법은 독재적 관료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계통, 동일한 학과에서도 각 과의 운용은 그 과를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순조로울 수 없다. 하물며 9대학을 통합한 1개 종합대학을 6명의 이사로써 충분히 운용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더욱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하니 이러한 획기적인 변혁은 과도정부의 손으로서만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써 통합 문제가 교육계의 여론을 무시하고 실시된다면 그것은 교육의 전면적인 파멸일 것이니, 광대전 학생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바이다.
  
工專
 1. 국립서울대학이 설치되면 현 경성대학 이공학부는 우리 학교로 통합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학교 학생 700여 명만 하여도 현 우리 학교 7교육 실험설비 등으로 보아서 수용력이 초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수용한다는 것은 무리요, 수용력 증대는 더욱 불가능하다.
 2. 교수는 연구의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수를 정리하고 교수 수를 감소하여 교수의 부담을 크게 함은 부당하고 소수 교수에 의한 많은 학생의 질은 저하한다.
 3.국가 발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교육 문제에 있어서 이상의 두 조건을 무시하고 경비 문제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며 최고 교육기관을 6명의 행정 관료로 구성된 이사회에 일임하여 총장이하 전 교수의 지위가 이에 종속된다는 것은 학원의 자치성이 근본적으로 말살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6개 대학은 단과대학으로 발전시키여 각 학교의 특색을 살려야 한다.
  • 1946년 7월 26일 <조선인민보> 國立서울대학교안에 여론 속출

@실제날짜:460723

政經系 學園 廢止는 不當- 조선교육자협회서 성명
서울국립대학교안에 대하여 23일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문교 당국의 심심한 고려를 요청한다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금번 문교 당국 발표의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신중히 연구 검토하여 보면
첫째, 각 전문대학을 통합하여 교직원의 임명, 파면을 포함한 모든 교육 행정을 6명의 이사회(임기 6년)의 통제하에 둔다는 것이니 이것은 전제적 교육 행정을 강행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목전에 두고 학원의 혼란을 야기시킬 뿐, 不○히 각 전문대학의 자치권을 박탈하여 학원의 민주적 발전을 저해시키고, 나아가 학생의 자치 훈련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 11개 전문대학 중 사실상 경대 이공학부, 工專, 鑛專을 합하여 한개의 공업대학으로 축소되고 정치경제학과는 폐지되어 문리과대학으로 포함되며 의학부 역시 축소될 것이니 이러한 기술 및 정경계통 학교 폐지는 일본 노예 교육때 보다도 가 일층의 개악이며 학교를 합하여 감소시키면서 학생을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한개의 공론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공업 계통의 3학교 금년도 학생 약 800명을 현재의 공업전문학교(경대 이공학부는 교사가 없음) 일 교의 시설만으로 여하히 교육시킬 수 있을까, 기술 교육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현재에 있어서 이와같은 시책은 무○에 가까운 조치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금번 개편 문제는 반드시 사전에 該審議會나 또는 기타 다수의 교육 관계자로서 구성되는 ○○회에서 공명 정대하게 토론되었어야 할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밟지 않고 돌연히 전제적으로 강행하려고 하니 어찌 그 속사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넷째, 학생 교직원이 방학에 들어간 시기에 이 통합안을 실행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계의 혼란을 일으키는 이러한 돌연적인 종합대학안을 발표하는 것은 그 文面上의 이유가 일견 합리적인듯 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조선의 현실적 정황에 부합하지 않는 탁상 계획임이 불원간에 입증될 것이니, 이것은 조선 교육 백년대계를 오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설비의 상호이용, 강의의 자유라는 것도 현재의 시설과 거리 등에 겨누어 보아 실제 운용에 많은 불편과 불합리는 멀지 않아 체험할 것을 단언하나니 도리어 현재의 구조를 아쉬운데로 확충 개선하여 실정에 맞는 임시 편법을 연구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모름지기 문교 당국의 성의 여하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상의 5가지 이유에 의하여 금번의 통합안의 실시 유보를 지적하나니 거족적으로 열망되고 있는 임시정부 수립 전야를 당하여 문교 당국의 심심한 고려를 요청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 1946년 7월 26일 <조선인민보> 우리는 絶對反對- 경대 이공학부 학생대회서

@실제날짜:460724

경대이공학부에서는 7월 24일 상오 10시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절대 반대키로 하고 문교 당국에 재고를 요청하는 결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교육계에 있어서 중요한 대학과 각 학교 책임자는 일반 사회와는 극비리에 입안되었고, 학생의 방학 시기를 이용하여 공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안을 검토하면
 1. 관료적 이사회가 학원을 지배하기 때문에 교수 이하 학생은 완전히 종속화되고 학원 자치가 말살된다.
 2. 각 학교의 특성을 말살하여 생명없는 학교를 구성하고 혼란을 일으켜 진정한 발전을 저해한다.
 3. 학생의 취학권이 양적질적으로 증가된다는 것은 ○설이고 각 학교 시설 상황으로 보아 연구와 실습이 불편할 뿐이다.
 4. 자연과학과 법리교육을 위축시킨다.
  가. 공업교육 ○○이전면적으로 철폐되는 것.
  나. 경대 정경학부와 理大를 철폐하여 정치, 법제 부문이 전○된 것. 이런 이유로 국립대학안을 반대하는 동시에 조선 교육 발달을 위해 다음 안의 실시를 요구한다.
   ▲ 경성대학은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부족한 학과를 확충시킬 것.
   ▲ 경대 이공학부 교사를 즉각 반환하고 모든 교수를 즉시 복직시킬 것.
   ▲ 각 학교의 특수성을 살려 급속히 완전한 단과 대학을 발전시킬 것.
   ▲ 교수 학생의 생활난을 해결하여 연구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5. 합병안에 쓰는 힘을 문화 향상과 국민 계몽 의무교육 실시에 치중할 것.
 6. 통합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 학교 도서관, 교수 시설 등을 상호 융통 개방케 할 것.
  • 1946년 7월 27일 여름음악교사강습회(Summer Music School) 시작

46년 7월 27일부터 시작된 4주 일정의 초등교사를 위한 음악강습에 남한 각지에서 285명이 참석하였다. 그중 272명이 졸업을 하였다.[121]

  • 1946년 7월 27일 <독립신보> 京大는 綜合大學으로- 경대 법문학부 학생대회서 결의
각 전문교는 단과대학으로 승격. 경성대학 법학부 학생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聲明書 
 7월 13일 발표된 '국립서울대학교'안은 조선 교육계의 획기적인 개혁인 만큼 우리들은 이 안의 중대한 의의를 인식하고 국가적 견지에서 사회 각 단체의 의견을 참고하여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1. 이사회 구성이 관료적이며 독재 행정으로 일탈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게 될 것이며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부문의 縮小 폐지이며 이는 일제 식민지 교육 제도를 실질적으로 답습한 것이다. 다음에는 각 단과대학의 재편성에 있어서 너무도 무원칙하여 불합리하다. 또 11개교를 통합하여 9교를 신설함은 새로 신설 확대되어야 할 조선 교육계를 縮小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면 이 안을  문교 당국에서는 어떠한 원칙과 이유로서 채택하였는가. 당국의 언명에 의하면, 一. 재정의 합리화 二. 학생의 수용력의 증대 三. 現有 설비 및 교수의 유기적 최대 활용이라 하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一. 재정은 현재의 경비의 縮小는 불가능한 것이다. 文敎를 중시하는 당국의 文敎費는 너무도 과소한 것이다. 재정의 합리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구체적 수자를 從示하라. 二. 학생수는 각 학교의 현재 상태로 포화 상태인 것이며 학생수와 종합대학안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이다. 현재 제도로서는 충분히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三. 각 학교의 시설 및 교수 수와 학생 수로 보아 현재에도 오히려 시설과 교수 수는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교수를 혹사함으로써 학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따라서 학생의 질적 저하와 민족의 문화적 퇴보를 초래할 것이다. 이상으로서 우리는 문교 당국의 의도와 국립서울대학안은 그 시기가 적절 못함을 지적함과 동시에 만일 당국의 의도를 존중하며 그 의도를 살리는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건설안을 제시하는 것다. 
  1. 서울대학은 종합대학으로 확대 강화하고 각 전문학교는 단과대학으로 승격하여 발전시킬 것. 
  2. 학원을 민주화하고 무용한 혼란과 마찰로서 교수 및 학생을 안심하고 학문에 종사하게 하기 위하여 조윤제 씨 같은 '파쇼'적  '비인격'적 교수는 파면할 것.
  • 1946년 7월 27일 <독립신보> 理事會는 편파를 難克- 鑛大 合同反對鬪委서 聲明

@실제날짜:460726

서울鑛工대학 합동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26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여 서울종합대학의 설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現今 제시되고 있는 합동 방법을 고찰하면 합동으로서 발생하는 해독이 너무나 심각함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1은 각 학교의 교사 시설이 먼 거리에 분산되었다는 것과 각 학교가 부족한 교사 설비 밖에 없다는 현상에 비추어 증원은 절대 불가능하고 도리어 이공학부 같은 것은 교사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교사를 주선하지 않고 타교의 교사를 이용케 한다면 도리어 금년부터서라도 교사 협소에 의한 다대한 곤란을 느낄 것이며, 따라서 집적되어 있는 시설을 설비할 곳이 없음으로 시설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그 2로는 이번 합동 방법은 일본 제국주의 잔재 즉 독재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즉 종합대학을 이사회에서 운영케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동일한 계통 동일한 학교에서도 각 과의 운영은 그 과를 知悉하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순조로울 수 없다. 하물며 9대학을 통합한 1 대종합대학을 6명의 이사로서 충분히 운영할리 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임명제로 조종되었으나 그 편파적임을 면할 수 없다. 이에 인해서 학원이 편파적으로 되고 유능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敎場을 떠나게 되며 교수와 학생이 자유를 구속당하고 불안을 느낄 염려가 다분히 있다. 우리들 鑛工대학 학생은 쓰러져가는 학원을 간과할 수 없어 전 학생의 명의로 합동을 반대하고 학원을 위하여 끝끝내 투쟁할 것을 맹서한다.
  • 1946년 7월 27일 <독립신보> 初等音樂講習 開催

@실제날짜:460729

초등학교 음악 하기 강습회는 二十五일부터 漢城女子師範學校에서 개강하는데 지원자는 二十五일 오전 10시까지 동교에 출두하면 된다.
  • 1946년 7월 28일 <독립신보> 敎育協會 主催의 全國敎育者大會

@실제날짜:460731

조선교육협회와 전문대학연합회에서는 오는 31일 오후 1시 京城藥專 강당에서 전국 교육자 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각 전문대학의 교수, 조교수, 강사 및 중등학교 교직원은 빠지지 말고 출석 하기를 바란다 하며 당일 토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교직원 및 학생의 생활 문제 
 2. 국립서울대학교 안에 대하여 
 3. 기타
  • 1946년 7월 28일 <독립신보> 根本的인 敎育 改革은 臨時政府 樹立時까지 保留

@실제날짜:460727

경대이공학부 교수단서 성명.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단에서는 27일 문교 정책과 서울종합대학 설치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종합대학의 설치 계획의 중지를 비롯하여 친일 교육자의 驅逐과 아울러 파면당한 민주주의 교육자의 복직을 요망하였다. 
우리 이공학부 교수단은 민주주의 조선 건설을 위하여 군정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문교 정책에 대해서 다음의 제의를 하고 當路者에 과학적 검토를 비는 바이다. 
1. 일제의 주구배, 황민화 운동에 분신하던 친일 교육자를 학원에서 驅逐하고 이들의 비열한 수단에 파면된 진정한 민주주의 교육자를 복직시킬 것. 
2. 조선 유일의 최고 이공학 교육 시설인 공학부 교사 사용을 실현시킬 것. 
3. 교육 정책의 근본적 개혁은 정부가 수립된 때까지 이를 보류할 것. 
'서울종합대학교안'은 결과에 있어서 학계에 혼란만 일으키고 말 것임으로 이 계획의 중지를 바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 1. 현하 조선의 급선무는 생산 회복에 있는데 조선의 제생산의 후진성과 기술자 부족, 중견 기술자의 급속한 대량 육성이 절대로 요청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今般의 안은 우리 민족 발달사상에 가장 중요한 금후 수년간에 어서 결국은 이 중견 기술자의 육성을 막아버리고 실정이 허용치 않는 방대한 대학안은 대학의 질을 떨어뜨려  一擧 兩失의 폐해를 초래하여 누를 백년에 남긴다. 
이유 2. 문교부에서 발표한 6개 항목의 이점이란 것은 각 학교 교사가 一지역에 집중되었을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유 3. 학원의 자치는 학문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절대로 요청되는 것이니 비록 군정하라 할지라도 관료에 의한 전면적 통제 간섭을 획책하는 금반의 종합대학교안은 절대 반대이다.
  • 1946년 7월 28일 <독립신보> 大學은 어데로? - 本社 主催 座談會 (1)

@실제날짜:460727

眞理 探求의 意慾 充滿 
- 解放 후 學生의 氣質도 明朗 
8.15 해방 이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읍니까만 특히 교육 문제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부문으로 그 중대성은 날로 배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대성에 비추어 민주주의 새 조선 건설의 원동력이 되는 교육 문제 해결에 대한 도움을 삼고저 오늘 이 좌담회를 열고 여러 선생님의 고견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현재 야기되고 있는 문제만으로도 특히 대학 문제 6-6-4년제의 문제라든가 오늘 교육 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견지에서 이를 해명하여 사회의 관심을 일으키고 좀더 현실적인 실현 방법을 자유로운 입장에서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崔編輯局長 인사에서)
 --- 출석자 ---
 ▲ 이극로 씨(조선어학회장) ▲ 이승기 씨(경대 이공학부교수) ▲ 김지정 씨(경대 이공학부교수) ▲ 한인석 씨(경대 이공학부 교수) ▲ 윤행중 씨(경대 법문학부교수) ▲ 박술음 씨(휘문중학교장) (無順) 
 본사측 윤상무이사, 최편집국장  (장소 雅敍園) ▲ 본사측 :  먼저 8.15 이전의 우리의 교육계를 중심으로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의 교육계의 일반적 현상과 교수아와 학생의 기질에 대하여 尹行重선생께서 먼저 .. 
 ▲ 尹行重 씨 : 다 아시다시피 8.15 이전은 다분히 형식적이었습니다. 또 무슨 진리를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해야 좋을지는 도저히 어렵고 또 사실에 있어서 기술이 필요했고, 또 어떤 의미로 보아서  평교육자로서 본의는 아니겠습니다만 소극적이었습다. 그러하던 것이 8.15 이후의 조선이 되니까 현재는 자기 자신이 해방된 것도 알고 교육자로서 말하자면 청년 학도들에게 대하여 미흡하였다는 책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정말 자기 실력에 부족함을 느끼고 동시에 그때 교육은 형식적이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또한 해방전에는 학생 자신들이 먼저 선생에 대하여 그리는 이상을 갖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태도는 전연 없습니다. 대단히 명랑하고 정말 진리를 탐구하자는 의욕이 선생 이상으로 넘쳐 있는 것을 간절히 느끼어 스스로 큰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 朴術音 씨 : 중학교에는 이상을 쫓는다는 것보다는 실정적으로 일본인이 있을 때보다 더 한층 선명하고 생도들끼리 일본인이 있을 때 보다 (중략) 한 예로는 입학식 준비 같은 것도 우리 손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 하는 意氣에 차 있다고 보입니다. 
 ▲ 본사측 : 일본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방법에 대하여 이선생님이 좀 .. 
 ▲ 李升基 씨 : 글세요. 노-트식의 것은 나도 반대입니다. 온종일 쓸 뿐이지 하나도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래 우리는 ○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같이 자유스럽게 사제끼리 학문을 가지고 대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연구 속에서  결국 원자탄 같은 것도 발명되었다고 봅니다. 
 ▲ 韓仁錫 씨 : 이번 일본 교육의 장단점을 적어 보고된 중 13가지 결점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도 사제간이 냉정하다는 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조선에서도 사제간에 탁 터놓고 한번 공부하는 기분을 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李克魯 씨 : 선생님이라고 전지 전능이 아닙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교육의 본질일 것입니다. 
 ▲ 본사측 : 그 다음 해방 후의 학교 설비와 인재관계에 대해서 이승기 선생님 좀..  
 ▲ 이승기 씨 : 나는 일본 있을 때 연구실만 있었기에 현재의 경성대학의 이공학부 밖에는 모르니까 그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설비는 전연 없으며 실험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은 어째서 이에 대하여 사회의 관심이 이다지 나타나지 않을까요. 금년에는 학생을 모집을 합니다만은 교실은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專賣局으로 京工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9월까지 일정한 집을 못 얻으면 배울 곳이 大體 없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여론이 잠자고 있다는 것은 너무 냉정한 태도인 것 같이 느낍니다. 신문에는 새 조선의 공업의 필요성을 부르짖지마는 그 토대가 되는 공업교육은 전여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金志政 씨 : 무어 사회 여론만이 냉정하다고 만 볼게 아니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보면 일제시대의 습관성이 남아 가지고 말하자면 자기 개인과 직접 관계가 없으면 그저 그때 그때만 넘어가면 ... 이러한 생각을 전 민족이 한결 같습니다. 
 ▲ 이극로 씨 : 사회 여론이 안 일어난다고 하면 나는 그 관여자 자신들의 노력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사회 문제는 좀더 자신들이 구체적으로 사회 인사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민족에 대해서는 비관을 갖는 분도 많습니다마는 나는 퍽 낙관하는 바입니다. 
 ▲ 일동 동감입니다. 
綜合大學案에 期待難 - 실제로는 初等 敎育 擴充이 急務 
 ▲ 본사측 - 다음에는 종합대학의 의의라는 점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 尹行重 씨 - 문교 당국의 발표를 보면 세가지 점에서 이번 종합대학안이 되었다고 이해됩니다. 하나는 설비 또 하나는 교수문제, 세째로 재정 문제로 그 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설비를 공평하게 쓰면 학생을 많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교수를 같은 전문 방면끼리 서로 이용하면 적은 교수로서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게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볼 때 앞으로 조선에 정말 자주 독립 정부가 수립되드래도 거기에서도 방침이 변경되지 않을 만한 근본적인 방침이라 할 만한 이론이 확립었다면은 좋지만은 우리로서는 이번 안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 이러한 교수법이 학생들에게 현실 문제로서 이익을 주겠는가 의문입니다. 또 校舍는 어디 그렇게 있습니까. 이공학 같은 것은 문과 계통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설비가 필요할 것이니 종합한대야 얼마나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읍니다. 다음은 교수 문제인데 이에 있어서는 그렀습니다. 지금은 권위있는 교수라든가 전문 학자라는 것이 대단히 부족합니다. 문교부 당국에서는 이러한 전문 학자를 기를 방침도 세워야 할 터인데 현재 학자진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여 양성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학자가 2년이나 3년에 되는 것이 아니고 교수로 하여금 너무 강단에만 서게 해도 안되고 적당히 서야 할 것인데 이 안을 보면 교수진 자기들의 공부가 조금도 늘지 않을 만큼 바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교수를 경비 관계라고 해서 줄이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교육에 바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동요를 가져 오지나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바입니다. 나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만은 전문 과목에 있어서 2시간 가르치려면 적어도 2-3시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에 있어서는 좀더 자유스러운 시간이 많키를 바라는 바이올시다. 그러므로 이번 안과 같은 것을 무리하게시리 강행한다면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줄 압니다. 문교 당국의 방침을 반대하기 위하여 하는 반대가 아니라 어느 과정에 있어서 앞으로 독립 정부가 서면 해도 될 것을 구태어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헛 수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납니다. 
 ▲ 본사측 - 대학 교육의 本旨에 비추어서 종합대학안을 어찌 보시나 말씀하여 주십시오 
 ▲ 김지정 씨 - 글세요, 대체로 말씀하면 대학이 너무 범람합니다. 아무 실력은 없어도 그저 모두 다들 대학으로 승격하고저 하는데 이것이 향상심에서 그렇다면 좋게 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는 실질적으로 먼저 필요한 것은 대학이 아니라 그 이하의 초등학교이고 기껏 일본의 고등학교 같은 것이 있어야 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번의 6-6제 같은 제도도 조선 현실의 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합대학안도 좋다. 그러나 가르칠 사람이 없습니다. 人材 문제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이 있었지만은 용이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문교부로서는 종합대학으로 편성하면 교수의 손이 남는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와 반대일 것입니다. 
 ▲ 본사측 - 대학의 자유라는 점에서 ... 
 ▲ 이승기 씨 - 이사회의 인물 구성이 맘에 맞지 않습니다. 적어도 종합대학교의 이사회는 대통령 직속의 대통령급 인물이래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일동 笑聲)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대학에 와서 운용해야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러한 이사회라면 필요합니다. 가르칠 사람이 누구냐 하는데 그 점은 합리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상세한 면은 구체적 안이 아직 안 나왔으므로 나로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만은 그 인적 구성에 있어서 불만입니다. 
 ▲ 尹行重 씨 - 결국 교육심의원과 이사진의 구성 맴버로서 교수를 파면하는 권리에 있어서 구성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욱 이 통합안에 대해서는 현직의 교수들에게는 일언의 상의조차 없었던 점에서 결론질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길을 터놓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의 논조를 보면 이사회의 구성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국가적 견지에서 검토하야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전제제도라이라고 논파한 것은 없습니다. 문교부 책임자들이 여기 왔더라면 물으려 했는데... 
 ▲ 본사측 - 신문 기자의 입장에서도 역시 앞으로 조선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을 좀 더 아카데미즘을 강조해야 좋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종래에는 정치적 요구에만 항의해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이번 문제에 있어서도 교육 행정의 면에 치중하지 말고 아카데미즘의 전통의 발전을 위하여 이상적인 대학안이 고려되었어야 할 것이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는 상아탑적인 건설의 제안이 필요치 않은가 생각합니다. 
 ▲ 尹行重 씨 - 그러나 이런 점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대학은 그 국가의 두뇌입니다. 순전히 자연과학부이면 모르겠습니다만은 사회과학 부문의 사람으로 보아서는 또한 학문 자체가 그러한 만큼 정치적으로 생각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이러한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으려면 교육자 자체의 인간성의 면과 제도의 면이 두 가지가 긴밀하게 연관성을 가져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이 있던 바와 같이 교육 행정가가 교육가를 좌우할 수는 없다는 것은 아마 근본적인 우리의 인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尹行重 씨 - 그런데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이번의 합동문제에 대해서 느끼된 것은 그렀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경성대학에 흡수되었다고들 생각을 하고 있고 한편 경성대학생들은 경성대학대로 대학이 해체되었다고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도식적으로는 그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마는 이런 안이 시기 상조이다. 정부 수립 후에라도 문교정책이 확립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 박술음 씨 - 중등학생들로부터 이런 것을 많이 듣습니다. 대학에서 교수가  ○끼게 되니까 전모양으로 대학간의 우열이 없어져서 좋다. 이러한 것과 대학교수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것은 편파하지 않은 상아탑적인 입장에서 교수위주였으면 하는 아까 말씀에 아카데믹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 이극로 씨 - 그렀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권분립 즉 신앙의 자유, 정치의 자유, 학술의 자유 이것입니다. 문교가 정치나 학술을 지배해서는 안되고 또 정치가 신앙과 학술을 도구로 삼아도 안됩니다. 학술이 문교나 정치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변 같은 것이 아무리 거듭되어도 학교나 문교에도 영향을 주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삼권의 독립없이는 문명한 국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外來 敎育의 模倣 禁物 
 ▲ 본사측 - 그러면 새 조선의 교육 현상에 대하여 ... 
 ▲ 이승기 씨 - 글세요, 지금 교육자로 계신 분이 日帝교육을 받은 것은 그들 자신의 생활 환경 때문이었다고 보는게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육 개념 문제 보다는 실은 학문의 문제입니다. 교육계에 계신 분들이 과거의 살아온 것에 비추어 행동的으로 일을 했으면 합니다. 
 ▲ 한인석 씨 - 이공학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면 어느 정도까지는 國定한 주입식 교육을 해보았읍니다만은 거기에 대해서 중대 결함을 잘 알았습니다.  즉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별적 지도라는 것이 대학 교육에는 필요하다고 보는 바입니다. 
 ▲ 김지정 씨 - 그 말씀은 대단히 좋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우수하다고 ○○ 조선에 수입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합니다. 일본 시대에는 결국 말하자면 무조건하고 교육 제도를 본따 왔지만 지금와서는 그 가치를 그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조선 현실로 보면 서양 사람의 아카데미크 '○'을 그대로 본받으면 조선적인 것의 발전은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 교육 제도를 지금 조선에는 미국식으로 북조선에는 소련식으로 하자는 단순한 모방 즉 그들이 다 전승국이니까 일본 보다는 낫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 박술음 씨 - 중등학교 생도들의 심정으로 본다면 일본주의 교육은 이미 없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의 습관성이라든가 그런 무의식한 면은 남아 있겠습니다만은 의식적인 교육 정신은 남아 있지 않다고 봅니다. 정신은 그렇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남은 것이 있겠지요. 지금의 문교 당국 어느 책임자 말에도 영어를 가르치지 않고 어려운 문구를 가르치고 있다는 평이 있습니다만은 제가 그때 가르친 것은 '언더슨 학스레이'의 수필입니다만은 또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피교육자의 상입니다. 漢字廢止에 異議가 없다. 
 ▲ 본사측 - 참 이선생님 한자폐지에 관해서 말씀 듣고 싶습니다. 
 ▲ 이극로 씨 - 한자폐지는 아무 異論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외국학자가 그 '산스크리트‘나 '다꾸르바' 어를 베운 것과 같이 학문상 필요한 사람은 한자를 배우지만 보통 조선 사람이 한자 안쓰면 한문말을 못합니까. 우리 버릇이 '정부'하면 의당히 한자로 '政府'라고 쓰던 버릇을 했으니까 이상할 것 같지 그냥 한글로 쓰는 버릇을 하면 아무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닙니까.  그야말로 '길을 두고 배로도 분수가 있지'. 보십시오. 지금의 중국에는 자기 민족이 고유한 그 한자를 우리 보담 먼저 폐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즉 漢音字母를 만들어서 한자를 弊履가리버리려고 하고 있읍니다. 세계에서 훌륭한 자기 글자를 가지고 남의 글자를 빌어다가 쓰며 버리기를 아까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문맹이 많다 하지만은 실상은 우리 글을 아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치니까 그렇지, 9할이나 문맹일 리는 없습니다. 
 ▲ 본사측 -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 1946년 7월 28일 <독립신보> 學生鬪爭共委서도 反對 聲明

@실제날짜:460727

師大 工大 鑛大 經專 京大 三學部 醫大京大豫科 학생들은 國立서울大學校案에 반대하고자 國立서울大學校反對學生共同鬪爭委員會를 결성 二十七일 오전9시반 경대 의학부 강당에서 결성식을 거행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포하였다. 
國立서울大學校案은 國家的 民族的 立場에서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反對한다. 이案은 偏狹性과 非民主性을 免치 못한 고로 民主主義 建設의 核心이 될 最高 學園으로서는 그 害惡이 甚大할 것을 指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滿天下에 呼訴하는 同時에 이 案의 撤回를 主張한다.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京城醫專에서도 學生 大會
문제의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중심으로 경성의전에서도 왼쪽과 같이 학생 대회를 개최하고 신중한 토의를 하기로 되었다 하는데 문제가 문제인 만치 부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무○참석하기로 바라고 있다.
  일시: 7월 30일 정오
  장소: 동교 부속병원 신강당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根本的改革은 政府樹立後- 京城大學 理工科 敎授團이 反對
서울종합대학안 분규.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단에서는 28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문교 정책과 서울대학안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여 당로자의 과학적 검토와 고려를 요청하였다.
 1. 일제의 주구배, 황민화 운동에 매진하던 친일 교육자를 학원에서 추방하고 이들의 비겁한 수단에 의하여 파면된 진정한 민주주의 교육자를 복직시킬 것.
 2. 일제의 식민지 문교 정책인 과학교육 억압책을 청산하고 이에 확충을 획책하며 조선 유일의 최고 이공학 교육 시설인 이공학부 교사 사용을 실현시킬 것.
 3. 국가 영원한 입장에서 배려되어야 할 교육 정책의 근본적 개혁은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를 보류할 것. 금반 계획 중에 있는 서울대학교안을 결국에 있어서 학계의 혼란만을 일으키고 말 것이므로 이 계획의 중지를 바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하 조선의 급선무는 생산 회복에 있는데 조선의 제 생산의 후진성과 기술자 부족은 중견 기술의 급속한 대량 육성이 절대로 요청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반의 안은 우리 민족의 발달 사상에 가장 중요한 금후 수 년간에 있어서 결국은 이 중견 기술자의 육성을 막아버리고 실정이 허락하지 않는 방대한 대학안은 대학의 질을 떨어뜨려 일거양실의 폐해를 초래하여 ○를 백년에 남긴다.
  둘째 문교부에서 발표한 6개 항목의 이점이라는 것은 각 학교 교사가 한 지역에 집중되었을 때만 성립되는 것이고 현실과 같이 수원, 서울, 고양군에 넓게 분산되어 있을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수용력을 감소시키고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셋째 학원의 자치는 학문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절대로 요청되는 것이니 비록 군정하라고 할지라도 관료에 의해 전면적 통제 간섭을 자초하는 금반의 종합대학교안은 절대 반대다.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단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民族文化의 退步 招來- 경대 법문학부생들이 성명

@실제날짜:460725

경대 법문학부생들은 지난 25일 학생대회를 열고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국립서울대학교안은 과연 민주국가 건설 과정에 있어서 조선 교육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 이사회 구성요소가 관료적이여서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게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 이 안에 있어서 특히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자연과학 부문의 축소 폐지이며 이는 일제 식민지 교육제도를 실질적으로 답습한 것이다.
 △ 11교를 통합하여 9교를 신 설립함은 새로 신설 확대되어야 할 조선 교육계를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그리고 당국의 언명에 의하면 1) 재정의 합리화, 2) 학생 수용력 증대, 3) 현설비 및 교수의 유기적 활용이라 한다. 그러면 과연 이안을 실시함으로써 그 의도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현재 당국의 문교비는 너무도 과소한 것으므로 더 축소함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교의 합리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구체적 숫자를 제시하라. 학생수는 각 학교가 현재 포화 상태이며 학생수와 종합대학안은 하등의 연관이 없는 것이다. 현재의 제도로서 충분히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교수를 혹사함으로써 교수의 연구에 지장을 주며 따라서 학생의 질적 저하와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의 퇴보를 초래할 것이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문교 당국의 의도와 안이 완전히 배치됨을 지적하고 다음을 제안한다.
  서울대학은 종합대학으로 확대 강화하고 각 전문학교는 단과대학으로 승격하여 발전시킬 것
  학원의 민주화에 무용한 혼란과 마찰을 제지하고 교수 내지 학생이 안심하고 학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조윤제와 같은 파숏적 비인격적 교수를 파면할 것.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生命없는 學校 構成- 自治權 民主化를 蹂躪
학생반대공동투쟁위원회 성명. 경대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를 비롯하여 사대, 의대, 공대, 광대, 경대, 경대豫科 등 학생대표들은 7월 27일 상오 9시 부터 경대에 모여 서울대학교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조국 학원의 장래를 진실로 우려하며 순수 냉정한 태도로 다시 신중토의 한 결과 동 안에 대한 전적인 반대를 공동으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문교부 이하 각 정당, 문화 단체 및 일반 사회에 진정하고 건의하는 동시에 끝까지 투쟁하기를 공동 결의 하였다.
   성명서
 1. 11교를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통합하여 관선 이사회로써 관료적 통제하에 이를 지배하려 함은 학원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이다.
 1. 교수를 정리하고 약간의 여유를 두지 않고, 교수를 혹사하는 것은 조선의 교육을 파멸에 인도하는 길이요, 국립서울대학교안의 "대학원은 일부 소수인 연구밖에는 용납하지 못한다."
 1. 본안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학교수는 감소되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학생수의 감소를 초래하고 또한 학교 조직의 결함은 조선 장래의 발전에 심대한 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그 예로는 경제학부와 정치학부의 폐쇄와 이공계통의 축소 등을 들 수 있다.
 1. 본 안은 각 학교의 특성을 말살하여 생명없는 학교를 구성케 한다.
이상의 견지로써 우리들 학생 일동은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전적 반대 한다. 학무 당국, 일반 사회와 일언의 상의도 없이 계획을 진전시키고 상기과 같은 결함을 내포하며 심지어 하계 휴가 중에 발표한 데에 대하여 극히 유감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금반 이안의 철회를 강경히 주장한다.
 1. 종래의 종합대학(경대, 사대 등)은 그 자체를 보충 확대하고 종래의 단과대학은 그 전통과 특성을 살려서 확대 육성 시킬 것.
 1. 국민 교육 시설 확충의 긴급성을 확인하고, 이에 노력을 기울임이 문교 당국의 당면한 과제일 것.
 1. 교수 학생의 생활난을 해결하여 연구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서울大學 敎授講師大會 開催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동안 교수자치회 문제와 의학부 합동 문제로 당국에 진정하고 교섭을 계속해 왔는데 지난번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안 발표로 전기 2대 문제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음으로 신사태에 대책을 강구키 위하여 좌와 같이 전 대학 교수, 강사, 조교수 대회를 개최하다고 한다.
 일시, 7월 20일 오후 2시
 장소, 법문학부 중강의실
  • 1946년 7월 28일 <조선인민보> 全國敎育者大會를 召集- 양심적 대책 강구를 위해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둘러싸고 각계의 여론이 분분한데 이 문제를 중심으로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에서는 공동 주최로 다음과 같이 전국교육자대회를 개최한다. 각 전문대학의 교수, 조교수, 강사 및 중학교 교직원은 無루 참석함을 바라며 각 문화단체 및 신문사에서도 다수 참석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는데 가장 양심적인 교육자들이 모이는 이 대회는 크게 주목되는 바 있다.
   일시: 7월 31일(수) 오후 1시   
   장소: 경성 藥專 강당
  • 1946년 7월 29일 여름교사대학(Summer Teachers College)

46년 7월 29일부터 8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여름교사대학에 공식적으로 606명이 등록을 하였다. 397명이 현직 중등교사였고, 91명은 예비중등교사, 48명은 초등교사, 그리고 70명은 대학생들이었다.[122]

  • 1946년 7월 29일 <조선인민보> 敎育의 創造성을 喪失- 종합대학안, 大豫재경학생회서 반대

@실제날짜:460724

독재, 관료, 침체화할 위험성. 문교 당국의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표된 이후 일반 유지, 사회 단체, 각 학교 단체들의 반대 여론이 계속 대두하여 여론이 분분하거니와 24일 경성대학 豫科, 재경학생회에서도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문교 당국의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성명서
신성한 진리 탐구의 전당이요, 신국가 건설의 기초로써 학원의 독자성과 민주화를 위하여 연일 분투를 아끼지 않은 문교 당국의 성의와 노력에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 우리는 그 성과에 있어서 당국의 실정에 어그러지는 현상이 적지 않은 현상을 지적하고 냉정한 이성으로는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다수의 사건과 재차 발표되었던 문교부안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문제의 국립종합대학안도 유감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문교 당국의 희망 예측을 배○하고 이 통합안이 줄 영향이 교육계의 독재화와 관료화 침체화에 나타날 위기성을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 또 이러한 교육계의 창조성과 개성의 상실이 여하히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우리는 깊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문교 당국의 노력과 열성에 아울러 이해있고 과학적 진보적 원칙을 확립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청년학도의 진의를 양해하고 교육과 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금후 문교 당국은 마땅히 위대한 국가백년지대계를 세울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에 대하여 ○○반대이다.
  • 1946년 7월 30일 <조선인민보> 奴隸敎育 招來- 사범대학서도 반대 성명

@실제날짜:460726

서울사범대학 학생회에서는 26일 본교 강당에서 재경학생대회를 열고 이번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신중한 토의를 거듭한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동 안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기를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민주주의 학원 건설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기본 과제의 하나이다. 이에 입각하여 우리는 국립서울대학교안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이안의 전적인 철회를 요구한다.
1. 관료이사회로는 학원의 자치권과 민주화가 유린된다.
2. 교수시간 초과로 교수의 연구 여유가 없고, 한개의 대학원 만으로는 일부 소수의 연구밖에 안된다.
3. 정경학부 폐지와 이공학부 축소는 조선 학도에게 다시 노예교육을 베풀려는 것이다.
4. 재정 운운하며 학원을 축소시킨다는 것은 조선 사람에게 학문을 배우지 말라는 말이다.
5. 합동은 학교의 전통성과 특수성을 말살한다.
6. ○○기본의 하나인 과업을 학교, 교수, 학생에게 일언 반구의 상의도 없이 비밀리에 조직한 것은 비민주성을 如句히 ○○하는 것이다.
  • 1946년 7월 30일 <조선인민보> 商科아닌 經濟大學을 要求- 종합대학을 經專교수회서 반대

@실제날짜:460729

서울국립대학교안에 대하여 경성經專에서는 지난 29일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서울국립대학교안을 우리 교수회에서도 신중히 검토한 결과 본 안은 유해 무익이라는 전원 일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문제의 중대성에 비추어 특히 좌기 3조항을 강조하여 동 안의 철회를 주장한다.
1.본 안의 구성으로서는 조선 현실에 부적당하다.
1.본안은 학원의 자치와 연구의 자유가 구속되고 문화 향상이 저해된다.
1.본 교는 상과대학이 아닌 경제대학으로서 발전하기를 원한다.
  • 1946년 7월 31일 <조선인민보> 朝鮮獎學協會 誕生
재단법인 전국장학협회와 전국 농촌문화협회 또 조선고학생연맹 삼자 합동하여 금번 새로 조선장학협회를 결성 회장에 이극로, 부회장에 고여위 양 씨가 각각 취임하고 금후 시내 남대문 일정목 97에 사무소를 두고 강력한 장학기관으로 전국적 문맹퇴치를 위하여 문화계몽운동과 근로학생 원호 지도사업을 전개하리라 한다.
  • 1946년 8월 1일 <조선인민보> 理事會는 專制的이다- 경대 이공학부 직원회서

@실제날짜:460729

경대이공학부 직원은 7월 29일 오후 2시 직원대회를 개최하고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아래의 이유로써 이를 절대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1) 기술자 다량 양성은 이공계통의 학교를 개별적으로 대량으로 설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종합대학교안은 此 點에 馳行되는 것이다.
 2) 소수인의 관료로 구성된 이사회로 남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을 운영함은 독선적이고 전제적이요 그리고 또 학원의 민주화를 저해할 가능성이 많은 것.
 3) 설비의 상호이용, 청강의 자유라는 것도 현재의 시설과 거리 등에 비추어 실제 운영에 있어서 절대 불가능한 것.
 4) 각 학교의 특성을 말살하고 ○○○에 의한 ○○○을 저지하는 것.
  • 1946년 8월 1일 <조선인민보> 設置案을 끝까지 實現- 文敎當局서 態度 表明

@실제날짜:460731

문교부에서 신설하려고 하는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절대 반대를 표방하고 경성대학을 비롯한 經專, 工專, 鑛專 교수협의회 등 학도들은 공동투쟁위원회까지 조직, 문교 당국에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였던 바 이에 대하여 문교 당국에서는 31일 공동투쟁위원회, 각 학교 대표 18명 초청, 설립하려고 하는 종합대학교안은 끝끝내 실현한다는 문교 당국의 강경한 태도를 거듭 표명하였을 뿐이고, 이날 대표단의 의견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고 경성대학교수단 대표도 이날 문교 당국자와 회견하고 문교부안에 반대를 표명하는 동시에 재음미를 요청하였다 한다.


1946년 8월

  • 1946년 8월 1일 <조선인민보> 全員一致로 反對可決- 국립서울대학설립안, 경성대학 전교수회서 토의

@실제날짜:460729

국립서울대학교안이 한번 발표되자 교육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도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키여 물의가 분분하고 각 학교 학생회에서는 일제히 반대의 기치를 들어오다가 학생공동투쟁위원회까지 조직하여 맹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 중이며 관계 학교 교수회에서도 여기 저기서 반대를 표명하여 오던바 드디어 29일 오후 2시 부터 경성대학에서는 본교 법문학부 중강당에서 교수, 조교수, 강사 등 80여 명 참석하에 전학교 교수회를 열고 장기간에 걸쳐 신중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조선현실에 비추어 보든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보든지 또는 진실로 조선 교육계의 장래를 위하여서든지 동 안이 전적으로 옳치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여 전원 일치로 반대하기로 가결하고 당국에 대해 동 안의 철회를 요구하는 동시에 사회에 성명하기를 결의한 다음 각 부(법무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豫科)에서 각 5명씩의 실행 위원을 선정하여 건설적인 대의안을 작성 건의하며 적극적으로 동 안이 완전 철회 되도록 운동을 전개하기로 되었다.
  • 1946년 8월 2일 <독립신보> 經濟專門校 緊急 學生會

@실제날짜:460803

경성경제전문학교 동창회에서는 大學 專門合倂, 국립서울대학설치안이 모교의 존폐와 상업 경제 교육의 休戚에 관한 중대 문제에 비추어 오는 3일 오후 2시 시내 종로 2丁目 YMCA 3층에서 긴급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모교와 모교에 관련된 상업 경제 교육 문제에 관하여 신중 협의하게 되었는데 특히 시내에 거주하는 동창생은 전부 출석하기를 요망하고 있다.
  • 1946년 8월 2일 <독립신보> 理事會는 과도 조치, 國立大學에 兪문교부장 談
비등하는 일반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서울국립대학은 9월부터 실현될 가능성이 농후한데 군정청 유문교부장은 국립대학 이사회의 기능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일부에 있어서 국립대학 이사회 理事 임명에 대하여 오해가 있는 듯하다. 이사는 군정이 실시되는 동안 군정이 임명하는 것이며 6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사회는 순전히 잠정적이고 군정 실시 중에만 국립대학에 관한 일을 운영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여야 한다. 조선 정부가 서면 조선 정부의 주권자가 현재의 학부를 포함한 9학부에서 각각 1명씩 합계 9명을 임명할 것이다. 
이사의 임기는 6년이나 임기 연한은 동일하지 않다. 임기가 끝난 이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2년만에 한 번씩 3명을 임명, 조선 정부의 首席이 최총 임명할 때는 3명은 임기 2년, 3명은 임기 4년, 3명은 임기 6년으로 하여 2년 교대 임명 제도를 채용하게 될 것이다.
  • 1946년 8월 2일 <독립신보> 綜合大學 反對 聲明을 트루맨 大統領에 發送

@실제날짜:460731

전국교육자대회에서 결의. 전국교육자대회는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연합회의 공동 주최로 지난 7월 31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악학대학 강당에서 교직원 500여 명 참석하에 개최되었다. 동덕고녀 趙容郁 씨의 개회사로 일제 교육의 중점은 식민지화와 노예화 교육이었지만 해방된 오늘날 조선과 같은 창조기에 있어서는 과학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의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학술원 백남운 씨와 이극로 씨의 祝辭가 있은 다음 토의 사항에 들어갔다. 
 1. 학생생활문제 
    1. 학교 기숙사를 부활하도록 당국에 노력할 것. 
    2. 학용품, 식료, 생활 필수품의 집단적 배급. 
    3. 빈곤한 학생에 대한 수업료 기타 납입금에 대한 부담금 면제. 
 2. 교직원 생활 문제 
    1. 식료 및 생필품의 특배 
    2. 연구비 제도 설정 
    3. 교직원의 사회적 지위 향상, 봉급령제도 실시 
    4. 교직원 및 학생 생활대책위원회를 교육자협회에 두고 순차적으로 군정청에 건의할 것 
 3. 국립서울대학교안 재검토는 시기 상조이며 학원의 자치와 민주화를 무시하는 이 안에 반대하되 공대책위원회가 결성된 학교는 대표 2명 기타 학교서는 대표 2명을 선정하여 교육계의 저명한 인사(이극로 백남운 이만규 조용욱)의 제씨 및 초등 중등교 대표 수인을 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안'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트루만 대통령에 보내는 멧세지와 러취 장관, 하지 중장, 문교 당국에 건의서를 보내며 사회의 성명하기를 결정하고 동 6시 반쯤 원만리에 폐회하였다.
  • 1946년 8월 2일 <독립신보> 學生 大量 養成이 緊急- 피문교부장 교수대표에 언명
지난 31일 서울대학 전학 교수, 조교수, 강사대회 대표 4 교수는 군정청에 문교부장 피렌져 씨를 왕방하여 '국립서울대학교'안의 비민주성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이 안의 철회를 요구한 바 있었는데 석상 동 씨는 다음과 같은 주목될 발표를 하여 대표단을 아연케 하였다 한다. 즉 '군정은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알어야 한다. 군정은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이사회 구성은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문교부장, 총장, 사회 권위자 11명으로 구성될 것이며 학자는 행정에는 관계치 말고 연구와 교육에나 종사할 것이며 자치 운운은 일제 잔재다'라고 말하였으며 연구와 교육의 竝行 문제에 대하여 동 씨는 다시 연구보다 학생의 대량 생산이 긴요하니 4, 5년쯤은 연구를 중지하여도 무방하다 등 실로 조선 건국에 급속히 요청되는 문화의 급진적 향상을 몰각 무시한 발언을 하여 학계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다.
  • 1946년 8월 2일 <조선인민보>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全國敎育者大會서도 反對

@실제날짜:460731

재편성은 혼란을 초래. 저간에 준비를 계속하여 오던 전국교육자 대회는 교육자협회,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 공동주최로 31일 하오 1시부터 시내 약전 강당에서 전국교육자 500여 명의 참석하에 성대히 열렸다. 먼저 학술원 백남운 씨를 비롯하여 조선어학회 이극로 씨와 문화총연맹 강성제 씨의 열열한 축사가 있어 대회를 한층 의의깊게 하였고, 토의에 들어가 1. 학생 생활문제, 2. 교수생활문제, 3. 국립서울대학교안 등에 대하여 장시간에 걸쳐 열열하고 진중한 토의를 거듭한 결과 각 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고 하오 5시경 성황리에 폐회하였다.
 1. 학생 생활문제
  가. 학교 기숙사를 부활시키도록 당국은 노력할 것.
  나. 학용품 식량 생활필수품을 집단적 배급할 것.
  다. 빈궁한 학생에 대하여 학비부담을 면제할 것.
 2. 교수생활문제
  가. 교직원에게 식량 및 생활필수품을 특배할 것.
  나. 연구실제도를 실시할 것.
  다. 교직원에 대하여 봉급, 주택 등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것.
 3. 국립서울대학교안 문제에 대하여 본회는 별항과 같은 조건으로 전적 반대하는 동시에 국립서울대학교안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이유
  가. 문교 당국이 사회와 교육 당국자에게 한번의 문의도 없이 비밀리에 이안을 작성한 것은 그 의도가 불순하다.
  나. 해방 후 학원이 비로서 기초가 잡혀가는 도중에 돌연 이것을 재편성하는 것은 막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다. 이공학 부문의 축소, 경제사회학부의 폐지는 무엇보다도 불가하다.
  라. 관료이사회는 학생과 교수의 자유를 박탈하고 학원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탄압하는 것이다.
  • 1946년 8월 2일 <조선인민보> 反對對策委員會 結成- 京大와 十一專門學校가 一丸

@실제날짜:460731

鑛專, 經專, 京師, 여사의 각 전문학교 교수회와 경성대학 4학부 전체교수, 조교수, 강사회에서는 이미 반대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는데 지난 31일 교육자대회에서 토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동안의 철회를 요청하기로 하고 전기 제학교와 工專, 약전, 국전, 고농, 연전, 보전, 法專을 합한 11전문학교와 경대 4학부의 대표 및 중·초등학교 대표, 교육계 선배(백남운, 이극로, 한병훈, 최윤식, 이만규 제씨)로써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회 금후의 활동은 학생반대운동의 진전과 함께 매우 주목된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는 다음과 같다.
 1.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조직.
 2. 학생 및 교직원 생활문제 대책위원회 조직.
 3. 교육자의 무고 파면에 대하여 항의할 것.
 4. 학생 및 교육자의 신분에 대한 경찰의 부당 침해에 대하여 항의할 것.
 5. 트로만 대통령에게 메세지를 발송할 것.
  • 1946년 8월 3일 <독립신보> 宗大는 政府樹立後에 -全國敎育者大會 決議書 內容
全國敎育者大會에서는 國立서울大學設立案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한 결과 반대 결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동 안의 철회를 요구하였는데 동 대회의 반대 결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國立서울大學校'案에 對해서 全國敎育者大會는 愼重한 討議를 거쳐 다음과 같은 諸 理由에 基하야 反對 決議를 採擇하는 同時에 同안의 撤回를 要求한다. 
1. 國立서울大學校案이 文敎 當局의 一方的 意思만으로 決定되었음을 遺感으로 생각한다. 
2. 國立서울大學校案의 實施는 統一政府 樹立이 멀지 않은 때 敎育界에 無用한 混亂을 일으킬 뿐이다. 
3. 從來의 十一個 校가 八個 校로 縮小되는 것만큼 自然科學 部門은 勿論 社會科學 部門의 縮小도 不可避하다. 
4. 尨大한 機構의 國立서울大學校는 私學의 (중략) 現을 期할 수 있다. 
7. '敎授 其他 專門 技術者의 最大限 活用'은 이들의 연구 활동을 抵碍하고 講義 內容을 不充實하게 할 것이다. 
8. 僅少한 財政的 利益을 위하야 敎職員을 整理한다고 함은 學者 급 技術者의 源泉을 고갈식히여 앞으로 敎育 機關의 擴充에 重大한 障碍가 될 것이다. 
9. 學生 數爻의 增加도 綜合大學校로는 不可能하며 二部制 實施도 單科 大學으로 함이 一層 有利하다. 이상과 같은 諸理由에 基하여 우리는 우선 현재의 서울대학을 내용이 충실한 綜合大學 卽 理工學部를 理學部와 工學部로 法文學部를 法學部 文學部 經濟學部 政治學部로 分離 獨立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현재의 각 專門學校는 가급적 단과대학으로 승격 또는 확충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同時에 각 전문대학 교수회의 자치권은 절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케 함으로써 각 학원은 自由스런 學問的 硏究와 競爭을 통하여 民主主義的 發展이 可能할 것이다.
  • 1946년 8월 3일 <동아일보> 各 大學의 收容 倍加- 文科系로 殺到한 學生의 志向
금년도 각 전문대학의 입학 비율은 대체로 어떠한가. 경성대학 예과는 문과가 約 4대 1, 이과 甲은 2.5대 1, 이과 乙은 1대 1인데 특히 모집 정원 4백 명을 9백5명으로 하여 합격 발표를 한 것은 크게 반가운 소식이다. 법과대학 5대 1, 공과대학 5대 1, 의과대학 8대 1로 예상한 것보다는 경쟁율이 弱하였다.
그러나 금번 입학시험 중 한개의 기현상은 장마와 호열 관계로 지원을 하고도 수험을 못한 학생이 현재 판명된 것만도 1천여 명이 넘는다. 이에 문교부에서는 9월초에 다시 시험을 치르도록 관계 학교 당국자와 연락하여 준비 중에 있으며 각 학교마다 예정 인원을 늘리고자 준비하고 있음은 저윽이 반가운 소식이다. 이에 금년도 각 전문대학의 지원과와 수험자, 입학허가자(8월 2일 현재) 등을 조사하여 넓어진 좁은문의 입학 전선을 살펴보려 한다.
                              受驗者  入學者
   ▲ 京城法科大學              
       전문부                  1,059   200
       학  부                     80    30
   ▲ 京城工科大學
       전문부                  1,409   340
       학  부                    113    82
   ▲ 京城醫科大學               850    91
   ▲ 京城師範大學
       전문부 문과               524    --
       전문부 이과               178    --
       同學部 교육과              20     6
              국문과              14     7
              역사과              15    10
              영문과              15     6
              체육과               8     4
                  계              71    33
   ▲ 京城大學豫科
       문과                    1,217   338
       理 갑                   1,065   436
       理 을                     421   131
          계                   2,703   905
   ▲ 京城經濟大學
       전문부                  1,400   338
       학부                       80    54
   ▲ 京城鑛工大學
       鑛山科                     --    52
       金屬工科                   --    56
       機械工科                   --    56                   
            계                    --   164
   ▲ 女子師範大學
       전문부                     --   206
       학부                       --    18
   ▲ 京城女醫專
       예과                      150    98
       전문부                    139    81
   ▲ 세부란스醫專
       예과                      703   100
       전문부                    320    80
  • 1946년 8월 3일 <조선인민보> 釜山水專 敎授 總退陣- 綜合大學 編入에 反對
부산종합 대학 편입을 반대하여 부산수산전문학교의 수산계 교수진이 총퇴직을 하였으므로 본교는 현재 맹휴 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한편 부산종합대학 설치는 아직 현안 중에 있으며 문교부의 정식 지령에 의하면 8월 말일까지 시민의 부담액인 1000만 원의 모집이 성공치 못하면 수산전문은 단과대학으로 존속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한다. 조선의 수산계 기술자는 현재 50여 명에 불과한데 이들은 전 수산인을 대표하여 끝끝내 불합작을 언명하고 있다. 일방 재학생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므로 선배들의 특별한 알선에서 8월 1일부터 약 일주일 간 林兼商店魚場인 강원도 울진, 경북 구령포, 경남 욕진도, 남해 등지에 출동하여 실제 훈련을 받기로 되었고 한다.
  • 1946년 8월 3일 <조선인민보> 平讓에 音樂學校 誕生
평양 31일 발 해방 민족 음악의 우수한 후예의 양성에 노력하고 있는 평양 음악 동맹에서는 평남의 일류 음악 예술가의 절대적 찬조및에 평양시에 음악학교를 창설하고저 앞서 평양음악 동맹 내의 평양음악학교 설립 사무소를 두고 제반 사무를 추진하여 오던 바 설립사무를 완료케 되어 이번 9월 9일 개교를 목표로 학생 모집에 착수하였다. 과목은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작곡의 5과목이며, 중등학교 졸업자 남여 약 100명을 모집하기로 되어있다.
  • 1946년 8월 4일 <독립신보> 罷免 敎授를 복직시켜라- 교육자대회서 문교 당국에 진정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이만규, 박준영 외 4백 60인의 명의로 교직원의  무고 파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정서를 문교 당국에 제출하였다. 도상록교수, 淑專 諸교수, 부산수산교수, 청주중학교 교유, 경기고녀교유 및 각 국민학교교원 등의 교육자를 무고히 파면함은 민주주의화를 육성하는 미군정하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남조선에 있어서 교육자의 태반은 일정시의 교직원들이나 그중에는 아직도 극도의 악질적 분자가 도태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 지위가 더욱 향상된 예가 적지 않다. 이러한 분자는 일례를 들면 3상 회의를 지지하는 교원은 무조건 파면한다는 등의 非行을 敢行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국교육자대회의 명의로서 반민주적 교육 관계자를 철저히 조사하여 단호 파면의 처단을 할 것과 금후 교직원의 신분 보장이 학원의 자치와 연결 실시되어야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해방 후 일년을 맞이하는 금일 무고 파면된 모든 교육자를 다시 교단에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 1946년 8월 4일 <동아일보> 敎授는 줄이쟎는다- 綜大 建設에 對해 吳次長 談

@실제날짜:460803

3일 국립대학 설치에 대하여 문교부차장 오천석 씨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오해말기를 간망하였다.
대학교 설치안은 근근 법령으로도 발포될 것이나 단연 9월부터는 실시될 예정이다. 이의 설치에 대하여서는 앞서도 여러 가지로 말하였거니와 민주주의의 독립국가로써 권위있는 종합대학 하나 없어서야 말이 않될 것으로 조금도 삼천만 국민을 위하여 부당한 계획이 아닌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교수를 파면시키지나 않는가 하는 말이 있는데 학생수를 늘리는데 어찌 교수를 줄이리오. 재직 교원이외도 교수 모집을 하려한다.
또한 9월에 1부 지원하고도 시험못친 학생들을 위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기로 되었는데 이 기회에 일반 학생까지라도 수험할 수 있는 기회를 추가하여 고려 중에 있는 터이다.
  • 1946년 8월 4일 <조선인민보> 國立大學校 反對案 等 提出- 교육자대회 대표단 유문교부장 방문

@실제날짜:460803

31일 藥學대학에서 개최된 전국교육자대회의 총의로서 박준영, 최종환, 최응석, 김세련, 윤병상, 김한주, 제씨는 3일 오전 10시 군정청에 러취 군정장관, 유억겸 문교부장을 각각 방문 동대회에서 결정된 학생 교직원 생활 안정책, 무고 파면 반대,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 3조목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러취 장관과는 5일에 정식으로 이에 관한 회견을 약속하고 유부장과는 이날 전후 약 2시간에 걸쳐 열열한 토의가 있었다. 이날 회견 석상에서 대표단은 각 학교 단위로 결성되어 있는 서울대학교안 반대 투쟁 상황 등을 전달하고 이날 더욱 유부장이 수일 전 대학교 이사회의 구성에 관하여 '장차 임시정부가 수립될 시에는 누구 누구가 임명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월권 행위라고 대표단이 지적한 것은 매우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날 회견에서 결과적으로 이렇다 할 만한 성과는 보지 못하고 끝나고, 내일 5일 동대표단과 러취장관과의 회견이 크게 주목된다.
  • 1946년 8월 4일 <조선인민보> 罷免 敎授 復職시키라

@실제날짜:460731

근일 남조선 각 학교에는 경향을 막론하고 교원의 이유모를 파면이 속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7월 31일 전국교육자 대회에서는 이만규 씨, 박준영 씨 외 교육자 460명의 이름으로 문교 당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보내어 무고 파면된 교직원의 복직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경성 및 남조선 각 지방을 통하여 다수의 교직원이 무고 파면당한 예가 비일 비재하다. 주요한 예를 들면 도상록 교수, 숙전 제 교수, 부산수산 교수, 청주중학교유, 경기고여교유 및 각 국민학교 등에 接踵하고 있다. 이같은 무고 파면은 일제하의 인사에서도 절대로 없던 것이다. 남조선에 있어서 교육자의 태반은 일제시의 교직원들이니 그중에는 아직도 극도의 악질 분자가 도태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 지위가 더욱 향상된 예가 적지 않다. 우리는 전국교육자대회의 명의로서 반민주적 교육 관계자를 철저히 조사하여 단호 파면의 처단을 할 것과 금후 교직원의 신분보장이 학원의 자치와 ○○○되어야 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해방 후 1년을 맞이하는 오늘 무고파면된 모든 교육자를 다시 교단에 복교시킬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 1946년 8월 5일 <조선인민보> 국립대학교안 絶對로 反對- 經大 新入生들

@실제날짜:460728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대한 절대 반대의 봉화는 매일 같이 학원은 물론 각 방면에서 올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서울 경제대학의 합격한 신입학생 일동이 이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즉 '이 안은 청년 학생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민주국가 건설에 직접 중대 영향이 미친다.'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절대 반대를 결의하고 지난 28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6년 8월 6일 <조선인민보> 敎職員生活을 保障하라- 교육자대회서 당국에 진정

@실제날짜:460731

이미 보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는 서울국립대학교안 반대성명과 아울러 현하 학생 및 교직원의 참담한 생활난을 피력하여 급속한 대책 실시를 요망하는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하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여 일반 민중의 생활고는 비참 일로를 받고 있다. 우리들이 직접 목격하고 또 체험하는 학원 내의 학생 및 교직원의 생활 문제는 그 전도가 실로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본 대회는 당국이 급속히 좌기 대책을 실시해 주기를 충심으로 정진하는 바이다.
   학생 생활문제
학교 당국으로 하여금 기숙사를 개설케 하며 사옥으로는 구 일인 가옥을 극력 알선 제공할 것.
식량특배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저렴한 가격에 의한 일용품 학용품의 배급제를 실시할 것.
극빈 아동 및 학생에 대하여 수업료 기타 제 학비 부담금을 감면할 것.
고학생에게 광범한 편의를 도모할 것.
    교직원 생활문제
식량을 특배하고 주택을 알선 제공할 것
연구비 제도를 창설 할 것.
교직원에 대하여 사법 행정관과 동등히 대우를 할 것.
학생 및 교직원의 생활 문제는 결국 일반 민중의 생활 문제와 분리하여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은 사실이나 교육의 중대성에 비추어 최소한 상기 제 대책의 급속 실시를 바란다.
  • 1946년 8월 7일 <독립신보> 綜大案 撤回를 要請- 교육자 대표가 러장관에게

@실제날짜:460805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선출된 박준영, 최종환, 김택원, 김재을 외 7씨의 대표단 일행은 5일 오후 2시 반 군정청을 방문 군정장관실에서 '피텐져' 문교부장, '키피'대위 동석하에 '러취' 군정장관과 한 시간이나 회견하고 자못 화기가 도는 가운데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철회 요구를 전하는 동시에 전국교육자대회에서 결정된 대책안을 제시하였는데 러장관은 종시 성의 있는 태도로 충분 고려할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다시 대표 제씨는 계속하여 별실에서 '피' 兪 兩 문교부장, '키피' 대위 3씨와 약 한 시간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중심으로 교직원 무고 파면 문제 등에 언급하였는데 특히 종합대학교안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로 '러취'장관에게 진언치 못한 각 학교의 실정을 토대로 구체적 검토를 하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綜大'안에 대한 재고려를 촉진한 바 있다.
  • 1946년 8월 7일 <동아일보> 綜合大學案을 反對

@실제날짜:460805

全國敎育者大會서 러-취 長官에 陳情
앞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선출된 崔宗煥, 朴俊泳 씨 등 7명의 교수단은 5일 하오 러-취 군정장관을 만나 국립서울대학교설치안에 대하여 철회요구를 하는 동시에 동 교육자대회에서 결정한 9개 항목의 대책에 대하여 재고려가 있기를 요청한 바 있었다.
  • 1946년 8월 7일 <동아일보> 좋은 의견 많았다- 러長官 記者團에 言明

@실제날짜:460806

이에 대하여 6일 러장관은 기자단에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나는 그들 교수단과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 조선교육에 대하여 많은 새지식과 의견을 들었다. 진심과 성의있는 회견 사이에 제가 느낀 바와 마찬가지의 진의를 그들 교수단에서도 이해하였을 줄 안다.
  • 1946년 8월 7일 <조선인민보> 교육자 대표단 러장관 방문- 국대안 充分考慮할 것을 約束

@실제날짜:460805

지난 藥專 강당에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선임된 박준영, 최종한, 김택원, 김재을 외 7인의 대표단 일행은 5일 오후 2시반 군정청을 방문 군정장관실에서 피텐저 문교부장 히피대위 동석하에 러취장관과 한 시간여 회견하고 자못 화기가 도는 가운데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철회 요구를 개진하는 동시에 전국교육자대회에서 결정된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장관은 시종 성의있는 태도로 충분 고려할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한다. 동대표 제씨는 계속하여 별실에서 피문교부장, 유문교부장, 키피대위 3인과 약 1시간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중심하여 교직원 무고파면 문제 등에도 언급하였다. 특히 종합대학교안에 대하여 시간 관계로 러취장관에게 진언치 못한 각 학교의 실정을 토대로 구체적 검토를 하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종합대학안에 대한 재 고려를 촉구한 바 있었다 한다.
  • 1946년 8월 8일 <조선인민보> 國立大學案 批判座談會

@실제날짜:460810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조선 문교 정책의 큰 충격을 야기한 국립서울대학교안 문제에 대하여 순수한 학구적 입장에서 조선 교육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저 10일 (토) 하오 2시 경성대학 식당 2층에서 사회 각 방면의 인사와 언론 기관을 망라한 좌담회를 개최하리라 한다.
  • 1946년 8월 9일 <독립신보> 學校 經營 講習會

@실제날짜:460819

문교부에서는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서 학교 경영 강습회를 개최하는데 이 강습회에서는 학교 재정 시간표, 학교의 민주화 등 제 문제를 연구한다. 희망자는 소속 道의 학무관에 신청하면 된다.
  • 1946년 8월 9일 <조선인민보> 躍進하는 蘇聯의 敎育 施設- 五年 後엔 學敎數가 十九萬
건설의 추진력, 신 5개년 계획의 이채.
모스크바 7일 발 공립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있어서의 신학교의 건설에 관한 보도기사를 종합하여 전한다. 5개년 간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도시나 농촌에서 새학교 5,290이 건설되기로 되었다.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학교의 수는 2만 4백으로 될 것이다. 정부는 학교 건설을 위하여 13억 6천만 루불이라는 거액을 지출하였다. 내년 중에는 899의 학교가 건설될 것이다. 카르바루지의 자치 공화국의 국민교육대신이 말한바에 의하면 산악 지방의 국민이 거의 무학 문맹이며 혁명전이나 현재도 카르바루지 공화국의 지역에는 단지 12의 학교뿐이었다. 그것도 특권 계급의 아동들을 위해서만 설립되었었던 것이다. 이 지대에 있어서 주민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겨우 백 명에 대해 3명이라는 데에 불과하다. 소비에트 정권 수립의 선언 이후에 비로소 의무교육제는 급속한 속도록 진행시켜던 것이다. 수차에 걸친 5개년 계획의 년년에 있어서 카르바루지의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새학교 239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229의 학교가 적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현재 학교의 건설은 급속히 보급되고 있으며 또 새로이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카르바루지의 자치 소연방 공화국에서는 거의 전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수의 학교가 건설되기로 되어 있다. 또 오리오리주의 국민교육과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전쟁 중 동 주의 학교의 건물이 거의 4분의 1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학교가 회복되고 또 신축도되었다. 최근의 5개년간에 다시 92의 학교가 건설되기로 되었다. 현재 신축 중의 학교는 19이다. 그중 이미 약간의 학교가 거의 낙성되고 나머지 학교도 신학년이 시작할 때까지 건축이 완료할 것이다. 또 스탈린그라드에서 전하는 보도에 의하면 동 시에서는 현재 대규모의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큰 학교 7개가 급속도로 건축되고 있다. 이들의 학교는 전후 새 5개년 계획의 제1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최근의 5개년간에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새학교 65가 건설되기로 되어 있다. 소비에트 정부의 새학교의 건설에 대하여 감격은 매우 큰 것이다. 소비에트 국민은 이 점에 관하여 자기 정부를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있다. 많은 촌락에서는 농민들 자신의 힘으로 학교는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 즉 1945년 1개년에 있어서만 하여도 국가의 계획 이상으로 자기자신의 백병전에 의하여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488의 촌락에서 학교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1950년 까지에 즉 제4차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에 소비에트 연방에 있어서의 학교의 수는 19만 4천에까지 증가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학교에서는 3천 2백만 명의 학생이 공부할 것이다. 국민학교의 수는 도시에 있어서도 또 촌락에 있어서도 소비에트 연방에 있어서의 7세에 달한 아동에게 국민의무교육을 시행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 1946년 8월 10일 <독립신보> 敎員 養成에 支障- 京師 교수회서 당국에 건의
京師 敎授會에서는 서울국립대학설치안에 대하여 신중히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조건을 들어 동 안의 모순을 지적하고 문교 당국에 실시 보류를 요망키로 되어 건의서를 문교 당국에 제출하였다. 
 1. 본 안의 결정에 있어서 조선인 식자층의 여론과 교육자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돌연 일방적으로 결정 발표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 
 2. 학원의 민주화를 무시하는 관료적 理事 행정에 의하여 연구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권이 박탈되어 신 조선의 학원 건설에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한다. 
 3. 38이남에 있어서도 각 중등학교 학생 수용 능력은 지원자 수의 5분지 1에 불과한 실정에 鑑하여 중등교원의 대량 양성, 재교육, 단기 양성 등 본대학의 사명이 극히 중대하니 이러한 국가적 요청을 集約的으로 수행하려면 본교를 명실 상부한 문교부 직속인 독립한 종합대학으로 확충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본대학이 국립서울대학의 一학부로 편입되면 현하 실정으로 보아 교육자 양성의 독자적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막대한 장애가 될 것이다.
  • 1946년 8월 10일 <독립신보> 敎員 資格 標準 制定
해방 후 조선의 초·중등 학교의 교원의 질이 대단히 저하되어 청소년의 장래가 크게 우려되고 있어 문교부에서는 교원의 자격 표준을 제정 중인데 장차 초·중등 교원은 면허를 받아야 될 모양이다.
  • 1946년 8월 12일 <독립신보> 綜合大學 九月부터 發足
현존의 관립 대학, 전문학교를 폐지하는 동시에 이를 통합하여 서울국립대학교를 설치하고저 문교 당국에서는 착착 준비 중인데 가을 9월을 기하여 조선 최초의 국립대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안에 대해서는 그 조직 구성에 비추어 민주 학원 수립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론이 불등였으나 군정 당국에서는 이 안이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가장 좋다하여 기정 방침대로 9월부터 발족하게 된 것이다. 이 국립대학은 1대학원과 9대학으로 구성되었는데 학교의 배치는 대개 결정되어 있는 모양으로 학생 처치에 대해서는 방금 신중을 기하고 있다.
  • 1946년 8월 12일 <조선인민보> 사범대학서 당국에 건의- 師大는 綜合大學으로

@실제날짜:460805

국립대학교안은 일방적. 경성사범학교 교수회에서는 현안 물의가 분분한 소위 서울국립대학교안에 대하여 5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건의서를 군정 당국에 제출하여다고 한다.
 1. 교육 시책의 전환을 초래하는 중대한 안을 돌연 일방적으로 결정 발표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
 2. 관료적 이사 행정에 의하여 연구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권이 박탈되어 신조선의 학원 건설에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한다.
 3. 중등 교원의 대량 양성, 재교육, 단기 양성 등 본 대학의 사명이 극히 중대하니 이러한 국가적 요청을 集約적으로 수행하려면 본교를 명실 상부한 문교부 직속의 독립한 대학으로 확충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본 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의 1학부로 편입케 되면 현하 실정으로 보아 교육자 양성의 독자적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막대한 장애가 될 것이다.
  •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 金浦中學 9月에 實施
7만 군민이 자나깨나 바라던 김포중학은 금추 중에 실현코자 2백 30만 원 기금을 획득코자 김포중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활동 중인데 늦어도 9월 중에는 실현되리라 하며 기성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 회장 申景秀 (이하 명단 생략)
  •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 農林大學 期成會 組織
裡里 군민의 다년 열망이던 이리농림학교의 高農 승격 문제는 해방 후에도 익산 군민의 열열한 염원으로서 그 실현을 기다려 오든 바 동 농림학교는 드디어 3천만 원으로서 농림대학을 설치하기로 하고 지난 7월 25일 기성회를 조직하였는데 동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 회장 李培元 ▲ 부회장 趙容奎 金○永 金炳洙
  •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 入學難은 緩和- 忠北에 14 中等校 增設
지방통신: 청주 충북도 학무과 당국에서는 오는 9월 1일부터 신설할 관하 각 지방에 14개소 남녀 중등교 개교 준비에 예의 매진하고 있다는 바, 이로써 도내의 중등교는 35교, 1백 29학급이 되는 터로 현재 59학급에 비하여 約 배이상의 증가로써 도내 금년도 졸업 아동의 8할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설된 교명은 다음과 같다.
 ▲ 淸州公立工業中學校 ▲ 伊院公立蠶業初級中學校 ▲ 黃潤公立農業初級中學校 ▲ 無極公立農業初級中學校 ▲ 甘谷公立商業初級中學校 ▲ 堤川公立蠶業初級中學校 ▲ 永東公立初級中學校 ▲ 靑山公立初級中學校 ▲ 曾坪公立初級中學校 ▲ 堤川公立初級中學校 ▲ 報恩公立女子初級中學校 ▲ 鎭川公立女子初級中學校 ▲ 槐山公立女子初級中學校 ▲ 陰城公立女子初級中學校
  • 1946년 8월 13일 <조선인민보> 敎育者에 큰 侮辱- 대학생 대책위원회 文敎部 次長 談話를 論駁

@실제날짜:460812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각 방면에서는 반대 여론이 沸騰하고 있는데 지난 7일부 군정청 공보부 발행 주간신보에 발표한 문교부 차장 오천석 씨의 담화에 대하여 20일 국립서울대학교안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논박하고 있다. 성명서의 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차장은 먼저 '지금까지 해 온 반대 이유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씨가 얼마나 오만한 成心과 독선적 선입견에 젖어 있는 가를 폭로함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발표된 각 방면의 반대 성명은 문교 당국의 제안 이유를 ○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보다도 이 안에 대한 반대는 '학제의 변동으로 인하여 자기 개인의 진로 문제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는 데서 나오는 사적 불평에 불구하다는 구절은 과연 문교부 책임자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언사는 아닐 것이다. 이는 실로 교육자를 전례없이 모욕하는 폭언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구가 현 제도하의 전문대학 교수의 그 지위만에 만족하며 개인의 진퇴 문제에 전전 긍긍 불안을 느끼고 있겠는가. 오히려 이안에 찬성하는 자가 있다면 이야 말로 교육자적 양심보다 신설 대학교의 어떠한 지위를 바라거나 현재의 자기 의자에만 연연한 분자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만천하가 부르짖고 나오는 반대 여론에 대한 여사한 언사를 도저히 과간할 수 없으매 오히려 형용할 수 없는 공분을 느낀다. 이에 나는 오천석 차장이 이를 취소하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 1946년 8월 13일 <조선인민보> 國代案 反對 이미 民族의 總意- 左右 莫論코 反對
교육자대책위원회서 타진. 국립서울대학교안 문제를 싸돌고 학원은 혼란을 일으켜 이에 대한 맹렬한 반대 운동이 전개되어 있고 문교 당국에는 연일 관계 학교로부터 동 안 철페의 진정이 끊어지지 않으며 일반 사회의 반대 여론이 점점 비등하고 있는데 동안 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그 동안 각 정당 및 학교 인사들을 방문하여 의견을 문의하였다는 바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한국 독립당 신익희 씨 담: 전날 공보국에서 사람이 와서 소위 국대안의 찬부를 묻기에 일언 폐지하고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요컨대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이러한 중대 문제를 경솔히 취급하여 물의와 혼란을 일으킴은 온당치 않다.
2. 천도교 청우당수 조기엽 씨 담: 금반 발표된 종합대학안은 각계가 다 반대하는 바요 우리도 반대한다. 교육 문제는 우리 민족의 당면 문제 중 백년지 대본을 決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당연히 임시정부가 선 후에 결정할 문제요
또한 그 내용이 조선 교육계의 현 실정에 적합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안의 철회를 희망한다.
3. 재미한족연맹 한시대 씨 담: '각 전문대학이 현재 자유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형식적으로 통합하여 몇 사람의 권한만을 크게 할 방대한 기구를 만들 필요가 없다. 더우기 안을 학부장과 교장도 모르게 결정하였다면 옳치 못하다. 이사회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본받았다고 하나 군정하의 남조선에서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지금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권한 확대에 불과하다. 통일 정부의 수립만이 긴급하다.'
4. 사회민주당 여운홍 씨 담: 미국의 이사회는 민주주의적이다. 그러나 서울종합대학의 이사회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
5. 한민당 함상훈 씨 담: '나는 교육에는 문외한이므로 이번 국립대학교안에는 찬성이니 반대이니 아무런 결정적 의사는 없다.'
6. 조선어학회 신태영 씨 담: 간부들이 출근치 않았으므로 본 회를 대표하여 말할 수 없으나 우리 간부는 개인적으로는 누구나가 통합안에 반대다. 이사회는 학원을 비민주적으로 할 위험성이 많고 통합이 각 전문대학의 자유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학원의 중대 문제를 무슨 까닭에 임시정부 수립전에 내어 놓아 학원과 민족을 괴롭게 하는지 나는 진의를 알 수 없다.
7. 생물학회 심학진 씨 담: 나는 이번 국립대학교안에 절대 반대다.
  • 1946년 8월 14일 <독립신보> 美國서 敎科書 三百券 來着
서울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얼마 전 미국 '빨티모어'에 있는 '빨티모어'의 현악단에 조선장고를 보냈었는데 그 사례로 교과서 3백 권이 도착되었는데 그 교과서는 사회학, 수학, 공학, 전기학, 과학, 數科와 음악 등으로 이 책들은 '죤스 홉킨스' 대학도서관, '메리렌드' 대학도서관, '리삐리인스티튜트'대학도서관, '메리렌드'대학 藥學部에서 기증을 받아 그중에서 선택해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 1946년 8월 14일 <조선인민보> 成人敎育方針決定- 1회 수용은 1만 2천 4백여 명

@실제날짜:460812

12일 경성부청 회의실에서 성인교육의 사업 방침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성인교육협회 이사회를 개최하였는데 회는 회장 金炯敏 씨의 사회로 진행되어 대략 다음과 같이 방침의 결정을 보았다 한다. 교육 기간은 3개월 간으로 하고 연 3회의 수료생을 내게되며 제 1기는 오는 9월 1일 부터 시내 국민학교 69개교를 개방하여 야간을 이용하기로 하고 수업료는 1기 30원씩이며 연령은 무제한이라고 한다. 역원은 회장에 김형민 씨, 부회장에 장발 씨와 홍병선 씨가 각각 피선되었다. 1회 수용생은 1만 2천 400여 명이라고 하는데 그의 성과가 자못 기대된다.
  • 1946년 8월 16일 미국에 파견되었던 한국교육사절단 귀국

미국에 파견되었던 한국교육사절단이 1946년 8월 16일에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 사절단은 미국 교육 및 과학 분야의 최신 정보를 수집하였다.[123]

  • 1946년 8월 17일 <독립신보> 祖國 再建의 一翼되라- 새조선 담당할 학도에 문교부장 檄

@실제날짜:460815

해방 1주년 기념일을 마지하여 문교부장 兪億兼 씨는 “전국 학도에 고함”이라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학창서 수학하는 제군은 장래의 국가를 담당할 사람들이다. 조선의 해방일을 담당하여 제군은 학문을 닦기에만 전력을 다하여야 될 것이다. 기타 문제는 제군이 간섭할 바 아니다. 하루바삐 제군들이 완전한 인격으로 학업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 국가를 맡아 달라고 또 세계 평화에 공헌을 하여 달라고 이 세대가 기대하고 있는 것을 명기하여야 할 것이다.
  • 1946년 8월 19일 학교경영에 관한 교사연수

학교 경영에 관한 교사 연수가 46년 8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연수내용은 학교재정, 교실공간 활용, 시간표짜기, 새교과과정, 학교와 지역사회, 학교에서의 민주주의 실습 등이었다.[124]

  • 1946년 8월 19일 <조선인민보> 九割以上의 反對- 學生共同鬪爭委員會서 再次 聲明

@실제날짜:460816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각계 학교와 일반 사회의 반대 여론이 치열함에도 이것을 일축하고 문교부에서는 기어코 동 안을 관철시키려는 태도가 농후하고 일부 교수들 중에는 교육의 장래는 고사하고 우선 자기의 지위나 보존하자는 의도에서 종래의 반대를 찬성으로 변하는 경향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16일 동 안 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당국의 독선적 태도와 무원칙한 주장을 유감히 여겨 다음과 같이 재차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7월 13일 서울국립대학교안이 발표된 후 우리는 학교 당국에는 물론 누차 문교부에도 진언하 바  있으나 학생의 순정은 여지없이 유린당했고 독선전 태도와 무원칙한 주의 주장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발견치 못하였으니 이것은 극히 유감이다. 우리들은 공정한 입장에서 사회 인사, 여론 기관을 통하여 조선 교육에 다소라도 관심하고 그의 민주주의 재건을 희망하시는 분은 누구나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맺었으며 또한 우리가 직접 조사한 여론의 결과를 본다면 90%이상이 반대하니 문교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일부 정치가만의 반대가 아님이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 운운하는 문교부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끝으로 일부 교장 제 선생님 중에는 소위 학장 후보 등의 榮職으로 말미암아 종래의 반대를 찬성으로 표변한다든가 조국 교육의 위기는 강 건너 불보기로 구직 운동에 급급하는 분이 계신것은 우리들 학생으로서 차마 못할 소리이나 이는 교육자로서는 도저히 묵고할 수 없으며 우리들 학생의 지식으로서도 이해키 곤란한 것이다. 민족적 교육자로서의 양심에 盟省하여 주시기를 요구한다.
  • 1946년 8월 20일 <동아일보> 中等 英語 敎科書 1年만에 編纂 完成
문교부에서는 재래의 일본식 영어교재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교과서의 편찬을 경성중등영어교원회에 부탁하였던 바 착수 만 1개년만에 독본 여섯권과 문법책 한권이 완성되었는데 우선 독본 첫째 권의 정식 검정이 끝났다. 그리하여 경성중등영어교원회에서는 우선 신학기 초에 이를 출판 배부하고 뒤이어 둘째 권 이상도 계속 출판키로 되었다.
  • 1946년 8월 20일 <조선인민보> 敎育界의 實情을 呼訴- 敎育者大會 美大統領에 멋세지

@실제날짜:460818

남조선 교육자 대회에서는 지난 달 개최된 대회의 결정에 의하여 18일 대략 다음과 같이 조선의 교육 실정을 알리는 동시에 문교부의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안의 부당성을 지적한 멧세지를 트로만 대통령에게 발송하였다고 한다.
트로만 대통령 각하
이번 세계 대전을 통하여 파시슴 타도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수행된 귀국의 위대한 역할에 대하여 우리 남조선 교육자 대회는 각하와 귀 국민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중략) 우리 교육자들은 조선을 해방시키고 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평화의 사도로 들어온 귀국군대를 최대의 감사와 희망을 가지고 맞이하였고 과거 1년간 가장 양심적으로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귀 군정에 협력해 온 바입니다. (중략) 그러나 타면 민주주의적 발전에 대하여 그 지장이 될 사태가 발발되고 있음도 또한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단 사법 행정 기관에 의하여 일반 인민의 (언론, 집회, 출판, 결사) 자유는 적지 않게 제약되고 있으며 진정한 애국자가 불가피한 이유로 검거, 투옥되는 일도 있어서 일제 시대와 방불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정세는 교육계에도 직접 반영되어 교육자의 무고한 파면, 좌천, 검거 등 불미한 사태가 경향 각지에 계속하여 학원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문교부로부터 경기도 내 전 관립전문과 경성대학을 통합 축소하여 종합대학을 만들고 6인의 관선 이사에 의하여 전단한다는 소위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각 학교 선생과 학생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도 조선의 실정에 비추어 조선 교육의 완전한 발전을 저해하리라는 점을 누차 지적하고 반대하였으나 그대로 실천되려는 형세에 이르렀습니다.
각하 남조선의 사회 및 교육계의 정세가 이러합니다. 이 어찌 대서양 현장의 정신과 카이로 선언의 실현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각하와 귀 국민 또는 귀 군정의 본의이며 우리 민족의 소망하는 바입니까. (중략) 그러나 일제의 폭압에서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는 과연 과거의 일제 주구와 반민주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행정, 사법 및 교육계의 요직을 점하고 그○음姿意專천 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이 장애되고 있으니 이 사실은 대다수 남조선 민중이 다 같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 입니다.
각하 이러한 제 사태의 중대 원인은 귀 군정에 우리 인민의 의사와 희구하는 바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략) 최후로 조선의 당면한 가장 긴급하고도 중대한 민족적 과제가 무엇보다도 완전 민주국가의 완수에 있음은 물론입니다. 각하게서는 우리 민족의 변을 살피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의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속히 재개하여 우리들의 갈망하고 있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급속히 수립되도록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략)
  • 1946년 8월 21일 <독립신보> 義務敎育은 實現 不能 - 러취 장관 기자 회견

@실제날짜:460820

군정청 출입 기자단은 20일 오전 10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러취 군정장관과 회견, 식량 문제, 기타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문 일답을 하였다. 
 (중략) 문 : 의무교육은 9월부터 실시되는가? 
 답 : 실시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 각 국민학교를 보면 6세부터 12세 미만의 아동을 겨우 반수밖에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장래 의무교육제 실시에 관한 법령을 고안 중이고 예산 결정도 고려 중이다. 우리는 이 안 실시 제1년간에 국민학교 제1학년만을 의무교육제로 할 생각이다. 그리고 교원 양성 계획도 확장 중이다.
  • 1946년 8월 21일 <조선인민보> 敎育講演會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해방 일 주년을 기념하여 21일 오후 2시부터 배재중학 강당에서 교육대강연회를 개최한다는데 교육자는 물론 일반의 다수 래청을 요망하고 있다. 주제와 연사는 다음과 같다.
 ▲ 교육계의 1년   김택원
 ▲ 미국교육시찰단   장리욱
 ▲ 건국과 과학교육   이재을
 ▲ 국립 서울대학교안에 관한여   김한주
 ▲ 조선교육의 진로     박준영
 ▲ 의학교육에 관하여    이병남
  •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법령 제102호) 공포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군정법령 제102호로 공포되었다.[125]

  • 1946년 8월 25일 <독립신보> 國立大學 陳容 內示
교육계, 학계는 물론 일반 여론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대학교안은 예정대로 당국이 추진하는 모양으로서 진용은 이미 아래와 같이 정해져서 총장인 안스테트 씨가 각 대학 관계자를 불러서 내시했다 한다. 
大學院長 윤일선, 副院長 조윤제, 文理科大學長 이태규, 醫科大學長 심호섭, 工科大學長 김일, 農科大學長 조백현, 齒科大學長 박명진, 法科大學長 高炳國, 商科大學長 이인기, 師範大學長 장리욱, 藝術大學長 장발, 大學醫院長 백인제.
  • 1946년 8월 25일 <독립신보> 普成專門校 高麗大學으로
梨花女專, 延專, 普專은 교명 개칭을 요청 중이던 바 이번 정식 인가되어 9월부터 이화여대, 연희대학 고려대학의 신 명칭 아래 새 출발한다.
  • 1946년 8월 26일 <독립신보> 前進하는 새 敎育 設計 - 만六歲 兒童 全員 收容
장래 역군 양성에 자진 응모하라.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24세에는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는 신 교육 제도는 9월부터 발족하게 되었는데 아직 독립이 않된 우리 조선으로서 교육은 조선 건설의 기본이 되는 만큼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데 9월부터의 교육 체제 개편을 계기로 문교부 차장 오천석 씨에 전진하는 '조선의 교육 설계'를 들어 보자. 
▲ 신교육 제도 - 이 교육 제도는 획기적인 것으로 究學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 제도에 의하면 국민학교 6년, 초급중학 또는 초급실업 3년, 고등중학 또는 고급실업 3년, 각종 대학 사범대학 4년, 대학원 3년으로 되어 6세에 국민학교를 입학하면 21세에 대학 졸업, 24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어 있다. 이 교육 체제로서 많은 학도들을 대량으로 양성하자는 것이다. 
▲ 서울종합대학 - 많은 반대는 있었으나 서울 종합대학은 9월부터 발족한다. 이 종합대학은 농과, 치과, 의과, 예술, 공과, 상과, 법과, 사범, 문리과의 9 대학과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장도 내정되어 있고 학생들의 처치도 준비 중이다. 
▲ 의무교육 - 교원 부족, 시설난 등으로 우리가 계획하던 적령자를 전부 수용하는 의무교육의 즉시 실시는 불가능하나 만 6세의 학령자는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수용할 능력이 있음으로 의무교육제도에 대한 법령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의무교육이 실시된다고 할 수 있다. 금년부터는 한 사람의 미취학자도 안낼 것이다. 
▲ 야간중학 설치 - 경기도의 예를 들면 이번 중학교 지원자는 2만여 명이었으나 2교 지원한 사람이 대부분으로 약 1만 명 가량 되겠다. 5천여 명이 입학하여 결국 나머지 5천 명이 갈 길을 모르고 있는데 이를 위하여 야간 중학을  교원이 용서하는 한 대대적으로 신설하려고 지금 준비 중에 있다. 이로서 상당한 학생을 수용할 것으로 장차는 훨씬 증설될 것이다. 
▲ 교원양성 - 지금 전선 사범학교에서는 많은 교원을 양성 중이다. 사범 교육은 교육의 기본으로 우리도 여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뜻있는 사람은 조선의 역군을 양성하는 큰 의욕을 가지고 교육 전선에 나와 주길 바라는 바이다.
  • 1946년 8월 26일 <조선인민보> 國大案, 秘密主義는 不當- 京大 醫學部 講師一同
소위 서울대학교안에 대한 반대여론은 별항과 같은 각 학교장의 임명까지 보게 되어 최후단계에 이른 감이 있는데 그럴수록 문제는 첨예화하고 25일에는 경성대학 의학부 조교수 강사 의국원 일동이 동안에 대한 반대 성명서를 발표 동안에 숨은 음모를 철저히 규명하고 있다.
京醫 모모 교수의 음모로 지난 3월 14일 부로 시작된 경의 경대와 의학부와의 합동 문제는(금번 국립대학안에 의한 의과대학장에 심호섭 씨, 원장에는 백인제 씨가 내정되었다 함은 저간 사정의 일단을 증명한다) 그 지극한 부당성으로 인하여 사회 여론의 맹반대에 봉착하게 되자 돌연 국립서울대학안이라는 허울좋은 분칠로 화신하였다. 본 국립대학교안은 거족적인 맹렬한 철회 요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안은 금일 극비밀리에 그 방법에 있어 너무나 모욕적이고 탄압적인 의도로 강행되러 하니 우리는 아연한 뿐이요 오직 우리 삼천만 민족의 거족적으로 정당한 요구는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번번히 유린당하고 마는가. 우리 민족의 위태한 운명을 통탄할 뿐이다. 우리 경대 의학부 조교수 강사 의국원 일동은 지난 8월 25일 총회의 결의로써 첫째, 국립대학안 절대 반대와 둘째로 우리의 인내도 드디어 최후의 단계에 다달았음을 차에 냉혹히 선언하는 동시에 문교 당국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동안의 철회를 요청한다. 그○○○○○하 동포 제위에게 다음의 우리의 진정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여 협력하여 주시기를 간망한다. 
 1. 국립서울대학안을 즉시 철회하라.
 2. 문교 정책에 있어서 비밀주의와 탄압주의를 즉시 철폐하라.
 3. 모든 과학자의 인격을 존중하라.
     1946년 8월 23일 경성대학 의학부 조교수 강사의 국원 일동
  • 1946년 8월 26일 <조선인민보> 總長以下 各學長의 決定
말썽 많은 서울대학교안은 일반의 맹렬한 반대가 있던 말던 기정 방침대로 9월 부터 실시한다는 것이 문교부의 방침. 그리고 총장이하 8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이 결정되어 벌써 지난 30일에는 그 첫 회합을 보았다 하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 상과학장 이인기
 ▲ 사범학장 장이욱
 ▲ 치과학장 박명진
 ▲ 예술대학 미술부 장발
 ▲ 동음악부 현제명
 ▲ 총장 안시터드대위
 ▲ 대학원장 윤일선
 ▲ 동부원장 조윤제
 ▲ 문리과학장 이태규
 ▲ 의과학장 심호섭
 ▲ 법과학장 고병국
 ▲ 공과학장 김 일
 ▲ 농과학장 조백현
  • 1946년 8월 27일 <독립신보> 서울國立大學 敎授難- 學生 增募에 따라 문교부 頭痛

@실제날짜:460826

문교부장 유억겸 씨가 26일 발표한 바에 의하면 서울 국립대학 신입학생의 增募에 따라 신교수가 긴급히 필요하다 한다. 총장과 각과 부장은 대학의 교수진에 새 교수가 들어와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 1946년 8월 28일 <독립신보> 서울大學法令(一)

@실제날짜:460822

반대론이 비등하던 국립서울대학교는 기정의 계획대로 설립하게 되어 군정청에서는 이에 대한 법령을 지난 22일 부로 발표하고 오는 9월 1일부터 개학하게 된다. 
 제1조 목적
   본령은 조선 국민에게 우수한 고등교육 시설을 제공하고 활용케 하여서 조선 청년으로 하여금 개인으로서의 조선인 자신 및 현대 사회의 국민으로서의 조선 인민의 향상을 위하여 그 시설로부터 발생하는 온갖 이익과 기회를 適宜 이용케 함으로써 목적함. 
 제2조 목적 달성의 방법
   본령의 목적은 기존 교육 시설이 재편성되는 국립서울대학교에 합동하여 시시로 필요 또는 요망에 의하여 그외 교육 시설을 과도적으로 흡수하고 기타 필요한 대학 학부 및 硏學 기관을 증설하며 우수한 교수 진용을 정비하고 현 학교 운영상의 결함을 제거하며 행정면에 있어 절약 정책을 수립하고 전세계 일류 고등교육 기관의 학술 수준에 필적할 만한 정도로도 대학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필요한 제반 감리 제도(경쟁시험 및 기타 방법에 의한)를 創定함으로써 달성함. 
 제3조 입학 자격 규정
   본 대학 입학 자격 규정은 시시로 본 대학교 이사가 제정함. 단 여하한 때 또는 여하한 경우를 물론하고 그 종족, 국적, 종교, 성별, 가문(사회계급), 또는 경제적 지위 혹은 조건 여하가 본 대학교 입학 및 출석의 許不許, 본대학교에 의하여 혹은 본 대학교내에서 수여되는 학위, 졸업장, 증여서, 장학금, 증여금, 급여, 명예 또는 상여 등의 부여를 결정하는 필수 조건이 되지 못함.  그러나 이사회는 조선의 공익이 필요로 인정하는 하시든지 문서에 의한 공포로써 본 대학교에 입학 또는 출석이 허용될 수 있는 조선내에 정착하지 않는 자의 정원을 백분율 또는 수에 의하여 규정함을 得함. 
 제4조 기본 법령의 폐지 보류 규정(예외규정)
   左記 기존 법령의 전부 혹은 일부가 본 령에 규정된 국립서울대학 및 그 대학 학부 학교 연학 기관에 관련된 이상 此를 폐지함. 
    (가) 1918년 12월 6일부 勅令 제388호(대학령) 1928년 칙령 제7호 및 1943년 1월 칙령 제41호 개정 법령 및 이래 개정 법령 
    (나) 1919년 2월 7일부 칙령 12호(제국대학령) 
    (다) 1926년 4월 1일부 칙령 제34호(대학정), 1934년 3월 조선총독부령 제34호,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79호 및 1943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137호 정 법령 및 이래 개정 법령. 
    (라) 1926년 4월 1일부 칙령 제47호(경성제국대학 각학부에 있어서의 강좌의 종류 및 그 수에 관한 건), 1927년 6월 칙령 제154호, 1928년 4월 칙령 제58호, 1929년 4월칙령 제81호, 1931년 4월 칙령 제66호,  1940년 4월 칙령 제219호, 1940년 12월 칙령 제934호, 1914년 4월 칙령 제44호 개정 법령, 1942년 4월 칙령 제400호 및 이래 개정 법령. 
    (마) 1943년 5월 7일부 조선총독부령 제138호(경성제국대학 예과규정) 
    (바) 1932년 1월 官專 제2호(경성제국대학 학위규칙) 
    (사) 1903년 3월 27일부 칙령 제61호(전문학교령), 1928년 1월 칙령 제8호 개정법령 이래개 정법령. 
    (아) 1922년 3월 7일부 조선총독부령 제21호(공사립 전문학교규정),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81호, 1943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139호 개정법령 시행 규칙 및 이래 개정규정. 
    (자) 1922년 4월 1일부 조선총독부령 제49호(경성법학전문학교 규정 시행규칙) 및 이래 개정 규정. 
    (차) 1922년 4월 1일부 조선총독부령 제50호(관립경성의학전문학교 규정), 1944년 6월 30일부 조선총독부령 제262호 개정 규정 시행규칙 및 이래 개정규정 
    (카) 1922년4월 1일부 조선총독령 제52호(관립수원고등농림학교규정), 1944년 6월 30일부 조선총독부령 제2백61호 개정 규정 시행세칙 및 이래 개정 규정. 
    (타) 1922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53호 (관립경성고등상업학교 규정), 1944년 6월 30일부 조선총독부령 제263호 개정 규정 시행규칙 및 이래 개정 규정. 
    (파) 1922년 4월 1일부 조선총독부령 제51호 (관립경성고등공업학교규정), 1944년 6월 30일부 조선총독부령 제 260호 개정 규정 시행 규칙 및 이래 개정 규정. 
    (하) 1943년 3월 8일부 칙령 제109호(사범교육령 및 시행 規則) 
    (가) 1924년 5월 2일부 령 제104호 (경제제국대학학부에 관한 건 및 이래 개정 법령) 
    (나) 1924년 5월 2일부 칙령 제105호(경성제국대학에 관한 건 및 이래 개정 법령) 
    (다) 1926년 4월 1일부 조선총독부령 제31호(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에 법학과, 철학과, 사학과 및 문학과 설치에 관한 건),  1927년 3월 조선총독부령 제15호 개정법령. 
    (라) 1939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65호(경성광산전문학교규정),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령 제85호 개정 규정 시행規則 및 이래 개정 규정. 
    (마) 1922년 3월 31일부 칙령 제151호(조선총독부 諸學校 官制 제3조中 경성사법학교 경성여자사법학교에 관한 규정) 
    (바) 본령과 합치하지 않거나 또는 본령 규정에 위반하는 기타 諸法令 전부 혹은 일부는  본령 규정과 합치하지 않거나 또는 그에 위반하는 범위에 한하여 폐지됨. 단 본령은 玆에 열거 및 기술된 법령 또는 규정의 조항에 의하여 소멸된 단체를 부활시키거나 혹은 그에 의하여 폐지 또는 취소된 법령 규정 조항 및 법규의 再定을 의도하지 않고 또는 여차히 해석지 못함.
  • 1946년 8월 28일 <조선인민보> 國大案法令發布, 十一 專門學校는 廢校
소위 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는 각계의 반대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 군정청에서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22일 부로 발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經專, 치전, 法專, 의전, 鑛專, 남여사범, 工專, 수원농전, 경성대학 이상의 기존 11교는 폐지되고 몇몇 사람으로 운용되는 이사회에 완전히 그 기능을 맡긴 거대하다기 보다는 복잡한 서울대학교 만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 1946년 8월 29일 <동아일보> 綜合藝術大學을 準備
우리의 예술을 살리고 우리의 전통을 기르는 예술의 요람을 세우고자 극장예술인들은 기금 1천만 원을 거두어 9월 중순부터 종합예술대학을 설립키로 하기로되어 방금 준비 중이다. 그런데 동교는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의 각과를 포함한 것으로 그 장래가 크게 기대되고 있다.
  • 1946년 8월 30일 <독립신보> 綜大에 就任 拒否- 經專 교수 42[126]명이

@실제날짜:460828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단 24명은 국립서울대학 설립에 대하여 28일 유억겸 뮨교부장에게 통고문을 제출하고 조선 교육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동 법령의 철수를 요망하는 동시에 새로 설치되는 국립서울대학에 취임할 의사가 없다고 서명 날인하여 강고한 결의를 표명하였다.
  • 1946년 8월 30일 <조선인민보> 國大案 法令 撤回하라- 經專敎授會 全員 署名으로 勸告

@실제날짜:460828

학계의 혼란을 가져오고 사회에 물의를 비등시킨 국립서울대학안은 금월 22일 드디어 법령으로 발표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경성경제전문학교에서는 28일 교수회를 개최하고 신중 토의한 결과 전원 24명의 서명 날인으로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문교부에 재출하여 단연 불합작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본 교수단은 국립 서울대학안에 관하여 문교 당국의 재고를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금반 법령으로 이를 발표함은 유감이다. 본교수단은 조선 교육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이 법령의 철회를 요구하며 만약 이 법령이 실시되는 경우에는 우리는 국립서울대학교에 취직할 의사가 없음을 일동 서명으로 권고한다.
  • 1946년 8월 31일 <독립신보> 교육자여 양심있는가? 世醫專서 入試 志願者로부터 收賂
건국초 신성해야 할 교육계에 일대 오점을 점찍은 불상사가 생기어 식자로 하여금 이마쌀을 찌푸리게 한다. 경성부 남대문통 5丁目 세부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는 지난 7월에 실시된 동교 입학 시험 때 지원학생 5명에게서 입학을 시켜준다는 약속 아래 합계 48만 원이라는 거대한 금액을 받은 사실이 탄로되어 목하 동교 교장 崔棟 씨와 회계과장이 제1관구 경찰서 정보과의 취조를 받고 있다는데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 1946년 8월 31일 <독립신보> 綜大는 기정 방침대로- 經專 교수단 질문에 문교부 응답
신 발족하는 문제의 종합대학에 대해서 경제전문에서는 교수 24씨의 연명으로 문교부장에게 동 안의 철회를 요구하는 동시에 만약의 경우에는 총사직하겠다는 통고문을 발하여 추이가 크게 주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吳차장과 鄭고등교육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차장 - 통고문이 있었으나 소속 윤총장에 회부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국장 - 종합대학안을 철폐하라는 요구였으나 철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안은 실시하는 것으로 경전의 교수단은 자기 갈 길을 가면 좋을 것이다.
  • 1946년 8월 31일 <독립신보> 向學熱이 빚어낸 죄- 입학 시험 서류를 위조

@실제날짜:460829

향학열에 불타는 1학도의 가련한 죄. 서울 중구 황금町 3丁目 30 朴學文(가명 25)은 좀더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전문대학의 입학기를 앞두고 시험을 한 번 쳐 보려도 학력 증명이 없어 고심하며 생각한 나머지 동경 目白상업학교 졸업증과 동경고등공업학교 졸업증, 교장 인장, 활인 등의 위조를 서울동대문구 돈암町 83의 355거주 인쇄직공인 이광범(31)외 2명에 1500원을 주고 부탁하여 연희대학의 입학 수속을 무난히 마쳤다. 그러나 범죄의 불안과 공포에 그날 그날을 지내 오던 중 지난 29일 용산서에 탐지되어 인치되자 전후 사실을 솔직히 자백하여 관대한 처분을 바라고 있다고 한다.


1946년 9월

  • 1946년 9월 1일 <동아일보> 文盲退治에 烽火 - 15일부터 成人敎育 實施
경성성인교육협회에서는 오는 15일경부터 각 국민학교를 이용하여 글을 배우지 못한 12세 이상의 男女 성인을 수용하여 국어와 공민,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래서 공부를 못한 사람은 노소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배우도록 희망하고 있다. 또 이 기간은 1년을 4기로 나누어 1기(3개월)에 1천 200명씩 수용한다.
  • 1946년 9월 1일 <동아일보> 새 役軍될 男女 大學生 一萬二千餘名을 進學
新大學制 實施, 國民皆學의 第一步
9월의 신학기를 맞아 남조선안 각 학교는 일제히 희망과 연학의 새로운 포부를 안고 문을 열었다. 국민학교는 의무교육 실시를 앞두고 계획 제1년을 맞이하여 적령학동의 7할을 수용하게 되고 중등학교는 고급 3년, 초급3년제로 나누이게 되고 새로히 공업 11교, 사범 21교 도합 31교가 증설되는 한편 야간제 중학을 설치함으로써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에 문교 당국은 만전의 조치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綜大는 實現
그리고 고등교육에 있어서는 한동안 반대 여론으로 말썽이 많던 국립서울대학도 드디어 9월부터 개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경기도안에 있는 8개 관립 단과 전문학교와 치과의전(사립)을 합친 국립서울종합대학과 연희, 고려, 이화의 세 사립 종합대학 이밖에 15개의 단과대학에는 도합 1만 2천여 명의 학도들이 새나라의 동냥이 되는 길을 닦게 되었다. 이밖에 부산에는 수산전문을 바탕으로 하여 인문과학 계통을 통합한 대학이 나타나게 되어 교육조선의 躍進狀을 여실히 보이고 있다.
念願 學童은 全部就學 : 9월 2일부터 新學期
의무교육을 앞에 둔 금주의 신학기는 오는 2일부터 개학되는데 금년도 경성시내 각 국민학교 입학아동은 1천 8백 명이며(지원자 전부수용) 이 아동들은 시내 55개 국민학교에서 2부제로 262명의 훈도가 담당하여 내일의 씩씩한 새일꾼이 되도록 지도배양하기로 되었다.
  • 1946년 9월 1일 <동아일보> 鎭海海洋大學 9月 15日에 開學
오는 9월 1일에 개학 예정이었던 진해해양대학에서는 이를 연기하여 9월 15일부터 개학하게 되었다.
  • 1946년 9월 1일 <동아일보> 八箇 夜間中學 今月中으로 開校
문교부에서는 앞서 각도에 야간중학을 창설하라는 지령을 전하였는데 이에 의거하여 작도에서는 이번 9월부터 주간과 동등한 야간 수업을 시작하기로 되었다.
  • 1946년 9월 1일 <한성일보> 신학기 맞는 학원의 신체제- 신교육령 월내 공포 실시
해방된 노예 교육의 사슬. 해방 후 ○○간의 시련기를 거치고 생동하는 신학기를 당하여 문교 당국에서는 이미 전번에 그 윤곽을 발표한 바와 같이 과거 우리가 일제 아래서 받아 오던 식민지 노예 교육에서의 이탈과 함께 미영불 등 선진 국가의 교육 제도를 참작 소화하여 새로운 구상 아래 제정된 신교육령의 성문화를 마치게 되어 늦어도 9월 중순경에는 정식으로 법령을 발포하는 동시에 신학기부터 이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 교육사상 획기적인 이 신제도에 의하면 만 6세에 국민학교를 입학하면 21세까지에는 국민학교 6년 초급중학 3년 고급중학 3년 대학 4년의 전 학업을 마칠 수 있는 것으로 그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남조선 요취학 인구 개관 총 인 구 수 약 1,656만 명

       초등	 6세-11세	        약  308만 명

중등 12세-17세 약 206만 명 고등 18세-21세 약 104만 명 남조선 교육발전 개황 기간 학교별 학교수 교원수 생도수 초등 3,037 20,476 1,440,435 해방 중등 297 3,780 105,461 직전 고등 21 628 3,260 합계 3,355 24,884 1,551,156 초등 3,030 25,482 1,613,826 중등 323 2,668 99,880 최근 고등 27 991 10,380 합계 3,380 29,141 1,723,914 ◇ 註 - 해방 직전은 일인 학교를 포함함

初等敎育
 국민학교는 나치스 독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중심인 교육을 시행하여 오던 일본식 교육을 타파하고 아동중심의 즉 아동 개개의 개성을 살리는데 치중하자는 것이 이번 새 교육제도의 주요한 안목이다. 서울을 비롯하여 도시에 있어서는 아동의 취학율이 거의 100%에 가가우나 지방 특히 농촌 아동은 학교의 부족 또는 생활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국민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받아야 하나 공민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일생을 문맹 가운데 보내고 있는 현상인데 문교 당국에서는 별표와 같이 만 6세 이상 11세까지의 적령 아동 300여만 중 취학하지 못하고 있는 140여만 아동을 수용하고자 이미 도시에서 시행 중에 있는 2부제를 전반적으로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일정 시대부터 현안으로 있는 의무교육제도는 지금 그 성안을 작성 중이나 이것을 실시하려면 3천여개교에 4만여학급과 34,000여 명의 교원이 필요하게 됨으로 시설의 확충과 아울러 부족되는 만여 명의 교원 양성을 위하여는 자연 국민의 부담이 커지게 될 것으로 이러한 애로의 타개책이 서기 전에는 그 실현은 당분간 보류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더욱 이번 신학기 부터는 교원의 직제를 과거의 1종 2종 3종 훈도 또는 촉탁 교원 교두 등 일제 시대의 잔유들을 폐지하고 교장 부교장 교사 준교사의 새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中等敎育
 국민의 중간층을 양성하려는 중등교육의 새 구상은 근본방침을 공민교육에 두고 과거의 과목주의에서 벗어나 학생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이 기본 강령이다. 그 제도에 있어서는 년한에 제한이 없다는 갑종학교를 제외한 정규 중학교는 男女○○을 ○○하고 원칙적으로 갑 을○ ○○을종 제도를 폐지하고 수업 연한을 6년으로 하되 전반기 3년을 초급중학 후반기 3년을 고급중학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과거의 보습학교는 수업 년한 3년의 초급중학교로 승격 될 것이며 금번 신학기에 구제도의 4학년 진급자는 고급중학 1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더욱 문교 당국에서는 왜적의 기만 교육 정책에서 벗어난 오늘에 있어서도 5배 내지 10배의 경쟁율을 보이고 있는 입학난의 완화를 꾀하고자 1부는 주간 2부는 야간으로 동자격의 2부제를 실시하려고 방금 그 예산을 청구 중에 있다는 바 이것이 전반적으로 실현된다면 향학에는 불타나 학자가 없어 진학을 못하는 많은 소년들의 복음이 될 것은 물론 현재의 시설만 가지고도 최소한도 20만 명의 학도를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그 실현이 시급히 요망되고 있다.
高等敎育
 일정 시대 일본은 식민지 정책에 의한 방편으로서 우리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지 않아 삼천만 인구에 단 하나 밖에 없던 경성대학의 지옥같은 문조차 반수이상을 그들의 자녀로서 독점하여 왔던 관계로 현재의 조선을 두 어깨에 짊어질 일꾼을 양성하는 것이 고등교육이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문교 당국에서는 해방 후의 첫 시책으로 이번 신학기부터 미국의 대학제도를 본받아 과거의 전문학교령을 일절 폐지하고 원칙적으로 男女공학의 대학령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별항과 같이 지난 8월27일에는 서울 부근에 있는 기존 관공립 전문학교를 1대학원 9대학으로 구성되는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는 법령을 반포하였고 남조선 각지에 있는 국공립 전문학교는 물론 대학령에 제정된 제반 시설 등의 조건을 구비한 사립학교에 대하여도 주간, 야간을 막론하고 대학으로서 승격 인가를 허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잡종학교 이외의 전문학교는 이○○○로 전폐하게 되었는데 경성대학 예과에 한하여 현재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구제도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신제도에 의한 대학의 수업 연한은 법문리공(法文理工) 계통이 4년이고 의과계통만은 예과2년에 본과 4년의 6년제를 채용하게 되었다. 더욱 대학 졸업 후 학생의 희망에 의하여 1년 내지 3년에 걸쳐 대학원에서 연구할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교수의 직제는 교수, 준교수, 강사의 4계급으로 나누게 되었다.
成人敎育
 문교 당국에서는 국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자 이번 새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개학운동으로서 남조선 방방곡곡에 공민학교를 설치하고 소년과에 17,280학급 보수과에 1,800학급 성년과에 43,500학급을 두어 총게 5여만의 성인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이것이 실현되는 때에는 문맹은 완전히 퇴치될 것으로서 하한 민도가 세계적 수준에 오를 날도 머지 않아 그 운영여하야 말로 기대되는 바 크다.
  • 1946년 9월 1일 <한성일보> 임시미봉의 교재- 응급 조치로 겨우 대처
소위 황민교육에서 180도 급전환해서 새로 발족한 조선 교육계가 봉착한 일대 곤란은 교재난이었다. 각 과목별로 우선 교수 요목을 토의 결정한 다음 교재를 편찬해서 인쇄 공급한다는 것은 현하 가지 가지의 제약 아래서는 상당한 시일을 요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라도 ○○○○一이 없이 방임할 수는 없어서 문교부 편수 당국의 적지 않은 고심이 여기 있는 바 임시 교재를 잠정적으로 공급하고 한편으로 본 교재를 준비 중이나 아직 손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허다하다. 즉 가사 재단 미술 과목 등은 착수하지도 못하고 있고 ○○ ○○ 과목 등은 ○○○○○○○○○○ ○○○ 공작과목은 교수 요목 번역 중이며 이과는 4, 5, 6학년 교재 1권을 미쳐 인쇄할 수가 없어서 원고를 등사해서 공급하도록 응급 조처를 하고 있는데 8,15 이후 편찬 공급 혹은 인쇄 중에 있는 교재는 다음과 같다.

臨時敎材
 ▲한글첫걸음 1945년12월 7일 공급 7월 10일 1,024 526부 공급 완료▲한글교수지침 동 12월 26일 공급 7월 10일 동 완료▲초등공민(상)(중)5월 10일 공급 (하)5월 24일 공급▲중등공민(상) 5월 2일 공급 개시 7월 4일 70,000부 완료 (하)5월 20일 공급 개시 7월 4일 50,000부 완료 ▲초등국어교본(상) 작년 12월 26일 배본 개시 5월 23일 700,000 ○○○ ○○○○○○○공급▲국사교본 6월 17일 공급 ▲노래책(상)(중) 7월 25일 공급 (하) 7월 29일 공급 ▲이과교수요목 8월22일 공급
本敎材
 ▲초등셈본(1)(2) 8월 26일 공급 (3)(4)(5)(6) 인쇄 중 ▲중등국어교본(상) 9월 8일경 공급 (중) 인쇄 중
  • 1946년 9월 1일 <한성일보> 홍익인간의 이념- 민주국가의 인격 교육이 목표
문교부차장 오천석 씨 담. 이번 새 학기부터 실시하게 된 신교육령은 주로 미국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근본 이념은 홍익인간의 건국 이상에 따라 인격이 완전하고 애국 정신이 투철한 민주 국가의 공민을 양성하려는데 있다. 그 특색은 종래 직업 교육화한 전문학교 제도를 폐지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인격 교육을 주로하는 대학 제도의 창설을 비롯하여 실업학교와 중학교 남학교와 여학교의 차별을 일절 철폐하고 수업 연한과 그 내용을 같이하여 종합중학의 사상을 고취하는데 있으며 학교 당국의 희망에 의하여 국민학교는 물론 중학 대학까지도 男女공학제를 허가할 방침이다. 의무교육 문제는 우선 국민학교에만 적용하려고 계획 중에 있으나 장래에는 연한을 연장하여 초급중학까지를 의무교육으로서 실시할 복안을 가지고 있다.
  • 1946년 9월 2일 <독립신보> 單科大學生 收容力 增大
昨 1일부터 신 학년도로 들어가는데 조선에 있는 15 단과대학과 4 종합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은 1만 2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번 신 학기에는 별로 학교는 증가되지 않았으나 설비 확장으로 예전보다 더 많은 학생을 수용하게 된 것인데 신입생들은 각 학원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게 되었다.
  • 1946년 9월 3일 <독립신보> 經專 敎授會서 社會에 謝過 聲明

@실제날짜:460829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회에서는 벌써 발족한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하여 그 비민주성을 지적하여 거듭 반대하였으나 문교 당국은 이를 묵살하고 있음으로 24명의 전 교수는 예정한 대로 교단으로부터 퇴진할 것으로 보이는데 동 교수회에서는 '조선 사회에 고함'이란 다음과 같은 비장한 일문으로서 동 안이 철회 못된 것을 사죄하고 있다. 
동포들! 우리는 우리가 민족 이익에 배치된다고 인식한 종합대학안을 철회시킴에 역량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 교육의 주인공인 동포에게 호소하며 백번 사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종합대학에 취직원을 제출치 않고 제정된 방식에 따라 자연 퇴직함으로써 대신하려 합니다. 그것이 미력한 우리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으로서 종합대학안에 반대하는 이유가 일신의 지위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의 책동이라는 부당한 일부의 오해에도 답이 된 것이고 순전히 사적 입장을 방기하고 민족의 구원한 행복을 념원하는 소위임이 입증될 것입니다. 사대 사상과 더불어 頑迷한 배타심은 민족의 장래를 다시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자주성이란 근본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누구나 다 엄연해야 하고 자기 희생적이어야 할 것을 국치일인 오늘 8월 29일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946년 8월 29일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회
  • 1946년 9월 3일 <독립신보> 마음을 설레며 등교- 國民校 男女 신입생의 이모 저모

@실제날짜:460902

일본말을 국어라고 하여 일어를 쓰지 않으면 벌을 주어 강제하던 일본말고 우리 손으로 한해 동안 교육한 오늘 이 땅의 조선 국민은 정신과 언어에 벌써 조선혼이 박혔다. 작 2일은 새 교육 행정의 첫 신 학년도가 바뀌는 날이다. 일제 시에는 4월에 학년도가 갈리던 것이 우리는 9월부터 학년도가 바뀌게 되어 새로 입학하는 소년·소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어리광만 부리던 아동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이 땅의 한 학생으로 전환되는 일생 중 중대한 의의를 갖는 날인 것이다. 오전 8시 30분 서울 남녀국민학교에서는 40여일의 하기 방학에서 다시 수업 의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교장으로부터의 훈시와 반 편성이었었고 오후 2시에는 생전 처음 학교에 들어오는 6, 7세의 남녀 아동들이 어머니 누님 언니의 손에 이끌려 귀여운 눈동자와 걸음걸이로 교문에 들어서 입학식에 나아 갔다.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 빼놓지 않으려고 말동 말동하는 눈동자를 굴리는 아들딸의 모습이야말로 이땅의 '심볼'인 듯 하다.
  • 1946년 9월 3일 <독립신보> 이제부터 새 학년도- 男女 중, 초등교 입학식도 거행

@실제날짜:460902

찌는듯한 더위도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가을이 벌써 왔다는촉감을 느끼게 한다. 결실의 가을철을 앞두고 硏學의 길에 있는 새조선의 일꾼은 과도기에 처해 있으면서 오로지 학구에 열중할 때는 바야흐로 이 때를 두고 이름인 듯이 향학열이 고조되어 있다. 작 2일은 해방 후 조선인 손으로 운영되는 문교 행정에 있어서 첫 번 맞이하는 학년 초인 동시에 신입생의 입학식이다. 이날은 서울 남녀 중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이 공사립 국민학교생이 처음 맞이하는 승급, 새학교의 입학식으로 어린 동심에 자못 감격을 가져 오게 하였다. 우선 중등학교 교문을 들여다 보니 면면마다 한여름 赤冬色으로 탄 얼굴도 씩씩하게 이 땅의 장차의 새 일꾼은 나란 듯이  걸음걸이도 믿음직하게 교문에 발길을 들여 놓는다. 신입생은 6년간의 일제 강제 교육에서 이탈되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선발된 수재들이니 만큼 모두 희망에 불타는 능동자로 동경의 온상으로 앞을 다투어 모여든다. 이땅의 젊은 학도에 축복하듯이 날씨도 하늘높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날씨이다.
  • 1946년 9월 4일 <독립신보> 延專 敎授 10명 罷免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이번 학과목 변경의 이유로 담당 과목 없는 교수로 陸藝修 씨외 9명을 사전 예고도 없이 파면하였다고 한다.
  • 1946년 9월 4일 <동아일보> 緩和되는 入學難
5천여 미취학생 위해 도내 각 중학교에 1학급씩 증설
입학난으로 말미암아 아무 중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고 새학기를 맞이하게 되어 아동들과 학부형들의 근심은 날로 심해가고 있음에 鑑하여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여러 가지로 그 해결책을 강구하여 오던 중 이 지음 도내 50여 중학교에 한 학급씩 더 증가시키기로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9월부터는 50여 학급이 증급되고 우선 금년도 도내 국민학교 졸업생으로 중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5천여 명 생도를 수용하게 되었는데 교사와 교유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각 학교가 일제히 실시하게 되지는 못하나 9월 내에는 전부 수용하게 되리라 하며 벌써 2학급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학도 많다 한다. 그런데 도에서는 별도로 야간 중학을 실시하고자 경기경성중학을 비롯하여 9개 학교에 야간부를 두고 미취학 생도들은 물론 주간에 배울 길 없는 근로 청년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로 되어 많은 성과가 기대되는데 이번에 실시되는 야간중학을 특히 근로 청년을 위하여 실로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 1946년 9월 6일 <독립신보> 同案 撤回를 懇曲히 요청-女子師大서 聲明
좌우를 막론한 정치 단체 문화 단체 및 사회 각계의 명사 등의 적극적인 반대와 철회요청의 물끓듯 하는 여론 속에 도리어 八月二十二日부로 법령화했다. 그러나 보라!! 그 안이 얼마나 조선 장래에 미치는 악영향이 심대할 것인가를 우리 女師大 學生은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야 우리 일동은 다사다난한 건국 도상에 한결같은 결의로서 다만 묵묵히 진리의 탐구와 직무의 실천을 애끼지 않는 우리 여사대 학생 雙肩에는 불원한 장래의 조선 교육계와 아울러 일천오백만 여성 해방의 중대한 사명을 질머진 원대한 존재로서 우리는 이 안에 절대 반대하야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적으로 하루바삐 이 안이 철회됨을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 1946년 9월 6일 <독립신보> 日帝 奴隸 敎育의 延長- 師範大學 新入生 大會서 聲明

@실제날짜:460904

聲明書
 民主 敎育 建設에 獻身코자 京城師範大學에 입학한 우리 신입생 일동은 今般 所謂 國立서울大學校案을 신중 검토한 결과 玆에 그 부정당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여 이를 전적으로 반대하기를 결의하였다. 
  一. 문교 당국이 말하는 바 장점이란 실질적으로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한낮 臆설에 지나지 않는다. 
  二. 관료적 이사회의 구성은 독재적이며 학문의 민주화를 억압하는 것이다. 
  三. 교수회의 권한과 학생회의 존재를 말살하고 학문 연구의 자유를 剝奪하는 것이다. 
  四. 敎授 및 학생의 생활을 구속 강제함은 현실 사회 생활 조건하에서는 수학을 불가능하는 것이며 과외 연구를 무시하며 진실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五. 조선 민주 건설의 기본적 조건인 政治 과학 사범 교육의 萎縮은 일제 노예 교육의 연장이며 교육자 확보를 곤란케 하는 것이다. 
  이상 지적한 바 본안은 조선 교육에 많은  폐해를 가져올 것은 明若觀火의 사실이다. 조선 민주 교육에 몸소 이바지하고자 맹세한 우리는 재학생 일동과 동일 보조로 최후까지 투쟁하여 나갈 것을 널리 선언한다. 
 1946년 9월 4일 경성사범대학 신입생대회
  • 1946년 9월 6일 <독립신보> 綜合大學校의 法令은 非民主的이며 官僚的- 공업전문교 학생회 성명
서울대학교안은 左와 같은 근본적 결함을 내포함을 지적한다. 
 1.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다. 교수회의 원칙적 부인, 미국인 총장의 교내 전권 장악, 이사회의 독단적 학교 운영은 관료적이며 학원의 민주화를 말소하는 것이다. 
 1. 교수의 활동 봉쇄. 교수의 일주 44시간이란 과도한 근로, 대외 문화 활동에 있어서의 총장의 통제는 기성 학자가 적은 조선 현실에 있어 우수한 학자 양성을 저해하며 대중 문화의 활발한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1. 공업 교육의 축소와 학생의 질적, 양적 향상 불가능. 설비없는 이공학부 제2호관에 현 공대 설비를 이전하여 이공학부, 공대, 광공대를 종합함은 조선 공업교육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左와 같은 불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1. 조선 정부 수립 후까지 운운함은 완전히 조선 정부의 자주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2. 교수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함으로서 현하 이에 적합할 조선인 교수의 부족을 초래한다. 
    3. 학생 수업 총시간의 1/10을 결석하는 학생을 제명함은 일면 공부, 일면 노동으로 학생 생활을 유지함이 대부분인 현하 학생의 진학의 길을 암담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번 법령의 철회를 강고히 요구하며 요구 관철을 위하여 학생의 패기와 정열로서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 1946년 9월 7일 <독립신보> 교수의 질적 퇴영을 초래 - 법대생 총회 결의

@실제날짜:460904

국립서울대학교안은 다음과 같은 모순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관료로서 구성된 同기구가 교수회의 부정권 및 학생의 자치를 부인하고 나선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의 무시로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2. 교수의 수강에 있어서도 그것을 시간적으로 구속하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 교수의 질적 퇴영과 민족 문화의 퇴보를 초래하는 것이다. 
 3. 학생에 관한 규정에 있어서는 현금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4. 학생의 질적 양적 향상 운운은 실제에 있어서 이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5. 동 법령의 모순은 고사하고라도 그것이 가진 과정의 비민주적 성격을 우리들은 지적할 수 있다. 
기타 허다한 모순을 발견하였을 때 우리는 동 법령의 즉시 철회 요구와 학생 등록의 절대 거부를 결의하는 바이다. 
 1946년 9월 4일 서울법과대학학생대회
  • 1946년 9월 7일 <독립신보> 교수 총사직을 결의 -서울대학 이공학부 38명이

@실제날짜:460905

서울대학 이공학부 교직원 일동 38명은 9월 5일 신제도의 국립서울대학교 기구하에 봉직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는 과거 1년간 학원의 민주화는 보장되지 못하였고 교수회의 자치는 부인되고 교수의 파면은 일방적으로 단행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 중에는 격열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대학교안이 정식으로 실시되어 학원의 민주화가 일층 거부되었다고 지적하였다.
  • 1946년 9월 7일 <독립신보> 서울 법과대학 전교 학생대회

@실제날짜:460909

서울법과대학에서는 7일 오전 10시 신입생 대회를 또 9일 오전 10시에는 학생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전학생의 출석을 요망하고 있다.
  • 1946년 9월 7일 <독립신보> 수업일 1割 결석한 학생 제적함은 부당- 경대 이공학부 학생대회 결의

@실제날짜:460904

경성대학 이공학부에서는 4일 학생대회를 열고 국립대학안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1. 군정 관리 6인과 美人 총장이 교내 전권을 장악하고 교수는 자치권 박탈은 물론 강의를 팔아먹는 노예로서 취급되고 학생의 경제 곤란은 일고에 부치지도 않고 수업일의 일할을 결석하면 제적한다 함은 우리를 학원에서 축출함과 동일하다. 
 1. 형식적인 통합으로 혼란을 일으키며 학문 일반 수준을 저하시키며 조국 산업 건설에 비통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맹서한다. 
 1. 국대안의 철폐의 날까지 싸운다. 
 2. 국립서울대학교 학생이 되는 여하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3. 경성대학 이공학부를 우리의 힘으로서 힘있게 세워 간다.
  • 1946년 9월 7일 <동아일보> 開校앞둔 綜合大學 : 注目되는 學生들의 態度
이미 국립서울종합대학교 설치는 법령으로서 발포되는 각부 책임자도 임명하는 한편 9월부터 개학하리라 하는데 배워야 할 학생층은 예상과는 반대로 종합대학안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기세로 신학기에 뜻하지 않은 학원의 이상을 보이고 있다.
이뿐더러 각 학부의 교수 진영의 재편은 아직도 정식 발표가 없는 이때, 5일 각 학교생도 대표, 교직원들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반대성명을 내고 있어 이 문제의 원만 해결이 주목되고 있다.
 ▲ 서울대학 이공학부 교직원 : 서울대학 교직원 38명은 신설 대학교에 봉직할 의사가 없음을 당국에 전달하기로 하였다고 성명서를 내었다.
 ▲ 경대 의학부 학생대회 : 경대 의학부 학생회에서는 지난 2일 신입생과 상경학생들이 긴급 의학부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종합대학에 대한 4원칙을 결의하여 절대 반대의 성명을 하였다.
 ▲ 여자사범대학학생회 : 여자사범대학 학생회에서는 이 대학안이 앞으로 악영향을 미칠 것을 통각하여 종합대학안을 절대로 반대한다고 5일 제2차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6년 9월 10일 <동아일보> 敎職員의 食糧難 解消

@실제날짜:460905

吾丁國民學校에서는 지난 5일 후원회 총회를 열었는데 처음으로 작년도 결산보고 등이 있은 다음 동 후원회장 韓基鶴 씨의 발기로 교직원의 생활 안정 없이 완전한 교육 없다는 제안에 일반 학부형들도 이에 감격, 협의한 결과, 각자마다 "쌀" 한 되 이상의 식량을 모아 무료로 공급하자고 만장 일치로 가결되어 익 6일에는 쌀자루가 쇄도하여 교직원의 식량난을 해결시켰다 한다.
  • 1946년 9월 10일 <동아일보> 불타는 地方의 敎育熱 : 望城面에 3國 民校 增築
전북 익산군 망성면에서는 건국도상에 직면한 의무교육 완성에 이바지하고자 동면 면장 兪然浩 씨와 국민교후원회장 吳在彬 씨외 면내 유지들의 성의있는 협력하에 백만 원 예산으로 內村 27학급 제2분교를 增築케 되었다. 그리고 망성천주교회에서는 동회에서 경영하던 계명학교(6학급)와 기타 소유재단 5백만 원을 동면 의무교육 촉성회에 제공키로 내인가되었다는데 일반의 찬사가 자자하다.
  • 1946년 9월 11일 <동아일보> 南朝鮮 大學이 誕生 : 釜山官大와 別個로 設立
신생 조선의 동량을 길러내기 위하여 은연히 팽배한 사학열은 부산에 새로운 열매를 맺어 관립 부산대학과 쌍벽을 이룰 남조선대학이 탄생케 되었다. 경남 유지들은 재단법인을 조직하게 되어 문교부에 허가 신청을 내는 한편, 이번 신학기부터 전문부와 법문학부를 정식으로 개학하게 되어 학생 모집을 하고 있다. 초대총장은 鄭基元 박사인데 동 대학 재단 설립에 이바지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
 ▲ 金在植, 具滋完, 黃永木, 金景俊, 姜憲伊, 黃元錫, 薛씨
  • 1946년 9월 11일 <동아일보> 貞明女學校 初中校 昇格
시내 宮井町에 있는 정명여학교는 이번 初級 女學校로써 문교부의 인가를 받게 되어 초급 1년생 約 50명을 추가 모집하고 있다. 시험은 오는 12일부터라 한다.
  • 1946년 9월 11일 <동아일보> 綜合大學은 旣定대로 : 吳文敎部次長 趣旨를 言明
登校 手續하라
국립서울종합대학 설립 문제를 애워싸고 교수회와 학생의 대부분은 반대의 의사를 표명한 채 개학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신입생 등록 초일인 9일까지 의연 학생측의 태도는 강대한 채 대학가는 이변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입생 등록은 9월 11일이고 재학생 등록은 12, 13 양일간으로 금후 학생들의 태도가 오직 주목되고 있다. 한편 문교 당국으로서는 초지일관 처음 방책대로 실시할 방침으로 문교부 차장 吳天錫 씨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말하여 학생들의 재삼재고를 촉구하였다.
종합대학 설치란 절대 필요한 것으로 외국에서는 한개의 상식으로 되어있다. 더구나 현재의 각 전문대학은 일제적 잔재와 모순이 많은 기구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一掃하는 뜻에서라도 빨리 종합대학을 설치하려는 것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는 종합대학을 반대한다는 이유가 있는데 이에는 우리도 동감이나 지금의 정세로는 임정이 언제 설지도 모르고 있는 만큼 우리는 부득이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 또한 등록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고 입학수속이니 오해말고 기간안에 수속할 것이며 대학안을 다시 한번 읽고 그 안의 좋은 점을 널리 이해하여 주길 바란다.
  • 1946년 9월 12일 <독립신보> 대학생들 登錄을 거부? 금후의 귀추 극히 주목
국립서울대학안은 그간 여러 가지 반대 진정에도 불구하고 문교 당국은 예정대로 동안을 성립시켜 과반 교직원의 복무 규정과 학생들의 출석 규정을 발표하는 등 기정 방침을 착착 실시 진행 중인데 관하 각 대학생들은 이번 국립서울대학 실시와 동시에 일제히 동 대학으로 전입하게 된다는 형식으로 동 대학에 대하여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되었다 한다. 제출 기간은 제학생은 오는 11, 12 양 일간이고, 신입학생은 13, 14 양 일간이라 하며 대학측에서는 이 신청이 끝나는 대로 지금 연기 중인 입학식을 거행하리라 하는데 한편 학생측에서는 이 신청 제도를 여전히 냉시하고 완강히 동 대학안에 반대하여 등록을 거부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어 각 대학 교직원들의 사의 표명과 아울러 그 추이가 매우 주목되고 있다.
  • 1946년 9월 12일 <독립신보> 서울師大서 反對

@실제날짜:460908

서울師範大學에서는 지난 8일 학생대회를 열고 학생등록에 대하여 단호 거부하는 동시에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연서날인할 것 등을 결의하는 종합대학안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6년 9월 12일 <독립신보> 水原 農大서도 반대 결의 성명

@실제날짜:460909

종합대학안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원농과대학에서는 9일 同校에서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동 안을 신중 토의한 결과 동 안은 
 一. 비민주주의적이고 관료적 전제적이며 
 一. 문교 당국이 주장하는 질적 양적 향상은 실질적으로 현실과 상반한다는 등의 결함을 지적하고 전적으로 동 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 1946년 9월 15일 <독립신보> 國立大學案 民議서 贊同

@실제날짜:460914

민주의원 공보부장 함상훈 씨는 14일 국립종합대학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립종합대학안에 대하여 본원으로서는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그 실행 방법에 있어서는 다소 검토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1946년 9월 15일 <동아일보> 明朗化하는 學園 - 學生의 登錄 陸續
綜大로 就學 人員은 倍加!
국립종합대학교 설립은 그동안 학생들의 등록 거부로 일시 사회 문제화되는 듯 하였으나 13일에 이르러 18일까지 등록 기한을 연기하자 14일 현재로 約  4천여 명이 등록을 하게 되자 대학생가에는 돌연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종합대학 설치는 수용인원을 줄이게 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한 측의 비논리성에 대하여 14일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종전의 배이상이 수용하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실제 수용 숫자를 밝히었다. 즉 전에는 4천 7백 30명이 수용될 것을 종합대학으로 한 뒤는 별항과 같이 8천 2백 17명을 제1차로 수용하고 제2차로 約 3백 명을 더 편입 수용하게 되어 8천 5백여 명이 개학 제1년에 수용하게 되었다 한다.
     校名                    今年卒業前在籍者數      現在籍者數
 京城大學 法文學部                445                 828
          理工學部                281                 408
          醫學部                  144                 190
          豫科                    473               1,224
 師範大學                         967               1,410
 女子師範大學                     206                 331
 法學專門                         264                 486
 經濟專門                         521                 860
 工業專門                         364                 784
 京城醫學專門                     248                 337
 音樂學校                         145                 273
 齒科專門                         184                 245
 水原農林專門                     288                 477
 鑛山專門                         200                 364
     合計                       4,730                8,217


  • 1946년 9월 18일 <한성일보> 서울國大 全學生 登錄?
작일 정오까지 수속 완료 6천여. 국립서울대학의 학생 등록 문제는 한때 물의를 끌다가 그 후 순조로이 진행되어 16일까지 5,234명 등록을 마치고 이어서 어제 17일에도 등록하는 학생이 답지하여 정오까지 6백여 명이 수속하였는데 등록 최종일인 오늘 18일까지는 동대학 8,319명 학생이 전부 등록 수속을 마치게 될 것으로 예기되고 있다. 16일까지 등록을 마친 각 과 대학별 학생수는 다음과 같다. 
 ▲의대426 ▲치대227 ▲농대382 ▲사대671 ▲문리대394 ▲법대569
 ▲상대545 ▲공대945 ▲약대206 ▲예대869
오늘 입학식
국립서울대학에서는 금 18일 오후 2시 입학식을 동 대학 본부에서 거행하리라 하는데 동 이공계통 개학식은 학생 천오백 명 참석하에 16일 광전에서 거행하였다.
피검학생 석방
국립대학등록 반대로 지난 12일, 동 14일에 걸쳐 경찰에 구속된 학생 1백 82명 중 10여 명만 남기고 전부 석방하였다 한다.
  • 1946년 9월 19일 <독립신보> 국대안반대의 경과를 교육자위원회서 동포에 호소

@실제날짜:460917

서울국립대학안에 대해서는 학교 교직원은 물론이요 사회 각 정치 단체와 문화 단체에서도 치령한 반대 여론이 있어 조선 교육계의 중대한 국가 문제로 되었는데 군정청에서는 법령 102호로 국립대학법령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교직원의 사직과 학생들의 등록 거부 등으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었는데 지난 17일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의 그간의 경과를 들어 발표한 바가 있었다.
신제도의 대학 기구하에서는 부하된 교육적 의무를 충실히 완수할 수 없다는 책임감에서 단체 사직의 형식으로 학원을 떠난 자가 적지 않으며 또 이 경향은 날로 증가되어 가는 중이다. 이같은 정세하에서 경대 의학부와 사대 교수단은 사태를 우려한 나머지 문교 당국에 동안의 실시를 보류하고 사회 각 방면의 권위를 망라하여 동안의 광범한 재검토를 요청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교직원의 태도에 대한 당국의 회답은 무엇이었는가? 국대에 취직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한 교직원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사표를 수리하였으니 즉시 사택 및 연구실에서 퇴거하고 교정에도 출입하지 말라는 통달이 있었으며 보류를 요청한 교수단에 대해서는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독선 일관의 태도이었다. 사택으로부터의 즉시 퇴거가 가능한가? 또는 반대하기 위한 반대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오로지 동포들의 현명한 판단에 맡기려니와 이제 9월의 학년초를 당하여 학생의 등록은 누차의 연기와 상서롭지 못한 공기 중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앞으로 교육계의 혼란은 여러 방면으로 예견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조선 교육의 부흥 발전과 학원의 민주화를 환호하여 온 우리들 교직원에게 있지 않음을 深諒하여 주길 바라는 바이다. 우리의 태도가 일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반대를 위한 반대거나 특권을 보전하기 위한 私心 私欲의 소치가 아님을 동포들은 깊이 양해해 주리라고 믿는 바이다.
  • 1946년 9월 21일 <독립신보> 國立大學 入學式 거행- 9월내로 수업 시작할 예정

@실제날짜:460918

그간 물의를 거듭하던 국립서울대학에서는 학생들의 등록이 끝났음으로 공과대학을 제외한 8대학의 입학식을 각기 대학 교사에서 분산적으로 18일 오후 2시 일제히 거행하였다. 이번 입학식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과반 실시한 등록제도로 要登錄者 8,200명 중에서  18일 정오까지 등록을 마친 약 5천 명의 재학생과 신입생들인데 등록 거부로 인한 산하 각대학의 신입생 결원의 보결은 18일까지 입학 원서를 받아 19일 오전 9시 경성 동숭町에 있는 구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사에서 전형 시험을 실시하리라 한다. 그런데 국립서울대학측의 말에 의하면 각 대학의 개강은 여러 가지 설비 관계로 다소 지연될 것이나 9월 안에는 일제히 시작되리라 한다.
  • 1946년 9월 21일 <동아일보> 綜大登錄學生은 五千餘 - 18일 開學, 開講은 未定
18일 하오 2시 국립서울대학에서는 공과대학을 제외한 8대학에서 각기 개학식을 擧行하였다. 개학식에 참가한 학생은 취학예정 학생 8천 2백 명 중 18일 정오까지 등록을 마친 約 5천여 명의 재학생과 신입생들이다. 그리고 등록 거부로 인하여 다시 신입보결생을 모집하기로 되어 19일 아침 전형시험을 擧行하였다. 개학은 하였으나 개강은 준비 관계로 몇일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 1946년 9월 22일 <독립신보> 京大 新入生은 明日까지 登錄

@실제날짜:460921

국립서울대학에 편입된 경성 지역 구 전문학교 재적자로서 미등록 학생이나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새로히 접수된 입학 원서에 의하여 입학 허가를 받게 된 학생은 23일까지 등록을 완료하여야 된다고 21일 문교부 유억겸 씨가 발표하였다. 그리고 23일 오후 4시 30분 이후 등록자는 등록 요금으로 180원을 납부하여야 한다.
  • 1946년 9월 22일 <독립신보> 國民校 六年用 算術敎本 配給
국민학교 6학년 1학기용 산술 교본 30만부의 인쇄가 완료되어 지금 각지 지정 판매점을 통하여 배포 중에 있다. 값은 10원이며 주문은 지정 판매점에서 취급하고 있다.
  • 1946년 9월 24일 <독립신보> 서울시 學務課長 李德鳳 씨 就任
京城府가 서울特別市로 오는 28일부터 새로이 발족됨을 따라서 여러 가지 직제가 변경되는데 그중 學務課 사무는 지금까지 시내 각 국민학교만 감독 통괄하던 것을 특별시 직제부터서는 시내 남여 중등학교(고급중학도 포함)까지 지휘 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중등학교 감독은 도청에서 해 왔었는데 도로부터 분리되어 시자체가 직접 관할한다. 도학무과에서는 서울시 이외의 초등 중등학교를 관할하는데 얼마 전 사임한 시학무과장 張勃 씨 후임에는 전 培花高女敎長 경기도 視學官 이덕봉 씨가 취임하였다.


1946년 10월

  • 1946년 10월 9일 <독립신보> 商科大學學生 新任 朴學長을 排斥

@실제날짜:461007

상과대학 학생회에서는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국립 대학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이사회를 조선인으로 구성할 것, 교수 및 학생의 자치권을 인정할 것 등 9개의 요구 조건을 문교 당국에 제출하는 동시 지난 9월 2일부터 동맹 휴학으로 들어갔는데 동 학생들로 조직된 맹휴투쟁위원회에서는 맹휴 중에 사임한 이인기학장의 후임으로 신임한 朴容夏학장을 배척하기로 되어 지난 7일 동 위원회 대표 최상호, 김상동, 김주현, 이우삼, 김상일 군 등 5명이 학교로 신임 박학장을 방문하고 동 학장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한다. 그 사퇴 요구의 이유는 신임 학장의 일제시대의 악질정총대로 학병 출정을 강요한 일제의 주구로서 앞으로 비민주적 학원 건설을 기도할 우려가 있으므로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1946년 10월 11일 <독립신보> 危機에 처한 國大- 교육자 대책회서 담화 발표

@실제날짜:461010

국대안 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대학 교육의 위기에 대하여 10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광전, 경전, 경대법경의 전교수, 경대의학부 조교수, 강사, 醫局 전원 160명, 경대 이공학부 교수, 조교수의 절대 다수인 35명은 동안의 철회를 요구하여 國大에 취임을 거부하자 이들은 즉시 국대 이사회와 총장으로부터 파면되고 말았다. 이외에 법전 교수진의 과반수, 공전 교수 13명 및 수원고농 교수 5명도 국대의 비민주성을 통감하고 도저히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일방 京師 女師 敎職員의 과반수도 이와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교직원의 이같은 태도가 오로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한 애국의 념에서 출발한 것임은 동포들이 깊이 양해하여 줄줄 믿는 바이다. 그러면 현재 국대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1. 불과 수명의 신규 채용에 의한 교수진 편성의  糊塗, 관공서 및 회사 직원의 시간강사 임명(사법부 재판소 직원의 법대 동원, 군정청 각 기술국 직원의 공대 동원 등) 친일 상인의 상대 학장 등용, ○編 국대 교수진의 내분 등으로 인하여 대학 교육은 실로 공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1. 입학 허가에 있어서는 거월 18, 19 양 일에 걸쳐 일부 지망자를 하등의 자격 심사도 없이 소위 명사의 추천만으로 무시험 입학시키는 등 엄정해야 될 학원은 대학 행정자 자신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세계에 우수한 대학을 건설하는 방도인가? 
 1. 이같은 사태하에서 공대, 의대, 사대, 상대, 예과 등 각 대학 학생은 학원의 민주적 건설을 위하여 맹휴에 들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대학은 소수의 굴종 비양심적 교수와 천여 명 학생 중 국대의 비민주성을 인식치 못하는 畿人 내지 수십인의 학생으로써 일일 일시간 정도의 수업을 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같은 대학 교육의 위기에 직면하고도 문교 당국은 하등 반성함이 없이 동 안의 강행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우리는 동포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일층의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 1946년 10월 12일 <독립신보> 學務課를 局으로 昇格-학무과장 談

@실제날짜:461012

서울 특별시가 됨에 따라 종래 부내 소학교만 관할 감독하여 오던 경성부 학무과는 서울시 학무국으로 승격하여 시내 소학교는 물론 남여 중등학교도 관할 감독하게 되었는데 지난번 학무과장으로 신임하여 이번 기구 개혁에 학무국장으로 내정된 李德鳳 씨는 앞으로 서울시 교육 방침에 대한 포부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잠정적으로 야간 중학을 - 이 학무국장 담
일제시대부터 늘 문제가 되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 문제는 금년에도 초등학교의 내신서와 입학 시험 성적과 신체검사 등을 참작하여 입학을 시키는데 여전히 여러 가지 폐해가 많았다. 현재 중등학교의 입학 지원자는 약 3할밖에 수용치 못하는데 입학제도의 폐해의 근본 해결책은 학교를 많이 증설하여 지원자를 전부 수용함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분간 무망한 노릇이고 결국 입시 해결책으로 야간 중학을 많이 증설하고 될 수 있는 한 지방 분산을 하여 타개책을 강구할 예정이다. 소중등학교 교원의 질이 퍽 저하된 것은 사실인데 일제 잔재적 요소와 아울러 사범대학과 각 사범학교 등을 이용하여 장기 단기 강습의 재교육으로 교원의 질의 향상과 일제 잔재적 오점을 숙청하여 가겠다.
  • 1946년 10월 16일 <독립신보> 서울 의대 맹휴 - 학원 자치권 등 요구

@실제날짜:461015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국립서울의과대학 학부 학생들은 지난 14일 동학부 학생대회를 열고 학생의 자치권 문제 기타 중요 문제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결의하는 동시 동 요구 조건을 관철키 위하여 15일 부터 동맹 휴학을 단행키로 하였다. 
▲ 요구조건 
   1. 이사회 문제 = 교수 자치권을 승인하고 이사회가 필요하면 학장회로 대행할 것 
   2. 학생자치권 =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승인할 것 
   3. 학원의 경찰 간섭 배격(검속 예과생을 즉시 석방시킬 것) 
   4. 학생과는 사무 처리만 할 것. 
   5. 藥理 제2 강좌 존치할 것 
   6. 합동 강의 거부(전문부와 학부의 분리) 
   7. 이상 요구 조건을 해결치 못하면 沈학장은 인책 사임할 것.
  • 1946년 10월 20일 <동아일보> 늘아가는 授業料 滯納 學生

@실제날짜:461020

塗炭에 빠져가는 社會의 苦悶相
세계대전 후 오직 한 길로만 걸어가는 "인풀레"의 선풍은 마침내 우리들의 생활을 위협하게 되어 각종의 아름답지 못한 사례를 빚어내어 인생 문제에 커다란 경종을 울리고 있거니와 우선 국가 재정의 근본이 되는 세금의 납부 성적이 겨우 5할에 달하는 것과 시내 각 공립중학교 재학생들의 수업료 체납이 늘어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민하는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9월 말 현재 서울시내 10개 공립중학교의 수업료 체납자가 무려 7천 7백여 명으로 그 체납액은 15만 5천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아직 보고되지 않은 공사립 중등학교와 초등학교의 것을 합친다고 하면 막대한 인원과 금액을 숫자로 보여주었을 것으로 앞으로 민생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긴급히 요망되어 있다.
  • 1946년 10월 20일 <동아일보> 授業의 새로운 方法 - 孝悌國民校에서 硏究會
民主 敎育은 이렇게
광복 조선 어린이와 민주 교육은 어떠한 지향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효제국민학교에서는 교장 尹在千 씨가 중심이 되어 9월부터 신정운영에 대한 신교수법을 실시하고 있다.
이 새과정 교수법은 교과의 배당시간을 80분씩으로 하여 점심시간의 60분을 전후하여 오전 오후에 두 시간씩의 수업을 한다. 이 80분간에는 두과목 내지 세과목을 수업할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담당 교원은 임의로 국어, 국사, 산술, 이과 등을 80분간에 수업하는 것이 매우 능률을 올린다. 이러한 시간 배정을 함으로 말미암아 교실 부족에 의한 2부 교육 문제의 폐단을 완전히 해소할 수도 있다.
이밖에 조례는 폐지한 대신 학년별로 매주일 네번씩의 건육회와 한달 한번의 건육회로서 집단 훈련과 건강을 향상시키게 되었다. 수업 방법은 종시 일관 민주주의적으로 하여 어떠한 문제가 제시되면 아동간에 충분한 문답과 토론으로 결론을 지어 선생님의 최후 가부를 듣게 됨으로써 시간에 교재를 배당하든 종래 의례를 완전히 일소하여 교재에 충분한 시간을 배당케 한다. 이리하여 동교에서는 25일 교육자들에게 이의 특별 연구교수회를 열어 비판을 받기로 되었다.
  • 1946년 10월 20일 <한성일보> 교육문제 잡감 - 주요섭
7, 8매 정도의 단감이란 題로 붓을 들기 만히 주저되지만은 최근 소감의 토막들을 한번 설파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다. 잡담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으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 교육하면 그 범위가 너무 광범하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성인교육,특수교육.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고 교육을 한다. 가장 조직적이고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을 수행하기 위하여 학교라는 제도가 발생되어 왔다. 따라서 집단된 인류가 각자 집단의 존속을 위하여 계획적 교육 정책을 써왔다. 따라서 그 집단의 성격 여하에 따라서 교육의 이상과 목표와 방법이 서로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환언하면 일개 집단의 집권자 게급은 자계급의 보장과 보호 발전을 위하여서 국민교육에 치중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기성 특권 계급이 일정형을 만들어 놓고 대중을 그 형에 판찍어 내는 교육이었다. 그것도 한 자아 성장욕의 하나일 것이다. 일제시대의 식민지적 교육 정책이 하나의 좋은 예일 것이다. 해방 조선에 있어서 이 문제가 논의되지 아니하는 것은 1개의 기이한 현상이라고 내게는 생각된다.
필자 개인의 의견을 솔직하게 고백하라면 현대인이 여하히 우상화 하려드는 형이라도 나는 반대다. 형을 아주 깨트려 버리고 아동 개인 개인의 천부된 역량을 아무런 장해가 없이 즉 선입 주관이 없이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최선의 환경과 도구를 아동들에게 절대적인 기회 균등의 입장에서 제공하여 보는 것이 교육의 진의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민의 대다수가 각자 그 층의 편견적 입장에서 반대할 것을 나는 이야기 하고자 한다. 오직 분방한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극소수의 인텔리켄치야 층에서만 이 주장을 찬성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요새는 아무런 사상위에나 민주주의라는 백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두루마기를 입혀야 출세를 하는 세상인 모양인데 아무리 미려한 민주주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설지라도 그것이 파쇼나 전제주의보다 물론 우월할 것이지만 마치도 그 두루마기만이 인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은 역시 약장수식 정치밖에 더 될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를 원한다 하지마는 우리가 후손이 또한 과연 우리가 鍍金해논 민주주의를 즐겨할런지 안할런지 어떻게 예언할 수 있으리오! 戰후에 세계 각국에서 활발히 논의될 줄로 기대하였든 테크노크라시소리가 窒息이 된 것은 데모크라시 수선통에 세계의 인텔리겐치야층이 잠시 정신 마비가 된 것이 아닐까? 하옇든 나는 이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수 있는 데모크라시라는 것보다도 테크노크라시 의 진전이 더 한층 인류를 행복스럽게 할 줄로 믿는다. 그러니 너는 테크노크라시형의 교육을 주장하느냐?하고 물으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아마도 나는 久遠의 회의주의자인지도 도른다. 어떤 형이 우리 후손에게 가장 우수한 사회 생활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미지이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오토크라시"는 열등이고 "데모크라시"는 중등이고 "테크노크라시"는 상등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에 우리 후손으로 하여금 소학교 시대서부터 아무런 旣성형에도 관심하지 말고 철두 철미 각자의 天才를 최고도  진전시킬 기회와 환경이 제공된다고 하면 20년 30년뒤에 그 결과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날런지 저으기 흥미있는 문제이고, 인류가 참으로 장래에 진선미를 추구한다면 한번 실행해 볼 용단도 가져야 한다고 나는 본다.
우리 성인은 아무리 진보적인 자라 하더라도 그 꿈꾸는 바의 형은 그 어느 것이나 오랜 전통과 인습에 제약된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 어떠한 쳇바퀴를 돌고 또 돌고 있었는지 막론하고 한번 우리 후손으로 하여금 자기네 자유에 기인한 형을 창조할 수 있는 환경을 공급해 줄 용기와 아량이 없을까?
교육방법론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과거의 교육 방법은 어디서나 주입식이었다. 지금도 역시 그런 교육 방법을 버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는 학생의 자유스러운 재능을 최대한으로 ○○○○할 환경을 공급하는 ○○○되고 ○○○○ 우리가 자랑으로 삼는 우물속 개구리 思○○의 ○○ 주입으로 그 목적을 삼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에 年○을 정해 가지고 1학년에서는 어떠어떠한 한계의 기성 지식. 2학년에서는 또 어떤 한계까지의 기성 지식을 주입하면 학교 교육의 임무는 끝났다고 그 지식을 암송하면 졸업장을 받고 교육받은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교본이라 독본이라 50명, 백 명을 한 학급 속에 몰아 넣고 그 독본들을 암송하면 교육은 끝난다. 그 주입된 지식을 활용하면 성공이다. 型에 잘 들어 맞으면 성공이다. 網모래 2, 3마차, 점토 2, 3마차, 목재 2, 3마차, 모사 약간, 철사 약간, 조회, 연필 안가지고 교과서 무용의 소학교가 그립다. 물론 교원 문제가 있다. 하나 소규모로라도 시작해 볼 필요는 없을까? 학교 당무자는 말고 우리 각자 부모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그 근본 동기가 너무 공리적으로 흐르는 때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내 아들 내 딸이 인간으로 태여나서 자기의 천재를(물론 그것은 평등이 아니다) 무한 향상시킬 기회를 준다는 목적보다도 우리가 直常不備하면서도 마지못해 살아온 일 종의 생활 형식을 될수있는 데까지 연장시키는데 유효하도록 교육을 하려고 하는 것이 주안이라는 느낌이 나는 것을 나는 금할 수가 없다.
아직 학령에 달한 자녀를 가지지 못한 나로서 너무나 이상에 흐르고 있는지 알수 없으나 불원한 장래에 내 자식들을 마음놓고 입학시킬 수 있는 소학교가 실현되도록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1946년 10월 23일 지방정부조직 재편에 따라 문교국 독립

1946년 10월 23일 군정청 법령 제114호(Reorganization of Provincial Governments)이 공포됨에 따라 동년 11월 2일부터 문교국이 독립하였다. 문교국 밑에 서무, 조사기획, 학무, 사회교육 등 4개 과를 두게되었다.[127]

  • 1946년 10월 24일 <한성일보> 사범대학 중등교원양성소 야간부 신설
사범대학내 중등교원양성소에서는 이번에 국어과와 영어과에 각 100명씩 야간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지원마감은 오는 11월 6일까지라 하며 자격은 5년 중등학교 졸업 정도라고한다.
  • 1946년 10월 24일 <한성일보> 新民主敎程 創案- 효제교서 각계 초청코 연구발표회

@실제날짜:461025

시내 효제국민학교에서는 오는 25일 등교에서 문교당국의 수뇌자와 및 교육 관계자 600여 명을 초청하고 신과정표 운영연구발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교에서 창간한 새교수법은 아동 본위의 민주교육을 실시하려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로서 국민 교육의 전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될 것으로 앞으로 그 운영 여하에 기대되는 바 크다.
  • 1946년 10월 25일 <독립신보> 無資格 敎員 講習- 인천시 학무과에서 실시

@실제날짜:461015

학원문제를 싸돌고 교육자 재교육 문제가 논의되는 이 때 23일 인천시 학무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시에서는 성인 미교육자의 문맹 계몽을 촉진시키고자 22일 하오 2시 시내 제2공회당에서 교육 관계자 다수 집합한 가운데 시 성인교육협회를 결성하였고, 
 2. 무자격 교원들의 정식 자격을 수여키 위하여 11월 2, 3, 4일 3일간 실시될 검정 시험을 앞두고 인천을 비롯한 부평, 강화, 시흥 김포군 하에 있는 해당자 82명을 모아 지난 15일 부터 매일 오후 3시부터 시내 창영국민학교에서 강습회를 개최 중이다.
  • 1946년 10월 25일 <동아일보> 延禧大學 開校式
연희대학교에서는 이번 대학 승격을 祝賀하고자 25일 하오 1시부터 동교 노천극장에서 개교식을 擧行하고 귀중한 도서의 전시회를 연다. 이밖에 29일과 30일은 매일 하오 2시 시내 경기여자중학 강당에서 기념 강연회를 열기로 되었다.
  • 1946년 10월 25일 <동아일보> 醫大生은 登校하라 - 文敎部 發表, 不應하면 除籍
학업을 계속하려거든 등교하라!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생 중 이달 24일 까지 결석을 하게 되면 최고 결석일수가 10퍼센트가 되는 만큼 이날까지 출석하지 않은 학생은 제적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학업을 계속할 의향이 있으면 곧 복교하라고 다시금 요망하고 있다.
  • 1946년 10월 25일 <한성일보> 연희대학 개교
연희대학에서는 이번 25일 오후 2시반 개교식을 동교 노천극장에서 거행하는  한편  동기념 행사로서 동일 오후 희귀 도서 전시회를 동교에서 개최하고 이어서 26일에는 대운동회, 29일, 30일 양일에는 매일 오후 2시부터 학술 강연회를  경기고녀 강당에서 열리라 하며 앞으로 11월에 음악회 12월에 연주회도 열 예정이라 한다.
  • 1946년 10월 27일 <한성일보> 우리 민족 교육의 길- 金恩雨
한 민족의 교육은 그 민족의 생활 철학으로 비쳐낸 것이다. 대체로 교육은 인간 생존의 한 수단 방법을 세우려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교육학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었느냐를 문제로 삼을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문제로 삼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속에는 마치 생활 방법의 길이 무한한 것 같이 교육의 타입도 무한히 많다. 따라서 이 평면위에는 가장 이상적인 교육도 있을 수 있는 동시에 그와 반대로 가장 무서운 해독을 주는 교육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참 행복한 인생이 있을 수 있는 반면에 무서운 불행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어떠한 타입의 교육이든지 그것을 그 민족이 전심 전력을 다하여 실현시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거나 이를 알면서 거부하는 것이거나 결국은 그 사회적인 힘에 따라 규정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에서 가장 크고 곤란한 문제는 무었인가? 누구의 입에서든지 수술대위에서 아품에 못견디어 나오는 신음의 소리같이 쌀 정치 경제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하는 열쇠는 어떠한 것인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적인 힘이다. 사회적인 힘은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그 사회의 내포된 개체의 힘이 발달됨으로써 비로소 세워진 것이라 하겠다. 개체의 힘을 발달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교육의 힘을 세움으로써 기르어 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교육의 힘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먼저 우리 민족의 참된 교육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한 민족의 교육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 민족의 생활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아서는 안된다.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은 무엇인가?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실현되고 있는 현실 생활 속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이나 실현되고 있다는 것(중략)
우리 민족의 현재 어떠한 생활을 하며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며 어떻게 움직이는 것을 잘 들여다 보았다 하드라도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가장 완전하고 정말 생활 철학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 1946년 10월 29일 <한성일보> 널리 의좋게 살려면 서로 말부터 배웁시다.
3 여교수 맞아 영어학원 개교. 새 조선의 중견인들을 모아 어학의 실력을 양성시키는 한편 조선의 아들 딸로서 국제 친선에 이바지 하기 위하여 군정청 외무처 문교부 중심으로 그동안 경운동에서 경영해오던 영어학교는 어학 연구열의 팽창과 아울러 이의 기구 확충이 요청되어 금번 문교부 직속으로 개편하여 시립도서관 후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시에 영어학원의 이름도 고치어 금 29일부터 첫 발자국을 내디디는 바 신입생은 대략 150여 명이며 특히 조선의 婦女들을 위하여 초등여자반도 부설되어 있는데 군정청의 추천장을 가진 사람은 우선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본교의 교수진을 강화하기 위하여 저번 미국으로부터 모니카 키-호 박사를 위시하여 메리메 R. 존스여사, 후로잰스키 여사 등 세 분 여선생이 전문으로 담임케 되었는데 키-호 박사는 ○키리대학 문학부 부장으로 특히 이번 조선여성의 계몽사업을 위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찾아간 기자에게 박사는 여성답지 않게 쾌할한 성조로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해 준다.
세계인이 되는 자랑- 키-호 박사 談
나는 물론 미국인이라는데 큰 자랑을 가지고 있지마는 세계인이 되는 것은 더 큰 자랑이다. 금번에 이 나라에 온 것은 특히 여성 교육에 종사할려고 왔습니다. 저는 미국서 안전보장이사 인권위원과 뉴욕부인회 이사로 동양의 여성들과 일할 기회를 가졌었지만 먼저 피차의 어학을 공부하는데 더욱 깊은 이해와 한편 친선을 가질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 완전한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는 피차의 이해가 제일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 사회의 제일 긴급한 것은 남녀공학의 실시라고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자유 해방과 생활 향상의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는 먼저 여성도 남성과 같은 건강한 체력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어깨를 쫙 펴고 키가 큰 여성을 육성할 만한 <스포츠>를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테니스, 승마, 스키, 다이빙 등의 <오하이오>주의 선수권을 가지고 있는데 허락만 한다면 어학을 공부하는 한편 운동을 통하여 조선의 여성들과 세계 여성의 향상을 위하여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세계 무대 위에 활발히 나서는 장한 세계인들이 되고 싶습니다.
  • 1946년 10월 30일 피텐져 문교부 고문 예산동결조치에 이의제기

피텐져 문교부 고문은 재무부로부터의 "'46-47회계년도 1, 2/4분기 예산 중 현재 계속 중인 사업예산 이외는 모두 동결하라는 조치"에 대해 이는 문교부의 사업 예산 성격상 적절한 조치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128]

  • 1946년 10월 30일 <독립신보> 새 中等學校가 81교 增設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해방 후 남조선에서는 82교에 달하는 중학교가 신설되었다 한다. 그런데 각 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20, 충청 13, 충남 8, 전북 4, 전남 7, 제주 1, 경북 17, 경남 6, 강원 6.
  • 1946년 10월 30일 <동아일보> 敎育朝鮮의 大氣魄 - 解放後 南朝鮮에 82 中等校 新設
교육 시설의 확충과 교육내용의 쇄신이 전적으로 새 조선 당면 문제로 요청됨에 따라 해방 후 남조선 각지에 82개의 중등학교가 신설되었다. 이 교육 기관의 배치는 각 지방의 교통, 인구 등 여러 가지 방면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설치된 것인데 아직도 허가 신청 중에 있는 학교도 많이 있다 한다.
 ▲ 경기도 20교, ▲ 전북도 4, ▲ 충북도 13교, ▲ 전남도 7, ▲ 충남도 8교, ▲ 강원도 6교, ▲ 제주도 1교, ▲ 경북도 17교, ▲ 경남도 6교, 합 82교
  • 1946년 10월 30일 <한성일보> 늘수록 좁은 구학의 문
해방 후 남조선에 신설중학 82교.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남조선 일대에는 초등 중등 대학을 막론하고 교육 기관의 확충과 아울러 신설 증설이 점차로 늘어가고 있는데 10월 1일 현재로 신설된 중학교의 총수는 82개교에 달하며 이것들도 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20 ▲충북13 ▲충남8 ▲전북4 ▲전남7 ▲제주1 ▲경북17 ▲경남6 ▲강원6
이상과 같은 현상은 약진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제 있어서 날로 끓어 오르는 향학열은 경향을 막론하고 학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향학의 관문은 의연히 좁은 형상에 처해 있어 보다 더 급속한 확충이 요망되고 있다.


1946년 11월

  • 1946년 11월 3일 <독립신보> 醫學部는 빈집- 조교수 파면과 학생 제적으로
국립대학안 반대를 이유로 서울대학 의학부부속의원 조교수, 강사, 의국원 등 160명이지난 9월 7일부로 파면 처분을 당한 것과 24일부터 200여 명 간호부의 파업 개시, 입원 환자들의 사개 요구 조건 제출 등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그 후 파면 처분을 당한 조교수, 강사, 의국원들은 병석에 누워 있는 백여 명에 달하는 입원 환자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음으로 당국의 재 고려를 희망하면서 윤번제로 치료를 계속하여 오는 터인데 이에 대하여 당국에서는 아무런 방편을 강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쌀 4홉 배급, 8시간 노동제, 일급제를 월급제로 요구하는 간호부 파업단을 면허장을 뺏는다고 까지 위협하면서 사감과 안과 간호부장 2인을 파면시킨 이외에 아무런 만족한 조건을 주지 안하였다고 하며, 한편 의학부 학생들은 공부를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조교수, 강사의 복직을 요구하며 학원의 자치와 이사회의 민주주의적 개조를 주장하였으므로 2백30명 전원이 제적을 당하여 의학부 학생측에서는 그 동안 여러 차례의 교섭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음으로 항간의 여론은 자못 비등하고 있다.
  • 1946년 11월 3일 <독립신보> 學園 自由 絶叫- 수천 學生이 示威

@실제날짜:461102

전남 각지에 소요가 파급되어 물정이 소연하던 차 2일 오후 3시경 학생 천여 명은 서울 남대문 앞에서 '학원의 자유를 내라'는 쁘랑카드를 선두에 높이 들고 시위를 개시, 학생들은 朝鮮銀行 앞을 향하여 행진하면서 '학원의 민주화'를 절규하는 동시에 '식민지화 교육반대', '국대안을 즉시 철폐하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조국의 식민지화 방위는 조선 민족의 거족적인 반제 투쟁을 전개해야만 가능하다'는 전국 동포에 고하는 격문을 뿌리었다. 학생 시위로 경관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 시위 行列은 동 20분경에 해산하였는데 학생 수명은 체포되었다 한다.
  • 1946년 11월 3일 <한성일보> 우리 민족 교육의 길 (하) - 金恩雨
나는 여기서 단언할련다. 우리 민족의 이상과 희망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민족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지 못할 사람에게는 우리 민족은 영원히 수수께끼의 존재일 것이다. 우리민족의 생명은 지극히 얕은 것 같으나 무한히 깊고 너무도 좁은 것 같으나 끝없이 넓은 것이다.남의 것이 아무리 좋고 완전한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대로 들어 맞지를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이상과 희망은 무엇인가? 말할것도 없이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전 세계에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이즈러진 민주주의가 아니다. 가장 자기민족만이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그들의 눈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것을 보고는 그것이 바로 자기네들이 일구어 놓으려고 애를 써도 안되던 것이라고 할것이다. 즉 우리 민족이 가져야할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경제적인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되어진 민주주의이다. 어떠한 계약밑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극히 적은 것일지라도 그 민족에서 일어난 惡에 대해서는 절대의 연대 책임을 지지 않는 멤버는 하나도 없고 선에 대해서는 그 공이 제 것이라고 하는 멤버는 하나도 없게 된다.  나는 믿는다. 우리 민족의 이 이상과 희망이 실현되는 날 즉 교육이 완성되는 날은 어떠한 카타스트로피의 전환이 우리 민족에 오더라도 인류 역사상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혁명을 하더라도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즐겁게 기쁜 얼굴로 참된 명예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 또 자기를 끝까지 무슨일이 있든지 어떠한 위험을 당하든지 고집하는 용기가 아니라 가장 아끼는 자기를 부정하는 용기를 가질수 있으라고 - 그러나 교육 이것은 일조 일석에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교육이 완성되는 날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절대 책임을 지고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적어도○○○○○○○○○○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 어느 곳이나 어떤 때나 우리가 사는 곳에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선생의 것도 아니요 학생의 것도 아니다. 그 민족의 이상과 희망을 가져 올 학문이 그 학교의 주인일 것이다. 따라서 이 학문이란 주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제도도 규칙도 방법도 교육자도 피교육자도 굽히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필자는 이대 교육과장)
  • 1946년 11월 3일 <한성일보> 음악교육의 전망(상) - 李宥善
우리 조선에 구미 음악이 소개된 것은 모름지기 60여년전 미국선교사들의 손을 거쳐 들어온 때일가 한다. 그들이 한편 신교육의 길을 열어 주는 동시 간이한 노래를 가르쳤다는 그 당시를 회고할 때 음악적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향상 발전된 오늘에 그 업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적다 할 수 없는 것이다. 36여년 전 일본이 우리를 사로잡은 이후 우리 민족에게 시행한 모든 교육이 전부 그러했겠지만 그중에서 특히 정서 교육인 음악 교육에는 더 말할 것없는 태만과 냉대였다는 ○○○○○○○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길들여진 우리로서 해방 후 우리의 손으로 원만한 음악 교육을 베풀고자 하되 뜻한 대로 수행치 못함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잠재하겠지만 제일주인이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부끄러운 미준비라는 사실은 그 죄과와 책임은 멀리 도망한 그들에게 있겠지만 과거 조선의 일반 사회와 교육자간에 음악 교육에 대한 몰이해로서 ○○○○○○○○○○○ 을 우리 겨레에로 물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장래 조선 음악 교육의 전망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음악 교육의 목적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통괄적으로 논하여 교육의 종국적 목적은 그 시대시대에 일어나고 자라는 문화를 흡수시키고 그 사회 그 시대에 적당한 문화인을 조성함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교육 방면에는 우리의 육체를 기르는 체육이 있을 것이요 정신에 대한 智, 情, 意의 연합화 교육이 있을 것이다. ○○○○○○○○○○상인 지 정 의 삼자 중 정에 대하여는 美 교육 즉 정서 교육이 응당 필요할 것은 물론이다. 과학 예술 도덕 종교 체육 등의 문화 요소를 내포한 財를 도야시킴에는 其中 如何한 분문이던지 경시한다는 것은 마치 예를 들면 아동에게 편식을 시행함과 다름없어 결과에 있어서는 不健兒를 만듦과 같이 완전 원만한 인격을 형성하기 곤란하다 할수밖에 없다. 조선에 있어서 이상의 제부문 중 체육과 미술 중에도 특히 음악만은 유달리 냉대받았고 일반 교육자로부터도 경멸시당해 왔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 천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 아니치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필자는 이대 음악과장)
  • 1946년 11월 5일 <동아일보> 260만 원 목표로 初等校 新築 期成會 組織
지방통신 : 충주 교육 기관의 확충 강화를 위하여 충주읍에서는 지난 29일 읍회의실에서 관민 연쇄회의를 개최하고 신중 의론한 결과 260만 원을 목표로 초등교 新築 增築 기성회를 조직하고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 1946년 11월 5일 <동아일보> 固城中學校 入學式 盛大
지방통신 : 固城 고 李어榮 씨의 20만 원 기금을 기본으로 15만 군민의 ○○○ 발표로 창설을 본 고성중학교에서는 남녀중학제, 초급중학 1년생 백 명을 모집하고 성대한 입학식과 아울러 개교식을 擧行하였다.
  • 1946년 11월 6일 <동아일보> 高等敎育委員會 召集
고등교육위원회에서는 오는 14일 하오 1시부터 문교부 회의실에서 1. 고등교육 기관○持하 설치 制○표준에 관한 건, 2. 고등교육 기관名 制定에 관한 건, 3. 교수자격표준에 관한 건, 4. 고등교육 기관 제적학생의 制服制○에 관한 건, 5. ○사료 통일제정에 관한 건, 6. 특종 교육 기관과 정규대학과의 ○格관계에 관한 건 등 의제를 세우고 위원회를 소집하기로 되었다.
  • 1946년 11월 8일 <한성일보> 道內 一郡 一中學 實現 在邇- 具지사 談
중학신설. 군단위로 유지들이 초급중학을 신설하고자 대단히 노력 중인데 나로서는 이에 적극적 협력 중이다. 우선 우리는 배워야 겠다. 현재까지 성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설된 학교가 7교이며 수개월 내로 개교될 학교 수가 5개소이다. 이것으로 도내 각 군에는 초급중학이 하나씩 생겨서 장래 조선을 지고 나갈 유수한 청년들이 양성되어 나갈 길이다. 
  • 1946년 11월 9일 <독립신보> 法科大學 休學- 전교생이 7개 조건을 제시코

@실제날짜:461108

배우자니 교수가 없어 학구에 불타는 법과대학 전교생들은 지난 7일 동교에서 학생회를 개최하여 학원의 자유를 절규하는 7 조건을 학장을 통하여 문교 당국에 요구하는 동시에 700학생들은 8일부터 휴학으로 들어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1946년 11월 10일 <동아일보> 明星女學校 財團을 確保
과거 17년간 형극의 길을 걸어 오면서도 수천 명의 재원을 길러낸 명성여학교는 許河白교장의 절대한 노력과 유지 金奉斗 씨외 수씨의 원조 협력으로 1천만 원의 재단법인을 완성시키는 중에 있으므로 8일 문교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 1946년 11월 10일 <동아일보> 梨大 昇格記念 - 15일부터 多彩한 行事
지난 8월 15일 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여자대학에서는 오는 15일 하오 2시 동교에서 승격기념식을 擧行하고 교내 미술전람회를 비롯하여 빠-사대회, 음악회, 연극발표회, 교육심리학술연구발표회, 醫藥學科合同學術講演會, 학예발표회 등 다채로운 行事를 行하고 12월 6, 7 양 일은 체육대회를 擧行하리라 한다. 그리고 동 대학 재단확충위원회에서는 건물과 시설 확장 유지기금으로 5천만 원을 모집할 계획으로 착착 사업을 실시할 것이라고 한다.
  • 1946년 11월 10일 <동아일보> 現敎育制度에 順從하라

@실제날짜:461109

兪文敎部長 一部 敎諭, 學生에 要請
9일 문교부 유부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국립서울대학 설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현존 교육제도에 순종하라고 각별한 요청을 하였다.
우리 조선 학생도 이제는 전세계를 향하여 공인된 제도에 의한 수업을 하여야 한다. 국가의 교육을 자기네들이 지배하려는 몇 몇 단체의 어떠한 기도라도 민주주의 원칙에는 어긋나는 것으로 학교 운영을 독점하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럼 학교를 국민 전부가 운영할 수는 없는 만큼 대표자를 선출하여 운영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 조선 정부가 조선인의 의사에 의하여 수립될 때에는 조선인이 교육제도를 감독할 대표자를 선출할 것이나 그때까지는 문교부와 이사회가 전세계적으로 공인될 조선의 질서있는 교육제도를 세우도록 할 것으로 조선의 학생과 교수들은 현재의 교육제도에 순종하여 세계적 고등교육 기관에 요구되는 필요한 자격에 도달하도록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 1946년 11월 10일 <한성일보> 선생님이 부쩍 는다- 8개 사범학교를 신설
문교부에서는 머지않아 실시될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교원의 부족을 해결하고자 이번에(중략) 이로써 남조선에는 사범대학이 ○교 사범학교가 15교로 되었다
  • 1946년 11월 12일 <동아일보> 中學 創設에 三百萬圓 - 特志家 徐丙선 씨가 快擲
지방통신 : 안양 안양 타이루공장 관리인 서병선 씨는 안양중학교 창설기금으로 사재 3백만 원(부동산)을 내기로 되었는데 안양유지들은 3일 오후 두시에 곧 안양중학교 창립기성회를 결성하고 박영래 씨를 회장에 추대하여 설립준비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 1946년 11월 14일 <동아일보> 學園으로 돌아간 爲堂- 鄭仁普氏 國學大學學長에 就任
우리 학계의 권위인 위당 정인보 씨는 이번 승격된 국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동 대학은 새로운 교수진을 정비하여 새 학원으로써 명실상부하게 되었다. 씨는 경성태생으로 금년에 52세인데 중국에 일찍이 유학한 후 10여년간 연희전문교수로 재직, 해방 후는 민주의원 의원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5천년간 조선의 얼을 발힌 朝鮮史硏究외에 古文學과 사학에 대한 것이 다수 있다.
  • 1946년 11월 15일 <동아일보> 通學列車 空前의 大慘禍- 永登浦驛頭에서 列車 衝突

@실제날짜:461113

鮮血과 火焰의 驛! 學生死傷 114名
첫 겨울의 찬 바람으로 음산한 석양 13일 오후 5시 50분경 서울역발 천안 行 학생 일반의 통학 통근 열차가 영등포역 구내로 질주 돌입할 즈음 때마침 동역 구내에서 入煥하고 있던 3170열차와 정면충돌이 되어 사망자 42명과 부상자 72명을 낸 일찍이 없든 일대 참사가 발생하였다.
  • 1946년 11월 16일 <독립신보> 商科大學生 盟休-朴校長 排斥外 4개 條件을 걸고

@실제날짜:461115

국립상과대학에서는 지난 10월 10일 박용하 씨가 학장으로 취임하여 무장 경관 백여 명 동원하에 개강식을 거행하였던 바 그 후 학생들은 교장과 교수의 편당적인 언동과 그 질적 저열을 통절히 느끼는 동시에 부단한 경찰의 간섭을 통분하여 금일 15일 드디어 다음 5항목의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민주 학원 건설을 부르짖으며 전원이 맹휴에 돌입하여 그 귀추가 주목된다. 
 1. 전 경제전문 교수 전원 복직 시켜랴. 
 1. 박용하학장은 사임하고 李寅基 교장을 복직시키라. 
 1. 경찰의 간섭을 즉시 정지하라. 
 1. 교내 집회 허가제를 철폐하라. 
 1. 미인 교장 안스테드 씨는 사임하고 조선인을 임명하라.
  • 1946년 11월 16일 <한성일보> 교육심리연구 이대서 발표회

@실제날짜:461121

이화여대 교육과에서는 오는 21일 오후 1시 교육심리 연구발표회를 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다는데 고순덕 교수의 도시와 農村 上級  兒童의 ○○ 활동에 관한 조사연구를 비롯해서 아동 심리학 실험 등 수종이 있다 한다.
  • 1946년 11월 17일 <한성일보> 음악교육의 전망- 李 宥善
(고대) 희랍 아테네에서는 교육에 있어서 음악과 체육을 주요 과목으로 취급 장려했다 하며 철인 플라톤은 美를 통함없이 선에 도달할 수 없다 음악은 이상적 국가에 있어서의 두 개의 가장 큰 교육 수단의 하나이다. 음악의 목적은 일단 쾌락만이 아니요 선과 미의 똑바른 모방이니라함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볼수 있는 명구이다.
다-윈은 음악에 대한 취미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일생의 유감으로 생각했고 일대 결손이라하여 음악이 감정 교육으로 최고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같은 예구는 일일이 나열할수 없거니와 이러하듯 선현들이 일찌기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 교육에 있어서 왜 음악을 중요한 과목으로 취급하려는고 하면 풍부한 감정적 내용을 ○○○○○로서 제3자에게 전달 할 수 있는보이지 않는 위대한 힘을 음악이 소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음악)교육의 목적은 어떠한가? 이 목적론은 주관적 입장에서 그 논함이 구구할 것이요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과히 오류된 견해는 아닐것이다. 미술적 체험이 주안이 되고 환상적 세계에서 미를 탐구하고 ○○하는 것이며 그 미로 인하여 우리의 감성을 풍부케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도야로 음악을 통하여 미를 인식하며 감상력과 창작력을 배양하는 동시 자연과 인생의 제반 방면에 대하여 미적 판단을 내릴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  능력이 도덕관에까지 영향을 미쳐 선한 사념과 정당한 행위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릴수 있는 고상하고 심오한 춤성과 인격을 형성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음악을 이해치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음악 교육이  단지 음악가를 양성하는 것을 유일의 목적인 것 같이 오해함으로 과거 조선 사회 현상에 비추어 적당치 못한 인물이라는 속단적 판결을 지은 관계로 음악가(후략)
  • 1946년 11월 20일 <독립신보> 학원에 박두한 위기-미국 교육자에 호소

@실제날짜:461118

교육자대위 5씨 내외 기자와 회담. 국대안이 표면화한 지도 이미 4개월. 그동안에 반대하여 오던 대다수의 교직원들은 학원을 떠나고 접종하야 맹휴 사건이 일어나며 '휴강을 없이하라' '구교수를 복직시켜라'는 배움에 굶주린 학원의 소리가 절규되는 때에 지난 18일 오후 국대안 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대표 김계숙, 김재을, 이재완, 손응록, 김한주 5씨는 UP 조선통신 합동통신 등 내외 신문 통신사 기자 5씨와 회견하고 국대안 반대의 경위와 대학 교육의 위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타개책을 위한 공정한 내외 여론의 환기를 요청하였으며 그리고 특히 UP의 '륙쓰' 씨를 통하여 미국 교육자들에게 보내는 요지 다음과 같은 메세지의 전달을 의뢰하고 2시간 반의 회담을 끝마쳤다 한다. 
우리들은 남조선 교육자의 이름으로 해방의 은인 귀 국민과 귀국문화에 존경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8.15 이후 이땅에 진정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유가 올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여 왔었는데 해방 후 일년이 경과되었음에도 일제 주구는 의연히 민주 건설을 방해하고 인민은 온갖 부자유에 신음하며 문화면에 있어서도 더구나 교육기관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과거 일제 시대에 조선의 교육이란 참으로 비참하기 작이 없었는데 지난 7월 13일 문교당국은 대학 교육 통제를 위한 국립서울대학안을 발표하여 관립 9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신설하고 6인으로 구성된 관료적인 이사회와 미국인 총장이 지휘하게 되어 각 대학의 독자적 발전을 저해하고 조선 교육계에 중대한 지장을 가져옴으로 다수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물론 사회 단체서도 반대 여론이 치열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지난 7월 21일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관계 당국에 누차 동안 철회를 희망였으며 귀국 대통령에까지 호소한 바 있었는데도 문교 당국은 동 안을 강행 일로로 고집하고 반대 의사를 표시한 교수 220명을 파면 逐出하였으며 일방 학생들에게 강압적으로 등록을 요구하였고 그 후 학생의 맹휴 사건이 속출하여 거진 휴업 상태로 휴강이 계속되고 현재 1만 명의 학생 중 2000명이 등교하는 정도에 지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실로 교육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며 급속한 해결이 요청됩니다. 당국자는 이에 모름직이 재고 삼성함이 없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이에 여러분의 고견과 협력을 요망합니다.
  • 1946년 11월 23일 <동아일보> 學生은 工夫에만 熱中하라- 兪文敎部長이 거듭 付託

@실제날짜:461121

"조선의 대학생은 스스로 재정을 정리하여 많은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 교육 시설을 증강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들어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21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요지) 발표하여 대학교육 제도에 대한 학무 당국의 방침과 소신을 피력하였다.
"한 나라의 학생으로서는 자기들의 교육 기관을 경영할 수도 없고 또 그들에게 기대할 수도 없다. 여기에 대한 책임은 이론적으로써 세금을 치르는 한 나라의 시민에게 있는 것이다. 학생은 오로지 국민 다수의 요망에 의한 교육제도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
  • 1946년 11월 24일 <동아일보> 缺勤 敎員많은 텅빈 小學敎室: 先生님은 쌀사러 시골로

@실제날짜:461124

요즈음 시내 각 국민학교는 교원들의 결근으로 인하여 학동들이 학교에 등교하여도 선생님이 없어서 놀다 오는 경향이 많아 학부형들의 비난이 자자한데 최근 시내 각 국민학교 교원들의 결근율은 평균 하루 3-4명으로부터 심한데에는 10여 명까지에 이르러 제2세 국민교육에 일대 지장을 일으키고 있다.
全學童들은 놀다가 歸家!
해방 이후 일시 학원에도 교원 부족으로 인하여 교육에 적지 않은 지장을 일으키고 그 후도 교원들의 생활 보장이 못된다 하여 사퇴하는 직원이 격증하여 학무 당국에서도 이에 대하여 최선의 책을 강구 중이었는데 이 겨울에는 각 학교에서 교원들의 생활 안정책과 교원 확보책으로 학교 학부형회, 혹은 후원회에서 별도로 보조금을 지불하는 등 교원 대우에 관하여 만전책을 다하고 있으나 시내 각 학교 교원들의 결근이 격심하다. 이렇케 결근이 심한 주요 원인은 현재 받는 봉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유지되지 않으므로 다소간 값이 누군 쌀을 구하려고 결근을 한다고 한다.
對策을 講究中, 敎員 生活 安定에 努力 : 李學務局長 談
교원들의 결근에 대하여 서울시 李덕봉 학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선생이 하루 결근하면 7, 80명의 학생이 하루 노는 것이 되는데 요즈음 교원들이 생활란으로 쌀을 사러 간다든가 혹은 교직을 버리고 전직을 하려는 관계로 결근이 많아 방금 이 문제에 대하여서 대책을 세우는 동시에 교과에 지장이 없도록 할 작정이다. 그리고 교원 생활 확보에 대하여서는 학교소비조합을 더 활용하여 안정책을 세울 계획이며 결근 심한 교원을 정리하여 아동 교육에 지장없도록 하겠다.
問題는 쌀이요 : 南大門國民校 敎頭談
우리 학교 교원들 중에도 하숙 생활을 하는 교원이 많은데 쌀을 하숙에 가져와야 밥을 먹여주는 관계상 쌀을 가질러 가는 일이 있습니다. 가정을 가진 교원들이라도 신곡기니까 시골 친지의 집을 찾아가면 다소 쌀을 헐한 값으로 살수 있으니까 학교 결근을 부득이 하게 됩니다.
눈물 머금고 缺勤 : 國民學校某敎員 談
교원들의 대우는 전보다 다소 좋아졌으나 그 봉급으로는 생활이 앞으로 곤란합니다. 물론 생활 곤란은 교원만이 안이지만 교육자의 양심으로 학교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칠판을 바라고 있을줄은 아나 눈물을 머금고 양심을 어겨가며 쌀을 사기 위하여 결근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 1946년 11월 27일 <독립신보> 대학 교육의 위기 (상)
丁 愚 
(1) 교육은 사회가 소유하는 문화적 제성과를 전달하여 개성의 발전을 조장하면서 사회가 요청하는 또는 이상으로 하는 방향으로 사회 성원을 훈육하는 의식적 활동이다. 즉 기존 문화 가치의 전달 보급을 통하여 그 가치를 활용하고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사회인을 만드는 사회 발전의 조직적 준비 공작이며 진보의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민족의 장래를 우려하는 인사는 누구나 다 가장 큰 비중으로 교육을 소중히 여기는 바는 이같은 교육의 기능과 그 미치는 영향이 장구하고 지대함을 이해함으로서이다. 일제의 가지 가지 폭압 중에도 특히 교육면에 있어서 그 교묘한 사기와 혹심한 탄압이 회상되는 바이니 학원의 관료 통제, 연구 교수의 자유에 대한 완전 봉쇄, 학생들의 활기있는 과학적 思想力과 실천력의 신장에 대한 극단의 탄압으로 인한 무기력화 내지 예속 근성의 미풍화 등 민족 장래를 거세하는 교육 정책은 우민 정책 내지 동화 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싹을 짓밟었던 것이다. 인구의 8할 이상인 문맹이 그 유물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의 지식인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독소는 정계를 교란하는 무리로서 또는 문화 교육 분야에 날뛰는 파괴자로써 더욱더 歷然한 바이니 이 역시 일제 遺毒의 필연적이며 과도적인 현상인 것이다. 
(2) 해방 후 비교적 건전히 발전해오던 학원 특히 전문대학은 일반의 상당한 기대를 받아 오던 차 7월 13일 돌연히 문교부에서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안은 전 교수, 학생은 물론 일반 사회 각층의 맹렬한 반대로 평지풍파적인 혼돈이 계속되어 문교부의 일방적 전단에 대한 전면적 항거가 계기하였음은 기억에 새롭다. 그러한 가운데 8월 22일 부로 드디어 법령화하자 경전의 전원 24교수를 위시하여 광전 교수 19인(전원), 경대 이공학부 이승기 박사 등 38교수(절대다수), 법경학부의 전교수 20인, 의학부의 조교수, 강사, 의국원 160명 전원이 동 안의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문교부장에게 국대안 철회 요구와 국대에 대한 불협력 선언을 제출하여 사회의 이목을 끌었든 바인데 이들은 9월 7일부로 총파면이 되었다 한다. 그 후 사대의 17교수, 여사대의 8교수, 법전의 1, 2명을 제외한 전원이 같은 보조로서 사직하였으며 大豫의 4, 5인, 수원고농의 5교수, 또한 학교를 떠나게 되어 총수 360명 중 실로 근 300명의 대다수가 국대에 참가치 않고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비민주적인 동 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니 과학성과 양심에 사는 학자들이 민족 문화의 옹호자로서의 이같은 총궐기는 학계는 물론 전사회에 던진 커다란 투석이었다. 조선적 지능의 집결이오 조선 장래의 ○○자인 대학 교수의 거의 대부분으로 하여금 이같은 선풍적 파동을 조성케 하였다 함은 건국 초 조선의 일대 불상사라 아니할 수 없다. (계속)
  • 1946년 11월 29일 <독립신보> 대학교육의 위기 (하)
丁 愚 
9월에 들어 개학기가 되자 모여든 전 학생은 국대는 학원을 관료 통제하려는 악제도라 하여 이 안의 철거를 주장하고 국대 등록을 거부하여 새로운 충격을 일으키더니 등록기일의 3차 4차의 연기, 학부형의 대리 등록, 기마 경관대 출동의 삼엄한 속에 約 8할의 학생 등록이 발표되었었고 추가모집에 의한 학생 보충이 실시되었었다. 그 후 당국은 신교수진 편성이라 하여 활동하였으나 양심적 교수들의 불합작으로 결국은 비양심분자, 파렴치한, 내지 친일 모리배 등 까지를 신성해야 할 학원에 등용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도 소요 인원의 반도 못 채우게 되었다. 따라서 등록한 학생들이 통학은 하나 유명무실하게 시간을 소비하며 하급생의 불충분한 기초 과목의 합동강의로 1일 1, 2시간 정도의 半休상태에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학생들은 당국의 무책임을 규탄하며 동맹 휴학이 접종하니 문교 당국의 누누한 호도적인 성명 발표와는 반대로 현 사태는 너무나 엄청난 조선의 손실이며 명랑 건실해야 할 학계에 엄폐하는 암영은 애국 인사의 통절한 분노를 자아내는 바이다. 
(3) 국대의 기구는 관료 6인(미조 양국 문교부장, 차장, 고등교육국장)의 이사회하에 미인 총장이 있고 그 밑에 사무국장, 교수처장(미인), 남여 학생감이 직속하여 그 통제하에 대학원 및 9 각과 대학이 분립해 있다. 따라서 교수 인사를 위시한 제반 권한은 이사와 총장에 전속되고, 입퇴학 교무는 교무처에서, 사무에 관한 제항은 사무국에 장악케 됨으로 각 학장은 此等 명령 지시에 복종하는 로봇트로 화하여 교수회는 완전 거세되고 교수는 一使用人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것이 어찌 민주 학원이 될 수 있으며 학원의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기할 수 있으랴. 열성적이고 양심적인 학자의 창의적 독자성과 전문가에 의한 전문 분야의 발전책이 몰각당하고 관료에 예속하여  그 更迭마다 동요 불안케 될 것은 明若觀火한 바이다. 그 일 예는 지난 번 등록 후의 교무처의 횡포이니 학장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명사의 소개장 한장으로 자격 심사도 없이 수 학생을 입학시키는 등 그 모순 포착은 收擧키 어렵지 않다. 최근 지방 학도의 거의 대부분의 귀향과 각 대학 전체 교수 중진급들의 속속 퇴진하는 현실은 그 내포한 모순의 노출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4) 이상 각 대학의 실정이 문교부에서 국대 설립 이유로 내걸은 교육의 세계적 수준에의 향상을 圖하는 유일의 방법일 것인가는 별 문제로 하고 이 사태에 대한 학부형을 위시한 전민족의 염려는 적지 않으며 적어서는 안될 바이다. 교육은 민족 발전의 근원이 되는 바이며 그 不振은 그것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조국 건설에 큰 지장을 가져 올 것임에 이에 당로하는 자 그 실무가 어찌 적을 것이랴. 만약에 전세계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오늘 一人 내지 수인의 고집으로 그 전폐를 그르치는 결과가 된다면 그 과오 이에서 지나침이 없을 것임에 군정청 문교 당국자는 마땅히 성의를 가지고 선처의 용단이 있어야 할 것을 尾末에 부언하는 바이다. 
  • 1946년 11월 29일 <동아일보> 鐘路國民校 全燒

@실제날짜:461127

엄도의 화재 계절을 앞두고 시 소방부에서는 시민에게 방화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있는데 27일 하오 5시 40분경 시내 수송동 종로국민학교는 화재로 인하여 23동 9호 건평 384평을 전소시킨 화재소동을 일으키었다.
발화는 27일 하오 5시 40분경 시내 종로국민학교 2층에서 발화하여 동교 일본식 목조 2층 18동 3호 1만 227평을 전소하고 28일 상오 1시경 진화를 보았다. 손해액은 종로국민학교 435만 8천여원(비품은 제외)과 민간손해 435만 원 도합 8백 70만 8천백여원으로 원인은 방화인 듯하다 하며 방금 조사 중이다.
  • 1946년 11월 30일 <독립신보> 京城農業學校의 醜態- 선생이 교장 걸어 고소

@실제날짜:461129

동맹 휴교를 개시한 이래 하등의 진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경성농업학교에서는 그동안 맹휴 선동 혐의로 이병상교유가 이휘재교장으로부터 파면당한 사실이 있었는데 경찰에서 취조한 결과 사실 무근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이 교유는 교장에게 복직을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교장은 이요구를 일축하였는데 이교유는 교장에게 무고히 파면을 당하였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교장을 상대로 문서 위조, 명예 훼손 등의 죄명으로 고소를 제기한 바 있었다. 검사국에서는 鄭義禾검사가 이 사건을 담당하여 교장과 이교원을 수차 추궁하여 취조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정검사는 29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까지 취조한 결과로는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모르겠다. 앞으로 생도의 과교원을 증인으로 심문해 보아야 비로소 흑백이 가려질 것 같다.
  • 1946년 11월 30일 <동아일보> 最初의 無線中學 - 昇格코자 期成會 組織
지난 8월 조선서 처음인 정규 학교로 인가된 시내 봉내동 조선무선초급중학교를 이번 고급중학으로 승격시키고자 동교장 曺光云 씨가 이번 사재 백만 원을 내어 놓았다. 이것을 기금으로 동교 후원회와 동창회에서는 5백만 원 재단을 완성하여 건국도상에 필요한 무전기술자양성에 만전을 다 하고자 동 재단법인기성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동 후원회장 이정섭 씨는 다음같이 말한다.
건국도정에 있어서 필요한 무전 기술자를 배양할 기관이 하루 빨리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일반 사회의 절대적인 협조가 있어야 하겠다.


1946년 12월

  • 1946년 12월 1일 <독립신보> 師範大學에 曙光- 22명의 불합작 교수 복교

@실제날짜:461130

지난 7월 소위 국대안이 발표된 이래 각 전문대학에서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이는 민주주의 조선교육계의 향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이제껏 원만 해결이 되지 않아 조선 교육계의 전도가 심히 우려되던 바 금번 서울사범대학에는 국대안 불합작을 표명하고 협력을 거부하여 온 22명의 교수들과 학장 사이에 좌의 공약이 성립과 동시에 22명의 교수들은 복교하게 되었다고 교수 일동은 30일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우리는 국대안의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문교 당국에 대하여 그 실시의 보류와 재검토를 요청하고 불협력을 표명하여 오던 바 11월 25일 학장과의 사이에 좌기의 公約이 성립되어 이에 복교함을 성명함. 
一. 교수회의 자치
      1. 교수의 임면은 사대교수회(교수의 선거에 의한 평의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학장이 이를 추천함.
      2. 사대학생의 처분 문제 및 교무 일체는 사대 교수회에서 결의함.
二. 국대안 실시 이후에 본 안에 관련하여 사대를 떠난 학생 및 교직원은 전원 무조건 복교 복직함. 단 이상의 公約이 실시되지 못할 경우에는 금후 행동의 자유를 보류함.
      서울사범대학불합작교수일동
  • 1946년 12월 1일 <동아일보> 問題많던 男子師大- 意見一致로 圓滿 解決!
종합국립대학 설치를 계기로 불합리를 표명하든 남자법과 여자사법교수 22명은 지난 25일 張학장과 사이에 다음과 같은 公約이 성립되어 그 동안의 소소한 모든 문제의 원만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2일부터 개강하게 되어 학생들의 ○○를 바라고 있다. 公約은 다음과 같다.
敎授會의 自治 
 (1) 敎授의 ○○은 師大 敎授會의 決議에 의하여 학장이 이를 ○○함. 
 (2) 師大學生의 身分問題 及 ○○ 一切은 師大敎授會에서 決議함. 國大案實施以前에 本案에 反對하여 학교를 떠한 학생 及 교직원은 전원 ○○○○○○○함.
 이상의 公約이 실시되지 못할 경우에는 ○○○○의 자유를 ○○함.
  • 1946년 12월 3일 문교부 남한 교육에 관한 보고서 제출

문교부는 남한 교육 전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군정장관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의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교육개혁의 목적
   2. 일제하의 교육
   3. 초등교육
   4. 중등교육
   5. 교사양성
   6. 고등교육
   7. 교과서
   8. 성인교육
   9. 긴급 요구사항[129]
  • 1946년 12월 3일 <독립신보> 淸州商科大學 新設

@실제날짜:461202

문교부 2일 발표에 의하면 同부에서는 사립 대학 청주상과를 지난 11월 18일부로 인가하였다고 하는데 설립자는 재단법인 대성학원 이사장 金元根 씨며 개교는 명춘 3월 1일이라한다.
  • 1946년 12월 3일 <동아일보> 大學 設立에 새 基準 - 敎授, 講師 資格等도 規定
증가하는 교육열과 아울러 해방 후 교육계는 민주 교육 건설을 지향하며 일대 혼란을 면치못하고 있다. 너도 나도 대학 설립, 대학 교수로 자처하고 나오는 등 내부는 물론 외형부터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이 고등교육계 한계점이었고 이런 점에 대하여 당국의 세부적 규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문교부 고등교육위원회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거듭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정, 결의하기로 되어 근근 법령으로써 공포하게 되었다.
즉 대학 신설 기금으로는 적어도 1억만 원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기설이면 4천 8백만 원은 있어야 되고 토지로는 답 1백 3십3만평(신설) 기설은 63만평은 있어야 되게 된다. 이밖에 도서도 5만권 이상은 비치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각종 대학 교수의 명칭도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 등으로 정하고 자격등급, 고등교육 기관의 명칭까지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 국립서울대학교 교수자격
   ▲ 교수 : 박사학위 소유자나 동등이상 학계권위 전문학교 졸업 후 3년간을 연구한 사람 혹은 12년간 전문대학에서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
   ▲ 부교수 : 석사학위 소유자로써 1년간 대학원에서 연구 또는 전문학교 졸업 후 4년 이상 연구한 사람으로 10년간 전문대학에서 교육경험이 있는 사람.
   ▲ 조교수 : 석사학위 소유자, 전문학교 졸업 후 2년간 연구한 자로 4년간 전문대학에서 교육경험이 있는 사람.
   ▲ 전임강사 : 학사학위 소유자, 전문학교 졸업 후 2년간 연구한 자로 4년간 전문대학에서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
   ▲ 고등교육 기관의 명칭
      一. 대학교 : 3개 이상의 분과대학으로 구성되는 종합대학을 가르킴.
      一. 대학 : 인문 혹은 자연과학 계통을 단과로 설립하는 단과대학을 지칭함.
      一. 대학관 : 주야간수업을 불문하고 정규의 대학으로 인정할 수 없는 대학정도의 기관.
      一. 학관 : 주야간수업을 불문하고 고등학술 ○○을 지칭함.
  • 1946년 12월 4일 <독립신보> 敎員養成 8개소

@실제날짜:461203

문교부 조사기획과 3일 발표에 의하면 신교육계를 걸머질 초등·중등 교원양성 기관인 각급 교원양성소는 2개의 사범대학을 비롯하여 7, 8개소나 되는데 그 교원 총수는 987명이나 되며 생도수는 1,065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 초등·중등 교원 양성 기간은 2개월 내지 16개월의 7종류로 되어 있으며 10월말 현재 수료자는 초등 교원이 607명, 중등 교원이 744명이라 한다.
  • 1946년 12월 4일 <동아일보> 우리의 秀才들은 나오라
五億圓 豫算으로 高麗獎學會 設立
민주주의 신문화국가 건설에 있어서 유의한 수재에게 외국 문화의 습득과 기술의 연구 향상에 최대 의지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어 국가가 요청하는 인재의 육성을 목적하고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 씨를 비롯하여 유지 64씨를 발기인으로 한 고려장학회가 준비되고 있다.
동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도에 지부와 각 군에는 분회를 두고 군정청 문교, 의무 양당국자 긴밀한 연락하에 사업을 운영하기로 되었는데 동회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수납케하며 특지가의 찬조금과 장학부표 發行 수납비 등 그 예정액이 실로 5억삼천만 원이며 동회에서는 개설되는 대로 학생들을 수용할 터인데 수험과목은 원칙으로 3개월로 정하고 채련에 증치하기로 되었는데 주요 발기인은 다음과 같다.
발기인 : 유억겸, 설의식, 이인, 현상윤, 송석하, 김활란, 백낙준, 엄항섭 씨 등.
  • 1946년 12월 7일 <독립신보> 初中等用 敎科書 이천여권 인쇄

@실제날짜:461206

문교부 6일 발표에 의하면 작년말부터 지난 11월까지에 총계 18종의 교과서가 남조선 초·중등학교 생도에게 배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인쇄 중인 것 또 편찬 중에 있는 교과서는 초등용 1천9백2십만권, 중등용 1백2십만권과 교사용 도서가 46만권으로 민주주의 국민교육 달성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 1946년 12월 7일 <한성일보> 교과서 五百여만권 배부
문교부에서는 작년 말부터 지난 11월까지 총계 18종 5,355,315권의 교과서를 남조선 각 초중등학교에 편찬 배부하였다고 한다.
  • 1946년 12월 8일 <독립신보> 한심한 초등교원
해방 이후 급속한 초등 교육의 확장과 함께 교원 부족을 보충코저 각도에서는 무자격 교원을 다수 채용하여 이에 충당하였던 바 그 후 결과는 질적으로 상당히 저하를 보이게 되어 초등교육 장래에 우려됨이 막심함에 비추어 그 후 각도 학무국에서는 무자격 교원에 대한 검정시험제를 제정하고 시행 중에 있었는데 금번 경기도 발표에 의하면 취임 중에 있는 도내 무자격 교원검정시험 수험자 1,783명 중 전학과 합격자는 불과 874명이며 과목 합격자는 교육심리 101명, 공민 155명, 국어 79명, 윤리학 122명, 지리 94명, 역사 182명, 수학 66명, 이과 54명 등으로 그다지 우량한 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금번 실격자에 대하여는 금후 재시험을 시행하리라 한다.
  • 1946년 12월 8일 <한성일보> 미국 고등교육 현황- 종합·단과 대학이 천칠백
재적 학생은 백오십만. 최근 紐育國際敎育硏究所에서 발행한 유학 안내서에서 유학에 관하여 참고될 점을 몇가지 譯出하는 바 장래 미국 유학을 희망하시는 이의 참고가 되면 다행이다.
 ▲高等敎育略史▲
  미국의 고등교육은 거의 공장과 같이 새롭고 그 발전은 미국 기계 문명과 같이 극적으로 급속도였다. 英이 식민지를 발족한 직후 1636년부터 1776년까지의 140년간에는 겨우 칼리지 여섯 개가 설립되었다. 1776년부터 1861년 내란까지는 그 수가 173으로 증가되었다. 1940년까지는 칼리지와 유니버서티 수 실로1,700에 달하였다. 하버드가 1636년에 예일이 1701년에 설립되었을 때는 그 양 대학은 금일의 예비학교에도 비하기 어려웠다. 내란전에는 거의 모든 대학이 종교 기관에 설치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 학과와 학교 생활에 종교적 색채가 농후하였다.대학 교육이 자유화하게 된 것은 겨우 19세기 후반이었다. 종교 교육은 감소되었다. 제한 선택 제도가 채용되고 외국어 과학 농업 교육 기타 특수 부문 과목이 증가되었다. 미국 정부가 종합대학을 설립하기 위하여 각 주에 토지를 부여하기 시작한 1862년 이후 미국 고등교육은 종교적 영향에서 급속히 분리하고 과학적 방면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중략) 고등교육은 자연 금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아란네비스 교수에 의하면 하바드는 아직도 교육이나 조사의 명확한 제도없는 아직도 빈궁에서 헤매는 하나의 작은 칼리지였다. 과학을 제외한 과목은 금일의 하이스쿨 만큼도 발달하지 못하였다. 예일은 더 가난하였다. 과목은 정도가 떨어져 있었다. 예일대 준교수의 급료는 청년 목사만도 못하였다. 도서실기금은 받기도 전에 다 써버렸다. 칼리지는 대개 외○○을 교수하지 않았다. 과학 과목은 적고 실험은 교육에서 교수가 하였는데 학생 자신은 실험할기회를 주지 않았다. 주요한 과목은 고전 수학 윤리와 수사학이었다. 교수는 흔이 4, 5과목을 교수하였다. 1865년의 미국 고등교육은 이러하였다. 대학 과목과 학생 생활이 일반적으로 급속한 진보를 한 것은 19세기 말 이후였다. 20세기의 막이 열리자 이 진보는 가속도화하였다. 이 경향은 대학 학생 수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었다. 통계를 들면 학생수는 좌기와 같다.
  ▲1891년 74,000  ▲1901년 129,000  ▲1911년 198,000  ▲1921년 437,000  ▲1931년 989,000  ▲1940년 500,000
  대학원은 미국 교육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달된 것이다. 하바드는 설립 2백년 후인 1872년에 이 대학원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설립때부터 대학원를 가진 학교는 죤스 호프킨스 (중략) 대학원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였다. 그 숫자를 들면 엠·에학위를 수여한 학생이 1890년에 70명, 1910년에 2,440명, 1930년에 18,243명, 1938년에 22,631명이었고 수여된 박사호 수는 1876년 44명, 1890년 164명, 1910년 409명, 1929년 1,912명이었다. 금일의 미국 대학원에는 학생수가 격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도 다수하다. 미국 대학원은 건물, 현대적 설비, 교정의 미, 학술 정도 및 연구 성적, 사회에 대한 일반적 공헌에 잇어서 어느 구주 대학원에도 비견할 만하다. 종합대학의 실험실 및 교실은 20세기 미국의 공업 및 문화적 진보의 원천이 되었다. 미국 대학의 실용 (중략) 에 있어서도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앞섰다. 이것이 (중략)
 ▲고등교육제도▲
  미국 고등교육 기관의 주요 종류는 유니버서티 칼리지와 주니어 칼리지인데 전 2개는 이론적으로 구별하지만 서로 바꾸어 쓰는 일도 많다. 그 재정으로 보면 미국 고등교육기관은 주립, 시립, 사립과 종교 단체 설립으로 구별할 수 있다. 주립대학은 중부 및 서부에 많다. 市政局은 전에는 초등 및 중등 교육만 담당하였는데 최근 대학 부문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뉴욕시의 각 시립 대학은 시민이 집을 떠나지 않고 無授業科 大學敎育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호평을 얻었다. 서부에 있는 다수의 시읍은 초급 대학이 있어서 시민에게 대학 교육 전부담을 덜고 있다.(중략) 그중 저명한 대학은 하바드 예일 푸린스톤 등이다. 신교 및 천주교회 같은 종교 단체는 전 미국에 다수한 대학을 설립하였다. 미국 대학은 단위 제도를 사용하는 데 비-에-학위를 얻을려면 보통 120단위가 필요하다. 보통 학생은 1학기(6개월)에 약 15 단위를 얻는다. 다수 학교에서는 각 학생이 강의를 듣는 수에 따라서 수업료를 받는다. 엠에- 박사호 학위를 얻는 데 필요한 단위 수는 학교·과 기타에 따라서 다르다.
  비-에- 학위를 얻는데  보통 4년을 요하고 엠에- 학위는 적어도 1년을 더 해야 된다. 어떤 학교나 학부에서는 주요 학과의 일정한 단위 이외에 논문을 요구한다. 박사호에는 보통 3년 (중략) 논문을 내야 된다. (중략)
  구두는 논무에 관한 것만 취급하나 필기는 주요 부무의 모든 학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수일을 요한다. 필기 시험 준비는 다수한 서적, 특별히 사회과학 부문의 서적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고로 영어가 충분치 못하고 영문 독서가 뜬 학생은 큰 곤란일 것이다. 비-에-를 얻은 후 엠에-를 먼저 얻지 않고 박사호로 들어갈 수 있는 학교도 많다.
 ▲하계학교▲
  다수 유명한 대학의 흥미있는 특징은 보통 7, 8월의  6주일에 ○한 하계강의다. 초여름에 도착하는 외국 학생은 특히 영어실력이 충분치 못한 학생은 평판좋은 하계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다.
  • 1946년 12월 13일 <독립신보> 文理大學 盟休

@실제날짜:461209

문교부에서 국대안 발표이래 이에 부당성을 지적하고 전 학원을 위시하여 거족적으로 반대함에 불구하고 당국에서는 이를 강행하고 있어 교육계는 말할 수 없는 혼탁 상태에 빠지고 있는데 문리과대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지난 9일부터 칠백여 전학생은 보조를 같이하여 맹휴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강의 역시 일제 휴강 상태에 빠지고 있으며 이번 요구 조건이 현 문교 정책의 근본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만큼 각 단과 대학의 이에 대한 동향도 크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학교 당국과 문교 당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사태는 전면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요구조건
 1. 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등 미국인 직무를 유능한 조선인에게 이양하라.
 1. 문교부장 동 차장 및 동 고등교육국장 등 문교 당국의 책임자는 인책 사임하라. 
 1. 학원 내에 경찰 간섭을 절대 배제한다. 
이번 맹휴에 대하여 동교 학생회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대안 발표이래 각 단과 대학에서는 여러 가지 각도로 이 문제를 검토하여 왔다. 본 대학 역시 그 동안 신중한 태도로서 이를 연구하고 민족 교육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 전 학생의 총의로서 맹휴의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당국의 성의로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으나 문교 정책의 근본 정책을 개혁하지 않는 한 민족적 학생 운동으로서 단호 초지를 관철할 생각이며 따라서 청년 학생의 순진한 요구가 성공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1946년 12월 14일 <독립신보> 서울대학은 수업 계속- 헬미크 대장과 기자단 회견

@실제날짜:461213

우리나라 최고 학부인 국립서울대학은 새로 발족한 이래 수 개월이 지난 이제도 교수 보충의 부족과 기왕의 인적 물적 시설의 확대 이용, 연구비의 전무, 교직원의 교정 자격 문제, 師大의 교수 학생 자치회 요구 수락, 교직원의 급료불지불 등 문제에 관하여 군정청 출입기자단에서는 지난 주일 군정장관에게 질문을 제출한 바 있었는데 '헬미크' 군정장관 대리는 13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서울국립대학의 많은 학부가 교수의 부족으로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거짓말이다. 각 학부는 교수의 사직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그 수준이 저하되었으며 또 남조선의 모든 학교에서도 심지어 서울국립대학에 반대하지 않는 학교에서까지도 이와 같은 현상에 있다. 그 결과 각 학부는 정원 이상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산은 종전대로 편성되었으며 이 모든 학생들은 종전의 예산으로써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전쟁 중에 학교가 퇴폐되였으므로 막대한 수선비를 이 종전의  예산 자금으로부터 支辯한 까닭이다. 자금 증가가 제한되여 있으므로 필요한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원은 외국의 수준에 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나 만약 우리가 외국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은 현재 남조선에는 초등·중등·대학을 합하여도 25교 밖에는 개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차후 변경에 대한 의견을 제의하거나 현재의 교원의 자격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데 있어서만 자격있는 미국인을 이용할 것이다. 유자격 교수는 현재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구할 수 있는 데로 임명하고 있다. 학부 교수로서 규정 봉급을 받지 않는 자는 없다. 사범대학 교수자치위원회에 관한 신문 보도는 동 대학장이나 서울대학 총장이나 이사회나 또는 문교부와 하등 협의가 없이 발생된 것이다. 이 신문 보도는 사범대학 교수가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교수단에서 성명서의 책임자도 결정치 않코 또 이 성명서의 내용을 확증치도 않고 일교수의 성명서로 수락하여 발표하였기 때문에 많은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이다.
  • 1946년 12월 15일 <독립신보> 法科大學 盟休- 구교수의 전원 복직 등을 요구

@실제날짜:461213

국립대학 문제를 중심으로 법과대학 학생회에서는 지난 13일 문교 책임자들의 무성의와 무능력을 지적함과 동시에 학장의 회피적 태도를 비난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동맹 휴학을 개시하였다 한다. 
 1. 舊교수를 전원 복직시킬 것. 
 2. 문교 당국 책임자는 사직하라. 
 3. 國大행정權 일체를 일임하라.
  • 1946년 12월 17일 <독립신보> 國粹主義 敎員 만이천 명 추방
동경 10일 UP 발 연합군최고사령부 정보국 발표에 의하면 과반 동 사령부가 발표한 일본인 관공리 숙청령에 의하면 11월 말까지 국수주의적 경력을 가진 교원 1만 2천 6백3명이 교직으로부터 추방되었으며 1천 4백 8십 3명이 또 추가 파면될 것이라 한다. 한편 2백 89명은 자격재심사를 받게 될 예정이다.
  • 1946년 12월 17일 <독립신보> 우려되는 조선교육계- 초등교원에 아직도 일제 잔재
서울국립대학안은 의연 험로. 해방 후 어언 1년 반, 우리 국민 교육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교육 정책의 굴레를 벗고 나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도 진실한 우리나라의 새로운 교육 정책이 확연히 확립 추진되고 있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소위 국립대학교 문제를 중심으로 최고 학부인 각 대학의 분규가 끊일 사이 없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거니와 초·중등교육에 있어서도 무자격 교원의 다수 채용 등과 또 일본 냄새를 새 교육에서 일소하고 명쾌하고 희망있게 새 교육을 추진시켜 나가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있음은 관계자의 관심사로 되어 있다. 먼저 초등교육으로 각 국민학교의 실정을 보면 그 지긋지긋한 일본 냄새가 아직도 아동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일소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차마 보기 딱한 사정이 많다. 아해들이 길에서 노는 것을 보면 제법 잘 일본 말을 하고 그전 창씨 이름을 부르는 장면을 곧잘 우리는 목도한다. 천진한 아해들이니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입에 발린 말이 무의식 중에 나온다고 호의로 해석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방 후에 교육을 받은 지 1년여에 오늘까지 이같은 추태가 남아 있다는 기 사실은 그것이 극히 적은 일부분이요 무의식 중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하드래도 학교 당국자와 아동의 가정에서는 다시 한번 크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종전 교원 중 확실히 반성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또 무자격 교원이 많은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중등교육에서도 볼 수 있으니 더욱 경계할 바이다 다음 초·중등학교를 통하여 전 민생 문제가 도탄에 빠졌다는 오늘의 비참한 사회 현상이 학원에도 여실히 반영되어 모처럼 해방된 나라의 국민으로 희망에 불타고 명랑한 교육을 시켜 주어야 할 어린이들에게 그와 반대로 위축과 실망을 주게 되는 것은 실로 한심한 일이다. 연필, 고무, 책 등 학용품은 물론이요 역시 학교 아동에게 필요한 신발의 배급이 거진 없다시피 되어 있기 때문에 아동은 물론 학부형의 우울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월사금, 후원회비, 무슨 책값 등으로 학교에 가져가는 돈은 별다른 수입없는 학부형에게는 실로 견디어 나갈 수 없는 큰 고통이요 과중한 부담이다. 굶주리는 집에 와서 몇백 원 몇십 원의 돈을 달라고 하는 어린이들의 얼굴은 무한한 고민과 우울로 가득차 있다. 일반 가정의 부담 능력을 생각하지 않은 학교의 균일한 부당 요구는 어린이들에게 무참한 정도로 정신적 타격을 줄 뿐 아니라 돈이 없어 못내는 때는 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울 밖에 도리가 없다. 해방되어 기쁘다고 날뛰는 천진한 아동들을 이러한 곤경에 빠뜨린다면 아무리 산술 이과를 배워야 그다지 명랑한 교육은 되지 못한다. 언제나 연필 운동화를 대여 쓰고 신을 수 있을까 하는 아동들의 하소연을 그대로 듣기에는 가슴이 아프다. 대체로 학교당국은 무리한 요구를 한다. 그 한가지 예로 중등여학교 재봉시간에 바느질할 옷감 한 마에 몇백 원이 보통인 오늘 그 요구에 쉽사리 응할 수 있는 가정은 얼마 못될 것이다. 그것보다는 집에서 식구의 헌 옷감을 가져다가 꼬매게하는 것이 실질적이 아닐까. 결론으로 학원에서 그전 일본식 교육인 형식에 치우치는 그 정신을 일소하고 실제에 알맞는 진실한 교육 대책이 하루 바삐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 1946년 12월 20일 <한성일보> 군정관리 약 5만- 운수체신관계는 제외

@실제날짜:461015

10월 중순 현재. 인사행정처장 발표에 의하면 10월15일 현재로 군수부와 체신부를 제외한 본청 급 각도 군정청 관리의 총수는 48,949명으로 각도별은 다음과 같다.
 ▲본청7684 ▲경기6168 ▲충북2854 ▲충남4212 ▲전북4430 ▲전남6174 ▲경북6481 ▲경남8009 ▲강원2722 ▲제주344
  • 1946년 12월 21일 <독립신보> 三大學 休校 處分- 문리, 법, 상 학생은 정학 처분

@실제날짜:461218

국립대학의 문리 법과 양과 학생들이 그전 교수진의 무조건 복직과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짖고 맹휴에 들어갔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에 대하여 군정 당국에서는 지난 18일부로 돌연 문리 법과 상과 등 3대학에 대하여 휴교 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전 학생에게 정학 처분을 단행하였다는 바 이에 대하여 국립대학 법과 학생회와 민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성명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학생회성명 
 우리들의 존경하여 마지 않는 혁명적 선배 여러분.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하는 일부 인사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학원의 생명인 자유에 관할 때 민족의 운명에 관할 때 우리들은 민족의 재산이요 보배인 학생으로서 단연 궐기치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경하여 마지않는 혁명적 선배 여러분. '구교수를 무조건 복직시키라' '문교 책임자는 총사직하라' '국대의 모든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즉시 넘기라' 우리의 이런 투쟁을 꾸준히 지도 편달하여 주십시오. 
민전 성명 
 그러한 처분은 너무나 비민주적 처단으로서 건국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도저히 묵인할 수 없다. 당국은 당연히 국대안을 철폐하고 전 학생의 요구를 용인하여 민주교육 실시에 나가야 할 것이다.
  • 1946년 12월 22일 <독립신보> 停學 處分 부당-서울學統이 성명
서울학생통일촉성회(學統)에서는 국대 학생 정학 처분에 반대한다고 대요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거족적으로 반대한 소위 국대안이 강제적으로 실시되자 그 현상은 생도 수천 명에 교수 10명, 하루 수업 시간 평균 1시간, 출석 학생수는 총수의 5분지 일에 불과하다. 우리는 당국이 정학 처분 등 무단적 행위를 즉시 정지하고 민심에 따라 발본적 민주 시책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 1946년 12월 24일 <독립신보> 舊교수복직에 노력 중-신학기에 등교치 않으면 제명
국대 맹휴에 대한 문교 당국자 담. 구교수의 무조건 복직을 요구코 시내 문리과 상과 법과의 세 대학 학생은 동맹 휴학을 단행, 공과대 文大예과 기타 학교에서도 이번 겨울 방학 동안에 구교수의 복직을 실현시켜 달라는 요구를 학교 당국과 문교부에 제출하여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던 바 지난 18일 군정청에서는 전기 동맹 휴학에 들어간 문대 법대 상대에 대해 휴교와 학생의 정학 처분을 내리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문교부 차장 오천석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 법 상의 세 대학에서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림으로 '헬믹' 대장이 문교부 고문 '핏텐쟈' 중좌를 시켜 그 사실 여부를 조사시켰던 바 각 대학 모두 사실로 수업을 안하고 있음으로 군정장관이 휴교와 정학 처분을 명령한 것이다. 오는 2월 3일 2학기 개학 날에 정당한 이유가 없이 등교치 않는 학생은 제명할 것이고 또 전 학생이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오는 해 즉 9월 신학기까지 폐교를 시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구교수 복직 문제는 각 대학 당국에서 구교수와 만나 복직해 주기를 교섭하고 있다. 이미 사대의 22명 교수는 전원 복직하였고 공대에서도 학장이 나서서 교섭 중이고 그외 학교에서도 힘쓰고 있다.
  • 1946년 12월 24일 <독립신보> 民革黨도 國大生을 지지
조선민족혁명당에서도 3 대학생 정학 처분에 관하여 학생들의 구교수 무조건 복직과 國大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지지하며 당국자는 그들의 요구를 용인하여 국대 문제를 정당히 해결하여 달라고 담화를 발표하였다.
  • 1946년 12월 24일 <독립신보> 反動 敎育에 적극 反對- 남로당 위원장 許憲 씨 談

@실제날짜:461223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허헌 씨는 23일 출입기자단과의 정례 회견석상에서 전주 사건과 국대 문제에 대하여 대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략) ▲ 국대안 - 반동 공세는 이번 3대학 휴교로 인하여 더욱 명확히 되었다. 인민 항쟁이 고조에 달하자 국대안 고집자들도 1보 양보하는 듯 민주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등교를 권고하였으나 또 다시 휴교로써 반동 공세에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 반동 교육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바이다.
  • 1946년 12월 25일 <독립신보> 敎育 政策의 作定을 不許- 군정장관대리 談
3대학의 휴학과 학생들의 제명 처분에 대하여 군정장관대리 '헬믹크'代將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학생이 스크라이크로 인하여 허용할 수 없는 상태는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이 상태가 계속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조선의 교육 제도에는 손해를 입고 시간과 금전이 낭비될 뿐만 아니라 조선이 세계의 제국간에 정당한 일원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큰 지장이 있을 것이다. 학생은 교육 제도에 있어서 정책을 작정하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교육 정책을 작정하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요 군정장관대리로서는 일반은 사소한 감정 혹은 체면 문제보다 조선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교육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유해 무익하고 정당한 근거가 없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를 요망한다.
  • 1946년 12월 25일 <독립신보> 문리과, 법과 휴교 선언- 학생은 전부 정학 처분
신학기에 등교않으면 제명 처분. 문리과 법과 및 상과의 3대학 학생은 구교수의 복직을 요구하고 동맹 휴학한데 대하여 문교 당국은 3교에 대해 휴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학생을 정학 처분을 시켰는데 전 문교부장 '핏텐자-' 중좌는 별항과 같이 서울국립대학 총장에 대해서 서신을 보내어 군정청의 교육 정책을 밝혔는데 일방 군정장관대리 헬믹크 대장도 학생은 교육 정책에 간섭말라고 한 것은 민주주의 교육 정책상 주목 아니할 수 없다. 
군정청 문교부 고문인 '오브레. 오. 핏텐자' 중좌는 서울국립대학 총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명서를 보냈는데 이에 의하면 내년 2월 3일에 등교치 않는 학생은 전부 제명 처분하라고 또 학생 스트라이크의 이유로 운영않는 학교도 즉시 휴교 처분을 할 것이라고 호령을 내렸다. 군정장관의 지령에 따라 나는 이에 서울국립대학의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은 휴교되었고 전 학생은 정학에 처하였음을 선언한다. 그리하여 명 2월 3일에 下記의 조건하에  該 2대학을 재개할 것을 허가할 것이며 동 전 학생은 정학 처분이 해제될 것이다. 
 1. 1947년 2월 3일에 출석할 전 학생에 관한 정확한 조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할 것. 
 2. 동일에 정당한 이유 없이 등교치 않는 학생은 전원 제명할 것. 
 3. 今週 휴강한데 대하여는 금번 잔여 기간에 10여일 오후의 강의로 보충할 것. 
 4. 금후 단 一日이라도 학생들의 출석 거부로 말미암아 정규 수업을 방해한다면 그러한 학생은 제명할 것이다. 이러한 제명 처분을 하므로써 학생수가 감소되면 그 학교는 금번 학년 동안은 휴교하게 될 것이다. 상기 1, 2, 3, 4에 열거한 조치는 귀하의 관할하에 있는 그외 어느 대학에든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일층 더욱 충고하는 바이다. 어느 학교를 물론하고 학생 스트라이크의 이유로 운용되지 않는다면 그 학교는 즉시 휴교 처분을 당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그 기간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타교에서 이용하게 될 것은 이卽 군정장관의 방침인 것이다. 귀하의 관할하에 있는 전 학부에 이 방침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바이다.
  • 1946년 12월 25일 <동아일보> 國大 行政權 一切을 移讓하라- 法大學生會서 聲明

@실제날짜:461222

서울법과대학 학생회에서는 22일 3대학 휴교 처분에 대하여 12일 구교수의 무조건 복직, 문교 당국 책임자 인책 사퇴, 국대 行政權 일절의 조선인 이양의 삼대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는 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6년 12월 25일 <동아일보> 大韓夜間大學塾에 李相근 씨 千七百萬圓 快擲

@실제날짜:461225

시내 청엽동 선린상업학교 안에 있는 한국야간대학숙은 지난 4월에 설립키로 하여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진학할 수 없는 사정에 있는 무산 근로 청소년의 교육 기관으로 많은 공적을 쌓고 있는데 이 무산 청소년의 교육 기관의 운영을 더 한층 강화함에 협력하려는 일반의 특지에 앞서 요지음 대구의 부호 이장우 씨 영식 이상근 씨는 그 부친의 유지받들어 특히 근로자 교육사업에 사재를 희사할 계획이던바 드디어 1천 7백만 원에 해당하는 토지를 동 대학숙 경영비에 써 달라고 기부하여 왔다고 한다.
  • 1946년 12월 25일 <동아일보> 停學處分은 解除하겠다
핏텐쟈 顧問 問題의 大學 開校한다고 聲明
서울국립대학 문리과대학, 상과대학, 법과대학의 휴교 처분을 계기로하여 다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문교부 고문 피텐쟈대좌는 군정장관의 지시 아래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전기 2개 대학을 재개하며 학생의 정학 처분을 해제하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一. 명년 2월 3일에 정당한 이유없이 등교치 않는 학생은 즉시 제명할 것.
   二. 금주 휴강한데 대하여는 어떤 잔여 기간에 토요일 오후의 강의로 보충할 것.
   三. 금후 단 하루라도 학생들의 등교 거부로 말미암아 정규 수업을 방해하면 그 학생은 제명될 것이며 제명 처분으로 학생수가 감소되면 그 학교는 이번 학년 동안은 휴교될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안은 국립대학의 다른 학교에도 적용될 것이라 한다.
  • 1946년 12월 25일 <한성일보> 2월 3일 등교하라, 문교당국 휴교도 고려- 서울국립대학
문교부 고문 피텐자 씨는 서울국립대학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나는 서울대학의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을 시찰하였는데 그중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은 학생들의 스트라이크와 교수 부재의 이유로 휴교 상태에 있으며 상과대학은 학생들이 강의에 출석치 않으므로 대단히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정장관의 지령에 따라 나는 이에 서울대학과 법과대학은 휴교되었고 전학생은 정학에 처하였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올 2월 3일에 좌기의 조건하에 2대학을 재개할 것을 허가할 것이며 동 정학생은 정학 처분이 해제될 것이다.
 1. 1947년 2월 3일에 출석할 전 학생에 관한 정확한 조사를 하기 위한 ○○를 할 것.
 2. 동일에 정당한 이유없이 등교치 않은 학생은 전부 제명 할 것.
 3. 금주 휴강한데 대하여는 금번 잔여 기간에 토요일 오후의 강의로 보충할 것.
 4. 금후 단 일일이라도 학생들의 출석부로 말미암아 정규 수업을 방해한다면 그러한 학생은 제명될 것이다. 이러한 제명 처분을 함으로서 학생수가 감소되면 그 학교는 금번 학년 동안 휴교하게 될 것이다.
상기 1, 2, 3, 4에 열거한 조치는 귀하의 관할에 있는 그 외 어느 대학에든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일층 더욱 충고하는 바이다. 어느 학교를 물론하고 학생 스트라이크의 이유로 운용되지 않는다면 그 학교는 즉시 휴교 처분을 당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그 기관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타교에서 이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즉 군정장관의 방침인 것이다. 귀하의 관할 하에 있는 전 학부에 이 방침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바이다. 이 학생 맹휴 사건에 관하여 군정장관 대리헬믹 씨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학생들은 맹휴로 인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야기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만일 이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묵인한다면 조선교육계는 손해를 입고 시간과 금전이 낭비될 뿐만아니라 조선이 세계 제국간의 정당한 일원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지장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제도에 있어서 정책을 작성하도록 허락할 수는 없다.
  • 1946년 12월 26일 <독립신보> 國大 3課 學生 初志 貫徹을 再聲明

@실제날짜:461223

지난 18일 군정 당국으로부터 돌연 휴교와 학생 전원의 정학 처분을 받은 법과대학 문리과대학 상과대학 학생회에서는 23일 각각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금번 조치의 부당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끝끝내 요구 관철에 매진할 것을 표명하였다. 
법과대학 성명서 
발족 당시부터 내포한 국대안의 모순은 날로 확대되어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진 법과대학에서는 1. 구교수 무조건 복직, 2. 문교 당국 책임자의 인책 사직, 3. 국대 행정權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등을 들고 맹휴를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휴교 명령과 전 학생에 대한 정학 처분을 하였으니 이는 정의에 대한 모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문리대 성명서 
우리는 학원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기 삼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맹휴를 단행하였는데 문교 당국은 문리대 폐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삼대 요구가 가장 민족적인 정당한 요구임을 확인하고 이의 즉시 실시를 요망한다. 
상대 성명서 
우리는 박용하 교장의 사임을 요구하여 왔는데 돌연 휴교 및 정학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탄압에도 굴치 않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성명한다.
  • 1946년 12월 26일 <독립신보> 冬季大學 登錄 오는 1월 6일
문교부 주최로 동계 대학이 개설된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교육 기타 방면에 있는 미인 고문들은 1월 6일부터 4주일간에 걸쳐 중등, 전문 정도의 과정을 담당하기로 되었다 하며 등록은 1월 6일까지, 대학에서 할 예정이라 한다. 중등학교 교원을 위한 동계 학교는 남조선에 있는 각 사범학교에서 내년 1월 초순부터 개시될 예정이라 한다. 서울대학에서는 중등학교 대학 교사들을 주로 하여 전문 정도의 과학, 농업, 가정, 공업에 관한 업적 훈련, 체육, 교육법, 영어 강좌를 하리라 하는데 희망자에게도 공개될 것이라 하며 오전 강좌는 미인 경험가의 강의가 이채를 띄울 것이라 한다.
  • 1946년 12월 27일 <독립신보> 조선교육자협회 교육사태에 성명

@실제날짜:461225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지난 12월 25일 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1. 동계강습회 개최의 건, 2. 기관지 발행의 건. 3. 각과 연구회 구성의 건 등을 계획 결정한 다음 현하 남조선 교육계의 사태에 대하여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자주학원 건설을 방해하는 분자들을 일본 교육계에서 추방한 것과 같이 우리 조선의 문교 당국과 교육계에서 추방할 것. 
  2. 교육 내용 중 비과학적 국수주의적인 것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혁신할 것. 
  3. 교원의 신분을 보장할 것. 
  4. 교원의 생활을 보장하고 학부형에게 과중한 부담을 강요치 말 것. 
  5. 국대안을 철회하고 고등교육 기관을 재건할 것.
  • 1946년 12월 28일 <독립신보> 공대서 성명

@실제날짜:461227

대학의 휴교 문제에 대하여 공과대학 학생회 각과 연합 확대위원회에서는 27일 문리과 법과 상과 대학의 세 학교를 휴교 처분하고 열정에 불타는 애국 학생을 전부 정학 처분한 것은 과거 역사에서 보지 못한 것으로 우리들 조선학도들은 분격에 울고 의분에 불타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6년 12월 28일 <독립신보> 民主的 學園을 요망 -국대교육자대책위원회서 담화

@실제날짜:461227

국립대학의 휴교에 관하여 27일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문리대 법대 상대 등에 대한 휴교령과 학생 전원에 대한 정학 처분은 상상할 수 없는 처사다. 우리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달라. 이렇게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고 일어선 학생들에게 과연 이러한 대답 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일까. 끝까지 탄압과 위협으로 진리와 강의없는 대학으로 학생을 몰아 넣어 사태가 수습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기 3대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다른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임은 사실인데 문교 당국에서는 泰然自若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 참을 수 없는 공분을 느끼는 바이다. 민주 대학의 건설을 위하여 총궐기하여 주기를 바란다.


1947년

1947년 1월

  • 1947년 1월 4일 교과서 생산 및 배분

군정청 편수국(미국인 국장 Paul Anderson)에서는 미군정 시작 후 1946년 12월 25일까지 발간된 교과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문교부장 고문에게 제출하였다.[130]


  • 1947년 1월 8일 <한성일보> 사립 3대가 학 새로운 출발
기독교 계통 사립 교육 기관의 최고 학부 연희, 세브란스, 이화 3대학이 기구를 쇄신하고 새로운 구상하에 새출발을 보게 된다. 요즈음 소식통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기 각대학에서는 대표 위원을 내어 수차에 걸쳐 사립대학연맹체위원회를 조직하고 합동도서관과 합동대학원 설치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토의하고 각 대학의 새로운 진로를 구명하고 있다.
대학원 공동도서관 설치- 世, 延, 梨 3대학 제휴 합동
조선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기독교 계통의 사립 대학 연희, 이화, 세부란쓰의 3대학이 자주 독립 절규 신춘을 맞이하여 더욱 더 내용을 충실케 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 일꾼들을 대량으로 육성하여 대학교육의 만전을 기하고자 사립대학의 연맹체를 조직하고 청년 교육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하기로 되었다.
사립 교육 기관의 극도의 재정난으로 인하여 항간에는 전기 3 대학의 합동 경영설까지 떠돌고 있었는데 요지음 각 학교에서는 학교 경영의 혁신을 꾀하고자 세명씩의 위원을 내어 위원회를 조직하고 수 차 회담한 결과 아직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하였지만 항간에 떠도는 학교 합동설은 전원 일체로 부인하고 학교 경영을 별개로 하되 서로 각 학교의 특색을 조장시키며 새로 공동 도서관과 공동 대학원을 설치하여 경비 절약과 인재 육성에 정진하기로 될 터이라 한다.
요지음 민생 문제는 극도의 고경에 빠져 이 여파는 교육 기관에 까지 물들인 현세태에 비추어 보아 합동이냐 연맹체이냐 각대학의 태도가 극히 주목시 되고 있다.
  • 1947년 1월 9일 1946년도 문교부 업적 개요 보고

문교부장 고문 피텐져 대위는 아래 요지의 1946년도 문교부업적을 보고하였다.

   1. 다음과 같은 권한의 대폭적인 지방 이전에 의한 분권화
       - 대학 이하의 학교 신설
       - 초중등학교의 감독
       - 각급 학교 교사와 초등학교 교장의 임명
       - 모든 사범학교의 行政
       - 초등교원의 자격 수여
       - 기타
   2. 신교육체제의 기초가 될 조선교육심의회의 보고서 접수.
   3. 3-6-4학제의 도입: 6년간의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1946년 9월에 5학년 과정 도입. 
   4. 4년제 대학 교육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1946년 9월에 대부분의 공, 사립 대학에 3학년 과정(전체로 14학년) 설치.
   5. 일본식 교육과정을 대체하기 위한 새 초등 및 중등 커리큘럼 도입.
   6. 25종의 새 교과서 600만부의 집필, 편집, 인쇄.
   7. 교원 재교육 실시.
   8. 성인교육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각 군에서 1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를 선발하여 성인교육지도자 강습(Adult Education Institute)을 실시. 이들 지도자들이 실시하는 성인교육 강습회에 거의 150만 명이 등록.
   9. 서울과 인근 지역의 9개 공립 및 2개 사립 대학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 이전의 등록학생 3,689명에 비해 새로 설립된 서울대학교에는 7,758명이 등록.
   10. 254개의 초등학교 그리고 81개의 중등학교 신설; 초등학교 학생수는 1,623,330명에서 2,114,000명으로, 그리고 중등학교 학생수는 76,467명에서 141,097명으로 증가. 교사 숫자도 26,444명에서 34,427명으로 증가.[131]


  • 1947년 1월 10일 <독립신보> 國大案 去益 難航- 민주건설 초석인 학생은 어데로
국대안의 철폐와 문교 정책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가 당국으로부터 대학의 임시 폐쇠와 전 학생 정학 처분을 당한 문리대 법대 상대의 국대 삼대학에서는 금반 이에 대응코저 3대학의 전 학생 교수진을 망라한 '국대3대학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초지 관철을 위하여 싸우련다고 한다. 그런데 문교 당국에서는 전 학생의 맹휴 요구 조건에 대하여 이를 一蹴하는 동시에 전 학생에게 개별적 서신으로써 금후 등교치 않는 자와 1일 이라도 맹휴를 敢行하는 학생은 즉시 퇴학에 처할 것을 통고하였다 한다. 이에 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여하한 희생이 있더라도 등교를 끝까지 거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7일에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대안에 대하여 차 건의한 데도 불구하고 하등의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은 문교 당국자의 독선적 문교 정책 및 일부 교수의 엽관적 정신에 기인하였음을 지적하고 금후 국대안 철폐를 위하여 투쟁할 것을 강조하였다.
  • 1947년 1월 12일 <한성일보> 교육계의 거성 페프타롯치 탄생 기념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교육계의 거성 요한 헤인리히 페스탈로치의 탄생일인 1947년 1월 12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2일 오전 10시부터 서울대학 강당에서 교육에 뜻을 둔 여러 분들과 같이 페스탈로치 탄생 20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리라 한다.
  • 1947년 1월 14일 <동아일보> 啓明實業校 女生徒 募集
지방통신 : 인천 사재를 털어서 계명학원을 경영하든 李順熙여사는 이번 학원기구를 개혁하여 새로히 계명여자실업학원으로 발족하게 되는 동시 신입생 1백 20명을 12월 말일까지 모집하기로 되었는데 자격은 12세이상 30세까지인데 기혼 여자도 관계 없다고 한다.
  • 1947년 1월 14일 <동아일보> 鄕土中學에 二白五十萬圓 - 特志家 柳東彦氏가 寄附
지방통신 :長水 장수독립촉성국민회위원장 柳東彦 씨는 얼마 전 장수중학 기성회에 사재 시가 2백50만 원어치의 부동산을 기부하였으므로 동 기성회에서는 명춘에 개교하고자 맹렬히 활동 중이라고 한다.
  • 1947년 1월 15일 <독립신보> 國粹主義 敎育 絶對 反對-남조선교육자대회

@실제날짜:470114

학원 자치 봉쇄와 관료성 버리라. 남조선 전 교육자의 열성적인 지지밑에 14일 제1회 남조선교육자대회는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날 오전 10시 대회장인 시내 종로 2정목 YMCA 강당에는 약 2000여 명의 교육자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내참하여 임창순 씨 사회로 애국가 합창 ○○이 있은 다음 박준영 씨의 개회사가 있고 이어서 임시 執行部를 선거하였는데 尹行重, 박건양, 최종환 3씨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다음 예정대로 김택원 씨의 경과 보고 정갑 씨의 교육계 정세 보고가 있고 祝辭에 들어가 먼저 민전 대표 김오성 씨, 남조선노동당 이기석 씨, 민혁당 성주연 씨, 文聯 강성재 씨, 學家동맹 등 각 문화단체 대표의 祝辭가 있고 토의사항에 들어가 열렬한 토의가 있은 다음 별항과 같은 결정서가 통과되었다. (전문략) 
 1. 문교 행정 및 교육계에서 친일 분자, 팟쇼 분자, 학원 모리배를 추방하고 민주주의 학원을 건설하여 교원의 부당 파면 압박을 근절하고 과학적이요 민주적인 교재를 편찬 사용할 것을 요청한다. 
 2. 고등교육 기관을 폐허화한 국대안을 철폐하고 이같은 사태를 초래한  문교 당국자의 인책사직을 요구하기로 한다. 
 3. 교원 학도에게 식량 및 생필 물자의 배급을 확보하고 대우를 개선하여 그 생활을 보장하므로써 학부형에게 대한 후원회비 기부금 등의 명목에 의한 과중 부담을 경감하여 학도에 대한 교육기회 균등의 길을 개방할 것을 요구한다. 
 1947년 1월 14일 남조선교육자대회
  • 1947년 1월 16일 <동아일보> 反託學生大會 - 18일 學生總聯 主催로
반탁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억센 조수처럼 청년의 애국정열을 선혈로써 앙양한 작년 1월 18일 이 성스러운 한 돌을 맞이하여 전국학생총연맹에서는 오는 18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천도교 강당에서 반탁학생대회를 개최하여 반탁 정신을 다시 발현할 터이라고 한다.
  • 1947년 1월 16일 <한성일보> 학원자치를 강조- 남조선교육자대회 결속

@실제날짜:470114

현금 조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교육 문제를 토의 검토하는 조선교육협회 주최 남조선교육자대회는 지난 14일 오전 11시부터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각지에서 모여온 1천여 교육자들을 모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날 먼저 박준영 씨의 사회로 개식하여 김오성 안스테트 씨 등 제씨의 축사가 있은 후 개회식을 마치고 회의로 들어가 박중양 씨를 의장으로 추대하고 학원의 자치와 교육의 민주화 수립이라는 표어 아래 ▲교육민주화문제 ▲서울국립대학문제 ▲교원 생활 문제 등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장시간에 걸쳐 열렬한 토의 검토를 한 다음 각 문제에 대한 대책 위원을 선정하고 오후 7시 지나 대회의 막을 닫았다.
  • 1947년 1월 17일 <독립신보> 二月3일에 등교 않으면 제명 처분

@실제날짜:470116

서울국립대학총장은 2월 3일에 이유없이 등교하지 않는 학생은 제명 처분한다고 16일 경고하였다.
  • 1947년 1월 17일 <독립신보> 日帝敎育 소탕되었나- 일본말로 숙제를 낸 중등교원
친일파 민족 반역자 모리배들이 교육계에 잠입하여 민주학원 건설을 방해하고 있거니와 이번에는 어떤 중학교원이 겨울방학 숙제를 일본말로 낸 사실이 있어 이런 몰상식한 일제 잔재 교육자에 대한 비난이 크다. 즉 충남 옥천군의 옥천농업중학교 敎諭 睦寅修는 이번 겨울방학 수학 문제를 비롯한 숙제를 일본문 프린트라 하여 학생에게 배부하였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일본문 숙제 처사에 대하여 부형들의 비난이 큰 데 교무주임도 이것을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한다. 조선의 일꾼을 양성하는 학원에 일제 잔재가 아니라 이와 같은 일재 교육자가 남아 있다는 것은 교육 정책의 결함을 말하는 동시에 순진한 조선의 어린이들이 점점 일재의 주구적 교육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위험 천만으로 조선 교육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문교부차장 오천석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 듣는 사실이다. 그 선생은 아마 도깨비에 홀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육자로서 숙제를 일본문으로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조사하여 책임을 추궁하겠다.
  • 1947년 1월 20일 문교부 주간업무보고(47년 1월 18일 끝나는 주간)

1. 문교부의 인력 비교

 1942년 148명, 1943년 176명, 1944년 211명, 1945년 185명(남한), 1946년 157명

2. 주간 지출 Y85,250.00, 현 회계년도 총지출액 Y655,877,048.85 3. 교과서 배포 지난주에 40,699책, 지금까지 총 6,332,944책 배포 4. 서울대학 상과대학 학부모회의 개최. 60명정도 참석. 2명은 학생 맹휴에 찬성하고 나머지는 2월 3일에 그들 자제를 등교시키기로 합의. 5. 겨울방학 동계 교사 강습 - 109명 등록.[132]

  • 1947년 1월 21일 <동아일보> 沃溝農校를 設立 : 六百萬圓 基金達成으로
지방통신: 沃溝 옥구군민의 총의로 6백만 원의 기금 조성에 활동 중이던 옥구중학교 기성회에서는 그동안 회장 張榮奎 씨의 토지 7만평 시가 約 50만 원 기부를 비롯하여 文원泰 씨의 60만 원, 강영태 씨의 40만 원, 李東석 씨의 25만 원, 그리고 도청으로부터 하곡 수집 장려금으로 군에 교부된 120만 원 까지 합치어 목표액을 완성하였으므로 관계 당국에 농업학교 설립인가 신청을 제출하고 있는데 교사는 당분간 八木農場을 쓸 것이며 새 교사는 地境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 기성회에서는 최초 중등학교를 계획하였으나 현재 형편으로선 농업학교가 적당하므로 우선 설립하고 계속하여 중학 설치 운동도 추진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1월 22일 <독립신보> 京畿道學務課員도 4십만 원 收賄
군정관리들의 썩어 빠진 매국적인 배임 행위는 사회의 큰 지탄을 받고 있거니와 이번에는 다음 세대의 일꾼을 양성하는 학무과원의 독직 사건이 발각되어 사직의 손에서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즉 문제의 인물은 경기도 학무과원 박철규인데 박은 교과서 인쇄에 대하여 시내 7개소의 인쇄 업자로부터 40만 원을 수뢰한 것이 탄로되어 경무국 수사국에서는 불구속으로 엄중 취조 중인데 아동을 양성하고 더욱이 교원을 지도하는 학무과원으로서 이와 같이 뇌물을 받은데 대하여 당국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 1947년 1월 22일 <동아일보> 醜! 敎科書로 詐欺 - 京畿道 朴學務課長 不拘束 取調中
육백만 원 수뢰사건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제 직책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던 군정 관리가 또 적발되었다.
수사국 특무과에서는 20일부터 돌연 경기도 학무과장 朴哲奎 씨외 시내 모모 인쇄소 7개처의 주인을 불구속으로 엄중 취조 중인데  사건의 내용인 즉 박과장외 수명은 모모 인쇄소와 결탁하여 중등학교 교과서를 인쇄하는 데 있어 특수한 명목을 붙여 約 40여만 원을 사취한 것이 탄로되어 瀆職 혐의로 취조를 받게 된 것이다.
  • 1947년 1월 23일 <독립신보> 國民敎育 講座 開催
조선교육자협회서는 신춘을 기하여 좌기와 같이 제2회 국민교육 강좌를 개최한다는데 특히 국민학교 교원의 다수 참가를 요망하고 있다 한다. 
 1. 時 - 自1월 23일 至1월 29일 매일 12시부터 4시까지 
 2. 장소 -대동상업학교 
 3. 회비 - 50원
  • 1947년 1월 25일 <동아일보> 日本敎員勞組도 全國的 大罷業에 參加
교원조합협의회에서도 전산공청과 공동보조로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준비태세는 25일부터 시작된다. 즉, 파업 준비기간 중에는 될 수 있는대로 생도 자신이 자유로 자습하도록 지키며 또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것과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수업하게 되어 있다. 1월 30일에 완전 스트라이크 준비를 하여 2월 1일부터 분격적 제네스트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일방 동경 急行 전철도 전산공청과 동일보조를 취하기로 오늘 회합에서 결정하였다. 또 전국공공단체 노동조합에서도 2월 1일부터 제네스트에 들어가기를 오늘 하곡공회당 전국대회에서 결정하였다.
  • 1947년 1월 25일 <한성일보> 파란의 서울대학은 어찌되나?
파란많은 국립서울대학문제를 에워싸고 초창기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우여 곡절 가지 가지의 파문을 일으키고 내려 왔는데 새해의 신학기를 맞이하여 이 서울대학 문제는 어떠한 구상아래 어떠하게 전개될 것인가?
일파 또 일파 아직 동요- 학교 당국은 무조건 취학 희망
2월 3일 개교
지난 12월 18일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문교부 피톤지-고문의 명의로 교직원 배척 교원 복직 요망 등의 조건으로 동맹 휴학을 단행한 상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등의 학생들에게 오는 2월3일 신학기 개학식에 등교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퇴학 처분을 하겠다는 ○담도 있어 이 운명의 날 2월 3일을 10일 앞둔 작금에 있어 각 대학에서는 학장들이 퇴직한 교원의 복직을 권고하고 있는 학교도 있고 그중에는 전 교원의 복직을 보고 신학기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는 학교도 있어 이들 학생들의 귀추가 매우 주목되고 있는데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학장에게 이들 학생들에게 보내는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張利郁 씨 談 -나는 서울대학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동맹 휴학을 이용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대국적 견지에서 본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시킬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배워야 할 때이니까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불합리해 보인다든지 서로 불합작의 태도가 있더라도 다소의 불평을 불구하고 우리의 가장 긴급한 배움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내용 충만의 기회를 잃으면 나중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으까요 운운
  • 1947년 1월 26일 <독립신보> 國大 最後 難關 逢着- 학생은 학원자치 요구
문교부선 기정 방침 시행.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국립대학 문리과 법과 상과의 3대학생은 맹휴 중인데 이에 대하여 문교 당국에서는 3교를 휴학 처분하는 동시에 2월 3일까지 등교 않을 시에는 단연코 제명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기일을 얼마 후에 두고 양측이 모두 일보의 양보도 보이지 않으며 3대학은 신학기 9월까지 휴교 상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문교 당국으로서는 3대학 학생들의 요구 조건인 학원의 자치와 자유를 위한 국대 미인 책임자를 조선인으로 교대하라는 것과 현 문교 책임자의 인책 사직, 구교수의 복직 등의 요구에 대하여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수차에 걸쳐 학생들에 고한 예정일까지 이유없이 등교않으면 단연코 제명하겠다는 태도에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만일 학생들이 등교않을 시에는 신학기 9월까지 3대학을 휴학하리라 한다. 일방 학생측은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 하고 있으며 3교 연합대책위원회에서는 대책을 강구 중인데 지금 형세로서는 문교 당국의 냉정한 태도와 같이 학생측도 등교치 않고 초지 관철을 달성하여 학원의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할 태세를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1947년 1월 26일 <동아일보> 美 푸大學서 留學生 招請
자라나는 우리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 미국 푸린스톤대학으로부터 요즈음 문교부에 들어왔다. 문교부에서는 앞서부터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고자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운동을 하여 오던 중 이번에는 푸린스톤대학에서 조선의 해방을 기념하고자 매 해 몇 사람씩 유학오기를 바라며 적임자를 알선하여 달라는 의회 편지가 온 것으로 방금 문교부에서는 각 방면을 통하여 유학생 파견에 대한 협의와 연락을 급히 하고 있는 중이다.
  • 1947년 1월 26일 <한성일보> 과학교육진흥회의
조선 과학교육진흥회의가 오는 30일부터 2일간 서울대학에서 개최되리라는데 동회의에서는 공업, 의약, 상업에 대한 응용 등에 관하여 토의하는 한편 자연 물리 심리 교육 농업 과학 등 각 분과회를 조직하리라 한다. 또 동 회의에서는 지도 과학자 50여 명으로 구성된 科學士院 설치 문제도 토의 되리라 한다.
  • 1947년 1월 27일 미국대학 설립 건의안 제출됨

“Higher Education in Korea"라는 제목의 미국 대학 한국 설립계획이 군정장관과 문교부장에게 제출되었다.(작성자는 미상)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대안으로 인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 고등 교육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은 미국 대학을 한국에 설립하는 것이다.
 2. 이 대학은 1947년 9월 학기부터 개교하도록 한다.
 3. 이 대학은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 미국인 교사와 학자의 지도하에 적합한 과학 및 기술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 교육을 의해 미국식 건물들을 新築해야 하며 특히 미국인 교육자들이 생활할 시설이 포함되어야 한다.
   - 개설되는 교과 과정은 한국이 가장 결여하고 있는 분야로 하되 미국의 많은 주립대학들에서 가르쳐 지고 있는 내용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 학생 수용 규모는 1,000명 정도가 적합하며 남여공학이어야 한다. 그리고 직원으로는 남학생처장, 여학생처장, 상담직원, 총무과 직원, 보건소 직원들이 있어야 한다.
   - 강의는 영어로 되어야 한다.
   - 학부과정 이외에 대학원 과정이나 기타 특별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 이 대학은 반드시 미국 자금에 의해 지원되고 미국 교재나 시설들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이 세계 시장에 흡수되었을 때 미국 상품을 소비하는 진정한 시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미국 물건이나 교재를 사용하던 그들은 미국 상품을 원하게 된다.
   - 이 대학의 성격과 규모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조사가 일차로 이루어 져야 한다.
   - 대학 설립 계획은 가능한 한 조기에 시작되어야 한다.[133]
  • 1947년 1월 28일 <독립신보> 끓는 정열의 외침-학통주최 서울 학생대회 성황

@실제날짜:470127

벅차는 젊은 힘, 끓어 오르는 정열, 그리고 끊임없는 진리 탐구에의 의욕을 모두 바치어 민주주의 조선 건설에 초석이 되고저 작년 1월 27일 결성을 본 서울학생통일촉성회는 지난 일년간 크나큰 공헌을 남겼고 앞으로 또한 그 거대한 조직을 통하여 다난한 학원 문제를 해결할 것 등 기대되는 바 많은데 작 27일 학통 결성 1주년 기념 서울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속속 모여드는 남여 학생으로 천도교당은 정각전에 만 원이 되었으며 옥외에도 수백 학생이 집결하고 있는 가운데 개최되어 우렁찬 애국가 합창, 묵상, 주악, 개회사가 있은 후 임시 執行部 선거에 들어가 의장으로 7명 서기 6명을 선출하고 民戰 民革 民靑 敎協 南勞 婦總 文聯 대표들의 열렬한 祝辭가 있은 후 정세 보고, 경과 보고, 각 학교 대표의 결의 표명, 결정서 통과가 있은 다음 만세 삼창으로 오후 늦게 폐회되었다.
  • 1947년 1월 28일 <동아일보> 國立서울大學 開學에 對한 注意
豫定에 의하여 二月 三日에 九個大學 一時 開學할 터인데 右 指定 時日에 登校 授業하지 아니하는 學生은 當局 方針에 의하여 除名 退學 處分을 하기로  決定되었으니 각 學生은 특히 주의하여 錯誤없기를 요망함.
                                       國立서울大學校總長
  • 1947년 1월 28일 <동아일보> 新刊評 "民主主義敎育의 建設"을 읽고 -白樂濬-
본서의 저자 오천석 씨는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일찍이 문화 민족 동화를 목적하는 교육정책의 虛妄을 이론적 근거와 역사적 사실로써 변증하여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하던 노예 교육을 論고한 바 있었다. 그것이 저자의 학위논문이었다. 
개항 벽두에 저자는 먼저 신국가 건설은 "하루 아침의 법령으로써 세워질 것"이 아니요 오직 "교육의 힘"을 빌어야만 될 것을 주장하고 그러한 과업의 수행에는 "일본적인 생활과 정신을 깨끗이 청산"할 것을 역설하고 "민주주의 교육건설에는 민주주의 자체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무릇 민주주의란 것은 국가의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르치는 데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론에만 그치는 일종의 학설도 아니다. 이는 훨씬 광범위의 의미를 갖추고 있는 일종의 생활 방식이요 사회적 질서이다"라 하였다. (중략) 그런데 민주주의 교육의 목표를 八項으로 列하여 仔細한 논란이 있고 교육제도의 민주화에 대한 교육기회의 균등, 남녀공학제, 학원의 개방, 공사립학교의 개폐, 성인교육의 보급 등 중요 문제를 취급하고 다시 교육 내용과 방식의 민주화에는 생활을 교재로 하는 생활을 위한 생활에 의한 교육을 참된 교육의 내용으로 제창하였다. 智識 偏重 敎育의 과오를 지적하고 교과서 문제의 지향을 보이고 종합적 교육법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교육의 이념, 목적, 내용, 방식의 중요 문제가 본서의 골자요 전체 50頁내에 38頁을 점하였다. 제7章은 결론으로 교육자의 사명과 책무를 말하여 "민주사회의 교육자는 산 인격의 진실한 동반자이어야 하고 슬기로운 人生 行路의 指路者"가 될 것을 권장하였다. 敵 天下의 敎育家와 民主主義 敎育 建設에 留意하는 자마다 熟讀玩味하기를 懇權한다.
  • 1947년 1월 31일 겨울방학 교원 강습에 관한 보고서

Captain Kieffer의 부탁으로 작성함. 작성자는 강습회의 과학 담당자. 성명은 미상. 교원 강습회의 실패 원인은 세가지 정도임:

   (1) 장기적이고 주도 면밀한 계획의 결여
   (2) 관심이 있고 의지가 있고 협조적인 인사들의 부족
   (3) 강습회에 제공된 자료의 부적합성[134]
  • 1947년 1월 31일 <독립신보> 공부하기 싫은 학생은 학교 그만 두어도 좋다- 러장관과 문답

@실제날짜:470130

(전략) 러취 군정장관은 30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중략) 특히 국대안 문제에 대해서는,  "학교에 다니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를 그만 두고 돈벌어라"고 군정청의 강경한 방침을 암시하였다.
  • 1947년 1월 31일 <독립신보> 학원분쟁 해결을 요망함- 사설-
1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민주 건국의 임무 遂行에 있어서 교육 문제가 차지하고 있는 의의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것이며 특히 사회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주도력과 창의를 발휘할 중견 분자의 양성은 부강한 나라의 불가결한 전제 조건으로서 대학 교육의 負荷하는 바 국가적 의의는 非常히 거대한 바가 있는 것이다. 昨秋 이래 서울의 각 대학을 혼란과 마비속에 함몰시키고 있는 분쟁 문제가 아직도 아무런 해결의 서광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사태는 건국 도상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不幸의 최대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으며, 이것은 다만 교육자나 학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실로 조선 인민의 전체의 운명에 암담한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며 이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는 것은 이제야 민족 전체의 초미의 급무가 되고 있는 것이다. 
2 
 원래 서울대학안이 성립된 경위에 함유되었던 중요한 몇 개의 계기는 명백히 현재의 분쟁을 야기할 필연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각 대학의 시설과 능력을 최대 한도로 이용하기 위한 종합 운영의 방침은 그 배후에 각 대학의 교육을 일정한 정치적 목표에 강력적으로 연계시키려는 너무도 명백한 의욕을 숨겼던 것이며 그것은 직접적으로 학문 자치의 거부를 위한 준비 형태로 나타나서 너무도 노골적으로 학생과 교수들의 심리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문교 당국이 건국 도상의 우리나라 교육을 일정한 정치적 방침에로 향도하려는 주관적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하한 의미에 있어서나 위정자의 독단을 교육 기관을 통하여서 강요하기에 필요한 교육 체제의 건설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되지 못할 것이다. 교육의 질과 形態에 대한 피교육자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교육 제도를 통한 국가 목적의 추구만이 정당한 민주주의 국가의 교육 정책의 정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서울대학안을 위시하여 문교 당국과 학원측의 분쟁에 있어서 문교 당국의 반성과 우려를 요망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민주주의는 교육의 질에서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육의 형태에 있어서도 보장되어야 할 것이며 그 형태에 있어서 비민주주의적인 교육을 통하여서 민주주의를 교육한다는 것은 일개의 意識錯亂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나 최고 학부인 대학에 있어서 학생과 교수의 자치가 고도로 보장된다는 사실과 현재의 각 대학 시설의 종합적 이용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문교 당국의 의사가 오직 각 대학 시설의 종합적 이용 이외에 없을 진댄 허심 탄회하게 학생과 교수의 학원 자치의 요망을 수락하고 학원내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여 문제의 해결에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는 것이 마땅히 국가 교육에 중책을 부담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1947년 2월

  • 1947년 2월 1일 <동아일보> 紛糾中의 淑明女中
최교장 軍栽에 회부, 학부형 궐기.
오래전부터 분규 중에 있던 시내 숙명여자중학교에서는 드디어 문제화되어 동교 최삼식교장과 동교 후원회 회장 鄭勳 양 씨가 며칠 전에 시내 종로에서 유치되었다. 그리하여 30일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3일에 공판키로 되었는데 동교 학부형회에서는 1일 하오 1시부터 학부형회를 열고 이 학교의 재건책을 강구키로 되었다.
  • 1947년 2월 2일 <독립신보> 國大案의 전면철회를- 전서울대학 이공학부 교수단 성명
대학 교육의 목적은 진리 탐구와 문화 창조를 위한 인간 교육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에는 교수의 연구 자유와 학생의 학습 자유가 절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일 국대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하여 정, 부정을 정당히 지시하지 못하고 일찍이이 볼 수 없는 폐교를 운위하여 제명 퇴학 등 처분의 위협 문구를 나열하여 대학의 생명인 학생들의 관리성에 대든 용기와 압살만을 기도하고 있으니 이는 학부 자체의 비문화성을 말하는 것이며, 대학 교육의 사멸을 말하는 것이다. 국대의 이사회인 동시에 문교 당국인 문교부의 설명을 보면 학생들의 학습 자유 요구는 불학습 자유로 취급되고 있고 교수회의 자치는 파쟁의 위험이 있으니 관료에 의한 전단이 필요하다는 등 본말이 전도되어 있고 대학 기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어 식자로 하여금 암연케 하는 바이다. 민주 건국과 민주 학원의 건설은 오직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요 관료의 독선적 전단에 의하면 권력에 아첨하는 썩어 빠진 지식인이 지배될는지 모르나 그 결과는 우리가 보고 있는 현사태이며 그 전도는 절망적인 것이다. 국대안은 學의 독립, 대학의 자치를 유린하여 대학 교육을 사멸케 하며 과학 입국에서만 활로를 구할 수 있는 새조선에 있어서 과학 교육을 억압 縮小하며 또 학문적 특징을 말살하는 것이니 우리는 국대안의 전면적 철회를 요구하며 문교 당국의 책임있는 처사 있기를 요망하여 마지 않는다.
  • 1947년 2월 2일 <독립신보> 국대안 최후심판의 날 -학생 등교 거부가 역사를 만든다
공부하기 싫으면 돈이나 벌라- 고 서울대학 맹휴 학생들에 대한 러취 군정장관의 태도는 학원의 자유를 위해서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도들의 감정를 퍽이나 유린시키고 있거니와 서울대학 학생회에서도 1일 대회를 개최하여 학생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었다. 군정 당국으로서는 내일 등교치 않는 학생은 단호 제명 처분할 모양이다. 그런데 국대공동투쟁위원회와 전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단은 1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모순에 빠진 국대안의 전면적 철회를 요구하였다. 내일 심판의 날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위해서 끝가지 싸우느냐 또는 등교함으로써 타협하느냐 교육계의 큰 문제라 할 것이다. 
국대공동투쟁위원회서 성명 
건국 도상 문화 건설 사업의 기본 과업인 교육 부문에 있어서 평화로운 학원에 혼란을 일으키고 양심적인 수많은 교수를 교단에서 추방하며 진리의 사도인 학도에 대하여 편벽된 교육을 강요한 것이 이번의 국대안임은 국대 성립 이후 6개월간의 실정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민족적 不幸에 대하여 당국이 무성의한 태도를 견지하는 한 우리에게는 오로지 학원의 민주화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만이 있음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이에 오천석 씨의 담화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불합작 교수가 불과 3, 40명이라고 하니 불합작 교수 2백여 명의 엄연한 존재를 숨김은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가. 교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의 길은 국대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있다. 
2. "사람이 만든 것이니 불완전한 점도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니 실패를 자인하면 책임을 느끼고 용감히 사임하라. 민주 정치의 특징은 책임 정치다. 
3. 3백여 명 교수의 임면권을 수삼인의 관료가 독점하는 대학 제도는 세계에 그 예가 없을 것이다.
  • 1947년 2월 3일 1947학년도 2학기 개강(대학)

1947학년도 제2학기를 개강하였다. 90%의 학생이 등교는 하였으나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35]

  • 1947년 2월 4일 <독립신보> 國大案은 과연 어찌되나 -商科대학서는 계속 맹휴 결의

@실제날짜:470203

3일 서울국립대학은 개학을 선언하였으나 상과대학을 비롯하여 다른 대학에서는 "자유없는 학원에서 무슨 공부란 말이냐" 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자유 학원 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여 전 학생 맹휴를 단행하였다. 정의를 위하여는 총칼도 두렵지 않다는 학생들이거니와 과연 승리의 깃발은 어느 머리에 휘날릴 것이냐. 이날 각 대학생들은 각각의 대학에서 학생회를 개최하여 등교하느냐, 안하느냐, 진리를 위하여 싸우느냐, 타협하느냐고 열렬한 토의를 하여 상과대학생을 비롯하여 다른 대학 학생들은 맹휴 계속을 결의한 모양이다. 
이날 각대학생들은 각각의 대학에서 학생회를 개최하여 등교하는냐 안하느냐 진리를 위하여 싸우느냐 타협하느냐고 열렬한 토의를 하여 상과대학생들을 비롯하여 다를 대학 학생들은 맹휴 계속을 결의한 모양이다. 
 ▲ 문리과대학 - 이날 아침 10시부터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다음 요구 조건 관철을 위하여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一. 학원의 자유를 유린하는 학원의 경찰 간섭을 절대 배척 
  二. 총장, 교무처장 미인 직무를 우능한 조선인에게 이양하라. 
  三. 문교부장, 차장, 고등교육국장 등 문교부 책임자는 인책 사임하라. 
  四. 국대폐쇄령, 전원 정학처분 및 장관의 명의로 발표된 일체의 모욕적 담화의 취소를 요구함. 
 ▲ 상과대학 - 동 대학에서도 이날 아침 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대회를 개최, 다음 6조건을 만장일치로 결정,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소위 국대안 발표 이후 조선 교육계의 현실은 어떠하냐? 애국적 교수의 다량적 추방,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권의 박탈, 3대학 휴교처분 등 그 주관적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를 불문에 붙일지언정 그가 초래하는 결과는 민족적인 불행이며 건국도상의 일대 불상사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의 황폐화가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려 교육의 노예화가 민족의 노예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문교 당국자는 하등의 책임도 느끼지 아니하며 일방적인 억압으로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뿐더러 어떠한 위정자는 국가 예산도 부족한데 내 말을 안들으려면 공부는 그만 두고 돈벌이나 하라고 하니 조국애와 정의감에 불타는 학도로서 이를 묵시하고 있으랴? 이것이 우리가 일시적 학문 연구의 희생을 무릅쓰고 궐기하는 이유이다. 우리 1천 2백 명의 상대 건아는 민주 건국에 이바지 하기 위하여 우리의 학원을 사수하고 다음의 6개 요구조건을 엄숙히 3천만 동포앞에 맹서하는 바이다. 
  一. 전교수의 요구를 완전히 승인하고 즉시 복직시켜라. 
  二. 친일파 학원부로-카 朴容夏학장을 절대 배척한다. 
  三. 신성한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을 절대 배격한다. 
  四. 학원의 자유를 박탈하는 미인 총장의 폭언(12월 18일부)은 즉시 철회하고 유능한 조선인으로 총장을 경질하라. 
  五. 학원 파괴의 근본인 문교 당국 책임자는 즉시 인책 사임하라. 
  六. 휴교처분 기타 일절 불법 탄압을 절대 반대한다. 
 ▲ 문리과 대학 예과 - 3일 아침 학생회를 개최, 천여 예과생은 다음 6 요구조건을 문교당국에 제출하여 맹휴를 단행하였다. 
  一. 前敎授團의 요구조건을 승인하고 이를 전적으로 복직시켜라. 
  一. 학원을 혼란케하는 문교 당국 책임자는 즉시 인책 사직하라. 
  一. 미인 총장 안스테드의 폭언을 취소하라. 
  一. 교내 행정권을 미인으로부터 조선인에게 이양하라. 
  一. 휴교령 등 불법 탄압 절대 반대 
  一. 학원에 경찰 간섭 절대 반대.
  • 1947년 2월 4일 <독립신보> 立議 分委서 國大案 審議

@실제날짜:470205

작년 9월 법령 발표 이래 학생들의 맹렬한 반대로 아직도 원만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소위 國大案에 대해서는 날이 갈수록 분규가 확대하고 있어 아연 사회 각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고 있는데 오는 5일에 열릴 입법의원 문교후생분과위원회에서는 그 첫 사업으로 국대안에 대한 심의가 있으리라 한다.
  • 1947년 2월 4일 <동아일보> 高調되는 敎育熱과 同胞愛
지방통신 : 原州 원주 金鳳洙, 元鴻黙氏等의 美擧
원주읍 우편국장이며 원주청년회장인 金鳳洙 씨는 먼저 학성국민학교 校舍 建築기금 30만 원을 내놓았는데 또 다시 김연수 씨와 협력하여 동교사 建築에 ○만 원을 기부하였다 한다.
元鴻黙 씨는 고아원을 위하여 사재 60만 원을 내놓아 원주읍에서 고아원을 경영케되었고 沈읍장의 노력으로 가난하여 학교에 가지 못하는 무산아동 1백 20명에게 매인당 면포 1마식을 분배하였다 한다.
원주기독청년회에서는 크리스마스날 전재 동포 위안 예배회를 개최하고 60여 호 전재민에게 1호당 백미 1승 금 50원의 의복 1점식을 노나주었다 한다. 동교 부인회에서는 1만 1천 원을 거두어 전재민 구제에 써달라고 군당국에 기탁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4일 <동아일보> 金堤中學 期成會에 丁氏 巨資 喜捨
지방통신 : 金堤 김제중학 기성회는 지금으로부터 십여년전에 조직되었으나 아직도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중인데 해방 후 당지 유지들은 이 실현에 일층 열의를 더하여 각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요지음 竹山面 정규술 씨는 자진하여 현금 1만 원 논 2천 5백평을 동회에 희사하여 왔다고 하는데 그의 선친 고정평삼 씨도 일찍 동회에 전재산의 반분에 해당한 논 8만 9천평을 동회에 희사하였다고 한다.
  • 1947년 2월 4일 <한성일보> 서울대학은 어떻게 되나- 개교일에 의연 암영
학생대회 열고 초지 관철 결의. 말썽 많은 국대안을 애워싸고 당국에서는 3일 드디어 개학을 선언하고 등교치 않는 학생은 제명 처분을 하겠다는 비상 조치를 내렸으나 학생들은 이에 순응할 기회를 보이지 않고 방금 교내 교외에는 저으기 험악한 공기를 보이고 있는데 문리과대학에서는 개교를 하루 앞둔 1일 250여 명 참집하에 학생 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는데 3일 상오 10시반 부터 재차 학생 대회를 열고 요구 조건 관철에 매진하기로 결의하여 그 귀추가 대단히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1. 학문의 자유를 유린하는 학원의 경찰간섭을 절대 배척 2. 총장 교무처장 미인 직무를 유능한 조선인에게 이양하라.
3. 문교부장 차장 고등교육장 등 문교부 책임자는 인책 사임하라.
4. 사대 폐쇄령, 전원 정학 처분 및 장관의 명의로 발표된 일절 모욕적 담화의 취소를 요구함.
예과에서도 결의
서울대학 문리과대학 예과에서는 지난 3일 본교에서 전학생 1천여 명이 강당에 모여 학생 대회를 열고 신중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는 동시에 요구 관철까지 맹휴 단행하기로 가결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5일 <독립신보> 工科大學 盟休

@실제날짜:470203

상과, 법과, 문리과대학 등 각대학에서는 3일 맹휴를 결의하여 등교를 거절하였는데 공과대학 1천 5백 학생은 3일 신공덕리 동교에서 학생 대회를 개최한 결과 다른 학교와 발을 맞추어 좌기 7개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맹휴를 결의하였다. 
 1. 국대안을 철폐하라. 
 2. 학원을 망쳐논 문교 당국자 인책 사임하라. 
 3. 경찰은 학원에 간섭치 말라. 
 4. 3교 휴교 처분 등 기타 탄압적 문교 정책 절대 배격한다. 
 5. 구 교수단의 요구를 승인함으로써 전적 복직시켜라. 
 6. 공과계 全 敎舍를 완전 확보하라. 
 7. 김동일 학장은 인책사임하라.
  • 1947년 2월 5일 <독립신보> 맹휴는 지당 - 학통이 성명
각 대학 맹휴에 대하여 서울학생통일촉성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국대 각대학에서는 "자유없는 학원에서 무슨 공부란 말이냐"하고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였다. 당국은 국대안의 근본적 정책이 없이 위협 탄압 일방으로 강제 해결하려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는 맹휴 이외에 취할 수 있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취하여 왔으나 당국의 근본 태도가 이러한 현 단계에 있어서는 맹휴는 지당한 것이다.
  • 1947년 2월 5일 <독립신보> 文理大學 豫科부장 사임

@실제날짜:470203

문리과대학 예과부장 蔡官錫교수와 학생과장 柳應浩교수는 당국의 학생 탄압 정책은 학원문제 해결의 방도가 아님을 지적하고 3일에 열린 학생대회에서 사임을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5일 <독립신보> 法大도 맹휴

@실제날짜:470203

법과대학에서는 다음 6조항을 제시하고 3일 맹휴를 단행하였다. 
 1. 구 교수의 요구조건을 전면적으로 승인하여 전원 무조건 복직시켜라. 
 2. 학원의 혼란을 초래한 문교 당국자는 즉시 인책 사임하라. 
 3. 국대 행정 일체를 즉시 조선인에게 이전하라. 
 4. 학원에의 경찰 간섭을 배격한다. 
 5. 당국은 학생 생활의 보장을 즉시 議究 실시하라. 
 6. 학교 諸 시설을 완비하고 도서관을 즉시 확충시켜라.
  • 1947년 2월 5일 <한성일보> 교수 학생진 일치- 공과대학도 맹휴
국립대학안 반대로 작일 개학 예정이던 시내 각 대학에서는 몇 학교를 제외하고 맹휴를 단행하여 동 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데 공과대학 교수 일동은 지난 3일 전원이 사직을 결의 민주 학원 재건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이와 아울러 학생대회에서도 7조항의 요구 조건을 들어 단행을 진정하는 동시에 맹휴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2월 5일 <한성일보> 渡美하는 3학도- 사비 유학생의 효시
鵬程萬里. 군정청 외무처 문화과 알선으로 전영창 안용준 김한업 3군이 지난 3일 인천항을 떠나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올랐는데 해방 이후 사비유학생으로 도미하는 것은 전기 3군이 처음으로 금후 동 사비 유학생이 점차 증가될 것으로 기대된다.
  • 1947년 2월 5일 <한성일보> 문리대건설학생회결성- 정치 행동은 배격
파괴냐 건설이냐? 의 당면한 난관에 학생들로서는 끝까지 순수한 태도로서 대처하자는 서울대학내의 문리대건설회에서는 개교 당일인 3일 학생회를 동교 강당에서 소집하고 학원의 정치적 책동을 배격하는 동시 일제히 등교하여 학원으로서의 정당한 투쟁을 하자는 결의로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 전체 학생의 맹서 분기를 촉구한 바 있었다.
◇성명서◇ - 학원을 某某 정치 동향의 ○○정책의 희생으로 제공하기 싫다는 주 이유로 현재 계속하고 있는 맹휴를 절대 배격하며 그 맹휴를 지도하고 있는 현 학생회를 절대 배격하여 오등은 자에 문리대 건설학생회를 건설하였다.
문리대건설학생회는 작년 12월 18일부 군정장관의 전학생에 대한 휴교 정학처분과 그외 민족적 체면을 손상시킬 언사 일절을 일 주일 내로 철회 할 것을 촉구하며 일반에게 천명한다.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京福, 徽文中學 동정 맹휴에 돌입

@실제날짜:470204

경복중학에서는 4일 오후 전교생이 집합하여 학생 대회를 개최 동정 맹휴를 결의  5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휘문중학에서는 5일 오전 9시부터 동교에서 대회를 개최하고 9백여 명의 전교생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결의문과 국대안 반대와 교직원의 생활 보장을 요구하고 동일부터 맹휴에 돌입하였다. 우리 휘문 학도들은 국대兄들과 같이 조선 학원의 자유를 위하여 보조를 같이 하여 자유 학원 건설의 전사가 되기를 맹세하며 다음 요구 조건 관철을 위하여 결사 투쟁하기를 결의한다. 
 1. 국대안 절대반대 
 2. 문교부 책임자 인책사임하라. 
 3. 학원의 경찰 간섭 결사 반대 
 4. 교직원의 생활을 보장하고 학생에게 쌀을 特配하라.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警察은 學園에서 손떼라.

@실제날짜:470205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은 5일 장택상 씨에게라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교육의 민주화는 전 조선 민족의 지상 명령이며 그 첫 과업인 민주 학원의 건설은 무엇보다 긴급하며 학원의 민주화는 교수 학생의 자치권과 연구 언론 출판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함으로 우리 경찰이 진정한 민주 경찰이라면 이러한 의미하에 학원 간섭을 즉시 중지하여야 하며 특히 학생의 총의를 받은 위원에 대한 책임 추궁 등은 착오라 할 것이다.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師大의 맹휴조건

@실제날짜:470204

사범대학도 맹휴에 돌입- 경성사범대학 학생회에서는 3일 학생 대회를 소집코저 하였으나 학장 장리욱 씨의 간섭으로 부득이 연기하여 4일 오전 11시부터 동교에서 1천여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 대회를 개최하여 국대안의 모순을 지적하는 동시에 자유스러운 학원의 건설을 절규 국대안 철회, 학원의 자치권 등 다음 5개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하고 맹휴로 돌입하였다. 
 1. 국대안을 철회하라. 
 2.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진정한 학생 자치권을 인정하라. 
 3. 제명 및 휴교 처분을 취소하고 미인 총장 및 문교부 책임자는 인책 사임하라. 
 4. 진정한 민주 교육자 및 구 교수를 전원 복직시키고 학원 모리배를 몰아내라. 
 5. 사대는 單獨히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라.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商大 學父兄 학생을 지지

@실제날짜:470203

상대 학부형은 지난 3일 오후 2시부터 동 4시반까지 상대 강당에서 許柱 씨 사회로 학부형회의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학생의 요구를 전적으로 지지하나 학생과 어깨를 겨누어 실제 행동에 들어가는 것은 당분간 보류한다.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醫科大學도 맹휴
국대 의과대학 제일부 학생회에서는 다음 5개 조항의 요구 조건을 내거는 동시에 요구 관철을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성명하였다. 
 1. 국대안을 철폐하라. 
 2. 남조선 전교육계에서 미인 즉시 철퇴하라. 
 3. 경찰의 학원 개입을 배격하라. 
 4. 국대에 관한 문교부내 책임자 사임하라. 
 5. 학원의 자유를 달라.
  • 1947년 2월 6일 <독립신보> 學園과 文化의 자유 -민전서 문교 당국에 맹성 촉구

@실제날짜:470205

민주주의 교육 문화 정책을 즉시 실시하라고 민전 선전부에서는 5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소위 국대안이 발표된 이래 오늘날까지 남조선에 있어서의 교육계 혼란과 문화인의 활동에 대한 탄압 정책을 볼 때 우리는 군정 당국의 너무나 민주주의와는 상반되는 교육 문화 정책에 다시 한번 맹성을 촉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민족 문화 건설에 있어서 학원의 자유와 문화인의 창의적 활동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인데 학원의 자유로운 활동을 유린하는 정책은 나치스나 군국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유없는 학원은 반동의 온상이 될 것이며 사상없는 문화 예술은 공허를 의미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교육계와 민주 문화 건설을 위한 학생, 교수, 문화 예술인들의 진지한 투쟁을 지지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舊 醫學部 맹휴

@실제날짜:470206

의과대학 구 의학부(그전 경성대학 의과) 학생 1백 수십 명이 지난 오일 정오 학교에 모여 협의한 결과 6일 동 의학부 학생투쟁위원 명의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 그전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 일동은 국대 문제에 대하여 그 동안 신중한 태도로서 건설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여 오던 바 있었으나 조국의 교육계를 우려하는 학생의 순진한 열정은 유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학생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는 동시에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투쟁하기를 맹서하였다. 이 결의에 의한 요구 조건이 당국에 수락되지 않으면 7일 정오를 기하여 맹휴로 들어간다. 
 1. 국대안 즉시 철폐 
 1. 문교 책임자의 인책 사임 
 1.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國大 問題에 대한 要望 - 사설
1 
 문교 당국에서 성안하여 그 실시를 강행하려던 국대안이 관계 각 대학의 교수 및 학생의 다대한 반대에 조우하여 건국 도상 오랜 시일을 휴교 상태에 경과하고 지난 2월 3일의 개교 통지가 문교 당국에 의하여 발표되었으나 등교한 각 대학의 성원이 일치하여 국대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문교 당국의 기정 방침하에서는 취학 및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여 사태는 드디어 전체적인 맹휴로 발전하게 되고 만 것은 세인의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吾人은 누차 문교 당국자의 반성과 선처를 요망한 바 있었으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각 대학 맹휴의 영향은 시내의 각 중등학교에까지도 파급되었으며 동정적 의미의 맹휴를 결의하는 중등교 등이 나타나게 된 것은 특히 사태의 중대화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한 세론과 일반의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사태의 진전이 비상히 험악화된 작금의 형세에 대하여서 이것을 타개하고 적적한 조치를 취할 책임이 우선 문교 당국자에 있음은 贊言을 不要로 하는 바이나 오인이  관찰하는 바에 의하면 문교 당국은 오로지 원안을 유지하는 이외에 하등 건설적인 해결안을 제시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향에로 의를 用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음은 심히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국대안의 주요 목표가 당국자의 언명하는 바와 같이 각 대학 시설의 종합적 이용 이외에 타의가 없을진대 원안이 응당 전폭적으로 정정되어야 할 것은 명백한 일이며 이 점은 학생과 교수가 요구하기 전에 교육의 민주화를 담당하는 문교 당국자가 자진 솔선하여 단행하여야 할 일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원안에 반영될 종합 이용을 위한 기구는 각 대학의 교육 내용을 정치의 기구에 의하여 지배하려는 의도를 너무도 노골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학도와 교수들의 반대도 오로지 이면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문교 당국의 원안 고집에 반하여 최근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교육자 공동대책위원회 '군정대표' '학생대표'의 참여한 특별위원회를 요망한 것은 한 개의 건설적인 의견으로서 주목할 사실이라 할 것이며 구례의 통념에 사로잡혀서 문교 당국이 위신을 운위하는 시대 착오의 감정을 일척한다면 당국자의 입장에서도 이 안은 충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서 문제의 해결은 관료주의에 일임하지 않고 당국자와 민간 교육자와 학생 삼위일체의 협조적인 토의에서 구할 수 있다면 이는 확실히 한 편의 민주적 ○○양식의 성공으로서 커다란 의의와 성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오인이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맹휴가 중등학교에까지도 파급하기 시작하였다는 작금의 심각한 사태에 대하여 당국자가 대국적인 고려에서 문제의 중대성을 파악하고 허심 탄회하게 해결을 위한 모든 방법을 탐구하고 성의있게 학생 교수 및 민간 각층의 협력을 흡수하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國大案 싫으면 그만둬라 -조선인 총장도 인선 중- 러-장관 談

@실제날짜:470206

2월 3일의 개학을 계기로 국대 문제는 다시 분규가 재연되어 국대의 관계 각 대학은 물론 중학에 이르기까지 맹휴 선풍이 일어나 요원의 불꽃과 같이 그칠 바를 모르고 있어 사회 각계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군정장관 러취소장은 6일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국대안을 반대하는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하여 돈벌이를 하라고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생들이 국가에서 제정한 교육 제도를 원치않고 스트라익을 한다면 학교에 오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학생이 안오면 안올수록 국가의 경비는 덜들게 되니 교육받기에 관심을 갖지 않은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하는게 좋을 것이다. 더욱 部處長 회의에 명령하여 방금 그곳에서 조선인 이사와 조선인 총장을 인선 중에 있는데 좀더 구체화하게 되면 수주일내로 이에 대한 정식 발표가 있을 것이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國大案에 해결책 없는가- 국대안으로 조선 교육계에 암영

@실제날짜:470206

교수와 핵생의 지치권요구, 구 교수의 복직, 문교 당국 책임자의 인책 사직 등을 요구조건으로 지난 3일의 제 2학기 개학을 계기로 재연한 국대생의 맹휴 사건은 날이 갈수록 점차로 악화 일로를 걷고 있어 기보한 바와 같이 문리과, 예과, 상과, 법과, 공과, 사범, 醫과의 각 대학은 물론 이에 호응하여 藥大, 한양공대를 비롯하여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동정 맹휴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군정장관 러취소장은 6일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정부가 제정한 교육 제도에 불만이 있는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나 하라고 원안을 고집하고 있으며 한편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군정 당국의 교육 정책의 시정을 강경히 요구하고 있어 쌍방의 원만한 타협은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어 건국도상의 교육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고 있는데 앞으로의 귀추는 매우 주목되는 바 있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德壽商業 맹휴

@실제날짜:470205

덕수상업학교 6백 명 학생은 5일 학생회를 열고 학생의 자치권을 달라, 교무주임 南基邦 씨를 배척한다, 우리의 敎舍를 달라는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결의하고 맹휴로 들어갔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民靑도 國大案 철회를 요구

@실제날짜:470206

조선민청에서는 5일 국대안반대공동투쟁위원회에 대하여 격려문을 보낸 바 있었는데 작 6일에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학생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학원의 민주화를 억압하며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국대안'이 강제적으로 실시된 지 이미 반년 이상이 경과되었다. 국대안이 실시된 후에 민주주의적인 교수와 학생의 맹휴는 끊일줄 몰라 학원은 황폐해가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문교 당국이 국대안 실시를 강행하고 이에 반대하여 궐기한 교수 학생의 맹휴 투쟁은 실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우리 민청은 이 투쟁이 민주 학원과 민족 문화 건설을 위하여 가장 정당한 민주 투쟁임으로 그 성공을 빌며 협력과 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을 성명하며 국대안 철회와 문교 당국 책임자의 인책 사직을 요구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藥大도 맹휴

@실제날짜:470204

藥學대학 학생회에서는 4일 (1)양심적인 이사회를 구성하라 (2) 강력한 교수진을 구성하라 (3)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을 절대 반대한다. (4) 학원의 생활을 보장하라 (5) 학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대안을 절대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맹휴를 계속하기로 되었다.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예술대학 맹휴

@실제날짜:470206

예술대학 학생들은 6일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성명한 다음 맹휴로 들어갔다. 
 1. 학구의 자유 
 1. 출석의 자유 
 1. 미인 총장 배척 
 1. 경찰의 간섭 배격 
 1. 3대학 휴학처분 취소
  • 1947년 2월 7일 <독립신보> 電氣工業도 맹휴

@실제날짜:470206

조선전기공업중학교의 교직원(尹甫鉉, 金又用, 金容서, 崔昌守, 李權浩, 韓吉弘, 李貞和, 金尙玉, 李聖茂, 李炳千, 張鉉두) 일동은 6일 학부형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동교의 부교장 崔佑東 씨가 자기 세력을 학교에 부식하고 다수한 교원을 무고 파면한 것을 비롯하여 기부금의 부정 처분 등으로 학원이 영리의 대상이 되는 것 등을 저지하는 동시에 학원의 신성을 위하여 교직원 일동이 궐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동교 학생측에서도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6일부터 맹휴로 들어갔다. 
 1. 부교장 최씨배척 
 2. 무고 파면당한 2교원의 복직 
 3. 무고 정퇴 학생 즉시 복교 
 4.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절대 반대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경기여중 교원들이 교장 배척

@실제날짜:470205

경기여자중학교 직원들은 5일 憂敎職員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교장 박은혜 씨의 편파적 교육 행정과 학교 운영의 전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京東中學 맹휴

@실제날짜:470207

경동중학(구 旭丘중학)에서는 7일 전교생 1300명이 모인 가운데 학생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이유로 즉시 맹휴에 들어갈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고 한다. 
 1. 학생의 자치권을 달라. 
 1. 교원 생활을 보장하고 학생에게 식량을 특배하라. 
 1. 神話的 교육을 철폐하고 과학적 교육을 실시하라. 
 1. 국대안 결사 반대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光新商業 맹휴

@실제날짜:470206

광신상업학교 학생 600명은 지난 6일 학생회를 열고 학원내의 경찰 간섭을 반대한다. 현교장 이용한 씨의 사임을 요구한다는 등 6개 항목에 미치는 요구 조건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맹휴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국대안엔 모순 없다- 공대생과 유부장과의 문답

@실제날짜:470206

6일 공과대학투쟁위원회에서는 문교부장 유억겸 씨를 방문하고 국대 문제에 대하여 大略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한다. 
 (문) 국대의 현상을 아는가 
 (답) 국대안에 대하여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현재 국대는 잘 운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국대안은 철회 못하겠다. 
 (문) 맹휴에 관한 견해여하 
 (답) 맹휴는 학생의 오해에 관한 것이지 국대에 모순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문) 국대안 자체가 좋지 못하여 반대하는데 이에 대한 대책은 
 (답) 국대가 싫거든 나가라. 
 (문) 구교수는 복직시키지 않겠는가 
 (답) 들어와서 가르치고 싶으면 들어오면 될 것이다.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연희대학 맹휴- 信敎 强要 배척과 학원 자유 요구

@실제날짜:470205

국대안에 항거하는 국대 학생들의 맹휴 투쟁의 폭발은 사회 각계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를 계기로 5일 연희대학에서는 각부 학생회를 열고 信敎를 강요하는 학교당국의 태도에 반기를 들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는 한편 즉시 맹휴로 들어갈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는데 동교는 과거부터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던 만큼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1. 학생자치회 인정 
 2. 종교 과목을 감소하고 선택 과목으로 하여 전문 과목을 증가하라. 
 3. 학원의 정치 간섭 반대 
 4. 납부금 감액과 기부금 강요 반대
  • 1947년 2월 8일 <독립신보> 파급되는 맹휴 선풍- 대학 13교와 중학 11교, 18,183명의 학생
지난 3일의 제 2학기 개학을 계기로 다시 문제화한 국대 문제는 당국의 원안 고집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학생들 측에서는 그들의 최후 수단인 맹휴로써 이에 항거하고 있는데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6일 정오까지에 맹휴를 단행한 학교수는 국대산하의 9대학은 물론 학원의 민주화를 구호로 동정 맹휴를 한 학교까지 합하면 대학이 13교, 중학이 11교에 달하고 있다. 더욱 이에 참가한 학생의 총인원수는 18,183명이라는 방대한 숫자는 나타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풍은 점점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데 학교별로 본 참가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 
   교명        맹휴일      참가인원 
   상과대학    3일         1200 
   법과대학    동          700 
   문리대학    동          750 
   동 예과     동          1200 
   공과대학    동          1500 
   사범대학    4일         1200 
   藥學대학    동          421 
   藥大학부    5일         210 
   의대전문부  동          275 
   예술대학    동          61 
   한양공대    동          700 
   의대예과     6일         66 
   연희대학    동          900 
   경기상업    3일         1100 
   경복중학    4일         1100 
   휘문중학    5일         950 
   중동중학    동          950 
   덕수상업    동          600 
   한양공업    동          800 
   광신상업    6일         600 
   경기공업    동          700 
   사범중학    동          450 
   조선전기공업  동        450 
   경동중학    7일         1300 
   총계 24개교             18183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경제전문 교수단이 성명

@실제날짜:470208

국대 문제에 대하여 경제전문 교수단에서는 8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고 광범한 학생 동맹 휴학이 벌어짐에 따라 7개월간 시비가 그치지 않는 국대안은 드디어 전 민족의 눈앞에 그 정체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도 문교 당국자는 책임을 질려는 성의 커녕 그 범한 민족적 과오를 은폐하니 통탄할 일이다. 이는 민주주의 미국 시민의 진의가 아닌 것은 물론이려니와 문교 당국자에게 진실로 해결의 성의가 있다면 변명과 미봉책에 시종함 보다는 겸손하고 솔직하게 국대안을 철회하고 민족에게 사죄함이 남은 유일의 길일 것이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高麗大學도 盟休

@실제날짜:470208

시내 고려대학에서는 8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곧 맹휴로 들어갔다. 
학생운동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본교 학생회는 천여 명 학생의 총의로써 내외에 성명한다. 자유를 잃은 곳의 희망의 길이 없고 탄압이 지배하는 곳에 힘찬 발전은 없다. 교수도 학생도 학부형도 아니 전 인민이 반대하는 국대안이 누구의 손으로 강행되려하는가. 이러한 현상은 국대뿐 아니라 우리 학교에서도 학원 자치의 기본 조건인 학생회를 거부하고 학원의 자유와 문화 발전을 억압하고 있다. 이같은 조국 교육계의 위기를 당하여 정의와 진리의 사도인 우리는 다음의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맹휴를 단행할 것을 성명한다. 
1. 국대안의 즉시 철폐 
2. 학생의 자치권 인정 
3. 玄총장의 포고령 2조(학원의 자유를 구속하는)의 취소 
4. 경찰의 간섭 반대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鑛專敎授團 성명
소위 국대안은 조선 산업의 실태를 무시한 교육 정책임을 지적하여 누차 성명한 바 있거니와 작금의 외신도 조선 경제상태를 평하여 '원료와 기술 부족으로 생산은 정체되고 수입은 초과되어 경제 위기에 당면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실로 현하 긴급한 임무는 기술 교육의 飛躍적 확충과 국내 자원 개발에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이 사명의 일부를 담당한 우리 광전은 국대안으로 말미암아 이미 희생되고 말았으니 이 방면의 교육은 정체되었다. 그러나 문교 당국은 조금도 반성함이 없이 頑迷한 독선적 조치만으로 일관하여 학원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유린하고 객관적으로 학원의 자멸을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우리는 국대안 철회를 재강조하는 동시에 당국자가 회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등교 않으면 斷乎 再募集 -유억겸 문교부장의 언명

@실제날짜:470208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8일 기자단과 회견하고 맹휴 선풍에 휩쓸린 국대 문제에 대하여 수습책은 없느냐는 기자단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루에 4, 5차씩 학생들이 찾아와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요구는 대개가 동일하였다. 즉 국대안을 철폐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국대안이 식민지 교육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일부에서는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각 학교의 맹휴에 대해서는 각 대학의 학장이 처리할 것이며 학생이 오지 않는 경우에는 재모집을 해서라도 학교는 지속하겠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盟休收拾은 학장의 책임

@실제날짜:470207

8일 상오 10시 반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 이경호(문리) 김용덕(상대) 이경방(공대) 박창규(사대) 임홍규(사대) 이정삼 (공대) 김석주(문리예과) 등 7군은 문교부로 유억겸 부장을 방문하고 국대 분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국대 문제에 대한 당국의 수습책은 여하 
 답- 맹휴를 중지하고 당국에서 제정한 규칙에 따라 공부해주기 바란다. 
 문- 지난 6개월 동안 우리는 맹휴를 하지 않고 당국의 선처를 기다렸으나 조금도 성의있는 태도를 엿볼 수 없어 일어난 것이 아닌가? 
 답- 시설과 교수 문제에 대하여 당국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국대안을 철폐할 수는 없다. 10년 후면 군들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니 내말만 듣고 공부하기 바란다. 
 문- 부장의 말씀은 전재 독재적이며 히틀러를 연상케합니다. 
 답- 나는 히틀러 같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문- 부장이 연전에 계실 때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황국 신민이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부장 말만 듣고 10년을 기다리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답- 그것은 나나 군들이나 마찬가지다. 군들도 창씨를 하고 병정으로 나가지 않았는가? 
 문- 그러면 우리들에게 창씨를 강요하고 학병을 강요한 것은 누구인가? 
 답- 나는 그런 일이 없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日帝敎育의 殘滓를- 姜舜의원 立議에서 지적
국대안은 학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국립대학은 물론 각 사립 대학, 중등 학교까지도 국대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맹휴 중인데 제16차 立議가 본회의 석상에서 姜舜의원 외 4의원은 맹휴 문제 해결에 대하여 긴급 동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 문교분과위원회에서 토의하기로 결정, 맹휴 해결에 한 팔을 걷게 되었는데 강의원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고 현 교육 제도가 악독한 일제의 교육실상을 철폐 못하였다고 설파하고 민주주의 교수의 추방 자유스러운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이 오늘날 학생의 맹휴에 이른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주목된다. 
국대안 철회와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모든 대학, 중학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해방된 조선의 학생이 일제의 쇠사슬을 끊고 대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맹휴를 하였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도대체 해방 후 남조선의 교육 정책을 보면 과거 혹독한 일제 교육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고 팟쇼적인 교욱 정책이 금일의 학생 맹휴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든다면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은 심히 불유쾌하다 아니할 수 없다. 또 하나는 학생을 제명 처분하고 많은 민주주의 교수를 추방한 것 등 이러한 민주주의 교육 발전에 모순된 문교 정책이 오늘날 교육계의 중대 사태를 일으킨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것은 완전히 진정한 민주주의 학원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모든 배반되는 교육 정책이요 한탄할 일이다. 우리는 학생들의 요구 정신이 무엇이며 현 문교 정책을 검토하여 맹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齒農科大 盟休

@실제날짜:470206

수원농과대학에서는 지난 6일 학생대회(학생총수 450명 중 327명출석)를 열고 곧 맹휴로 들어갔는데 동교 투쟁위원회 명의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형적인 국대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 진리는 구체화함에 있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는 자기의 환경을 타파하고 용감히 투쟁할 수 있는 우리 농대생은 침묵 속에서 학생 투쟁 전선에 참가함을 고한다. 우리는 민족의 전위대로서 진정한 민주 학원을 찾으며 민족 문화를 지킬 순정으로 문교 책임자의 책임을 추궁하여 성의있는 해결을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걸고 맹휴로 들어갔다. 
 1. 국대안의 철폐 
 2. 교수와 학생의 자치권 인정 
 3. 문교 책임자의 인책 사임 
 4. 국대안으로 인하여 추방된 교수와 학생의 무조건 복직 
 5.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치과대 학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6일부터 맹휴로 들어갔다. 
 1. 교수와 학생의 자치권을 달라. 
 2. 미국인 총장과 교무처장은 유능한 조선인으로 바꾸라. 
 3. 문교 당국과 학무 책임자는 인책 사임하라. 
 4.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을 반대한다.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八 中學校 맹휴- 普成, 東星, 師中, 漢中 등

@실제날짜:470207

다음의 각 중학교 생도들은 각기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7일부터 맹휴로 들어갔다. 
普成중학교 
 1. 학교법정과 유명무실한 생도위원회 등 기관을 철폐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달라. 
 2. 학생의 자유로운 개성 발전을 도모하라. 
 3. 교직원의 생활을 보장하라. 
 4. 국대안을 철폐하라. 
 5.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東星 중학 
 1. 관료 교육 반대 
 2. 교직원의 학교내 정치 선전 배격 
 3.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大東상업학교 
 1. 국대안 철폐 
 2. 학생의 자치권 인정 
 3.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4. 후원회비(1천 원) 철폐 
 5. 학생의 생활 보장 
사범대학부속중학교 
 1. 국대안 철회 
 2. 국대생의 요구 조건을 승인하고 휴교 처분을 취소 
 3. 문교 당국자의 인책 사임 
 4. 본교의 독자성을 살리고 설비를 완비할 것. 
 5. 팟쇼 교원 배척 
 6. 교원과 학생의 생활 보장 
한성중학교 
 1. 위생 시설 완비 
 2. 학교 당국에서 경찰에 대하여 생도에 관한 것을 보고하지 말것. 
 3. 교원은 교수를 충분히 하여 임무를 다할 것 
 4.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중지 
 5. 대학 휴교 처분 철회 
 6. 현 교육 제도 반대
  • 1947년 2월 9일 <독립신보> 擴大一路의 학원 맹휴- 고려대학 등의 사대도 참가, 총참가인원은 2만 3천여
국대 문제를 도화선으로 요원의 불꽃과 같이 일어난 학원의 맹휴 선풍은 작 보한 바와 같이 6일 현재로 13대학 11중학에 총 참가인원 18,183명이라는 방대한 수자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어 7일에는 그 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고려대학(1,130명), 치과대학, 동명고녀, 朝工야간부 등 3대학 7중학의 5천여 학생이 궐기 참가, 총계 15대학 18중학에 2만 3천여 학도가 참가를 보게 되었다. 더욱 사태는 앞으로도 상당히 확대될 것으로 보이며 광주학생사건 이래 일찍이 보지 못하던 이번 학생의 투쟁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 그 귀추는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
  • 1947년 2월 9일 <동아일보> 京畿道 成人敎育者 會議

@실제날짜:470222

경기도에서는 오는 22일 성인교육자회를 소집하고 문교부 지시에 따라 오늘 조선이 당면한 생활 곤란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이기주의적 생활을 시정하며 이와 아울러 민주주의적 도의감을 깊이 갖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2월 9일 <동아일보> 警務, 文敎 兩部長과 李總長 盟休問題 討議

@실제날짜:470210

검찰총장 李仁 씨는 10일 警務部長 趙炳玉, 文敎部長 兪億兼 양 씨를 초청하여 "학생 맹휴파급"문제와 그 대책을 협의하기로 되었다 한다.
   文敎 警務 檢察 首腦 國大案 連席會議
국대안 문제를 두고 학생 맹휴 사건은 중대한 문제로 진전되고 있는데 李仁 검찰총장은 문교부장, 경무부장을 초청하여 10일 검찰청 회의실에서 이 문제를 상의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2월 9일 <동아일보> 高大는 授業
고려대학교 학생과장은 8일 동 대학 학생의 맹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항간에 본교 학생 맹휴 斷行 운운의 선전이 전파되고 있으나 본교는 여전히 다수 학생 등교하여 수업을 계속 중이오니 이점 양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 1947년 2월 9일 <동아일보> 全國 學生聯盟서 盟休 反對 聲明 發表

@실제날짜:470208

전국학생연맹 맹휴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맹휴를 반대하는 요지의 경고문을 8일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9일 <한성일보> 커지는 학원 맹휴의 선풍- 지방에까지 파급, 사태는 점차 엄중
국립서울대학안 문제로 발단한 학원의 맹휴 사건은 점차 광범위로 확대되어 시내 각 전문대학은 물론 각 중학에까지 파급되고 있으며 지방 각 학교에서 까지 동요의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처럼 광범위의 학원을 중심한 사건은 광주 학생 사건 이후의 처음 일로서 금후 사태의 진전은 자못 심상치 않은 바가 있는데 8일 아침까지 맹휴로 들어간 각 중학은 다음과 같다.
   ▲조공(야간부)200명 ▲동명고여600명 ▲영성중학570명
   ▲대동상업660 ▲동성중학600명 ▲배재중학900명
  • 1947년 2월 10일 Edwin. L. Miller 학생운동에 관한 특별 보고서 제출

의과대학 예과 고문이었던 밀러가 문교부 고문에게 국대안 반대 운동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함. 2월 25일에 재차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함. 개요 국대안 반대운동은 교육적 이유이에외 다른 이유가 개입된 것 같다.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 운동을 중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등교를 원하는 학생들을 즉각적으로 등록시키고 수업을 재개하도록 한다. 등록을 하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제해야 한다.[136]

  • 1947년 2월 10일 문교부 업무 주간 보고(47년 2월 3일 - 47년 2월 8일)

의과대학 교육, 서울대학교 문제, 사범대학, 의과대학 예과교육, 보건 및 체육 교육, 교과서, 간호 교육, 중등교육, 영어교육 등에 관한 보고서.[137]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國大敎育對策會서 잔류 교수에게 성명

@실제날짜:470210

날로 확대되는 국대 문제에 대하여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10일 '국대잔류 교수 여러분에게'라는 大略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드디어 국대는 총파탄의 국면에 이르렀다. 자로부터 내포한 갖가지 모순과 불합리성으로 미루어 식자간에는 누구에게나 예상되든 바의 필연적인 사태이기는 하나 현실은 너무도 중대하며 잠시라도 방관할 수 없을 파국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교육은 새 시대 사람에게 문화 가치를 전달 보급하여 그 가치를 활용 확대하고 또 재생산할 수 있는 사회인을 양성하는 의미에서 사회 발전의 추진력이 되는 것이니 교육은 철두 철미 학도를 위하는 것이 돼야만 한다. 민주 학원 건설을 부르짖는 젊은 조선 학도에 대하여 무조건 억압 내지 일종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 교육자의 궁극 의지로는 민주 교육을 함에 있으니 사심과 영달을 버리고 오직 교육자의 양심에서 자기 희생적으로 노력함으로써만 우리의 교육 임무가 隨行될 것이며 민주 건국에 이바지하는 길도 될 것이다. 교육자적 동지 감정에서 우리들은 굳게 마주잡고 민주 조선 건설을 위하여 제휴 매진할 것을 성심으로 고대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국대안 철폐하라 - 社勞黨에서 성명

@실제날짜:470210

국대안에 대하여 사로당에서는 10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배움에 굶주린 학생은 드디어 구교수의 복직, 국대안 철폐 등 요구 조건을 들고 맹휴에 들어가 그 파문은 각 중학에까지 파급하여 조선 교육계 공전의 대불상사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당국자로서는 당연히 시책의 근본적 재검토와 책임 통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당국은 국대안을 즉시 철폐하고 문교 책임자 퇴진에 성의있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대책위원회 구성-서울시 民戰에서

@실제날짜:470207

서울시 민전에서는 지난 7일 제3회 常委員會에서 특히 국대안에 대하여 토의한 바 있었는데 동석상에서 국대안에 대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선 議長團은 즉시 군정 당국과 당해 문교 당국에 엄중 항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동국대학

@실제날짜:470210

동국대학 학생대회에서는 국대안이 철회될 때까지 맹휴를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는데 10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대안 철회없이는 민주 학원 건설을 단념치 않으면 안될 것을 우리는 명심하였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자중하였음은 오직 진리 탐구의 사도로서 당국의 반성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비상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냉혹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학생대회의 1천여 명은 다음 4개 요구 조건을 관철키 위하여 맹휴로 들어간 것이다. 
 1. 우리는 국대안 반대 투쟁에 운명을 같이 한다. 
 2. 문교 책임자의 인책 사직 
 3.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 
 4. 학술 연구 자율 보장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汶山農業學校도 맹휴

@실제날짜:470210

문산지국전화 문산농업학교에서는 10일 오전 10시부터 동교에서 임시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국대안 반대, 경찰 간섭 반대 등의 조건을 내걸고 6백여 명의 학생은 동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중앙중학 등 6中校 맹휴

@실제날짜:470207

경기공립사범학교 
 동교에서는 다음 요구 조건을 내걸고 7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1. 학교 당국에 대한 요구 
   ㅇ 金輿洙 교유 배척 
   ㅇ 자치회 요구 
   ㅇ 일체학생 퇴학 절대 반대 
  2. 문교 당국에 대한 요구 
   ㅇ 교장 金容河 배척 
   ㅇ 교직원에 대한 생활 보장 즉시 실시하라 
   ㅇ 국대안 반대, 9대학 맹휴 절대 지지 
  3. 경찰당국에 대한 요구 
   ㅇ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절대 반대 
중앙중학교 
 지난 8일 다음 요구 조건을 제시코 맹휴로 들어갔다. 
  1. 국대안 반대 
  2. 학생회 인정 
  3. 교직원 생활 보장 
  4. 경찰 간섭 반대 
영창중학 
 현 남조선의 문교 정책은 학원을 황폐케 하는 것이라고 지난 8일 전교생이 학생회를 연 결과 맹휴를 결의하였다. 
경기중학 
 8일 천사백여 명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회를 개최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맹휴에 들어갔다. 
  1. 11명 퇴학 정학 처분 철회 
  2. 李泳圭선생 복직 요구, 노예 교육 원흉 朴昌願 金文煥 양선생 사퇴 촉구 
  3. 자치권 인정 
상공중학 
 8백 학생은 지난 8일부터 국대안 반대를 부르짖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선린상업 
 吳교장 배척과 파면 선생과 제명된 학생의 복교를 외치고 8일부터 맹휴 전열에 참가하였다.
  • 1947년 2월 11일 <독립신보> 學校街는 맹휴街? 각 중학교와 지방에 파급, 대학·중등교등 40교의 3만여 명

@실제날짜:470208

국대안 문제를 계기로 서울의 각 대학, 중학의 맹휴는 요원의 불같이 그 불덩이는 드디어 지방 학교에까지 파급하고 있으며 아직 맹휴에 들어가지 않은 학교도 뒤를 따를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비록 일부에는 맹휴를 반대하고 있는 학생도 있기는 하나 8일 현재의 맹휴교수는 대학이 16교 중학이 24교 합계 40교에 달하고 그 수효는 실로 3만여 명을 훨씬 넘고 있다. 그런데 학생측에서는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는 설사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어도 단연 투쟁을 계속 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으며 일방 문교 당국 역시 학생측 요구와 주장에 대해서 그다지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어 앞으로의 귀추는 과연 어떠한 결말을 자져오게 될는지 크게 주목되고 있다. 더욱 8일 현재의 맹휴교수는 다음과 같다. 
대학 ( 16교) 
 상대 법대 공대 사대 치대 농대 예술대 문리대 同豫科 의대(舊京醫專系) 연대(일부) 고대 동국대 한양공대 藥大 
중학 (24교) 
 경복중 휘문 중동 보성 배재 중앙 동성 경동중 한성중 영창 畿中(일부) 畿商 덕수상 광신상 선린 대동 師中 경기사범 농공 朝工 同(夜間部) 한양공 동명高女 상공중
  • 1947년 2월 11일 <동아일보> 校長會議열고 對策을 講究
시내 대학을 비롯하여 중등교 학생 동맹 휴학 사건에 대하여 서울시 李德鳳학무국장은 금후 대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등교 맹휴 사건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과로서는 학교 운영 문제는 학교 당국에 맡기고 이번 맹휴는 학교장과 학부모들이 협력하여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시로서는 교장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겠다.
  • 1947년 2월 11일 <동아일보> 國大建設學生會 組織 - 盟休中止코 合法 運動을 展開
최근 시내 각 대학과 중학교의 동맹 휴학은 각 방면으로 던지는 파급이 큼에 비추어 맹휴에 들어간 국립서울대학교내 각 대학생 대표 수십 명이 9일 시내 한청회당에 모이어 토의한 결과 건설학생회를 조직하고 각 대학과 연락하여 맹휴를 중지하고 합법적으로 요구 조건의 관철을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 1947년 2월 11일 <동아일보> 登校 妨害 學生을 首都警察廳에서 嚴重 團束
수도 경찰청에서는 시내 각 학교 맹휴 사건에 대하여 학원에 경찰의 불간섭이라는 태도로 방관하고 있었는데 요즈음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려는 것을 노상에서 방해 구타하는 일부 학생이 있음으로 이같은 행동은 경찰도 묵과할 수 없다 하여 취체할 방침을 세우고 활동을 개시키로 되었다.
  • 1947년 2월 12일 <독립신보> 각 학교에 무장 경관 배치

@실제날짜:470211

국대안 반대를 계기로 서울안 중등 이상 남여 각 학교에 선풍같이 파급된 동맹 휴학에 대하여 11일 경무부와 대검찰청 공동 발표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엄중 단속하겠다고 발표하였거니와 이에 따라 수도경찰청에서도 동일 약 7백 명의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각 학교에 10명 내외를 배치하고 앞으로 맹휴 선동자와 이를 선동하는 벽보 활동에 대하여 철저히 검거 단속하겠다 하는데 본격적으로 경찰이 간섭하게 된 각 학교 맹휴의 귀추는 주목된다.
  • 1947년 2월 12일 <독립신보> 국대안대책협의회- 35정당 단체에 조직
국대안 반대를 계기로 한 각 대학, 중학의 동맹 휴교는 날로 확대외어 맹휴 40교, 학생수는 실로 수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더 만연될 기세를 보이고 있어 마침내 전 민족적인 중대 문제화하고 있는데 이를 해결코저 조선교육자협회, 남조선노동당 등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등 35정당 단체로부터 국대안 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이 문제 해결을 취하여 적극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 협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대안은 관료적 통제의 의도로서 출발, 이사회의 독단적인 운영을 기도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교수회의 자치권은 무시되고 학생회의 자유가 말살되어 총독 정치 시대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 분별키 어려울 만큼 되었다. 그 결과는 민주 교원은 추방을 당하고 강사없는 학원이 되었으며 반민주적인 권위주의자들의 亂舞場化하여 마침내 학생없는 폐허의 학원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본분이다. 그러나 옳은 공부를 제대로 못하게 될 때 그저 덮어놓고 노예처럼 맹종하라고만 강요함은 너무나 전제 폭군적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간단하다. 국대안을 즉시 철회하고 문교 책임자는 사직하고 모리교육자를 배제하고 학원의 자유 자치를 인정하고 그리하여 구교수의 복직, 전학생의 복교를 도모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군정 당국에 맹성을 촉하는 동시에 이 문제의 정당한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고자 한다.
  • 1947년 2월 12일 <독립신보> 시급 해결에 노력 -安민정장관 담

@실제날짜:470210

국대공동투쟁위원 12명은 10일 안 민정장관과 국대안 문제에 대하여 면담하였다 하는데 안장관은 시급히 해결에 노력할 것을 約束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12일 <독립신보> 학생 맹휴는 의연 계속

@실제날짜:470210

경기고녀 
 6일 동교에서 학생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는 한편 당국의 책임을 추궁하기로하였다 한다. 
  1. 학생 기숙사를 점령한 선생들은 양심적으로 물러날 것. 
  1. 파면당한 20여 명의 양심적 교원을 전부 복직시킬 것. 
  1. 강제적으로 징수한 慈모會費의 간 곳을 공개할 것. 
  1. 학교 공금으로 연말에 40여 처에 선물을 보낸 책임을 追究한다. 
  이상의 과오를 범한 박은혜교장을 불신임한다. 
성균관대학
 10일 오후 학생총회를 열고 국대안 반대의 맹휴로 들어갔는데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찬란한 전통과 혁혁한 역사를 자랑하며 정의의 사도, 평화의 추진자로서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우리 성균관대학 학도는 작금 동맹 휴학의 선풍이 폭풍같이 휩쓸리는 학원의 현상에 대한 원인을 규명한 결과 국대안의 모순을 지적함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이안이 민족 유구의 정도를 차단하고 문화 발전을 악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에 이같은 조국 교육계의 위기에 당면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양심에서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동맹 휴학에 돌입할 것을 성명함. 
  1. 국대안 절대 반대 
  1. 교수진 강화 
경성농업학교 
 동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10일부터 맹휴로 들어갔다. 
  1. 맹휴 사건으로 인하여 처분당한 5명의 무조건 즉시 복교 
  1. 교원 생도의 생활보장 
  1. 경찰의 간섭 반대. 
  1. 국대안 철폐. 
인천상업학교 
 인천공립상업학교 7백여 명 학생들은 (1) 국대안 절대 반대 (2) 교직원 대우 개선 (3)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 (4) 학칙을 발표할 것 등 4개 조항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맹휴. 
경성공업학교 
 천6백의 학생은 국대안 반대를 부르짖고 동일 맹휴에 돌입하였다. 
輔仁상업학교 
 10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朝陽중학교 
 6백여 학생은 수업료 미납자 퇴학 처분 반대 등 4조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10일 맹휴를 단행. 
第三고등여학교 
 국대안 반대, 신선한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등의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10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배화여학교 
 교원 복직 등을 요구하고 560여 명의 학생은 맹휴를 결의하였다. 
崇文중학교 
 10일 맹휴를 단행하였다. 
조선電氣공업교 
 10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2월 12일 <독립신보> 학원 맹휴에 단호 처벌-검찰총장, 경무부장 발표

@실제날짜:470210

국대 문제를 싸돌고 지난 2일에 다시 폭발된 학원의 맹휴 선풍은 드디어 그 불꽃이 경향 각지 40여 대·중학에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사태는 점점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문교부장 유억겸 씨와 경무부장 조병옥 씨, 대검찰총장 이인 씨는 10일 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한 결과 당국으로서의 최고 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정 조, 이 양 씨의 공동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독립 완성에 매진하고 있다. 그 완성에는 무엇보다도 전 국민의 건설 노력이 긴요하다. 우리의 3천만 민중의 장래 운명을 좌우할 학도의 임무 즉 학문의 개발 및 탐구가 일층 더 긴요한 요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조선 일대에 소위 동맹 휴학이라는 불상사가 발생되는 증상이 보이는 것은 학도들의 장래와 조선 장래를 위하여 일대 통한 사이다. 문교 당국의 근본 방침으로서는 그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학원내의 규율을 파괴시키는 동맹 휴학이라는 것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므로 경무당국에서는 학원의 동맹 휴학을 선동하는 단체 혹은 개인들의 선동 지령을 받어 동맹 휴학을 책모하는 주동자 및 선량한 학도의 취학을 방해하는 자들은 엄중 처단할 방침이고 또 검찰당국으로서도 이에 대하여 가장 준엄한 태도로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도들은 건국도상에 있어서 학구에 전심 전력함에 최대 사명을 자각하고 학원으로 돌아가서 건설적 애국 학도가되기를 바라는 바이고 학부형 제위도 상기 취지를 심찰하여 만일의 유감이 없도록 그 子女들에 대한 최선의 지도를 부탁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12일 <한성일보> 동맹 휴학에 대한 경무·검찰 당국 공동 성명- 학원으로 돌아가란

@실제날짜:470211

학원에서 학원으로 급속도로 만연되어 가고 있는 학도 맹휴화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문교부장 유억겸, 경무부장 조병옥, 검찰총장 이인 3씨는 10일 구수 협의한 다음 경무·검찰 양 당국에서는 문교 당국의 방침에 의준하여 작 11일 다음과 같은 경무부장 검찰총장 공동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대들의 사명은 오직 학문에 전심.
우리는 독립 완성에 매진하고 있다. 그 완성에는 무엇보다도 전 국민의 건설적 노력이 긴요하다. 우리의 3천만 민중의 장래 운명을 좌우할 학도의 임무는 학문의 계발과 탐구가 한층 더 긴요한 요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조선 일대에 소위 동맹 휴학이라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증상이 보이는 것은 학도들의 장래와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일대 통탄할만한 일이다. 문교 당국의 근본 방침으로서는 그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학원내의 규율을 파괴시키는 동맹 휴학이라는 것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므로 경무 당국에서는 학원의 동맹 휴학을 선동하는 단체 혹은 개인의 선동 지령을 받아 동맹 휴학을 책모하는 주동자와 선량한 학도의 취학을 방해하는 자들은 엄중 처단할 방침이며 또 검찰 당국으로서  이에 대하여 가장 준엄한 태도로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도들은 건국 도상에 있어서 학구에 전심 전력함이 최대 사명임을 자각하고 학원으로 돌아가서 건설적 애국 학도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고 학부형 제위도 위의 취지를 심찰하여 만일의 유감이 없도록 그 자녀들에게  최선의 지도를 부탁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13일 <독립신보> 국대안 철회를 - 사대 교수회서 성명서 발표

@실제날짜:470211

국대 문제로 맹휴 중인 사대에서는 연일 교수회서 그 대책을 협의하였는데 지난 11일의 긴급 교수회에 출석한 교수 25씨는 국대안의 철회를 목표로 결속 매진하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치명적 결함을 가진 국대법령이 발표되었을 당초부터 그 내용의 불합리와 실제적이 아닌 등 여러 가지 점을 지적하여 職을 도할 결의로 그 강행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당국으로부터 국대법안의 여러 가지 결함을 운영 중에 차츰 고쳐나갈 수 있다는 변명도 있어 이를 신뢰하고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면서 협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시일이 갈수록 국대 운영은 과연 실제상 그 결함을 연속 폭로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이상 더 문교부 및 국대 당국에 협력함은 전연 무용일 뿐이다. 이에 우리는 현 문교 및 국대 당국과의 전면적 불협력을 표명하는 동시에 국대 문제의 궁극적 해결로 향하여 끝까지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
  • 1947년 2월 13일 <독립신보> 국립대학과 교육의 위기(상) - 申南澈
'누구를 위한 벅차는 청춘이냐'의 애국 애족의 지성을 기울여 이 강산의 명일을 응시하며 연구 설계하는 학도들이 '제네스트'를 決行한 것도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순진무구의 불타는 청년들이 과연 모략에 빠졌으며 마술에 걸려서 자기의 학술 수련을 포기하고 정치 행동에 나온 것이라고 타마만 하여야 할 것인가? 倭帝의 노예화 우민 교육으로부터 해방된 때 그들은 천지의 광영을 그득히 안고 신조선 건설에 위대한 책무를 遂行하려고 결의하였다. 식어가는 정열을 다시 불붙게 하고 강탈된 지성을 다시 일구어 찾으며 억압당한 의도를 한껏 펴보려고 그들은 학원으로 학원으로 물밀듯이 들이 밀렸다. 배우자! 토론하자! 읽자 또 읽자! 하고 덤비는 그들의 애틋하고 골돌한 그 성스러운 자태! 그 우렁찬 영웅적 대열! 그들이 어찌 이땅의 보배가 아니며 광영이 아니냐. 이 명일의 꽃이 자기의 찬란한 결실을 期約하면서 雨順風調의 天候만을 바라고 빌었다. 그러나 원일이냐!  폭풍이 불었다. 천문대의 예고도 없는 파괴적인 폭풍이 불어왔다. 가냘픈 이 우리의  꽃들은 온갖 힘을 다하여 結實萬落花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 악풍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갔다. 이제는 死냐 生이냐의 기로에서 최후의 항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금번의 학도들의 제네스트의 규모는 40여교 3만여인이라고 하니 아마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발견하기 어려운 운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이 이같이 자기의 학업을 중단하고 이같은 항쟁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는가. 우리는 냉정히 이곳의 고등교육 부면이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가를 고찰하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소위 국립서울대학교라는 것은 세 가지 관점에서 그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으니 첫째는 교육 제도상의 견지에서 거대한 생산 문명의 기반위에서만 가능한 종합대학 제도를 이곳의 당면한 실정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이식하였다는 점이다. 임시정부도 수립되기 전에 우리의 정식 정부의 자주적 교육 정책까지도 앞질러 制約하는 월권까지도 범하여 가면서(국대법령에 의하면 국립서울대학교는 영구히 존재한다고 규정하였다.) 강행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민족적 견지에서도 首肯할 수가 없다. 6,3,3,4의 제도를 구미의 數國에서는 채용할 때도 그러하였거니와 종전 후 일본도 이 제도를 채용하였으나 개혁은 중학부터 시작하였고 고등교육은 중학교육이 다 개편된 뒤에 착수하기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傳聞하였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등교육의 개편을 극단의 비밀주의로서 강압적으로 관철하려고 하는 군림 전제적 행정조치는 민주 교육을 운위하는 당국자의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속)
  • 1947년 2월 13일 <독립신보> 학생의 요구를 참작 -안 민정장관 기자단과 初회견

@실제날짜:470212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12일 상오 10시 취임 후 첫 회견을 하고 예산 문제를 비롯하여 군정이 당면한 제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신을 피력하였다. 
(중략) 
 ▲국대 문제 = 대학 기구의 개혁을 계기로 일어난 학생측의 맹휴 사태는 대단히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인은 문교 당국과 학생간의 견해의 소격에 있다고 보는데 될 수 있는 한 학생측의 요구를 참작하여 단시일 내에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
  • 1947년 2월 13일 <독립신보> 학원맹휴 一束

@실제날짜:470210

▲ 수원농업학교는 10일 맹휴에 들어 갔다 한다. 
▲ 백남공업중학교 생도는 학원내의 모든 불순성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11일 발표하였다. 
▲ 동덕고등여학교 학생회에서는 11일 대회석상에서 국대안 반대 등 3 요구 조건을 내걸고 학생은 맹휴에 들어갔다. 
▲ 朝鮮政治學館학생 일부는 11일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2월 13일 <동아일보> 警察의 學園干涉은 治安確保만이 目的- 李仁檢察總長 談

@실제날짜:470212

拷問한 警官은 嚴重히 處罰
이인 검찰총장은 12일 총장실에서 법조 기자단을 회견하고 기자단의 "학원문제"에 대한 심판관측의 총장에의 항의 문제를 비롯하여 경찰의 고문, 대구경찰서 사건, 맹휴 사건 등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問 일전 총장이 우리 기자단에 대하여 불필요한 눈물이란 담화를 발표한 데 대하여 심판관측이 이에 항의하였다는데
總長 항의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항의서는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눈물도 필요이상 흘리면 안된다는 말이 무엇이 잘못된 말인가. 또 나는 하등 재판소에 대하여 간섭이나 견재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問 형사피의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은 전혀 없다고 하였는데 작금 각지에서 고문에 인한 사상자의 발생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總長 자세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런 사실이 있다면 단호 공정한 처리를 하겠다.
問 美人의 간섭문제로 분규를 일으키고 총사직하였다는 대구검찰청 사건은 어떻게 되었는가.
總長 유감으로 생각한다. 방금 사법부장과 그 대책을 강구 중이다. 그런데 직원 총사직이란 거짓말이다. 지금도 전직원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問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은 절대 배격한다고 총장이 언명하였는데 이번 맹휴 사건의 경찰 간섭은 도로히 악영향을 줄 우려가 없을까?
總長 우려가 조금도 없다. 또 간섭할 의사도 없고 그런 사실도 없다. 다만 치안을 문란케하는 데 간섭할 따름이다.
  • 1947년 2월 13일 <동아일보> 盟休眞相 暴露 大會 大學建設學生會서

@실제날짜:470212

서울대학 건설학생회에서는 경향 각 학교의 맹휴 진상을 조사하여 이의 진상을 폭로하는 대회를 12일 하오 1시 시내 종로예배당에서 열기로 되었다.
  • 1947년 2월 14일 <독립신보> 국대안 철폐를 부르짖고- 민주학원건설공위회 결성

@실제날짜:470213

국대안 철회를 요구하고 맹휴를 단행한 7천여 국대 학생이 한 덩치가 되어 이번 국대학생의 통일전선인 '서울민주학원건설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 민주학원건설위원회는 국대안 타도와 비민주적 문교 행정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발을 하는 것인데 동회에서는 모든 민주 학생은 통일된 민주학원건설위원회의 깃발 아래 모이라고 애국 학도들에 참가를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2월 14일 <독립신보> 국립대학과 교육의 위기(下) -신남철
둘째는 교육훈련적 견지에서 볼때 학도의 자치 생활이 해방 교육의 根本 義에 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연 인정하지 않고 학도의 자주성,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계발 추진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일제의 교육 정책과 무엇이 다름이 있는가. 학생의 자치적인 집회 결사에 대한 대학교 당국의 규정을 보라. 자유스러운 연구와 집회가 제한 구속되었다고 보아도 아마 변명할 여지 없을 것이다. 무엇때문에 학생 단체를 통제하는 위원회를 두어가지고 規約을 승인하여야 비로소 유효하다는 규정을 만드느냐. 그 지긋 지긋한 일제의 제도와 무엇이 다르냐? 교수회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고로 勢不得 학생 단체를 대학교의 학생처란 것이 통제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의 일체의 학업과 자치 훈련은 교육적 견지에서나 행정的 견지에서나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교수회의 지도에 일임함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셋째 교육 행정的 견지에서 보아서 그 불합리성, 반민주성이 날이 갈수록 폭로되어가고 있다. 엄동을 당하여도 장작 한 坪 구하기에 허비되는 시간이 그 얼마였으며 신임 교원의 봉급 지불이 2, 3개월이나 지연된 것은 末之末端의 적은 일이다. 인사, 교무, 회계, 용도, 영선 등을 통하여 사무직원 등 들의 사무 능률 부진과 그 불평 불만을 듣는가 못듣는가 알고저 한다. 경비 節約이 국대안을 법령화하는 중요한 一 이유였으나 참으로 합리적인 운영이 되어가고 있는가 반문하고 싶다. 이 제한된 지면에서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는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국립대학교 제도는 그 철회와 근본적인 제검토가 요청되는 것이며 이렇게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하게끔 무상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고 따라서 학생들이 이래서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간곡하게도 수없는 진정과 건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請而不聞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학생을 고압적으로 나무래기만 하는 당사자의 태도는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바이다. 따라서 그 행정上의 책임은 당연히 문교 당국의 수뇌부가 져야 하며 이것이 또한 민주 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는 명분상의 진퇴도 도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당연히 밝혀져야 하는 근거다. 환언하면 문교 수뇌부의 인책 사직이야말로 금번의 이 학생 제네스트를 해결하는 유일의 계기라고 사유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책임자가 이 문제를 백지로 환원시켜 허심탄회하게 재검토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미증유의 교육계 혼란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일까? 大方은 냉정히 성찰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끝으로 한미디 첨가하고자 아는 것은 우리가 금차 맹휴의 해결책으로 국대안의 철회 내지  근본적 재검토와 문교 수뇌부의 인책과 교수회 학생회의 자치권 확립이라는 요구를 지지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 교육의 건설 원리상 학문적으로 확증되는 논거에 의하여 주장하는 것이요 결코 선입견이나 편당적 저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주장이 우리의 해방 후 미국의 諸 행정的 의도가 참되게 조선 인민을 위한 유종의 미로서 결실하기를 기원하는 순정에서 나옴임을 또한 부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태를 전체 관련적인 과학적 인식에서 파악하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금차의 학생 맹휴를 정치적 모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하여 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도 근시안자의 단견이라는 비방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좌익 우익 학생이 전원 일치하여 궐기함이 사태를 무엇으로서 설명하려는가? 당국자의 선처를 요망하는 믿음이 어찌 필자 하나뿐이랴.
  • 1947년 2월 14일 <독립신보> 맹휴 문제의 열쇠는 오직 학생요구 승인뿐
국대의 문제를 계기로 한 학생 맹휴가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맹휴 학생수는 사만여에 달하고 종식을 모르고 있다. 일방 이에 대한 당국의 조치는 낙관적인 모양이고 학생들의 요구 조건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각계의 여론은 학생 맹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오직 학생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승인하는데 있다고 보고 있다.
  • 1947년 2월 14일 <독립신보> 학원 맹휴 一束
▲ 인천중학교 
 인천지국전화 중앙 각 학교의 맹휴는 인천에까지 파급되어 10일에는 인천상업, 11일에는 인천공립중학과 인천공업, 인천동산중학, 12일에는 인천고여, 해성중학이 각각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맹휴를 단행하였다. 
  1. 국대안 반대 
  2. 학원의 자유와 학생의 자치권을 즉시 승인하라. 
  3. 교원 생활 보장하라. 
  4. 문교부 책임자는 사직하라. 
  5. 학원 경찰 간섭 반대. 
▲ 성남, 성동, 대산의 3교도 10일부터  맹휴에 돌입하였다. 
▲ 덕수상업 주간부 학생도 야간부 학생과 발을 맞추어 10일부터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2월 14일 <동아일보> 盟休眞相 暴露大會서 絶叫 - 破壞的 盟休 粉碎하라-

@실제날짜:470212

맹휴는 학원 적화의 "38선"이며 "파괴적 맹휴를 분쇄하라"는 스로간을 내세우고 이번 경향 각 학교 맹휴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리어 학생 자신으로 하여금 현명한 태도를 촉구하는 국립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 주최 맹휴진상폭로대회는 13일 하오 1시부터 시내 중앙예배당에서 경향 각 학교 학생 다수 참석하여 성대히 擧行되었다.
식은 김창훈 군의 사회로 시작되어 애국가 봉창, 묵상, 문리대 박용만 군의 개회사에 이어 법대 윤금중 양의 국립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 성명서 낭독이 있은 다음 상과대 최성 군으로부터 각 대학 맹휴 실정보고가 있은 다음 강연으로 들어가 문리대 백운길 군과 법대 김종일 군의 열열한 진상의 폭로 강연으로 청중은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끝으로 결의문 통과가 있은 다음 하오 4시경 대회는 성대히 마치었다.
  • 1947년 2월 14일 <동아일보> 李泰圭博士 文理科大學長의 溫諭 - 學生諸君에 告함-
신성한 학원으로 돌아오라. 조국의 기대에 보답은 바로 이 때다.
친애하는 학생 제군!
우리의 임무는 중하고 갈 길은 또한 멀다 일찌기 민주주의적 훈련을 받지 못한 우리 겨레는 정치인이나 산업인이나 조국 재건의 진통가운데 극도로 혼란 상태에 있으니만치 정의감에 불타고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 제군을 흥분시키는 것이 비일비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제하고 우리의 重任 수행에 매진하는 데는 더욱 굳센 용기와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친애하는 학생 제군!
금반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고저 우리 교수 일동은 심사 숙의하여 여러 방책을 강구하는데 진력하였다. 1월말일경 경찰 간섭과 美人총장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사태를 수습할 용의가 있다는 학생 대표의 요청을 받자 2월 1일 문교 당국을 방문하여 교섭한 결과 미인 총장 문제는 행정권 이양이 진행 중에 있으니만치 시일 문제에  불과할 뿐아니라 조선인 총장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당국으로서는 처음부터의 신념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으며 또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은 절대로 이것을 방지하겠다는 快答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2월 3일 학생대회에서 군정장관의 명령 철회의 건이 迫加 결의되자 2월 4일에는 주임교수 일동의 이름으로 군정장관의 진의 표명을 요청한 바 있었고 이에 대하여 문교부장의 명의로 該 명령의 진의가 “조선국민을 侮辱할 의사가 추호도 없고 조선을 위하여 학생들은 속히 학교로 돌아가 수학에 정진하라”는 점에 있다는 회답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경과로 보아 該 명령은 사실상 해소되었다는 것으로 간과할 수 있을 것이다.
由此觀之하면 학생 제군의 요구 조건은 거의 성공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니 이 이상 맹휴를 계속한다는 것은 제군의 學業 進步를 遲延시키는 것으로 그것은 결코 제군에 대한 조국의 기대에 보답하는 소의가 아닐 것이다.
친애하는 학생 제군!
현하 우리 조선은 국제적으로 또 국내적으로 비상한 난관에 처하고 있다. 조국의 민주주의적 재건의 중임을 ○負한 학생 제군은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고 비분하고 강계하는 정열을 심각하고도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저 아르키메데스적 각오와 用意가 필요할 뿐아니라 이것은 또한 조국이 제군에게 實切히 요구하는 바일 것이다. 제군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진지한 사색과 연구와 웅대한 구상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시간을 다투기 때문에 제군이 맹휴한다는 것은 이 임무를 등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슬프하는 바이다.
제군의 정당한 요구는 신성한 학원을 抛棄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애하는 학생 제군!
우리 교수 일동은 우리의 성의와 微衷을 다하였다. 이제는 친애하는 제군이 하루속히 학원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단기 4280년 2월 11일 
                      	 국립서울대학 문리과대학
                      	 학장 이태규
  • 1947년 2월 14일 <동아일보> 土地 20萬坪을 敎育 事業에 - 朴喜在女史의 美擧
시내 輔仁 상업학교 안에 설치된 국민대학관은 지난 8일에 신익희 씨를 학장으로 개교하였는데 동 대학의 탄생을 祝賀함과 동시에 앞날 활발한 발전을 보도록하기 위하여 고 朴基鴻 씨 부인 조희재여사와 그 장남 박위부 씨는 공동명의로 천안에 있는 그의 소유토지 20만 평을 동학관에 기부하여 교육사업에 큰 힘을 던져주었다.
  • 1947년 2월 14일 <한성일보> 사대 교수단 총사직
국대안 반대로 맹휴를 계속하고 있는 사범대학에서는 연일 교수회의를 열고 그 대책을 강구 중이던 바 지난 11일 동 교수단 일동은 "당국에서는 국대안의 실제상 결함을 연속적으로 폭로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독선적 고압적 태도로 임하므로 우리는 현 정책에 전면적으로 불협력을 성명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원이 사직원을 제출하였다.
  • 1947년 2월 14일 <한성일보> 종로국민학교 복구기성회 활약
배움의 집을 잃은 5천 학동을 돕자. 장래 국가를 두 어깨에 지고 이끌고 나아갈 소국민의 교육은 점점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이즈음 작년 11월 27일 서울 중앙에 있어 5천아동을 연성시키던 종로공립국민학교는 화재로 교사를 잃어버리고 근방 각 학교에 분산하여 부자연한 교육을하고 있어 각계 각층에서는 벌써부터 이의 재건을 기하고 노력 중이던 바 지난 12월 15일에 부흥촉성기성회를 조직하고 제반 준비를 하여오던 바 지난 12일 오후 1시부터 동 기성회 사무실에 동회장 신익희 씨를 비롯하여 각계 지명의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하여 그 운영 발회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일반의 절대한 원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독립신보> 국대안에 서광? - 문교 수뇌부와 학장 연석회의

@실제날짜:470214

14일 상오 9시 문교부에서는 유억겸 부장, 오천석 차장을 비롯하여 문교부 수뇌측과 '안스테트' 총장을 위시한 국대산하의 각 대학 학장이 한자리에 모여 학원 맹휴에 관한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입법의원으로부터의 종용도 있었고 하여 맹휴 해결책으로 문교부에서는 종래에 취하여 오던 원안 고집주의에 다소의 수정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독립신보> 서울대학 美人 교수 6명 소환

@실제날짜:470213

학생 맹휴는 요원의 불길이 퍼지고 있는데 서울국립대학의 미인 교수 6명은 13일 문교 당국에서 소환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독립신보> 쓸쓸한 대학 교수진- 학생도 없지만 선생님도 없오
학생들은 파면 사임한 교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 그리고 교수가 없어 공부를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 현 국립대학의 교수진은 어떠하며 국대안 실시 이후의 교수의 동태는 어떠한가. 국대안반대투쟁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국대안 실시 직후의 국대 교수는 429명이었는데 국대안이 실시되면서 311명의 교수가 이안을 반대하고 즉시 사임하고 이어서 191명의 교수가 채용되어 결국 309명이 사임 혹은 불합작을 선언하여 남은 교수는 불과 백 명에 지나지 않는 쓸쓸한 교수진이라 한다. 이것을 비율로 보면 현 교수진으로 국대안 실시전의 교수진에 비하면 2할 4부라 하며 상대, 사대, 농대의 3 교는 전연 교수가 없는 상태라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독립신보> 학원 맹휴 一束

@실제날짜:470209

맹휴하는 학원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데 女醫大 예과생을 비롯한 각 학교 학생이 학원의 자유를 찾으며 궐기하였다. 
 ▲ 여의대 예과생들은 지난 12일 학생 연구의 자유를 달라는 등 4 요구 조건을 내걸고 궐기하였다. 
 ▲ 일부의 경기여중학생은 기숙사를 학생에게 양도하고 선생들은 물러가라는 등 6조건을 제시하고 맹휴 중이라 한다. 
 ▲ 선린상업 야간부 학생들도 지난 9일을 기하여 주간생들과 보조를 같이 하여 궐기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동아일보> 國大案 解決에 曙光- 文敎部서 問題解決코저 討議

@실제날짜:470214

국립대학교에서는 국대안 반대를 애워싸고 동맹 휴학을 斷行하여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던 중 14일은 상오부터 문교부에서는 동 대학 학장과 문교부 수뇌부가 모여 여러 모로 이 문제 해결에 대한 토의를 하였다. 그 회동한 결과는 아직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어느 모로 해결에 서광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1947년 2월 15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京畿師範 父兄會

@실제날짜:470216

경기사범학교에서는 오는 16일 오전 10시 반 학부형회를 연다는데 학부형은 자제를 동반하고 학교 강당으로 모이기를 바란다고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國大 美人 講師 辭任
국립대학교에서는 6명의 미국인 강사가 13일 사임하였다고 14일 러-취근정장관은 발표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들이 등교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 1947년 2월 15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藝大, 法大等도 登校
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의 활동으로 예대, 법대를 위시하여 경동, 동성, 보성, 중동 등 각 학교는 맹휴를 중지하고 총 등교키로 되었다.
  • 1947년 2월 15일 <한성일보> 서울대학 강사 美人 6명 전원 辭免
이번 국립서울대학 맹휴로 인하여 동 대학 미국인 강사 6명은 전부 사면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16일 <독립신보> 국대 맹휴에 최후 통첩 -학원 학문의 자유는 최초부터 인정- 문교당국 방침

@실제날짜:470214

학생 본분 지켜서 질서적 요구하라. 문교부에서는 국대 문제를 계기로 하는 학원의 맹휴 선풍에 대처하고저 14일 '안스텟트'총장을 비롯하여 각 대학장을 초청 문교부 수뇌측과의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그 결과 학생측의 요구 조건에 대하여 그 처리 방법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고 한다. 
 1. 국립서울대학교에 조선인 총장을 두자는 것은 최초부터의 근본 방침이므로 군정에 관한 행정權 이양이 실현됨을 따라 군정청의 최고 방침으로 불원 조선인 총장을 임명하게 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학교 이사회의 이사도 또한 전부 조선인을 임명할 계획으로 인선 문제에 대하여 신중 고려 중이다. 
 2. 평화한 학원내에 경찰관이 발동됨과 같은 것은 절대로 있지 못할 바이다. 만약 학원내일지라도 불법 행위가 발생될 때에는 경찰 자체의 직권을 行使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며 국법에 의한 당연한 처사일 것이므로 이것을 제지할 하등의 근거가 없겠지만 학원이 평화리에 운영되는 한 경찰은 간섭할 이유도 없을 것이요 또 간섭하지도 못하게 하겠다. 
 3. 학원의 자유를 주창함이 학문 연구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최초부터 인정하여 오는 바로 하등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 어떠한 교수 어떠한 학생임을 물론하고 학문을 자유로이 연구함에 대하여는 그 신분에 아무 위해가 절대로 미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4. 기타 모든 요구 조건에 있어서는 학생이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면서 정당한 이유를 갖추어 가지고 순서를 밟아서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성의를 다하여 검토하며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아니할 충분한 용의를 가지고 있다.
  • 1947년 2월 16일 <독립신보> 국대 이사회 개조 - 9명의 민간인을 새로 임명

@실제날짜:470215

공보부 15일 발표에 의하면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 이사 및 총장 선출의 신 방법 제정에 관하여 13일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군정청 부처장회의에 서간을 보내었다는데 이에 의하면 조·미 문교부장, 차장, 고등교육국장 등 6명으로 구성된 현 이사회를 재편하여 총장 1명과 9명의 민간인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바 9명의 이사는 그 자격으로 정당 관계와 관직에 몸을 두고 있지 않는 순수한 민간인에 한하게 되었으며 선출 방법은 부처장회의의 추천에 의하여 군정장관이 임명하게 되었는데 이에는 반드시 입법의원의 비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 러취장관의 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교부장 유억겸 씨의 건의에 의하여 나는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 이사 및 총장 선출 방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나의 의견으로서도 선출법을 속히 개정하여야 된다고 생각되어 1946년 8월 22일 부령 제102호를 수정할 것이다. 현재 나의 안으로서는 여러분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동의할 때는 조선인 10명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를 임명하는데 그중 9명은 남조선인과도입법의원의 비준을 얻어 부처장이 추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사회에 대하여는 서울국립대학교를 소관하는 문교부의 감독하에 직권과 책임이 부여되며 또 이사회의 일원인 총장의 선출권도 부여되는데 그 선출도 최후적으로 입법의원의 비준을 요하게 된다. 그런고로 가급적 속히 이사회 이사 9명을 나에게 추천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재차 여러분의 선처를 요망한다.
  • 1947년 2월 16일 <독립신보> 중학생은 배우며 싸우라- 국대, 中等共同鬪委서 성명

@실제날짜:470215

국대안 문제로 경향의 각 중등 학교에까지 맹휴가 파급되어 남조선의 전 학원이 국대안 반대 투쟁에 총궐기하고 있던 중 중등 학교만은 각기 맹휴를 중지하고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면서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싸워 나가기로 되었는데 15일 다음과 같이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중학생에게 보내는 멧시지를 발표하였고 동시에 중등학교공동투쟁위원회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의 멧세지 = 민주 학원의 건설과 국대안 철회를 부르짖고 일어선 우리들의 대열에 과감하게 참가하여 씩씩하게 싸워준 40교 3만여 중학생 제군에게 우리는 눈물겨운 감사를 드린다. 금번  학생 투쟁에 제군들이 용감히 궐기한 것은 실로 정당하고 당당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투쟁은 결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요 건설을 위함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실천에서 증명되었다. 제군들의 용감한 투쟁은 제군들의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한 우리들의 투쟁을 승리시키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우리들은 제군들의 씩씩한 투쟁에 무한한 감격과 감사를 드리면서 남은 국대안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우리들에게 일임하고 제군들은 그리워하던 학원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사명인 학업을 계속하면서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싸워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중등학교공동투쟁위원회 성명서 = 우리들은 이번 투쟁에 있어서 용감한 투쟁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그것만이 우리가 바라는 민주 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투쟁에서 학원을 좀먹는 무리들을 축출했고 학원의 자치권을 획득하고야 말았고 국대안 문제도 뿌리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투쟁의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본분인 학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완전한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한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愛校의 精神으로" 文敎部 次長 吳天錫氏 談

@실제날짜:470215

조선인으로 조직될 이사회 구성 등 동맹 휴학 처리에 대하여 문교부 차장 오천석 씨는 15일 다음과 같은 말로써 국립대학교안에 오해가 없기를 요청하였다.
이사회 조직은 원칙적으로 조선인으로 구성하게 된 것이다. 법령 百二호에 의하면 임시 조치로 미국인과 조선인의 문교부장, 차장, 고문, 교육국장 도합 6인이 이사회를 조직하고 추후에 정식으로 11명의 이사회를 조직하도록 되었었다.
이 11명 중 문교부장과 총장은 例兼위원이라는 명목으로 이사회에 들고 나머지 9명 또한 문교부에서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하면 여러 가지 오해도 있고 독선적이라는 폐단도 있고 하여 이번 군정청장관 부탁으로 정식 정부가 서기 전이나 정식 이사회를 10명으로 구성하게 하여 그 선발 방법을 고치었다. 이는 부처장회의에서 추천하여 입법의원의 비준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이사회가 관료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은 할 리도 없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이사는 순민간인으로서 재임 중은 관리 직분이나 정당 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총장도 이사회의 추천에 의하여 입법의원의 비준을 받도록 한 것도 한 특징이다.
이로써 이사회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될 것이고 학원의 자유는 즉 학문 연구의 자유인 만큼 문교부의 근본 방침이라 재론할 것이 없다. 이번 맹휴가 진정으로 학교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된 것이라면 이로써 해결되었는 줄 안다.  우리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는 언제든지 들어줄 터로 학생들은 학문을 사랑하고 학교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결코 이런 문제를 가지고 부질없는 동맹 휴학은 하지말아 주기 바란다.
   盟休條件의 處理案
 1.국립서울대학교에 조선인 총장을 두자는 것은 최초부터의 근본 방침이므로 군정에 관한 行政權 移讓이 실현됨을 따라 군정청의 최고 방침으로 불원 조선이 총장을 임명하게 될 뿐아니라 나아가서는 대학교 이사회의 이사들도 또한 전부 조선인을 임명할 계획으로 인선 문제에 대하여 신중 고려 중임.
 2. 평화한 학원내에 경찰들이 발동됨과 같은 것은 절대로 있지 못할 바이나 다만 학원내일지라도 불법 행위가 현저할 때에는 경찰 자체의 임무를 수행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며 국법에 의한 당연한 처사일 것이므로 이것을 제지할 하등의 근거는 없겠다. 많은 학원이 평화리에 운영되는 한 경찰은 간섭할 이유도 없을 것이요 또 간섭하지도 못하게 하겠음.
 3. 학원의 자유를 주장함이 학문 연구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처음부터 인정하여 오는 바로 하등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어떠한 교수, 어떠한 학생임을 막론하고 학문을 자유로이 연구함에 대하여는 그 신분에 아무런 위해가 절대로 미치지 않을 것을 인정함.
 4. 기타 모든 요구 조건에 있어서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면서 정당한 이유를 갖추어 가지고 순서를 밟아서 요구한다면 언제든지 성의를 다하여 검토하여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아니할 충분한 用意를 가지고 있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國大案은 全面的으로 解決- 法令百二號 一部를 改正
理事會는 朝鮮人으로 組織 : 學園自治에 行政 當局 干涉않는다. 學生은 學園으로 가라.
국립서울대학교안 실시를 계기로 각 대학들에서 연달아 일어난 동맹 휴학은 적지아니 우려되고 있던 중 군정 당국의 동 대학실시법령 개선안과 학생측의 새로운 이해로 점차 해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즉 군정장관은 특명으로써 별항과 같이 법령 102호 일부를 개정하여 이사회는 조선인들만으로써 조직하게 하였다. 이에는 문교부장 등 행정당국자는 관여할 수 없도록 하여 학원의 자치에 行政 당국의 지나친 간섭 또는 압박감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신조치로 국대안 반대 해결에 새로운 서광을 던지게 된 것이다.
이에 군정청 각부장 회의에서는 신중한 태도로 이사 9명을 선택하고 있는 터로 적임자를 결정 후 군정장관에게 출하면 장관은 이를 입법의원에 회부하여 다시 비준을 받아 이사회를 조직하게 하도록 되었다.
그리고 14일에 모인 문교 당국자들이 각 대학장들의 회에서도 별항과 같은 "맹휴 요구 조건에 대한 처리"안을 결정하여 대학총장에 보내는 한편 1만 학생들에 발표하여 곧 학원으로 돌아와 명랑한 우리 학원 건설에 학생의 본분을 다할 것을 촉구하였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理事, 總長 選出을 러-취 長官이 部處長會에 要請

@실제날짜:470213

13일 러취 군정장관은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 이사와 총장 선출에 새로운 방법을 취하라고 군정청 각 부처장 회의에 부탁하였다. 문교부장 유억겸 씨의 건의에 의하여 나는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 이사와 및 총장 선출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나의 의견으로서는 선출법을 속히 개정하여야 된다고 생각되며 1947년 2월 22일부터 법령 百二호를 수정할 것이다.
여러분과 남조선입법의원이 동의할 시에는 조선인 10명의 이사로 구성되는 이사회를 임명하는 데 그중 9명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비준을 얻어 부처장이 추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사회에 대하여서는 서울국립대학교를 소관하는 문교부의 감독하에 직권과 책임이 부여되여 또 이사회의 일원인 총장의 선출권도 부여되는데 그 선출은 최후적으로 입법의원의 비준을 요하게 된다. 그런고로 가급적 속히 이사회 이사 9명을 나에게 추천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재차 여러분의 선처를 요망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盟休아니다" 培材中校 聲明

@실제날짜:470214

배재중학교 학우회에서는 14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배재중학교의 맹휴는 전연 낭설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몇몇 학생이 등교를 방해하여 수일간 수업을 못했으나 배재의 1천 2백 건아들은 매일같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儆新中學 登校

@실제날짜:470211

경신중학교에서는 지난 11일 동교 강당에서 학도대회를 열고 맹휴를 반대하고 총등교키로 되어 방금 전원 등교해 수업을 계속 중이다.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盟休 反對會서 聲明
국립대학안 반대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대학과 중등학교의 맹휴 사건에 대하여 전국학생총연맹 맹휴반대투쟁위원회 조사부에서는 학생 생도들의 자발적 의사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간섭으로 결국 중대한 국면에 이르렀다고 다음과 같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一. 민주 학원 건설을 표방하고 학도들을 이용하여 선동한 지령서가 모당에서 발각되었다.
   二. 그 내용은 추후로 세상에 공표되려니와 애국, 애교, 애족에 불타는 학도들은 모당의 모략에 넘어가지 말고 전원이 학교에 등교하여 모당 모회의 음모와 모략의 전모를 진실로 파악하라.
  • 1947년 2월 16일 <동아일보> 學園消息 - 中東 授業 繼續
중동중학교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맹휴를 하였으나 기타 학생은 전부 교수 중인데 맹휴 중에 있는 학생도 17일 까지 등교치않으면 적당히 처리하기로 되었다.
  • 1947년 2월 16일 <한성일보> 남조선에 맹휴지령- 美 기자의 보도
경찰에 압수된 소군 당국 지령서. 남조선 주둔 미군 소식통 언명에 의하면 조선 경찰은 최근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남조선에 있는 조선 노동 운동 지도자에 보낸 서류의 복사물을 받았다는데 그 내용은 미군 점령하의 남조선에서 혁명의 예비 단계로서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단행시키라는 내용의 것이라 한다. 이 서류의 복사는 서울시에 있는 학생협회 본부에서 12일 몰수된 것이라 하며 동 서류의 원문도 발견되었다 한다. 즉 동 서류는 북조선 소련 교육 문제 주임 장교인 니교타이 쿠즈노프소좌로부터 남조선 노동당위원장 허헌 씨에게 보내온 것이라 한다. 서류의 내용을 보면 남조선 노동조합연맹은 남조선 전체에 걸쳐 혁명을 의기시키라는 것인데 그 목적은 남조선미군정이 수립한 전행정 기구를 일소시키는데 있으며 그 제 일보로서 학생들의 맹휴를 단행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재서울 AP특파원 로버트 씨 제공
  • 1947년 2월 16일 <한성일보> 말썽많은 서울대학- 조선인으로 이사회 구성

@실제날짜:470213

말썽많은 국립서울대학의 이사회를 조선인으로 구성하는 한편 동 총장을 동 이사회에서 선출하기로 결정되어 러-취 군정장관은 지난 13일 대략 다음과 같은 서간을 군정청 부처장 회의장에게 보내었다고 한다.
문교부장 유익겸 씨의 건의에 의하여 법형 제102호를 수정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이사와 총장의 선출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나의 안으로서는 여러분과 입법의원이 동의할 때에는 조선인 10명으로 구성된 이사회 중 9명은 입법의원의 인준을 얻어 부처장이 추천하고 동 이사회의 1원인 총장은 동 이사회에서 선출하여 입법의원의 인준을 받게 되는 것이다.
  • 1947년 2월 18일 <독립신보> 청주중학 등 맹휴

@실제날짜:470215

청주전화 청주중학, 청주상업, 청주사범, 청주농업의 각 학교는 국대안 반대, 학원 민주화, 학원 경찰 간섭 반대 등 요구 조건들 내걸고 15일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2월 18일 <동아일보> 問題는 뒷 處理 - 文敎部서 盟休 會議

@실제날짜:470215

국대안 반대 문제를 애워싸고 일어난 동맹 휴학은 15일 문교부 제시의 4 항목의 처리안으로써 대체로 전면적인 해결에 서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앞서 발표된 군정장관 명령의 문리과, 상과, 법과의 3대학 휴교 선언과 2월 3, 4일은 등교를 하였다가 맹휴에 가담한 학도들에는 어이 할 것인가 등등이 당면 수업 문제로써 남게 된다. 이에 문교부와 관계 각 학교 당국에서는 되도록 관대한 태도로 이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고자 18일은 문교부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그 대책에 대한 의론을 하게 되었다 한다. 이 회의 결론에 따라 다시 국립대학은 등교일 등이 정하게 될 것이나 상과대학 같은 데서는 이미 대부분의 학생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
  • 1947년 2월 18일 <동아일보> 不正學園을 肅淸 - 市 學務當局 調査에 着手
신성한 교육계를 간판으로 사기 행위를 하는 건국도상 아름답지 못한 악덕 교육가가 있음으로 학무 당국에서도 이같은 종류의 교학기관을 숙청하는 한편 다수한 부정 학원, 강습회 등이 경찰 기관에 단죄된 것도 수 건이었고 종로서에서도 시내 모학원 원장이 강의록을 發行한다 하여 거액의 금전을 사취한 사건이 이미 있어 방금 유치 취조 중에 있는데 시 학무과에서도 이같은 행위를 하는 기관은 철저히 숙청하는 한편 금후 사설 교학 기관으로 내용이 불충분하며 당국의 허가도 없는 학원 강습 등은 철저히 숙청하기로 되어 이미 시당국에서는 조사에 착수 중이다.
  • 1947년 2월 18일 <동아일보> 北朝鮮서 온 密令書 - 첫 段階로 學生盟休를 使嗾
요지음 조선 주둔 적군 교육관 니콜라이 그즈노푸소좌로부터 남조선인민 노동자위원장 許憲 씨에게 보낸 "각 학교의 맹휴를 제일단계로 폭동을 야기선동하라"는 비밀 지령에 대한 사실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이번 그 밀령의 원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7년 1월 22일 북조선주둔적군사령부 교육관 니코타이그즈노프 소좌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헌 귀하

세계 최대 강국인 소비에트연방의 외무인민위원동지 모로도프와 영불미 등 세계 4대강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소비에트연방의 수도 막사과에서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1. 1945년 12월에 막사과에서 개최되었던 3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삼상결정을 남조선에 있어서 친일파 파시스트 민족 반역사의 두목 김구, 이승만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미군정이 선동 조장한 때문에 마침내 소미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입수된 有用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來3월 10일부터 막사과에서 개최되는 4대강국 외상들의 회의에서 붉은 군대의 입장을 有利하기 위하여 남조선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미군정의 입법의원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건설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946년 10월에 있던 남조선의 인민은 광범위의 騷動을 침략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 과업의 위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효과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록된 종합적 계획서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부의 학교에서는 광범위의 조직적 맹렬한 투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 을 제 1차로 동맹 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하여야 됩니다.
남노당 부인성명
남노당 허헌 씨는 17일에 지난 15일 AP특파원이 제공한 “북조선주둔소련장교 교육국장이 맹휴를 단행시키라”는 내용의 지령을 내렸다는 보도는 사실 무근한 것이라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 1947년 2월 18일 <한성일보> 학원 맹휴 해결에 진일보- 문교 당국의 보다 더 현명책 요망
배움의 문을 열도록 하자! 신학기 초부터 국립서울대학 문제로 발생된 맹휴 사건은 시내 각 남녀 중등학교에 까지 파급되어 일시 학원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어 이에 대한 문교 당국의 해결책이 각 방면으로부터 요망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러-취 군정장관으로부터 국립대학의 총장을 비롯하여 이사진 전부를 조선 사람으로 임명하라는 제안이 있고 문교 당국에서도 학생측의 요구 조건에 대한 답변을 각 대학 학장에게 전달한 바도 있어 금후 맹휴 돌입을 감행한 이들 학생들의 취추가 매우 주목되고 있는데 지난 15일에는 다시 국대학생 공동투쟁위원회에서 맹휴를 감행한 중등학생들에게 제군들은 학교에 등교하여 배우면서 싸워달라 는 메시지를 보낸 일도 있고 하여 이들 중등학생들은 2, 3일내로 모두 등교하기로 결정되어 국대안 문제도 차츰 해결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각 대학의 현금 상태를 보면 학생들이 등교는 하나 교수의 지도를 거절하는 학교도 있고 등교는 하나 선생이 없어 수업을 받지 못하는 학교도 있어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건국 도상에 있는 우리 조선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라 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이 대학안의 급속 해결을 위하여 문교 당국의 보다 더 현명한 대책이 있기를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2월 19일 <독립신보> 국대문제 토의- 부처장회의서

@실제날짜:470218

18일 군정청에서는 상오 10시부터 민정장관실에서 정례 부처장회의를 열고 맹휴 선풍에 휩쓸린 학원 문제를 중심으로 장시간에 걸쳐 토의를 전개하였는데 그 결과는 9일 안 민정장관으로부터 정식 발표가 있으리라 한다. 더욱 군정장관의 위촉을 받아 전형 중에 있는 국대 이사 9명과 초대 조선인 총장은 오는 25일 경에나 결정을 보게 되리라 한다.
  • 1947년 2월 19일 <독립신보> 최후까지 투쟁 -국대.교육자공동투위서 성명

@실제날짜:470217

금번 국대문제를 중심으로 한 학원 맹휴에 대하여 당국은 그 해결책으로 국대 이사회 개편의 의사를 발표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와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당국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국대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는 오직 국대안 철회에만 있을 것이라고 17일 각각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반박 성명을 세간에 발표하였다. 
당국은 자기의 실패를 호도하기 위하여 최근 관료적 이사회를 개편하여 10명으로서 이사회를 구성하고 9명은 조선인, 그중 1명은 총장으로 임명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한개의 미봉책에 불과함을 솔직히 지적한다. 이러한 미온적 정책으로 학생을 현혹코저함은 한 개의 치희라 아니할 수 없으며 당국의 무책임, 무성의를 유감없이 폭로함에 불과한 것이다. 국대 7천여 명의 애국적 학도는 대학 자치권의 완전한 승인과 학원의 자유 보장을 위하여 타협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며 교육 문화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당국은 과감히 국대안을 철회할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문교부 책임자는 자기의 무성의와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고 용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19일 <독립신보> 학생요구 승인하라 - 대책협의회 성명

@실제날짜:470218

국대안 대책협의회에서는 18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1. 일전에 본 대책협의회에서는 민전 의장단을 통하여 러취장관과 회견하였는데 동 장관은 국대안 해결에 대해서 성의있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2. 그러나 문제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우리는 공정한 입장에서 민주주의적인 옳은 해결을 위해서는 문교 당국은 책임을 지고 하루 빨리 학생의 요구를 무조건 용인하여주기 바란다. 
 3. 더구나 수 일내로 다수한 학생들을 경찰이 검거하고 있음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며 옳은 평화적인 해결의 방도를 버리고 탄압과 검거만을 능사로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
  • 1947년 2월 19일 <독립신보> 협력할 수 없다 - 의학부 조교수 강사

@실제날짜:470218

국대문제에 대하여 서울대학 의학부의 조교수, 강사, 의국원 일동은 18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지난 1년 동안 국대안은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교육의 장래를 위하여 유해할 것을 예측하고 이를 적극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국대가 창설된지 반년. 국대는 과연 그가 호언 장담한 여러 가지 당면 문제를 해결 실천하고 있을까? 학생의 수용력이 팽창하고 연구 시설이 확충되고 교수와 학생의 학문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을까?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아니'라고 대답않을 수 없다. 이를 옳게 해결하는 방법은 국대안 철폐라는 근본적 처치 이외에 없다고 믿는 바다. 이같은 여러 가지 모순과 결함이 고쳐지지  않고 존속하는 한 우리들의 가진 바 건설적인 협조심도 점차로 식어짐은 필연의 세이다.
  • 1947년 2월 19일 <한성일보> 국대안을 俎上에- 9대 학장 회의 소집코 협의

@실제날짜:470218

안장관 금일 특별 발표. 문교 당국에서는 국립서울대학을 중심으로 각 대학 중등학교의 맹휴를 급속히 해결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바 지난 18일 오존 10시 서울대학 9학장을 소집하여 문교부 회의실에서 문교부장 유억겸 동차장 오천석 고등교육국장 등이 연석으로 장시에 거처 선후 해결책을 협의하였다. 한편 동맹 휴학 사건에 관하여 안민정장관은 오는 19일 특별 발표를 하리라 한다.
  • 1947년 2월 19일 <한성일보> 맹휴선동설 허헌 씨 부정
남로당위원장 허헌 씨는 AP서울 특파원 르페-드 씨 부터 제공된 남조선 혁명 선동과 이에 대한 예비 공작으로 학생의 맹휴를 단행하라는 북조선 소군 장교의 지시나 서간을 받은 일이 없으며 이것은 악질 위험한 모략이라는 長女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19일 <한성일보> 美人側 공보 事務 大擴充
군정청 공보부에서는 동 고문 젬스 L. 스트워드 씨 신임을 계기로 미국인측 공보 사무를 확장하게 되어 스트워드고문 외에 공보 관계 전문가 7명이 새로이 배치하였다. 신 고문 스트워드 씨는 1937년 AP통신 중경 특파원으로 있었고 그 후 중국 주둔 미해병대 정보국장으로서 천진과 북경에 근무하다가 금차 영전하였다.
한편 이번 배치된 전문가 중 마이겔 모아 씨는 시카고 헤랄드 엑씨미나지 화싱톤 타임스지 로산젤쓰 세계○보 등의 주필을 역임하였고 윌리암 헬리프라이암쓰시는 뉴욕 아메리칸지 주필을 거쳐 멕아터사령부 라디오 영화 관계 전임으로 있으며 또 찰스 L. 틀맨스 씨는 천진 노드 차이나지에 근무한 일이 있고 미정부 보도 기관에 다년 종사하여 극동 사정에 정통하다고 한다.
  • 1947년 2월 20일 <독립신보> 국대 이사진 추천 암초?
군정청 부처장회의에서는 군정장관의 위촉을 받아 방금 국립서울대학교의 이사 9명과 총장 1명을 전형 중에 있는데 이미 모모씨에게 취임 내교섭까지 하여 보았으나 원래가 시끄러운 자리인 만치 취임을 승낙하는 사람이 전연 없어 암초에 걸려 있다고 한다.
  • 1947년 2월 20일 <독립신보> 문리대 예과 孫, 池 양교수 사임

@실제날짜:470215

문리과대학 예과 물리 교수 孫元祿 池彰烈 양 씨는 국대안 철회와 구교수 복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15일 사직하였다.
  • 1947년 2월 20일 <독립신보> 성균대 교수진 총 퇴진?

@실제날짜:470218

성균관대학교수단 일동은 총퇴진한다고 18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난 10일부 교직원과 학생이 구타를 당하여 피를 흘린 불상사에에 대하여 본 대학 교수단은 그 후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해결을 위하여 극력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사태는 간단히 처리되지 아니하고 10일이 경과하도록 해결의 서광도 보이지 아니하며 또 장래에 있어서도 도저히 본 교수의 힘으로서는 해결될 방책이 전무하다고 생각됨으로 총 퇴진하기를 이에 성명한다.
  • 1947년 2월 20일 <독립신보> 학생위해 최선의 편의 도모 - 안 민정장관 성명서 발표

@실제날짜:470219

교수진 보충과 생활 보장 고려. 국대은 래 3월 2일까지 휴교. 국대 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학원의 맹휴 선풍은 관계 각 대학은 물론 사대, 중학에까지 그 불똥이 파급되어 경향각지의 70여 학원이 국대안 반대를 부르짖고 맹휴를 단행, 건국도정의 교육계에 커다란 암영을 던지고 있는데 이에 대처하여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그 해결책으로 이사회를 조선인으로 개편할 것과 조선인 총장을 등용할 것을 제시하는 동시에 오는 3월 2일까지 국대는 임시 휴교하고 다음 3일날부터 제2학기를 개학하게 되었으니 학생은 학원에 돌아오라고 19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1. 국대에 대하여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해결을 하여야 할 것이고, 
2. 학생이 지정한 기일 즉 3월 3일까지 번연히 등록 취학하여 이로 연학에 전심하면 학생들을 위하여 최선의 편의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유억겸 문교부장은 전연 이 방침에 준하여 노력 중이고 '러취' 군정장관도 전폭 승인하는 터이므로 이사회의 적정한 선출 구성과 그들의 협의에 의한 조선인 총장이 선정될 것이다. 
3. 교수의 전반적 보충 및 그들의 생활 향상과 연구의 기회를 향유하도록 각 부면을 통하여 진력키로 한다. 
4. 어느 파를 막론하고 학생과 그 관계자 등의 폭력 행위를 절대 방지하여야 한다. 조국 재건은 결코 편향 급진을 요치 않고 협동 호조의 신 민주 국가됨을 요하는 것이므로 학생 제군이 정치적 핵동에 가담하는 것은 불가하다. 더구나 중등 남여 학생들의 뇌동적 맹휴는 단연 불가하므로 즉시 등교함을 요한다. 정치 운동과 맹휴는 용허치 못할 것이다.
  • 1947년 2월 20일 <동아일보> 國大 建設學生會에서 辭任한 美講師의 留任 請願

@실제날짜:470219

국립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에서는 국대안 반대 맹휴로 말미암아 서울대학의 미국인 강사 6명이 사임한 데 대하여 이는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19일 문교 당국을 방문하고 유임을 청원하는 동시에 조선교육에 이바지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20일 <동아일보> 雷同的 盟休는 不可 - 安民政長官 談

@실제날짜:470219

政治的 策動에 加擔말라
국립대학교의 설치안에 대하여 학생들의 전면적 거부는 마침내 지난 5일부터 동맹 휴학이란 최후 수단을 걷게되고 이어 다른 학교에 까지 파급되어 민주 학원 건설에 적지아니 큰 주목을 끌게 되든 중 17일부터는 문교 당국의 처리 지시로써 중학교의 동맹 휴학은 결말을 지었다. 이리하여 국대안은 국대만의 문제로써 원만한 해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현재 군정청 부처장회의에서는 조선인 이사 9명을 선정 중이고 이어 총장도 조선인 중에 임명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데 19일 安 민정장관은 다음과 같은 담화로써 3월 3일까지 국립대학교 학생들은 등록 등교할 것과 아울러 학원에서 정치적 활동에 가담하는 것은 삼가하라고 경고하였다.

국대안 문제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해결을  꾀하여야 할 것이고 학생은 삼월까지 등록 취학하여야 할 것이다. 문교부장은 전혀 이 방침에 준하여 노력 중이고 러-취 군정장관도 전폭적으로 이 방침을 승인하는 터임으로 이사회의 적합한 선출 구성과 그들의 협의에 의한 조선인 총장이 선정될 것이다.
이에 의하여 각 분과 대학의 합리 운영과 기타 교육 行政상의 결함도 필연적으로 시정하게 될 것이다. 교수의 전면적 보충과 그들의 생활 향상과 연구의 기회를 갖도록 각 부면을 통하여 일층 노력하기를 열망한다.
어느 과를 막론하고 학생과 그의 관계자들의 폭력 행위를 절대 방지하여야 한다. 조국 재건은 결코 편향 급진을 요하지 않고 협동 호조의 신 민주국가됨을 요하는 것임으로 요즈음에 있어 학생 제군이 그 한도를 이탈한 정치적 책동에 가담하는 것은 불가하다. 더구나 중등 남녀 학생의 뇌동적 맹휴는 단연 불가함으로 즉시 등교하기를 바란다. 어쨋든 학교안에서의 정치 운동과 맹휴는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 1947년 2월 20일 <한성일보> 등록취학 3월 3일까지- 국대안 처결 安장관 담화

@실제날짜:470219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서 해결. 국립서울대학교 9분과 대학에서는 여전히 맹휴가 계속되고 있는데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씨는 작 19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서 국대안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서 해결할 것을 전재로 오는 3월 3일 일제 등교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학교 내에서의 정치운동과 맹휴는 용허치 못할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국대안에 대하여서는
1.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해결을 하여야 할 것이고
2. 학생이 지정한 기일 즉 3월 3일까지 번연히 등록 취학하여 일로 학업에 전심하는 학생에 최선의 편의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3. 유억겸(兪億兼) 문교부장은 전연 이 방침에 준하여 노력 중이고 러취 군정장관도 전폭 승인하는 터이므로 이사회의 적절한 선출 구성과 그들의 협의에 의한 조선인 총장이 선정될 것이다. 이에 의하여 각 분과 대학의 관리 운영과 기타 교육 행정의 결함도 필연으로 시정하게 될 것이다. 교수의 전반적 보충과 그들의 생활 향상과 연구의 기회를 향유하도록 각 부면을 통하여 전력토록 한다. 교수 제씨도 거국도 증 일층 희생적으로 노력하기를 열망한다.
4. 어느 파를 막론하고 학생과 그의 관계자들이 폭력행사를 절대 방지하여야 한다. 조국 재건은 결코 편향 급진을 원치 않고 협동 호조의 신 민주 국가 됨을 요하는 것이므로 이즈음에 있어서 학생 제군이 그 태도를 이탈한 정치 직책 등에 가담하는 것은 불가하다. 더구나 중등 남녀 학생들의 뇌동적 맹휴는 단연 불가하므로 즉시 등교함을 요한다. 어찌하든 학교 내에서의 정치 운동 및 맹휴는 용허치 못할 것이다.
吳문교부 차장 談
오는 3월 3일은 제2학기 개학일이므로 오늘 민정장관 담화로써 서울대학생들이 동일까지 등록 취학하도록 발표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부터 3월 2일까지는 각 분과 대학이 학기말 휴가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날 학생들에게 등록하라고 하여서 혹 의혹을 가질런지 모르나 등록은 매학기 초마다 하게 되는 것으로 등록이라는 것은 주로 그 학기간의 학과 선택 등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동일 등교치 않는 학생에 관한 처벌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1947년 2월 21일 <독립신보> 경찰이 학원서 학생 구타- 경기공업학교서 생긴 불상사

@실제날짜:470219

남조선 일대에 파급되고 있는 금번 맹휴에 있어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가 학생측의 중대 이유로 되어 있으며 또 전번 안 민정장관의 담화에도 경관은 학원에 간섭할 수가 없다고 발표된 요즈음 19일 맹휴 중에 있는 경기공립공업학교 학생을 마포서원이 학원 내에서 구타 검속한 사실이 있어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내용을 탐문한 바 다음과 같다. 
즉 그간 국대안 반대, 경찰 학원 간섭 반대 등 요구로 맹휴 중에 있던 경기공립공업학교에서는 그 대책을 강구코저 19일 학부형회를 개최하였는데 학생 대표인 동교 5년생 박인봉 군이 학부형회에서 학생측의 입장을 설명코저 들어가려 하여 선생측과 말썽이 생기자 당일 동교에 와 있던 마포서 사찰주임 柳武 씨는 전기 박군을 운동장에 끌고나와 무수히 구타하여 출혈까지 본 후 검속하여 갔는데 당시 동 장소에는 학교 교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구속을 당하여 이를 통분히 여긴 학생 중에는 통곡하는 학생까지도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각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수 방관은 미안 - 학교 당국자 담 
처음에는 교내에서 검속한다는 것을 부탁하여 그것만은 유여를 빌었는데 그 후에 다시 검속하여 갔다. 학생이 구타당할 때 교원측이 방관한 것은 우리측도 미안하게 생각하여 교수회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지금 말할 수 없다 -○○○주임담 
○○○○ 이 사건에 대하여 나로서는 지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학교엔 안심하고 다닐 수 없다. - 모학생 담 
차(朴?)군은 군고구마 장사로 고학하는 학생으로 우리는 그를 평소부터 숭배하고 있었다. 학생이 학원 내에서 경관한테 얻어맞고 검속당하는 것을 선생이 공수 방관하니 이러한 학교에 우리가 어찌 안심하고 다니겠습니까?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 1947년 2월 21일 <독립신보> 국대학생투위와 동국대학서 성명

@실제날짜:470220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중략). 
중학생은 학원에 돌아가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학원 건설을 위한 각 학교의 특수요구 (국대안 철폐 이외)가 관철되지 않더라도 굴복해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니다. 
▲ 동국대학 투쟁위원회에서는 20일 학교맹휴에 대한 '모종지령'운운을 전연 허위의 모략임을 강조하고 성스러운 그들 (중략)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21일 <독립신보> 맹휴의 방향과 해결 - 사설
1. '국대안'을 도화선으로 폭발한 대학 맹휴의 물결은 마침내 중학생들에까지 파급되어서 문제는 드디어 중대사의 절정에 달하게 되었으나 아직껏 해결에 대한 하등의 희망적 징후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결을 적극적으로 진척시킬 만한 건설적인 방향과 의견이 문교 당국에 의하여 제시되지 못하였음은 심히 해괴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수일전 문교 당국에 의하여 제시된 해결안 같은 것은 저조한 면목주의와 고식적인 미봉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이러한 대책의 제시는 현하 정세와 학생맹휴의 상호 관계가 표시하는 객관적인 정치적 의의를 간파할 줄 모르는 短見者流의 頑迷를 스사로이 폭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문교 당국은 모름직이 현하 남조선 정세에서 맹휴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한 諸 방향을 예측하고 문제의 중요성을 파악하여 대처하고 적극적인 해결책의 제시에 의하여 해결의 '이니셔티브'를 補捉하는 것이 지도 당국자의 마땅한 의무인 것을 뚜렸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2. 현재 남조선 대학생 맹휴의 금후의 발전은 대체로 두가지 방향을 吾人에게 예견하게 하는 것이다. 첫째로는 학생측 요구와 문교 당국의 방침이 최후까지 타협점을 발견하지 못해서 투쟁이 이대로 만성화되고 학원이 오랫동안 황폐화하는 방향이나 이 경우에 맹휴가 불가피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성질을 부아하게 될 것은 너무도 명료한 사태의 발전일 것이다. 둘째로는 학생과 당국 사이에 타협점이 발견되어서 학원 생활의 복귀가 실현되는 경우인데 이때에는 학도측의 민주주의적 요구가 남조선 현하의 정세가 허여하는 최대 한도에 있어서 관철되는 것을 전제로 할 것이며 또 이러한 조건하에서 학생측이 그 투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외에 당국측의 방침에 학생들이 무조건으로 복종하는 데서 해결되는 방향도 가정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사태의 현상으로 보아서는 도저이 실현될 수 없는 일이며 문교 당국이 이 방향을 고집한다 하더라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의 교훈이 오히려 그들을 逆교육하기에 이미 필요 이상의 시일이 낭비되어 온 것이다. 
3. 위에 제시한 두개의 해결 방향을 명찰한다면 문교 당국은 문제 처리의 방향과 한계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투쟁의 만성화, 학원의 황폐는 대다수 학생의 결코 희망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조선 정세하에서의 최대 한도의 학원 생활의 민주주의화는 맹휴 학도들의 일치한 요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문교 당국이 솔선하여서 학원 생활에 보장하여야 할 직책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최대 한도를 割하는 선을 구체적으로 어디 두겠느냐 하는데 있을 것이나 이 점은 당국자가 맹휴를 죄악시하는 태도를 일소하고 문제의 해결을 학생 대중의 민주주의적 의욕의 앙양과 발전의 방향에서 건설적으로 실현할 만한 예지와 아량을 가진다면 그다지 곤란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맹휴 문제에 관한 안 민정장관의 발언은 이러한 방향에의 일보의 접근을 표시하였다는 점에서 오인에게 희망과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학도 맹휴에 과대한 정치성을 상상하거나 또는 요구하는 것은 다같이 중대한 죄악이다. 그러나 오직 한개의 명백한 사리는 맹휴가 이대로 심화되고 만성화된다면 그것이 조만간 정치적 항쟁에로 전화될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소련지시' 운운의 떼마에 경도하거나 또는 이러한 모략에 맹휴 거세의 희망을 囑하지 말고 당국은 모름직이 '최대 한도의 민주주의'에 해결의 정도를 구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은 당국에게나 학생들에게나 공통되는 '최대한의 선'인 것을 확신하여야 할 것이다.
  • 1947년 2월 21일 <한성일보> 미군인 소학교 방문기- 민주교육의 표본실
안팍에 넘치는 자유의 웃음. 미국인 아동의 자유스러운 학원은 용산에 있는 일제시 사단사령부의 따뜻하고 환경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6세부터 18세까지의 생도가 162명이며 선생은 교장을 합하여 전임이 5명, 시간 교수가 5명뿐이다. 교장 L. S. 리빙스터 씨는 1935년에 조선에 왔던 일이 있는 분으로 만면 웃음으로써 대하는 씨는 원만하고 인격있는 선생이다. 교장의 안내로 수업 중의 교실과 시설을 볼 수 있었다.
영화로써 소개된 미국의 민주주의적 모범 교육 방식 그대로이다. 선생을 에워싸고 회의하는 것같이 또는 좌담하는 것 같이 보는 교실마다 화기가 만만하고 자유스럽다. 독서실에는 3천여 권의 서적이 쌓여 있고 이공학 실험실, 미술실을 거쳐 한 교실에 들어가니 공부하는 생도들과 함께 벽에 붙은 그림이 눈에 띄인다. 조선 아이들이 썰매타는 것, 대문 앞에서 널뛰는 것, 남대문을 그렸는지 그 앞에 갓 쓰고 당나귀를 탄 시골 아저씨의 그림 등이다. 이로써 생도들의 조선 풍속과 조선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능히 살펴볼 수 있다. 영사실까지 있는 강당 그리고 일체 설비가 완비된 식당과 부엌 모두가 호화롭고 장기적 설비이다. 생도들의 나비와 같이 날뛰고 종달새와 같이 노래부르는 천진한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이 나라 이 땅에 이 사람들은 날로 날로 뿌리를 깊히 박고 있는 감이 적지 않다.
  • 1947년 2월 22일 <독립신보> 3월 3일의 개교 앞두고 국대안 귀추 주목
작년 8월 법령 발표 이래 무려 6개월간에 걸쳐 분규를 거듭하여 오던 국대 문제는 원만한 해결의 서장을 보지 못한 채 해를 넘겨 동기 방학 개학날인 지난 3일을 계기로 다시 재연되어 학생들은 당국에 항거하는 방법으로 맹휴를 단행 그 선풍은 요원의 불꽃과 같이 서울 시내는 물론 남조선 각지의 전 학원에 미쳐 건국 도정의 교육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처하여 군정장관 '러취'소장은 13일 부처장회의에 서간을 보내어 조·미 문교 당국 수뇌자 6명으로 구성된 현 이사회를 개편하여 조선인 9명과 조선인 총장 1명으로서 이사회를 구성하겠으니 적임자를 추천하여 달라고 위촉한 바 있었고 14일에는 문교부장 유억겸 씨가 그 해결책으로 이사회 개편을 중심으로하는 네가지 조건을 각 대학 학장에 제시한 바 있었는데 계속해서 19일에는 민정장관 안재홍 씨로부터 3월 3일에 제2학기 개학을 하겠으니 학생은 빠짐없이 등록 취학하라는 최후적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이것을 통하여 보건대 국대안에 대한 당국의 의도는 절대로 원안을 철회할 것 같이 보이지는 않으며 한편 학생측에서는 국대안의 철회를 절규하여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강경히 주장하고 있어 며칠 남지 않은 3월 3일의 제2학기 개학을 앞두고 이 문제는 과연 어떠한 결말을 가져오게 될는지 앞으로의 귀추가 매우 주목되고 있다.
  • 1947년 2월 22일 <독립신보> 학생 본분 지켜가며 국대안 결점 지적하라- 유문교부장 성명

@실제날짜:470221

분규 중에 있는 국대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저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3월 3일의 제2학기 개학을 앞두고 21일 학생들이 학원에 돌아오기를 종용하는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지난 동기 방학을 전후하여 국립서울대학의 일부 학생들이 몇 개의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그 선풍이 다른 학교, 심지어 중등학교에까지 불게 된 것은 조국 건국도상에 일대 통한사이다. 국립서울대학교는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계획하에 발전한 것이다. 국대안을 비난하는 것은 조게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구나 국대를 식민지 교육 기관이라함은 종합 대학의 진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로서 언어 도단이다. 
2. 건설적인 비평은 민주주의 국가의 건전한 발달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본분을 지키어 가면서 국대 운영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 소위 민주주의적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학도들의 재래의 동맹 휴학이란 일본적 잔재의 태도를 버리고 대학교 당국과 문교 당국을 신뢰하고 학업에 취한하면 대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차차 큰 광명이 있을 줄 믿는다.
  • 1947년 2월 22일 <독립신보> 학원 맹휴 一束

@실제날짜:470216

全州二中 등 맹휴 
전주 21발 합동 학원의 맹휴 선풍은 드디어 전주에도 파급되어 19일 전주사범, 전주북중에서는 (중략) 3개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일제히 맹휴를 단행하였다. 
부산 각 학교 맹휴 
부산발 조선 과반래 서울 각 대학, 중등 학교의 국대안 반대투쟁 맹휴가 계속되고 있는 이때 부산에도 맹휴 선풍이 파급되어 지난 16일부터 부산대학 南大를 위시하여 釜工, 釜商, 東中, ○○, 釜師 등 각 중학교는 맹휴에 돌입하였다. 18일 현재 맹휴 참가자수는 3천 5백여 명의 다수에 달한다.
  • 1947년 2월 22일 <동아일보> 成均館大 學生會서 學校에 歎願

@실제날짜:470220

"선생님은 왜 안오시는가?" 盟休끝에 오는 學徒의 向學熱
선생님들은 어서 학교로 돌아와 가르쳐 주시오.... 지난 1일부터 국립대학안 반대를 문제로 내걸고 시내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학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斷行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동 대학 교수측에서도 총사직을 하게까지 되었다. 이리하여 학생들이 공부하려 하여도 선생들이 안나와 수업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러 20일 동 대학 학생회에서는 선생님들의 복교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곡한 성명서를 내고 있다.
  • 1947년 2월 22일 <동아일보> 兪文敎部長 學生 本分을 遵守하라고 勸告

@실제날짜:470221

盟休는 破壞的 행동이다!
학생들의 뇌동적 맹휴와 서울국립대학안 반대에 대하여 21일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학도 제군에 고함"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동맹 휴학은 파괴적 행동이니 학생은 그 본분을 지켜 학원에 돌아가 공부하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1. 사랑하는 학생 제군. 국립서울대학의 일부 학생들이 몇개의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그 선풍이 심지어 중등학교에까지 불어가 선량한 애국 학도의 수학까지 방해되고 있는 것은 조국 재건도상에 일대 痛恨事이다. 국립서울대학교는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계획하에 발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초창기에 있어 더욱 안정되지 못한 현하 우리 사회에 있어서 다소 불편과 불비와 혼잡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목전의 이러한 점만을 골라가지고 국대안을 비난하는 것은 早計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에 완전한 성과를 나타나게 함에는 또한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국대를 식민지 노예 교육 기관이라함은 종합대학의 진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로써 언어도단이며 신성하여야할 학원에서 당을 지어 동맹 휴학을 하는 것은 애국적 학도의 취할 바 태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2. 건설적인 비평은 민주주의 국가의 건전한 발달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본분을 지키어 가면서 국대 운영의 결점을 지적하여 정정당당히 建設的인 의견을 제출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인데 동시에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적 해결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교 당국이나 문교 당국은 학생의 적이 아니다. 그들의 선도자요 원조자다. 항거의 태도를 버리고 서로 신뢰하는데 건설이 있을 것이다.
3. 학도들이 재래의 동맹 휴학이란 파괴적인 태도를 버리고 대학교 당국과 문교 당국을 신뢰하고 학업에 취한다면 규율이 서고 따라서 당국자들은 심혈을 경도하여 대학교의 발전은 물론 일보 더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을 위하여 진력할 수 있을 것이며 국립서울대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차차 큰 광명이 있을 줄 믿는다.
4. 그간 동맹 휴학이라는 비건설적 운동으로 말미암아 순진한 마음에 받은 고통을 생각할 때에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프다. 世上에 誰某할 것 없이 一國 一民族의 장래 운명은 雙扇에 진 청년 학도들을 교육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당하고 순결한 열정을 꺾으며 侮辱하려는 자 어디 있으랴.
5. 一刻을 다투어 가며 학원으로 돌아가 규율 정연히 면학하면서 정당한 요구를 하면 아니 통할 리가 없으리라고 믿는다. 문교 당국은 배우고자 하는 학생을 위하여 있지 아니한가. 우리를 신뢰하는 학생을 위하여 있지 아니한가. 우리를 신뢰하고 학원에 돌아가서 면학에 매진함으로써 조국 재건의 영광스러운 임무를 다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서울 국립종합대학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입법의원의 각별한 고려를 바란다고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 부교수, 조교수, 유지 일동은 17일 다음과 같은 건의서를 제출하여 입의에서는 21일 이를 본회의에 상정 토의하였다.
1. 이사회 = 이사회에 본 대학교수 3,4인을 참가시킬 일. 학교 제반사의 운영에 있어서 교육을 직접 담당한 교수들이 참가하여야만 이사회가 잘 운영될 줄로 믿습니다.
2. 평의회, 대학교에 평의회를 설치 = 각 단과대학에 평의원 2명씩과 학장 1인 합 27인으로서 평의회을 만들어 총장의 자문기관으로서 총장을 보좌하여 대학교 최고 사항을 상의 처결하도록 하여 문교부의 학무 복잡을 피하도록 할 수 있음. 該 평의회 2명은 각 단과대학의 학장을 모아 該 대학의 중대사를 상의하도록 함.
3. 교수회는 각 단과대학은 교수회를 부활시킬 일. 교수회는 자문기관으로서 학교 諸般 사항을 ○○없이 토의하여 학장에게 편의를 도와줄 일.
4. 교무처와 학생처 이 양처의 최고 책임자는 학교 교수로 하고 그 밑에 조교수와 또 전임 학무원을 둘 일.
5. 학술연구비 = 학술연구비설정. 각과에 연구비를 설정하는 동시에 연구논문 출판비를 계상할 일.
  • 1947년 2월 23일 <독립신보> 맹휴는 정치활동 아니다. -안장관 해결안에 학생투위 성명

@실제날짜:470222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지난번 학생들 맹휴에 대하여 '해결할 터이니 학교에 돌아오라'는 군정 당국의 해결안을 제시한 바 있었는데 22일 국대학생투쟁위원회에서는 안장관의 해결안을 반박하는 동시에 맹휴의 해결책은 오직 국대안 철회에 있다고 하고 안장관의 과단을 요망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안 장관의 해결문은 너무나 우리 기대에 어그러진다. 첫째 국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한다 하였으나 비민주적인 국대안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한다면 우선 학생 전체의 요구와 의사를 존중할 것이고 학생 총의를 기준으로 하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둘째 이사진은 조선인 임명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며 국대안의 많은 모순 결함을 원칙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다시 기일을 3월 3일까지 연기하여 무조건 등교를 강요하고 있으나 이러한 고압적 태도에는 절대로 굴복지 않을 것이다. 양심인 학생은 언제나 선배 지도자의 옳은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는다. 그러나 정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강요한다면 거기에는 무자비한 투쟁이 있을  뿐이다. 셋째 구교수 복직 문제에 있어서 교수의 생활 보장이다. 연구의 기회의 향유에 해결책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수의 생명인 연구 발표의 자유, 자치권의 확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장할 수 잇는 기관 즉 민주 학원이 건설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우선 국대안을 철회하여야 될 것이다. 넷째 학원의 폭력 행위가 정치적 책동을 절대 배격하여야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부 반동배들이 말하는 설이다.  이 공투에서는 지난 17일부터 학교는 일제히 등교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만약 국대안이 전적으로 철회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은 최후적으로 민족적 양심으로 재봉기할 것이다. 학원의 정치 운동은 물론 불가하다. 허나 맹휴는 곧 정치 운동은 아니다. 요컨대 국대 문제 해결에 있어서 당국의 해결안은 하등의 효과도 없을 것을 우려하는 동시에 국대안 철회의 용단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 1947년 2월 23일 <한성일보> 국대안 입의에 건의- 서울대학 교수진 연서

@실제날짜:470217

국대안에 대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많은 비난이 있어 당국에서는 이를 수습하고자 방금 노력 중인데 입의에서도 문제의 중대성에 감하여 금간 정식으로 토의하게 되었다는 바 서울대학교수, 부교수, 조교수, 유지 일동 명의로 지난 17일 입의에 다음과 같은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1. 이사회: 이사회에 본 대학 교수 3, 4인을 참가시킬 것. 학교 제반사의 운용에 있어서 교육을 직접 담당할 교수들이 참가하여야만 이사회가 잘 운영될 줄 믿습니다.
2. 평의회: 대학에 평의회를 둘 것. 각 단과대학에 평의원 2명씩과 학장 1인 합 27인으로서 평의회를 만들어 총장의 자문기관으로써 총장으로 보위하여 각 학교 최고 사항을 상의 척결토록 하여 문교부의 사무 복잡을 피하도록 할 수 있음. 해 평의원 2명은 각 단과대학의 학장을 도와 해당 대학의 중대사를 상의토록 함.
3. 교수회: 각 단과대학의 교수회를 부활시킬 것임. 교수회는 자문기관으로서 학교 제사항을 격의 없이 토의하여 학장에게 편의를 도와줄 일.
4. 교무처와 학생처: 이 양처의 최고 책임자는 학교 교수로 하고, 그 밑에 조교수와 전임 사무원을 둘 일.
5. 학술연구부: 학술연구부를 설정. 각과에 연구비를 설정하는 동시에 연구 논문 출판비를 계상할 일.
  • 1947년 2월 26일 <독립신보> 국대 문제 해결책을 제시-교육자대책위 대표가 헬믹대장 방문코
국대안 교육대책위원회 대표 尹行重 최종환 김계숙 씨 등 국대 교수 8씨는 수일전 헬믹대장과 회견하고 국대 문제 해결에 대하여 요담한 바 있었는데 동 대표는 국대의 실정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서한을 당국에 제출하는 동시에 학생대회 석상 혹은 같은 장소에서 체포된 구금 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국대안의 철폐를 요구하였는데 헬믹대장도 이에 성의있는 태도를 표시하였다 한다. 동 대표 일동은 계속하여 민정장관 안재홍 씨를 방문하고 그 간의 실정과 해결안으로서 문교 당국자의 인책 사임과 국대안 철회를 주장한데 대하여 안씨는 성의있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約束하였다 한다.
  • 1947년 2월 26일 <독립신보> 요구 관철까지 투쟁 -학생투위 성명
지난 21일 발표된 유억겸 문교부장의 담화에 대하여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국대안 철회를 절규하며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여 맹휴를 선언한 5만여 애국적 학생을 아직까지도 일부 학생이라고 부름은 당국자의 무성의 무반성의 제일의 증거다. 이 이상 더 무책임한 태도를 계속함은 그야말로 '조국 재건도상 일대 통한사'가 될 것이다. 
2. 맹휴를 일제 잔재라고 하나 이 언사야말로 3.1운동, 광주학생사건 같은 애국적 학생의 영웅적인 민족 해방 투쟁을 욕하는 것이다. 
3. 7천여 전 국대학생은 요구 관철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 1947년 2월 27일 <독립신보> 일부 교수의 건의안은 민주교육 방향과 배치- 교육자공위서 반박 성명

@실제날짜:470226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학교에 남아 있는 일부 교수들이 立議에 건의한 내용은 그들의 무성의한 방관끝에 나온 민주 교육 건설의 방향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26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23일 발표된 그들의 입의에 대한 건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그들은 관료적인 이사회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전제밑에서 다만 그 구성에 현교수 3, 4인을 관선 임명시켜 달라는 것이니 대다수의 교수가 불합작하는 통에 火中拾粟격으로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伏意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둘째는  評議會 의장설인데 전제적인 이사회의 존재로 거세될 이 회의 기능이 애매할 뿐 아니라 관료 통제의 강화를 위한 어용 기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셋째로 교수회를 고문 기관으로서 규정하는 것부터가 학원 자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넷째 학생의 통제 기관으로서의 교무처 학생처의 기구를 그대로 두고 다만 그 책임 지위에 교수가 된다함은 자리차지 이외에 아무런 변경도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국대 현교수 유지일동'의 건의를 민주 교육 건설의 방향과는 배치되는 행동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엄숙히 그 맹성을 경고한다.
  • 1947년 2월 27일 <동아일보> 愛國女學生 蹶起大會 27日 開催
애국여학생 궐기대회 준비위원회에서는 27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안에서 애국여학생 궐기대회를 擧行하기로 되었다.
  • 1947년 2월 28일 <독립신보> 민청원 석방하라

@실제날짜:470227

서울學統에서는 27일 지난 24일 '테러'방지를 위하여 민청회관 경비 중 대량 검거된 민청원을 전원 석방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 1947년 2월 28일 <독립신보> 정의의 광명비칠 때까지 투쟁할 터

@실제날짜:470227

민주학원건설학생공투, 국립대학학생공투, 사립대학생학공투, 중등부학생공투에서는 27일 연명으로 학원의 경찰 간섭과 퇴학, 정학 등 여러 가지 탄압에 대하여 특히 성남중학의 혹심한 실례를 들어 이를 단호 반대 투쟁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과거 3.1운동,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사건에서 피를 흘린 선배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관헌들의 충칼 밑에서 희생적인 투쟁을 감행한 것이라고 강조한 다음 여하한 희생도, 탄압도 웃음으로 맞이하며 정의의 광명이 조국에 비쳐 올 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 1947년 2월 32일 "미군점령하에서의 한국 교육발전" 보고서 작성

미연방정부 전쟁성 공보부 여성관계과에서는 "Educational advancements in occupied Korea"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총 10개의 주제 영역별로 되어 있는 이 보고서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I. Introduction

    한국 교육의 3대 과제 : 교사, 교실, 교재 부족

II. Administration

   군정법령 제6호(학교의 재개 등), 한국교육위원회의 역할

III. Teacher training

   당초 교사의 숫자는 26,429명. 
   1945년 11월에 임시교사양성과정 시작. 
   1946년 여름에 여러 기관에서 실시됨.
       - 각급학교에서 가르칠 교사
       - 초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음악 교육
       - 사범학교 교사, 체육교사, 실업교육 교사를 위한 교육실시
       - 기타 학교 경영을 위한 강습도 실시됨.
   1947년 1월 13일 현재 남한의 교사는 48,939명.

IV. Adult education

   3가지 형태의 folk schools이 있음.
       - 성인반 : 18세 이상
       - 청소년반 : 13-18세
       - 보습반 : 학교 교육을 마쳤으나 한글과 국사 교육을받고자 하는 사람 
   이동교육반(mobile education unit)이 전국 순회. 지난 여름동안 2-3,000명의 성인교육 교사들이 한국역사와 한글 교육을 실시함. 현재 경상북도에만 1,000개 정도의 성인교육 기관이 있음. 기타 국립 맹아 및 농아 학교, 한국인 공무원을 위한 야간영어학교 등이 운영됨.

V. Preparation of instruction books

   1946년 10월 31일까지 5,823,350권의 교재가 배포됨.

VI. Korean Education Mission

   세가지 목적 : 미국의 대한교육사절단 파견 준비, 한국 교육자 및 장학생의 미국 대학 입학 허가 획득, 그리고 교육 기자재의 확보.

VII. Physical reconstruction of school facilities

   군정 실시 이후 82개 중등학교 신설. 1946년 6월 현재 남한의 학교 총수는 3,322개교. 지역단체가 학교 시설에 관심 크게 보임. 많은 지역에서 기금 모금을 위한 협의회가 구성됨. 예컨데 부산에서 천만엔, 삼척과 영월에서 백오십만엔, 그리고 경주에서 백만엔이 모금됨. 

VIII. Reforms in Educational Standards

   대학을 4년제로 개편함;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으로 가시화됨.(군정법령 제102호)
   기타 대학의 경우에 연희전문학교가 1946년 10월 25일에 대학으로 승격함.
   중등교육은 6년으로 그리고 초등교육도 6년으로 확대됨.
   법정 등록금 최고액이 정해짐. 초등은 월 1엔, 중등은 월 20엔으로 함.
   학생 총수는 1946년 10월 7일 현재 2,583,930명.
   교사 특히 대학 교수에 대한 처우가 열악한 실정임.

IX. Korean folk customs X. Conclusion

   1946년 6월 현재 문교부 조직표[138]


1947년 3월

  • 1947년 3월 1일 <한성일보> 학원맹휴 흑막- 경찰청에서 발표

@실제날짜:470228

과반 국대안 반대 문제로 각 학교 맹휴 사건이 발생하데 있어 경찰청에서는 동 사건의 전모를 작 28일 張총감으로부터 발표가 있었다. 내용은 금번 각 학교 맹휴 사건 배후에 모당이 재정적 원조까지 하여서 맹휴를 조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 1947년 3월 5일 <독립신보> 등록학생은 2백 명

@실제날짜:470303

3일 제2학기 개강을 한 국립서울대학교에서는 5일까지 2학기초 학생 등록을 실시 중에 있는데 3일 현재로 등록을 마친 학생의 총수는 7천여 명 학생 가운데 불과 220명 밖에 안된다.
  • 1947년 3월 5일 <독립신보> 문산농교 교직원 사직 - 교내 문제를 외부와 간섭한 이유

@실제날짜:470302

문산지국전화 문산농업학교 교직원 일동은 지난 2일 총사직을 단행했다. 원인은 동교가 지난 2월 2일 맹휴로 들어가자 학교에서는 학생과 학부형회를 열었는데 동교 교장의 요청으로 이 회의에 출석한 獨促 臨津面 연맹위원장 김진호 씨가 발언 중에 동교 선생을 모욕한 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후원회측에서는 선생의 복직을 위하여 노력 중인데 사직한 모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내 문제를 외부의 사회 단체에 간섭시키는 것이 잘못이요 또 김씨 말에 교내 선생가운데 적색 분자가 있다는 등 학생과 학부형이 있는 곳에서 선생을 모욕한 때문에 우리는 사직을 단행한 것이다.
  • 1947년 3월 5일 <독립신보> 인민의 여론은 이렇다. - 투서로 본 여론- 국대 문제가 제 일위
여론은 민주정치의 기본이라 한다. 그러면 이 여론은 실지에 있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나. 다음은 본사에 들어오는 투서와 항간에서 들은 '최근 한달 동안의 여론'이다. 여론을 중요시한다는 군정 시책에 있어 거짓없는 인민들의 부르짖음은 과연 얼마 만큼 반영되어 있을까? 제일 많은 것이 '국대' 문제이다. 국대학생들은 물론이요 다른 대학, 중학생까지도 국대안을 반대하고 맹휴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요구는 국대안은 비민주주의적이라는 것이요 학원의 모든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국대안 반대는 요원의 불같이 남조선에 퍼져 아직도 그 수습을 못보고 있거니와 이 비등하는 조선 학생들의 외침은 군정에 반영됐는지 안됐는지 해결을 못보고 있다. 다음은 경찰에 대한 것인데 인민의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편파적이라는 것, 해방이 된 이땅에 있어 대수롭지 않은 일에 잡어가고 석방하고 이런 점이 불유쾌하다는 것이 많았다.(후략)
  • 1947년 3월 5일 <독립신보> 주목되는 국대안 - 입의서 국대수정안 내걸고 토의

@실제날짜:470304

입법의원 문교분과위원회에서는 러취 군정장관의 위촉을 받어 그간 국립서울대학교안을 중심으로 발생된 학생 맹휴 사건의 진상을 조사 검토하는 한편 국대안 수정에 대한 요강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이것을 4일에 열린 입의 제25차 본회의에 부의하였는데 그 토의 결과는 주목되는 바 있다. 
1. 법령 제102호 제7조 이사회에 관한 조항을 개정하여 조선인만으로의 이사 10명을 각계 의견을 종합하여 급속히 선정 임명하고 조선인 총장을 천거케 할 것. 
2. 예산액의 자금 융통을 원활히 하고 그 실시에 있어서 각 단과 대학의 독자성을 십분 고려할 것. 
3. 실험 설비, 도서 확충, 교구 정비 등을 단행할것. 
4. 제반 후생 시설을 개선할 것(교통, 주택, 기숙사 설비, 주식편의 등) 
5. 교수의 보수를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생활을 보장할 것. 
6. 교수 양성의 방도를 급속히 강구 실시할 것(외국 유학생 파견, 외국인 교수 초빙, 유능 강사 증빙)
  • 1947년 3월 5일 <동아일보> 國立大學을 世界 優秀 大學으로
立議에서 敎育委員會에 委囑
국대안 반대 문제를 계기로 한 맹휴 사건과 그 뒤 문제를 처리하고자 지난 17일 러-취 군정장관은 입법의원으로 하여금 조사하고 이 법령 百二호 수정안을 토의하여 국립대학을 세계의 우수한 대학이 되게 하는 기본 법을 제정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입법의원에서는 이 문제를 제6분과(문교)위원회에 위촉하여 연구 조사하고 대책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로 3일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동분과 위원장 黃保益 씨는 별항과 같은 요지의 안을 제의하여 이 문제의 해결에 새로운 제시를 하였다.
   ▲ 맹휴의 원인
인재난과 아울러 국대안 반대 교수들의 복직 거부로 수업이 불충분하며 학생을 너무 많이 수용하여 수업상 지장이 있다.
국대안을 노예 교육으로 해석하고 한편 군정장관은 이유없이 등교치 아니하면 퇴학 처분하겠다는 통고를 민족적 모욕이라고 해석하여 감정을 격발시킨 것 등과 일부 외부의 선동으로 국대안 반대에 자극을 가진 점도 있다.
   ▲ 국대안 운영상 제결함
  一. 교육방면 : 국대안 실시 전 교실의 배치, 제반 설비와 시설, 교수 진영 교과 내용 준비 등에 있어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고 일부 학교에 있어서 모집 생도 과다와 不合作 敎授 퇴진으로 인하여 충분한 敎授가 실시되지 못한 것.
  二. 經濟的 方面 : (가) 예산의 자금조달이 元滑하지 못한 것  (나) 사무중앙화의 관계로 각 대학 본위로서의 경제 운영 上 불편한 점이 많은 것 (다) 교수의 보수가 太低하여 생활의 위협을 받은 것 (라) 후생시설(특히 교통, 주택, 기숙사 시설)의 불충분으로 교직원과 학생의 일상 생활에 심한 지장이 있는 것
  三. 人的 方面 : (가) 현 운영 主體인 臨時理事會는 全員이 文敎 行政 當路者의 겸임이므로 알반에게 관료的 색채가 농후하다는 감을 주는 것 (나) 현 총장 교무처장이 美人인 관계상 조선의 실정과 심리 동향을 明察치 못함과 언어 관계로 의사의 疏隔이 있어 大學長, 敎授, 學生 관계가 10분 발휘치 못한 것 (다) 敎授, 강사 인원의 부족(不合作 敎授團의 非協力도 큰 원인)
   ▲ 對策
  一. 法令 第102호 第7條 즉 이사회에 관한 조항을 개정하여 조선인만으로의 이사 10명을 각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급속히 선정 임명하고 조선인 총장을 추천케 할 것.
  二. 예산액의 자금 융통을 元滑히 하고 그 실시에 있어서 각 단과大學의 독자성을 십분 고려할 것.
  三. 실험 설비, 도서 확충, 교구 정비 등을 단행할 것.
  四. 敎授 厚生 施設을 改善할 것(교통, 주택, 기숙사설비, 晝食便宜 등)
  五. 교수 양성의 방도를 급속히 강구 실시할 것. 
  六. 외국 유학생 파견, 외국인 교수 초빙, 유능 강사 增招
  七. 사상적 정치적 배후 조종으로 학원의 혼란과 파괴를 책동하는 분자를 철저히 숙청할 것.
  八. 교직원으로서 외부 조종자와 연락 호응하여 맹휴와 분류를 선동 조장하는 자를 교육계에서 제거할 것.
  • 1947년 3월 5일 <동아일보> 登錄, 登校하자 - 建設學生會에서 聲明

@실제날짜:470304

3일부터 시작한 국립서울대학교의 학생 등록에 대하여 동 대학 건설학생회에서는 등록 기일이 5일까지이니 일반 학생은 등록 등교하여 민주 학원을 건설하자고 4일 간곡한 성명서를 내여 동지 학생의 성원을 구하였다.
  • 1947년 3월 5일 <동아일보> 登錄 學生 減少 - 根本 解決은 언제

@실제날짜:470304

앞서부터 국립대학교안 반대를 애워싸고 각 학원에서 일어난 학생 맹휴 사건은 제2차 등록기(3일부터 5일까지)를 당하여서도 여전히 암운을 던지고 있다. 등록 초일인 3일엔 7천여 학생 중 불과 2백 2명이 등록하였고 4일도 등록하는 학생 수효는 매우 적어 국대안 해결이 적지아니 우려된다.
  • 1947년 3월 5일 <동아일보> 全國學生聯盟 聲明
전국학생총연맹에서는 기미독립기념준비위원장 엄항섭 씨의 돌연 구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一. 본 대회는 수십만의 애국 단체 민의 총의로서 거행되었다. 주최자측으로서는 식순에 의하여 진행하였고 당일 시위에 대하여는 애국 열정의 발로로 폐식 후 학생이 등단하여 시위를 선언하자 각 학생 단체에서 찬동하여 학생을 선두로 시위를 단행한 것이다.
一. 본 회 책임자는 시위에 대하여는 하등의 관계는 無하므로 즉시 석방을 渴願한다.
一. 시위에 대한 책임은 백만 학도가 전폭적으로 책임 부담하며 吾等을 구금하기를 요청한다. 아울러 시위는
一. 자유와 평화를 애호하는 군정 당국이라면 일절 자유 건설 시위를 금하지 말라.
  • 1947년 3월 5일 <동아일보> 學園 建設에 邁進하자 - 商科大學 臨時 學生會 聲明

@실제날짜:470304

상과대학 임시학생회에서는 4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학생의 반성을 요망한 바 있었다. 
  聲明
민족의 분열, 사회의 혼란, 破綻이 직접 간접적으로 학원에 영향을 줌은 불가피한 사실일 것이나 조국 明日의 運命을 짊어진 학생들과 학원은 최선을 다하여 그 순수성과 독자성을 지키며 학문 연구와 학원 건설○○의 것에 努力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일 일부 학도는 학원 혼란 선동의 主狗가 되며 그 조종에 詭動하여 맹휴를 계속함은 학원 발전의 일대 장해이며 학생 자신의 회○치 못할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부단히 등교하는 학생은 물론 맹휴에 가담하였던 학생들까지도 총 등교하여 수강하고 있으며 앞으로 학원 건설에 일로매진할 것을 맹서한다.
  • 1947년 3월 5일 <한성일보> 국대안 해결될 방안인가?- 입의 분과회서 대책안 제시
국대안을 싸고 도는 학원의 풍파는 날이 갈수록 그 지식을 좀체 보이지 않고 있으며 3월 3일부터의 등록 취학도 학생측의 강경한 결의로서 원만한 해결을 나타내지 못해 그 귀추는 자못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바 입법의원에서는 과반 국대안에 대한 내막과 그 대책의 제시를 요구하였던 바 동 위원회로부터 오래 동안 문교 당국 및 관계 학교 방면에서 조사한 결과 동 문제에 대한 진상과 대책에 관한 의견서를 입법의원의장에게 제출한 바 있었는데 맹휴의 경과와 원인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있고 이어서 운영상의 결함과 해결 대책을 다음과 같이 지적 제출하였다.
◇운영 상의 모든 결함◇
1. 교육방면; 국대안 실시 전 교실의 배치, 제반 설비와 시설, 교수진영, 교과 내용 준비에 있어서 다소 불비한 점이 있었고 일부 학교에 있어서 모집 생도 과다와 불합작 교수의 퇴진으로 인하여 충분한 교수가 실시되지 못한 것.
2. 경제적 방면; (가)예산의 자금 조달이 원할하지 못한 것 (나)사무 중앙화의 관계로 각 대학 본의로서의 경제 운영상 불편한 점이 많은 것 (다)교육의 보수가 대저하여 생활의 위험을 받은 것 (보급표 참조) (라)후생시설(특히 교통, 주택, 기숙사의 불충분으로 교직원과 학생의 일상 공사생활에 심한 지장이 있는 것)
3. 인적 방면 (가)현 운영 주체인 임시 이사회는 전원이 문교 행정 당국자의 겸임이므로 일반에게 관료적 색체가 농후하다는 감을 주는 것 (나)현 총장·교무처인 미국인 인관계상 조선의 실정과 심리 동향을 명찰치 못함과 언어 관계로 의사의 소격에 있어 대학장, 교수, 학생 관계가 십분 원만치 못한 것 (다)교수, 강사 인원의 부족(불합작 교수단의 비협력도 큰 원인)
◇대책◇
1.법령 제 102호 제 7조 즉 이사회에 관한 조항을 제정하여 조선인만으로의 이사 10명 각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급속히 선정 임명하고 조선인 총장을 추거케 할 것.
2. 예산액의 자금 융통을 원할히 하고 그 실시에 있어 각 단과대학의 독자성을 십분 고려할 것.
3. 실시 설비, 도서 확충, 교구 정비 등을 단행할 것.
4. 제반 후생 시설을 개선할 것. (교통, 주택, 기숙사 설비, 주식편의 등)
5. 교수 양성의 방도를 급속 강구 실시할 것.
6. 외국 유학생 파견, 외국인 교수 초빙, 유능 강사 증빙.
7. 사상적, 정치적 배후 조종으로 학원의 혼란과 파괴를 책동하는 분자를 철저히 숙청할 것.
8. 교직원으로서 외부 조종자와 연락 호응하여 맹휴와 분쟁을 선동 조장하는 자를 교육계에서 제거할 것.
  • 1947년 3월 6일 <독립신보> 국대안 시급 해결 요망 - 7천여 학생에 5백 명이 등록

@실제날짜:470305

국대 등록 최후의 날 5일까지의 등록 학생은 겨우 5백여 명에 지나지 않다 한다. 이 숫자는 국대생 7천여 명에 비하여 1할도 못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학생들의 정식으로 등록은 매우 주목되며 과연 학생들이 거부한다고 해서서 학교 당국의 최후의 斷, 제명 처분을 할는지 또는 동록 기일을 재연기할는지 당국의 태도는 극히 주목된다. 그런데 학생들의 거부 이유로서는 문교 당국이 말뿐이고 학생들의 요구에 대하여 실천을 못할 뿐더러 무성의하고 더욱이 '교수없는 학원에 무슨 공부를 하러 가나'가 공통된 학생들의 거부 이유이며 국대안이 철폐될 때가지 등교를 거부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리하여 '국대'는 의연히 난항을 계속하고 있는데 문교 당국의 태도 여하가 맹휴 해결의 열쇠가 되고 있는 만치 넓은 아량과 도량으로 조선의 청년 학도를 위하여 가장 애정적이요 민주주의적인 해결을 요망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 1947년 3월 6일 <동아일보> 跋扈하는 學園"뿌로-카" - 警察에서 嚴重 取調
이름좋은 학원 경영을 내걸고 그 실은 입학금 월사금 무슨비 무슨비 등으로 사복을 채우는 학원 뿌로카-에 시당국에서는 메스를 내리게 되었다.
시내 모 사립 공업학교는 작년 11월부터 학교 시설 관리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 휴학에 들어간 채 오늘날 까지 맹휴가 계속되고 있는데 동교 교장 李모는 동맹 휴학 동안에 많은 학생을 모집, 입학시켜 입학금으로 사복을 채워 학생을 울리고 학부형을 희롱하고 있어 시당국에서는 조사 여하에 따라서는 단호한 처단을 내리게 되었거니와 일방 경찰 당국에서도 동교 교장을 방금 불구속으로 취조 중인데 앞으로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주요용어:맹휴, 학원부로커

  • 1947년 3월 6일 <동아일보> 百萬 學徒 死의 決議- 最後 一人까지 共同 鬪爭
全國 學生總聯盟에서 聲明
전국학생총연맹중앙총본부, 서북학생후원회, 애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 공동 명의로 전국학생총연맹위원장 이철승 군외 백만 학도의 일사 순국의 정열을 모은 결의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決議文
一. 미소 양 군은 철퇴하고 대한민국의 정권 수립을 즉시 공인하라.
二. 학생의 기미년 독립기념대회 참가를 방지하고 순결한 학생의 독립 정신을 무시한 미군정하의 문교부 책임자는 양심적 사직을 하라.
三. 南勞黨, 民靑, 全評의 行事를 암암리에 승인하고 민주주의의 미명하에 白晝赤狗의 테로를 근절 못하고 骨肉相爭을 시키는 미군정 관리를 파면하라.
四. 純眞無垢한 학생을 살해한 남로당, 민청, 전평을 즉각 해산시키라.
五. 순국 동지의 학생연합葬 時까지 이에 대하여 당국자는 和答하라.
이상의 五約은 우리 백만 학도가 최후의 일인까지 공동 투쟁으로써 그의 실행을 볼 때까지 싸울 것을 연합군 원수, 미군정 당국자 各부형들께 정확한 결의로써 건의함.
   연합국 원수에 결의문을 발송 - 전국학생연맹
전국학생총연맹, 한국학생동맹, 서북학생원호회, 애국학생공동투쟁회에서는 공동 명의로 연합국 원수에게 백만 학도의 열열한 결의문을 보내어 애국 정신에 불타는 조선 학생들의 의기를 알리었다.
  • 1947년 3월 7일 <독립신보> 최후까지 등록 거부- 사대 공투서 성명

@실제날짜:470306

등록을 거부한 서울사범대학투쟁위원회에서는 6일 다음과 같이 국대안이 철폐되는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겠다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국대안 철회를 위하여 전 학생이 일어선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제1차 등록 이후 국대안이 무엇이란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사대생은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용감히 일어섰다. 당국은 또 다시 등록을 요구하고 있으나 우리는 또 다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등록을 강제 요구할지라도 우리들은 국대안이 철회되는 최후의 날까지 과감히 싸울 것을 널리 선언한다.
  • 1947년 3월 7일 <동아일보> 러-長官 學園에 要望 - 登錄 就學하라
러-취 장관은 국대안 처리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써 개혁도중 일지라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현재 국대안 처리 문제는 立議에서 조사, 연구, 토의하여 다대수의 조선 사람이 원하는 대학을 만들고자 하는 중인데 이리 개혁하는 도중이라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서는 등록을 하여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니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1947년 3월 7일 <동아일보> 文大, 法大를 비롯 各大學 今日부터 登校 開講
학원에 새봄은 왔다.
국대안 문제를 싸고 문리과대학을 비롯한 각 대학에서는 그동안 맹휴의 중심이 되어 활발히 투쟁을 계속해 왔던 것인데 요즘 문교 당국으로부터 성의있는 조치가 있기로 約束한 바 있고 또한 건국도상의 다난한 제반 정세에 비추어 학생으로서 맹휴라는 비상 수단을 敢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들어 일제히 등교하여 수업하기를 결정하였다. 즉 문리과대학에서는 5일 학생대회를 열고 별항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 동시에 곧 등교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법과대학에서도 5일 현재 3백 20명의 학생이 등록을 하고 맹휴를 반대함으로 3월 7일부터 전면 개강을 시작하기로 되었다.
   聲明書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吾等 7백여 학도는 국대안의 내포한 결함의 시정을 중심으로 한 4대 요구 조건을 걸고 맹휴를 단행한 후 순수한 학도적 양심에서 열렬한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에 오등의 단결과 전국민의 열의로 문교 당국은 1. 이사회를 조선인으로 구성하고 조선인 총장을 임명할 것. 2. 신성한 학원에 경찰 간섭을 원칙적으로 배제할 것. 3. 국대안의 결함을 인정하고 시정에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 등을 전국민 앞에 공약하고, 4. 민족적 치욕이던 3대학 휴교 처분은 우리의 단결로 사실상 해소되었다. 이것은 오등의 정당한 투쟁에 대한 당연한 성과라고 하겠다. 이에 당국의 성의와 건국도상의 다난한 제반 정세를 신중히 고려하여 맹휴라는 비상 수단을 중지하고 그리운 학원에 등교하여 연학에 매진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국대안의 제결함은 이것으로 완전한 해결을 보았다고 하기에는 ○으나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차후 어디까지든지 학원의 자주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양심적이고 순수한 평화적 투쟁이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생명은 그 순수성에 있는 만큼 우리는 이것을 濁하게 하는 모든 모략이나 허위 선전 등을 극력 배제하여 時代에 예속하지 않는 문화 생활의 역군이 되어 조선 학도의 명예를 길이 빛낼 것을 천하에 성명한다.
  • 1947년 3월 7일 <동아일보> 醫大學生會에서 敎授 退去를 聲明

@실제날짜:470305

의대 제1부 학생회에서는 5일 등교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들어 성명하였다.
一. 學園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교수는 우리 신성한 조국 청년 학도의 양심이 허락치 않으니 즉시 사퇴할 것.
二. 몇몇 모략 分子로 구성된 수업표를 개정하고 敎育政策上 도저히 용납치 못할 차별 교육을 즉시 근절할 것.
  • 1947년 3월 7일 <동아일보> 千二百名 登錄 - 各學長 緊急會
파란과 오뇌속에 발족한 서울국립대학교는 학생측의 전면적 반대로 여러 차례의 동맹 휴학을 단행하여 사회의 중대 관심을 이끌고 있다. 특히 지난번의 맹휴에 이어 일부 학생 중에는 벽보 붙이다 또는 등교 방해 등의 이유로 경찰에 구금 중에 있고 한편 3일부터의 등록을 단연 거부하는 측과 등록에 응하려는 측이 있어 크게 주목되던 중 등록 처음날인 5일 현재로 1,265명(수원농과대학은 조회 중)이 등록하였다. 이는 전교생 7,761명에 비하면 16퍼-센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금후 미등록 학생들과 학교 당국의 처사 여하에 달려 원만 해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한편 각 대학학장들은 6일 상오부터 문리과대학에서 긴급 대책을 협의 중인데 대체로 등록 기한에 대하여서는 한 걸음 양보하여 기일 연기의 온정을 보여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1947년 3월 7일 <한성일보> 국대문제, 등록은 지지 부진- 9대 학장회의 열고 대책 검토
국립서울대학 재조직안은 수일 전부터 입법의원에서 취급되고 있으며 그 결정에 대하여서는 러취 군정장관이 간섭치 않겠다고 작 6일 언명한 바 있었다. 한편 지난 3일 제 2학기를 맞이한 9대학에서는 동 3일부터 5일까지의 3일 간을 학생 등록 기간으로 정하였던 바 농과대학을 제외한 시내에 있는 8대학의 등록 학생이 3일에 220명, 4일에 727명, 5일에 784명으로 5일 오후 5시 등록 마감 시간까지의 전 등록 학생이 겨우 1,263명이어서 9대학 전 재적학생 7,761명의 16퍼센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등록을 거부한 5,500학생에게 대한 처치 문제가 주목되는 바 작 6일 9대학 학장회의를 개최하고 동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가 있었다 한다.
  • 1947년 3월 7일 <한성일보> 법대 개강
그 동안에 맹휴의 파문으로 휴강 중에 있던 법과대학은 맹휴를 반대하고 등교하자는 학생들의 다수 출석으로 7일부터 전원 개강하였다 한다. 
  • 1947년 3월 7일 <한성일보> 학도는 연학의 문으로- 서울대학 학생회서 등록 성명

@실제날짜:470305

국대안 반대와 맹휴로 각 방면에 논의가 분분하던 학원 분규 사건은 안민정장관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의 언명과 아울러 학생들의 건국 정신에 입각한 자발적인 궐기로서 그의 수습에 적지 않은 서광이 보여 오는 바 지난 5일 오전 11시 서울대학 강당에서 3백여 학생의 참석 하에 학생회를 개최하고 학원의 당면 문제에 대하여 열열한 토의가 있은 후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업에 일의 매진하기로 되었다 한다.
▲ 성명서 ▲
민주학원의 건설을 위하여 오등 700여 학도는 국대안의 내포한 결함의 시정을 중심으로 한 4대 요구 조건을 걸고 맹휴를 단행한 후 순수한 학도적 양심에서 열열한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에 오등의 단결과 전국민의 열의로 문교 당국은
1. 이사회를 조선인으로 구성하고 조선인 총장을 임명할 것
2. 신성한 학원에 경찰 간섭을 원칙적으로 배제할 것
3. 국대안의 결함을 인정하고 시정에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
4. 민족적 치욕이던 3대학 휴교 처분은 우리의 단결로 사실상 해결되었다. 이것은 오등의 정당한 투쟁에 대한 당연한 성과라고 하겠다. 이에 당국의 성의와 건국 도상의 다난한 제반 정세를 신중히 고려하여 맹휴라는 비상 수단을 중지하고 그리운 학원에 등교하여 연학에 매진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국대안의 제 결함은 이것으로 완전한 해결을 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맹휴를 중지하였다는 것이 결코 오등의 투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차후 어디까지든지 학원의 자주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양심적이고 순수한 평화적 투쟁이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1947년 3월 5일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학생회
  • 1947년 3월 8일 <독립신보> 국대안철회를 민전서 성명

@실제날짜:470307

국대 학생들의 등록 거부에 대하여 민전에서는 7일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국대안은 학생 등록 거부로 또 실패를 거듭하였다. 대체로 당국은 무엇때문에 학생과 교원과 사회의 '국대안을 철회하라'는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국대안 해결책은 
▲ 문교 책임자를 즉시 파면시킬 것. 
▲ 하등 필요없는 학원의 관료적 지배 기관인 이사회를 철폐하여 학원의 운영을 교수회의 자치에 맡길 것(후략).
  • 1947년 3월 8일 <독립신보> 등록 거부 학생은 제명 - 각대학 학장회의서

@실제날짜:470306

국대 학생 중 90퍼센트에 가까운 학생이 등록을 거부한데 대하여 서울대학에서는 6, 7 양일에 걸쳐 각 대학 학장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한다. 그런데 일부 반대도 있었으나 거부 학생들에 대해서는 제명 처분을 하리라고 한다. 일방 군정청에서는 국대 이사진을 개편하려고 인선 중인데 머지않아 결정되리라고 한다.
  • 1947년 3월 9일 <독립신보> 국대안 해결은 期待 難望 -입의선 형식과 절차만 되풀이

@실제날짜:470306

작보한 입법의원에서의 국대 문제 토의는 지난 4일 문교분과위원으로부터 해결안에 관한 보고서 제출 ○○○○○○을 거듭하여 토론을 개시하였으나 왈가 왈부 갑론 을박의 쓸데없는 의견 진술이 있었을 뿐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고 7일이 지난 제27차 회의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끝이 없으니 토론을 중지하고 이 문제를 다시 문교분과위원회에 돌려주어 수정안의 법문화를 마친 다음 본회의에 재 제출케 하라'는 김영규의원의 동의가 있었다. 이때 탁창혁의원으로부터 최동오 부의장에게 발언을 요구 
탁: 개의를 하여도 좋습니까? 
최: (웃으면서) 있으면 하지 물어볼게 무어 있소? 
탁: 그러면 하겠습니다. (이때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난다.) 나는 국대안을 측시 철폐하고 구교수를 복직시킬 것을 개의합니다. 
최: 再意면 몰라도 그것이 개의는 못됩니다. 개의라는 것은 동의에 대해서 ○○○을 하는 것인데 탁의원의 발언은 동의와 전연 반대되는 것이니(후략)
  • 1947년 3월 9일 <독립신보> 선생을 생도가 구타 치사 -광주사범서 일어난 불상사

@실제날짜:470304

광주7일발 조선 해방 후 신교장 배척 등을 위시하여 교유 생도측간에 끊임없는 충돌이 발생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던 광주사범학교에서는 드디어 대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지난 2일 밤 중 수명의 학생이 숙직 중인 동교 교유 박응섭(51) 씨를 습격 무수 구타하여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러 의대부속병원에 입원, 응급치료를 받었으나 급소의 치명상으로 말미암아 4일 오후 4시 반경에 드디어 순직하였다 하는데 씨는 함흥 출신으로 당지에는 단신교편을 잡고 있어 매우 적적한 처지였다.
  • 1947년 3월 9일 <독립신보> 책임자 인책 등 -京大 조교수 등 당국에 통고문
구경성대학 의학부 조교수, 강사, 의국원 일동은 국대안에 대하여 당초부터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당국의 강압으로 실시되자 학구심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은 진정한 연구를 지향하고 민주 교육 건설에 이바지하고저 국대에 참여하였으나 제모순을 참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제반 모순을 지적하는 동시에 국대안 철회와 문교 당국자의 인책 사임 등의 5개조 결의 사항을 당국에 통고하였다 한다.
  • 1947년 3월 9일 <동아일보> 學生이 先生을 打殺 - 光州師範 宿直室, 夜半의 慘劇
古今에 못본 學園의 不祥事
해방 후 신설 교장 배척 등을 비롯하여 교육, 생도간에 부단 충돌이 발생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던 광주사범학교에서 드디어 대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지난 2일 야반 수명의 학생이 숙직 중인 동교 교육 朴應燮(51) 씨를 습격, 무수 구타하여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러 의대부속병원에 입원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급소의 치명상으로 말미암아 5일 오후 네시반 드디어 순직하였다. 씨는 함흥출신으로 당지에는 단신 교편을 잡고 있어 적적한 처지였다.
   "學生은 더욱 冷情하라 - 先生죽이는 自由는 不可"
광주사범학교 불상사 사건에 대하여 문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교부당국 談
"아직 문교부엔 정식 통지가 없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민주주의 원칙에서 자라나려는 우리 학원에 저윽이 우려되는 유감된 현상이다.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스승을 때려 죽이는 자유까지 있어서는 그 자유의 결과는 매우 우려할 일이다. 모름지기 학생은 보다 더 명철한 究學의 태도로써 모든 일을 판단하여 실천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47년 3월 9일 <한성일보> 은사를 구타 치사- 광주사범 학생의 悖倫

@실제날짜:470302

해방 후 신교장 배척 등을 위시하여 교유, 생도 측 간에 부단 충돌이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던 광주사범학교에서는 드디어 대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지난 2일 밤 수명의 학생이 숙직 중인 동교 교유 박응섭(朴應섭=51) 씨를 습격 무수 구타하여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러 의대부속병원에 입원 응급치료를 받었으나 치명상으로 말미암아 4일 오후 4시 반 순직하였다.
  • 1947년 3월 11일 <독립신보> 미등록은 離籍으로 인정- 14일까지 복적원없으면 제명
一割强의 등록본 국대 귀추 주목. 학생과 교수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고 그리고 학원으로부터 나간 교수들을 복직시키라 하고 대부분의 학생이 동맹 휴학을 하므로 말미암아 국립 각 대학은 학생을 잃어 빈집 상태에 빠져 있는데 대학측에서는 최후 수단으로서 14일까지 등록을 연기하는 동시에 그 후에 있어서도 등록을 거부하는 학생은 제명 처분하여 학생을 새로 모집하리라 하는데 문교 당국의 강경한 태도와 역시 강경한 학생들의 동향으로 보아 많은 희생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즉 서울대학에서는 연일 학장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 중이었는데 미등록 학생은 이적으로 인정하는 방침을 결정하고 미등록 학생에 대해서는 오는 14일까지 복적원을 체출시키기로 되었다. 복적원을 낸 학생에 대해서는 각 대학에 설치된 대책위원회에서 자격을 심사한 후 이유가 타당하면 학생에 대하여 정식 등록을 접수하리라 한다. 그런데 등록 결과를 보면 전교생 7천7백61명에 대하여 9할의 학생이 등록을 거부하고 있는데 14일까지 복적원을 내지 않는 학생은 제명 처분하고 신규로 학생 모집을 하리라 한다.
  • 1947년 3월 11일 <독립신보> 신설된 중등학교 45- 금년 2월말까지 4개월간에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작년 11월 이후 현재까지 남조선에 45개 교에 달하는 중등학교가 신설되어 이로서 중등학교 총수는 389교에 달한다고 한다. 각 도별 증교수는 다음과 같다. 
서울시 3교, 경기도 2교, 충청남도 8교, 전라북도 5교, 전라남도 17교, 경상북도 3교, 
경상남도 3교, 강원도 3교, 제주도 1교, 계 45교
  • 1947년 3월 11일 <동아일보> 敎職員이 總辭職 - 先生 殺害행위에 憤慨
光州師範不祥事件 後報
광주사범학교에서 교장 배척 등으로 교유와 학생측에 부단한 충돌이 계속되다가 결국은 학생이 교유를 구타 치사케 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 순직 교유 박윤섭(51)의 장의는 동교 교정에서 지난 6일 2시에 擧行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익일인 7일에는 동교 직원 전원이 총사직을 건의하고 교장이하 6인이 전부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다.
  • 1947년 3월 11일 <동아일보> 學生登錄에 暗雲이 繼續 - 復籍願내면 審査後에 認定
八割 未登錄 學生의 對策이 注目
맹휴, 등록 거부로 연달아 학원과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국립서울대학교는 6, 7, 8일 3일간의 학장회에서 긴급 수습책을 협의 중 등록 거부 학생을 위하여 다시 한번 등록의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즉 오는 14일 까지 각 학교에 복적원을 내도록 하여 서류 심사를 한 후 15일 복적 허가를 발표하도록 되었다. 이리하여 복적 허가를 받은 학생은 다시 등록을 하여 수업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5일 현재 제2회 등록에 등록한 학생은 1천 5백 명 (수원농대 포함)정도로 전교생 7,761명에 비하면 불과 2할밖에 안되는데 과연 이번 복적원을 내라는 것으로 5일까지도 등록하지 않은 학생들이 복적원을 내어 심사를 받고 등록을 할 것인지 이번 조치는 다시 한번 학원에 돌을 던지는 결과가 안될까 주목된다.
그리고 학장회의에서는 14일까지 복적원을 아니내는 학생은 모두 제적으로 인정하고 13일 이후에 재모집을 하리라고 한다.
  • 1947년 3월 12일 <독립신보> 광주 각교 일제 등교

@실제날짜:470310

광주10일발 합동 국대안 반대 등을 위효하고 지난 22일부터 맹휴를 단행하고 있던 광주의대를 비롯한 7개 중등학교에서는 금번 퇴학 처분당한 학생의 무조건 복교, 국대안 반대 등 각 요구 조건을 학부형 및 교직원들에게 일임하고 10일부터 일제히 등교하였다 한다.
  • 1947년 3월 12일 <독립신보> 패륜의 여학교 교원-성신여학교 음악교사의 비행
삼천리 금수강산 아름다운 이땅의 겨레들은 예로부터 예의에 돈독하고 특히 사제지간의 엄격한 준율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미풍의 하나였다. 더구나 해방된 후에는 빼았겼던 우리의 문화를 찾고 세계적인 문화 수준에 하루바삐 도달하기 위하여 스승된 자 마땅히 존엄한 인격으로 제자에게 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승된 자가 어린 제자를 음욕 충족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 얼마나 몸서리칠 통탄지사일 것인가? 그런데 不幸히도 이러한 패륜의 스승이 있어 목하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음을 어찌하랴. 즉 시내 동대문구 돈암동에 있는 성신여자중학교 교원 林千壽는 금년 28세된 자로 음악 교수를 담당하고 있음을 기화로 제자에게 음학 공부를 하러 오라고 자기 하숙인 시내 천연동 120의 47로 인도하고 밤늦어 두 제자가 같은 방에서 자게 되자 한 학생을 범한 것이 탄로되어 4일전 성북경찰서에 유치된 후 엄중 취조를 받고 있다는데 이 추한의 독아에 걸려 봄을 버리게 된 여학생의 수효가 더욱 증가될 것 같다고 한다.
  • 1947년 3월 13일 Prostov 한국의 학원사태에 관한 보고서 제출

미소공동위원회의 E. V. Prostov는 Weckerling 장군에게 한국의 학원 사태에 관한 보고서 "School Strikes in Seoul, Korea, Their Political Implications"를 제출하였다. 그 요점 및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학생 시위는 46년 10월경에 시작되었다. 47년 2월에 재개되었으며 좌익 교수들의 사퇴로 더욱 악화되었다. 열악한 교육 환경도 그 원인의 하나이다. 2. 학생운동은 좌익에 의해 조직되고 공산주의의 원조를 받고 있다. 성격상 정치적 운동이다. 3. 많은 교수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우익 지배하의 문교부 관리하에서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좌익 교수들이 학생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4. 학생 운동은 점차 반미 감정으로 발전하고 있다. 5. 남로당이 격려하고 있다. 6. 해결책이 교수들을 중심으로 모색되고 있다. 7. 학생운동은 계속될 전망이다.[139]

  • 1947년 3월 13일 <독립신보> 학원자치 요구코 예산농교 맹휴에 돌입

@실제날짜:470308

예산지국발전 예산농업하교 전교생 7백 명은 지난 8일 국대안 반대,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 학생 자치권 인정 등 6조항을 내걸고 맹휴에 들어갔다.
  • 1947년 3월 14일 <독립신보> 국대안 철폐를 요구 -문화단체

@실제날짜:470313

국대안 문제에 대하여 과학,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미술의 각 동맹과 학술원, 과학기술연맹, 교육자협회, 신문기자회, 무용예술가협회 등 각 단체에서는 13일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 학생 맹휴에 대하여 : 남조선의 학생들이 자기들의 학원을 폐허에서 구출하고 민주화가기 위하여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생들의 요구는 교수의 복직, 경찰의 간섭 반대, 학문 연구의 자유 보장 등이다. 국대안이 이들 요구를 가로막은 기관이라면 전학생의 9할이 등록을 거부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명 처분하려는 당국의 조치는 교육에 대한 최대의 무성의요 반민주적이다. 
2. 문교 당국의 태도에 대하여 : 학생, 교육자, 학부형과 모든 문화인이 반대하는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민주적이요 비민족적이다. 더욱이 복적원이 없으면 제명한다는 위협적 태도는 학교를 페쇄하겠다는 폭거가 아니면 학교를 일부 특권자들의 사랑방으로 여기는 중세적 완고다. 한 말로 하면 투표수자는 9대 1이요 사회여론이 절대 결정적인 이상 국대안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즉시 철폐를 강경히 주장한다. 다음으로 문교부 책임자는 책임을 느끼고 이 이상 조선 교육의 역사에 오점을 그리지 않도록 용퇴할 것이며 대학의 재건책을 학생 대표, 교수, 교육자, 문화인들에게 맡기기를 요망한다.
  • 1947년 3월 14일 <독립신보> 국대안 해결에 성의 보이라- 복적기한전에 보결생 모집은 당국의 무성의

@실제날짜:470312

국대안 문제를 싸고 38이남 전조선에 걸쳐 전문대학은 물론 중등학교의 대부분이 참가하여 수 개월을 두고 계속되던 학원 맹휴 사건은 지난 3일 학생 등록에 있어 7천여 명 국대생 중 불과 17퍼센트의 등록율을 보였는데 문교부에는 나머지 83퍼센트의 학생도 14일까지 복적치 않으면 전부 제명한다고 발표하여 금후 사태가 주목되던 바 여사히 중대 위기에 봉착한 학원 문제 해결에 있어 우리들 학부형으로서도 방관할 수가 없다 하여 학부형 유지로서 발기 중에 있던 맹휴 대책 9개대학 학부형연합대회가 지난 12일 오후 2시 YMCA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금번 맹휴의 해결여하는 금후 조선 교육의 백년지계를 결정하는 중대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금번 학부형회의 결과와 금후 활동은 각계의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할 것이다. 회의는 먼저 이홍종 윤치형 홍용식 3씨를 의장으로 선거한 다음 문교부 고등교육과장으로부터 문교부의 태도 설명, 공대교수 모씨의 교수가 본 국대안과 금번 맹휴 진상, 학생 대표로서 맹휴 학생과 맹휴 반대 학생 쌍방의 견해를 청취한 다음 토의에 들어갔는데 학부형측의 의견으로서는 이러한 회합에 문교부장 자신이 출석치 않는 것은 문교 당국에 맹휴 해결의 성의가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며 학교에 나오기 싫거든 돈이나 벌어라, 또는 언제까지 안나오면 퇴학을 시킨다는 등의 위협적 언사는 학생뿐 아니라 우리 학부형에게도 심히 불쾌한 감을 준다. 국대안은 교육의 일제 잔재를 숙청하고 민주 교육을 실시하는데 있다 하나 국대안을 안출한 문교부 자체 내에 일제 잔재가 더 많이 있다고 본다. 또는 14일까지의 기한을 준 복적 기한이 마감되기도 전에 모학교에서는 벌써 보결생을 모집하고 있으니 이러한 태도가 맹휴를 해결할 성의에서 나온 것인가. 등등의 발언이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학부형 중 각 대학에서 2명씩 18인을 선출하여 實行위원회를 구성하여 우선 문교부에 상의하여 '14일까지 복적치 않으면 제명한다'는 발표를 철회시킨 다음 문교부, 학교 당국, 학생측, 사회 각 방면 등과 협의하여 금번 맹휴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기하자는 결의를 한 다음 오후 6시에 폐회하였다.
  • 1947년 3월 14일 <독립신보> 立議의 국대안 해결안

@실제날짜:470314

군정장관 러취소장의 위촉에 의하여 입의에서는 맹휴 중에 있는 국대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저 지난 4일 문교분과위원회로부터 맹휴 대책에 관한 보고서 제출이 있자 7일에 이르기까지 연 사흘을 거듭하여 토론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문교분과위원회에 다시 회부하여 법문화를 마친 다음 본회의에 재보고케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 거니와 이에 의하여 문교분과위원회에서 그동안 심의한 결과 결정된 국대설립에 관한 법령 제102호의 개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제7조. 가)기구(1) 규정 제1호 중 '문교부장 직권으로'를 삭제하고 '문교부의 추천으로'를 '군정청 부처장회의의 추천으로 군정장관이 임명함. 단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인준을 요함'으로 개정함. 
제7조. 가) 기구 (1) 규정 제3호 중 이사의 임기 '6년'을 '2년'으로 개정함. 
제7조 (가) 기구 (2) 임시이사회에 관한 규정 전문을 삭제함. 
제7조 (나) 직능과 임무 (2) 항중 '서면으로 수락한 時 정식으로 그 직에 임명됨'을 '서면으로 수락한 시 군정장관이 정식으로 此를 임명함'으로 개정하고 이하 단서를 삭제함. 
제7조. (다) 보수규정의 '문교부장의 제의로 인사 행정처장이 결정함'을 '행정府 최고책임자가 결정함'으로 개정함.
  • 1947년 3월 14일 <독립신보> 初志를 불변 -국대안 교육자대책위

@실제날짜:470313

학생에 대하여 제적 처분을 하고 또한 학생들에 대하여 복적원을 재출시킨다는 학장회의의 결정은 ○대 교육계에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한 처사라고 국대안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13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학장회의에서 복적원을 제출치 않으면 제명하고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결정이 있었는데 도대체 학장 9명은 6천여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가? 누구를 위한 대학인가. 복적이란 무엇인가. 이는 실로 20세기 교육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으며, 민족적 공분을 극도로 일으키게 한다. 학장 제공은 그 결정을 즉시 취소하고 민족앞에 사과해야 될 것이다. 
1. 안 민정장관은 불합작 교수의 대다수가 복직을 희망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당국의 무성의한 탄압과 기만 위협 등으로 비민주적 전제로 종시하는 한 문제 해결에는 일보의 접근도 없을 것이며 근본적 해결 시까지 우리의 초지는 불변할 것이다.
  • 1947년 3월 14일 <동아일보> 國大問題報告- 立議30次 會議

@실제날짜:470313

입의 30차 본회의는 13일 하오 1시 25분부터 尹○○○○長사회로 개회되어 먼저 29차 회록을 통과시키고 심의안건에 들어가 국대안을 ○○한 학생맹휴○○에 대한 건을 상정시켜 제6분과회의 ○○○의원의 이에 대한(후략)
  • 1947년 3월 14일 <한성일보> 등록 취학의 길로- 국대안 안민정장관 특별 발표

@실제날짜:470313

안민정장관은 작 13일 서울대학교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다.
애국적인 순진한 학생 제군은 지정한 14일 오후 5시까지 모두 복교원을 제출하고 복교 취학의 길을 열 것이다.
1. 검거된 학생 수는 소수이고 그중에도 단순한 뇌동적인 피검자는 판명되는 대로 상당 수를 석방하였다.
1. 9인 이사는 이미 부처장회의에서 신중 진행되어 각각 그 수락을 내 교섭 중이니 대학 행정은 조선화로 그 궤도에 올라 올 것이 의심없다.
1. 교수회는 학부 교수회와 대학 교수회로 되어 있고 각각 그 회장이 되는 학부장, 대학장의 자문에 응하여 의견 제안하는 권이 있으므로 그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것이다.
1. 학생회는 교사로서 조직된 "學生團體委員會"와 대학 총장의 승락으로 이를 회칙에 의하여 조직 운영될 것이오 학생단체위원회의 승인으로 1인 이상 교수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대학교법령 범위 한에서 자치를 향유할 것이다.    현재에 있어 상술 정도의 변법으로서 국대안은 적정 해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고집한다면 현실적인 인식의 과오이다. 그리고 兪문교부장의 고충과 노력을 양해할 필요가 있다.
  • 1947년 3월 14일 <한성일보> 사회시론 : 學園의 革淸- 어머니의 요구
가정 교육을 아무리 잘한다고 하여도 학교 교육의 진실한 협력이 없고서는 우리의 참다운 자녀를 기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의 질서가 없어지고 가정 생활에 암영이 떠돌기 쉬운 요즈음에 있어서는 학교에서의 밝고 참된 교육을 전폭적으로 바라는 바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학원을 살펴 보면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믿기조차 싫은 사실이 발생하여 어린 생명을 죽이고 나라의 기둥을 좀먹는 교육자 아닌 교육자가 각 학교에 날개를 펴고 있으니 학부형의 하나로 학교 당국에 부탁과 충고를 아니할 수 없다. 더욱 전문대학과 같은 학술에 치중한 교수들과도 다른 중등이나 여학원의 교유들은 학술 기술보다도 그 인격으로서 교육이 있어야 한다.
학교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술집으로 달려 학생들에게 악영향만 주는 선생! 시간만 있으면 쓸데없는 정담으로 배움의 싹을 흔들어 꺽어버리는 선생! 사복을 채우려고 학교 당국은 알지도 못하는 특별 원조금 등등의 미명 밑에 이북으로부터 오는 보결생에게 수많은 기부금을 받는 선생! 이런 선생들은 학원 내의 피교육자뿐만 아니라 바른 생각을 갖은 소수의 교유까지 망쳐버리는 모양이니 스스로 깊은 자숙하기를 바라며 그렇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매장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모여학교의 음악 교수의 사건은 한 학부형으로 믿기도 싫은 일이다.
내 딸을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로 치가 떨리는 무서운 일이다. 바라건데 건국 도상에 있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그 참된 일꾼을 그대들의 인격과 행위로서 길러야할 교육자들이 아닌가? 우리 가정 교육의 참된 협력보담 지침이 되어 주기를 바랄뿐이다. (일 학생의 어머니)
  • 1947년 3월 15일 <독립신보> 국대안 해결책 앞두고 기한부 복적 강요는 본궤도 이탈

@실제날짜:470313

13일 입의 제30차 회의에서는 작보한 국대설립에 관한 법령 제102호의 수정안을 상정하고 토론을 전개하였는데 그 석상에서 신기언 의원으로부터 본원은 지금 맹휴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토의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에서는 14일까지 복적원을 내지 않으며 안된다는 등 혼란만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맹휴 해결책이 결정될 때까지 복적원 제출운운을 보류하도록 학교 당국과 문교 당국에 의뢰하자는 긴급 동의가 있어 결국 30대 3으로 이 안이 통과 채택되었는데 과연 문교 당국과 학교측에서 입의측의 위탁을 수락할는지 주목되고 있다.
  • 1947년 3월 15일 <독립신보> 누구를 위한 국대안? 배움에 주린 학생들을 구하라
작금 4일 서울대학에서는 등록 거부 맹휴 학생에 대한 복적원 접수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복적자는 불과 몇명 안된다고 한다. 현명한 학교 당국이 이것을 예측하여서인지 학생의 재모집을 하고 있다. 복적원이란 것도 교육사상 없는 일이지만 학교 당국의 처사는 과연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어느 대학에서는 단식 투쟁을 하고 있고 이외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목이 쉬도록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과연 국대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복적원까지 거부하였다 해서 당국은 그들을 그들의 학원으로부터 逐出할 것인가? 각계의 여론은 당국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힐난하고 있으며 성의있는 당국의 대책을 요청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대안인가? 조선 민족을 위하고 건국 청년을 위한 국대안일진대 이렇게도 비장히 외치고 고함치는 젊은 함성의 파도를 탁상 공론으로 막을 수 있을까? 문교부 당국자여 그대들도 학원과 거리에 나서서 이 외침을 들어보라. 목말라가는 이 민족에 학원의 자유를 좀더 줄 수 없을까? 요사히 학생들이 배워야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왜 모르는가? 일제 전쟁통에 5, 6년간 배우지 못하고 해방 후 1년 반이 지나도 배우지를 못하니 그들의 안타까움이 전조선 민족의 안타까움이 아닐 수 있으랴? 거듭 말하노니 당국자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에 쫓아 허심탄회한 가운데 민족적인 성의와 열성에서 화급한 국대안 해결책을 요망하는 것이 민족의 외침이다.
  • 1947년 3월 15일 <독립신보> 복적원 접수마감 연기- 문교부서 서울대학에 통첩
입법의원의 결의로 말미암아 문교 당국은 서울대학에 대하여 복적원 접수 마감을 보류하라고 15일 통첩하였다. 그런데 아직 확실한 숫자는 모르나 복적원을 제출한 학생수는 불과 7, 8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학생 총수 7,800명에 대하여 등록 학생 천여 명, 복적원을 제출한 학생 8백여 명을 합하더라도 6천여 명에 가까운 학생은 끝끝내 등록과 복적원까지도 거부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1947년 3월 16일 <독립신보> 被檢학생 오백 명
국대안반대학생공투에서는 안 민정장관 담화를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1. 검거 학생이 소수라고 하나 현재 피검거 학생은 오백여 명이고 수감 실수는 150명에 달한다. 뇌동자 운운은 학생을 모욕하는 동시에 애국 학생 운동을 압살하려는 편파적인 말이다. 
2. 미인의 조선인 치환과 관제 회칙 등은 미봉책이며 비민주적이다. 
3. 교수회는 어용 자문기관이 아니고 독자적인 자치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안장관의 시대착오적 인식을 지적하는 동시에 학원 불상사의 책임을 문교부에서 져야 할 것이다.
  • 1947년 3월 16일 <동아일보> 登校生數 漸次 增加- 波瀾重疊의 復籍願
未登錄 學生의 措置가 注目
파란속에 다시 연기된 서울대학교의 등록 복적 원서 제출은 14일 하오 5시까지 인데 이날 정오까지 각 학교에는 상당한 수효의 복적 원서 제출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이 아직도 등록 복적을 거부하고 있는 터로 당국의 이번 지시 조처는 과연 뜻대로 되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아 금후의 당국 태도가 주목된다.
결과에 있어서 당국은 강압적으로 등록이나 복적 위압을 느끼게 하지 말고 순순한 태도로 그 진의를 일깨워 오해를 풀게 하며 단순한 雷同적인 행동으로 경찰에 피검된 학생은 석방하여 취학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 1947년 3월 16일 <동아일보> 法大 거의 登校 - 17日 正式 開講
법대는 3월 14일까지 전교생 698명 중 428명이 등록 복교하였는데 17일부터는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음으로 이에 등록치 않은 학생은 17일까지 전부 등교하라는 담화를 건설학생회에서 발표하였다.
  • 1947년 3월 16일 <동아일보> 六百餘 師範大學生 復籍願내고 登校
국대안 반대로 맹휴 중이던 사범대학 학생 6백여 명은 14일까지에 복교 원서를 제출하여 개강은 당국에 요청하는 동시에 종래의 선동과 모략을 일삼던 학생회를 해체하고 새로히 동 대학 학우회를 조직하여 오직 건실한 신념을 간직하고 학구의 길을 걷기를 성명한 바 있었다.
  • 1947년 3월 17일 문교부 주간 업무보고(47년 3월 10일 -3월 15일)

문교부에서는 한 주간의 업무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Administration
Textbooks
Home Economics
U.S. Army School for Children
Secondary Education
Meteology
Health and Physical Education
Business Education
Teacher Training
Nursing Education
Premedical Education
Biology
Research
Veterinary Education[140]
  • 1947년 3월 18일 <동아일보> 서울에 蠶絲大學 - 設立期成會 組織코 活動
지난 13일 조선잠사회관에서 개최된 전국 잠사업자대회에서는 조선의 잠사 사업의 중대성에 따라 기술자 양성의 필요하다는 점에서 잠사대학 설치의 급속 실현을 통감하고 직석에서 동 대학창립기성회를 창립하기로 만장일치 가결하고 동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 1947년 3월 18일 <한성일보> 국대안 점차 해결 단계로- 등록 마친 학생이 이미 50%
서울국대문제는 기보한 바와 같이 동 학장회의에서 지난 14일까지 미등록학생의 복적원을 접수하여 심사하기로 결정하였던 바 그 후 입법의원에서는 동 원에서 동 대학 맹휴 해결 대책안이 결정될 때까지 복적원 제출 기한을 연기하라고 결의하고 동 결의안을 문교부에 14일 오후에 회부하여 다시 문교부로부터 동일 오후 5시 넘어서야 학장회의에 회부하였는데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을 뿐 아니라 입의에서 행정부문에 간섭하는 점도 있다 하여서 동 결의안은 학장회의에서 거부되고 말았다. 한편 14일 오후 5시 마감까지 복적원을 제출한 학생은 약 이천 명으로 학생들은 각 학교 심사를 거쳐서 작 17일 오후 5시까지 등록하기로 하였다. 이것으로 제1차로 등록을 마친 일천삼백 학생과 아울러 약 50%의 재적학생이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입법의원에서 이미 해결 대책이 결정되었고 앞으로 조선인 이사회 구성과 동 총장 취임 등으로써 원만 해결될 것이 요망되고 있다.
  • 1947년 3월 19일 <동아일보> 成人敎育者大會 18일 배재교서

@실제날짜:470318

경기도 성인교육자대회는 18일 상오 10시부터 배재학당 강당에서 도내 관계자 천여 명의 참석으로 성대히 열리었다.
  • 1947년 3월 20일 <독립신보> 복적 수속은 학장에 일임- 안 장관 담

@실제날짜:470319

국대안 문제는 전번 발표 정도.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19일 출입 기자단과 회견하고 국대 문제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회의 개편 및 그에 인한 교육 행정의 쇄신과 교수회 학생회 등에 대한 국대 문제는 전번에 본관이 발표한 정도로 만족해주기 바란다. 복교 수속에 관한 방침은 학장회의에 일임하였으므로 선처할 줄로 믿는 바이며 입의에서 결의 조회하여 온 기한부 복적원의 보류안은 문교부에 돌렸으나 그 성질이 학장회의에서 결의할 것이므로 문교부로서는 이상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금후라도 입의에서 건설적인 안이 제출될 때에는 충분히 고려할 용의가 있다.
  • 1947년 3월 20일 <독립신보> 학원 숙청 절실히 필요 -성신여중의 전철을 밟지 말라
국립대학교 문제로 한 때는 남조선의 전 학원에 맹휴가 일어났고 아직도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아 진정한 민주 학원의 급속한 건설이 사회 각층으로부터 요망되고 있는 이때 때마침 시내 성신여중의 음악 교원 蠻行 사건은 현하 교육계의 부패한 실태를 여지없이 폭로한 것으로 실로 관심되는 바 크다. 이 사건이 신성한 교원의 몸으로 자기가 가르치는 여학도를 수명이나 능욕했다는 淫行에서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요 오늘의 우리 교육계가 너무나 부패하여 있다는 것을 폭로시킨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관계자의 맹성이 요청되고 있다. 해방된 우리나라의 국민 교육은 진정한 민주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제2세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육계에서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와 소위 학원 모리배 또는 파쇼적 교육자를 일소하는 것이 급무다. 또 자격 없는 교원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기 때문에 학원이 부패해 간다는 비난도 있는 이 때인 만큼 교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서도 이 문제는 큰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성신여중 사건으로 보면 교원의 질적 저하 등은 차라리 문제가 아니다. 교원 뿐 아니라 모든 인물이 부족한 이때인 만큼 진정한 인격자라면 대학이나 전문의 정식 졸업 등등의 형식적인 자격 규정에 관대하고 융통성 있는 해석이 있어도 좋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동교 교무주임은 '그 사람이 악극단의 가수였다는 것은 까마득히 몰랐다'고 변명하였다. 해괴하고 몰염치한 변명이다. 어디서 이런 무자격자를 올려 세웠단 말이냐. 이것은 무성의하고 학교 경영을 시장의 장사치 식으로 하는 자의 자기 고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요 만일 이 변명 그 자체까지도 거짓말이라면 이같은 자들은 성스러운 교육계에서 단호히 追放해야할 것이다. 양심없는 교육자, 학원을 장사터로 아는 모리배, 일제의 진재와 새로운 파쇼의 편협한 교육을 강요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교육계에서 하루 빨리 물러나야만 한다. 이것은 오직 성신여중 한 학교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요 널리 일반적으로 오늘의 학원에 적을 둔 자에게 적용되어야만 할 것이며 문교 당국에서도 이에 관한 시급한 대책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오늘 조선의 학원을 구할 길이다.
  • 1947년 3월 20일 <한성일보> (국대안)미등록 학생도 시기 보아 복교 고려
국립대학 문제는 기보한 바와 같이 약 50%의 재적생이 등록을 마치고 나머지 미등록 학생들에 대한 처치가 주목되고 있는 바 안민정장관은 작 19일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민정장관 담

국대안에 대하여는 동 이사회의 개편과 그에 인한 교육 행정의 쇄신과 교수회, 학생회 등에 관하여 첫 번의 발표한 바와 같이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복교수속에 관한 방침은 학장회의에 일임하였으므로 선처할 줄로 믿는다. 입법의원에서 결의 조회하여온 조건은 금후 문교부와 사이의 협의로 적정하게 처치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 자신이 그간 입법의원장, 부의장, 동 문교후생분과위원장과 이 문제로 회담하였고 18일에는 나와 유문교부장과 황입의문교후생분과위원장과 연석 협의한 일도 있는 바 목하 미등록 학생에게 적당한 기회를 주어서 복교시킬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 1947년 3월 20일 <한성일보> 국대안 해결의 서광- 사설
용감히 복적 취학하라
一 
국대안을 중심한 학원의 문제는 시시비비를 막론하고 건국도상 우리 교육계에 비상한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 것만 사실이다. 차대의 민족과 국가를 쌍견에 지고 밤낮을 묻지 않아 연찬에 매진하여도 오히려 타민족, 타국가에 뒤떨어질 염려가 다분히 있겠거늘 대다수의 그들로 하여금 오랜 시일을 흥분이 아니면 우울 속에 방황케한 것은 우리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환경을 병들게하는 일면 지도층 스스로 중대한 책임감을 느껴야만 될 일이다. 사상의 좌우나 정견의 차이를 여기에 물어서 그 무슨 소용이랴.
二
이즈음 안민정장관의 발표를 본다면 국대안 반대 조건의 중요 항목인 총장 내지 이사 진영은 이미 학도측의 요망대로 조선인을 선정할 방침이 확정되어 미구에 그 인선까지 공표되리라고 하며 복교 수속 문제도 학장들의 선처에 맡기게 되었다고 하고 다시 일부의 보도에 의하면 이에 선행하여 문교부 고문관도 교체되어 조선 교육계의 대은인인 元漢慶 박사가 새로 취임케 되리라 하니 국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확실한 서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문교 당국으로도 금후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 枝葉末端의 법리론에 구애되지 않고 대승적인 견지에서 기구나 운영의 개선할 점을 개선하며 학도에 대하여서도 사부의 아량과 가장 현명한 태도로 관용이 있을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三
이 기운에 순응하여 학도 자신들도 이미 50% 이상이 복적하였고 앞으로도 번연 자상하여 취학을 열망하는 기세가 팽배해 진다 함은 교육계 전반을 위하여 다행타 아니 할 수 없다. 走馬加鞭의 일념에서 학도와 학교 당국에 일언하노니 학도여든 사소한 수속 문제같은 것에 고집하지 말고 하루 바삐 복적 취학하겠다는 용기를 갖으라. 제군의 취학이 일일 는다면 느는만큼 개인의 손실보다도 민족의 손실이 클 것이 아니냐. 다음으로 학교 당국 및 교수측도 萬端의 용의로써 수업을 촉진하라. 左願右聘한다든가 형세를 관망치 말고 지도자의 입장에서 좀 더 용감하여 또 성의와 아량을 갖으라. 학원의 파란는 순정적인 학도를 관용못하고 감정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데서 흔히 의외의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점 세심한 주의가 요청되는 것이다.
  • 1947년 3월 20일 <한성일보> 성균관대학 등교- 26일 학생대회
그 동안 맹휴 중이던 시내 명륜동 성균관대학에서는 주위 정세에 비추어 새로운 방침을 검토하고자 동교 학생회와 투쟁위원회의 공동 주최로서 오는 23일 오전 11시 동교 강당에서 전체 학생대회를 열고 전원 일제 등교를 결의하리라는데 동교 학생은 빠짐없이 참석을 바란다고 한다.
  • 1947년 3월 20일 <한성일보> 현이사진을 규탄- 존폐기로의 淑專
교수진 회의 열고 항의문 제출. 한 때 교수와 학생 사이에 불상사를 일으켜 사회의 이목을 끌었던 숙전은 동교의 재원인 왕궁 소속 토지가 38이북에 있는 관계로 수입 고갈로 인하여 경영난에 빠지고 있으며 일면 이 국면을 타개해야 할 현 이사진은 이에 개렴한 바 성의는 조금도 없어 학생측의 거출로 명맥을 유지 하였으며 교수들의 봉급은 12월 말까지 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고 학생들의 부담은 커감으로 날로 자진 퇴학생이 불어가는 형편인 한편 현 이사진의 무성의는 국제 정국의 호전으로 百年河淸 38선 철폐에만 구실을 삼고 문호를 굳게 닫어 독지가들의 출자도 거부하고 있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객년 12월 경에 교수단에서 이 타개책의 대한 건의문을 제출한 바 있으나 여지껏 회답이 없으므로 이에 분연히 궐기한 동 교 교수단은 지난 17일 교내 문제를 즉조 규명하여 현 이사진의 과오를 지적하는 결의문을 이사장 윤홍섭(尹弘섭) 씨에게 제출하는 동시에 금 월 말까지 정식 회답이 없으면 현 이사진을 단연 부인하고 학원 존속 발전의 독자적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항의를 제출하였다 하여 금후의 추이가 주목된다.
  • 1947년 3월 21일 <독립신보> 예산농교생 등교

@실제날짜:470314

예산지국발맹휴 중이던 예산농업학교에서는 학교 당국의 성의있는 처사로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요구 조건이 관철되었음으로 지난 14일부터 전학생이 등교하여 민주 학원 건설의 좋은 표본을 보여주었다.
  • 1947년 3월 22일 <독립신보> 학생 맹휴엔 불간섭 -전원 취학 요구시까지 무기 휴학

@실제날짜:470320

부산 21일발 합동 부산대학 수산과대학장 정문기 씨는 동교 학생 맹휴에 대하여 작 20일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는데 이번의 발표는 종래 보지 못하던 바이며 학교 당국의 맹휴에 대한 신전술이라 하여 일반의 주목을 이끌고 있다 한다. 
1. 맹휴에 대하여는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일절 간섭치 않음. 
2 . 학생 전원이 취학을 요청할 때까지 무기 휴학으로 함.
  • 1947년 3월 24일 <독립신보> 각 학장 책임지라 -국대공위서 성명

@실제날짜:470322

지난 22일 국대안 교육자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국대학장에게의 공개장'이라는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초순 등록 요구에 6천 5백의 학생 불응하자 商大의 수백 명을 필두로 각 대학에서 상당수를 함부로 입학시켰으며 농대에서는 식량 배급 정지로 단식 항거하던 북선 출신 기숙학생을 강제 추방하였다. 조선의 우수한 건국 역군이요 진리와 과학과 정열을 사랑하는 6천여 학도를 학대한 학장 제씨는 만일 민족적인 양심이 있다면 이번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전 민족 앞에 사죄하여야 할 것이다.
  • 1947년 3월 24일 <독립신보> 과학연맹서 성명

@실제날짜:470322

조선과학기술연맹에서는 22일 당국의 국대안 고집으로 인하여 민주 독립의 물질적 기초를 닦을 역군들의 육성을 담당한 대학 교육의 고사를 방관할 수 없으니 안 민정장관은 동안의 찰폐에 힘쓰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사회 인사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기를 요망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7년 3월 24일 <독립신보> 농대 단식 악화

@실제날짜:470317

국대안 반대를 부르짖고 농성 단식 투쟁 중에 있는 농대에는 17일에 무장 경관 30여 명이 들어와서 학생을 기숙사에서 몰아내는 동시에 5명을 검거하여 사태는 악화되고 있다.
  • 1947년 3월 24일 <독립신보> 문리대와 동 예과서 보고 대회
문리대에서는 24일 오전 10시부터 예과 강당에서 보고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한다.
  • 1947년 3월 26일 <독립신보> 국대안 반대투위 학생-안건종 등 6명에 체형을 언도

@실제날짜:470324

국대안 반대 등으로 국립서울대학 학생 안건종외 22명은 그간 경찰에 피검되었다가 군정 재판에 회부되어 24일 오후 종로 특별 법정에서 '노드컴'심판관으로부터 각각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 폭동계획, 불법집회, 국대안 반대죄: 6개월 징역 안건종, 90일(執留) 한상구, 90일 형 박군인, 60일 형 강翊夏, 30일 형 이영석 정항석. 
유죄 판결은 이상 6명이고 대부분은 석방하고 8명은 26일로 연기하였다.
  • 1947년 3월 27일 <독립신보> 상대에 불상사

@실제날짜:470324

지난 24일 상대 2백여 명 학생들은 동일 오전 10시경 맹휴 투쟁 경과 보고 대회를 열고저 등교하다가 150여 명의 무장한 태러단에 습격되어 5명의 중상자와 10명의 경상자를 내고 민주 학원 건설을 부르짖는 학생복을 피로 물들인 일대 참극이 있었다. 이날 아침 10시경 학생들이 정문에 이르자 이미 학교를 점령한 150여 명의 태러단은 손에 목검, 곤봉, 단도 등의 무기를 들고 교문을 닫고 학생들의 입교를 억제하자 학생들은 이를 헤치고 교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침내 태러단은 단도와 곤봉으로 학생을 찌르고 난타하였다. 서홍석, 김길상은 단도에 찔리고 학생 1명은 권총을 맞았으며 이한익 외 8명은 전신에 타박상을 입는 등 신성한 학원의 참극은 벌어져 무장 경관의 해산 명령으로 동 대회는 해산되고 2백 학생들은 17명의 무장 경관에게 검거 성북서에 압송되었다가 그중 6명만 유치되고 다 석방되었다 한다.
  • 1947년 3월 27일 <독립신보> 안동농림중 맹휴에 교유진도 합류

@실제날짜:470311

안동지국발 안동농림중학교 학생 6백여 명과 동 교유진은 합류하여 전에 독촉 한민당 당지부장을 겸임하고 있던 동교 권교장의 편당적 교육 방침을 반대하고 지난 11일부터 동맹 휴학에 들어가 아직도 계속 중인데 그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학교 운영의 모든 문제는 직원회에 넘기라. 
2. 사감으로써 파면한 교수를 직시 복직시키라. 
3. 농장에 불필요 이상의 경작을 중지하라. 
4. 학교로 배당된 시가 10만 원에 달하는 배급 물품의 行方을 추구하자.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국대 반대 학생 선언

@실제날짜:470326

국대 반대 학생측에서는 26일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제반 蠻行에 대해서는 정당 방위로서 단연 투쟁한다는 것이다.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맹휴 각교 동향
지난 25일에 시내 10여 중등학교 학생이 24시간 맹휴에 들어갔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그 후 각 학교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 경기공업 = 27일 보고 대회를 열자 영등포서에서 포위하여 10여 명이 검거되어 동 대회는 중지하고 말았는데 일부분만 임시 수업 중이고 여전히 맹휴는 계속되고 있다. 
▲ 대동상업 = 27일 일부분만 수업 중이라고 하는데 경찰에 피검된 자 10여 명과 퇴학 처분당한 것이 12명이라고 한다. 
▲ 휘문중학 = 일부분 수업 중이고 여전히 맹휴는 계속 중인데 27일 종로서에서는 형사대를 동교에 파견하는 등 그 귀추가 주목된다.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맹휴학생은 팔만여- 수도청 관내에만 42학교
국대안 반대,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반대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남조선 일대를 휩쓸은 학생 맹휴 선풍은 아직도 종식을 모르고 있는데 경무부 조사에 의하면 2월 이래 학생 맹휴에 가담한 학생수는 실로 8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즉 수도청 관내의 42학교가 맹휴를 단행하였는데 이에 참가한 학생수는 대학 중학을 합하여 실로 24,334명에 달하고 경기가 8,129명, 충남이 3천 명, 충북이 1,271명, 경북 8,460명, 전북 2,695명, 경남이 22교 이외에 강원 전남 제주를 합하면 8만여에 달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學統서 성명
서울학통에서는 학원의 테러 행위와 불법 구금된 학생 및 민주주의 애국자를 즉시 석방하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한성 진명여중 맹휴
한성여중학생들은 김수명, 이윤영 선생의 석방 요구, 학내에 테러단을 도입한 책임자처단, 성신여중 임천수 처벌과 성신여중 교장, 부교장의 교육계로부터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맹휴에 들어갔는데, 진명여중에서도 대동소이한 내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맹휴에 들어갔다 한다.
  • 1947년 3월 28일 <독립신보> 漢陽工中生 성명

@실제날짜:470327

한양공중학생회에서는 27일에 교장 배척, 테러하는 교원 배격, 학원의 경찰 간섭 반대, 구금 학생 석방 요구, 학생 퇴학 처분과 교원 무고 파면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7년 3월 29일 <독립신보> 光州西中에 廢校 命令

@실제날짜:470327

국대안 반대 동맹 휴학 이후 세인의 주목하고 있는 광주서중학교는 지난 22일 동맹 휴학 후 교원과 학생의 피검자가 속출하여 학생들은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재차 맹휴 중인던 바 27일 돌연 서지사로부터 폐교 명령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이 기간은 8월 말일까지 이라고 하는데 9월 1일부터 새로 개교할 터이며 따라서 신학기에는 진급 학년이 없다고 한다.
  • 1947년 3월 29일 <독립신보> 國大案 反對 學生-2명 1년형 선고

@실제날짜:470328

국대안 반대 등으로 중부서에 검거되었던 민청원의 박정식, 김홍태 두명에 대한 군정재판은 28일 종로서 특별 법정에서 개정하고 로드컷 심판관으로부터 각각 다음과 같은 판결 언도가 있었다. 
▲국대안 반대죄 1개년 징역 박정식, 김홍태
  • 1947년 3월 29일 <독립신보> 대구 5중학에 폐쇄령?

@실제날짜:470327

대구발 조선통신 지난 22일 제2차로 맹휴에 들어간 대구 각 학원 생도들에게 崔 경북지사는 27일까지 등교치 않으면 공부할 의사가 없는 자로 인정하여 처단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월 22일 맹휴로 들어간 사대, 농대를 비롯하여 5개 중등교의 경거망동은 통탄할 일이다. 어떠한 대학과 중학을 막론하고 3월 27일까지 등교치 않는 생도는 전부 제명될 것이고 등교하는 생도에게는 수업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또 맹휴가 계속된다든지 재발생할 때에는 교문은 폐쇠할 수밖에 없다.
  • 1947년 3월 29일 <독립신보> 道學務局長을 不信任-청주초중등 교원 일동
충북 청주에서는 지난 2월 15일부터 청주시내 각 중등학교 생도의 국대안 반대를 부르짓고 일어선 맹휴에 대하여 3월 6일 청주사범학교에 대하여 전교원 무고, 강제 사직 권고와 무조건 휴교 명령을 발령하고 동 15일에는 청주중학, 농업, 상업 세 학교에 대하여 무조건 휴교령을 내린데 대하여 청주 시내 각 중초등학교 전교원은 고광만 도학무국장을 불신임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문서를 도군정장관에게 제출하였다 한다. 
불신임장 요지 
1. 고광만 도학무국장은 일제시에 조선총독부 시학관과 충주공립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면 일본 천황의 소위 교육칙어를 라디오를 통해 해설했고 조선 동포와의 면담에는 통역을 필요로 했다는 등 황민화 교육에 충성을 다한 친일파이다. 
2. 작년 2월 청주중학교 3교원을 무고, 파면하여 교육계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고 금번에는 4중학교에 대하여 휴교령이라는 비민주적 조치로 중등학교 교육계를 파괴하였다. 
3. 이상으로 충북 교육계의 파괴를 초래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 고광만 국장에게 있는 것이며 미군정을 훼손하는 것이니 청주시내 교원 일동은 서명 날인하여 불신을 함
  • 1947년 3월 30일 <동아일보> 授業中 敎室에 投石 - 商大에서 일어난 不祥事

@실제날짜:470324

學生會에서 非行을 指摘
24일 상오 11시 상과대학에서는 등록 거부로써 제적당한 학생 2백여 명이 수업 중인 학원에 투석 구타하여 수업 방해하는 학원 불상사를 일으키었다. 이에 다대수의 재학생과 경찰대의 출동으로 별 희생이 없이 해산되었는데 동교 학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聲明
오등은 학원파괴○방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꾸준히 투쟁을 계속해 왔던 바 금일에 이르러 비로소 6백여 학도가 단결하여 파괴 세력을 일축하고 학원에 基礎를 확고하게 하였다. 人道와 정의를 몰각하고 민족의 이익를 좀먹는 파괴 학도는 국대안 발표 시초부터 학원의 파괴를 도모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본 대학장에게 대하여 선동과 모략으로서 교내적, 사회적으로 인격을 中傷하는 악선전을 했으며 威爀과 폭행을 가하였다. 이는 진실로 조선의 師弟道의 反叛임을 물론이요, 인도상 용납지 못할 暴漢이라 규정하여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본대학 6백여 학도는 현 학장이 정의로서 부단히 노력하여 본 상과대학을 재건설했음에 대하여 滿腔의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현 학장을 推載하여 일심 불란, 일로 매진할 것을 만장일치로서 결의하였다. 더우기 파괴 학도의 가진 위협과 생활의 곤란을 극복하면서 조선 대학교육의 건설을 위하여 주야로 분투하신 현 교수단 제위 선생꼐 多大한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앞으로 본 대학 6백여 학도는 학장 교수급 학생의 삼위일체로서 민주 학원 건설에 매진하여 신조선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차에 엄숙히 맹세하는 바이다.
  • 1947년 3월 30일 <동아일보> 平澤中學校 六月頃 設立
지방교육에 새봄은 오다 - 오랜동안 평택군민이 갈망하던 중학교 설립 문제는 李민휘, 황경수, 최명창, 정용달, 최승순 제씨의 기금 하사로 말미암아 마침내 6월경에는 실현될 예정이다.
  • 1947년 3월 30일 <동아일보> 學園政治化 徹底히 排擊 - 師範大學 에서 陳情

@실제날짜:470329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우회에서는 동 회원 일동의 명의로 29일 군정청 문교부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陳情
우리는 순수한 학도의 입장과 학원 독자성에 입각하여 국대안 시정에 임하며 학원의 정치 무대화를 배격하고 오직 연학에 매진코저 학우회를 결성하였다. 基後 입법의원에 있어서의 법령 102호의 개정, 안민정장관 및 문교 당국의 ○에 의하여 우리 국대의 前途에 어느 정도 광명이 보이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시라도 속히 완전히 해결됨을 갈망하는 회원 일동은 전반에 언명하신 바 그것만이라도 가급적 속히 실현하시와 극도로 혼란된 우리 국대를 안정시키어 동 향학열에 불타는 학도에게 ○○一○의 감이 없도록 明敎해 주심을 대망하옵나이다.
  • 1947년 3월 30일 <한성일보> 중등교는 素質 考査- 대학전문 신입생 모집 없다
입시지옥은 이대로? 오는 9월의 신학기를 앞두고 7월 중에 시행될 남녀 중등학교 입학 시험으로 수많은 국민학교 졸업생들이 벌써부터 어린 가슴을 조리고 있을 뿐 아니라 학부형들까지도 조마 조마해서 지내며 더욱 각 국민학교에서는 졸업반 담임 교사들이 자기의 성적을 나타내려는 심정에서 가혹한 수험준비를 계속하고 있어서 어린 동심을 과중한 부담으로 울리고 있는 경향이 많은데 문교 당국에서는 벌써부터 이 폐해를 없애고자 적극책을 방금 강구 중이라 한다. 즉 오는 4월 3일부터 3일 간 열리는 남조선 각도 학무국장회의를 거쳐서 즉시 중등교육국에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구체안을 작성하리라는데 동 위원회는 중등교육국, 경기도 학무국, 서울시학무국 관계자 각 1명과 중등학교장 4명의 7명으로 구성하기로 되어 방금 인선 중인데 동 위원회에서는 수험 준비를 전면적으로 배우(제?)하고서 그 아동의 소질만을 고사하여서 선발하는 구체 방침을 세우게 되는 것으로 따라서 각 국민학교에서 현재 행하고 있는 수험 준비 교육은 앞으로 전혀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편 전문학교 제도는 금년도부터는 전면적으로 없어지게 되어서 금년도에는 의과를 제외하고는 전문학교 입학 시험은 없으며 현재 남조선 각 중등학교에는 아직 신학제에 의한 고급중학 2년생이 없으므로 각 대학 입학 시험도 없다고 한다.
  • 1947년 4월 1일 사범학교 재정에 관한 권한이 각 지방으로 이관됨

46년 2월 12일에 각종 사범학교에 관한 감독 및 통제권이 각 지방 관청으로 이관된 데 이어 이들 학교에 대한 재정 관할권도 47년 4월 1일 부터 각 지방 관청으로 이관되었다.[141]


1947년 4월

  • 1947년 4월 1일 <독립신보> 光州師範 不祥 事件-46명 관계 학생을 퇴학 처분
교원 구타 치사 사건으로 말썽 많던 광주사범학교에 대하여 관계자 학생 46명을 퇴학처분을 하였다. 이 퇴학 처분을 당한자의 타교 전학을 불허키 위하여 그 명부를 작성해서 각 도 및 학교 교장에게 발송하였다 하는데 이들을 학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6학년 4명, 5학년 19명, 4학년 4명, 3학년 13명, 2학년 3명, 여학생 4명.
  • 1947년 4월 1일 <한성일보> 光師生 47명 處罰- 은사 타살 패륜 사건 후문
(光州發朝通) 교원 구타 치사 사건으로 말썽 많던 광주사범학교 관계 학생(47명)에 대하여 퇴학 처분을 하였다는데 그 명부를 작성하여 각 도 및 각 학교에 발송하여 그 자들의 타교 전학을 불허하기로 되었다는 바 학년별은 다음과 같다.
▲6학년 4명, ▲5학년 19명, ▲4학년 4명, ▲3학년 13명, ▲2학년 3명, 여학생 4명
  • 1947년 4월 2일 <독립신보> 공고-사회생활과 참고서 發行 동지사가 사과 광고
근래 서울시 서대문구 교북동 95번지 동지사에게 發行한 사회생활과 참고서 6권에 대하여 동사에서 문교부 편수국과 무슨 관계가 있는 듯이 선전하고 있으나 이는 허위이기에 좌기와 같이 이를 지적 공고함 
1. 그 책들은 참고서임에도 불구하고 교본이라고 광고하였음. 
1. 인정 미제임에도 불구하고 기제라고 공적 광고하였음. 
1. 문교부 편수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과 각 편수과 교열이라고 광고하였음. 1. 특히 제5-6학년 용에 있어서는 오류가 많다고 인정됨. 
1947년 3월 31일 문교부 편수국장
  • 1947년 4월 3일 랭던 Prostov 보고서를 국무장관에게 보고함

군정청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은 한국의 학원사태에 관한 프로스토프 보고서를 미국무장관에게 보고하였다.[142]

  • 1947년 4월 3일 <독립신보> 各道學務局長 會議
신교육 제도에 의한 문교 정책을 확립하기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오는 3일부로 5일까지 3일간에 걸쳐 동회의실에서 서울시 및 각도 학무국장 회의를 개최한다. 의안은 학생 맹휴 사건을 비롯여 입학 시험 제도의 개정, 문맹 퇴치 등인데 특히 비상시 공민 교육 운동의 전개, 실업 교육의 확충, 교원 생활의 보장, 교육 신제도 운용에 대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 1947년 4월 3일 <독립신보> 京城農業學校 盟休

@실제날짜:470327

지난 27일 경성농업학교 생도 일동은 이유없이 파면당한 최의성 선생의 복직을 요구하고 일제히 맹휴에 돌입하였다는 바 그 귀추는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 
  • 1947년 4월 3일 <독립신보> 入試 方法을 硏究-문교부에서 위원 선정
어린이들의 두통거리 중등학교 입학 시험도 몇 달 후에 박두하였는데 과연 이번 입시는 어떠한 방법으로 시행될 지 어린이들의 가슴을 조리게 하고 있는데 문교부에서는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 방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8명을 입학 시험 문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제1차 심사회를 오는 8일 오후 2시부터 동회의실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이덕봉, 이세정, 김원규, 서문출, 맹주천, 박술음, 송정선.
  • 1947년 4월 5일 <동아일보> 師大學友會 登校를 勸告

@실제날짜:470402

사대 학우회에서는 2일 상금도 등교하지 않는 학우들에게 하루 속히 등교할 것을 부탁하는 장문의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 1947년 4월 6일 <한성일보> 入試弊害를 是正- 심의회 열고 구체책을 강구
동심의 중압. 각 국민학교에서는 오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6학년생들에게 과격한 수험 준비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서 그 지나진 부담에 가얇은 동심이 압박을 받을뿐 아니라 학교에 따라서는 교재 등 사비 등으로 학부형에게 매월 3, 4백 원씩 부담시키고 혹은 각 가정에서 연료를 가져오게 하는 등 폐단이 적지 않으므로 문교부 중등교육과에서는 폐단 많은 수험 준비 교육을 전폐시키도록 방침을 결정하는 한편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 시험 방침에 대한 구체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은 기보한 바와 같으며 우선 남조선 각 중등학교의 작년도 입학 시험 문제를 심사하여서 금년도 입학 시험에 참고를 삼고자 다음과 같이 중등학교 입학시험문제심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동 제1회 위원회를 오는 8일 오후 2시 문교부 회의실에서 개최하게 되었다는 데 앞으로 기대되는 바 자못 크다.
▲이덕봉(서울시학무국장), 이병규(경기도학무국장), 김운규(경중교장), 서원출(보중교장)
맹주천(경기상교장), 이세모(진명여교장), 박술음(휘중교장), 송금시(덕성여교장)
  • 1947년 4월 8일 <독립신보> 實力 本位의 入試 要望-중등학교 입시 문제

@실제날짜:470407

금년도에 실업교육이 중점. 초등교육의 수업료 폐지도 고려. 두뇌가 좋아도 떨어지고 자력이 없다고 낙제하고 특권 계급의 소개와 자력만 있으면 문제없이 합격된다는 중등학교 입학 문제는 금년에도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몇 달 후에 박두하여 온 입학 시험 문제를 비롯하여 금년도 문교 행정에 대하여 7일 문교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금년에 있어서는 문명을 퇴치하는 공민 교육과 생산을 부흥하기 위한 기술자를 많이 양성하기 위하여 실업교육에 중점을 둔다고 하는데 이것을 추진하기 위하여 중앙에 중앙기술위원회(가칭)을 설치하는 등 과학 기술 발전에 힘을 쓰리라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의 수업료 폐지문제도 고려 중이라고 하여 이에 따라서 교육세 실시도 연구 중이라고 한다. 
▲ 중등학교 입학 시험 문제- 중등학교 입학 시험 문제는 위원을 선출하여 연구 중에 있다. 입시에 관련한 모든 비행, 공부를 잘하는 아동이 떨어지고 자력이 없어 못들어가는 모든 폐해를 없애야 할 것이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작년도 입시의 실정을 방금 검토 중인데 이번에는 이러한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고, 실력만 있으면 합격할 수 있는 입학 제도를 생각 중이다. 한편 무자격 합격이란 모든 협작물을 제거할 것이다. 
▲ 국민교육 문제- 아직도 조선에는 문맹자가 많고 선거 문제를 앞두고 공민 교육 문제는 대단히 크다. 그러므로 남조선 일대의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실시할 예정이다. 
▲ 실업교육 문제- 이 실업교육 문제 역시 금년도 문교 행정의 중점을 둔 한 문제인데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특별 예산 4억 5천 만 원을 계상하였다. 이것은 현하 부족한 기술자를 양성하려는 것인데 우선 서울에 기술자 양성 본영인 중앙기술위원회(가칭)을 설치할 예정이고 이에 따라 중앙기술 교육국과 과학기술 내지 교육연구기관을 창설하여 많은 기술자를 배출시킬 작정이다. 
▲ 종합중학 문제- 중학교에 있어서는 인문에 치중하여 기술, 실업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로써 금후에 신설되는 중학교에 있어서는 조건부로 신설을 인가하여 인문 치중을 억제하고 이외에 기존의 중학교에 있어서도 기술과를 두도록 할 작정이다. 
▲ 수업료 문제- 초등학교에서 수업료를 받는 다는 것은 원칙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업료 폐지를 연구 중인데 이에 따라 교육세의 실시도 고려 중에 있다. 
▲ 후원비 문제- 무슨 회비니 하여 학부형으로부터 후원비를 징수하여 학부형을 울리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금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는 묵인할 지언정 단속을 하겠다. 
▲ 의무교육 문제- 현재의 취학 상태는 8할 정도인데 예산 관계로 전반적인 실시는 현상태로써는 불가능하다.
  • 1947년 4월 8일 <동아일보> 活氣띄운 남조선 敎育界 - 中, 大學 403校
서울에만도 78교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에 장래할 광복 조선을 걸머지고 일어설 지식층을 양성하는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 기관이 과연 얼만가. 남녀 각 학교의 총수는 403교인데 현재 각도별로 보면 서울시가 78교로 극도의 관록을 보이고 있으며 제주도가 5교로 최소적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각 과별로 이를 따져보면 특수과에 있어서 단연 농과계통이 112교로 농업조선에 부끄럽지 않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으며 각 과별의 학교 수효는 아래와 같다.
▲ 대학 : 문과 10, 의과 7, 문리과 6
▲ 중학 : 사범과 116, 인문과 남 118 여 72, 농과 112, 工科 21, 商科 30, 水産科 4, 축산과 2, 기타 5
  • 1947년 4월 8일 <한성일보> 學園- 시들어 가는 젊은 싹
진리의 문에 거미줄이 얼킨지 오래다. 모처멀 터오르려던 새 조선의 젊은 싹들이 서리 바람에 시들은 채 봄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고들 있다. 원인이 무엇이며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을 구태여 추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요즈음의 궁금스러운 것으로 소위 국대안이 말썽을 일으킨 후로 어느 정도까지 풍파가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요즈음 몇 몇 학교에서는 전원이 등교 수학을 성명하는가 하면 또 다음 날에는 그러치 않소하는 성명을 내곤 하는데 실제로 학교 문 안에서 조사하여 보면 어떤 곳은 학생은 모이는데 교수가 안나와서 놀고 어떤 곳은 교수들끼리 옥신 각신하다 거의 폐교에 이르르고 교수는 나오려고 해도 학생들이 안 모이어 문을 못열고 등등 이라하여 고등교육의 문은 언제나 자유럽게 열려 질런지 아득한 꼴인데 한편 학생들은 생활난에 직업의 자리를 구하기 바쁜가 하면 정신적 자포와 자기에서 환경을 비웃으며 게으름과 일락으로서 허탕한 세월을 보내고들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나라 있고 겨레 있음을 자랑으로 알진대 만사를 폐하고 여기에 안온책을 구하나니 급중의 급사가 아닐까?(然然子)
  • 1947년 4월 8일 <한성일보> 懸案의 義務敎育은?- 줄어든 예산이 애로
앞으로 민주주의 국가로서 생장하려는 조선에 있어서 보통선거 실시와 아울러 문맹 퇴치를 위한 국민 교육의 강력 추진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데 현안의 의무교육제는 어찌되었는가?
就學普及令 實施?- 금년도 8천 학급 증설
현재 남조선 전 지역의 국민학교는 약 3,200으로 3만 6천 학급에 2백 25만 아동을 수용하고 있는데 교실과 교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2부 혹은 3부 교수를 실시하고 있는 형편으로 이 기형적 상태를 시정하기 위하여 문교 당국에서는 지난 1946년도에 6천 학급 증설 계획을 세워 거의 완성하였고 다시금 금 1947년도에 8천 학급 증설 계획을 세웠다 한다.
한편 오는 신학기에 취학할 만 6세의 학령 아동이 약 73만 명으로 문교 당국에서는 동 청구 예산 49억 중 의무교육 관계 지방 보조금 25억 원을 계상하였던 바 중앙경제위원회에서 배정된 문교부 예산은 18억으로 그중 실업 기술 교육비가 4억 5천만 원이고 따라서 나머지 13억 5천만 원 가운데서 의무교육 관계 지방 보조로서 11억 가량 지출 가능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초 청구 예산의 반도 못되는 것으로서 현하 의무교육 실시 전야에 있는 국민 교육의 중요성에 비추어 커다란 암영을 던지고 있는 것을 엿보게 된다. 일방 의무교육에 법적 근거를 주게 될 취학보급령(국민학교령으로 개칭될런지 미정)이 이미 국민학교 규정과 아울러서 작년 11월에 성안되어서 미구에 입법의원으로 회부하게 될 것으로서 동 령의 실시에 의하여 의무교육은 본 궤도에 올르게 될 것이나 문제는 결국 넉넉치 않은 예산에 있어서 애로가 되고 있어 그 타개책 여하가 주목되는 바이다.
  • 1947년 4월 9일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 Arndt단장 내한

미국의 대한 교육 및 정보조사단(Educational and Informational Survey Mission to Korea)의 단장인 Christian O. Arndt 박사가 4월 9일에 내한하였다.[143]

  • 1947년 4월 9일 <동아일보> 高麗大學 學生總會 10日 11時부터

@실제날짜:470410

사립대학으로 오직 마지막까지 버티며 등교를 거부하고 있던 고려대학에서는 학생투쟁위원과 학교측에서 누차 협의한 결과 오는 10일 맹휴를 수습하는 임시 학생총회를 열고 등교할 것을 결의하기로 되었으므로 이날 상오 11시까지 휴학 중에 있던 학생은 빠짐없이 등교하도록 하라고 학생투쟁위원회에서 격을 날리었다 한다.
  • 1947년 4월 9일 <동아일보> 推進되는 敎育 問題 - 義務制 實施와 敎育稅 新設
人文敎育 是正도 當面의 課題
과도적이나마 남조선의 교육제도와 교육 방침을 입안 검토하기 위하여 지난 3,4,5 3일간 군정청 중앙청에서 열린 각도 학무국장회의는 현하 긴급한 각 방면의 교육 문제를 원만히 토의 결정한 바 있었다.
즉 초등교육의 의무제를 실시할 전제로 25억원의 예산을 요구하였던 바 전액 용인이 어렵게 되었으므로 지방 실정에 따라 최대한의 수용을 하도록 하였으며 교육의 원활 운영을 기하기 위하여 교육세의 신설을 연구하기로 되었고 중등학교 교육도 과거의 인문교육의 폐를 시정하여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고 부족되는 공산업계에 기술자를 보내기로 하며 총선거를 앞두고 공민교육도 시급한 바 있으므로 이 방면에도 중점을 두고 교육 行政을 추진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앞으로의 성과가 매우 주목되어 있다.
  • 1947년 4월 10일 <독립신보> 제목:用紙難은 解決策 없다.-안 민정장관 담

@실제날짜:470409

긴박한 용지문제를 비롯하여 아직도 미해결 중인 국대 문제, 군정청 기구 개혁, 분규 중인 洞會 문제 등에 대하여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9일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문: 용지난이 심각한데 생산과 공급 대책은 없는가 
답: 조선내 제지 생산은 연 5천만 파운드인데 원료난으로 인하여 지난 3월에는 2십만 파운드의 생산밖에 없었다. 용지난은 세계적인 것으로 해결이 어렵다. (중략) 
문: 국대 문제와 이사진은 결정되었는가 
답: 이사진은 결정되었는데 아직 결재가 내리지 않았다. 복적 학생은 전체의 50%정도이고 나머지 학생은 아직도 취학을 거부하고 있다. 
  • 1947년 4월 11일 <독립신보> 警察의 學園 干涉은 反對- 이 학무국장 담
금차 경기도내 중등학교 맹휴 사건에 관한 기자단의 질문에 9일 경기도 학무국장 이병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내 중등학교 40교 중 동맹 휴학에 참가한 학교는 19개교, 학생수는 총 13,635명 중 8,220명이다. 맹휴 요구 조건 중 경찰의 학원 간섭은 학무 당국으로서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여 왔으며, 학생의 자치권 문제는 원칙적으로 인정하나 교직원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한 교내에서 인정한다.
  • 1947년 4월 11일 <한성일보> 新薦된 國大 理事陣- 不日 러長官 결제 얻어 입의 회부
국립서울대학에 조선인 총장과 이사회를 구성하게 되어 기보한 바와 같이 동 이사 인선을 각 분과 대학의 추천에 의하여 정치 운동에 관여치 않고 관직에 있지 않은 조건으로 진행 중 9명의 신 이사들 이력서 제출 등 수속이 지난 8일 완전히 끝나서 곧 러취 군정장관에게로 회부되었다. 따라서 군정장관의 결재가 끝나는 대로 입법의원에 회부되어 동 원의 인준을 얻은 다음 동 이사회에서 조선인 총장을 추천하게 되며 이번에 결정된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괄호내는 추천 대학)
▲劉在星(공대), 崔奎洞(사대), 安東源(상대), 徐光卨(법대), 李義植(의대), 安鍾書(치대), 李容勳(농대)
  • 1947년 4월 12일 <독립신보> 國大 理事陣 內定
국대 신이사 선정에 관해 그동안 군정청 부처장 회의에서는 18명의 후보자를 선정하고 문교부장 유억겸 씨로 하여금 취임 교섭을 進行시켜 오던 바 9명 가운데 다음의 7명은 이미 취임 승락이 있었음으로 군정장관의 결정이 내리는 대로 곧 입의에 회부하여 인증을 얻은 다음 정식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유재성(공대 용산 공작소 사장), 안종서(치대 개업의사), 최규동(중동 중학장), 이의식(의대 개업의사), 안동원 (상대 상공회의소), 서광설(법대 변호사), 이용훈(농대 전수원 군수)
  • 1947년 4월 12일 <독립신보> 當路者의 良心的 處事- 국대안 교육자 공위서 성명

@실제날짜:470411

국대안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11일 국대안 반대를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시 한번 맹서하는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국대안이 민족 전체의 반대에 봉착하자 당로자는 자기의 정치적 입장만을 염원에 세우고 대다수의 교육자를 축출함으로써 동 안을 강요하여 왔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사회 문명을 위하여 대학 건설과 민족의 도리 실천을 옹호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시 성명하는 바이다. 당로자의 양심적 처사와 일반 사회의 적극적 분기있기를 요청 절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 1947년 4월 12일 <독립신보> 低下되는 서울 大學
옳바른 공부를 하자는 많은 학도들이 거리에서 헤매게 된 서울국립대학의 황폐한 실정, 국립대학안의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있던 남조선의 수만에 달하는 학도들은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진리 탐구의 불붙는 학구적 양심으로서 아직도 맹휴를 하고 있는 바 그 후의 서울대학은 어찌 되었나. 학교 당국은 학생으로 하여금 세계 교육사상에 유래없는 복적원을 내게 하였으나 학생들의 진정한 요구를 들어주었는가. 그들의 학원이며 그들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복적원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각계의 여론과 더우기 입의에서도 반대하여 여론이 비등하여 복적원 문제는 형식상 중지되었으나 학교 당국은 그들 학생을 축출하고 신입생을 모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생수는 새로 입학시킨 학생수를 합하여 불과 3,386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국대 학생의 총수는 실로 8,000여 명 그중의 대부분의 학생이 맹휴를 하였다 하여 결과에 있어 축출당한 것인데 많은 신입생의 질을 본다면 완전히 저하되어 중학도 졸업못한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완전히 이땅 학원의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축출된 학생은 고사하더라도 현재의 재학생 역시 교수의 부족으로 변변히 공부도 못하고 그들 중에서도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재난이 큰 이땅에 있어 민주 건국에 역군이 될 학도들이 자기들의 학원을 잃은 것도 유감이러니와 더욱이 1년 후면 사회에 나올 많은 의학도들이 연구할 장소를 잃고 헤매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없다. 교수적고 학생적은 서울대학 그러나 그 이름은 당국자가 말하는 세계적인 학원일지는 모르나 현재의 교수와 현재의 학생으로는 확실히 서울대학이 저락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국자가 말하듯이 이것을 세계적인 우수한 학원을 만드는 것도 민주 학원 건설의 참목적일진데 민족적 양심으로 거리에서 배움에 굶주리고 민주 학원을 그리워하는 학생에게 한시 바삐 좋은 교수와 진정한 민주 교육이 이땅에 실시되기를 바랄뿐이다.
  • 1947년 4월 12일 <독립신보> 鬪爭을 繼續-국대공투 성명

@실제날짜:470411

국대안 반대 투쟁에 관하여 국대안 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11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대안은 당국의 시종 일관한 무성의로 인하여 8개월이 지난 금일에 있어서도 하등의 해결을 못보고 완전한 학원의 황폐화를 결과하고 말았다. 5,000여 명의 애국학생은 정의의 실천을 요구한 까닭에 학원에서 축출당하고 있으며, 다수의 양심적 교수는 부당한 억압 통제로 배제되었으며 신성한 학원은 학원모리배, 사이비 교육자, 가짜 학생복 입은 직업 테러단의 소굴화하고, 교실, 연구실에는 먼지가 쌓여 조국의 대학은 무참하게도 완전히 폐허화한 것이 현실이다. 도대체 조국의 장래를 쌍견에 걸머진 학생으로 하여금 배울 수 없게 만든 일대 민족적 죄악을 범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 5,000여 학도는 민주학원 건설을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는 결코 타협없는 투쟁을 계속한다는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 1947년 4월 12일 <동아일보> 西北 學生에 溫情
方應謨, 金炳淵 씨 등 대책위원회 두고 活躍
서북조선에서 이남으로 이주하는 동포 자제들의 입학난을 완화하고자 방응모, 김병연 양 씨 외 제씨가 발기하여 이북학생 전입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중등학생 2년생 백이십 명과 동 3년생 60명을 모집하며 희망자는 25일까지 조선민주당으로 지원하기 바란다고 한다.
  • 1947년 4월 12일 <동아일보> 收容能力 不過 五割 - 今年도 試驗地獄을 豫想
경기도내의 금년도 중학교로의 진학 관계는 과연 어떠한가. 진학 시기를 앞두고 학생과 학부형들 가슴은 점차로 조마조마하게 불안을 느끼고 있다. 지금 경기도내 중등학교는 40개소인데 수용 능력은 1만 5천 명으로 입학지원을 하리라고 예상되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2만 4천 명이므로 실로 9천 명이 진학의 관문에서 미끄러지게 될 것이라고 하니 실로 한심한 현상이다. 이러한 교육난을 타개하려면 독지가들이 솔선하여 학교를 많이 세워 민족문화 수준을 향상 발전시키는데 이바지 하여야 할 것이 절실히 요청되어 있다.
  • 1947년 4월 13일 <독립신보> 入試 方法 討議

@실제날짜:470417

7월에 실시하는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문교부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쉽게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연구 중인데 오는 17일 문교부 회의실에서 중등입시 제도에 관한 최종적 결정을 하리라 한다. 그런데 모든 폐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남조선에서 일제히 같은 날 같은 시험을 치르자는 논의도 있으나 결국 작년의 제도를 참작하여 학교내신서를 중시하는 동시에 시험 문제를 쉽게하여 지능을 테스트하는 상식시험 정도로 금년 입시를 실시하리라 한다.
  • 1947년 4월 14일 교과서 담당 미군장교 앤더슨 일본방문활동 보고

문교부의 편수국(Bureau of Textbooks) 고문 Paul S. Anderson은 교과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연합군사령부 관계자와 협의한 결과를 군정 장관에게 보고했다. 특히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종이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144]

  • 1947년 4월 16일 <동아일보> 國民皆學을 目標코 京畿道서 "文盲退治週間" 設置
경기도에서는 불원 남조선에 실시될 총선거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내에 한 사람의 문맹도 없게 하고자 오는 21일부터 27일까지를 "문맹급속퇴치주간"으로 설정하고 도내 전반에 걸쳐 유성대와 강연대를 파견하며 각 부문에서 성인교육대회를 개최하는 동시 면동리에 이르기까지 책임제를 실시하여 충실한 실적을 거양하기로 하며 부락마다 국문개학 강습회를 열어 오천년 찬란한 문화 민족으로써 왜정 시대 억압으로 해결짓지 못한 부끄러운 문맹 인민이 한 사람도 없이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만전의 조치를 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4월 19일 <한성일보> 중등 입시 고사의 새로운 成案
오는 7월 상순경 시행될 중등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남조선 각지에 있는 3천여 국민학교 졸업생 10만의 어린 가슴은 벌써부터 흥분 속에서 바르르 떨고 있다. 작년도에는 남조선 중등학교 360교 중 220교에 지원자가 11만 3,782명으로 그 가운데서 합격자가 3만 7,336명으로서 지원자의 36%에 해당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도에 있어서는 입학 시험을 2차례에 나누었던 만큼 실제에 있어서 남조선 전 지역의 중등학교 지원자는 약 9만으로 합격율은 70%를 넘었을 것이 예상된다. 금년에는 일반의 향학열이 일층 팽창되고 국민학교 수도 늘은 관계로 지원자는 10만을 훨씬 넘을 것이 예상되어 입학 경쟁율이 심할 것이 예측되고 있다.

종합고사를 실시- 국민교의 의견서와 지능고사뿐

이에 따라서 문교부 중등교육과에서는 신중히 연구를 거듭하고 있어 중등교육위원회에서는 금년도 입학생 선발은 출신 국민학교장의 조사서, 지능고사, 인물심사, 신체검사의 결과를 종합 판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작년 학과 시험의 많은 폐해에 비추어 금년도 지능고사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다음 각 항을 결정하였다.
1. 암기를 필요로 하는 문제를 피할 것
2. 기술적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문제로 할 것
3. 문제는 간단한 것으로 수를 많이 할 것
그런데 지난 16일 시내 공사립 국민학교장 회의에서는 금년도 중등학교 학생을 시험에 의하려면 국민학교장의 조사서를 받지 말고 만일 조사서를 받으려면 동조사서에만 의해서 선발하도록 하기로 결의하고 익 17일 중등교육위원회에 초등학교장 대표 윤재천외 4씨가 참석하여 동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 선발 방침 결정을 문교부에 일임키로 되었다는데 문교부에는 내주 초에는 관계자 회의를 열어 최후 결정을 지으리라 한다. 한편 이에 대하여 문교부 중등교육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학 시험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고 공정을 기할 수 없다. 또 반면으로 국민학교장의 조사서에만 의하는 것도 학교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만큼 전체적으로 측정하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국민학교장의 조사서를 존중하는 한편 종합적 지능고사를 하여야 할 줄 생각한다. 그리고 지원자들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학구제와 남조선 각 증등학교의 시험 기일을 동일하게 할 것 등이 고려되고 있다.
  • 1947년 4월 20일 <독립신보> 文敎部長 兪億兼君에게 보내는 公開狀- 백남운
군도 바쁘겠고 나도 바쁜 관계로 허구한 동안 토론할 조우를 얻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난 해 5월 7일 오후 1시 경에 전 학무국장 락카드 씨와 대학 운영 방침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을 때에 씨는 말하기를 (1) 학부 독립(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은 최초 당신과 約束한 대로 실현하려는 계획을 나는 생각하고 있오. (2) 교수회 자치제는 인사 결정권까지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대하는 것이나 교수될 인물들의 전문적 실력같은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사 문제를 교수회에서 논의하는 의미라면 나도 이해할 수는 있소. 다만 교수회의 의견을 듣고 안듣는 것은 부장의 자유일 것으로 교수회의 구속을 받을 것은 아니오. (3) 대학 교수로서 정당에 관계하는 것은 조선 건국기에 당연한 일이고 미국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요. 그러므로 정당에 관계하고 있다는 이유로 대학을 사임하게 한다는 당신의 의견은 너무 겸허한 생각이고 겸임도 좋을 것이나 정력과 시간만이 문제로 생각되는 것이오. 이상과 같은 의견 교환을 말한 후에 군을 만났더니 (1)과 (2)에 대하여는 우물우물하였고 (3)에 대하여는 일제 日帝官大式이라는 것과 당파가 생긴다는 말만 강조하고 아무런 성의 있는 의견을 듣지 못하였든 것이다. 건국기의 조선 민주 교육에 대한 건설적인 의견을 외국인인 락카드 씨로부터는 많이 들어으나 조선인인 군으로부터는 듣지 못하였다. 따라서 나의 무능한 책임을 자인하는 동시에 최초 대학에 관계할 때에 락카드 씨와 約束된 학부 독립과 교수회 자치제 수립이 실현 못될 것을 발견하고 사임해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서울대학안이 시행된 지 반년 이상을 경과하는 동안에 대학 교육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7,763명이나 되는 학생 중에서 5,800명 학생을 희생시키고 말아 버리는 최고 책임자가 군이 아니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4월 16일 밤 중앙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하여 방송된 귀 부하 모씨를 중심으로한 국대안 좌담회는 문교부 최고 책임자인 군의 의사를 대변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방송의 요지는 (1) 교사 및 교수를 유용하는 편리 (2) 재정적 경리의 합리화 (3) 학생들이 다양 다채의 교양을 받을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을 무시하고 학부형을 우롱하는 말밖에는 안된다. 금일까지의 실제적 결과로 보아서 (가) 민주 교육을 이해하는 유능한 교수들을 대량으로 放逐한 것 (나) 사립 교육 제도가 발달된 외국의 이사제와 경성 내의 사립 학교 경영자의 이사제와를 건국기의 관립대학에다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는 교수진을 결정적으로 弱化시킨 동시에 교육내용의 질적 수준이 저하된 것 (다) 우수한 학생이 5,763명이나 제적을 당한 것 등등이다. 그리하여 악화가 양화를 驅逐한다는 경제학상의 그레샴 법칙이 우리의 대학 교육계에 그대로 발로된 것은 민주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통탄할 뿐만 아니라 전기 방송을 들은 즉 새삼스러이 공분심을 억제키 어려워 구하는 바 없는 학부형의 일원으로서 慈에 단초를 보내는 것이니 지상의 해답을 보내는 동시에 민주 조선의 건설 사업을 담당할 만한 5,800명 학생의 진로를 개척하는 영단적 조치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나의 건설적인 사안으로서 (1) 이사진은 사립대학에 한할 것이고 관립  대학에는 적용하지 말것 (2) 사임한 교수들은 전부 복직시킬 것 (3) 인사 결정권은 부장이 가지더라도 그 결의권을 내포한 교수회 자치제를 용인할 것 (4) 미등록 학생을 전부 복직 시킬 것 (5) 각 학부를 독립시켜 단과 대학제로 개편할 것 등의 요항을 재언하는 바이다. 실은 이상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조언하려고 생각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군도 건설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나도 미력이나마 바쁜 관계로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간곡한 심정으로 慈에 제언하는 동시에 후일의 일석의 隱討할 기회를 가지려 하고 군의 깊은 이해가 있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 4월 17-
  • 1947년 4월 20일 <한성일보> 痛敬, 轉落의 師弟道- 기○風紀를 학원은 어찌 보나?
오랫 동안 큰 말썽거리였고 아직도 이렇다할 해결을 짓지 못한 채 있는 국대안 문제로 인한 대학생들의 동요는 중등 학생들에게도 적지 않은 파문을 던져 일부 참되지 못한 학생들은 도리어 기회나 만난듯이 극장과 술집 또는 공원을 내집 삼고 배움의 길에서 탈선하고 있다. 더욱 신성해야 할 사제 간에 재미없는 일이 여기 저기서 발생하여 사회의 큰 문제 거리가 되어 있으며 학부형들은 학교 당국의 교육 방침에 대하여 큰 의혹을 갖고 있다. 이러한 슬픈 현상을 기자는 몇몇 여학교를 방문하여 각 학교 책임자의 담화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기백과 열이 부족- 참된 사제애는 존경과 성실로
배화고녀 안훈육주임 談
▲배화고여 안신영훈육부주임의 말- 물론 요즈음 큰 화제가 되어 있는 패륜 사건은 우리 교육계의 큰 수치이다. 그러나 이것을 크게 취급하여 떠들어도 도리어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다고 등한히 생각도 못하겠고 그저 국부적으로 좋은 해결을 지어 주기 바란다. 내 학교에서는 언제나 ○○한 방침이 있다. 즉 선생은 생도를 딸이나 동생처럼 사랑할 것, 따라서 생도들도 아버지나 오빠처럼 사모하되 옳지 못한 것을 발견할 때는 절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나타낼 것. 그런데 요즘 여학생들은 그 전 학생에 비하여 기백과 배움의 열이 적다. 그리고 선생을 존경한다는 것보담 아주 깔보고 있으니 여기에는 선생들의 책임이 더욱 크다.
실력없는 선생들이 되지 않은 정치 사상만을 넣어 줄려고 하나 큰 탈이다. 먼저 실력으로 받은 존경이 있어야 하고 학생들은 선생의 비판만 말고 좀 더 배움의 길을 닦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엄격한 기율- 경기고여 담
▲경기고여 한경원교무주임의 말- 학생의 풍기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그럼으로 우리 학교에서는 훈육부에 있는 7, 8인 선생이 철저히 방침을 세워 실시하고 있다. 즉 6시 반까지는 반드시 학교에서 돌아가야 하며 저녁 7시 이후에는 절대 외출을 금지하고 더욱 친척 이외의 남자하고는 동행을 못하게 하며 극장출입에 대하여도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적 자유라는 것을 바로 인식시키는 데는 결근하시는 선생들이 많아 그 시간을 이용하여 교장의 수업이 있다. 무엇보담 우리 학교는 각 학생의 개성을 살려 그것을 바로 길러 줄려고 한다.
가정, 학원, 사회 일체
▲숙명고녀 최인호 교무주임의 말- 오랫 동안 학교 당국이 분열과 혼란에 빠져서 학생들이 적지 않은 희생을 당하고 있었다. 약 2주일 전부터 문교장의 신임과 새 선생진으로서 완전히 궤도에 올라서 전통깊은 이 학교의 특징을 살리며 새 교육에 힘쓰려고 한다.
지금 세가지 방침을 세우고 있는데 첫째로 학생들의 배움의 열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선생들도 같이 배움의 태도로 학원의 참된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 둘째로 풍기 문란 방지를 위하여 방과 후일지라도 5시 반까지는 전부 학교에 남아서 청소 작업을 할 것, 세째로 가정과 학원 사회의 삼부 일체 실현을 위하여 지금 학생들의 가정 방문을 실시하고 있다.
눈물로 사회에 항의, 합심 일치, 실력 양성에 매진- 이화고녀 談

▲이화고녀 서명학 교무주임의 말- 교장선생이 계셨으면 그 연구적인 이상이 풍부하신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데 매우 유감스럽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제부터의 여자는 남녀동등의 목표 밑에 나가야 하겠다. 거기에는 실력 양성이 제일이다. 해방 후 10월 1일에 개학한 이후로 선생, 학생을 물론하여 아무런 분열이 없이 일치 합심하여 하루도 학교 수업을 중지한다는 등의 맹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우리 학교의 자랑이라고 하고 싶다. 학생들은 명랑하고 활발하며 선생들은 모두 열심이다. 1천 3백이나 되는 학생과 근 40명이나 되는 선생들의 출석이 거의 백퍼센트의 성적을 내고 있다. 실력 중심으로 나가는 우리 학교는 과학, 외국어, 수학 더욱이 체육에 많이 힘쓰고 있다. 군정청 제정 시간은 한시간에 45분으로로 되어 있으나 50분 한시간으로 하여 매일 6시간 가르치고 그래도 실력이 부족한 학생에게는 남아서 한 시간씩 더 교수한다. 만일 어쩌다 선생이 결근하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교원실에 와서 배우고 싶은 과목의 선생을 끌고 간다. 지난 모여대학의 패륜 사건이 있을 때도 우리 학생들은 사회인의 비난에 대하여 울면서 대항한 일까지 있다. 그만큼 선생들을 믿으며 학업에 충실하다. 너무 자기 자랑만 하는 듯하나 사실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 1947년 4월 23일 <한성일보> 금추 입시는? 좁아드는 배움의 문- 依然 부족된 남조선 교육시설
오는 7월 순에 시행될 남녀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을 앞두고 벌써부터 심각한 입학난 지옥이 예상되고 있는 바 최근의 남조선 상황은 어떠한가?
우선 유치원 220개이고 국민학교가 3,184교, 31,137학급으로서 동 교원이 29,822명이며 재적 생도가 2,183,449명에 달하고 있다. 한편 사범학교는 17교 118학급으로 의무교육 실시 과정의 부족한 교원 육성에 매진하고 있다.
다음에 일반 중등학교는 386교 2,988학급으로서 동 교원이 5,883명이며 생도는 155,533명이라 한다. 그리고 고등교육 기관인 전문대학은 23교 174학급으로서 동 교원이 1,125명이며 재적 학생은 19,377명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해방 직전과 비교하면 재적 생도 수에 있어서 초등학교는 41.5%, 중등학교는 150%, 전문대학은 530%의 증가를 각각 보이고 있다.
  • 1947년 4월 24일 <동아일보> 問題의 敎育費 京師經費에 使用
金 市長 談 : 學校費 負擔 過重은 嚴禁
서울시 기자단은 24일 김시장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문 : 각 국민학교, 중등학교에서 각종 명목으로 부형에게 과중한 부담이 많다는 비난이 큰데 대책은 없나?
시장 : 자모회는 다만 가정과의 연락기관으로만 인정하고 회비 증수는 엄금하고 있다. 후원회의 부담도 경감하도록 하겠다. 학무국장 회의에서 논의된 대로 교직원 봉급의 증봉과 생필품 배급이 실시되면 학부형의 부담은 경감될 것이다.
  • 1947년 4월 25일 <독립신보> 未登錄 新學期에 復籍- 러 장관과 정례 회담

@실제날짜:470424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24일 상오 10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문답을 하였는데 특히 앞서부터 문제가 되어오던 국대 미등록생 문제에 언급 오는 신학기에는 이들을 전부 복적시킬 의사를 갖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아직 등록을 마치지 않은 국대 학생의 복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답: 2학기도 벌써 상당히 지났기 때문에 지금 등록하지 않은 학생을 복적시킬 의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돌아오는 신학기에는 복적시킬 의사가 있다.
  • 1947년 4월 27일 <독립신보> 대학생들의 최근 동태- 제1 祈願은 학원 자유와 교수 복직
이땅의 학생 대부분이 학원의 자유와 민주 조선 건설에 힘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기쁜일이거니와 그러면 최근의 학생 생활 동태는 ? 모대학 학생과 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현지 학생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더욱 최근 학생들의 대부분이 좋은 선생을 잃고 학원을 잃어버려 불타는 학구심을 만족할 수 없다고 하니 학원에서 내쫓은 민주주의 교수들을 복직시킬 것이요, 학원을 배움에 불타는 학생들에게 돌려주지 않는 한 민주주의 건설에 큰 지장이 있을 것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먼저 대학생들의 사상 경향을 본다면 모두가 열렬한 민주주의자, 독서 경향을 보면 문예물이 28%, 사회경제 21%, 철학 15%, 사학 12%, 자연과학 9%, 종교 6%, 기타가 9%로 되어 있다. 종교 방면을 보면 무신론자가 68%, 기독교가 13%, 유교가 12%, 불교 천도교가 각 3%, 대종교가 1%로 되어 있다. 또한 학생들의 취미를 보면 독서가 제일 많아 43%, 다음으로 운동 18%, 영화와 연극이 15%, 밤 산보가 10%, 다방가는 것이 9%, 동구가 5%, 또 그들의 여성관을 보면 현대형이 69%, 고전형이 29%, 그중의 2%는 극단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의 숙소를 보면 하숙 43%, 자택 33%, 친척 17%, 자취가 9%, 기타 4%, 학자의 출처는 보면, 부모 66%, 친척 6%, 타인 3%, 이러한 방면에 원조가 없이 회사 혹은 가정 교사 등으로 생활하는 학생이 25%에 달하고 있다.
  • 1947년 4월 27일 <독립신보> 增設되는 남조선의 학원- 전문대학교만 23교
일제가 이땅에 물러간 후 남조선 각지에서는 북돋아 오르는 청소년의 향학열에 발을 맞추듯이 국민학교를 비롯하여 중학·대학의 신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문교부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문교 당국의 인가를 받은 전문대학의 수효는 서울시에 문과계통이 9교, 이과계통이 4교, 문리과 계통이 4교 도합 17개교가 있고, 지방으로 내려가서는 충북에 문과계가 1교, 경남에 이과계가 1교, 경북에 이과계가 2교, 전남에 이과계와 문리과계가 각 1교씩 있어서 남조선만 해도 전문대학의 총수가 23개 교에 달하고 있다. 한편 남여 중등학교의 총수는 308개 교인데 이것을 인구에 비례하면 約 5만 명에 1학교씩 있는 셈으로서 도별로 본 중등학교의 분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 경기 충남 충북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제주 강원 계 
사범    1   1    2    2     2   1     3   2        2  16 
인문(남)16  13   9    9     25  16    19  7   3    1  28 
인문(여)19  5    8    9     10  5     6   8         2  72 
농과    1  19   18   10    8   16    7   9    2    12 22 
공과    7   1    1    2     2   2     3   2         1  21 
상과    12  3    1    3     3   3     1   3         1  30 
수산        1               2         1                 4 
畜産        1                         1                 2 
기타    5                                                5 
계      61  44   39   35   52  44    50 31   5    19  380
  • 1947년 4월 30일 <동아일보> 文盲 急速 退治코자 國文短期講習會 開催 - 京畿道
보통선거를 앞두고 문맹을 하루속히 없이하고자 경기도에서는 1일부터 1개월간 도내 5,991개 촌락에 국문단기강습회를 열어 성인교육의 만전을 기할 것이라 한다.


1947년 5월

  • 1947년 5월 4일 <동아일보> 建國學生聯盟 全國代議員會
16, 7일경 基靑서 開催 豫定
전국학생연맹에서는 오는 16, 7경 시내 종로 YMCA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이날 대회가 끝나면 미소공동위원회 성공에 대한 호소강연회를 열기로 되었다.
  • 1947년 5월 8일 <독립신보> 검거 학생 석방하라- 學統에서 聲明

@실제날짜:470507

메데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학생을 체포한데 대하여 학통과 중등공투에서는 7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하였다. 
1. 남산 메데 대회에 참가하였다는 구실로 학생을 대량 검거함에 대하여 엄중하여야 한다. 
1. 서울운동장 메데에 참가한 학생들은 묵인한 것은 경찰의 편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1. 즉시 검속한 학생을 석방하라.
  • 1947년 5월 8일 <독립신보> 금년도 중등교 입시 방침-가급적 거주지 근처 학교 지원

@실제날짜:470506

새 학기 입학 시험을 두 달 앞에 놓고 중등학교 입학 시험 방법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은 학교 당국은 물론 상급 학교에 보낼 아동을 가진 일반 부형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문교부에서는 중등교육위원회와 초등교육위원회에서 제시한 안을 충분히 참작한 나머지 6일 관계 국과장회의를 열고 최후적인 결정을 맺었다. 그런데 이에 의하면 입학자 선발은 출신 학교장의 조사서, 신체 검사, 지능 고사 및 인물 심사의 결과를 종합 판단하여 채택하게 되었으며, 한 학교에 수업 아동이 집중됨을 방지하고 한편 학부형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아동의 지원 학교는 거주지 근처의 중등학교를 선택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초등학교에 대해서는 상급 지망자 아동의 성적과 희망을 들어 분배 지원하고 이와 동시에 중등학교에는 모집 정원수의 3배에 해당하는 인원에만 필답 시험을 치를 자격을 주게 되어 그 이상의 지원자가 있을 경우에는 출신학교장의 조사서를 가지고 제1차 전형을 함으로써 초과된 수요를 미리 떨어뜨리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금년도에는 그 전과 같이 한 학교에 지원자가 몰려드는 폐해는 자연 없어지게 될 것이 예상되는데 서울시만 해도 남여 중등학교의 신입생 수용 능력은 12,000여 명에 달하고 있어 국민학교 졸업생 아동수는 30,000으로 치더라고 감히 심한 입학 지옥을 초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 시험기일은 7월 3일부터 9일까지 사이에 각 학교 임의로 결정하게 하여 한 학생으로 하여금 적어도 두 학교까지는 지원할 수 있도록 입학난의 좁은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 1947년 5월 8일 <독립신보> 메데 참가로 퇴학- 배화여중생 7명에 퇴학 처분

@실제날짜:470505

배화여자중학교에서는 남산공원의 메데 行事에 나아간 학생 150명에 대하여 동교에서는 2일 학부형과 동반하여 등교할 것을 명령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수업을 거절하고 교실에서 내쫓았으며 지난 5일에 직원회의를 열고 협의한 결과 소위 주모자라고 지목되는 학생 7명에게 퇴학, 33명에게 1주일간 정학, 3명에게 3일간 근신이라는 심혹한 처분을 내렸다 한다. 이에 분격한 처분을 받은 학부형측에서는 6일 동교를 방문하고 항의와 절충을 하였으나 별반 학교측의 성의있는 확답을 얻지 못함였으므로 불일중 학부형대회를 개최하여 엄중한 비판과 대책을 강구하리라 하는데 더욱이 이번에 처분을 받은 학생은 전부 남산공원에 나아간 학생들이고 서울운동장에 나아갔던 학생은 전혀 묵인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편파적인 처사는 동교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바 있어 일층 부형들의 분격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당국과 부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장, 이강래 씨 담 
학생들이 그러한 정치적 行事에 참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서울운동장에 나아간 학생들도 금후 조사하여 같은 처분을 하겠다. 
학생 이 孃 담 
대단히 억울합니다. 우리가 잘못했다면 좋도록 교도를 받고 싶은 것이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우리 행동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학부형 임씨 담 
이러한 냉혹하고 편파적인 학생을 처분하기 위한 처분은 심히 유감이다. 학부형회를 열어 협의한 작정이다. 
민정장관 안재홍 씨 담 
노동자의 기념식전에 학생들이 참가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초래한 것이지 경찰이나 학교 당국에서 남산공원에 참가한 학생과 서울운동장에 참가한 학생을 차별 취급했다는 것은 이와는 별문제라고 생각한다. 
문교부장 유억겸 씨 담 
상부 명령이라고 하나 나는 그러한 지시를 한 일이 없다. 학생들이 노동자의 식전에 참가하는 것은 신분에 벗어나는 일인만큼 경찰에서 임의로 취조한 모양인데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서울운동장에 간 학생들은 취조하지 않고 남산공원에 간 학생들만 잡아들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한 보고가 없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욱 학교 당국에서 학생들에게 취한 태도에 대하여서는 나로서는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 1947년 5월 8일 <동아일보> 各 中等學校 試驗 7月 3日 實施키로 方法 決定
文敎部에서 各道에 通牒
중등학교 입학시험 문제는 그간 문교 당국에 일임되어 초등교육위원회와 중등교육위원회안을 신중 검토중이었던 바 구체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으므로 문교부에서는 7일 각 도지사와 서울시장에게 통첩을 발송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요항을 발표하였다.
一. 출신학교장의 조서와 신체검사, 지능고사 급 인물고사의 결과를 총체적으로 종합판단하여 입학자를 선출함.
二. 학교선택으로 인한 경쟁과 학비부담을 경감케 하기 위하여 지원 학교는 거주지 근처의 중등학교를 선택함을 원칙으로 함.
三. 지망자가 모집 인원의 3배를 초과할 경우에는 출신학교장의 조사서에 의하여 제1차 전형으로써 모집 인원의 2배 내외의 인원을 사전 발표할 것.
四. 출신학교장 조사서의 성적을 500점 만점으로 심사할 것.
五. 신체검사
六. 지능고사의 성적은 500점 만점으로 사정하고 그 내용은 국민학교에서 수업한 전학과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을 2회에 나누어 실시하되 1회의 문제수는 50문제이상으로 하며 시간은 1시간 이내로 할 것.
七. 인물고사는 지원 아동의 언어, 태도, 성격, 기타 인물에 관하여 심사함.
八. 시험기일은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이에 임의로 함. 그리고 출신학교가 38이북인 지원아동으로서 국민학교장의 추천을 받을 수 없는 아동은 졸업 또는 6학년 재학을 증명할 만한 서류를 제출케 함으로써 추천에 대용하고 6학년에 재학하지 못한 아동 혹은 재학증명서를 가지지 못한 아동에 대하여는 국민학교 학년 전교과의 필답시험에 합격한 아동만에 한하여 입학시험을 수험시키게 되었다 한다.
  • 1947년 5월 8일 <한성일보> 중등입시 考査案을 결정- 교장 조사서와 지능고사를 위주

@실제날짜:470506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루보한 바와 같이 중등교육위원회안과 서울시내 초등학교장회안과의 의견 대립이 있어서 그 최후 결정을 문교 당국에 일임하였던 바 문교부에서는 검토를 거듭한 다음 6일 국과장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특히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에 있어서는 출신 국민학교장의 조사서를 중요시하게 되어 동 조사서에 의하여 제1차 전형을 하고 다음에 지능고사를 시행하는 한편 출신학교장의 조사서와 지능고사의 성적 채점을 반반씩 하기로 되어 입학시험 준비 교육의 폐해를 타파하고 어린 가슴을 억누르는 아동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데 커다란 기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등입시선발요항
 ▲ 제 1 총칙
1. 중등학교 입학자의 선발은 과거의 입학 시험 준비 교육 폐해의 제거와 민주주의 교육의 취의 실현을 기하며 엄정 공평하게 차를 실시할 것
2. 중등 학교 입학자 선발은 출신학교장의 조사서, 신체검사, 지능고사 내지 인물심사의 결과를 종합 판정하여 차를 행함
3. 학교 선택으로 인한 격심한 경쟁 내지 학부형의 과중한 학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아동의 지원 학교는 거주지 근처의 중등학교를 선택할 것을 원칙으로 함
4. 지원자가 모집 정원의 3배를 초과할 경우에는 출신학교장 조사서에 의한 제 1차 전형으로서 모집 정원의 3배 내외의 인원을 사정 발표할 것
▲ 제 2 출신학교장의 조사서
 1. 출신학교장 조사서
 2. 국민학교 제 6학년 학급별 학년말 성적일람표
 3. 출신학교장 조사서의 성적은 500점 만점으로 상기 조사서를 심사하여 차를 점수화하되 특히 하기 사항에 유의하여 그 적정 공평을 기할 것
 1) 조사서 기제 사항 중 건강, 근면 내지 인물에 관한 것. 출신 학교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다르고 또 이것을 점수화하는 것은 실제로 곤란할 뿐 아니라 적정을 기하기가 매우 곤란한 즉 조사서의 점수는 주로 5, 6학년 학과 성적에 의하여 사정하되 건강, 근태 내지 인물에 관한 사항은 참고자료의 정도로 참작할 것.
 2) 학과 성적 중 각 교과서별 성적 내지 평균 등은 학교에 따라서 표준이 다르므로 차에 의하여서 점수화하는 것은 학교 차이를 무시하게 되어 直正한 입학 지원자의 실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즉 석차에 대하여 하기 방식에 의한 점수를 산출한 후에 각과별 성적, 평균 등을 차에 참작, 조사서 성적을 점수화할 것. 500 X {학급 총인원-(석차-1)}割학급 총인원 ▲ 제 3 신체검사
 1. 수학상 지장있는 난치 감염성 질병의 유무 기타 신체 상황에 관하여 검사함.
 2. 수학상 지장있는 난치 또는 감염성의 질병이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입학을 허가치 않을 것.
▲ 제 4 지능고사
 1. 지능고사의 성적은 500점을 만점으로 하여 사정할 것.
 2. 지능고사는 필히 2회에 나누어 실시하되 1회의 소요 시간은 일 시간 이내로 하고 1회의 고사 문제수는 50문제 이상으로 할 것.
 3. 지능고사는 국민학교에서 수업한 전 학과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지원 아동의 지능 정도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하되 하기 사항에 특히 유의할 것.
  1) 직접 암기를 필요로 하는 문제를 피하고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 사고를 요하는 것으로 할 것
  2) 기술적 답을 필요로 하지 않고 채점을 용이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로 할 것.
  3) 출제의 근거를 표시하는 학과명같은 것을 표시하지 말 것.
  4) 문제 가운데 한자 사용은 현행 교과서 범위 내에서 한자를 국문에 병서하는 정도로 하는 것은 무방함.
▲ 제 5 인물검사
지원아동의 언어, 태도, 성격, 기타 인물에 관하여 심사를 함.
▲ 제 6 입학지원절차
입학원서, 조사서, 학급별 학년말 성적 일람표를 지원 학교에 제출함.
▲ 제 7 시험기일
시험 기일은 7월 3일부터 7월 9일까지 사이로 함.
▲ 제 8 적용범위
본 요항은 국공사립 초급중학 및 중학교의 입학자 선발에 관하여 차를 적용할 것.
  • 1947년 5월 9일 <독립신보> 경관의 학원 침입 엄금- 장총장 관하 각서에 시달

@실제날짜:470508

최근 신성한 학원에 있어 남여 중학생이 경관에 끌려가는 일이 많은 것은 이땅 남조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수도청 장총장은 8일 관할 각 서에 대하여 '금후 경관이 학원내에 침입하여 학생을 체포하는 것을 엄금함'이라는 시달을 하였다.
  • 1947년 5월 9일 <독립신보> 메데 참가 학생 800-학생 처벌은 학교장의 임의

@실제날짜:470508

메데 行事에 참가한 학생에 대한 검속과 학교측의 처벌 문제는 교육계는 물론 사회 각층에 심대한 충동을 주어 더욱 파문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을 끄는 것은 서울시 학무 당국의 태도로써 메데 이전에 모종의 지시 공문을 각 중등학교에 보낸다는 설화가 세인의 이목을 충동시키고 있던바 서울시 학무국장이 8일 언명한 바에 의하면 문제의 지시는 5월 1일을 기하여 시내 전 학교에 대규모의 동맹 휴학이 단행되리라는 문교부와 기타의 정보 제공과 교시에 의하여 보낸 것이라고 한다. 시 학무국에서는 이 정보에 의하여 4월 29일 각 학교에 지시를 보내어 학교에 외부로부터 출입하는 사람을 조사 결석학생의 조사, 전번에 동맹 휴학 할 때 처분을 받았던 학생과 재학생과의 연락 관계, 학생의 집회 등을 조사 감시할 것과 특히 1일 당일에는 전직원이 총동원하여 경계 감시할 것을 명령한 것이라고 한다. 또 이와 함께 학생이 수업 정지, 또는 맹휴를 敢行할 때에는 수요와 다과를 불문하고 용서치 않을 것과 학교 일과를 무시하고 타의 지시에 의하여 행동함을 절대 불가한 것, 학생이 정치적 行事에 참가하여 시위를 할 경우에는 절대 엄중 처단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하며, 다시 5월 3일에는 메데 당일 결석한 학생을 조사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한다. 이에 대하여 8일까지 시내 40교로부터 들어온 보고를 보면 메데의 두 곳 기념회장에 출석한 학생 총수는 約 800명이며 그 대다수는 남산공원에 참가하고 서울운동장에는 約 10명 밖에는 참가치 않았다는 흥미있는 숫자를 보이고 있다. 이 회장 참가 학생수에 있어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시당국에서는 1일 특히 양 회장에 시학이 출동하여 학생의 참가 여부를 조사케 하였던 바 남산에는 다수의 학생이 참가하였고, 운동장에는 전혀 볼 수 없었다는 보고를 들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배화여중 등의 학생 엄벌에 대하여 이 학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생의 처벌은 학교장의 의사로 결정하는 것이고, 학무국에서 간섭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적 견지에서 그 처벌이 부당하다면 지도할 책무는 있다. 아직 정식 보고가 없으므로 말할 수 없으나 보고를 본 후에 적당히 조치하겠다.
  • 1947년 5월 9일 <독립신보> 메데학생 검거는 서울시 학무당국의 요청- 장총장과 문답

@실제날짜:470508

지난 1일의 메데를 계기로 남산에 참가한 학생을 검속하고 서울운동장에 참가한 학생은 묵인한 사실과 또한 검속한데 대하여 학원을 유린하는 경찰에 대한 비난이 큰 데 이 문제를 비롯하여 기타 문제에 대하여 장총장은 8일 수도청기자단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지난 1일의 메데에 남산에 간 학생은 체포하고 서울운동장에 간 학생은 묵인한 것은 경찰의 편당한 처사라고 비난이 큰 데 
답: 지난 1일의 메데에 남산에 간 학생을 체포한 것은 서울시 학무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즉시 석방하였고, 아직 45명이 남아 있는데 석방 될 것이다. 
문: 메데에 참가하였다고 체포한 여학생에 대하여 종로서장은 "서방얻으러 남산에 갔니"하는 등 심한 말을 하였다는데 여학생에 대한 이런한 언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그것은 잘못이다.
  • 1947년 5월 9일 <독립신보> 학생 검거 위촉한 일 없다- 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 담

@실제날짜:470508

교육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배화여중에서 메데에 남산공원 회장에 나갔다는 이유로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은 학생 중에 4명은 8일 서울시에 마틴 학무국 고문을 방문하고 그들의 입장과 진상을 설명하고 겸하여 당국의 온정있는 조처를 요망하고 돌아갔는데 학생들과 만난 후 마틴 씨는 경찰의 학생 검거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명을 하였다. 
배화고여학생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이 문제는 장 수도청장과 또 배화고여 교장과 만나서 그들의 설명을 들은 후에 발표하겠다. 그리고 학무국에서는 경찰에 메데 당일 학생을 검속할 것을 위촉한 일은 없다. 학무국의 위촉없이는 경찰이 학원에 침임할 수 없다. 조금 전에 장씨를 만나고 왔는데 장씨는 학생을 검속한 일은 없다고 말하였다. 미국에서는 학생이 메데와 같은 사회적 行事에 참가하는 것은 관계치 않으나 정치 상태가 혼돈 중에 있는 경우에는 사정은 다를 것이다.
  • 1947년 5월 11일 <독립신보> 메데 참가 학생 처벌- 京畿, 德成 양 女中서도

@실제날짜:470509

메데 참가 학생의 처벌은 지난 번의 배화고여을 선두로 하여 단행되어 지난 9일 경기, 덕성 양여자중학교에서도 마침내 다시 학생을 처벌하였다고 하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각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덕성여중 김교무주임 담 
아직 정식 처분에 대한 통고를 학부형에 보내지 않았으나, 25명 학생에게 금명간 각기 상당한 처분을 할 작정이다. 이들 학생은 방금 근신 처분 중에 있는데 처벌은 엄벌주의로 나아가겠다. 
경기고여 오교무주임 담 
9일에 3명은 퇴학, 4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사전에 당국의 지시도 있어 메데회장에 나아가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몇 학생이 나아갔음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로 당국의 지시에 따라 마침내 처분을 줄 것이다.
  • 1947년 5월 11일 <독립신보> 전문부 신입생 모집 폐지-醫學, 藥學, 수산계는 예외

@실제날짜:470505

학기말과 새학기를 앞두고 신학제를 실시함에 따르는 금년도 전문대학의 신입생 모집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데 대해서 일반은 많은 관심을 끌어오고 있는데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5일 이에 대한 문교 당국의 최고 방침을 산하, 각 관계 기관에 통첩을 보내었다. 이에 의하면 먼저 졸업시기는 늦어도 7월 상순까지 전부 마치기로 하고 최대한 50일을 넘기지 못하는 하기 휴가를 마친 다음 새학기를 열게 되었는데 원칙적으로 의학, 藥學, 수산 등 계통을 제외한 각 대학 전문부의 신입생 모집은 중지하되, 미취학 청년의 앞길을 열어주고져 다음과 같은 요령 밑에 제2학년 이상의 상급생만은 모집하기로 되었다. 
▲ 모집범위 
 1. 금년도 고등교육 기관의 학생 모집은 의학, 藥學, 수산학 계통의 학교를 제외한 각 대학전문부 1학년 신입생은 모집하지 않키로 함.
 2. 그러나 각 대학 학부 각 학년 및 동 부속 전문부 또는 국립서울대학 예과부 제2학년 이상의 편입 혹은 보결생 모집은 이것을 승인함. 
 3. 더욱 편입생 혹은 보결생 모집에 있어서는 현재 각종 중학의 4-5학년 즉 고급 1-2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은 그의 모집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함. 
▲ 모집시기 
 신입 혹은 보결을 불문하고 각자의 학교에서 적당한 시기에 실시하기로 함. 
▲ 시험방법 
 1. 의학, 藥學, 수산학 계통의 전문부 신입생 방법은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 시험외에 각 학과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적당한 과목을 2-3과목 자유로 선정하여 실시하되, 학술시험 과목은 총 7과목을 넘을 수 없음. 
 2. 제2학년 이상의 편입 혹은 보결생 모집 방법은 신입생 선발 단계와 각 희망 학년에 해당한 편입 시험 단계를 각각 경유함을 요함. 더욱 야간 전문부 재학생으로서 주간 전문부 제2학년 이상 혹은 학부 제1학년에 편입하고자 하는 학생은 각 해당 학년에 상당한 특별 자격 시험만을 치르면 됨.
  • 1947년 5월 11일 <동아일보> 文敎部 新年度 敎育行事 決定 發表
卒業式은 7月 上旬까지, 夏期 休學은 50日 以內로
문교부에서는 1946년도 초중고등 교육 기관의 졸업시기, 하기휴가, 학생 모집 등 제반 行事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각 도지사를 비롯하여 각 대학 책임자에게 통첩을 띄웠다.
즉 졸업식은 이를 7월 상순까지 완료하고 년도말 하기휴가는 작년도와 같이 동일한 시기에 실시하되 최대한 50일을 넘지 못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신년도 학생 모집은 작년 6월 6일부 문교부장 통첩 "現行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임시조치요강"에 의하여 의학, 藥學, 의과학, 수산학 계통학과를 제외한 각 대학 전문부 제1학년 신입생은 이를 전적으로 모집하지 않기로 되었다. 그러나 각 대학부 각 학년과 동 부속 전문부(또는 국립서울대학 예과부)의 제2학년 이상의 결원 또는 보결원 모집은 이를 승인하나 현재 각종 중학교 4, 5학년생은 그의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이의 모집은 각 학교에서 적당한 시기에 실시하되 시험방법은 의학, 의과학, 藥學, 수산학 계통의 신입생은 작년 4월 20일부 문교부장 통첩 "신학년도 제반 실시요항에 관한 통첩"에 의하여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문제 등 4과목 이외에 각 학교의 내용과 성격에 적응한 과목을 2, 3 과목 자유 선정하여 도합 7과목 이내의 학술시험과 구술시험, 신체검사외에 최종 학교의 최고 2개 학년 성적을 참고하기로 하고, 대학 학부 각 학년과 동 부속 전문부 제2학년 이상의  결원 또는 보결생 모집은 작년 6월 6일부 문교부장 통첩 요항에 의하여 작년도 까지의 구제도 각종 중학교 전체 학년 또는 제5학년 졸업자로써 새로히 대학 학부 일학년과 동 부속 전문부 또는 예과부 제2학년 이상의 편입 또는 보결시험에 응시자는 제1 신입생 선발시험 계단과 각 희망 학년에 해당한 제2 편입계단으로 거쳐야 된다.
그러나 대학부속 전문부 야간부에 재학생으로써 주간 전문부 2학년 이상 또는 학부 제1학년에 편입 희망자는 각 해당 학년에 상당한 특별 자격 시험만을 거치면 된다.
  • 1947년 5월 11일 <동아일보> 獎學金 받아 美國에 留學가는 張震 군과 韓高麗 양
국립서울대학생 장진 군은 미주 세인트 안설톰스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외무처 문화과를 통하여 수속 중이던 바 이달 10일 인천항발로 도미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화여대 음악과 한고려양은 텍사쓰 하워-드테인대학의 장학생위를 얻어 역시 이달 중순경에 도미하기로 되었다.
  • 1947년 5월 11일 <한성일보> 각 대학 新募 中止(醫藥水産제외)- 입시, 졸업 방책 등을 결정
오는 9월부터 시작되는 남조선 각 학교 신 학기를 앞두고 지난 7일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규정이 문교 당국으로부터 발표된 데 이어서 고등교육에 관한 신입학생 모집 요항을 비롯하여 각 대학의 졸업기, 하기 휴가 등에 관한 문교 방침이 결정되어 서울시장 각 도지사를 비롯하여 각 국공사립대학장에게 정식으로 통첩이 발송되었다.
▲ 졸업시기; 4279년도 각대학 졸업식은 4280년 7월 상순까지 완료하기로 함.
▲ 하기휴가; 4279년도 학년말 하기 휴가는 4278년도와 동일한 시기에 실시하되 최대한 50일을 초과함을 부득함.
▲ 학생 모집 요항
 1. 모집범위; 본년도 각 고등교육 기관의 학생 모집은 의학, 약학, 치과학, 수산학계통 학교를 제외한 각 대학, 전문부 제 1학년 신입생은 차를 전적으로 모집하지 아니하기로 함.
  단 (1) 현하 미취학 청년의 다수인 실정에 감하여 각 대학 학부 각 학년 내지 동계통 전문부(또는 국립서울대학교 예과부)의 제2학년 이상의 편입 혹은 보결생 모집은 차를 승인하기로 함.
  (2) 상기 편입생 혹은 보결생에 있어서는 현재의 각종 중학교 제4, 5학년(고급 제1,2학년) 재학생은 그의 모집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함.
 2. 모집시기; 신입 혹은 보결을 불문하고 각자의 학교에서 적당한 시기에 차를 실시하기로 함.
 3. 입학지원자 선발시험 방법; (1) 학술시험: 공통 표준 과목은 국어, 수학, 외국어, 상식 시험 4과목 이외에 각 학교의 내용과 성격에 적응한 과목은 2, 3과목 자유 선정하여 실시하되 학술 시험 과목 합계 7과목을 초과함을 부득함. 단 외국어는 영어를 원칙적으로 실시하되 사정에 의하여는 독, 불, 중어중 기 1을 자유 선택하여 실시할 수 있음 (2) 최종학교의 최종 2개 학년 학업 성적 참고 (3) 구두시험 (4) 신체검사
  • 1947년 5월 12일 서울시 학무국고문 Martin May Day 사건에 대해 보고

서울시 학무국 고문 Martin은 May Day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경찰의 지나친 학원 탄압에 대하여 비판하였다.[145]

  • 1947년 5월 12일 서울시 학무국고문 Martin 문교부 전횡 비판

서울시 학무국 고문 Burton E. Martin은 서울시내 초중등학교 교장에게 공문을 보내서 문교부의 전횡과 경찰의 May Day 行事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였다.[146]

  • 1947년 5월 13일 <독립신보> 시내 초중등 학교장 회의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금 13일 오전 10시부터 시내 경기여중 강당에서 초등, 중등 학교장 회의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방금 파탄을 일으키고 있는 메데 참가 학생의 처벌 문제와 아울러 학무 당국의 교육에 대한 근본 방침 결정이 지시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1947년 5월 13일 <독립신보> 학교 당국의 처사는 부당- 학생 처분에 民主女同 담화

@실제날짜:470512

이 학생 문제에 대하여 민주여성동맹과 청우당에서는 12일 각기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메데 祝賀는 근로 인민의 생활 확보와 세계 평화를 목표로 전세계에서 祝賀하는 평화로운 집회에 자유로 학생들이 참가함을 그 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당국은 메데 참가 학생을 경찰에 고발하여 수십 명씩 검속케 하는 것은 학원의 신성을 유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구실로 퇴학, 정학, 수업 거부 등의 폭거를 恣行함에 이르러서는 실로 언어도단이다. 이런 사건이 빈번하고 있는 원인은 오로지 교단에 과거의 일제 충신들이 그대로 권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니 하루 속히 일제의 압잡이를 몰아내어 학원의 신성과 민주화를 보장할 것을 당국에 강경히 요구하는 바이다.
  • 1947년 5월 13일 <독립신보> 학생 처벌은 확대일로- 豊文, 進明, 德修商業서도
메데 行事에 참가한 학생에 대한 경찰의 구금, 학교의 처벌은 사회 여론의 엄격한 비판이 집중되어 점차 학생과 교육에 대한 근본적 방침의 변혁이 요망되고 있는데 이에 응하여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이 근본 방침을 고려 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와 반대로 각 학교 당국의 학생 처분은 더욱 확대되어 오늘까지에 이미 배화, 경기, 덕성의 각 여자중학교를 비롯하여 풍문여중에 퇴학 1명, 진명여중에 퇴학 3명, 무기정학 29명, 덕수상업에 근신정학 11명의 처벌이 내렸다고 하는데 이로써 지금까지에 총수는 퇴학 19명, 정학 39명이라는 대량의 처벌이 단행된 것으로 마침 일제 시대의 학생 운동에 있어 사건 후에 감행되는 압독한 탄압을 연상케 하는 바 있어 사회 여론의 비등은 날로 격렬하여지고 있다. 더욱이 남자 중등학교에서는 이번의 덕수상업이 처음일 뿐이고 기타는 모두 여자중학교라는 것은 봉건적인 여성관이 학원을 지배하고 있다는 산 증좌로서 또한 사회 비판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한다.
  • 1947년 5월 14일 <독립신보> 경찰 간섭 배격- 전기공업서

@실제날짜:470513

경찰의 학원 간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 학무 당국과 수도청장과 합의에 의해서 양 당국에서는 경찰이 학무 당국의 승인없이 학교에 간섭할 수 없다고 언명한 바 있었는데 13일 실무 학교장 회의에서 학무 당국으로부터 공개된 바에 의하면 중부서에서는 12일 전기공업학교에 서원을 파견하여 메데 당일 결석 학생을 조사하겠다고 그 명부의 제공을 요구하였다 하는데 학교측에서는 누차의 양 당국의 언명을 좇아 이에 응하지 않고 익 13일 시 학무당국에 조회한 결과 거절하라는 지시를 얻어 경찰의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 1947년 5월 14일 <독립신보> 비교육가의 행위, 메데 참가로 학생을 처분- 교육자협회에서 성명

@실제날짜:470513

지난 5월 1일 메데 行事에 학생이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시내 배화여중을 위시하여 각 중등학교에서는 다수 학생을 퇴학, 정학 혹은 근신 처분을 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학교 당국자의 이러한 처분에 대하여 지난 13일 조선교육자협회 서기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평화스러운 집회에는 누구나 자유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다. 하물면 금번 메데는 단지 노동자의 기념일일 뿐만 아니라, 미소공위 재개 祝賀를 겸한 것이니 만큼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나 다, 같이 참가하여 마음껏 祝福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 行事에 참가하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학생을 학원에서 逐出할 뿐만 아니라 학원내에서 학생을 경찰에 인도하여 구금케한 가혹 무도한 처사에 대하여는 전 민족적으로 분격하여 마지 않는 바이며, 앞날의 민주주의 국가를 등지고 전진하려는 젊의 학도의 정의감을 압살하는 중세기적 암흑 사회에서나 일제 지배하에서 밖에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서울시 고문 마틴 씨는 5월 10일부로 민주교육의 입장에서 그 부당성을 지적한 가장 적절하고 정당한 성명과 아울러 지시과 있었다. 본 협회는 씨의 정당한 주장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처분당한 학생 전원을 무조건 즉시 복교시킬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러한 비교육적 행위를 敢行한 학교 당국자는 마땅히 사회에 사과하고 인책 사임할 것을 促求하는 바이다.
  • 1947년 5월 14일 <독립신보> 학원 자유는 조선의 자유- 초중등 학교장회의 마틴 씨 재역설

@실제날짜:470513

메데 참가 학생 복교 재지시. 메데 참가 학생의 처벌 문제로 다시금 대두된 학원의 분규는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작 13일 오전 10시부터 경기여중 강당에서 시내 초·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열고 학무 당국의 근본 방침을 명시하였는데 학무국에서는 메데 참가 이유로 처분한 학생을 즉시 복교 시킬 것, 학원에서 경찰의 간섭을 자청하거나 운운하지 말고,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 등을 지시하였는데, 또 학원의 자유는 조선의 자유인 것이니만큼 우리 전 민족의 관심은 비상히 큰 바이며 동회의 석상에서 시학무국 고문 마틴 씨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조선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학생은 학문의 탐구 이외에 다른 무엇을 탐구하고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과 또 전세계의 교육자는 완고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학생에게 자유스로운 생명력의 발양을 돋구어 주어야 겠다. 우리 교육자는 어떠한 새싹이 나올 때, 그 싹의 자라남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조선의 교육자는 조선을 위해서 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건설적인 학생으로 길러내어야 겠다는 것은 우리의 공동의 사명이다.
  • 1947년 5월 15일 Underwook문교부장 고문이 Martin에게 공식 항의

문교부장 고문인 Horace H. Underwood는 서울시 학무국장 고문 Burton E. Martin에게 서한을 보내 Martin의 문교부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항의를 전달하였다. 특히 고문(advisor)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촉구하였다.[147]

  • 1947년 5월 15일 유억겸부장과 Underwook고문이 Martin의 주장에 해명

유억겸 문교부장과 Horace H. Underwood는 May Day 사건과 관련된 서울시 학무국 Martin 고문의 비판에 대해 해명을 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정치와 교육의 분리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둘째 문교부와 시 학무국의 업무 한계는 분명하다. 셋째 학교 교장들에게 위임된 권한하에서의 정책 결정은 정당하다.[148]

  • 1947년 5월 15일 <독립신보> 메데 참가 학생 문제, 문교부와 시당국서 대책 협의 중- 안장관과 문답

@실제날짜:470514

민정장관 안재홍 씨는 14일 기자단과 정례 회견을 하고 독촉청년총연맹원의 테러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기자단과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는 시내 각 학교장에 통첩하여 메데 사건으로 퇴학당한 학생을 복교시키라고 명령하였다는데. 
답: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방금 문교부와 시 당국간에 협의 중에 있는데 방침이 결정되는데로 금명간에 발표하겠다.
  • 1947년 5월 16일 미성년자노동보호법 공포

군정청은 미성년자 노동보호법을 47년 5월 16일자로 공포하고 한 달 후인 47년 6월 16일부터 施行하기로 하였다.[149]

  • 1947년 5월 16일 <독립신보> 퇴학생 복교 요구코 배화생 수업 거절
메데 참가 학생 7명에 퇴학, 3명 정학, 4명 근신 처벌을 선두로 단행한 배화여중에서는 재학생사이에 처벌당한 학우들에 대한 동정이 일어나고 있어 상급 학년 50명 학생은 학교 당국의 수업을 거절하고 처벌 학생의 복교를 요구하고 있다.
  • 1947년 5월 16일 <독립신보> 퇴학 처분당한 학생들- 진명여중서 전원 복교키로 결정

@실제날짜:470514

진명여중의 영단- 학원에 다시금 큰 물의를 일으킨 메데 行事 참가 학생의 처분 문제는 여론의 비등과 학무 당국 일부의 반대 견해도 있어 그 귀추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앞서 퇴학 3명, 무기정학 29명의 처벌을 내렸던 진명여중에서는 지난 14일 직원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토의한 결과 처벌 학생의 전원 복교를 결정하고 이 뜻을 학부형에게 전달하여 15일부터 처벌 학생을 무조건 등교하게 하였다 한다. 이와 함께 각 학교에서도 처벌 학생의 복교 문제가 논의되고 있어 한 때 분규를 일으킨 학원에 서광이 비치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5월 17일 <독립신보> 경성농업서 또 맹휴- 교직원과 퇴학생 복교 요구코

@실제날짜:470512

경성농업학교에서 11번째 동맹 휴학이 단행되었다. 농업학교로서 전통을 자랑하는 경농은 해방 이후 가장 많은 분란이 계속되어 무려 10회의 맹휴가 거듭하였는데 이 모교의 사태를 우려한 동교 동창회에서는 이를 해결하고저 지난 26일 동창회를 개최한 결과 대책위원회의 활동이 개시되어 서울시 학무국과 학교 당국, 학생 사이를 조정하기에 성공하여 원만 해결한다는 조건 아래 학생들의 무조건 등교를 요구하였던 바 5월 7일부터 등교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창회 측의 말에 의하면 교장 이휘재 씨와 교섭한 결과 자기가 책임을 느끼고 물러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고 하는데 이 교장은 그 후 이것은 일부 교직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5명의 교원을 수업 정지 처분케 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태는 다시 악화되어 학생들은 단지 3일간의 등교 후 그 동안 희생된 교직원의 무조건 복직을 요구하고 지난 12일부터 다시금 맹휴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 교장 취임이래 19명의 교직원이 파면 또는 변경되어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애착심을 잃게 되고 이에 따라 동교의 광대한 실습지는 농경기에도 황폐 상태로 버려져 있어 마치 폐교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고 하여 동창회와 학부형측의 비판이 물끊듯하고 당국의 적절한 조치가 요망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국장 이덕봉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생 맹휴 이유는 파면 교원과 퇴학생의 복교를 요구하고 일어난 것이다. 파면 교원은 교장의 방침을 반대한 까닭으로 파면된 것이고 이번에 수업 정지를 당한 교원은 교장없이 직원회를 열고 또는 당국에 진정서를 낸 것이 부당하다고 인정된 까닭이다. 그리고 아무리 교장 방침이 정당하다고 하여도 학교 운영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에 학무 당국의 방침은 어떠하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국장은 우선 동맹 휴학이 해결된 후에 급속히 선처하겠고 처벌 교원은 그들과 만나서 결정하겠다고 말하였다.
  • 1947년 5월 17일 <독립신보> 국대 이사진 遂 결정

@실제날짜:470516

국립서울대학교의 이사진은 오래 전부터 군정청 부처장 회의에서 각계 인사 중에서 신중히 전형하여 러취장관에게 추천한바 있었는데 이즈음 동 장관의 결정을 얻어 16일 다음과 같이 그 진용을 발표하였다. 
   ▲ 최규동(67)(사대) 중동중학교장 
   ▲ 오건영(61)(상대) 조선貯蓄銀行 감사역 
   ▲ 서광선(58)(법대) 변호사 겸 서울시 참사 
   ▲ 이춘호(55)(문리대) 전연전 이과 과장 
   ▲ 안종서(53)(치대) 치과의 
   ▲ 이헌구(53)(농대) 전경기중학교장 
   ▲ 박경호(49)(예대), 서울중앙방송국 기획과장 
   ▲ 이의식(48)(의대), 의학박사 
   ▲ 유재성(44)(공대), 공학박사. 용산공작이사장
  • 1947년 5월 17일 <독립신보> 이원적 명령 있을 수 없다- 메데 사건에 문교, 시 양 당국서 공동 성명

@실제날짜:470516

메데 行事에 참가한 학생의 처분 문제를 중심으로 학교 당국의 처사에 대한 일반의 비난이 자자한데 문교부와 서울시에서는 16일 이에 대한 공동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당국의 최고 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학도가 정치성을 띤 교외 行事에 참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은 군정 실시 이래의 변화없는 방침이다. 금번 메데 行事에 대하여 학도의 참가를 금한 것도 이러한 금번 방침에 기인하는 것이다. 
2. 금번 서울시 학무 당국의 처사에 있어 (마틴담화) 명령 계통이 분명치 못한 인상을 느끼는 듯하다. 모든 일이 학무 국장(조선인)을 통하여 行하여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원적인 명령 계통은 있을 수 없다. 
3. 정부의 교육 방침의 범위안에서 학교장은 자기 책임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메데 사건에 있어서도 각 학교장이 감독 관청의 지시에 의하여 한 교내 처사에 대해서는 그 자율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1947년 5월 17일 <동아일보> 國立大學校 理事 決定

@실제날짜:470516

오랫동안 문제되어 오던 국립서울대학교 이사 9명은 저간 군정청 부처장회희에서 신중히 전형 추천한 결과 다음과 같이 군정장관의 결재를 얻어 16일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 최규동(67),(사대) 중동중학교장
   ▲ 오건영(61),(상대) 조선貯蓄銀行 감사역
   ▲ 서광선(58),(법대) 변호사 겸 서울시 참사
   ▲ 이춘호(55),(문리대) 전연전 이과 과장
   ▲ 안종서(53),(치대) 치과의
   ▲ 이헌구(53),(농대) 전경기중학교장
   ▲ 박경호(49),(예대), 서울중앙방송국 기획과장
   ▲ 이의식(48),(의대), 의학박사
   ▲ 유재성(44),(공대), 공학박사. 용산공작이사장
  • 1947년 5월 17일 <동아일보> 復校시키라고 培花高女 籠城

@실제날짜:470515

시내 배화여학교에서는 지난번 "메이데이" 記念 行事에 참가한 학생 중에서 7명의 학생에 퇴학 처분을 斷行한 데 대하여 그날 함께 참가하였던 56명의 학생이 처분을 하려면 우리도 전부 함께 처벌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복교를 시키도록 하여 달라고 하며 15일 하오부터 교장실에 농성을 하고 16일 아침까지 두끼의 밥도 먹지 않고 농성 중이라고 한다.
  • 1947년 5월 17일 <동아일보> 學園은 純粹한 敎育機關 - 學生은 政治 行事에 加擔말라

@실제날짜:470516

문교부, 시당국에서 공동성명 발표
"메이데이" 記念 行事에 참가한 학생 처분 문제로 항간에 여러 가지 물의를 비져내게하고 있는데 16일 군정청 문교부와 서울시에서 다음과 같는 요지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政治的 行事에 參加마라
학교는 순수한 교육 기관으로 정치적 이용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학교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정치성을 띤 교외 行事에 참가하여서는 안된다.
  二元的 命令系統없다
이번 학교 처사에 대하여 명령 계통이 불분명한 듯한 점도 있는 듯하나 군정방침으로 언제나 명확히 되어 있는 바이지마는 2원적인 명령 계통이 있을 수 없다.
  學校의 自律性을 認定
중앙 문교부에서는 대체로 기본 문교 방침을 정하고 그 범위안에서 지방 학무국에서 자율적으로 제1선 교육 行政을 수행하고 정부의 기본 방침에 의하여 학교장이 자치적으로 실제 교육 운영에 당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이번 학생 처분 문제의 자율성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 1947년 5월 17일 <한성일보> 신교육연구발표- 전국서 44명 참가
해방 이후 아동의 자유 능동적 신교육 수립을 목표로 시내 孝悌국민학교에서는 작년 10월 25일 신교육 연구 발표회를 열고 이어서 동 12월 23일부터는 8일 간에 걸쳐 교육강습회를 개최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던 바 동 교장 윤재천의 노력으로 전국 신교육 연구발표회가 문교부와 서울시 후원 아래 오는 22일부터 3일간 동교에서 열리게 되었다. 동 대회에는 전북의 8명, 충북의 7명, 서울시의 4명, 경기도의 5명을 비롯하여 남조선 각 지역으로부터 44명의 참가 신청이 있어서 그 성과에 기대가 되는 바 크다.
  • 1947년 5월 18일 <동아일보> 花樹國民校 新築에 百二十萬圓을 喜擲
金鎭求, 金然肅 양 씨 美擧
지방소식: 수원지부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 있는 화수국민학교는 수년전에 창립되어 4년제 4학급으로 교육하여 오던 바 동 교사가 퇴락하여 학교 당국과 면민들은 신축 문제로 고심하여 오던 중 지난 9일에는 동면 호곡리 김진구 송연만 양 씨 우정면장 김연숙 씨를 방문하고 전기 김진구 씨는 현금 1백만 원, 송연만 씨는 20만 원을 하사하고 화수국민학교 新築費로 써달라고 자진 기부하였다.
  • 1947년 5월 19일 문교부 주간업무보고(1947. 5. 12 - 17)

문교부장 고문 Horace H. Underwood는 주간 업무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Recreation and Group Guidance Office of Administration Bureau of Textbooks Adult Education Office of Research Secondary School Section Music Section Higher Education[150]

  • 1947년 5월 19일 <독립신보> 4년제 중학 졸업생- 금년부터 전문, 대학 입학을 불허

@실제날짜:470517

새학기를 앞두고 4년제 중학을 졸업한 청소년의 전문학교 입학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데 대해서 일반은 많은 관심을 끌어 오던 바 문교부장 유억겸 씨가 17일 발표에 의하면  최근에 개정된 문교부 급 서울지구 전문대학 관계자 회의에서 4년제 졸업생은 전문대학 입학을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전문대학 입학에는 반드시 제5학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
  • 1947년 5월 21일 <독립신보> 교육 재정 강화책 등 건의- 서울시, 경기도 양 학무 당국서
의무교육제 실시 준비, 중등교육 기관의 확충과 교사 建築, 성인 교육의 강화 등 중요한 사업을 앞에 놓고 문교 당국에서는 재정난, 물자난 등으로 계획 遂行에 많은 지장을 보고 있는 터인데 지난 달 3일부터 열렸던 각 도 학무국장 회의의 결의에 따라 서울시 경기도, 양 학무국에서는 각도 학무국장 명의로 2-3일 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건의서를 군정장관과 민정장관 및 관계 당국에 내기로 되어있다. 
   ▲ 교육재정 강화- 지방세로 교육세를 신설 부가하여 중등교육 재정을 확립해주고 읍면의 성인교육세를 신설 부가하여 공민 교육비를 읍면에 부담케 해줄 것을 급속히 실시하기 곤란할 경우에는 임시 조치로 지방세 및 유흥세를 지방에 이양하여 거기서 교육특별경제에 충당케 해줄 것. 또 전 일본인의 학교조합의 소유이던 토지 건물 임야 등이 지금 모리배 수중에 들어가 있으니 그것을 학교비에 이양하도록 해주고 학교 비직원의 봉급을 국고로 보조해줄 것. 
   ▲ 지방 학무 행정 기구 강화- 부군에 학무과를 설치하여 지방에 팽창해진 교육열에 대비하고 장학사의 대우를 개선하며 부군 성인교육 주사를 국비로 보조케 할 것. 또 읍면에 의무교육 담당 직원과 성인교육 담당 직원을 배치케 할 것. 
   ▲ 교직원의 생활 보장- 생필품을 특배할 것.
   ▲ 학교 운영 물자 확보- 물동 계획을 세워, 학교 新築 공사의 물자를 우선 배급해 주고, 임야 벌채를 우선 배급해 줄 것. 
   ▲ 인사 행정의 간소화- 학교장 이외의 교직원의 임명권을 각 도지사에 이양하고 그 임명 절차는 학무국에서 주관하도록 해 줄 것.
  • 1947년 5월 21일 <독립신보> 서울시내 중등교 입시- 3배 내지 5배의 경쟁율 예상
서울시내의 명학무년도 각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은 오는 7월 3일 부터 9일까지 일주일 동안 일제히 시행된다고 한다. 학년말을 앞두고 중등학교에 진학할 국민학교 아동들은 벌써부터 좁은 문의 경쟁에 어린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금년의 국민학교 졸업생 총수는 約 13,600명으로 예정되는 바 서울시내의 남여 중등학교 수는 남자 중등 17, 여자 중등 19, 남자실업 22, 여자실업 5, 도합 63학교에 수용 능력은 11,600명이라고 한다. 이대로 하면 서울시내의 중학 입학 지원자는 大略 수용될 것이다. 경기도 내와 각 지방으로부터의 지망자가 더 많을 것이고, 또 우수한 학교에 대한 집중 경향이 있을 것이므로 최저한도 3배 내지 5배의 경쟁율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서울시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덕수상업, 경기상업, 선린상업의 각 야간학교를 정식 주간학교로 개편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 1947년 5월 21일 <독립신보> 소련 교육시설 연구 - 북조선 교원단 귀국

@실제날짜:470517

선진국 소련의 교육과 그 시설을 시찰 연구하기 위하여 지난 1월 북조선 교육계의 소장 인물을 선발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한 북조선 교원단 일행 31명은 조국의 교육 개선에 기여할 거대한 성과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 교원대학에서 강습을 받고 각 교육 문화 시설을 시찰하고 三一일절 축하 대회를 붉은 광장에서 구경하고 그날 밤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17일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 1947년 5월 21일 <동아일보> 各道 學務局長會議서 軍政當局에 建議
成人敎育稅等 新設 : 地方稅, 遊興稅는 地方에 移讓
새 조선의 새 일꾼을 양성하는 우리의교육 기관은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로 그동안 교육재정, 학무 行政 기구 등 전반적 문제에 걸쳐 가지 가지의 보충 또는 수정이 요청되던 바 앞서 개최된 각도 학무과장회의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들어 군정장관, 민정장관을 비롯하여 관계 각 부처장에게 건의를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번에 결정된 건의의 내용은 주로 학교교육 재정문제로 교육재건의 때가 때인만큼 그의 결과는 매우 주목된다. 그런데 건의의 내용은 첫째 교육재정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즉 중등학교 관계 경비 단체를 설치하고 지방세로써 교육세를 신설하여 중등학교 경비에 충당하는 동시에 성인교육비가 국고보조만으로는 부족함으로 읍면에 성인교육세를 신설 부과하라는 것인데 임시조치로써 지방세와 유흥세를 지방에 이양하자는 것 등이다. 그리고 월북인 학교 조합의 재산이었던 토지, 건물, 임야 등이 개인 또는 모리배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있으나 응당 학교비로 이양토록 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지방 학무 行政기구 강화에 있어서는 각 부군에 학무과를 설치하여 지방 교육열에 대비하고 장학사의 대우 개선, 국비의 부군 성인교육 주사 배치를 요망하고 있다. 이밖에 교직원의 생활보장, 학교 신영물자 확보, 인사行政의 간소화 문제 등 교육에 중대성에 비추어 인적, 물적, 확보를 기하자는 것이다.
  • 1947년 5월 21일 <동아일보> 國大 理事長 26日 選任
앞서 정정을 본 서울대학 새 이사진은 26일 상오 9시 문교부장실에 회동하여 이사장 선임, 이사의 임기 등을 결정하기로 되었다.
  • 1947년 5월 21일 <동아일보> 入學難을 緩和코자 夜間中學을 增設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내 각 남녀 중등학교에서는 오는 7월 3일부터 동 9일까지 각각 당해 학교의 사정에 따라 새학기의 입학시험을 施行하기로 되었는데 시내 각 국민학교 졸업 예정자 1만 3천 6백여 명을 비롯하여 지방으로부터 집중되어올 아동, 관계 학부형들의  관심과 초조는 날로 더하여 가고 있다. 과연 금년 입학시험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서울시내에는 공사립 남자 중등학교가 17교, 여자중학이 19교, 남자 실업이 22교, 여자실업이 5교 도합 63개 중등학교의 제1학년 수용 능력은 겨우 1만 1천 6백여 명으로 서울 국민학교 아동만 입학케 된다면 아무런 경쟁도 없을 것이지만 지방 학교 아동들이 집중되어 올 것이 예상되므로 평균 2대1 정도이겠으나 내용이 충실한 학교에 있어서는 상당한 경쟁이 있을 것이 예상되므로 서울시에서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야간중학 3개교를 다시 3개교 증설하여 6개교를 운영하여 갈 조치를 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5월 21일 <동아일보> 八.一五 記念 새 敎育 展覽會
오는 8.15 해방기념을 기하여 문교부에서는 새교육 제도 실시 후의 학교 교육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밝히고자 중앙에서 전국적인 새교육전람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지방에서도 각 도 또는 부, 군 단위로 전람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 1947년 5월 22일 <독립신보> 서울대학 입시는 7월 7일- 국대안 반대 제적생 복적 가능
문교부장 유억겸 씨 발표에 의하면 국립서울대학교 각 대학 입학 시험을 오는 7월 7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시행하게 되었다는 데 시험 자격은 5년제 중학교의 과정을 수료한 남여에 한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3월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한 학생도 이 기회에 다시 입학하여 등록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과거의 실력으로 재입학 여부를 결정할 것이며 성적이 우수한 자는 무시험으로 작년 가을에 재적한 학급에 편입시키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5월 23일 <동아일보> 今年度 中等學校 入試方法 決定
暗誦式 廢止코 智能試驗 實施 : 調査書를 試驗成績 半으로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공정히 시행하고자 문교 당국의 방침에 의하여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 입시 방침이 결정되었는데 금년도 입학시험에 관하여 서울시 중등교육계장의 말에 의하면-
금년 중등학교 입학시험이 예년과 다른 점은 종래에는 국민학교의 조사서는 중학교에서 참고정도의 취급을 하여와서 국민학교에서 성적이 좋았던 아동이 시험에 실수하면 낙제되는 수가 왕왕 있었다. 그런 폐해를 없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학교 조사서가 시험점수의 500점을 차지하게 된다.
즉, 시험 총성적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종래의 과목별 시험이 철폐되고 지능시험이라 하여 국민학교에서 수업한 전학과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므로 과거 암송식 교육에서 나오는 책만 외우면 되다는 폐단은 일소될 것이다. 금년 시험은 7월 3일부터 9일까지 1주일 동안 공사립 전부 施行되는데 2교는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입학경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입학지원 아동은 원칙적으로 자기집 근처의 학교를 지원하도록 되었다. 최근 38이북에서 남조선 중학교에 입학을 지원하러 오는 생도가 있는데 이 아동들은 검정시험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 1947년 5월 24일 각 시도학무국장 회의 개최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각 시도 학무국장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여기에서는 교육 현안에 관한 시의 적절한 건의사항들이 수집되었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중등교육이 확장되어야 한다. 2. 새로운 교육세가 징수되어야 한다.(면단위 지방세로) 3. 학교가 "School Union" 토지, 건물, 그리고 임야로부터 수입을 얻어야 한다. 4. "Section of Schools"가 도와 군 수준에 설치되어야 한다. 5. 시학관(School inspectors)이 현재보다는 급여나 지위가 상향조정되어야 한다. 6. 읍이나 면에 성인교육 담당자가 있어야 한다. 7. 학교 교사들의 생활 보장을 위한 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8. 학교 교사의 建築에 우선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9. Civil Service Teacher Administration이 간소화되어야 한다.[151]

  • 1947년 5월 24일 대학 교수를 위한 특강시리즈 시작

고등교육과 교원양성 관련 문교부 한미 관리들 사이에 있었던 5월 초의 협의에 따라 5월 24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에 대학 교수를 위한 특강이 열렸다. 이 특강은 당초에 7월 5일까지 7회로 계획되었으나 참석자의 부족으로 인해 5회까지만 열리고 마지막 2회는 취소되었다. 장소는 서울대학 강당이었다. 당초 계획되었던 특강 주제와 강사는 다음과 같다. 5월 24일 : 미국 대학에서의 교수 및 학생 단체의 조직(강사 : 염광섭 박사) 5월 31일 : 미국 대학에서의 교과서, 도서실, 연구설비의 사용(강사 : Robert E. Streeter 박사) 6월 7일 : 미국 대학에서의 학생 자치의 발달과 개별 수업(강사 : C. O. Arndt 박사) 6월 14일 : 미국 고등 교육에 있어서의 실험실 방법 및 강의식 방법과의 관계(강사 : E. L. Miller 박사) 6월 21일 : 미국에서의 대학 교수 양성(강사 : 백낙준 박사) 6월 28일 : 교육과 애국심:국가 건설에서의 이들의 역할(강사 : James Fisher 박사) 7월 5일 : 미군정청의 고등교육정책(강사 : 오천석 박사, H. H. Underwood 박사)[152]

  • 1947년 5월 24일 <독립신보> 離籍 학생도 재입학 가능 - 국립서울대학 신입생 모집 요항
9월부터 시작될 신학기를 앞두고 국립서울대학교에서는 오는 7월 7일부터 4일간에 걸쳐 신입생과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한 미등록 학생에 대한 입학 시험을 실시하기로 되어있다. 그런데 동 대학 교무처에서 발표한 신입생 모집 요강에 의하면 치과대학을 제외한 다른 각 대학에서는 일체 전문부와 예과 1년생의 새 모집을 중지하게 되었는데 각 대학학부 1학년의 신입생 모집 인원은 문리대 400명, 의대 120명, 상대 125명, 법대 200명, 사대 350명, 농대 250, 공대 275명, 예대 미술부가 100명으로 되어있으며 이밖에 치대 전문부에서 80명의 신입생과 각 대학 학부에서 2학년 이상의 편입생을 약간명 모집하게 되었다. 더욱 시험 방법과 과목은 대체로 작년도의 예에 따를 것인데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한 학생들의 재입학 방법과 학부 1학년 응모 자격은 다음과 같다. 
   ▲ 제적 학생 재입학 방법 - 1946년도 제2학기에 제적당한 학생으로서 재입학을 원할 때에는 학교 규칙을 엄수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맹휴에 선동 혹은 간섭하지 않기를 서약하는 보증서를 첨부하여 입학원서를 제출하여야 하는데 이로써 입학이 허가된 학생은 작년 9월에 재적한 학급에 무시험으로 재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 대학 예과 1학년에서 제적당한 학생들은 각 대학에 임시예비부를 두어 이곳에 수용 속성으로 수업을 시키게 되었다. 
   ▲ 학부 1학년 응모자격 - 6년제 중학교 졸업자, 예과 수료자 또는 전문부 2학년 수료자에 한하게 되었다. 
   ▲ 치대 전문부 응모자격 - 작년 9월 이전에 중학교를 마친 자로 하되 4년제 혹은 5년제의 구별을 두지 않기로 되어있다.
  • 1947년 5월 26일 문교부 주간업무보고(1947. 5. 19-24)

문교부장 고문 Horace H. Underwood는 주간업무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Culture Administration Elementary Education Bureau of Textbooks Music Higher Education Completed Projects General Conditions Significant Developments Teacher Training[153]

  • 1947년 5월 27일 서울대학교 이사회(Board of Regents) 기능 시작

새로 선임된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가 첫 회의를 열고 기능을 시작하였다.[154]

  • 1947년 5월 27일 <독립신보> 마틴 씨의 입장 곤란- 메데 참가 학생 복교 문제로
교육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메데 참가 학생의 처벌 문제는 문교부와 서울시 당국의 공동 성명으로 일단락을 지었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학생의 처벌을 부당하다고 주장한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는 그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독자적인 의사 발표가 금지되었다 하며 또 수일전에는 미국 관계 당국의 문초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각 학교와 학무 당국 일부의 상부에 대한 의견 제출에 의한 것이라고 일부 소식은 전하고 있다. 한편 마틴 씨에게는 매일 학생층과 각계로부터 감사장과 격려문이 답지하여 이미 2,000여통에 이르고 있어 일반 여론의 학원 민주화에 대한 열열한 부르짖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5월 28일 <독립신보> 朝陽中學 맹휴

@실제날짜:470526

현금의 학원의 분규 상태는 그치줄을 모르고 연속되어 시내 동작동 조양중학에서는 시설의 불충분으로 학생의 수학에 큰 지장이 있어 학생의 불평이 많은 바 드디어 지난 26일 동교 학생 400여 명은 고급중학의 설치와 학교 재단의 확충 등 요구 조건을 내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 1947년 5월 28일 <독립신보> 퇴학하는 데도 기부금- 성신여학교의 해괴한 처사
음악을 가르친다고 여학생을 희롱물로 삼아 한 때 세인을 분격시킨 성신고여의 임천수 사건은 아직도 그 여파를 끌고 있다고 한다. 즉 임사건이 일어난 후 학교내에는 추문이 떠돌아 천진스런 여학생들은 수치심과 분노심을 참지 못한 나머지 10여 명의 학생은 이 사건 내용을 규명하고져 학우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고 일차 학부형과 학생과 일부 선생의 회합하고 이야기 하였던 바 학교에서는 부당한 회합이라고 하여 학생들을 추궁하였다고 한다. 학생의 말에 의하면 이 회합 후 수차에 걸쳐 추궁을 받아오다가 결국 이러한 분위기의 학교에 재학할 수 없다는 결심 아래 10명이 퇴학 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1개월 간이나 이 퇴학원을 수리치 않고 있다가 지난 20일경에야 수리하였는데 학생들은 전학을 위하여 학교 당국의 증명 서류를 요구하였던바 다음에 재학 증명 등 서류와 함께 내어 주겠다고 일단 내어 주었던 퇴학 증명을 가져가더니 학생으로부터 재촉당하자 기부금을 내어야 서류를 주겠다고 요구하여 다시금 학생과 부형을 분격케 하였다고 한다. 금액은 최고 1만 원으로부터 1천 원이라는 바 10명 중 5명은 기부금을 내고 퇴학하였는데 나머지 5명은 이에 불응하여 퇴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1947년 5월 28일 <동아일보> 國民皆學에 總進軍 : 各洞에 한글 講習會
반세기 동안의 일본의 정치는 우리의 글 "한글"을 말살하고자 까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 동포들 가운데는 한글에 대해 해독을 못하는 문맹이 서울시 120만 가운데 반수나 된다는 점에 비추어 서울시에서는 "한글" 촉진운동을 전개하여 국민개학의 총진군을 하기로 되었다. 5월 20일부터 6월말까지 각 구청을 위시하여 동회, 교화단체 등을 총동원하여 매 동회 혹은 각 통에 1개소 이상의 "한글"강습회를 열고 우선 18세 이상 남녀로써 한글을 해독치 못하는 사람을 수용하는 동시에 시내 각 공사립학교 교실을 개방하여 강습장으로 제공하리라 하며 5월 31일부터 6일까지에는 성인교육 강조 주간을 설정하고 문맹퇴치의 강조를 하는 한편 6월 3일에 서울성인교육대회를 열고 성인교육의 취지를 보급시키기로 되었다.
  • 1947년 5월 28일 <동아일보> 서울大學 理事 決定
앞서 결정된 서울대학 9명의 이사는 26일 상오 9시반 군정청 문교부장실에 첫 회합하여 이사장을 피선하고 이사의 임기를 작성하였는데 이사장에는 崔奎東 씨가 피선되고 이사의 임기는 다음번 이사진과의 연락관계로 2년, 4년, 6년별로 하여 추첨한 결과 2년에는 안(安鐘書)박사, 박(朴慶浩), 오(吳健泳)의 3씨, 4년에는 최(崔奎東), 서(徐光卨), 이(李春昊)의 3씨, 6년에는 유(劉在星), 이(李軒求), 이(李春昊)의 3씨로 각각 결정되었다.
이밖에 이사회에서는 교무와 교정 두 위원회를 두어 각각 4명씩 분담하고 두 위윈회에 대학 총장도 참가시키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사회에서는 매주 화요일 하오 두시 서울대학에서 상례회를 개최한다.
  • 1947년 5월 29일 <동아일보> 社說 : 國大 理事 諸氏에게
一. 작년 9월 이후 국대안을 圍繞하여 세론이 분분하였고 일부 비건설적 책동도 이에 수반하여 허다한 학생의 고통을 초래한 것은 시비 여하를 막론하고 조국 재건도상의 일대 불상사로서 그 근본적인 해결이 대망되던 바 금반 국대 이사진 9氏의 발표를 보게된 것은 교육 재건을 위하여 환영하여 마지않는 동시에 이사 제씨의 임무 또한 중차대함을 지적하는 바이다. 금반 이사진을 각 대학이 추언한 인물 중에서  문교 당국이 신중히 결정한 후에 부처장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군정장관의 서명을 보게된 것이다.

초대 이사진이 만치 그 결정이 심히 곤란하였을 것이고 무수한 토의를 거듭한만치 이사 제씨는 그 연륜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로 보아 또 그 교육 정도로 보아 국대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충분히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인사들로 기대되는 만큼 이제 국대의 제 문제를 또 다시 검토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二. 국대안 자체는 현하 교육 재건도상에 유익한 것이며 이것을 제국주의적 식민지 교육이라고 반대하는 것은 비이성적 모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본지에서 지적한 바 있었거니와 그렇다고 국대안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기본적 의도에 있어서 유익하고 정당하다 할지라도 세부에 있어서는 불충분한 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국대안 자체가 세계 각국 특히 미국의 대학 학제를 참작하여 교육의 백년대계의 구상하에 작성된 것인만큼  과도기적 현실에 부합당한 점도 불가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과도기적 현실에 입각하여 임기응변의 초치를 해야하고 국대안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러한 조치를 不願한다거나 등한시한다면 좋은 국대안을 오히려 半身不隨化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국대안의 이상은 좋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과도기적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한 점이 많고 따라서 그 운영면에 있어서 최대 한도로 임기응변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대 본부에는 여러 가지 부서가 있지만은 기중에서도 사무국, 교무처의 권한은 실로 절대한 바 있어 획일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무엇이던지 도맡아 놓고 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비근한 일례를 들면 일용비품 한 개를 살려고 하여도 사무국 구매과에 일일히 신청하게 되니 그것이 접수될 때까지에는 수 개월을 요할 뿐아니라 물건에 따라서는 失期하여 求得치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고서야 각 대학 사무장은 어떻게 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가?

요컨데 학장은 교무처에 의하여 그 권한이 너무도 縮小되어있고 사무장은 사무국에 의하여 허수아비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통일 처리 방법은 관료풍을 조장시킬 뿐만아니라 국대안을 파경으로 몰아넣는 가장 졸열한 처리 방법이다. 각 대학에 예산이 있을 터이니 그 운영을 각 학장에게 일임하고 사무국에서 필요에 응하여 검열, 감독만 하면 되는 것이며 교무처나 학생처 같은 것도 학장의 권한을 빼앗을려고 하지말고 오히려 학장이 그 권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장하되 수시로 감독만 하면 훌륭히 통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각 대학의 인건비를 증가시킬 이유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각국, 처의 불필요한 인건비를 節約할 수 있을 것이다. 一般 行政 官廳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大學 行政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官僚風이 조장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三. 또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각 대학의 독자성이다. 각 대학은 종합대학의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각기 전문을 달리하고 있는 만큼 각 대학의 특수성이 충분히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종합적으로 통일 처리할 것은 처리하더라도 그렇지 않는 문제까지 일일히 통일화하려는 것은 학문의 獨自性에서 빚어나오는 기풍까지 말살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풍은 또한 아름다운 校風의 기초가 되는 것이니 이러한 기풍과 교풍은 9 대학에 통일적으로 作成하여도 결코 되는 것은 아니며 한 대학에서 형성된 교풍이 不知不識間에 타 대학에 파급하여 상호간에 작용되는 만큼 각 대학을 담당하고 있는 학교의 학생에 관한 영향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며 따라서 각 학장에게 상당한 권한과 독자성이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理事 諸氏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民族 百年의 교육 이념을 견지하여 9 대학장을 통솔하고 국대안을 效果的으로 운영해 나갈만한 인격과 手腕을 겸비한 신 총장이 하루 속히 결정되기를 9 대학 7천학도가 待望하고 있다는 것이다.
  • 1947년 5월 30일 <독립신보> 교육계에 보내는 공개장- 서울시정 기자회에서

@실제날짜:470526

지난 메데 사건의 생도 처벌 문제에 대한 사회의 물의가 분분하여 본 기자단으로써는 공정한 보도를 하고져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 학무 당국은 기자단을 만날 필요가 없다는 등 비밀주의를 취하였으며 5월 13일의 교장회의 석상에서는 모교장이 신문은 허위 보도를 한다는 등 언사로써 참석 전원이 기자단을 면전에 놓고 모욕을 가하였다. 그러나 본 기자단으로써는 교육자들이 반성을 바라며 기다려왔던 것인데 일부 악질 교육자는 학무당국과 기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언론을 비난하고 있음으로 이들 일부 비민주적 교육자들의 망동을 사회에 고발함으로써 교육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 사회 정의 인사의 비판에 자뢰코져 하는 바이다. 
1. 학도의 정치성을 띤 행사의 참가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당국의 방침은 학무 책임자의 실천에 있어 극히 오해되고 왜곡되어 있다. 원래 혼란이 심한 현 정세 아래에서는 학원만이 고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학생으로 하여금 사회와의 완전 격리를 강제하는 결과는 온실 식물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마틴 씨가 말한 바와 같이 새세대의 학생은 교과서의 활자외에 다른 무엇을 모색하고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현명한 자기 체험을 쌓은 교육자라면 현실의 폭풍우로부터 제자를 비호하는 동시에 그에 적응한 굳센 인간으로 배육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메데 사건에 일부 학교는 이와는 너무나 현격되었고 자기 결함을 폭로하였으며 타력 의존의 경향을 노출하였다. 
2. 본 사건의 실정을 엄폐하려는 시학무 당국의 처사는 극히 부당하다고 아니할 수 없으니 공문서의 언론에 대한 불공개와 “기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함은 실로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적 극비 정책의 초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보도된 바와 같이 본 사건에 학교가 경찰의 간섭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학교 문제를 경찰에 의탁하여 해결하려는 비교육적이며 파렴치적인 심성에서 수백의 학생을 경찰에 넘긴위에 24명 퇴학, 47명 정학, 67명 근신을 명하였음은 일제하에 있어의 학생 운동 이후에 엄습되던 폭압과 완전히 합치하는 것이며 마틴 씨가 정당히도 말한 바와 같이 “중세기적 교육”이 민주 조선에서 감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뿐더러 학생의 처벌에 있어서도 지극히 편파적이었으니 남산의 941명, 서울운동장의 단 10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다는 학교의 보도는 그 얼마나 대중의 눈을 면전에서 기만하는 행위인가? 이것은 학생에게 금하는 정치성을 학교 자신이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정치에 가담하는 학교의 학생이 또한 정치에 가담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순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4. 해방 이후 학원의 혼란 분규는 정치성을 띤 문제만은 아니다. 남조선 전역의 각학교 맹휴는 연회수가 100회에 가까우며 최고 11회의 학교가 있고 그 연일 수는 실로 막대한 숫자일 것이다. 다시 여학교 사제간의 치정관계, 추문, 불상사에 대하여 교육자 제씨는 무엇으로 속죄할 것인가. 
5. 여상의 사태는 물론 사회 혼란이 중대한 요인이라고는 하되 위대한 교육자의 빈곤과 교사의 몰인격, 편협, 봉건성 등은 이 혼란을 확대 재생산하는 요소가 되어 있다. 퇴학을 명하는 학생에게 “나의 사상과 맞지 않으니까 나갈 수 밖에 없다”고 가장 부도덕하게도 사상을 강제하는 교사,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교단에 올라 專制叱呼하는 교사 - 그들로 해서 학원의 민주화는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10여회의 동맹 휴학을 일부 교사와 학생의 정치적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그들을 축출하여 정치에 편승함으로써 자기 무능을 엄폐하고 지위를 보지하려는 비열한 학교책임자를 당국은 예리하게 감시하고 있는가. 
6. 위기- 학원의 위기는 교학 정책의 혁신과 악질 교사의 숙청, 교사 학생 상호의 반성과 노력에 의해서만 해소되고 민주 학원의 건설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敎育界에 보내는 公開狀" - 市 記者會 發表

@실제날짜:470529

서울시청 기자회에서는 자유의 전당이라는 학원에서 최근 빈발하는 학생 처분 문제와 敎育行政 민주화를 촉구하는 의미로 29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육계에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여 사회의 공론에 호소한 바 있었다.
   敎育界에 보내는 公開狀
一. 학생으로 하여금 사회와의 완전 격리를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학생은 교과서 이외의 무엇을 모색 갈구하고 있다. 이번 메이데이 사건에 있어 일부 학교에서는 봉건적 타력 의존 주장 경향을 노출하였다.
二. 이번 사건에 있어서 敎學 當局의 처사에 비민주주의적인 반동 정책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유감이다.
三. 경찰은 학원 사건에 관계하지 않키로 되어 있음에 불구하고 학교 당국자들이 학생을 경찰에 넘기고 퇴학, 정학, 근신 등 처분을 敢行한 것은 비교육적이며 편파적이며 가혹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四. 해방 이후 학교 맹휴가 근 백회에 이르렀고 그중에서도 최근 11회를 차지한 학교도 있었으며 敎諭와 여학생과의 추문, 불상사 등의 방지를 先行하라.
五. 如上의 사태는 사회 혼란의 중대 요인이기는 하나 민주적 교육자의 빈곤 등이 이 혼란을 확대 재발케하는 독소가 되어 있으므로 학원의 민주화가 파괴 지연되는 경향이 있다.
六. 학원 위기는 교학 정책의 혁신과 무능 교육자의 해소, 교육학생 상호의 반성과 노력에 의하여서만 해소되고 민주 학원의 건설은 지향될 것이다.
                                           4280년 5월 29일
                                       서울市政記者會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今年度 初等學校 入試決定 - 審査制를 廢止
滿 6歲 兒童 全部 收容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금년도 신입학기에 수용할 국민학교 입학에 관한 방침이 결정되어 방금 상부에 결재를 기다리고 있는데 금년에는 만 6세의 아동은 의무교육을 전제로 전부 수용하기로 방침이 결정되었다. 즉, 예년의 아동 査定 제도는 전부 철폐하고 등록을 한 아동은 學區내 학교에 전부 수용키로 되었고 수용 능력이 부할 때에는 3부제까지 실시할 계획으로 등록은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 사이에 할 예정이라고 한다.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말썽많던 淑明女中 新校長 맞아 復興 建設에
숙명여자중학교는 어쨋든 말썽이 많아 교원이나 학생(일부)에 있어 일반 사회의 주목 거리가 될 불상사 혹은 불미한 점이 있어 동 학교에 子女를 맡긴 학부형들은 물론 일반인까지가 동교의 장래에 대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오던 바 문제의 동교장 최삼식 씨를 비롯한 일부 교원의 인책 퇴진에 이어 과거 眞明高女 교유로 십여년간 교육계에 이름을 날린 文南植 씨의 신교장 취임과 일부 퇴진한 교유의 전면적 보충 등으로 동교는 새로운 "배움의 길"을 얻어 힘찬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교장 문남식 씨는 일찍이 나라고사(奈良高師)를 나와 진명고녀에 십여년간 교유로 근무한 진실한 "학원의 어머니"로써 교육계의 선배였었는데 이번에 숙명교장의 취임에 있어서는 특히 동교 동창회원들의 열열한 성원과 당국의 특별한 권고로 말미암아 취임하게 된 것인데 오랫동안 말썽많던 동교의 참신 활발한 출발이 크게 기대된다.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서울市에 敎育委員會
서울시 헌장에 의지하여 시학무국내에 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을 선정 중, 다음과 같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동 기관은 서울시 학무국의 관리 기관으로서 活躍할 것이라고 한다.
   ▲ 白樂濬(延大) ▲ 金活蘭(梨大) ▲ 李軒求(林藥開發社長) ▲ 崔容郁(同德女中 敎頭) ▲ 徐榮鎬(德壽校長) ▲ 金容完(京紡社長) ▲ 朴述音(徽中校長)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朝陽中學 盟休

@실제날짜:470526

얼마동안 조용하던 학원에 또 맹휴 - 시내 동자동 조양중학교에서는 4백 명 학생들이 재단의 보강 확립과 고급중학 설치를 요구하며 26일부터 동맹 휴학을 敢行하였다고 한다.
  • 1947년 5월 30일 <동아일보> 閑散한 私立學校 - 就學兒童없어 頭痛
국민학교 교사 문제로 아동 수용이 극히 곤란하여 금년에는 3부제가지 실시하기로 되었다는데 서울에 기이한 현상으로는 공립, 사립의 일제 관념이 그대로 남아 사립학교에는 아동이 가지 않아 취학 희망자의 부족으로 비어있는 학교가 대부분인데 현재 서울시내에 사립학교는 일부 공립으로 편입하고 十교만이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시설이든지 기타 교원이 충실한데 불구하고 학무 당국으로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긴급한 교학 문제의 당면한 요지음 유감된 일로써 이에 대한 시 당국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公私立 구별하지 않는다 - 市 當局 談
"시로서는 공사립의 구별을 하지 않으나 일반 가정에서 아동을 사립학교에 보내지 아니하여 아동이 없어 놀고 있는 학교가 대부분인데 사립학교로서는 아동을 배당하여 달라고 요구를 하여 오나 방침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 1947년 5월 31일 문교부 관리 명단 : 한국인 및 미국인 고문

문교부는 1947년 5월 31일 현재 문교부에 재직 중인 주요 관리 및 미국인 고문 명단을 발표하였다(세부 명단은 이길상 자료집 306-7에 있음).[155]

  • 1947년 5월 31일 <한성일보> 교육자 반성을 촉구- 시청 기자단서 공개장

@실제날짜:470529

메이 데이 행사에 학생들이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시내 남녀 각 중학교 학생들이 배움의 길에서 많이 떨어지게 되자 서울시청 출입 기자단에서는 완고한 일부 교육자의 반성을 촉구하고자 지난 29일 대략 다음과 같은 공개장을 발표하였다.
생도의 정치 행사 참가는 타당치 않다. 그러나 당국의 방침은 학교 책임자의 실천에 있어 ○히 ○○되고 왜곡되고 있다. 메이 데이 사건에 있어 교학의 실정을 엄폐하려는 시학무 당국의 처사는 심히 부당하다 아니할 수 없으니 공문서의 불공개와 "기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함은 실로 민주주의에(후략)
  • 1947년 5월 31일 <한성일보> 다 함께 한글 배우자- 오늘부터 성인교육 강조 주간
일정 36년 간 국문까지 뺏겼던 3천만 조선 민족은 해방 직후 혼란한 정계 움직임에 일부에서는 배움의 길을 잃어 국문까지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 허다한 딱한 사정에 봉착하게 되어 문교부 성인교육국에서 얼마 전부터 한글 개학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자 준비 중인 바 서울시 학무국에서 성인교육 강조 주간으로 제정하고 문맹 퇴치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가장 긴급한 성인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울시청에서는 금 31일부터 6월 6일까지 6일간을 성인교육 강조 주간으로 정하고 주간 중 서울시장 김형민 씨를 위시하여 명사 제씨의 방송 격려와 선전삐라, 시내 각 구청의 선전대까지 동원시켜 한 사람의 문맹자도 없도록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리라 한다. 동 운동의 예정은 대략 다음과 같으며 일반은 동 운동에 많은 후원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1. 주간 중 매야 방송 ▲김형민 5월 31일 ▲설의식 6월 1일 ▲박정근 6월 2일 ▲김활란 6월 3일 ▲백남규 6월 4일 ▲황애덕 6월 5일 ▲송흥○ 6월 6일
2. 선전, 삐라를 매호, 포스타는 대중 집회 장소
3. 중요 건물 정면에 선전막 설치
4. 선전대를 각자 파견하고 성인교육 선전의 밤을 개최
5. 성인 교육 대회 개최


1947년 6월

  • 1947년 6월 1일 <독립신보> 민주 국가 건설은 민주 학원 건설에서- 세계의 민주 학생들은 궐기
청년 학생은 그 나라의 장래를 짊어지고 있는 만큼 전후에 있어 국민 교육 문제는 비단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의 크나 큰 문제를 던지고 있다. 가까운 곳으로는 모든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 가장 관련성이 많은 중국의 최근의 학생운동은 중국의 중요 대학을 휩쓸어 중공격전과 아울러 중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 중국 학생은 중공의 즉시 정전과 학원의 민주화, 경찰의 학원 간섭 절대 반대 등을 내걸고 교수와 학생이 일치가 되어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남의 집의 불이 아니라 해방 후 ○○도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국대안 반대 운동이 전개되어 수많은 교수와 학생이 학원에서 추방되고 거의 1년이 가까워 오는 금일까지 배움에 불타는 학생들을 거리에서 헤매게 한 것은 문교 당국의 커다란 실책일 것이며 최근에 와서 겨우 국대 이사진을 개조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최근 외전은 중국의 학생 운동의 치열함을 연일 전해왔는데 남미 저 멀리 떨어져 있는 智利에서도 貧弱한 자격의 교수를 배격하는 학생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의 민주주의는 세계의 민주주의와 절대적인 관련성이 있는 만큼 교육의 민주주의화도 세계의 민주 학원과 걸음을 같이 할 것은 물론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중국의 학생 문제를 냉정히 살펴보고 우리의 국대안의 모순과 창조면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1947년 6월 1일 <독립신보> 학생운동의 탄압 조치는 사태 악화시키는 근시안적 정책
중국 입법원서 國府 조치 비난- 중국정부 입법원 임시회의에 있어 동의원들은 학생시위 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적 조치가 사태를 완화시키는 대신 도리어 악화시키는 근시안적 정책이라고 비난하는 동시에 학생들이 6월 2일에 전개할 계획인 국공 분쟁 반대 전국시위 운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간절한 권고 조정책을 취할 것을 만장일치로 건의하였다. 그리고 입법원은 학생들의 6월 2일의 시위 운동을 간지시키기 위하여 정부와 협력하는 한편 학생측 요구와 정부측 요구 사이에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9명의 위원회를 선출하자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학생 대표는 21개 대학 동맹을 대표하여 보고차 입법원에 출두 허가를 받았으나 동학생은 무슨 이유로 시위 운동 개시일을 6월 2일로 채택하였느냐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여 입법원 의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앞서 장개석 주석은 연설 중 시위 선동자들이 6월 2일을 채택한 것은 동일 연안공산당의 소위 국공분쟁반대 ○○기념일인 까닭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전기 학생 대표는 입법원 의원들에게 대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정지하더라도 제2차 행동을 취할 터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6월 2일에 제출할 12개조의 요구 조항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식량을 증배할 것. 
2. 교육 예산을 정부 예산의 15%로 할 것. 
3. 전학생에게 장려 보조금을 지급할 것. 
4. 검속된 학생을 전부를 석방할 것. 
5. 학생에 대한 경찰의 징벌을 폐지할 것. 
6. 정부의 일반 시위 금지를 폐지할 것. 
한편 입법원 한 의원은 20년전 학생들이 북경 정부를 타도하고 국민당 정부를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실을 지적하여 정부 당국은 학생들의 혁명적 기세를 지지하는 것이 현책일 것이라고 제의하였다. (남경 31일발  UP조선)
  • 1947년 6월 1일 <동아일보> 今年度 入學兒童 9일부터 登錄 開始
금년 9월 신학기에 입학할 서울시내 국민학교 아동 등록은 오는 6월 9일부터 10일간 6월 18일 마감키로 되었다. 금년도 등록 아동 연령은 1940년 9월 이후 1941년 9월 1일까지 출생한 아동과 미취학 아동으로 1935년 9월 이후 1940년 9월 1일까지 출생한 아동을 대상으로 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등록 용지는 각 동회에서 배부하며 구청에서 접수키로 되었다.
  • 1947년 6월 1일 <동아일보> 培花高女生 籠城 斷食

@실제날짜:470530

시내 배화여학교에서는 지난 메이데이 記念 行事에 참가한 생도 7명을 퇴학 처분한데 대하여 학생들 간에는 처분당한 동료들의 복교를 학교 당국에 탄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지난 30일 하오부터 제2차로 교장실에 80여 명 생도들이 농성하여 31일 아침까지도 그대로 계속 단식 투쟁 중이라고 한다.
  • 1947년 6월 2일 문교부 주간업무보고(47.5.26-31)

문교부장 고문 Horace H. Underwood는 주간 업무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Research Bureau : 각 시도학무국장 회의 소식 Textbook Bureau Administration Office Biology Elementary Schools Psychology Culture Bureau Secondary Education Higher Education : SCAP의 Higher education officer인 Mr. Wigglesworth 방한. 한일의 고등교육 정책 비교 및 협조 방안 협의.[156]

  • 1947년 6월 3일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 단원들 내한

미국의 대한 교육 및 정보조사단 단원 4명이 6월 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5월 26일 워싱턴에서 국무성 및 전쟁성 관리들과 만나 브리핑을 받고 5월 27일에 한국으로 출발하였다.[157]

  • 1947년 6월 3일 <독립신보> 성인교육대회
서울시 성인교육협회에서는 성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일반에 고취시키는 동시에 그 적절한 방책을 강구하고져 금 3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중학교에 각 학교장과 관계자가 참석하여 성인교육대회를 개최하리라는 바 일반의 다수 참석을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6월 3일 <독립신보> 학령아동 要登錄

@실제날짜:470609

새학년을 앞두고 이번에 국민학교에 입학할 학력 아동의 등록은 6월 9일부터 10일간 각 구청에서 접수하기로 되었는데 해당 아동은 오는 9월 1일 현재로 만 6세되는 아동과 만12세까지의 적령 초과 아동이라고 하며 용지는 동회에서 배부한다고 한다.
  • 1947년 6월 3일 <동아일보> 女子專門學館 二日 開館式

@실제날짜:470602

개학준비 중에 있던 서울여자전문학관 개관식은 작 2일 인사동 임시 교사에서 신입생 120명과 내빈 다수 참석리에 성대히 擧行하였는데 설립자 겸 교장은 朱永夏 씨라 한다.
  • 1947년 6월 3일 <동아일보> 培花高女生 斷食 繼續
메이데이 학생 참가문제로 학교 당국의 학생 퇴학 문제에 대하여 단식 농성 투쟁 중에 있는 배화여학교 학생 70여 명은 2일도 계속하여 농성 중에 있는데 학교 당국의 시급한 수습을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6월 3일 <동아일보> 成人敎育大會 - 13日 서울中學校서 開催
40만에 가까운 성인 문맹을 포용하고 있는 서울시에서는 국민 문화를 높이고 보선(普選)의 원만한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지난 31일부터 성인교육 강조주간을 설정하고 전 서울시를 들어 이 운동을 추진하고 있거니와 3일에는 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서울중학교 강당에서 성인교육대회를 열기로 되었는데 이 회의에는 시내 각 초중등학교장은 물론 성인교육 관계자와 교화단체, 종교단체 관계자들짜지도 모이어 성인교육 전반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6월 3일 <한성일보> 경기사범 어디로!- 종합중학으로 발족? 이전?
조국의 앞날을 좌우하는 교육의 중요성에 비추어 사범교육이 일반 중학교육보다 한층 더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이 없는 바 작년 5월 22일 부로 구용중교사를 사용하라는 조건 아래 인가된 경기사범은 동 8월 2일부로 인가된 용문중학이 당시 적당한 교사가 없는 관계로 동일 교사를 사용하여 오던 중 최근에 와서 전기 경기사범을 현 교사보다 시설이 문제가 못되여 기숙사 강당 설비조차 없으며 동 면적이 3분지 일밖에는 안되어서 장래 부속 국민학교를 신설하기 불가능한 국민학교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어 지난 4월 동교 후원회 대표가 서울시 학무국과 문교부에 반대 진정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워드 문교고문, 깁슨 경기도 고문, 마틴 서울시 고문 등이 동 교를 시찰한 다음 전기 사범 중학 양교를 헤쳐서 종합교육을 실시하도록 의견 결정이 있었는 데 그 후 직접 관계 당국인 서울시 학무국으로서는 무슨 관계인지 아무런 결정도 짓지 않고 시일만 지연되고 있어서 일반의 의혹을 사고 있는 한편 입학 시험기를 목전에 앞두고 급속한 결정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 1947년 6월 3일 <한성일보> 성인교육대회
신국가 건설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나가는 성인교육 강조 주간 문제는 기보한 바이나 서울시에서는 6월 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중학 강당에서 서울시 성인교육 대회를 개최하리라는데 일반은 많은 후원 있기를 바란다 한다.
  • 1947년 6월 4일 <독립신보> 학교당국서 선처 언약 - 배화생 농성 단식 사건 일단락

@실제날짜:470603

배화여중생의 단식 농성 사건은 학교 당국자의 선처 언약으로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지난 30일 오후부터 70명 학생들은 메데 참가 학생 7명에 대한 퇴학 처분 취소를 요구하고 현관 복도 근처에서 단식 농성을 개시하여 제복의 處女들이 굳은 결의를 표명한 바 있었는데 이 단식은 6월 1일을 지나 2일까지 계속되고 있었으며 학교 당국에서는 수수 방관하고만 있었다. 그 동안 이 사태에 심심한 관심을 가진 민전 조사단이 농성 학생들을 보고 갔으며 2일 3시경에는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가 배화여중을 방문하고 복도에 즐비하게 농성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학교 당국자에게 이것이 교육이냐 하는 말을 비롯하여 시종 학교 당국의 처사를 힐난하였다 한다. 이로 인함인지 오후 7시경 교장은 학생들에게 선처할 것을 언약하였으며 이 말을 계기로 학생들은 농성 3일간에 시달린 몸을 도사려 각기 자택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인 작 3일에는 70명 중에서 20명이 씩씩하게 등교하여 수업을 받고 있는데 퇴학 학생들에게는 직원 회의에서 복교가 허락될 것으로 관측된다고 한다.
  • 1947년 6월 4일 <독립신보> 한성중학생 3명 피검- 등교 도중에 고랑채워 인치

@실제날짜:470603

배화여중 문제가 일단락짓게 되자 한성중학에 또다시 불상사가 일어나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작 3일 오전 8시 30분경 등교 도중에 있던 한성중학 4년생 정진용 군에게 사복 경관 1명이 권총을 겨누며 고랑을 채운 후 부근 이발관에 인치하였다가 무장 경관을 대동하고 와서 본서로 인치한 것을 비롯하여 거의 같은 시각에 다른 지점에서 5년생 전회종 군, 3년생 고문식 군이 체포되었다 하며 3년생 전승○ 군은 일단 파출소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체포 이유와 그 외의 자세한 내용을 문의한즉 서대문경찰서 사찰계에 물어보라고 말하였다는데 학원 내의 경찰 간섭이 약간 뜸해져서 수미를 펴고 있던 일반은 학원에에서 정모를 쓰고 등교하는 학생에게 권총을 겨누고 고랑을 채운 이 사실에 대하여 다대한 의아를 느끼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장 박준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행인이 많은 길 가운데서 학생에게 수갑을 채우는 일은 교육상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의 학생을 체포했다면 체포 이유를 명시해 주었으면 좋았습니다.”
  • 1947년 6월 4일 <동아일보> 成人敎育大會 - 盛況裡에 開幕

@실제날짜:470603

서울시 주최 성인교육대회는 3일 상오 9시 서울중학교 강당에서 시내 중초등 학교장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 다수의 열석으로 성대히 개막되었다.
먼저 개회 절차를 마치고 金시장의 인사와 군정장관, 민정장관의 祝辭와 강연이 있고 성인교육 공로자에 대한 표창장 수여와 감사장 증정이 있고 성인교육 상황보고와 성인교육 실시에 대한 토의 좌담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進行되어 의의 깊은 이 대회는 하오 4시 엄숙 성대히 마치었다.
  • 1947년 6월 4일 <동아일보> 中等學校 入學人員 決定
男子 5,640名, 女子 3,220名
오랫동안 시험지옥에서 시달리던 학부형과 학령아동들의 애를 태우던 시내 63 남녀 중학교의 입학인원과 시험일자가 드디어 결정되었다. 금년도 남자 중등학교 총 모집인원은 남자중학 34교 5,640명(2일 현재로 約 10교가 미정 =이것은 추후 발표함)이 수용되고 시험일정과 모집인원은 다음과 같다.
ㅇ 男子中學 募集人員
  英彰 100, 普成 180, 培材 150, 城南 200, 中央 150, 京東 200, 서울中 200, 東星 100, 徽文 150, 京畿商業 200, 善隣 100, 京工中 500
ㅇ 試驗日 : 7월 3일 - 동 5일 京福 200, 京畿工業 200, ○○ 200, 漢工 100, 崇商 120 
ㅇ 試驗日 : 7월 3, 4일 - 동 6일 養正 150
ㅇ 試驗日 : 7월 3일 - 7월 7일 中東 150, 城都 130
ㅇ 試驗日 : 7월 7일 - 동 8일  龍中男女 200, 京畿 200, 園○ 120, 商工 240, 朝電工 第1部 120, 德商 晝夜 各 200, 大東 150, 補商 100, 光新 120, 無線工 100, 白南工業 150
ㅇ 試驗日 : 7월 7,8일 - 동 9일 朝電(제2부)工 120
ㅇ 試驗日 : 7월 11일 - 12일 東興 120
ㅇ 試驗日 : 8월 26일 - 동 28일
ㅇ 女子中學募集人員 豊文 120
ㅇ 試驗日 : 7월 3일 - 4일 三女中 150, 舞鶴 180, 培花 120, 淑明 150, 誠信 150, 德成 200, 進明 100, 二女中 200
ㅇ 試驗日 : 7월 3일 - 5일 梨花 240, 京畿 200
ㅇ 試驗日 : 7월 3일 - 동 6일 同德 150
ㅇ 試驗日 : 7월 3일 - 동 7일 啓星 100, 中央 120, 漢城 150, 東明 150, 女商 180, 東丘 120, 文星 120, 貞明 100
ㅇ 試驗日 : 7월 7, 8 - 동 9일 花園 120, 信光 100
ㅇ 試驗日 : 7월 15일 - 동 18일
  • 1947년 6월 4일 <한성일보> 경남교육대회
(부산) 경상남도에서는 학교·사회 교육을 막론하고 교육 성업에 조예가 깊은 교육가들의 귀중한 체험과 창안을 유감없이 교육 사업에 이바지하고자 지난 28일부터 3일 간에 걸쳐 경남교육자 대표회의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 1947년 6월 4일 <한성일보> 중등 입시 일정 결정- 수험 아동은 3교 선택 가능
좁은 문으로 쇄도하는 아동 15만. 어린 비둘기들의 가얇은 가슴을 조리게 하는 남녀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이 하루 하루 가까워 오고 있다. 이에 따라 아동들 뿐만 아니라 일반 학부형들도 일대 관문을 앞두고 무한한 초조감에 사로 잡히여 있는 바 서울 시내에 있는 56개 남녀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 일정과 아울러 이에 따르는 구체적 세목이 드디어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시내 남녀 중등학교 교장들은 지난 2일 하오 2시 서울중학교에서 금년도 입학자 선발에 관한 최후 결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 입학 선발은 통학거리를 충분히 참작할 것
  ▲ 지원 아동으로서 출신 학교가 폐교 또는 외지던가 혹은 38이북인 경우에는 재학을 증명할만한 서류를 학교장의 추천 혹은 증명서를 얻을 것
  ▲ 합격자 발표는 수험 시작일부터 5일을 지나지 말 것
  ▲ 지원 학교 수는 세 학교에 한 할 것 등이며 그 외 제6학년에 재학치 못한 자나 또는 재학증명서를 가지지 못한 자는 입학 시험 시행 전에 국민학교 제6학년 전 과목의 필답 시험과 인물 심사및 신체 검사 등의 자격 시험이 있다 한다.
이것으로서 지난 번 문교부 당국의 결정 요항에 의하여 오는 7월 3일부터 동 9일까지에 걸쳐 시행되는 입학 시험에 아동들은 세 학교씩 택하여서 수험할 수가 있게 되는 한편 주목되고 있던 학구제에 관하여서는 다만 통학 거리를 고려하기로만 되었다.
그리고 입학 원서 접수는 숙명여중의 지난 1일부터를 비롯하여 5일 경부터 금월 말까지로 되어 있으며 각 학교 고사 일정은 다음과 같다.
   
女子中學部
 ▲ 7월 3일-4일 (쌍문)
 ▲ 3일-5일 (제3,무학,배화,숙명,덕성,진명,서울 제2,성신)
 ▲ 3일-6일 (이화,경기)
 ▲ 3일-7일 (동덕)
 ▲ 6일-9일 (경성상업)
 ▲ 7일-9일 (계성,중앙,한성)
 ▲ 8일-9일 (동명,정명,동병상업,문성상업)
 ▲ 15일-18일 (화원 경리)
 ▲ 16일-18일 (신광 기예)
    
男子中學部
 ▲ 3일-5일 (영창,보성,배재,성남,중앙,경동,서울중,동성, 휘문,경기상업,선린상업,경성공업)
 ▲ 3일-6일 (경복,경기공업,경성전기)
 ▲ 3일-7일 (양정)
 ▲ 4일-6일 (한양공업,숭문상업)
 ▲ 5일-8일 (서울성동공업)
 ▲ 7일-8일 (중동,성도)
 ▲ 7일-9일 (용산중,경성농업,광신상업,경성원예,경성상공, 조선무선,덕수상업)
 ▲ 8일-9일 (조선전기공업 1부,대동상업,보인상업)
 ▲ 11일-12일 (조선전기공업 2부)
 ▲ 9일-미정 (백남공업)
 ▲ 8월 26일-28일 (동흥)
  • 1947년 6월 4일 <한성일보> 학령 아동을 등록- 국민학교 신입생 요항
서울시에서는 금년 9월 신학기를 앞두고 미리 학령 아동의 등록을 받고자 다음 요항의 주의 사항을 공고하였다.
  ▲등록의 대상; A. 적령아 自 1940년 9월 2일 至 1941년 9월 1일 출생자 B. 미취학아 자 1935년 9월 2일 지 1940년 9월 1일 출생자
  ▲등록기간; 서기 1947년 6월 9일부터 18일까지 10일 간
  ▲등록방법; 각 동회에 비치한 등록표에 해당사항을 기제하여 동회를 경유 소관 구청에 제출할 것
  ▲등록요항; 본적, 주소, 아동의 성명, 성별, 생년월일, 보호자의 성명, 직업, 아동과의 관계
  • 1947년 6월 5일 <독립신보> 교원의 부정 행위 감시- 입학기 앞두고 이검찰총장 담

@실제날짜:470604

7월 초순부터 시행될 입학 시험기를 앞두고 학부형의 고충은 나날이 커가고 있는데 이러한 불안에 틈타서 조량할 입학 부로-커(?)와 정실관계로 입학을 허락할 비양심적 교직원의 발생이 예년과 같이 예상되는 바이다. 이에 관하여 관계자들의 자숙이 요망되는 바인데 이인 검찰총장은 작 4일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시대의 폐풍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건국 도상에 있어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학생의 성적과 인물 등 고사본위로 입학시키지 않고 금품이나 향응을 받고 입학을 시킨다면 이런 자들은 독직 또는 사기죄로 엄중히 처단할 것이며 학생과 학교 사이에 소위 입학 뿌로-커 노릇을 하는 자도 역시 사기죄로 처단할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취지의 통첩을 관하 각 검찰청에 통달한 바 있다.”
  • 1947년 6월 5일 <독립신보> 남여중등 입학시험 일자
명학년도의 서울시내 남여 중등학교 입학시험 일자는 제1차 전형 발표 후에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남자중등 = 英彰, 普成, 培材, 景福, 養正, 城南, 中央, 京東, 서울, 東星, 徽文, 機工, 善隣, 京電 7월 3일부터 
▲漢陽, 崇文 4일 
▲京工 5일 
▲中東, 龍山, 開城, 京農, 園藝, 京高, 德壽, 光新, 無線 7월 7일 
▲電工, 大東, 輔仁 8일 
▲白南 9일 
▲여자중등 = 三女, 同德, 舞鶴, 培花, 淑明, 梨花, 京畿, 德成, 豊文, 進明, 二女 -7월 3일 
▲女商 6일 
▲啓星, 中央, 漢城 -7일 
▲東明, 貞信, 東丘 - 8일 
▲花園- 15일 
▲信光- 16일
  • 1947년 6월 5일 <동아일보> "푸"神父 孤兒院 視察談 - 淸潔의 精神 涵養하라
敎育者는 硏究가 必要
조선의 어린이 교육을 시찰하며 연구하려고 내조한 "소년의 거리" 창설자 에드워-드 제이 플라나간신부는 4일 상오 9시반부터 군정청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대략 다음과 같는 요지의 담화를 하였는데 ○히 조선의 어린이 특히 집없고 헐벗은 고아의 상태를 시찰한 감상으로써 고아는 보통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보다 더 훌륭한 취급을 해야 한다고 말하여 흥미를 끌었다.
"나는 조선만 시찰을 한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다 보았는데 조선은 비옥한 농지가 많고 국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만큼 조선의 농업이 중대하다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씩씩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조선의 장래는 퍽이나 多幸스러웠다. 그러나 도시에서 자라는 어린이의 건강 상태는 농촌의 어린이에 비추어 퍽 좋지 못하였다. 특히 조선의 어린이가 거리에서 암취인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어린이의 교육상 절대로 좋지 못하다.
그리고 학령 아동으로서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은 것을 볼 때 조선의 어린이 교육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이의 기관으로써 사법부에서 경영하는 고아원 이외는 내가 시찰한 고아원은 대개가 다 시설과 조직이 잘 되어있어 그들의 장래가 대단히 유망스러웠다.
그리고 국립맹아학교는 세계에서도 훌륭한 것으로 조선의 어린이 교육회는 이를 모범해야 할 것을 일러둔다. 나의 의견으로서는 첫째 전국 고아의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여 고아 교육 책임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부족한 것을 토의 연구하여야 과학적으로 이를 보충하는 동시에 어린이에 청결의 정신을 실천시키고 보급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그 장소가 어린이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고아원 같은 것을 신설할 때는 특히 주의할 것이며 운동경기 같은 것을 자주 베풀어 단체적으로 결합, 단결하는 정신과 육체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모든 고아에 대한 보호 시설은 그것이 국립이거나 시립을 불문하고 똑같이 하거나 그렇치 못하면 그 이상으로 좋게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주의시킬 것은 고아원 모리배는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1947년 6월 5일 <동아일보> 동네마다 글소리 - 活潑한 한글 促進 運動
배움이 힘이라는 스로간을 내세우고 서울 일대에 한글 촉진 운동을 전개한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각 동회에 500여 강습회를 개최하고 10만여 명이나 넘는 18세 이상 남녀를 수용하고 매일같이 강습을 시키고 있는데 이번 조사에 의한 순문맹은 서울 인구의 1할 4부, 즉 20만 명밖에 아니되므로 금월 중으로 전원을 다 가르키도록 노력하여 1개월 내에 우리 한글을 해독하도록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 보선을 앞둔 서울 시민만은 전부가 우리 한글을 해독하도록 하기로 되었다.
  • 1947년 6월 5일 <동아일보> 培花 籠城 事件 圓滿 解決

@실제날짜:470603

배화여자중학교의 농성 학생들은 3일 하오 교장이 퇴학을 선처하겠다는 언명으로 전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1947년 6월 5일 <동아일보> 續出하는 學園뿌로-카 - 摘發되면 嚴罰

@실제날짜:470604

李仁 檢察總長 管下에 指示
요지음 각 학교의 신입생들의 응시기를 앞두고 소위 학교 뿌로카들이 응시 학생들의 초점을 노리는 非行이 많음에 비추어 4일 李仁 검찰총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왜정시대부터 각 학교의 신입생을 노리는 악질 학교 부로-카들의 폐풍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 이같은 非行이 자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건국도중에 있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중대한 학교 당국의 현지로서 고사 본의를 떠나 청탁 또는 인연 관계로써 우선 입학을 허하는 점이 이후로 발생한다면 적발하는 즉시로 학교 관계자 또는 학교 뿌로-카들은 다른 사건 보담은 극형에 처하도록 관하에도 지시하였거니와 앞으로 이러한 非行이 있다면 즉시로 알려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 1947년 6월 5일 <동아일보> 中等校 入學 手續 方針 決定
戶籍抄本은 入學後에, 寫眞은 古品도 無關
매년 입학 시험기를 앞두고 수험 수속에 필요한 호적초본으로 각 구청은 일대 혼잡을 이루는데 금년에는 호적초본은 합격 후에 제출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수험용 사진은 여러 관계로 금년에는 시당국은 폐지를 각 중등학교장에게 요구하였으나 전례에 비추어 곤란타하여 사진은 서류에 첨부하되 형체만 알아볼 정도의 그전 사진이라도 관계 없다고 한다.
  • 1947년 6월 6일 <한성일보> 서울시 문맹 20만- 오는 월말까지 완전 퇴치
해방 이후 점차로 늘어가는 서울시 인구는 드디어 133만을 돌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금번 성인교육 강조 주간을 기회로 나타난 문맹자 수는 실로 20만에 달하고 있다. 동 문제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국 사회교육 과장 황주병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번 조사한 결과 서울 시내에만 20만의 문맹자가 있느데 이들 전부를 6월 말까지에는 한 사람의 문맹자도 없이 교육시키겠다.
  • 1947년 6월 8일 <독립신보> 학도를 애호하라- 사설

@실제날짜:470608

一
 금일 남조선의 학생 대중의 처하고 있는 열악한 사회적 지위와 완전한 무복리의 상태는 세계의 문명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구할 수 없는 혹심한 정도의 것이며 국내전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중국에 비하여서도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는 사태는 오인의 심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는 바이다. 최근의 예에서 보더라도 수일전 중국에서 일어난 내전 정지요구의 학생 운동이 대규모의 시위로 발전된 데 대하여 일반 사회인사의 신중한 태도는 물론 국민 정부의 취체 방법이나 대책에 있어서도 학생 대중의 발언과 요구에 대한 중대한 평가가 여실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학원자치의 요구가 탄압과 추방으로 보복되고 메데 참가를 이유로 나어린 여학생들까지도 퇴학 처분을 당하며 교우의 복교를 호소하는 어린 여생도의 단식 농성이 무단 교장의 냉소밖에는 받지 못하는 등의 언어도단한 사태는 남조선 학생 대중이 처하고 있는 고난이 완전히 세계 무관의 것임을 통감하게 하는 것이다.
二
 우리나라의 혁명 운동사상에 있어서 학생의 역할은 불후의 공적을 남겼든 것이다. 3.1 운동의 중견 부분이 전혀 학생 운동에 의거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후 6.10 만세 사건, 광주학생 투쟁 등 우리나라 민족 해방 투쟁의 성장 단계를 상징하는 주요 귀절이 모두 그 중추 부분으로서 학생 대중의 영웅적 항쟁에 의하여 지지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제의 질혹에서 해방되었다는 오늘의 남조선은 과연 학생 대중에게 무엇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돌아다 볼 때에 오인은 심각한 우려를 금치 못하는 자이다. 일찍이 일제 시대의 잔학한 무장 지배자들은 우리나라 학생들을 통털어 不逞鮮人視하였으며 학생의 요구나 운동은 머리를 들 여지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날 남조선의 활폐한 학원가두에 추방된 수 많은 학생, 교수, 그리고 눈물과 단식으로 학우의 복적을 애원하는 여학생들- 이 모든 사태에는 확실히 학생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에 대한 일제식의 무시와 유린이 감지 되는 것을 오인은 솔직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三 
 남조선 학원 문제에 나타난 개개의 불상사나 분규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오인이 진실로 우려하는 것은 이들 불상사나 분쟁이 주로 학생의 고귀한 사회적 지위를 존중할 줄 모르는 편견과 반동적 의식에 그 일반적 지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을 사회의 寄生物視함으로써 그 정당한 발언권을 유린하던 일제시대의 포악한 관습이 우리 남조선 일부 인사의 두뇌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는 사실 가운데 학생 무시, 학생 탄압의 정신적 지주는 서 있는 것이다. 위정자나 일반 인사들 사이에 민주주의 문명 각국에서 학생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애호와 존경의 일반적 관념이 충분히 보급되여 있고 학생을 사랑할 줄 아는 분위기가 사회에 충만되어 있다면 오늘 남조선에서 목도하는 학도의 불행과 고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도측의 태도를 운위하기 전에 먼저 젊은 학도들에 대한 냉혹과 횡포와 경시를 일소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학도 애호의 정신이 충만한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을 특히 문교 당국과 교육 관계자 제위에게 제언하는 바이다.
  • 1947년 6월 8일 <동아일보> 各大學 專門部 檢試 13日부터 京畿中서
문교부에서는 1947년도 醫學, 藥學, 齒學, 水産學의 각 대학 전문부 입학자 검정시험을 6월 13일부터 동 15일까지 시내 경기중학교에서 실시하기로 되었다. 출원마감은 11일까지이며 출원장소는 문교부 고등교육국 대학과인데 6월 12일 하오 1시 출원자는 일단 문교부 앞쪽에 집합하기를 요망하고 있다. 그런데 수험과목은 남자는 공민, 국어, 한문, 영어, 역사, 지리, 수학, 문리, 화학, 박물, 도화이며 여자는 공민, 국어, 영어, 역사, 지리, 수학, 이과, 가사, 재봉 등이다.
  • 1947년 6월 8일 <동아일보> 敎育者 慰安會 9月로 延期
8일 창경원에서 개최하려던 조선교육연구회 주최 교육자, 교육관계자의 가족 위안회는 현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부득이 래 9월로 연기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6월 8일 <동아일보> 新學期 兒童 登錄 9日부터 實施

@실제날짜:470609

서울시내 금년도 7월 신학기 국민학교 입학 아동 등록은 명 9일부터 실시하는데 각 가정에서는 동회를 통하여 기일 이내에 등록을 수속하도록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6월 8일 <동아일보> 貞信女學校 蘇生 開校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에 창립되어 조선 여성계에 많은 지도적 여성을 길러내인 정신여학교는 일제의 탄압하에서 아깝게도 폐교되었었는데 동교 동창회와 종교 방면 관계자들의 열열한 활동으로 소생되어 오는 7월초부터 생도를 모집하게 되었다고 하며 역원은 다음과 같다.
   ㅇ 理事長 : 金淳愛 = 金奎植博士夫人
   ㅇ 校長 : 金弼禮
  • 1947년 6월 11일 교육 및 정보 사절단 위한 만찬

교육 및 정보 사절단(대표 : Arndt)을 위한 환영회가 한국인 교육자들 주최로 열렸다. 장소는 Lee Summer Palace였고 한국인 학생들이 전통 무용과 음악 등을 공연하였다. SCAP의 대학교육 책임자 Philip W. Shay도 참석하였다.[158]

  • 1947년 6월 11일 <독립신보> 박교장의 비행- 경기여중 직원이 공개장 발표
경기여중의 학생 처분 문제는 학교축의 강경한 태도로 분규를 거듭하고 있는데 지난 9일부터 정학생중 2명의 정학을 해제한 데 대하여 그들은 같이 처분된 교우들의 처분을 취소하지 않는 한 등교할 수 없다고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이 오래도록 계속되는 학교의 혼란 상태에 격분한 동 교직원 7명은 박은애 교장의 비행에 대한 공개장을 발표하여 사회의 주목을 끌게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인사문제- 무자격자를 교원으로 임명한 것외 3항목. 
(2) 재정문제- 5만 원 이상의 거액으로 추측되는 선물을 요로 각처에 보낸 것외에 3항목. 
(3) 정치적 문제- 직원회 석상에서 자기는 극우이니 좌익이나 중간은 퇴장하라고 명한 일 외 2항목. 
(4) 특수 문제- 낙제한 고관의 자녀를 성적을 위조하여 진급시킨 일 외 3항목.
  • 1947년 6월 11일 <동아일보> 南朝鮮 中學校 376校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남조선 중등학교 수는 지난 2월 말 현재 370 학교였는데 그 후 새로이 6교가 신설되어 5월 말일 현재 376교라고 한다.
  • 1947년 6월 11일 <동아일보> 梨花女大 卒業式
이화여자대학교 금년의 졸업식은 11일 하오 2시부터 신촌 동교에서 열터인데 문과 제19회 졸업생은 14명이오 음악과는 제 17회로써 7명, 가사과는 제 15회로써 14명이다. 그리고 식이 끝난 뒤 동창총회를 연다는데 회비 1백 원을 가지고 꼭 래참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 1947년 6월 11일 <한성일보> 남조선 중등교 376교로 증가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2월 말일 현재 남조선 중등학교 수는 370교이던 바 그 후 5월 말까지에 다음과 같이 6교가 신설되었다고 한다.
   ▲서울시 1교, 전남 3교, 경북 1교, 제주도 1교
  • 1947년 6월 12일 <독립신보> 京農에 휴교 처분 - 시당국의 처사에 일반은 疑訝

@실제날짜:470611

지난 5월 9일부터 11회의 동맹 휴학에 들어간 경성농업학교의 분규는 학교 직원 일부와 동창회측의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지난 11일부터 휴교 처분이 내리었다고 한다. 이학교의 사건에 대하여 시학무  당국에서는 교직원과 동창회 대표에게 근간 원만한 해결을 짓겠다고 수차 언명한 후 근 1개월을 천연하여 오다가 급기야 휴교 처분이라는 뜻하지 않은 당국의 조처에 아연실색하고 있다고 한다. 당국의 말에 의하면 동교의 사태 수습이 곤난함으로써 여름 방학도 가까움으로 일단 휴교시킨 후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6월 13일 <동아일보> 獨立 國家 빨리 되도록 敎育經濟를 援助 - 러-長官 談

@실제날짜:470612

러-취 군정장관은 12일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방금 입법의원에서 심의중인 보선법 연령제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다음 시사 문제에 관한 문답이 있었다.
미국무성으로부터 하-지 중장에게 보내온 조선 정책에 관한 지령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이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가를 세워서 연합국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 둘째 조선 중앙정부를 세우되 완전히 조선인민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정부가 되게 할 것. 셋째 조선이 독립한 민주국가가 되기 위하여 교육, 경제를 원조하는 것이다.
  • 1947년 6월 13일 <동아일보> 名目 좋은 寄附金 新學期부터는 廢止
市 學務局 各校에 示達
매년 중등학교 신입학기에 신입생 아동에게 부당한 기부금을 요구하는 일이 많음으로 학부형들의 부담을 과중케하며 또한 기부금으로 인하여 입학을 못하는 일까지 생기는 폐단이 많음으로 금년도 입학에는 예년에 비추어 기부금이니 혹은 교육보조금이니 무슨 명목이던지 시학무 당국의 적당한 승인 없이는 기부금은 일체 폐지하도록 각 남녀 공사립 중등학교장에게 통첩을 발하는 동시에 금년 신학기에는 엄중 감시하여 이같은 폐단을 제거하기로 되었다.
  • 1947년 6월 15일 <독립신보> 경기여중 박교장 처사에 물의 분분

@실제날짜:470614

경기여중에서는 14일 서기영 선생외 4명의 교원을 파면시킨 것을 학생에게 발표하였는데 그 파면을 발표하는 박교장의 언사가 지극히 몰상식함으로 한 학생이 이를 지적하자 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공박하고 일시는 학생의 교외 출입을 금지하여 일부 생도는 맨발로 탈출하여 시학무 당국에 호소하 바 있었다고 하는데 사건 내용은 미상하나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파면된 교원은 전부 실력있는 선생님이라고 분개하고 있어 학생간에 물의가 높아가고 있다. 한편 박교장은 14일 왕방한 기자 십수명과의 면회를 거절하였다.
  • 1947년 6월 15일 <독립신보> 교육자협회서 항의

@실제날짜:470613

민주 교육계에 있을 수 없는 사실로 시내에 있는 배화여중의 메데 참가학생 처분 문제, 경기여중 박교장의 非行에 관한 문제, 경농 휴교 처분, 배재중학교장 ○난금 사건 등은 진정한 민주교육의 수립 도정에 있어 그 진실한 해결이 요망되고 있는데 이 중대 문제에 학교 당국자의 맹성을 촉구하고져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지난 13일 동 협회 대표 정갑 씨 외 3씨가 시학무국장 이덕봉 씨를 방문하고 전기 각 학교 불상사의 속출이 학무 당국의 무책임에 있음을 지적하고 시급한 해결책을 강구하기를 요구하였다 한다.
  • 1947년 6월 15일 <독립신보> 성균관대학 맹휴

@실제날짜:470613

성균관대학에는 민주주의 교수와 학생에 대한 테러사건이 분분하는 등 불상사가 발생하고 있는데 본대학 야간부 학생은 13일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맹휴에 들어갔는데 주간 학생도 상당히 동요되고 있는 모양이다. 
1. 惡試驗으로 입학한 테러학생 40명을 즉시 처분할 것. 
1. 테러단을 입학시킨 책임자를 철저히 처단 할 것.
  • 1947년 6월 15일 <독립신보> 학원의 분규는 악화일로 - 반민주 교육자여 반성하라
혼란, 분규, 투쟁 - 서울시내의 교육계는 이러한 구렁에서 헤매고 있다. 메데 사건을 계기로 각 학교에 잠재해 있던 분란은 드디어 표면화되고 더욱 확대되여 갈 뿐으로 일반 사회인의 교육에 대한 신망을 잃게 하고 있는 상태로서 13일에도 경농, 경기여중, 배화여중의 분규가 계속되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학무 당국에서는 모교장에게 현재 조처를 강요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하여 앞으로의 사태가 주목되고 있다. 
▲ 경농- 지난 11일 서울시장 담으로 발표된 휴교 처분에 대하여 학무 당국에서는 학교측과 협의 후에 한 조처라고 하였으나 본교 직원 일동은 전혀 몰랐던 일로서 교장이 단독으로 학무 당국에 제의한 것이라고 하여 종래 대립적 느낌이 있던 직원이 일치 단결하여 휴교 처분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여 전직원과 동창회에서 학무 당국과 교섭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경기여중 - 일전에 발표된 동교 직원 7명의 박은혜 교장 非行 공개장에 대하여 박교장은 지난 11일 생도들을 긴급 소집하고 이 공개장의 시행을 시인하면서도 이는 좌익 언론과의 협작 행위라고 다시금 사상에 편승하는 언사를 발언하는 한편 3명 교원의 교수를 금지시키고 또 학무 당국에 4- 5명 교원의 파면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교원 일부는 다시 성명을 발표하고 박교장이 왕년에 이화여자 사감으로 있을 때 무고한 학생에게 누명을 씌어 자살케 할 사실과 이번 행동을 들어 교장 태도를 지탄하는 동시에 끝까지 학교의 명랑화를 위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다. 
▲ 배화여중 - 처벌된 메데 참가 학생 일동의 단식 농성에 대하여 일전 이강래 교장은 학부형과 학생에게 근간 복교시킬 것을 언명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그 후 전혀 履行치 않고 있다가 지난 13일 방문한 학부형에 대하여 이 교장은 “기정 방침대로 나가겠다. 나는 철면피가 되었으니 그렇게 알아달라”고 하여 학부형들을 분개시켰다고 한다.
  • 1947년 6월 18일 <독립신보> 학원 분규 아직도 계속- 배화여중 연속회의는 遂 流會

@실제날짜:470616

○월여를 두고 분란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 배화여중에서는 단식 농성까지 한 학생과 학부형에게 선처할 것을 言約한 후 태도를 표변하여 기정 방침대로 학생의 처분을 할 것을 재차 언명하였음으로 이 기만 행위에 분격한 학부형측 30여 명은 16일 시학무국 고문 마틴 씨의 참석을 얻어 학교측과 연속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략) 아직 학원의 합의를 보지 못하였으며 기정 방침대로 나가겠다고 고집적 태도를 강경히 주장하여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학부형측에서는 이유없이 학생을 처벌한데 대한 학교측을 추궁할 터로 근간 학교후원회 총회를 개최할 것을 언명하여 쌍방의 강경한 태도는 금후의 전개를 주목케 하고 있다. 그런데 (중략) 를 비난하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6월 19일 <한성일보> 중학 지망자 9만!- 현재 수용력은 5만 6천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남조선 전 지역 각 국민학교의 금년도 졸업생은 14만 1천여 명으로 그 중 약 반수인 8만 7천여 명이 중등학교 입학을 지망이 예상되고 있다. 한편 현재 남조선에 있는 중등학교는 총수 376교이며 방금 설립 수속 중에 있는 것이 약 5교로서 동 수용력은 약 55,400여 명이여서 지원자를 약 6할 4부를 수용하게 된다.
  • 1947년 6월 20일 SCAP의 대학교육담당 Shay 한국방문결과 보고서 제출

SCAP의 대학교육담당(Universities officer)인 Philip W. Shay는 1947년 6월 9일부터 6월 13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첫째, 군정청 문교부의 고등교육 고문인 Edwin L. Miller 박사와 한국의 고등교육에 관해 그리고 이 분야에 있어서의 한국과 일본의 긴밀한 협조에 관해 협의하는 것과 둘째, 대일 미국교육사절단이 일본의 고등교육에 관해 질의하였던 내용들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6월 9일 오후와 10일에는 유억겸 문교부장, Underwood 고문, Glenn S. Kieffer 부고문, Edwin L. Miller 고등교육 담당, 군정청 민간이 고문 Johnston 박사 등을 만나서 의견을 나누었다. 11일 오후에는 교육 및 정보 사절단을 위한 환영화에 참석하였고 12일에는 서울대학교, 연희대학교, 중앙여자대학교, 서울기독교 신학대학과 두개의 중등학교를 방문하였다. 13일에는 밀러 박사와 그 Staff들을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런 활동을 토대로 Shay는 한국 방문 결과를 SCAP의 교육책임자(Chief, Education Division)인 Mark T. Orr에게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한 미군정청의 정책 현황 2. 1947년 6월 9일 현재의 문교부 조직 3. 1947년 1월 15일 현재의 남한의 대학교 및 대학 현황 4. 종합 평가

   A. 문교부 : 문교부장과 그 관리들의 역할 인식이 부족함.
   B. 문교부 미국인 고문들 : 권한부재로 주요 결정에 영향 못 줌. 한국인들은 이들의 자문을 원하지도 않고 있음. 미국인 고문단은 잘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한국 교육의 재건을 위한 어떤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음. 이들 고문들은 대부분 충분히 훈련되어 있거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음. 예산 부족도 주요 원인임. 충분한 대우를 받는 능력있는 교육자들을 확보해야 함.
   C. 고등교육 : Miller 박사는 고등교육분야에서 일하는 4-5명의 관리들에게 어떤 권한도 行事하지 못하고 있음.
   D. 서울대학교 : M. G. Neale 박사의 47년 5월 28일 보고서에 동의함. 단지 학생활동이 좀더 강조되어야 할 것임.
   E. 성인교육 : 좀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에 파견되어야 함.[159]
  • 1947년 6월 20일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 보고서 제출

미국의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은 조사 활동을 종합한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무성과 전쟁성에 제출하였다. 55쪽으로 된 이 보고서는 총론(general introduction), 관찰 결과 및 결론(observations and conclusions), 그리고 건의사항(recommendations)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고서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 General Introduction II. Observations and Conclusions

   A. General
       1. Koreanization
       2. Political Problems Affecting Education
       3. American Personnel Problems
       4. Supply Problems
       5. Youth Activities
       6. Coordination of Educational and Informational Effort
   B. Education
       1. Administration
           a. Department of Education
           b. Finance
           c. Co-education
           d. Compulsory education
       2. Fields of Education
           a. Elementary education
           b. Secondary education
           c. Higher education
           d. Vocational-Technical education
           e. Adult education
           f. Physical education
       3. Teacher Training
       4. Textbooks, Teaching

Materials and Equipment

       5. Interchange of Persons
   C. Public Information
       1. General Observations
       2. Media of Infornation
           a. Press and Periodicals
           b. Radio
           c. Motion Pictures
           d. Books and Information Centers
           e. Graphic Displays
           f. Touring Speakers
       3. Other Activities of the Department
           a. Political Research and Analysis
           b. Publications Control
           c. Public Opinion Sampling
           d. "Korean Mobil Education" Train
       4. Organizational and Administrative Problems
   D. Special Note

III. Recommendations[160]

  • 1947년 6월 20일 <독립신보> 美人 민주교육가 - 마틴 씨 집무 정지

@실제날짜:470619

그 동안 민주학원의 교육이념 수립을 위하여 메데 참가 학생을 완고한 두뇌로써 정퇴학의 처분을 한 교장들에게 경고를 하는 등 교육계에 큰 파동을 일으킨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는 19일 집무 정지 처분을 당하였다 한다.
  • 1947년 6월 20일 <독립신보> 반동 맹휴를 경계하라 - 사설-
一.
 국대 이사회에서 맹휴 문제로 퇴교 중인 학생 전원에게 무조건 복교를 통보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최근의 보도는 공위 사업의 진척에 조응하여 오랫 동안 분규와 혼란을 거듭하여온 국대안 맹휴 문제에 해결의 희망을 제시하는 현저한 사실로서 오인의 심심한 주목을 환기하는 것이다. 국대 이사회의 이러한 태도에는 종래 탄압 일방의 태도에서의 현저한 일보 전진이 표시되어 있었으며 맹휴 학생측의 최근의 현명한 동향과 아울러 문제의 해결에 대한 오인의 희망을 고취하는 건설적인 의도가 명확하게 간취되는 것이다. 물론 국대 이사회의 제안에는 진급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재검사 방침 등 학생측의 首肯에 곤란을 예상케 하는 점이 없지 않으나 또 학생측의 원래의 주장이 학원 자치문제에 대한 하등의 표시가 없는 점은 이사회의 성의의 한계를 획하는 것으로서 문제 해결의 근본적 방침이 호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二. 
 그러나 이사회의 결정은 학생측으로 하여금 적어도 그 근본 요구 조건의 관철을 위한 투쟁과 취학 문제를 竝行시킬 가능성과 여지를 새로이 보장하여 준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은 학교내의 정상적인 수업과 학원의 민주화를 위한 자기 주장을 결부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전체로써 문제의 해결이 현저한 일보 전진을 실현한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당국자와 학생측은 논쟁 중의 문제를 다시금 학원내에 옮겨놓고 학원내의 문제로서 논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남조선 정치 정세가 공위사업을 계기로 하여 현저하게 개선되기 시작한 작금의 새로운 경향의 한개의 표현인 동시에 또 이러한 경향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현명 공정한 태도로 추진되는 학원 민주화의 학생측 요구는 허심한 대국적 견지에서 충분히 보응되고 관철될 것을 오인에게 예견하게 하는 바이다. 
三. 
 그런데 이러한 전반적 동향에 逆行하여 일부 학생간에 새로운 맹휴 운동을 위한 암약이 계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중하게 경계되어야 할 유해한 경향이 아닐 수 없는 바이며 더욱이나 이러한 맹휴 계획이 대체로 공위에 반대하기 위한 반탁 운동의 일익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이 신빙할 만한 것이라면 일부 학생층의 이러한 난동이야말로 철저히 배격되어야 할 일이다. 일찍이 국대안 반대를 위한 학생 대중의 민주주의적 요구가 나타났을 때 남조선 반동파는 이것을 학원내에 정치를 引入시키는 것이라 하여 완강하게 거부하고 문제를 최악의 사태까지 몰아넣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학원 자치를 위한 학생의 가장 초보적인 민주적 요구가 반동 교육 정책하에 탄압된 것을 증명하였다. 
이제 반동 정치가 팟쇼 두목들의 사이비 애국주의의 선동이 논의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정치적 도구로서 일부 학생의 낙후층을 무의미, 유해한 맹휴駁動으로 유인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오인은 전민주 인민의 분격을 대표하여 엄중한 항의를 제시하고 그들의 맹성을 요구하는 바이다.
  • 1947년 6월 20일 <독립신보> 조선교육자협회 공위 참가를 결정

@실제날짜:470618

조선교육협회에서는 지난 18일 中擴委를 개최하고 공위 참가의 대표자 박헌영 씨를 결정하는 시서 자문서 답신은 민전 발표문의 원측위에서 작성할 것을 가결하고 방금 시학무국에서 기도 중인 관제 교육회는 교원 대중의 의사를 억압하는 강제적인 것으로 일제의 조선교육회의 재판이니 절대 배격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 1947년 6월 20일 <동아일보> 京城工科學院 明文商業으로
시내 사직동에 있는 경성공과학원은 이번에 曺東植, 閔衡基, 裵詳明 3씨를 신교주로 맞이하고 명문상업학교로 신출발하게 되었다 한다.
  • 1947년 6월 20일 <동아일보> 學園의 不祥事 學園自體에 一任
解決不能時만 當局 干與
학원내외 테로, 교장 배척 맹휴 등이 또다시 시작되어 배화여중을 비롯하여 경기여중, 배재중학, 경동 등 학원의 재미롭지 못한 사건이 종결을 못보고 있는데 이같은 모든 사태는 건국도중 교학계에 재미롭지 못한 현상으로 시급한 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시 당국의 태도는 학원내의 문제는 학원 자체로 해결을 짓게 할 계획이며 해결이 못될 때에는 시로서 단호한 해결책을 강구키로 되었다.
  • 1947년 6월 21일 <동아일보> 學園모리배 幽靈學生 募集
최근 초중등과 대학의 입학기를 앞두고 정식 인가도 없는 허위의 학교 이름을 내어 걸고 학생 모집을 하여 학원모리를 꾀하고 있는 자들이 준동하여 학생들의 향학심과 부형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며 나아가 교육계의 질서를 문란케하고 있는 일이 많으므로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그러한 비양심적인 자들에게는 준엄한 경고를 발하는 동시 일반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시내 61개 중등학교의 소재지와 학교명을 명백히 게시하여 참고에 이바지하고 있다.
  • 1947년 6월 21일 <한성일보> 국민교 졸업식
▲6월 25일; 덕수, 창신, 우신, 한남, 공덕, 삼청, 동명, 종암, 서대문, 당산, 마포, 청운, 서빙고
▲26일; 광희, 혜화, 서강, 금화, 남대문, 이태원, 효제, 아현, 안산, 남정, 청구, 경남녀
▲27일: 제동, 청파, 용강, 화광, 돈암, 은로, 방산, 매동, 용산, 흥영, 협성, 숭의, 계성
▲28일; 교동, 삼광, 북성, 영희, 미동, 전농, 영등포, 창경, 효창, 한서, 남산, 소의, 청원, 배명
▲29일; 공옥
▲30일; 수송, 봉래, 금양, 청계, 장충, 창천, 성북, ○화○, ○학, 종암, 가명, ○○, ○○
  • 1947년 6월 22일 <노력인민> 所謂 復校案의 謀略性- 國大學生共鬪委 談
노예 교육 陰蔽의 기만 정책
국립서울대학 이사회에서 국대 제적생을 무조건 복교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데 대하여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로 그 내용을 규탄 반박하였다.
지난 6월 18일부 각 신문에는 국대 제적 학생을 복교시킨다고 보도되었으며 모 반동신문은 '무조건복교'이니 '국대 문제 해결에 일대 서광'이니 하는 무책임한 보도로써 그에 내포된 모략성을 의식적으로 陰蔽하면서 일반 사회인을 현혹케 하고 있으나 이는 이사회에서 의도하는 바와는 대단 그 경로가 먼 것이다.
즉 그 내용을 검토해 본 바 '앞으로는 여하한 경우에라도 절대 맹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학교 당국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할 것'을 맹서한다는 서약서와 함께 복교원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며 그 복적원은 ABC 삼급으로 나누어 심사를 받게 되며 이어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게 되는데 이러함으로써 학생들은 노예 교육의 도구로서 화하고 마는 것이며 진보적이며 양심적인 학생들은 전부 학원에서 축출되고 말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우리들 5천여 제적당한 학생들은 이사회에서 결정되었다는 소위 '복교안'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들의 요구 조건과 근본적으로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러한 무성의하고 미온적인 기만 정책에는 절대로 속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우리들의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 1947년 6월 22일 <노력인민> 原級 復籍이 解決인가- 사대 등록 거부 학생대회 결의문

@실제날짜:470620

사대 7백 여 명 등록 거부 학생대회는 지난 20일 정오 동교에서 개최하여 원급 복적을 절대 반대하고 최후까지 싸운다는 결의문과 아울러 소미공위에 보내는 메세지를 결의하였는데 결의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결의문
문교부는 유억겸 등 친일파 민족반역자 계열에 점령되어 있어 그들은 일제와 같은 노예 교육을 강제하려고 반인민적 국대안을 내 놓았다. 국대의 모순은 학원을 극도로 황폐시켜으면 그들이 범한 죄악은 크다. 우리는 이것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 년간 꾸준히 싸웠다. 지금 그들이 원급 복적을 시킨다는 것은 임정수립을 앞두고 그 죄상을 陰蔽하려는 모략이다. 우리는 당연 이것을 분쇄하고 쓰러지는 국대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을 결의한다.
     공위에 보낸 메세지 요지
노예 교육을 강요하는 국대안을 만든 문교부내의 친일파 민족 반역자 계열을 삼상결정측에 의하여 즉시 처단하고 국대안을 철회시켜 민주 학원 건설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국대안을 반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하한 반인민적 문교 정책도 이를 배격한다. 이런 정책이 나오지 않도록 하자면 이제 수립되는 임정이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상 대상에 대한 민전 오대오 원칙을 지지하며 임정을 인민위원회 형태로 할 것과 학원도 선거에 참가할 수 있도록 민전 행동 강령에 의하여 선거가 시행될 것을 요망한다.
  • 1947년 6월 25일 <노력인민> 마틴 씨의 復職- 學統서 성명 요구

@실제날짜:470624

문교 당국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몰아내라는 요구는 비단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인민의 절실한 요구의 하나인데 도리어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인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서울시 학무국 미인고문 마틴 씨가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학통에서는 지난 24일 마틴 씨의 복직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 메데 행사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학생을 정퇴학 시킨 것은 노예 교육의 표본이라고 경고하는 동시 이들 학생을 즉각 복교시키라는 마틴 씨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직 처분한 것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책동이다. 문교 당국은 가급적 속히 마틴 씨를 복직시키고 한편 반동분자 매국노를 숙청하여야 할 것이다.
  • 1947년 6월 26일 <독립신보> 반탁시위한 학생 처분안, 교장과 직원은 시에서 직접 처분- 김시장 담

@실제날짜:470625

지난 5월 1일 메데 기념 行事에 학생으로써 참가하였다 하여 학생이 정치 집회에 참가함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시내 각 남여 중등학교에서는 참가 학생에 대하여 퇴학 또는 정학 처분을 하여 일반을 물론 이러한 처사는 비민주적이니 처분 학생을 즉시 복교시키라고 주장한 시학무국 미인 고문 마틴 씨의 전출설 등 일반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며 아직 기억에도 사라지기 전에 이번에는 반탁 시위에 중학생이 참가하였는데 이에 대한 당국의 처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시장 김형민 씨는 25일 오전 정례 회견석상에서 무허가 반탁 데모 등에 관한 출입기자단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응답이 있었다. 
문: 지난 23일의 반탁 시위는 당국의 집회 허가가 있었는가? 무허가 집회라면 그 대책은 여하하며, 第二高女, 漢城高女 그밖에 중학생들의 시위참가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답: 23일 반탁시위는 당국의 집회허가가 없었다. 무허가 집회에 대한 대책은 시내 치안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경찰에서 마땅한 조치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시로써는 당일 책임자 체포와 해산을 경찰에 위촉하였다. 윌슨 시장과 나와 어제 수도청장 장택상 씨를 만나 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더니 장청장은 러취 장관 및 그밖에 상사의 명령으로 해산시키지 않았다는 변명적 답변을 함으로 방금 그의 진의를 조사하려 한다. 학생들의 정치 참여는 불가하며 각 학교의 시위 학생 처벌안을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학생이 참가한 학교는 교장도 책임이 있고 이를 인솔한 교원은 시에서 직접 처리를 하겠다.
  • 1947년 6월 27일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 단원들과의 회의

미국무성은 한국에 파견되었던 교육 및 정보조사단 참가자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가졌다. 한국교육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조처들의 필요성, 한국인들의 남다를 교육열등이 거론되었다. 미국인 전문가 8-20명을 한국에 파견하여 단기 교육 과정을 개설하는 문제가 논의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의 미국 파견 유학은 한계가 많다는 지적도 있었다.[161]

  • 1947년 6월 27일 <노력인민> 京畿女中 問題 去益 惡化
메데에 참가 학생에 대한 부당한 처사로 일반의 비난이 자자한 경기여중에서는 그 동안 후원회장 원덕상 씨가 박교장의 비교육자적인 처사에 격분하여 3차례에 걸쳐 교섭한 바 지난 17일에 이르러 '퇴학생 3명 정학생 5명 전원을 복직시키되 퇴학생만은 시일을 요한다'고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학고 다시 17명 학생을 근신 처분에 처하고 '자진해서 퇴학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며 교원들을 시켜 수업을 오전 중에 마치게 하고 오후는 가정 방문을 하여 '박교장을 지지하라'고 권고하고 다닌다고 한다. 이에 원후원회장과 이 이사들도 동시 사임하였으므로 25일 동 여중 정퇴학 학부형 일동은 '양심적인 교원은 다량으로 파면되고 퇴학생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처사를 못하는 학무 당국의 맹성을 촉구함과 동시에 학원의 민주화 유지 후원을 위하여 일반 학부형의 궐기를 요청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주일 안으로 일반 학부형회를 소집할 것이라 한다.
  • 1947년 6월 27일 <독립신보> 경기여중은 의연 분규 - 호별 방문하고 박교장 지지를 권유

@실제날짜:470624

지난 5월 메데 참가 학생에 대한 정·퇴학 문제는 교육계에 큰 파문을 던졌을 뿐 아니라 사회 각계의 물의가 분분한데 경기여중 정·퇴학생 학부형 일동은 지난 24일 동교 박교장의 비민주적 처사를 지적하고 학교 분규를 적절히 처사못하는 학무 당국의 맹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학원의 민주화와 유지 후원을 위하여 일반 학부형의 궐기를 요청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해괴한 일은 지난 19일부터 전교생에 대하여 오전만 수업을 시키고 오후에는 전교원을 지역별로 분담 동원시켜 생도들의 가정 방문을 하여 교장을 지지하라는 권고를 하고 다니는 처사에 이르러서는 언어도단으로 학부형들은 물론 일반의 물의가 분분하여 교육계를 위하여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한다.
  • 1947년 6월 27일 <동아일보> 入學難 緩和코자 夜間中學 開設
우선 12교 20학급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중등학교 입학난을 완화시키고자 대책을 강구 중인데 우선 시로서는 야간중학을 전면적으로 개설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시계획으로는 금년 신학기에는 야간중등 54학급을 개설할 계획인데 국고 보조 관계로 전부 실현은 가망 없고 그중 최저 20학급만은 신학기까지 개설할 방침이라고 하며 이번 야간중학으로 개설 예정인 학교는 경기사범, 경기중학, 경복중학, 경동중학, 용산중학, 경성농업, 경기공업, 성동공업, 경기상업, 덕수상업 등 12교에 달하고 여자중학은 야간 개설을 당분간 보류하기로 되었다.
  • 1947년 6월 28일 <동아일보> 京畿道敎育會서 28日 評議員會
경기도교육회에서는 28일 오전 10시부터 평의원회를 개최하는데 협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본도 교육회로서 미소공동위원회 협의에 참가할 의견
2. 제6차 미소공동위원회 공동결의에 대한 자문요청의 탐구
기타사항
  • 1947년 6월 30일 Miller 박사 한국의 고등 교육 발전을 위한 제안

문교부의 고등교육 고문 Edwin L. Miller 박사는 문교부 고문 Underwood가 제기한 "한국에 있어서 고등 교육의 발전을 위해 취해야 할 교육적 조치들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한국의 고등 교육 발전을 위한 제안을 하였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대학 교육을 위한 현대적 기술과 방법, 민주적 行政조직의 개발 및 발전 2. 도서관 및 관계 정책 개발 3. 훈련된 교수 확보 4. 한국어로 된 대학 교재의 개발 5. 학회의 발전 6. 대학의 사회 봉사 및 성인 교육에 대한 책임 강화 7. 전문 교육 특히 과학 교육 발전 8. 대학 전용 건물의 新築[162]

  • 1947년 6월 32일 문교부 고문 Underwood "education in Korea" 제출

문교부 고문 Horace G. Underwood 박사는 미군정하에서의 남한에서의 교육 실정을 소개하는 보고서 "Education in Korea"를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언더우드 박사는 점령 초기의 일본인 교사 및 관리의 추방, 학교의 재개, 교과서 문제, 학제 변경, 학생의 양적 변화, 중학교 입학시험, 성인 교육 현황, 그리고 한국인들의 교육열 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163]


1947년 7월

  • 1947년 7월 1일 <한성일보> 마틴 씨에게 視務停止- 이학무국장과의 알력이 原因
메이 데이 기념행사에 학생들이 참가하였다는 문제로 인하여 배화여중을 위시하여 시내 여학교에서는 수십 명의 학생을 처벌하고 수명의 교유까지 파면시키는 등 일대 불상사를 빚어낸 사실이 있자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는 동 사건에 대하여 수차에 걸쳐 학원의 민주적 교육 방침을 역설하고 학생을 처벌한 일부 완고한 교육자에게 각성을 요구하였던 바 그 후 서울시 김市長은 마틴 씨는 실무 정지를 당하였다고 언명하였는데 동 사건을 탐문한 나에 의하면 마틴 씨 실무 정지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학생 처벌 문제가 있자 서울시 이학무국장과 출입 기자와의 회견이 있자 이국장은 기자단으로부터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를 회피하고 마틴 씨로 하여금 답변을 하게한 사실
▲ 경기여중에서 개최된 시내 남자 중학교장회의 석상에서 마틴 씨가 14조항에 걸쳐 민주 교육 방침을 시달하고 각 교장들에게 처벌당한 학생을 복교시키기를 권고한 내용은 사전에 이학무국장과 충분한 합의로써 말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시학무국 당국의 일부로부터 마틴 씨가 이국장의 존재를 무시하고 학교 분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독단적으로 처단한 것처럼 수차에 걸쳐 문교 미인 최고 인사 집행관에게 전언된 까닭이라 한다.
  • 1947년 7월 2일 문교부장 고문 미소공위에 의견서 제출

과도정부 문교부장 고문은 미소공동위원회 제2소위원회의 미국측 대표로부터 교육에 관한 자문 요구를 받고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질문과 답변 개요는 대략 다음과 같다. C. 1. Education - "Whar educational program should be adopted and developed in Korea in the following fields?"

   (a) 성인 문맹인구의 해소
   (b) 초급학교 의무취학 제도
   (c) 중등학교 교육의 개혁
   (d) 고등 교육의 개혁
  2. "What program should be established to train Korean specialists and technicians to fill all necessary positions in economic and governmental positions?"
   (1) 정부 관리의 현직 교육을 위한 기관 설립
   (2) 단기 산업 및 기술 연수과정의 개설
   (3) 실습제도의 도입
   (4) 현재의 직업 및 기술 교육 프로그램의 강화
   (5) 해외 유학 
  3. "What measures should be taken to promote the development of national culture, art and allso of science?"
   (1) 검열제도의 개선
   (2) 예술 및 기타 공예 분야에서의 국가 포상제도 도입
   (3) 전망있는 공예분야를 선택하여 지원
   (4) 현대적 시청각 기자재의 활용
   (5) 공공시설의 사용에 대한 종교적, 이념적 차별 철폐[164]

  • 1947년 7월 2일 <독립신보> 중등교 입학지원자- 남자는 6배 여자는 3배 정도
서울시내 각 중학교 신학기 입학 지원자수는 작년에 비해 별다른 것은 없었으나 지난 6월 1일부터 30일까지 각 학교 지원자수는 다음과 같다. 
   학교명          모집인원        지원자 
   경복중학        200             994 
   서울중학        200             1289 
   경기공업        200             1017 
   무학여중        180             216 
   중앙중학        150             741 
   진명여중        100             330 
   덕성여중        150             614 
   대동상업        150             261 
   경동중학        200             838 
   흥산중학        200             2097 
   경기여중        200             650 
   휘문중학        150             865 
   숙명여중        150             568 
   동덕여중        150             520 
   중앙여중        120             300 
   덕수상업(주)    100             305 
           (야)    100             202 
  • 1947년 7월 2일 <한성일보> 마틴 씨 오늘 日本向 發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왜정 시대의 탄압적이며 완고한 교육 방침에 침투한 일부 교육자들에게 민주주의적 교육 방침을 역설하다 문제가 된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가 시무 정지를 당한 것은 누차 기보한 바이나 마틴 씨는 드디어 금 2일 오전 10시 열차로 일본 동경을 향하여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동 씨의 측근자 측의 말에 의하면 약 2주일 간 휴가로 조선을 떠난다 하며 한편 동 씨가 떠나기 전 모모 학무 당국 관계자 수명에게 마틴이라는 이름은 잊어버려도 좋으나 내가 역설하던 민주 교육 방침만은 잊지 말기 바란다는 의미 심장한 작별의 인사가 있었다 한다.
  • 1947년 7월 3일 <노력인민> 中等學校 入學査定制의 非民主性- 敎育者協會서 指摘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조선교육자협회에서는 입학사정을 공정히 하라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一. 국민학교 조사서를 좋게 하기 위하여 갖은 '불순한 교제'가 성행되는 결과로 권세가와 자산가의 子女가 우위를 점한다는 것
二. 과거 경험에 의하면 국민학교 조사서와 아동의 실력과는 상부하지 않는 바가 많다. 특히 권세가와 자산가의 子女의 성적이 그러하다.
三. 각 국민학교의 학력 수준은 동일하게 취급하기 곤란하다는 것. 즉 을학교의 일등생의 성적이 갑 학교의 10등생만 못할 수 있다.
등을 지적하고 국민학교 조사서에만 편중함은 옳지 못하다. 일제 잔재가 세도하고 있는 남조선에 있어서는 사무 간편이라는 구실로 일제식 그대로 교장 독재를 하거나 또는 반민주교육적 사상적 편행으로 우수한 아동을 배제하는 암흑을 빚어내어 민족의 앞날을 그르치게 함과 같은 일이 있었서는 안될 것이다.
  • 1947년 7월 3일 <노력인민> 짓밟힌 師弟道- 교장 교원 경찰이 아동에 테로

@실제날짜:470526

용인군 백암소학교 윤정림(용인군 백암소학교장 尹丁林), 박한영, 박영근 양 교원은 철부지 아동들을 적색운운하여 고문, 구타로 아동을 혼도케 한 사실이 있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지난 5월 26일 박한영, 박영근 두 교원은 30여 명 아동을 무수 난타하여 그중 로중호 군은 다량의 출혈로 혼도하였다.
2. 이에 부당성을 말하였다 하여 허수철 군을 정학시켰다.
3. 그러던 중 지난 6월 4일 밤 8시경 부터 교장 윤정림은 아동 김두식외 1명을 사택에 불법 감금하고 부젓가락으로 위협하며 지난 3월에 학교에다 '일제 정신을 버려라' 등의 삐라를 부친 자를 추궁하여 악랄한 고문을 하였다.
  • 1947년 7월 3일 <한성일보> 스미스 씨 취임- 시학무국 고문
메이 데이 행사 이후 학원의 민주 교육 방침을 역설하던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가 시무 정지를 당하여 작 2일 조선을 떠난 것은 작보한 바이나 그의 후임으로 후생국 고문으로 있던 스미스 대위가 학무국 고문으로 착임되었다는데 말썽많은 학무국에 중요한 자리이니 만치 일반 기대가 크다.
  • 1947년 7월 4일 <동아일보> 어린이 마음 졸이는 中等校 入學試驗 昨日부터 實施
3일 서울시내 각 남녀 중등학교의 입학시험이 일제히 개시되어 광복 조선의 새 주인공이 될 우리 어린이들의 가련한 경쟁은 마침내 벌어진 것이다. 이날 이른 아침 어린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님 그리고 은사의 격려를 받으며 그들이 꿈에 그리던 중학교의 교문을 들어갈 때의 그들의 감개는 또한 무량한 것이었으니 유일한 소원은 "합격" 그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금년도 시험과목은 예년과 그 성질, 내용을 전혀 달리하여 어린이의 지능 정도를 고사하는 것으로 간단하고 알기 쉬운 문제들 뿐이었다.
  • 1947년 7월 4일 <한성일보> 難解의 知能 考査 出題- 학부형들의 논의 藉藉
서울 새내 각 남녀 중등학교 입학 시험의 경쟁율은 서울중학의 6배반을 비롯하여 거의 6배를 돌파하는 심각한 현실상을 보이고 있는데 금 년에 첫 시험으로 시행하게 된 소위 지능고사의 출제 경향은 어떠한가? 숙명여중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시험을 오전 중 두 시간 소위 지능 필기 시험이 있은 후 체격 검사가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시험장에서 나오는 아이의 무기력한 표정은 기다리던 학부형에게 실망을 주어 긴장된 시험장이었다. 이날 지능 필기 시험 문제는 광범위한 문제로 86 문제를 두시간에 제한하였는데 그중 일부 시험 문제 내용은 우리나라 정부는 누가 세워야만 되는가, 미소공동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등 국민학교 졸업생으로서는 무리치 않을까 생각되는 정치적 요소를 가진 문제도 있어서 부형들의 논의가 자자한 바 있었다.
  • 1947년 7월 4일 <한성일보> 천진한 동심 燒獄- 시내 중등교 입시 개시
보풀어 오른 어린 가슴의 고동이 높아져서 연필을 달리는 손끝에 가볍게 경련을 일으킨다. 심각한 시험 지옥의 좁은 관문을 헤쳐 나가려고 허덕이는 가얇은 동심과 따라온 부형들의 안타까운 표정의 雙奏曲- 어제부터 서울 시내 30여 남녀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은 일제히 시작되었다. 해방 후의 향햑열 팽창과 아울러 여기 서울중학의 모집 인원 2백 명에 대한 지원자 1,289명으로 6배 반의 경쟁율! 운명의 검은 과연 어느 누구 머리 위에 합격의 거룩한 황금관을 씌워주려는지?
  • 1947년 7월 5일 <동아일보> 醫大 專門部의 不祥事- "學士號"問題로 學生이 敎授 毆打

@실제날짜:470702

서울국립대학교 의과대학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 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학년말 시험이 끝난 뒤 許珪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前 京醫專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 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前醫大)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교수와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얻게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불연이면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施行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 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 예과로 가서 2년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하고 오후에는 학장 沈浩燮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
醫專, 醫學部 出身 同一資格줄수 없다 : 醫大 當局 談
학년말 시험이 지난 2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전전날인 23일부터 학생들간에 불온한 기색이 보이더니 드디어 지난 2일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의전 출신자와 의학부 출신자에 대해서 동일한 자격을 인정한다면 다른 단과대학 내의 전문부 학생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조치를 하여야 할 것이므로 매우 난처한 문제이다. 여하튼 暴行한 학생들은 그냥 방치할 수없음으로 8명은 퇴학에 169명은 무기 정학에 처하기로 하였다.
學校 當局에 一任했다 : 文敎部 談
국대에 관한 것은 국대 당국에 일임하였으니 국대 당국에서 선처할 것이다.
  • 1947년 7월 7일 <노력인민> 朝鮮民主主義 臨時政府의 敎育 文化 政策

@실제날짜:470704

자문 1. 좌기 각 항에 대하여 여하한 교육안을 채택하여 발전시킬 것인가
답신
 ㄱ 장년층의 문맹퇴치
  A 대책안
   성년층의 문맹퇴치는 일국 교육의 직접적인 ○○으로서 일은 민주주의 정치 사회단체의 자주적인 사업으로서 상호협력하여 급속한 기간내에 문맹퇴치를 ○하기로 한다.
  B 이유
   조선의 문맹률은 전국적으로 칠할 이상이며 특히 여자에 있어서는 구할 이상에 달한다. 그러므로 단기간에 문맹을 일소하는 것은 지난한 사업이며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단순히 정부의 서업으로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단체가 주체가 되어 인민의 힘으로 추진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며 문맹퇴치는 동시에 생○○과 결부된 계몽운동과 병행되어야 효과적인 것이므로 가능한 한 직장과의 부단한 관련하에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대책이 필요 되는 것이다.
 ㄴ 초등의무교육
  A 대책안
   一. 초등교육은 즉시 실천하여야 하며 오년제로 하고 만 칠세 입학 만 십일세에 졸업으로 할 것이다.
   二. 의무교육에 관한 경비는 국가부담으로 하되 의무교육세를 부과하여야 한다.
   三. 의무교육 실시에 따른 학교 내용 시설의 증설은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1. 이부교육제를 실시할 것(2만 학급이 증설됨)
     2. 삼개년 계획으로 삼만 학급을 증설한 것
   四. 의무교육 실시에 따른 교원의 증가를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1. 8.15전의 사범학교의 교원 양성 능력을 3배로 증대시킬 것이며 이것은 현 사범학교의 확충 및 신설에 의해야 할 것
     2. 초등교원 임시양성소를 사범학교 기타 중등학교에 부속시켜 중등졸업 학력 이상을 가진자를 단기 강습시켜 초등학교 교원을 대량 양성한다.
   五. 교육내용은 일본 통치 시대의 노예화적 기계적 교수과목 및 방법을 개혁하여 지육 체육의 균형적인 발달을 기하는 동시에 직장을 통한 실제교육제를 실시하여야 한다.
   六. 생도의 자치적 조직을 육성함으로서 사회적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ㄷ 중등교육
  A 대책안
   一. 중등학교는 초등학교 졸업자 및 동정도 자격자를 입학시키며 수료기간은 4년을 원칙으로 한다.
   二. 중등학교를 일반 중등학교, 중등전문학교, 사범학교의 3종으로 하고 중등전문학교 설립과 사범학교 증설에 치중하여 8. 15이전의 중등교육 각 학교를 재편성하고 이를 증설하여야 할 것이다.
   三. 중등 각 학교에 따른 교원의 보충은 전문 정도 이상의 학력 소유자를 자격 검정 후 대량으로 채용하여 단기 훈련한 후 충당하기로 하고 기술계통 교원은 기술자의 겸임으로서 충당하여야 한다.
   四. 일반 중학교는 종래의 5년제 중학교를 4년제로 개편한 것이며 종래의 순연한 대학 예비학교적 교수내용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야 한다.
   五. 중등 전문학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서 창설하여야 한다.
     ①. 중등전문학교는 초등졸업자 또는 그와 비등한 학력소유자를 입학시켜 중등직업인 교육기관으로서 行政, 경제, 기술, 문화, 각 방면의 중급 자격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②. 일본 통치시대에 있던 실업학교(농업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 수산학교, 직업학교, 여자상업학교, 실업보습학교, 여자실업보습학교)와 일부 중학교를 각종 기술의 단과 또는 종합학교로 재편성 또는 신규 증설함
     ③. 교육내용은 기초과업과 전문과를 병설하되 실업시간은 많이 지게함
     ④. 수업연한은 4년으로 하고 수료자는 1년 의무연한 이상 실무에 취한 후 대학에 진학함을 원칙으로 함. 노동자 기타 야간 근무자를 위하여 설립된 야간 중등 전문학교에서는 수료기간을 1년 연장함
   六. 사범학교는 초등 의무교육 실시에 많이 필요되는 교원수에 적응하게 확충 또는 신설할 것이다.
   七. 근로자 교육을 위하여 소학교 졸업 정도를 자격으로 하는 좌와 같은 공장학교을 설치함
     1. 숙련노동자 양성을 위하여 수업기간 2년의 '제일 공장학교'를 설치함
     2. 다인원의 종업을 요하는 직업(석탄, 광산, 야금, 建築사업)의 노동자 양성을 위하여 수업시간 約 6개월의 제이공장학교를 설치함
 ㄹ 고등교육대책안
  一. 중등학교 졸업자 또는 그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를 입학자격자로 하며 수업기간은 4년으로 한다.(단 의학은 5년제로 함.)
  二. 기술자교육에 치중하되 이공계통 교육시설을 확장하여야 한다.
  三. 38이남에서의 국대안을 철회하고 현 국대안 구성 각 대학은 그 특수성에 의하여 개편하여 그 외의 고등교육시설과 합쳐서 고등교육의 학제를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1. 일본 통치시대에 있었던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개칭함
    2. 경성대학 3학부는 개편하여 사회(정치, 법률, 경제, 문학)학부, 이공학부, 의학부, 삼학부 종합대학으로 한다.
    3. 경성대학 예과는 기술계통의 대학으로 개칭함
    4. 관공립 전문학교 및 사립 전문학교 중 기술계통학교는 존속 발전시킴
    5. 그 외의 사립 남여 전문학교는 가급적 그 설비와 전통을 참작하여 발전시킨다.
  四. 각급 대학 졸업자 중 우수한 자 또는 그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는 대학원에서 연구케 한다. 대학원은 '과학원'에 직속된 기관으로서 학술의 연구와 고등교육 동량의 양성 기관으로 한다.
  • 1947년 7월 9일 <동아일보> 醫大事件 問題化 - 敎授, 學生 總退陣
新學期앞둔 學園의 不祥事
"학사호"문제로 국립대학 의학부내에 갈등이 생겼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 대학 의학부 구 경의전(舊京醫專) 계열 학생 전원은 지난 30일 일제히 퇴학원을 제출하였는데 뒤이어 구 경의전 계열 교수 吳元錫 씨 등 8명도 총사직을 결의하고 지난 2일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여 또한 의학부내에 암운을 던지고 있어 새학년기를 앞둔 때가 때인만큼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서울의과대학에서는 제1부 의전(舊京醫專) 학생이 의학부 학생과 동등한 자격을 요청하여 종래부터 국대 당국과 교섭하여 오던 바 지난 28일 국대 총장으로부터 요구 조건이 거부되어 격분한 구 의전 계열 학생이 국대로 편입하던 당시 구 성대계열 의학생과 동등한 취급을 한다는 조건 아래 쾌히 편입되었는데 그 후 국대 당국은 구의전 계열 학생에 대해서는 전문부 취급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교수들은 구의전 계열 학생들에 대하여 차별적 대우를 하고 심지어 강의를 중지한 예까지 일어나게 되어 그동안 이 문제로 맹휴까지 있어 학원내에 두 학벌을 애워싸고 긴장과 묘한 공기가 떠돌게 되었다.
그런데 학년말을 앞두고 구 경의전 계열 학생은 지난 22일 학교 당국에 자격의 차별을 철폐할 것과 불연이면 예과의 과목의 보충 강의를 실시하여 시험에 패스를 한 자에 대해서만이라도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동시에 대학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 등을 요구하였던 바 지난 28일 동 요구 조건이 거부되자 구 의전 계열 학생들은 30일 전교생이 일제히 퇴학원을 제출하는 한편 지난 2일 구 의전 교수들도 책임상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差別 待遇 한 일 없다 : 朴副敎授 談
"학부로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이미 문리과 대학 예과로 편입시켰으며 현재 남아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부 진학을 희망치 않은 것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의학부 학생과 의전 학생 사이에 차별 대우를 한 적은 없다. 전문부 학생에 대한 강의를 한 때 중지한 이유는 전혀 시간이 없었던 때문인데 여하간 강의를 교수 자신이 직접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강의의 초안은 그 교수가 작성한 것이므로 그 교수를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融通性이 全然 없다 : 河在鳩 君 談
"일제 시대의 학제에 있어서도 선과(選科) 별과(別科) 등의 제도가 있어서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나 이와 동등한 자격을 획득한 자에 대하여서는 본과 출신자와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융통성이 있었거늘 항차 해방된 학제에 있어서 이처럼 융통성이 없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 같은 학교에서 강의에 까지 차별을 하는 비양심적 교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醫學部에 比해 遜色없다 : 宋助敎授 談
"이번 사건을 몇 몇 교수가 구 경의전계 학생에 대해서 강의를 중지하는 등 편파적 차별 대우를 한 데 기인한 것이다. 우리 규도계(圭道界)에 있어 성대 의학부 출신자에 비추어 경의전 출신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구 경의전계 학생의 요구에 당국은 선처해 주기를 바란다.
  • 1947년 7월 11일 <독립신보> 시학무국장에 李承宰 씨
학무 행정의 다난한 시기에 한동안 학교 문제의 곤난을 홀로 겪던 서울시 학무국장 이덕봉 씨는 일신상의 이유로 10일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는 문교부장실 행정官으로 있던 이승재 씨가 1일부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저번의 마틴 고문의 퇴임과 아울러 이덕봉 씨의 사임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 1947년 7월 11일 <동아일보> 敎育行政官 講習

@실제날짜:470721

문교부에서는 하기 휴가를 이용하여 7월 21일부터 6일간 사범대학 부속 여자중학교(전여자사범학교)에서 각도 敎育行政官에게 하기 강습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 1947년 7월 11일 <한성일보> 矛盾많은 新制度 中等入試에 與論 紛紛
어린 아동들이 중학 및 여학교의 입학시험으로 가슴조리는 좁은 문을 될 수 있으면 타개하고자 중앙 당국을 비롯하여 각 학교 위원들이 제정한 신제도 고사법은 과연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미 제1기 학교 입학자 발표가 있었고 제2기 학교는 금명간 발표하게 되어서 신제도법에 대한 학부형들의 시비가 자자한데 학교 당국 책임자의 비판에 의하면 과연 국민학교 소견표 500점 제도로 인한 지나치게 기계적인 석차 순제이므로 실력있는 우수한 학생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으며 용산중학을 제외하고는 일류 학교가 전부 제1기로 집중되어 수험생들에게 2차씩 수험 기회를 주려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못보게 되어 유감스러운 점이 적지않게 엿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학교 당국자와 학부형들의 의향은 과연 어떠한가?
실력고사에 방해- 신제도 내포한 모순 不少- 서울중학교장 金元圭 씨 談
물론 이번 신제도로는 가장 공평되게 하며 될 수 있으면 학생들의 지나친 준비 시험 공부의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그 주의가 있었으나 신제도로 말미암아 생긴 모순도 적지 않다. 엄격한 석차순과 국민학교 500점 제도는 그 학생의 실력과 소질을 고사하는 데는 도리어 방해물이 된다. 어느 학교를 물론하고 일차한 학생은 500점 즉 만점인데 시내 학교 70명 중 일차와 시골학교 약 20명 중의 일차도 그 차이가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석차순이라고 일차만을 뽑지를 않았다. 예를들어 이북서 일등하던 학생이 이곳으로 전학하기 때문에 40차를 하여 겨우 200여 점밖에 못받았다. 하지만 그런 학생의 필기 시험을 보고 그 소질이 인정되는 한 그 학생을 뽑지 않을 수 없다. 즉 제도가 새로 생겼다고 그것에 지배받지 않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데 우리 학교 당국자로서의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이번 국민학교 성적표보다 실력을 발휘하는 시험에 치중하였다. 석차 제도란 무용의 유물이 되겠으니 곧 없앨 필요가 있다.
국민교 성적 비중 불만- 학부형 朴秉熙 씨 談
우리 아이는 1년전에 38이북으로부터 생소한 학교에 전학해 온 관계로 이북 학교에 있을 때에는 첫째 둘째든 것이 갑자기 성적이 얼마간 나빠졌다. 그렇지만 실력만은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을만하여서 이번 입학 시험에 낙관을 하고 있었던 바 시내 모 중학을 시험한 결과 제1차에 떨어지고 말았다. 입학 시험만은 상당히 잘 받았는데 떨어진 것은 국민학교 성적을 편중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뿐아니라 합격자 발표를 보고 수많은 학부형들이 몹시 불평을 말하고 있었다. 학교차가 심한 국민학교 성적을 편중하려면 입학 시험을 보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 1947년 7월 12일 <동아일보> 初等敎員 音樂講習
문교부에서는 초등학교 음악교사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하기 음악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수강 희망자는 8월 1일 상오 9시까지 계동 중앙중학교로 집합할 것이며 지방 수강자의 편리를 보아 숙사도 준비되었다 한다.
  • 1947년 7월 12일 <동아일보> 韓國學生同盟 聲明
한국학생동맹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대의명분을 망각하고 대세에 순응하려는 자는 이기적 인간으로 민족의 적이다.
▲ 경찰은 파괴와 폭동을 꿈꾸는 순사를 숙청하라.
▲ 자주독립을 촉진하여 민생을 구출하라.
  • 1947년 7월 12일 <한성일보> 民主敎育 推進
(워싱턴 11일발 AP합동) 전번 조선 일본 등지의 고아 구제 사업을 시찰한 후 당지에 귀환한 쭈마나간 신부는 조선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만약 미국이 민주주의의 교육을 추진시키지 못한다면 구라파와 동양은 공산주의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2. 양분 점령된 조선의 현 사태는 비통한 바 있는데 만약 미국이 남조선으로부터 철수한다면 북조선 세력이 남하하여 그의 병균을 전파시킬 것은 의심할 바 없다. 3. 북조선으로부터 매일 2천 명의 인민이 남조선으로 모여 들고 있다.
  • 1947년 7월 13일 대학영어교수협의회 제2차 회의 개최

대학영어교수협의회(Association of College Teachers of English)는 7월 13일 제2차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Streeter 박사가 "Nationalism in Early American Literature"라는 주제하에 강연을 하였다.[165]

  • 1947년 7월 13일 문교부 주간 업무보고(47.7.7-12)

문교부 고문 Horace H. Underwood는 주간업무보고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Textbook Bureau Office of Administration Elementary Schools Higher Education Teacher Training[166]

  • 1947년 7월 13일 <동아일보> 建設學生聯盟서 夏季啓蒙隊 組織
전국건설학생연맹에서는 문맹퇴치와 사상계몽을 위하여 하기 건설학생계몽대를 4대로 편성하여 남조선 각지에 파견키로 되어 15일 서울을 출발하여 8월 30일 귀경할 예정이라고 한다.
  • 1947년 7월 13일 <동아일보> 校門밖에 나선 새일꾼 560名 - 國大 一回 卒業式 擧行

@실제날짜:470711

서울국립대학에서는 신교학제도에 의한 이나라의 새일꾼 560명을 처음으로 교문 밖에 내놓았다. 11일 상오 10시부터 동 대학 문리과 강당에서 제1회 졸업식이 擧行되었는데 이날 식장에는 徐載弼 박사 헬믹 군정장관 대리를 비롯하여 조소앙 씨 등 각계 대표 요인 다수가 참석하였었다. 그런데 금년도 졸업생을 과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문리대 학부 40명, 동 전문부 예과 72명, 동대 전문부 47명, 법대학부 30명, 공대학부 8명, 전문부 95명, 사대예과 160명, 상대학부 8명, 전문부 12명, 치대전문부 36명, 농대예과 52명
  • 1947년 7월 13일 <동아일보> 學齡兒童 收容코자 三部制를 計劃
경기도내 초등 국민학교의 금년도 졸업생은 공립 386교 사립 16교 도합 402교의 남자아동은 1만 6천 9백 30명, 여자아동은 7천 1백 15명 도합 2만 4천 40명이 오랜 동안 뛰고 놀던 그리운 교문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새 학년도에 새로히 취학할 적령아동의 총수는 도내 6만 1천 3백 20명인데 도 학무 당국에서는 전 아동을 수용할 계획으로 방금 3부제 교수까지도 계획 중이다.
  • 1947년 7월 15일 <독립신보> 교육연합회 조직

@실제날짜:470711

지난 11일과 12일에 문교부 교화국에서는 남조선 각도 학무국장회의를 개최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결정이 있었다고 한다. 
1. 5만 교원을 총망라하여 조선교육연합회를 급속히 지역과 직역별로 결성할 것. 
2.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 수업료는 일반적으로 인상할 것. 
3. 올림픽 선수 파견 자금으로 학생 상대로 일천만 원 예산을 세우고 매인당 5원 이상 10원 이내의 기부를 받을 것 등이다.
  • 1947년 7월 15일 <동아일보> 可嘆 學生風紀 - 首都廳서 嚴重 團束을 言明
해방 이후 일부 학생들의 무질서한 행동은 일반 사회의 비난과 동시에 관계 당국의 철저한 감독과 지도가 요망되고 있거니와 요즘 수도경찰청에 집계된 풍기 위반 중 학생 관계가 최고점에 달하고 있어 또한 교육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중에도 중학생 사고가 제일 많은데 6월 중의 사고 건수만 230여건으로 극장 출입과 남녀 학생의 공원 밀회 등이 자장 주목된다. 이에 경찰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맹성을 요망하는 한편 금후 취체를 강화하여 학생풍기 사고 방지에 전력을 다하기로 되었다.
  • 1947년 7월 15일 <동아일보> 敎科書 配布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40종류의 교과서 946만 5천 4백 86부를 인쇄하여 남조선 각지의 교육 시설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 1947년 7월 17일 <동아일보> 未就學 兒童 一萬 三千 - 金 市長 談
不良兒, 癩患者 收容 計劃
서울시 김시장은 16일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시정 제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學齡 兒童 問題 : 적령 아동(만 6세) 1만 5천 2백 93명, 미취학 아동(만 7세 - 만 11세) 1만 3천 4백 77명 도합 2만 8천 8백 70명이 등록되었는데 현재의 시내 각 학교 시설로 보면 그들을 전부 수용할 수가 없어 별다른 새 계획이 없는 한 동대문, 성동, 영등포 등 주변 지대는 3부제를 면치 못할 것이다.
不良者, 癩患者 : 그야말로 부모 또는 의지할 곳이 없는 부량아는 대략 4백 명 정도인데 이들을 경찰과 연락하여 머지 않아 적당히 수용할 방침이다. 그리고 문둥병 환자의 보고수자는 約 4, 50명인데 이들 역시 적당한 시기에 수용소에 수용하겠다.
  • 1947년 7월 17일 <동아일보> 學聯 啓蒙隊 23日 出發
전국학련에서는 기보한 바와 같이 하기 지방 계몽대로 다음과 같이 파견키로 되어 23일 서울을 출발한다.
   ▲ 중앙대 300명 
   ▲ 지방대 50명(인천, 대전, 청주, 대구, 부산, 전주, 광주)
   ▲ 각도 주요지구 연맹의 50명 (경기 : 개성, 수원, 인천) 충남( 대전, 공주, 서산) 충북(충주) 경남(진주, 마산) 경북(안동, 경주) 강원(강릉, 삼척, 평창) 전남(목포, 순천) 전북(정읍, 이리, 군산) 
   ▲ 특별 유세대 : 각 주요 도시 순회, 특별 영화 계몽대
  • 1947년 7월 18일 <동아일보> 獸醫科大學 開校
수원농과대학 수의과를 분리하여 조선 최초로 수의대학이 설립되어 9월부터 개교하기로 되었다. 즉 동 대학은 4년제로써 연구과목은 내과, 외과, 병리학과, 藥物學科, 細菌學科 등이며 앞으로 50명씩의 졸업생을 내어 조선내 家畜의 육성과 방역에 많은 공헌을 할 것이다. 더욱 동 대학 직영으로 대소 동물의 간호와 치료를 담당하는 병원을 개설하기로 되었다.
  • 1947년 7월 18일 <동아일보> 義務敎育에 月謝金 免除 - 國際敎育會서 決議
제네바 17일발 AP 合同방금 당지에 개최 중인 국제 학교교육회의에서는 45개국 대표 참석하에 15일 중국대표의 보고 급 미국, 호주에 있어서의 교육 발전 상태에 관하여 토의한 바 있었는데 한편 동회에서는 각국 문교상에 대하여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에는 수업료를 부담시키지 말라는 권고 성명을 전달할 것을 가결하였다 한다.
  • 1947년 7월 18일 <동아일보> 學生大會 열고 決死 反託 決意
지방소식 : 安東支部 전국학생총연맹 경북 안동지부에서는 중앙본부원 파견을 맞아 애국학생대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 결사 반대와 학원내의 반동분자 맹휴 배격안을 걸어 호소한 바 전회원이 찬성하고 일층 애국정신 발로를 굳게 맹세하였다.
  • 1947년 7월 18일 <동아일보> 合格해도 就學不能 - 學園에 暗雲이 去來
入學金 徵收는 當然하나 寄附金 强要함은 不當
붙기 어려운 입학 시험을 보아 실력 시험에는 당당히 합격이 되었으나 과연 입학을 할려고 해도 "내는 돈"의 액수가 너무나 엄청나게 많아서 마음을 조리는 부형과 기뻐야 할 합격 아동이 생기를 잃고 있어 중등 교육계에 커다란 암운을 미치우고 있다.
즉 시내 대부분의 중등학교의 입학금을 살펴보면 수업료, 후원회비, 용지대, 학생회비 등이 4천 원 정도에 달하고 따로이 책상값으로서 3천 원, 도합 7천 원 정도를 징수하는 외에 이러한 입학 수속금과 아울러 기부금으로써 대개 1만 원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4천 원 정도의 소위 입학금에 대하여서는 별로 이의가 없으나 책상값으로서 3천 원 정도의 금액과 1만 원 이상의 기부금을 "입학"이라는 절대적 시기를 이용하여 징수하는 것은 봉급자 및 일반 소시민 가정 출신의 어린이에 미치는 영향은 교육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며 자유 의사에 맡기어야 할 기부금을 실제에 있어서 강요하고 있는 것은 더우기 교육 기관의 과오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공립학교의 시설과 기구를 책임지고 주선하여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게 할 시당국자로서 입학금 접수 마감을 앞둔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여 시당국의 무성의, 무책임을 폭로하여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冊床값 寄附  强要 黙過할 수 없다 : 金市長 談
"어제(16일) 용산중학교의 어느 학부형으로부터 책상값 운운하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정식으로는 아무런 보고가 없고 책상값은 누가 받으라고 했는지 근거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기부금을 입학금 접수 시기에 학부형의 弱點을 이용하여 받는 것은 잘못이다. 더욱이 강요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다."
調査하겠다 : 李學務局長 談
"나는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자세히 모르겠으나 조사하여 부정이 있다면 적당히 처리하겠다."
寄附는 不當 : 權中等係長 談
“책상값은 시로서 승인했다. 그러나 기부금만은 자유의사에 맡겼으나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工夫못하죠 : 學父兄 談
"자식을 가르키려는 욕심으로 없는 돈을 각처에서 꾸어다 입학금 7천 원을 만들어 가지고 갔더니 기부금을 만 원 이상 내라고 하며 입학금을 접수 안해주니 어찌하면 좋겠소. 정 그렇다면 공부는 단념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아요."
  • 1947년 7월 19일 <한성일보> 입학 寄附金 강요말라, 문교부 지시- 中等校後援會聯合會도 組織
최근 중등학교의 입학 시험도 거의 끝은 맺고 수많은 경쟁자의 안타까운 얼굴을 물리치고 당당히 합격한 어린이들은 불타는 향학열과 장래의 사각모를 꿈꾸며 가득한 희망에 개교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한편 그 부형들은 입학과 동시에 예상외로 드는 모든 경비에 허덕이고 있다. 특히 말썽많던 기부금 문제도 부형의 정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내게 될 것이어니와 어느 학교에 있어서는 부당하다고 인정될 만한 기부가 요청되고 있어 생활 상태가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의 한 가지 걱정거리가 되어있는데 문교부에서는 18일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지시를 관하에 전달하는 동시에 기부금에 대한 폐단을 일소하도록 하였다 한다.
▲ 기부금은 절대로 강요하지 말 것
▲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 하여 입학을 절대로 취소하는 일이 없을 것
▲ 중등학교후원회연합회에서 회비를 결정하면 그 결정 이상을 받지 말 것
  • 1947년 7월 20일 <동아일보> 江原中學 全燒

@실제날짜:470710

10일 하오 5시경 돌연 강원중학교 북편에 원인모를 불이 일어나 전소되었는데 경찰 당국에서는 방금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일방 춘천 유지 50여 명은 긴급 협의회를 열고 동교 화재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여 달라는 탄원서를 경찰 당국에 제출하였다.
  • 1947년 7월 20일 <동아일보> 誠意있는 援助는 받되 寄附 强要는 不當
文敎部 各道에 警告
중등학교 입학 진학시기를 이용하여 학부형으로부터 입학금외에 거액의 기부금을 강요하는 폐단이 있음에 비추어 과도정부 문교부에서는 학교 증설 등으로 학부형에게 성의있는 원조를 청하는 이외의 일체 기부를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각도 학무 당국에 통첩을 보내어 새롭게 주의를 환기하였다.
  • 1947년 7월 22일 문교부 편수국 교과설 편찬 및 보급 실적 보고

문교부 편수국(Bureau of Textbooks)의 미국인 고문 Paul S. Anderson은 문교부장 고문에게 해방 후 현재까지의 교과서 편찬 및 보급 실적을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a. 27종의 국민학교용 교과서, 5종의 중학교용 교과서, 2종의 교사용 지침서가 집필, 출판, 보급되었다. 총 9,393,246권. b. 500,000권의 일어로된 국민학교 Home economics책이 배포되었다. c. 23권의 법원기록이 번역되었다. d. 한글로 된 사회생활과 6학년 교과서, 한글독본 4-1, 6-1, 교육심리학, 산수 1-2, Our Nearest Neighbor(Moon), 상과, Domestic Science 5-6 등이 인쇄 중이다. e. 한국인 교육자들을 위한 미국 교과서 센타가 서울의 국립도서관, 대전 사범학교, 그리고 부산 교육청에 설립되었다. f. 3,695권의 미국 대학 교재가 참고용으로 배포되었다. g. 종이 보급, 영어 책, 시청각 교재, 기타 실험설비에 대한 요구서가 마련되었다. h. 16,000권의 미국 도서- 소설 및 비소설-가 학교와 각 지방 교육청에 배포되었다. i. 문교부밖에서 집필된 교과서의 검정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차로 18종의 교과서가 중등학교 교과서로 인정되었다. j. 한글의 순화를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k. 일본어, 영어, 중국어로 된 교재들이 참고용 도서로 번역되고 있다. l. 교과서에 실린 사진, 지도, 삽화 등이 준비되었다. m. 민간 교과서 출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167]

  • 1947년 7월 22일 <동아일보> 光州師範에 또 不祥事- 學生이 敎師를 毆打

@실제날짜:470716

지난 16일 하오 9시경 모단체 소속 학생 15명이 목검, 곤봉 등으로 광주사범학교 기숙사를 습격하여 교유 2명과 동교 2년생 부영택 군을 무수히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였다하는데 경찰에서는 방금 주모자 5명을 체포하여 취조 중이라 한다.
  • 1947년 7월 22일 <동아일보> 光州西中學 全燒

@실제날짜:470719

지난 19일 상오 3시 40분경 광주서중학교 교장실 부근에서 돌연 발화하여 본 교사 1동을 전소하고 약 3시간만에 겨우 진화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조사 중이며 소방서원 1명이 순직하였다.
  • 1947년 7월 22일 <동아일보> 未就學 戰災兒童 27만을 突破- 戰災援護會 對策建議

@실제날짜:470715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에서는 해외와 북조선으로부터 남하한 전재 이재 동포들의 귀여운 자제 27만 명이 미취학 상태에 있고 또 경비의 과중한 부담으로 말미암아 9할 정도의 아동이 중도퇴학을 하고 있어 지난 15일 동원호회 위원장 김규식 박사 명의로 안민정장관에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였다고 한다. 
一. 남조선의 전교사를 개방시킬 것. 二. 소학교는 3부제 중등학교이상은 2부제로 실시할 것. 三. 2부 및 3부제에는 미취학 전재학생과 아동을 절대 우선적으로 입학시킬 것. 四. 전재학생과 아동에게는 수업료외에는 일체 경비를 면제 혹은 국가 보조로 할 것.
  • 1947년 7월 22일 <동아일보> 培材中學 秩序를 回復
배재중학에서는 지난 14일 다시 맹휴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학교에서는 어디까지든지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지난 14일에는 9명을 퇴학처분하고 학교질서를 회복하는 한편 교수를 시작하고 있다. 
辛校長事務取扱者談
학생본분을 지키지 않는 학생은 교육할 필요가 없다. 공부하고 싶은 학생만을 우리는 가르치겠다. 교원 중 편파적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면 처단하겠다.
  • 1947년 7월 23일 <동아일보> 渡美學生 學資問題로 文外務處長 美國에

@실제날짜:470722

외무처장 文章郁 씨는 22일 아침 8시 금포공항을 떠났는데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문박사는 미국내 각 대학에서 승인을 얻었으나 아직 조선과 미국의 환금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곤란을 받고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미국 시민이 보장하도록 각 방면에 활동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20명의 유학생이 미국에 가 있었으며 오는 8월 6일 33명이 "알트맹"호로 도미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7월 24일 <동아일보> 全國學聯서 安長官에 抗議

@실제날짜:470722

전국학련에서는 22일 安민정장관에게 빈번히 일어나는 테로, 살인 사건으로 학도들은 공포와 불안에 쌓여있으니 시급히 절절한 조치를 하라는 요지의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 1947년 7월 26일 <동아일보> 學生테로 - 講師를 毆打

@실제날짜:470720

지난 20일 서북청년회 朱仁煥 씨 등 강연대가 장흥초등중학교에서 강연을 마치고 휴게 중 동교 학생 約 15명이 곤봉과, 죽창, 단도를 가지고 습격하여 주씨 등을 무수 구타하여 빈사의 상태에 이르게 하였으며 가해자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 1947년 7월 27일 문교부에서 군정장관에게 교과서 실태 보고

문교부장 유억겸과 Aubrey O. Pittenger는 군정장관(Military Governor)에게 편수국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편수국은 공책과 시험 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폐지와 같은 모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 편수국은 3,138,000권의 책을 집필, 인쇄, 배포하였다. 3. 교과서의 가격을 계속 상승하고 있다. 4. 인쇄 예정인 교과서 원고는 많으나 이용 가능한 종이가 부족하다.[168]

  • 1947년 7월 28일 미국 전쟁성 민사국 ETC설립안 제출

미연방정부 전쟁성 민사국(Civil Affairs Division)에서는 대한 교육 및 정보 조사단의 보고서에서 건의한 Educational Training Center의 설립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I. 목적과 계획

   A. 목적
   B. 계획

II. 미국인 Staff

   A. Director
       a. 자격
       b. 의무
   B. Teaching personnel[169]
  • 1947년 7월 28일 중등학교 영어교사 강습

American Language Institute에서 주관하는 중등학교 영어교사 강습회가 7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개최되었다. 60명의 교사가 등록하여 영어 회화 및 발음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대전에서도 강습회가 8월 1일에서 14일까지 열렸다. 강사는 Miss Agnes Boner와 Miss Madeleine Gill, 주관은 충남 학무국, 장소는 대동여자중학교, 그리고 대상은 충남북 및 전남북 지역 영어교사라고 한다.[170]

  • 1947년 7월 29일 대학 교수를 위한 특강시리즈 결과 보고

교원양성국 고문 Richard W. Werth와 고등교육국 고문 Edwin E. Miller는 대학교수를 위한 특강 시리즈에 대한 결과 보고서를 문교부장 고문 Underwood 박사에게 제출하였다. 특강 참석자 수는 다음과 같다. 1차 : 75명 2차 : 30명 3차 : 20명 4차 : 16명 5차 : 14명 6차 : 취소(4-5명만 참석) 7차 : 취소 이번 특강을 통해서 드러난 문제점, 앞으로 이런 종류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준비할 때 유의할 점 등이 제시되었다.[171]

  • 1947년 7월 30일 Paul Goodman(중등교육 고문) 대전 부산지역 시찰

중등교육 고문인 Paul Goodman은 47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대전과 부산지역을 시찰하고 각 지역에 교과서 센타를 건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172]

  • 1947년 7월 30일 <동아일보> 文盲退治의 進軍 - 夏季 國學 運動 展開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도내 문맹퇴치에 대진군으로 하기 국학운동을 전개하기로 되어 8월 1일부터 9월 말까지 2개월에 걸쳐 도내 3천 8백여 부락에 강습소를 일제히 열기로 되었다. 강사에는 군, 면, 그외 관공서원을 비롯하여 국민학교 상급생, 중등학교 생도 등이 동원될 것이다.


1947년 8월

  • 1947년 8월 1일 군정청 영어교육 담당자 군정하 영어교육 실태 보고

군정청 영어교육 담당자 Monika Kohoe는 47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영어교육 실태에 대해 군정청 문교부장 고문에게 보고하였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A. American Language Institute B. Private English Schools C. Examination and Orientation of Students Going to the U.S. D. The Teaching of English at the College Level E. The Teaching of English at the Middle School Level F. Summary of Progress in English Instruction in South Korea G. Important Developments Anticipated in the Near Future[173]

  • 1947년 8월 1일 <노력인민> 復校方向으로 鬪爭 展開- 學生共鬪서 당국에 요구조건 제출

@실제날짜:470731

일제 잔재가 ○○한 반동적 노예 교육안 국대안의 철회를 위한 지난 (중략) 이에 우리는 민주정부수립을 앞둔 임정수립○에 있어서 교육의 민주화를 일층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복교하는 방향으로 적극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요구 조건
1. 전체 제적 학생을 무조건 복교시킬 것
2. 학생의 자치권을 승인할 것
3. 구교수를 복직시킬 것
4.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중지를 보장할 것
  • 1947년 8월 1일 <독립신보> 제적 학생 복교시켜라 - 국대안반대 학생투위서 성명

@실제날짜:470731

금년 2월이래 국대안 반대을 외치고 궐기한 7,000명 남여대학생 중 5,000명의 학생은 등록 거부 또는 당국의 제적 처분 등에 의하여 학원과 헤어져 있지 않을 수 없는 바 31일 국대안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앞으로는 복교하는 방향으로 투쟁 운동을 전개할 것을 표시하였다. 
1. 국대안의 철폐없이는 학원의 민주화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하에 우리는 당국의 과단성있는 실천을 요망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5,000명 학생의 학원외로의 逐出이 있었을 뿐이었다. 
2. 그러나 우리는 국대 이사회의 개편, 총장 경질 등의 일부 요구 조건 관철에 성공하였으며 우리의 투쟁은 애국적 투쟁으로서 전민족의 지지와 성원을 받아왔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교 당국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학원 파괴를 음모하며 진리의 전당을 반동 온상화하려 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의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이러한 경향을 시정 극복할 것을 언명한다. 
 1. 전 제적학생을 무조건 복교시킬 것 
 2. 학생의 자치권을 승인할 것 
 3. 舊교수를 복직시킬 것 
 4. 학원에 대한 경찰 간섭 중지를 보장할 것
  • 1947년 8월 4일 Harry B. Anstead 서울대 사태에 대한 보고서 제출

서울대학교의 Harry B. Anstead총장은 47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실제로는 7월 말까지: 편자)의 서울대학과 관련된 사항들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내용은

1) 겨울방학 중 두개의 단과대학이 휴교조치되고 관련 학생들은 전원 정학처분되었다. 2월 3일 등록 요구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냉담하였다. 서울대학의 미국인 교수 전원이 맹휴 학생들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사퇴하였다.
2) 3월 5일 재등록에서는 1,659명이 등록을 하였다. 3월 14일까지로 등록기회가 다시 연장되었고 이에 따라 1,720명의 재학생과 235명의 신입생이 등록을 마쳤다. 결국 3월 현재 등록 상황은 3,614명 등록과 4,801명 제적으로 나타났다.
3) 5월에 9인의 한인 이사가 선발되었다. 각종 학교 문제를 토의하여 결정하였다.
4) 총등록학생수는 8,415명( 학부 2,150명, 구제대학 3,424명, 예과 2,720명, 121명의 특수 학생)이다. 47-8학년도부터 구제에 의한 학생선발은 없었다. 551명의 신입생이 입학시험에 의해 선발되었다.
5) 7월 13일의 첫 졸업식에서 560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6) 한인 총장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 출신인 이춘호 씨가 인선되었다.
7) 대학원 강의를 47년 9월부터 시작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174]
  • 1947년 8월 4일 <노력인민> 국대등록 거부학생 제형에게
前日 성명한 바와 같이 복교 방침에 관하여 상의코자 하오니 귀성 학생은 大至 上京하십시요.
국대안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
  • 1947년 8월 5일 <한성일보> 중등교에 文化講義- 상공계통엔 특수교육 시행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과거 2년 간 각 학교의 건물 손상과 시설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의 각 학교 출석 총 학생수는 3백만 이상이라 하며 장차에는 중등학교에서는 전 학생에게 문화강의를 할 것이며 특히 상업, 공업 혹은 농업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문화 강의 이외에 특별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9월부터는 중학교 수업 년한이 6년으로 연장됨으로 조선 초중등학교 제도는 도합 12년으로 되어 세계 교육 표준에 따르게 된 것이다. 또 작년부터 시작한 성인학교에 출석한 성인은 773,677명으로 남조선에서 거주하는 성인 남녀는 국문을 해독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라 한다.
  • 1947년 8월 6일 <노력인민> 民主學聯과 學統서 聲明
民主學聯과 學統서 聲明
민주학생연맹과 서울학생통일촉성회에서는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一. 금번 국대등록 거부 학생(천오백여 명)들의 복교 투쟁은 통일 임정 수립을 앞두고 가장 건설적이며 옳은 방법이라고 믿는 바이며 무조건 복교, 학생의 자치권 승인, 구교수 복직, 경찰 간섭 중지 보장 등의 제 요구 조건은 극히 정당한 것이라 인정하며 이를 지지하는 바이다.
二. 만일 당국이 민주 학원 건설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하여온 국대학생을 대하여 한 사람이라도 희생자를 발생케 한다면은 다시 학원에 암영을 던지는 원인이 될 것이다. 조국 학원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우리 민주학생연맹은 이러한 不幸이 재차 야기되지 않고록 당국의 양심적 조치를 요망하는 바이다.
  • 1947년 8월 6일 <독립신보> 높아가는 향학열 - 일제시대보다 約 2배 증가
해방과 함께 일제의 식민 교육으로부터 탈각한 조선의 교육 상태는 과도기의 현상을 면치 못하여 질적으로 저하된 경향이 없지 않으나 양에 있어서는 飛躍的 발전을 하고 있어 문교부 집계에 의한 남조선에 있는 학교의 총수는 최근 현재로 국민학교 3,314, 중등학교 385, 전문대 24, 성인학교 8,703, 학생수 3백여만 명에 달하고 있는데 그중 중등학교 학생수는 일제 시대에 비하여 約 2배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8월 6일 <독립신보> 文大와 師大서 학생대회 개최

@실제날짜:470807

작년 8월 국대안이 법령으로 발표된 후 진정한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동 법안 철폐를 절규하고 총궐기한 학생 투쟁은 오늘날까지 그 진정한 요구가 관철되지 못한 채 도리어 진실한 학생들은 제적을 당하고 학교문밖에 추방되어 있어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던 중 근일 문리과대학 사대 투위에서는 미등록 학생이 모여 진지한 토의를 거듭한 결과 제적한 학생들을 무조건 복교시킬 것과 학원내의 학생 자치권 승인과 아울러 舊교수의 전원 복직 요구와 학원의 경찰 간섭 중지 보장을 위한 요구를 관철하기로 하고 결정하고 오는 7일을 기하여 전기 양 대학에서는 학생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8월 6일 <동아일보> 中等校 學級 增設 - 志願者 全部 收容
고조되는 향학열에 발맞추어 남조선 각 중등학교의 학급수를 대량적으로 증설, 확충하여 지원 아동의 65퍼-센트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2배의 증가로 현재 재학생수는 15만 9천9백5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학교 建築 施設에 대한 모든 자재가 결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9월에 4백 50 학급을 늘리었고 금년 9월에는 1천 학급의 증설이 허가되었으며 앞으로는 7백 58 학급의 증설을 허가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 학교에서 2부제를 실시하게 되어 6만 명이나 되는 학생을 더 수용하여 교육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교육 시설의 증설을 꾀하여 지망하는 아동 전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8월 6일 <한성일보> 中等敎育의 躍進- 재학생수 3배로 증가
일제의 노예 교육에서 해방된 조선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의무교육이었으나 여러 가지 관계로 이 때까지 이것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유감스로운 사실의 하나라고 하겠고 그 동안 국대안 문제를 에워싸고 조선의 교육계는 실로 혼란한 도정을 걷고 있었는데 다만 중등교육에 있어서만은 학교의 신설과 학생 수용 능력의 증가로 인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 해방 후 신설 학교수가 33교에 달하고 재학생 수도 일제 시대에 비하여 3배로 증가하였는 바 문교부가 발표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근 중등학교 생도 재적 인원을 조사하여 본 결과 일제 시대에 비하여 200%나 증가되었다 한다. 즉 과거에는 6만 8천 명이었던 것이 현재에는 159,950명이라 한다. 이와 같이 생도가 많이 증가된 것은 1945년 9월 이래 33개의 중학교가 신설되었기 때문이며 또 작년 9월부터 금년 8월까지 사이에 1천 학급이 새로 인가되어 그중 450학급이 증설되었는데 금년도 신학기에도 입학생이 많이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758학급을 증설할 예정이다. 그리고 또 2부제를 실시하여 신학기에는 1,010학급의 증설을 인가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약 6만 명의 생도가 입학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중등학교 입학 지원자의 약 50%를 수용하던 것에 비하면 약 65%를 수용하게 된 것이라 한다.
  • 1947년 8월 8일 <독립신보> 복교 방해 부당 - 국대공투 담화

@실제날짜:470807

통일임정수립을 앞두고 황폐화한 학원을 구출하기 위하여 작금에 이르러 무조건 복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5,000여의 학도를 대표한 국대안반대 공투위원회에서는 7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미 성명한 바와 같이 우리 5,000여 국대 학생이 무조건 복교를 요구하고 복교 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은 학원의 반동화를 방지키 위한 애교적 건설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국대 이사회는 우리의 이와 같은 건설적 운동을 8.15을 계기로 재차 맹휴을 일으키려는 예비적 행동인 것 같은 선전으로 우리들 복교를 방해하고 있음은 유감인 동시에 이는 민주 학원 건설을 영구히 방해하려는 반동 행위임을 경고한다.
  • 1947년 8월 8일 <한성일보> 서울國大 初代 總長- 李春昊 씨 정식 발령
국립서울대학의 첫 조선인 총장은 지난 6월 조선인으로 구성된 ○조선인이사회에서 투표 선거를 실시한 결과 동 이사 이춘호 씨가 최고점으로 당선되고 이어서(후략)
  • 1947년 8월 13일 <한성일보> 延大 여학생 모집
연희대학에서는 본과 각학원 여학생 모집을 하기로 되었는데 지원 마감은 오는 9월 3일까지이고 동 4, 5일 양일에 걸쳐 입학 시험을 시행하리라는데 시험 과목은 다음과 같다.
▲ 문과계통=국어, 영어, 국사, 서양역사 또는 경제원론
▲ 이과계통=국어, 영어, 국사, 수학물리, 화학
  • 1947년 8월 14일 <독립신보> 국민교 입학 아동 - 학교 배정과 통학 구역 발표
오는 신학기에 즐거운 입학을 할 서울시의 각 국민학교의 수용 아동은 동회를 단위로 통학구역과 학급 편성을 결정하여 오는 14일 보호자에 대하여 입학 통지서를 보내기로 되었는데 등록 아동의 보호자는 소속 동회에 문의하여 입학 통지서를 가져가기 바란다. 입학식은 9월 3일 하오 1시부터 시내 61개 학교가 일제히 거행하기로 되었으며 배정된 통학구역과 학교는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학급수) 
   ▲청계(2) 남대로1, 삼각, 수하장교, 을지로2 
   ▲방산(9) 방산, 주교, 을지로3, 을지로 4, 입정, 산림, 수표, 예지, 장사 
   ▲일신(4) 남학, 건자, 예장, 필1, 필2 
   ▲남대문(6) 남대문로2, 소공, 남대문로3·4, 남창, 남대문로5, 북창, 봉래1·2, 도1, 도2 
   ▲영희(4) 충무로5, 인현1, 인현2, 예관 
   ▲동대문(12) 묵정, 을지로5, 오장, 쌍림동, 쌍림4, 장충1, 장충2, 을지로6, 을지로7, 광희1, 광희2, 광희3 
   ▲남산 (12) 회현1, 회현2, 회현3, 남산1, 남산2, 저1, 저2, 충무1, 충무2, 충무3, 충무4, 초, 을지로2의 일부 
   ▲교동(10) 종로3, 훈정, 풍익, 와룡, 운리, 익선, 경운, 돈의, 수은, 권농, 낙원, 종4, 인의 
   ▲재동(9) 원서, 계, 가회, 재동, 원남, 봉건 
   ▲효제(11) 충신, 효제, 원지, 종로5, 종로6, 돈숭, 이화 
   ▲매동(8) 적선, 내자, 누하, 필운, 사직, ○부, 통의 
   ▲수송(6) 안국, 중학, 수송, 청진, 종로1, 서린, 세종로 
   ▲청운(8) 부암, 홍지, 신영, 청운, 신교, 효자, 통인, 옥인, 누상, 창성 
   ▲삼청(4) 삼청동,삼청서, 송현, 동덕, 경무, 활판, 화, 소격 
   ▲종로 인사, 관수, 견지, 공평, 관훈, 종로2, 관철 
   ▲창경(4) 명륜3, 명륜4, 욱구4 
   ▲봉래(6) 만리1, 만리2, 만리2서, 만리2남 
   ▲양동(8) 충정로1·2, 충정로3, 제1, 필, 제2, 냉천, 합미근, 중림 
   ▲덕수(6) 내수, 도염, 당주, 서대문1·2, 다, 무교, 정 
   ▲금화(8) 영천, 교북, 옥천, 천연, 행촌남, 교남 
   ▲안산(8) 홍재, 현저동·서·북, 행촌북 
   ▲북성(6) 북아현남·북 
   ▲태평(2) 태평로1·2, 을지로1, 서소문 
   ▲서대문(5) 순화, 의주1·2, 홍파, 평, 송월 
   ▲창신(12) 창신동·서·남·북, 숭인, 신설 
   ▲종암(14) 안암동·서, 용두남·북, 제기남, 고사남·북 
   ▲청량(8) 이문, 회기, 휘경, 청량, 전농 
   ▲돈암(6) 동선남, 동소문 
   ▲숭례(3) 종암, 제기북, 동선남 일부 
   ▲전농(2) 답십리 
   ▲성북(5) 성북1, 성북2, 욱구동 
   ▲정덕(4) 정화, 동선북 
   ▲금양(6) 효○, 도○, 용문, 원효1, 전차도북 
   ▲효창(5) 청파1남, 청파2, 청파3, 남영, 갈월서 
   ▲청파(3) 서계, 청파1북, 금5 
   ▲이태원(4) 이태원남·중·북, 용산 
   ▲삼광(11) 후암동·서, 동자, 남영, 갈월서 
   ▲용산(7) 한강1, 한강2, 신용산, 문배 
   ▲남정(8) 신창, 산천, 신계, 원효1, 전차, ○남, 원효2·3·4, 청암, 서빙고(2) 서빙고, 동빙고, 보광 
   ▲한남(3) 한남, 북한남, 금호북, 옥수 
   ▲마포(10) 도화동·서, ○정, 마포, 신공덕남 
   ▲용광(8)  대흥남·북, 염리동, 공덕서 일부 
   ▲아현(7) 아현1, 아현4, 공덕서 일부 
   ▲서광(5) 서광·서, 서교, 망원, 합정, 신수, 구수, 현암 
   ▲공덕(4) 공덕서 일부, 신공덕 북 
   ▲소의(9) 공덕동, 아현2 
   ▲한서(3) 아현2, 아현5 
   ▲광희(10) 황학상, 왕십 동·서, 앵구, 유락 
   ▲무학(6) 하왕십 동, ○봉, 행당 
   ▲장충(4) 중무, 북무, 남무 
   ▲동명(2) ○장, 사○ 
   ▲청구(5) 봉구 남, 중, 금호북 
   ▲흥인(16) 용곡, 서무, 동무, 하왕십서·중, ○문, ○행, 생구, 광희 
   ▲우신(14) 대방, 신길, 도신, 영등포중·동·북     ▲○○(8) 명수1·2·3, 명수남 
   ▲당산(8) 양평, 양평남, 광산1·2, 광산 중 
   ▲영등포(9) 영등포 남·서·동, 도림 서, 체옥 
   ▲강남(12) 본동, 노량진 동·서, 상도 동·서 
   ▲혜화(6) 혜화, 명륜1·2 
   ▲창천(4) 연희, 창천, 대신, 노고산, 동교
  • 1947년 8월 14일 <독립신보> 복교 불허 학생 천여 명? - 국대 당국 처사에 물의 분분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무려 반년간을 강경히 맹휴를 계속하여 오던 국립 각과 대학 5,400여 명의 학생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학원의 민주화를 건설코져 지난 9일 정오까지 전원복교원을 제출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으나 국대 이사회 및 각 학교 당국에서는 무조건 복교하겠다는 학생에 대하여 엄중한 심사를 가하고 상과대학 700여 명 중 그 반수 이상인 400여 명의 복교 거부를 위시하여 각 학교 상당수 희생자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 조건부 복교 허가자와 근신 학생을 통합하면 그 확실한 숫자를 발표하지 않으나 무려 천수백 명을 돌파하지 않는가 예측되는 바이며 이 가혹한 처사에 대하여 학부형과 일반의 물의가 자못 높아가고 있다.
  • 1947년 8월 14일 <동아일보> 文理科大學에서 試驗制 改良 講習

@실제날짜:470818

국립서울대학 문리과대학 심리학교실에서는 8월 16일부터 동 23일까지 매일 상오 8시부터 동 12시까지 시험제도 개량 방법 강습회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수강 자격자는 서울시와 경기도내 각 중등, 국민학교 교장이라 하며 강사는 廉光燮 박사이다.
  • 1947년 8월 14일 <동아일보> 入學通知書 찾아가라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금년도 신입학기에 취학할 국민학교 아동의 배정이 끝나 통학 구역이 배정되어 14일 각각 보호자에게 입학통지서를 발송하였으므로 보호자는 속히 동회에서 통지서를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입학식은 9월 3일 하오 1시 시내 일제히 擧行한다.
  • 1947년 8월 18일 Paul S. Anderson 편수국고문 교과서편찬 현황 보고

Paul S. Anderson 편수국 고문은 필요한 학생 및 교사용 도서의 수량, 이를 위해 필요한 용지의 소요량 등을 군정청 문교부 고문에게 보고하였다.[175]

  • 1947년 8월 19일 Horace H. Underwood 한국 교육의 현황 보고서 제출

문교부장 고문인 Horace H. Underwood 박사는 한국 교육의 현황을 분석한 "Where We Stand In Education Today"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要約될 수 있다. 1. 미국의 협조하에서 남조선 과도정부 문교부가 추진해야 할 과업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1) 400만 한국인들에게 쓰고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
   (2) 400만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보편 의무교육을 제공하는 것.
   (3) 200만의 아이들에게 인문과 실업 중등교육을 제공하는 것.
   (4) 교사, 의사, 엔지니어, 법률가 그리고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충분한 고등교육 기관을 제공하는 것.
   (5)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형식 교육과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즉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의무와 그에 따르는 혜택, 실천과정에서의 위험성과 어려움 등을 가르치는 것.

2. 이러한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a) 새로운 교사의 양성
   (b) 일본식 방식에 익숙한 교사의 재교육
   (c) 교재의 개발
   (d) 교재의 인쇄
   (e) 교실의 건설
   (f) 교육 기자재의 설비
   (g) 외국인 전문가 및 기술자의 유치와 한국인 전문가의 양성
   (h) 교육 기자재의 수입
   (i) 미국으로부터의 훈련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의 획득

3. 이러한 일들의 추진을 위해 과도정부는 $700,000의 예산을 배정하였다. 이는 $0.25 per capita for the pupils in school, 혹은 $0.05 per capita for the people to be trained에 해당되는 액수이다. 미군정청은 27명의 전쟁성 소속 민간인을 문교부에 배속시켰다.(상무부는 285명) 4. 앞서 언급한 사섯 가지 과제별 추진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600만 명에게 읽고 쓰기 가르치기 음성문자인 한글과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 문맹퇴치 운동이 시작된지 12개월만에 200만 명이 한글을 배웠다. 문맹율이 지역에 따라서 75%에서 25%로 감소하기도 하였으며 남한 전체적으로는 75%에서 42%로 낮아졌다. 이는 전적으로 한국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비용은 ¥58 per capita(이중 정부 보조는 Y2 per capita에 불과)정도였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에 의한 민주주의 교육은 성공적이지 못한 편이다.
   (2)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보편 의무교육의 보급
       현재 초등학교 재학생은 2,137,634명이다.(일제말인 45년 8월에 1,542,645명) 학교수는 3,314교이다.(해방 당시는 3,150교 : 일본인 학교 포함) 실제 증가율이 10%정도이다. 한학교 평균 학생수는 650명정도이다. 교사는 대략 30,000명정도로서 9,000명정도가 증가한 것이다. 현재 취학율은 대략 70%정도이다. 나머지 30% 미취학 아동의 취학을 위해서는 1,500개의 학교와 14,000명의 교사가 필요하다.
   (3) 200만 남여 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의 제공
       학교 수는 해방 당시 275교(남북)에서 47년 5월 31일 현재 385교(남)로 증가하였다. 학생 수는 67,625명(남)에서 159,950명(남)으로 증가하였다. 교사는 833명(한국인)에서 6,304명으로 증가하였다. 현재 16%정도의 중등학교 진학율을 보이고 있다. 완전 취학을 위해서는 1,600개 정도의 학교와 25,000내지 30,000명 정도의 교사가 필요하다.
   (4) 충분한 고등교육 제도의 제공        일제하에서는 고등교육 기관이 19개였던 것이 현재 24개로 증가하였고 교수는 261명(한국인)에서 1,100명으로, 학생수는 3,039명에서 14,000명으로 각각 증가하였다. 교수에 대한 열악한 처우, 강의실 부족, 교재, 노트, 연료 등의 부족에서 오는 교육의 어려움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선동으로 인해 대학은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5) 민주주의 교육의 실시
       민주주의 이상을 설명하는 사회 과학 분야 교재의 번역에 필요한 전문가를 더 많이 고용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지적한 다섯 가지 과업 혹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a) 교사의 양성 (b) 교과서의 편찬 및 보급 그리고 (c) 학교 건물의 보수 및 新築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현재 교사 양성은 15개의 중등 수준 사범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과 각 지방에서 이들 공식 교사 양성 기관을 보조하기 위한 교원 양성 과정이 미국인 고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사 양성 과정은 언어 장애, 교재의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것 보다는 한국인 교사들이 미국 파견 연수가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 비용이 문제가 된다. 한국인 교사의 미국 파견은 그 교육적 효과와 함께 미국에 대한 선전 효과도 매우 크다. 교과서의 편찬과 인쇄는 더욱 시급하다. 현재 초중등용 교과서는 24,000,000만권 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Paul Anderson고문은 주장한다. 대학 교재를 포함하면 40,000,000만권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종이의 부족 등으로 인해서 앞으로의 교재 보급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학교의 新築과 시설의 제공 또한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현재는 과거처럼 각 지방 유지들에 의한 자발적 기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자재들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이다. 교육 기자재, 실험 시설들도 현저하게 부족하다. 이들 문제와 함께 미국인 전문가의 증원이 요구된다. 현재로 보아 50명 정도의 전문가가 문교부 및 각 지방 교육을 위해 요청된다. 교육 재건에 필요한 재정 지원도 현재로서는 불가피하다. 금전적인 지원이 어려운 경우 시설이나 기자재의 직접적 지원이 바람직하다. 기타 단기 기술 훈련, 간호교육, 의학교육, 藥學교육, 예술교육, 농업교육 등 많은 문제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한국 교육의 재건을 위해 필요한 예산은 다음과 같다.
   교육 전문가 초빙 23명 x $6,000          $138,000
       (정원을 50명까지 점차 확대)
   지방 교육 전문가 초빙 10명 x $6,000     $60,000
   종이    400,000 reams x $5.00           $2,000,000
   15개 사범학교 지원(각200만엔상당액)
       (학교 설비형태로 지원)              $150,000
   서울대학교 시설지원                     $500,000
   5개의 주요 사립대학 지원                $25,000
   400명의 교사 미국 및 하와이 견학        $1,000,000
   체육교육 및 구급 장비
       4000교 x $100                       $400,000
                                       -----------------
                                           $4,273,000
   이들 중 특히 한국인 교사들의 미국 파견이 가장 중요하고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라는 것이 문교부의 공통된 의견이다.[176]
  • 1947년 8월 19일 <독립신보> 제적당한 국대 학생들- 법대위시 대부분은 복교 허가
국대안 반대의 깃발을 내걸고 지난 3월 제2학기 등록을 거부하였던 서울대학 제적학생 5,400여 명은 신학기를 앞두고 복적원 제출 마감날인 지난 9일 전원이 복적원을 제출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은데 교수회에서는 다시 이것을 심사 12일 등락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17일 현재로 판명된 각대학의 입학 불허 학생수는 다음과 같다. 
법대 42, 예과 53, 상대 466, 예대 음악과 28, 예대 미술과 25, 공대 75, 사대 20, 문리대 17, 농대 9
  • 1947년 8월 22일 <독립신보> 초등교 생도 성적 저하 - 중등교 입시에 나타난 현상
신학년도의 중등학교 입학 시험은 특수한 학교를 제외하고 전부 완료되었는데 금년에도 좁은 문의 경쟁은 해소되지 않고 최고 6대 1로부터 최저 2대 1의 경쟁율로 보였는데 결국 서울시내 전 중등학교의 입학 결정자수는 10,658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되는 중대한 사실은 입학생의 성적이 일제 시대보다도 현저히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각 중등학교측의 시험 성적에 대한 말을 들어보면 각 학교별로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가장 성적이 우수한 학교에서도 총점수 1,000점 중 최고점 900점 내외이고 최저는 500점이라고 하며 성적이 나쁜 학교에서는 최저 400점도 입학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낙제한 수많은 생도의 성적은 극히 저열한 것으로 초등교육에 대한 적신호로써 중대시 되어 여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 원인은 해방 이후 계속된 초등학교 시설이 난잡해진 것, 교원의 질이 저하된 것, 교사 부족, 교재 부족 등의 열거되고 있는데 특히 학무 행정에 대한 당국의 지도 여하가 논의되고 있다. 초등학교 생도의 성적은 어려운 일본어가 없어지고 국어로 공부하게 된 오늘에 급격히 향상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은 경시못할 사태라고 하여 교육계와 학부형들을 심히 우려케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등학교 입학 성적이 저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어로 배우게 된 생도들의 해득력은 점차 향상되고 있어 불원간 복귀되리라고 믿는다.학무 당국으로서는 학교 시설의 이용, 기타에 대하여 각종으로 연구하고 있다.
  • 1947년 8월 23일 <동아일보> 公民學校 設置에 河氏 私財를 喜捨
昌寧당지 출신으로 방금 서울서 報國文化興業 회사를 경영하는 河駿錫 씨는 향토문화 건설에 기여한 바 크거니와 요사이 사재 토지 1만 2천여평을 제공하여 중등 공민학교를 개설하여 벌써 백여 명 학생을 소용 교육하고 있는데 앞으로 당지의 정식 중학교로 승격이 유망하여 사회의 감사를 받고 있다 한다.
  • 1947년 8월 23일 <동아일보> 세부란스醫科大學에 一億圓 土地 寄附- 金忠植氏 美擧

@실제날짜:470822

시내 명륜동 1가 부호 金忠植 씨는 시내 세부란스의과대학의 경영을 위하여 자기 소유인 전남 장성, 무안, 화순, 함평 등지에 있는 토지, 가옥 등을 전부 기증하였다는데 가격은 約 1억원에 달하리라 하며 이 기부 발표회를 22일 정오 시내 수도그릴에서 열었다.
  • 1947년 8월 23일 <동아일보> 中等 盲啞學校 開設
보건후생부에서는 조선 처음으로 중등 정도의 맹아학교를 설치하고 오는 9월 초순 개교하리라고 하는데 맹아의 자격을 가진 부형들은 특별히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귀여운 자녀들의 입학수속을 하기 바란다고 하며 또한 생활이 어려운 사정은 신중 참고하여 국비로 교육시킬 터이라고 한다.
  • 1947년 8월 23일 <동아일보> 學級을 增加
黃登익산군 함라국민학교에서는 신임 교장 元亨俊 씨를 맞이하여 의무교육을 완성시키는 데는 먼저 敎室 增築이 급선무라는데서 동교 후원회장 曺海榮, 李集千, 金海均 등 3씨가 5교실씩 부담 增築키로 되었는데 일반 면민은 3씨의 특지에 감동하여 면민으로써 1교실을 책임지고 增築키로 되었다.
  • 1947년 8월 23일 <동아일보> 한글講習 好成績
공주전국학생연맹 공주지구에서는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공주군 각 면을 분담하여 約 1개월간 한글계몽대로 파견 강습을 실시 중인데 16만 군민은 감사해 마지 않는다.
  • 1947년 8월 24일 <동아일보> 獸醫大學長에 李根台氏 就任
오는 9월 1일 정식으로 개교하기로 된 국립서울대학교 수의대학은 학장으로 수원농과대학 수의과장 이근태 씨를 임명하고 다음과 같은 교수진을 임명하였다.
敎授 金容珌, 李昌熙, 金權煥, 李用○, 韓泳愚, 吳順燮.
  • 1947년 8월 27일 <독립신보> 교육자 하기 대학 - 온양서 성황

@실제날짜:470822

(온양온천발 조선) 남조선 사회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있는 봉건성과 일본 생활 의식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의식의 발전을 교육을 통하여 기대하는 남조선 교육자 하기대학이 문교부 주최로 지난 22일부터 25일까지 당지 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금번 모임에는 경상남북도를 제외한 남조선 각도에서 주요 소학교, 중학교 교장, 간부요원, 장학사 등 350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문교부 차장 오천석 박사의 민주주의 교육론, 서울대학 교수 이태규 박사의 원자력 해설 등을 위시하여 사회생활과, 수학, 국어 등 각계의 권위자의 강의로 성황을 이루었다.
  • 1947년 8월 28일 Horace H. Underwood 한국교육의 현황과 문제 보고

문교부장 고문 Underwood 박사는 19일의 1차 보고에 이어 28일에는 "Education in Korea : The Situation and Some of the Problems"라는 한국 교육의 현황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내용은 1차 보고서와 유사하다.[177]

  • 1947년 8월 29일 고등교육국 Miller 고문 장학사업 현황 보고

문교부 고등교육국의 Edwin L. Miller고문은 문교부장 고문에게 당시 장학사업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 "Ststus of Fellowship Work in Bureau of Higher Education"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주요 목차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장학사업의 필요성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철학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실험장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며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은 교수의 양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로서 미국의 대학에 한국의 유능한 젊은 인재를 유학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유학생 파견을 위한 장학금 제공 등에 대해서 소홀히 해왔다. 이제는 군정청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 현재까지의 업적에 대한 要約

   1. 미국 대학과의 직접 접촉
   2. 미국 의과대학과의 접촉
   3. 재단이나 다른 기관과의 접촉
       -Rockefeller Foundation
       -Fourth Int'l Cancer Research Congress
       -Int'l Office of Education
       -Medical Foundation
       -American Civilian Association of Korea
       -Private Auspices[178]
  • 1947년 8월 29일 <독립신보> 오백학생 복교 운동 - 심사에서 제적당한 국대생

@실제날짜:470828

금반 국대 등록 거부 학생들의 복교는 일반 사회적 기대가 컸었는데 명실상부하지 않아 심기일전으로 우선 학교에 들어가 배움으로 민주 학원을 건설하려는 의욕에 불타는 복적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또다시 실망을 주고 있다. 즉 복적원을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에서 제적당한 500여 명 학생은 새로 국대학생 복교투쟁위원회을 조직하고 28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1. 전국 대학생은 2월이래 국대안의 모순 시정을 위하여 오던 중 5,000여 명의 다수 학생이 제적당하였던 것이다. 금반 신임 총장 취임을 계기로 전원 복교를 결의 복적원을 제출하고 전원 무조건 복교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부당한 심사제도로 상대, 공대를 필두로 한 500여 명 다수 학생의 학적은 박탈되어 무수한 학생의 학원  逐出이라는 일대 不幸을 가져왔다. 
2. 우리 제적학생 일동은 복교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부 비양심적 교육자의 방해를 극복하고 최후까지 복교를 위하여 투쟁하는 일방, 신총장 및 학교 당국에 대하여 우리의 참뜻을 반영시켜 문제의 시급한 해결을 기할 것을 동포앞에 맹세하며 일부 소수 분자의 학원 파괴 음모를 박차고 최후까지 복교와 황폐화한 학원 구출을 위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 1947년 8월 29일 <동아일보> 過重한 入學 手續金- 最高 五千圓 徵收
國民學校 後援會에 非難 籍籍
서울시내 국민학교의 금년도 신학기를 앞두고 각 가정에서는 소위 수속금의 과중한 부담으로 비명을 울리고 있는 사실이 있다.
즉 학교 당국자와 소위 후원회가 솔선하여 최고 5천 원 최저 1천 6백 원까지를 학교에 납입하여 달라고 하는 통지서를 발하였다는데 결국 이 후원회에서 징수하는 거액의 돈의 내용을 보면 1천 6백 원을 요구한 시내 모국민학교의 것은 책상대라 하여 1천 원, 또 입학금이라 하여 5백 원, 학급비라 하여 1백 원을 징수하고 있다. 그리고 또 5천 원을 징수한 학교의 것은 교사 수리비니 책상비니 하여 마음대로 명칭을 붙여 징수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것은 시 학무 당국으로서의 지시가 아니고 학교와 후원회에서 마음대로 제정한 것이라 한다. 이같은 과중한 부담이 있어서는 의무교육의 정신을 잊을 뿐더러 수속금 관계로 등교 못하는 아동이 속출할 것을 예상하는 바이다.
후원회에서 이같이 거액을 징수하는 것은 교원들의 생활 보장의 일책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교직원의 대우 개선에 있어서는 앞으로 당국의 심심한 고려 대책이 있을 것이므로 달리 학교 당국 자체로나 후원회가 임의로 방침을 정함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 일반의 비난의 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일반 시민은 당국의 적절한 조치를 요망하고 있다.
監督 잘 하겠다. - 市學務當局 談
이에 대하여 학무 당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로서는 학부형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감독하고 선처하겠다."
  • 1947년 8월 31일 <독립신보> 내일부터 신학기
지리하던 장마도 개이고 老炎은 그 최후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백중도 지난 지금은 해방된 이땅에 신곡이 무르익을 8월 추석을 앞에 두고 새 조선의 일꾼이 될 청소년들은 9월 1일에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국민학교, 중학교를 위시하여 각 대학도 9월에 새 학기를 맞이하는데 해방 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각 방면에 있어 의식주를 위시하여 모든 정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새 조선 일군을 길러내기에 불철주야로 모든 희생을 한 여러 선생님들에게 우리는 민족적인 감사의 말을 올려야 한다. 새 조선은 청소년인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이 충실히 공부를 잘하고 안하는 것에 조선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달린 것이다. 그대의 형님이나 누나나 아버지나 어머님들은 그 악독한 일제 식민지 교육 탄압 밑에서 배우고 싶었으나 배울 자리도 없었고 배우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조선의 청소년들은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마음껏 배울 수 있는 자유의 천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정부도 가지고 있지 못한 만큼 사회 여러 방면에 우리의 불평은 많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훌륭한 교육자와 좋은 기구의 학원을 못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조선 교육계의 문제 뿐이 아니다. 조선의 모든 사회 제도는 해방 후 무질서에서 점차로 정돈되어 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해방의 감격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조선 건설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학원의 적을 가진 조선의 새 일꾼들이 불평, 불만만 갖고 학원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조선의 건설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 밖에 볼 수 없다. 배우며 고치며 배우며 건설하자. 사회의 모든 일군들은 괴로움에 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대한 새 조선 건설을 바라볼 때 사상이나 이념의 상위로 학원을 더럽힐 것이 없으며 불만있는 교수진과 불만있는 학교 기구라 하더라도 그 만한 것이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幸福으로 알아야 한다. 전후 구라파를 보더라도 모든 나라의 학원은 우리보다 월등히 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새 조선, 새 가을 맑은 창공아래 새 조선의 새 일군들인 조선의 학도들이여! 배우며 고치며 배우며 건설하는 충실한 조선의 학도가 되어주기 바란다.
  • 1947년 8월 31일 <동아일보> 入學手續金 不當 - 調査하여 處理할 터

@실제날짜:470830

金市長 談
서울시청 기자단은 30일 김시장과 회견하고 현하 여러 문제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問 : 시내 각 국민학교 후원회에서 거액의 입학 수속금을 회장 명의로 징수하는 일이 있는데 시로서는 대책이 없는가?
市長 : 국민학교 후원회에서는 거액의 수속금을 징수할 수 없다. 방금 각 학교를 통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적당히 처리하겠다.
  • 1947년 8월 31일 <동아일보> 血書로 反託 呼訴 - 全國學生總聯盟 웨 將軍에

@실제날짜:470829

전국학생총연맹 서부지부 맹원 일동은 지난 29일 국치일을 당하여 웨 장군에게 "신탁결사반대, 완전 자주독립 만세" 등의 혈서와 함께 "우리는 자유 독립 평화의 선물만 고대한다."는 장문의 성명서를 전달하였다 한다.


1947년 9월

  • 1947년 9월 2일 <독립신보> 김일성대학 교사 신축
김일성대학은 민주 조선의 앞날에 빛나는 햇살을 던지면서 장성하고 있는데 금번 민주주의 조선의 최고 학부로서 선진 제국에 부끄럽지 않는 현대식 교사를 新築하기로 되어 오는 7일 총공비 1억 3천만 원으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바 위치는 평양시 外彌山里라 하며 철근, 콘크리트 4층의 굉장한 건물이라 한다.
  • 1947년 9월 2일 <동아일보> 可憎할 學園의 赤化 - 不良 敎員을 檢擧

@실제날짜:470901

張總監 記者團에 言明
요지음 시내 각 국민학교, 중학교 등에서 소위 좌익 교원의 검거가 시작되어 이미 다수의 남녀 교원들이 경찰에 피검되어 취조를 받는 한편 계속 검거중에 있는데 이에 대하여 首都警察廳長 張澤相 總監은 一日 총감부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최근 남조선 적화 계획의 일부분으로 학원내의 악질 반동 분자가 신성하고 천진한 학도들에게 정치 사상을 주입시키며 민족 분열과 악질 투쟁을 야기하고자 하는 음모가 있고 또 적화 세포 조직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계획은 우매하고도 가증하다. 남조선은 미군정 정책 이외에는 절대 허락치 않는다. 경찰은 이러한 의도를 분쇄하고야 만다. 학무 당국도 예의하겠고 경찰은 이에 호응하여 일망 타진할 예정이다."
  • 1947년 9월 2일 <동아일보> 敎員 檢擧되어도 新學期 授業 別無 障碍
市 當局 談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다수의 좌익 교원이 검거되어 초중등학교의 신학기 교육에 지장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나 이에 대한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다수의 교직원이 경찰에 피검당한 사실이 있으나 신학기 교원의 지장이 없도록 방금 대책을 세우고 있다."
  • 1947년 9월 3일 <한성일보> 늘어가는 중학- 8월말 현재로 406교
문교부의 발표에 의하면 금년 8월말 현재로 남조선 중등학교의 총수는 406교에 달한다 한다. 그리고 8월 중에 다음의 세 중학교가 신설되었다고 하며 앞으로 더욱 확증되리라 한다.(3교 명단 생략)
  • 1947년 9월 3일 <한성일보> 시내 국민학교장 이동

@실제날짜:470826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지난 26일부로 시내 국민학교장과 동 교감 이동을 발령하였는데 이번 이동으로 조선 교육계에서는 처음으로 여자 국민학교장의 출현을 보게되는 한편 이번 통학구역제 실시를 계기로 하여서 적재 적소의 재배치가 실현되어서 서울 초등교육계에 청신미를 넣어 주었는데 동 교장 이동은 다음과 같다.
덕수 전경준(학무국), 남대문 ○○모(동), 방산 이○우(동), ○○ 이규백(○○), 재동 ○웅○(공덕), 광희 박광○(청운), 봉래 조○주(태평), ○○ 윤재천(효제), ○○ 이해○(○산), 창○ ○○용(광희), 수송 서○○(○○), 청운 ○○희(교동), 무학 박용재(용강), 한남 윤준○(무학), 안산 오○환(○동), 서강 한태연(삼청), 청원 강○○(동대문), 공덕 홍○균(북성), 북성 오백동(남강), 태평 김인영(○남), 청구 배수달(방산), ○강 남운○(성북), 삼청 오정○(교동), 성북 안○○(창신), 효제 정○성(재동), 동대문 최문○(청량), 금강 한흥수(남대문)
  • 1947년 9월 4일 <동아일보> 開城工業中學 開校

@실제날짜:470903

개성공업중학교는 지난 6월 30일 정식으로 인가가 내리어 9월 3일 개교식을 擧行하기로 되었다.
  • 1947년 9월 4일 <동아일보> 敎員, 區廳員等 警察에 多數 被檢 - 赤色 細胞組織 發覺?
태풍 일파의 좌익 검거 선풍이 있은 뒤 일시 잠잠하던 경찰은 학원의 좌익 교원 검거와 동시에 수일전부터 마포, 용산 양 구청원 다수를 검거하여 방금 취조 중이라는데 이 사건도 좌익 세포 조직의 음모 사건인 듯하다. 그런데 작 3일 도 수도청 형사대는 관계자 검거에 총동원되고 있는데 사건은 광범위로 확대되고 있다.
  • 1947년 9월 4일 <한성일보> 이부제? 삼부제?- 학령아동 초과에 대책 부심

@실제날짜:470903

금년도 신입 아동은 시험제를 폐지하고 적령 아동은 전부 각 학교에 다 수용하게 되자 학교측에서는 입학 아동 수가 초과되는 한편 고정한 교사에서 신입 아동을 마저 교육시키는데 여러가지로 고충이 많이 있어 시당국은 물론 직접 학교 측의 사정을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혜화국민학교는 신입생이 456명인데 이들 아동을 6반으로 분별한 후 현재 교사의 교실 수에 비추어 3부제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으나 3부제를 실시한다면 신입 아동이 밤까지 수업해야 하겠으니 이도 못하겠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2부제로 하는 한편 옥외 학습까지 하게 되었다는데 동교장은 왕방한 기자에게 교장으로서의 고충을 대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 혜화교장 담= 제일 곤란한 것은 1학년 신입생이 지정된 제 교실과 제 책상이 없이 오늘은 저 방 내일은 다른 방으로 옮겨가게 되며 수업을 받게 되겠으니 아동 정신을 혼란하게 할 것이 제일 걱정이고 비올 때나 눈올 때 그리고 일기가 몹시 찰 적에 운동장 수업은 곤란한 것이다. 모든 것이 곤란하다고만 할 시기가 아니니 교육자는 이 난관을 돌파하여 소국민 교육에 전력을 하지 않으면 안될 줄 생각하며 나로서도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실천하겠다.
  • 1947년 9월 4일 <한성일보> 昨日 국민교 입학식- 나도 배우리다!

@실제날짜:470903

한여름 무더운 더위와 지루한 장마도 어언간 지나가고 9월달에 들어오자 높고 높은 구름 아래 가을을 즐길 시기도 돌아 왔다. 원래 가을은 등화를 가까이 하기 좋은 시기라 40여일간 방학 동안 학생들도 심신을 단련하여 9월 1일을 기하여 그리운 교문을 드러섰으며 장래 조국의 간성이 될 소국민 신입학도 작 2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서울 장안 각 국민학교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금년도 입학생은 의무교육을 목표로 학령 아동 28,807명 전부를 각 학교에 배당하여 입학을 허락하여 어느 학교나 그 날은 운동장에 엄마 아빠 손목을 잡고 배움의 첫 걸음을 걸어갈 소국민들로 ○ ○하다. 씩씩하게 배워서 우리나라의 자랑인 초석이 되라.
  • 1947년 9월 5일 <독립신보> 중학교 수업교 인상
중학교의 월사금이 오른다. 서울시 학무 당국에서는 중등학교의 비용 부족에 대한 보충책으로서 월사금을 올릴 것을 고려 중이든 바 이번에 종래의 20원을 50전 정도로 올리기로 되어 내신 중이라고 하는데 작 4일의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상정하여 합의를 보면 곧 실시하리라 하는데 학교의 수업료 인상은 물가고에 비추어 피치 못할 것으로 물의가 많은 기부금 요구보다도 오히려 적당한 조치로서 기대되고 있다.
  • 1947년 9월 5일 <한성일보> 개성 적색 교원 숙청- 이 여중교장 이하 12명 파면
학원의 적화 문제가 일대 파문을 일으켜 서울시내에서도 관계된 교직원들이 속속 경찰에 검거되어 준열한 취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나 동 문제는 서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조선 일대까지 침투된 것으로 추측되어 검찰 당국은 물론 문교 당국에서도 예리한 감시를 하고 있다. 그중 나타난 한 사건으로 개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폭로되어 관계된 직원이 검찰의 취조를 받는 것은 물론 학무 당국에서는 교직원 전부를 파면시키었다 한다. 즉 개성여중 교장 이상춘 씨 외 3명의 교유는 모당의 책임자급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학원에 침투하여 모종의 책동이 발각되어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개성중학은 교장이 신병으로 6개월간이나 결근한 것을 기화로 동 중학 교무주임 이하 7명의 교유들이 학생들을 책동하여 정치적인 회합들에 참가하게 한 사실로 경찰에 검거 취조 중이다. 개성여중과 개성중학 양교 교직원 12명은 경기도 학무국에서 파면을 시켰으며 현재까지 경찰서에서는 계속 취조 중에 있다 한다. 동 사건에 대하여 경기도 학무국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 이번 사건 관계가 된 교직원은 전부 파면시켰으며 학생들 수업 문제는 아무 지장없이 교수 중이다.
  • 1947년 9월 5일 <한성일보> 적령아동 증가 만여 명- 부족 교실의 능률적 사용에 주력
지난 3일 서울 시내 각 국민학교 신입생이 일제히 등교하였는 바 교사에 넘치는 아동을 수용하여 학교당국에서는 수용될 신입학생을 수업하는 데 있어 2부제로 할까? 3부제로 할까? 연구에 분방 중에 있다 한다. 동 문제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국장 이승재 씨는 신입 아동과 수업 문제 그리고 학원의 적화(赤化) 문제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학무국장 담
작년에 비하여 약 국민학교 입학 아동이 만여 명 증가되었다. 작년에도 교실 부족이 문제되던 것이 금년에는 더 한층 심각한 문제다. 요는 무에서 유를 빼낼 수 없으나 당국자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 대책을 구하고 있다. 금년 신입 아동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나 모자라는 교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이 ○○○ ○○수학케 ○○ 각 학교에서는 동 방법을 실천 중에 있다. 목격한 나로서는 다만 비애뿐이다.
그러나 과도기인 이 때에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 많은 고충 가운데서 씩씩하게 공부하여 자라나는 소국민들의 장래를 기대하는 한편 교직원들의 노력에 감사을 표한다. 초중등학교 교원 적화 문제로 항간에서 말이 많이 있으나 학교 수업에는 절대 지장없다.
  • 1947년 9월 7일 <독립신보> 각학교 교직원 다수 피검
좌익 검거 선풍이 이번에는 학원을 휩쓸어 많은 교직원들이 검거되고 있다. 수도 경찰청에서는 수일전부터 시내 각학교 교원들을 다수 검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교육자협회에 가담한 교원들로 추측되고 있다. 당국의 말에 의하면 5일 현재 1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새 학기도 개학이 된 이 때에 수많은 교원의 검거는 학교수업에도 큰 지장을 일으킬 것이니 만큼 사건의 귀추 여하가 매우 주목된다.
  • 1947년 9월 7일 <독립신보> 국대 대학원 입시

@실제날짜:470904

국립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하게 되어 그 입학시험이 4-5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번 지원자수는 202명이고 금년도 개강 학과는 32과목이라 하는데 의과지원자가 제일 많고 다음은 정치학이라고 한다.
  • 1947년 9월 7일 <독립신보> 미등록 국대생 복교를 - 민주학생연맹에서도 요청

@실제날짜:470906

민주학생연맹에서는 지난 9월 6일 국대 신총장 이춘호 씨를 맞이하여 새로운 많은 기대와 희생 학생의 복적과 구교수 복직에 관한 성명을 대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만 일년에 긍하여 물의가 분분하던 국대 문제가 새로운 조선인 총장을 맞이하여 그 해결의 서광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완전 해결을 보지 못하고 각 대학에서 1,000명이라는 다수 학생이 제적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조국의 건전한 민족 문화 발전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희생 학생의 전원 복교와 구교수의 복직을 우리 4만 학도는 신총장께 기대하는 바이며 총장의 노력에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 1947년 9월 7일 <독립신보> 중등교육에 낭보! - 9월부터 야간중학을 신설
중등학교의 부족으로 인한 중등교육의 곤란 현상을 타개코져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일찍부터 야간중학의 설치를 계획 중인던 바 이번에 문교 당국의 정식 승인을 얻어 620만 원 예산으로 9학급을 신설하기로 되었는데 당해 학교는 서울중학, 경복중학, 용산중학의 3학교로 결정을 보아 각 학교에 1학년 70명씩을 모집하여 9월 20일경에는 개학할 예정으로 준비를 급히 하고 있다고 한다. 학무국에서는 명년부터 점차 야간중학을 확장하여 중등 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리라 한다.
  • 1947년 9월 7일 <동아일보> 學生 團體도 統合 - 各 代表會議에서 決定

@실제날짜:470826

전국애국학생단체들도 통합 단결하여 조국 광복에 이바지하고자 지난 8월 26일 하오 1시 대동청연주비회 회의실에서 대표들이 모여 전국애국학생단체 통합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고 하는데 참가 단체는 다음과 같다.
▲ 建設學生總聯盟 ▲ 以北學生總聯盟 ▲ 西北學生總聯盟 ▲ 朝鮮中等學生同盟 ▲ 全國中等學生同盟 ▲ 西北靑年會 學生部 ▲ 光復學軍同志會
  • 1947년 9월 9일 <동아일보> 京城園藝學校 高啓中學으로
경성원예학교는 문교부의 종용에 의해서 지난 8월 25일부로 개교하고 고계중학교로 신발족하기로 되었다는데 오는 13일부터 개교하리라 한다.
  • 1947년 9월 9일 <동아일보> 國立서울大學 昨日 一齊 開講

@실제날짜:470908

국립서울대학은 8일 각과 일제히 상오 9시 개강하였다.
  • 1947년 9월 9일 <동아일보> 大同學生團 籌備會 7日 結成式 擧行

@실제날짜:470907

9개 학생단체의 통합을 본 대동학생단 주비위원회에서는 지난 7일 하오 1시 대동청년단 회의실에서 결성식을 擧行하고 위원장에는 金桂龍, 부위원장에는 梁在建, 全性鐘 군이 각각 선임되었다.
  • 1947년 9월 9일 <동아일보> 서울大學 敎務處長에 崔奎南博士
결원 중이던 국립서울대학 교무처장에는 이번에 전 연희전문 이과 과장 최규남 박사가 취임하였다.
  • 1947년 9월 9일 <동아일보> 以北學生에 溫情
二百萬圓 豫算으로 未就學 生徒를 收容
향학열에 불타는 이북학생을 수용코자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2백여만 원의 예산을 계상하여 이달안에 시내 경복, 서울, 용산의 3중학교에 2부제로 15학급을 신설키로 되었다.
  • 1947년 9월 10일 <독립신보> 선생님 석방해 주오

@실제날짜:470909

최근 다수의 교직원이 피검되어 가을 맑은 하늘과 함께 명랑하게 배움터가 되어야 할 새 학기의 학원은 우울하기 할량없으니 우리들의 선생님을 하루 속히 석방해 달라고 지난 9일 서울 학통에서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
  • 1947년 9월 10일 <동아일보> 敎育者協會에서 學園에 赤化 指令- 協會長等 拘禁 取調中
천진한 학도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며, 학교의 기구를 파괴하려던 소위 학원의 적화 교원 사건은 경찰이 아직도 검거에 손을 떼지 않고 내사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미 검거된 백여 명의 교원의 취조가 進行되고 있는데 듣는 바에 의하면 이번 사건의 주모자는 조선교육자협회 회장 朴俊泳이라 하며 이들이 하고자 하던 계획은 초·중등·대학 등에 배치되어있는 조선교육자협회 산하 가맹 교원들에게 지령하여 각 학교별로 현 문교부 방침 반대, 현 학교 기구 파괴와 인적 구성을 개혁하자는 것과 교육을 民戰의 교육 방침으로 실시하려던 것 등이었다.
  • 1947년 9월 10일 <한성일보> 美 留學 63명- 금주 또 15명 登程
공보부 고문 ○토너 씨가 말한 바에 의하면 금년 1월 이후 학생 63명을 미국에 파견하여 유학케 하고 금주에도 15명을 또 파견할 터인데 방금 외무처장 문장욱 박사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고 조선 유학생의 학비 조달에 맹활동 중이라 한다.
  • 1947년 9월 11일 <독립신보> 국민교 교원 200명 피검 - 아동교육엔 아무 지장없다
신 학년초부터 개시된 서울시내 각 학교 교원 검거는 상당히 광범위에 걸쳐 다수가 피검된 모양으로 일부 학교에서는 교원의 대다수가 검거되어 수업에 커다란 지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하는데 서울시장이 언명한 바에 의하면 국민학교 교원의 검거된 수는 約 200명이고, 중등학교는 約 30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기자단과 회견한 김형민 서울시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민학교 교원 검거로 교육에 미치는 지장은 조금도 없다. 교원 희망자는 다수이고 결원은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그리고 검거된 교원에 대하여 아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 1947년 9월 11일 <독립신보> 초·중등 교장회의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금 11일 오전 10시부터 경기여중에서 시내 공립·사립의 초등·중등 사립학교장 회의를 개최한다고 한다.
  • 1947년 9월 12일 <동아일보> 赤色敎員 李弼運 送廳

@실제날짜:470910

교육자협회 사건 관계 혐의자 종로국민학교 교원 崔弼運 등 6인은 학원의 적화를 꾀하여 군정을 방해한 혐의로 지난 8월 21일부터 수도청에서 취조를 받고 있던 바 지난 10일 취조가 일단락되었으므로 서울지방 경찰청으로 송청되었다.
  • 1947년 9월 12일 <한성일보> 오늘 군정 2주년 기념식- 헬믹 군정장관대리 성명 발표

@실제날짜:470911

금 11일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한 2주년 기념일이다. 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군정장관대리 헬믹대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금일은 남조선에 미군정이 신시된 제2주년 기념일입니다. ○○에 ○○하는 군정장관 아취 엘 러취 소장의 뜻하지 않은 급서에 우리들 모두가 애도하는 祭日인 것입니다. 과거 2년간 미군정은 최초의 목적완수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 목적(중략)
 국제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독립 자주 조선을 건설하는 것
 2. 조선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를 대표하는 남조선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보위하는 것
 3. 조선인에게 조선 교육 및 경제의 부흥을 원조하는 것
 이상의 목적이 아직 완전히 달성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미군으로서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미국이국제적 위임 하에서 조선에 대한 약속을 가능한 한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실행하여 왔다는 것을 조선 국민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후략)
  • 1947년 9월 13일 <독립신보> 군정 실시 2주년 맞아 - 헬믹 군정장관 대리 성명서 발표

@실제날짜:470912

군정장관 대리 헬믹 대장은 12일 남조선 군정실시 제2주년에 즈음하여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금일은 남조선의 미군정이 실시된 제2주년 기념일입니다. 동시에 경애하는 군정장관 아처 L 러취 소장의 뜻하지 않는 급서에 우리들 모두가 애도하는 祭日인 것입니다. 과거 2년간 미군정은 최초의 목적 완수를 위하여 노력하여 왔습니다. 이 목적은 간단히 말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즉 
1. 모든 외교 지배에서 벗어나서 국제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독립 자주 조선을 건설하는 것. 
2. 조선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를 대표하는 신조선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보장하는 것. 
3. 조선인에게 조선 교육 및 산업의 부흥을 원조하는 것. 
이상의 목적이 아직 완전히 달성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미국으로써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제 과거 2년간을 회고하여 조선인 및 미국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조선인의 자치 훈련은 여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삼 부분으로 조직된 남조선 과도정부는 순전한 미국의 이익에 관계되는 것을 관할권을 제외하고는 실제에 있어 남조선을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 입니다. 조선의 사법기관은 대법원으로부터 말단에 지방 심리원에 이르기까지 사법기관은 約 2周年間 조선인 사법관이 운영하였으며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인사행정은 일본 법률의 완전한 수정으로 인하여 조선인 직원은 민주주의적인 수속을 받을 권리를 가지게 되었음. 민간물자 배급계획안에 의하여 사실 수백만불의 물자가 조선에 입하되었음. 그중에는 휘발유, 석유, 트럭, 승용차, 잉여 군대식량, 천막지소, 침대, 의료기구, 양화, 의복, 과자 등 기타 다수. 이것은 과거 2년간에 있어서 성취된 간단한 개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것이 성취되었지만 그러나 본관은 모든 조선인에게 국제적 협정이 완전히 移行되어 조선이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가 될 때 조선은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써 참가할 준비에 전력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 1947년 9월 13일 <독립신보> 미군교원강습소

@실제날짜:470911

지난 11일 미육군성 민정국 발표에 의하면 금후 1개월 내에 국무·육군 양성은 남조선에 교육강습소를 설치할 터이라 한다. (워싱턴 12일 AP 합동)
  • 1947년 9월 13일 <동아일보> 美 敎員講習所 朝鮮에 設置
11일 미육군성 민정국 발표에 의하면 금후 1개월 내에 국무, 육군 양성은 남조선에 교원강습소를 설치할 터이라 한다.
  • 1947년 9월 16일 <독립신보> 6개 학교에 2부제 계획 - 중등교육 확충에 시당국은 노력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중등교육의 확장을 위하여 저간 4개 중학교에 야간 교수를 실시하기로 되었거니와 이번에는 다시 2부 교육의 실시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 2부 실시 계획 학교는 배재중학 외에 5개의 사립학교로서 학급수는 각 학교 1, 2학년 1학급씩이며 수용 인원은 각 학년 50명으로 6학교에 600명을 수용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일전에 학무국에서는 전기 6학교에 대하여 그 가능 여부에 대한 실정 보고를 요구한 바 있었는데 보고 기일인 15일까지에 승인을 하여온 학교는 배재중학 뿐이나 대체로 전 학교에 실시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수용 능력이 충분한 학교에는 3학년까지 계획 중이라고 하며 교수 시간을 오후로 하든가 야간으로 하든가는 각 학교의 실정에 따라 임의로 정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9월 16일 <동아일보> 學園 赤化 事件 永登浦서 또 發覺

@실제날짜:470912

南勞黨員, 敎員等 逮捕
영등포 지구 학원을 적화하려던 일당이 12일 영등포서에 총검거되었다. 즉 영등포 학원 적화의 총책임자인 남로당원 金鳳一은 천진한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적화 사상을 주입시키고자 영등포 지국 각 국민학교에 적화의 손을 뻐치어 영등포국민학교 尹鐘善 교원과 강남국민학교 교원 柳鐘鳳, 宇新國民學校 女교원 盧淑仁, 恩露국민학교 車震鐘 등과 연락하고 학원에 세포를 조직 중 경찰에 탐지되어 관계자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 1947년 9월 17일 <한성일보> 朝鮮敎育者協會 幹部들 送廳
조선교육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원 적화 사건의 동 협회 중앙위원장 박준영, 부위원장 김택원, 조직부장 최종환, 총무부장 정갑, 서기 유상선 외 ○명은 지난 12일 서울 지방검찰청에 송청되어 오제도, 이주신, 조재천, 신일○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
  • 1947년 9월 18일 <한성일보> 국민교 교원들 20명 작일 送廳

@실제날짜:470917

기보한 바 조선교육자협회 간부는 이미 서울 지방검철청에 송청되어 오제도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거니와 이에 따른 교육자협회를 중심으로 각 국민학교에 남로당 세포를 조직하여 무허가 집회 또는 미군정 비방 기타 여러 가지 혐의로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던 오재문(방산), 조○석(영희) 외 17명은 포고 제2호 법령 9호 위반으로 17일 일신 서류와 함께 구속으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청되었다.
  • 1947년 9월 18일 <한성일보> 중등교 수업료- 50圓으로 인상

@실제날짜:470917

17일 서울시 발표에 의하면 이번 학기부터 시내 각 중등학교의 수업료가 개정되였다고 하는데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자는 종래의 20원이 50원으로 되고 서울시 외 거주자는 종래의 100원이 150원으로 인상되었다 한다. 그리고 국민학교의 수업료는 개정되지 않았다 한다.
  • 1947년 9월 19일 <동아일보> 赤色敎員 20名 送廳

@실제날짜:470917

시내 방산국민학교 교원 金濟文을 비롯하여 1백 6명의 시내 각 국민학교 교원들은 학원 적화의 혐의로 시내 중부서에서 취조 중에 있던 바 전기 김재문 등 20명은 지난 17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청되고 나머지 86명은 치안관의 임시 처결로 동일 석방되었다.
  • 1947년 9월 20일 <독립신보> 신설학교 100여소 - 躍進하는 북조선 교육계
북조선 산업 교육, 직장 교육은 관계 당국의 올바른 시책으로 많은 기술학교, 한글성인학교 등이 설치되었는데 그 성과를 학교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각종 기술학교, 강습소, 양성소, 신설 69. 
2. 한글성인학교 660, 학생수 35,600명, 교원수 700여 명. 
3. 북조선 인민위원회 각국 산하에 설치된 각종 기술학교, 32. 
4, 각 정당 사회단체 산하에 설치된 것, 14. 
5. 지방 행정기관 산하에 설치된 것. 23 
합계 138개의 각종 학교가 신설되었다.(해방통신)
  • 1947년 9월 21일 <동아일보> 敎育書籍等 各大學에 分配
문교부에서는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미국으로부터 대학 교과서 3천권과 기타 교육잡지 30만권을 입수하여 남조선 내 각 대학 도서관에 분배 배치하여 교수와 학생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좋은 자료로 열람되고 있다고 한다.
  • 1947년 9월 21일 <동아일보> 留學生 派遣 朝美文協에서
조미문화협회의 장학금으로 서울대학교 수원농과대학 조교수 李春龍 씨는 하와이대학에서 농예화학을 연구하기로 되어 머지않아 유학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동협회에서는 조선 학생을 위하여 하와이, 갤포니아, 아메리카, 시카고 등 4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학금 제도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 1947년 9월 21일 <동아일보> 文化大學 開校
서울문화대학에서는 그동안 학생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난 8일 개학하기로 되었던 것이 그대로 연기되었던 바 동 대학 재학생들로써 새로히 건설학생위원회를 결성하고 학원의 명랑화를 부르짓는 동시 학원과 학생들이 도의를 선양하기 위하여 노력 중 21일 개학하기로 되었다.
  • 1947년 9월 21일 <동아일보> 赤色敎員 6名 20日 遂起訴

@실제날짜:470920

종로국민학교 교원 崔弼運 등 6명은 지난 10일 학원 적화를 꾀하여 군정을 교란시킨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청되어 엄중 취조 중에 있던 바 작 20일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 1947년 9월 21일 <한성일보> 국민 교원 起訴
조선교육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 ○○○○의 국민학교 책임자로서 ○○ 검거되어 서울 지방검찰청 오제도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는 남로당원 최필운(종로), 김창○(○○), 지○○(청량), 하명오(효창), 하두식(○○), 최선(사대부속) 등은 작 20일 포고 제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한다.
  • 1947년 9월 25일 <독립신보> 교협관계 일부 석방

@실제날짜:470924

조선교육자협회장 박준영 씨외 4명의 간부는 근간 서울지검 오제두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던 바 작 24일 전기 박준영 씨 및 동 협회에서 유상선 씨만 포고령 위반으로 기소되고 김택원(사대 강사), 최종한(藥大 강사), 정갑(동덕여중 교원)의 3씨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로써 교협 간부진의 사건은 일단락지웠는데 영등포서에서 송치한 안산국민학교 유종봉 교원외 18명이 방금 오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는데 그 결과가 주목되며 이로써 서울의 교협 사건은 전부 낙착될 것으로 예상된다.
  • 1947년 9월 25일 <독립신보> 명랑한 國大를 기대 - 테로단 침입은 학원의 신성 모독

@실제날짜:470924

서울학생통일촉성회에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국대 문제 완전 해결의 관건인 800여 제적 학생의 복교와 양심적 교수의 복직을 희망하고 근간 각 학원에서 야기되고 있는 교원 검거를 비롯하여 학원에 테러단의 침입에 대한 당국의 근멸책을 시급히 요청하는 성명서를 24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당국은 일반 공론의 방향을 통찰하여 양심적 교수 및 800여 제적 학생을 즉시 복교시킴으로서 명랑한 국대 재건을 위하여 과단성있는 시책이 있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2. 근간 학원에서 야기되고 있는 교원 검거를 기회로 평화 학원에 테러단의 침입으로 교원 학생의 등교를 방해하고 있음은 교육의 민주화와 학원의 명랑화를 위하여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당국의 맹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학원 테러에 대한 근멸책의 시급한 확립을 강력히 요청하는 바이다.
  • 1947년 9월 25일 <독립신보> 신교육 이념을 전시 - 문교부에서 2주년 기념 전람회

@실제날짜:4711

남조선의 교육 현세와 실력을 직관함으로서 장래의 향상을 추진시키며 아울러 신교육 실시 2주년을 慶祝하는 뜻으로 문교부에서는 각 도, 시 학무국과 공동 주최로 신교육 건설 전람회를 11월 20일부터 30일까지 10일간에 걸쳐 서울공립중학교 강당에서 공보부, 상무부, 운수부, 재무부 및 신교육 건설 전람회 협찬회의 후원 아래 개최하게 되었다. 이번 전람회에는 문교관, 문예관, 미술관, 공예관, 과학관, 보건관, 참고관, 바자관 등으로 나누어 새교육 실시로 지향하는 당국의 근본 의도와 실적이 종합적으로 전시되는 전람회인 만큼 그 성과에 대한 일반의 기대와 관심이 자못 큰 바 있다.
  • 1947년 9월 25일 <독립신보> 이총장 인준 거부

@실제날짜:470923

작보한 바와 같이 서울대학 총장 이춘호 씨에 대한 입의의 인준 여하는 극히 주목되던 바 지난 23일 입의 제 145차 본회의 비공개회의에서 동 씨가 해방 후 적산으로 모리를 하고 덕망이 부족하여 세평이 자자하다는 이유로 자격심사위원회에서 맹렬한 반대가 있어 표결에 붙인 결과 41대 25로 인준이 거부되었다.
  • 1947년 9월 25일 <동아일보> 光州學園에도 赤化? 敎員 30名 檢擧
광주경찰서에서는 수일 전부터 광주사범학교 교유 鄭在表외 約 30명의 교원을 검거 취조 중에 있는데 사건 내용은 자세히 알수 없으나 중앙의 교원 검거 선풍의 여파로 주목된다.
  • 1947년 9월 25일 <동아일보> 朴 漢城中學校長等 3日 遂起訴

@실제날짜:470923

조선교육자협회장 朴俊泳(한성중학교장)과 동 협회 서울시지부 서기 柳尙善 양명은 "남조선 교육계의 정세와 그 당면 대책 수립을 논함"이라는 팜프레트를 發行, 분포하여 남조선 문교 당국과 경찰을 허무히 비방하여 민심을 교란하였고 군정을 방해한 혐의로 지난 12일 시내 중부서로부터 서울지방 검찰청에 송청되어 吳濟道검찰관에 의하여 엄중 취조 중에 있던 바 지난 23일 포고령 2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 1947년 9월 25일 <동아일보> 서울大學總長 立議 認准 未成立

@실제날짜:470923

서울대학총장 李春昊 씨에 대한 자격 심사 문제는 그동안 立議 資格審査委員會에서 심의 중이던 바 23일 제45차 회의에 "李씨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총장에는 부적당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다. 李씨는 이사회의 推薦과 군정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미 총장의 실제적 집무를 하고 있는 만치 의원간에는 의론이 구구하여 마침내 표결에 붙인 결과 재석 67인 중 41대 25로 다수의 찬성 투표를 얻었으나 의사규정상 3분2에 당치 못하였으므로 인준은 사실상 불능케 되었다. 이날 회의는 비공개리에 進行되었으며 兪문교부장도 동 회의에 동석하여 李씨를 引用케 된 경위를 설명하는 동시에 인준하여 주기를 역설하였다 한다.
  • 1947년 9월 25일 <한성일보> 敎育者協會 委員長 등 起訴
조선교육자협회 중앙위원장 박준영(朴俊泳=한성중학교장), 동부위원장 김택원(金宅源=사대및 약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 강사), 동 총무부장 정갑(鄭甲=동덕여중강사), 최종환(崔宗煥=약대 강사), 동회 서기 유상선(柳尙善) 등은 그 간 문교及경찰 행정방해의 협의로 서울지방검찰청 오제도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던 바 23일 박준영, 유상선은 기소되고 나머지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하였다 한다.
  • 1947년 9월 26일 <독립신보> 거부 근거를 추궁, 총장 문제와- 국대 이사 崔奎東 씨
지난 23일 입의 자격심사위원회에서 금번 국대 신총장 이춘호 씨에 대하여 불적격자로 인준을 거부한데 대하여 국대 이사장 최규동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문제는 나로서도 의외로 생각하며 거기에 대한 대책은 이사회를 소집한 후에야 말할 수 있겠다. 원래 금번 국대 조선인 총장에 관한 문제는 특별 법령에 의하여 이사회의 비준과 추천으로 군정장관의 서명이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 유문교부장까지 적격자라고 주장하는데 불적격자라고 거부함에는 그 구체적인 근거를 구명할 필요도 있을 줄 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총장으로 취임한 것도 전부 이사회의 추천임으로 금번 문제도 이사회에 일임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 1947년 9월 26일 <독립신보> 국대 제적생 복적 상황
국가의 장래가 청년의 두 어깨에 놓여 있다면 이 청년을 굳세게 양성하는 교육의 사명은 어떠한 정책, 어떠한 행정 보다도 가장 중대하고 심중에 심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특히 장래 국가의 동량이 될 중요 인재을 양성하며 국가의 문화와 세계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는 학문 예술의 전당인 대학 행정은 그 국가 자체의 장래를 좌우할 뿐더러 나아가 세계 역사 발전에 크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8월 국대안이 이땅의 행정자에 의하여 제기되자 학원의 민주화를 부르짓고 한결같이 일어난 학생들의 반대 운동은 요원의 불꽃처럼 남조선 각지에 맹휴 선풍으로 나타나 실로 8개월여의 분규가 계속되어 당국에서는 재삼, 재사 그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 나머지 그 타협안으로 제적당한 학생에게 복적할 기회를 준 바 있어 드디어 5,000여 제적 학생은 국가 장래를 위하여 지난 8월 9일 대부분 이에 응하여 복적원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 당국에서는 사상 불온과 맹휴 선동자를 단호히 제외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왔던고로 또 다시 상당한 수효의 학생이 학원에서 거리로 쫓겨 날 것이 예상되고 있는데 서울대학 교무처에서 집계한 산하 각 대학의 제적생 복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복적지원     허가   진급    중락    낙제    불허가 
문리대예과  1012         908    744     164     580     104
문리대학부  351         336     336                     15
사대예과    653         635     218     275     142     18
사대학부    180         169     127     15      27      11
법대전문    205         188     82      575             17
법대학부    111         105     103                     6
공대전문    288         280     228             52      8
공대고등부  218         215     52                      3
공대학부    142         139     70                      3
상대전문    390         234                             156
상대학부    296         185     119                     111
치대        12          3       3                       9
예대미술    66          47                              11
예대음악    111         89      29              49      22
농대        158         150     18      109     23      8
총계        3418        3092    1586    574     1134    326
  • 1947년 9월 26일 <한성일보> 大邱大學 正式 認可- 문학, 사회, 이학 종합대학으로 발족

@실제날짜:470922

벌써 1년 전부터 기성회를 조직하고 활동 중이던 대구대학은 정해봉, 최준, 이상렬, 이상호, 추병화 씨 등의 기금 희사로 드디어 지난 22일 부로 문교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가 있어서 해방 후 처음 보는 대학으로서 새 출발하게 되었다 한다. 동대학은 토지 957,278평(시가 3,500만 원)에서 년수 270여만 원이 있는 한편 경북도에서도 매년 100만 원씩 보조가 있어서 이미 재정 기초가 확립되었고 벌써 지난 3월부터 전문부와 예과생 200여 명을 수용하고 수업하고 있어 현재 전 천주교신학교 교사를 임시로 사용하고 있으나 신교사는 8,500만 원 예산으로 신축할 계획이며 동 대학에는 문학, 사회과학, 이과, 의학부와 대학원을 두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9월 26일 <한성일보> 復籍 不合格 400- 落第, 中間 落第 1,200

@실제날짜:470920

말썽많은 국립서울대학 학생들의 복적 문제는 그 동안 복적원을 제출한 학생 3,418명 중 합격자 3,092명으로 불합격자가 408명이라 한다. 한편 중간 낙제가 109명이며 낙제자가 1,134명이라 한다. 각 대학별 복적원 제출자와 동 합격자 수는 다음과 같다. (上 복적원 제출자, 下 동 합격자, 괄호내 불합격자)
   ▲ 사대    653    635  (18)
   ▲ 문리대  351    336  (15)   동예과   1,012   908 (104)
   ▲ 법대     111    105  (6)    동 전문부   205   188 (17)
   ▲ 치대     12      3  (9)
   ▲ 공대    648    634  (14) 
   ▲ 상대    296    185  (111)  동전문부   390   234 (156)
   ▲ 예대    111     89  (22)
   ▲ 농대    158    153  (8)
   ▲ 계    3,418  3,092  (408)
  • 1947년 9월 26일 <한성일보> 李總長 認准 拒否- 금후 재심사가 주목
국립서울대학 총장 이춘호(李春昊) 씨에 대한 인준 문제는 지난 23일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표결한 결과 출석의원 67명 중 41대 25의 다수 찬성 투표를 얻었으나 의사 규정상 3분의 2에 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난 5월 6일 부로 법령 제102호로써 공포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령 제7조의 개정에 있어서 동조(나)3항에 “유명한 조선인을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으로 ○○하여 서면으로 수락한 시 군정장관(군정기 후에는 행정당국 책임자)이 정식으로 차를 임명함”이라고 되어 동총자의 임명권은 전혀 군정장관에게 있을 뿐더러 입법의원 토의 당일 결석 의원도 상당수에 달하는 만큼 일반은 동 총장 임명 문제의 재심사 여부를 주목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9월 27일 <한성일보> 敎協事件 波及- 仁川서도 敎員 檢擧
인천지국 敎協 사건의 파문은 드디어 인천에 까지 미치게 되어 저번 인천 경찰 당국에서는 부내 숭의 신흥 등 양국민서 좌익계열 교원의 검거를 단행하였었는데 이즘 또다시 인천여중 모 교유를 검거하는 한편 동교 상급생 4명을 불구속으로 취조하고 있어 불원간 당국으로부터 그 진상의 발표가 있으리라 한다.
  • 1947년 9월 28일 <한성일보> 敎協關係事件 起訴者 18명

(내용생략)

  • 1947년 9월 29일 <독립신보> 미등록생 복적 상황 - 국대복교투위에서 발표

@실제날짜:470928

기보한 바와 같이 지난번 국대 당국에서는 동 대학의 미등록 학생 복적에 관하여 불허가, 급·락제 학생수를 발표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국대학생복교투쟁위원회에서는 28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투쟁위원회에서 조사한 미등록 학생 복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805명이란 다수 학생이 제적당하고 있으며 낙제 학생 총수는 1,177명이라는 다수에 달하고 있다.
    교명    총수    복적원제출  허가    불허    낙제수
법대        715     310         268     42      96
문대예과    1241    968         906     62      379
공대        1532    852         700     152     300
상대        1320    782         314     468     178
예대음악    190     110         89      21      61
예대미술    91      70          47      23      19
문리대      732     350         333     17      133
藥大        250     250         250
의전        350     38          35      3
계          7699    4358        3553    805     1477
  • 1947년 9월 29일 <독립신보> 躍進하는 남조선 학원- 1만 2천여교에 학생 3백만
國民皆學運動에 공민교육 괄목. 재작년 8월 15일 일제가 이땅에서 물러간 후 오랜 식민지 교육의 험악한 사슬에서 해방된 남조선 교육계는 새교육 실시를 지향하여 날로 자라나가고 있다. 이리하여 한 때 말과 글까지 빼앗기고 그나마도 배울래야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는 쓰라린 환경에 있던 청년학도들은 새로운 태양밑에 면학을 거듭하고 있고 한편 문교 당국 및 민간 유지들은 속속 학교를 확충 신설하여 국민개학운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문교 당국에서 조사한 지난 5월 현재의 학교의 총수는 공민학교가 8,703, 초등학교가 3,314, 중등학교가 385, 전문대학이 24 도합 12,426교에 달하고 있고, 학생수는 공민학교가 773,677, 초등학교 2,137,634, 중등학교 159,950, 전문대학 13,485 총 3,084,746명이 앞날의 조국 발전에 이바지 하고져 자기 양성에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들 학도들을 길러내는 교사의 수효는 공민학교가 16,095, 초등학교가 30,519, 중등학교가 6,304, 전문대학이 1,075로 그 총수는 53,993명이라는 방대한 숫자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발전이 더욱 촉망되는 바 있는데 각 지방별로 본 학교 분포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도별    공민    국민    중등    대학
전남        914     592     53
전북        584     281     32
충남        37      225     40
충북        130     217     35
강원        128     315     20
경기        120     400     41
서울                71      61
경남        5478    587     51
경북        1252    530     45
제주                96      6
총계        8703   3314    386    24


1947년 10월

  • 1947년 10월 1일 <독립신보> 남조선 교육 정책을 언더우드 박사가 비난
남조선 과도정부 문교부 미측 수석고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는 남조선 미점령 당국의 교육 방침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기자에게 그 소신을 피력하였다. 
1.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 내의 교육 보급 필요성을 경시하고 있음으로 만약 조선인이 민주주의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면 조선인은 일본, 소련 이데올로기 중 그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만약 현 남조선 교육 방침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민주주의  의 관련에서 거의 또는 전혀 이탈된 조선 민족주의의 대두일 것이다. 
3. 현재 미군정 당국은 정치 또는 경제 부문에 대함과 같은 관심을 교육 부면에 표현 하지 않고 있는데 한편북조선의 소련당국은 전문한 바에 의하면 수백 명의 북조선 교사를 소련내 각 학원에 파견하고 있으며 북조선 각 학교에서는 일본 잔재 정신이 사실상 일소되었다 한다.
  • 1947년 10월 1일 <동아일보> 南朝鮮 敎育改革이 必要 - 언더우드博士 力說
남조선 과도정부 문교부 미측 수석고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는 남조선 미군 점령 당국의 교육 방침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기자에게 그 소신을 말하였다.
一.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내의 교육 보급 필요성을 경시하고 있으므로 萬若 조선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면 조선인은 일본, 쏘련 이데올로기 중 그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될 것이다.
二. 萬若 남조선 교육 방침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그결과는 민주주의 관념에서 거의 또는 전연 이탈된 조선 민족주의의 대두일 것이다. 현재 미군정 당국은 정치 또는 경제 부면에 대함과 같은 관심을 교육 방면에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한편 북조선의 쏘련 당국은 측문한 바에 의하면 수백 명의 북조선 교원을 쏘련내 각 학교에 파견하고 있으며 북조선 각 학교에서는 일본 잔재 정신이 사실상 일소되었다 한다.
  • 1947년 10월 3일 <독립신보> 교육 정책 과오 지적 - 愛國婦女盟서 성명

@실제날짜:471002

조선애국부녀동맹에서는 미군정 당국의 교육 정책에 대하여 5조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언더우드 박사가 미군정 당국의 교육 정책에 과오가 있다고 경고한 것은 시기에 적절한 일이다. 오늘날 남조선 전역에 걸친 학원은 팟쇼 정신이 침입하여 있고 일제 잔재의 온상이 되어 있다. 
1. 군정 당국이 이러한 과오를 시정하려면 정권을 양심적인 조선인 지도자에게 맡길 것이다.
  • 1947년 10월 3일 <독립신보> 美 남조선 교육비로 150만불 계상
과반 남조선 과도정부의 수석 교육 고문인 언더우드 박사는 남조선 미당국의 교육 정책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금반 미육군성 대변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군성은 내년 6월 30일로 끝나는 회계연도에 있어서 남조선 교육 정보 관계 비용으로 150만불을 소비할 예정이다. 이 금액은 원래 계상되었던 금액에 비하여 매우 적은 것인데 이는 과반 미국의회에서 다액의 조선 점령비를 획득치 못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을 강화할 계획은 방금 강구 중이다. 하지 중장도 조선 교육자 및 교육 관리자의 강력한 훈련을 위한 기관을 서울에 창설하려는 육군성 계획을 승인하고 있다. 우리는 가급적 속히 이러한 계획을 수행할 적임자를 요구 중인 동시에 더욱 증가된 자금을 입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편 교육 사절은 3만불의 비용을 필요로 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중 대부분은 서적, 기록영화, 라디오, 기타 교육 및 정보 관계 원조용으로 사용될 것이다.
  • 1947년 10월 3일 <동아일보> 敎育情報費로 百五十萬弗 計上
과반 남조선 과도정부의 수석 교육고문인 언더우드 박사는 남조선 미당국의 교육 방책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금번 미 육군성 대변인은 이에 대하여 如左히 말하였다.
"육군성은 내년 6월 30일로 끝나는 회계년도에 있어서 남조선 교육 정보 관계비 등으로 150만불을 소비할 예정이다. 이 금액은 원래 계상되었던 금액에 비하여 매우 적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을 강화할 계획은 방금 강구 중이다. 하-지 중장도 조선인 교육자 급 교육관리자의 강력한 훈련을 위한 기관을 서울에 창설하려는 육군성 계획을 승인하고 있다. 일방 교육사절은 30만불의 비용을 필요로 할 것이 예측되는데 그 중 대부분은 서적, 기록영화, 라디오 급 기타 교육 급 정보관계 원조용으로 사용될 것이다.
  • 1947년 10월 3일 <동아일보> 惡質 敎員과 結託 學園에 謀利輩 跳梁
한동안 모리배의 앞재비가 되어 "란도쉐" 등 학용품을 배급이란 명목으로 팔아먹던 일부 악질 국민학교 교원이 있어 학부형의 비난이 자자하였었는데 요즈음에는 학부형과 어린이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책장사와 결탁하고 착취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고 한다. 즉, 교육에 열중하여 책사는 돈이라면 아끼지 않는 학부형의 지성과 어린이들의 새 책 사려는 심리를 역용하여 거리에 란발되고 있는 참고서, 그림책 등을 좋은 책이라고 권장하여 팔아서는 이익을 반분하는 악질 교원이 있다고 하는데 관계 당국에서는 이를 내사 중이라는 바 금후로는 학무 당국의 지정한 참고서외에는 판매 알선을 엄금키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10월 3일 <한성일보> 敎育費 50萬弗- 美 陸軍省 當局 支辨
워싱턴 2일발 합동 지난 번 남조선과도정부의 수석 교육 고문인 언더우드 박사는 남조선미당국의 교육방책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금반 미 육군성 대표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군성은 내년 6월 30일로 끝나는 회계 년도에 있어서 남조선 교육 정보 관계 비용으로 150만불을 소비할 예정이다. 이 금액은 원래 계산되었던 금액에 비하여 매우 적은 것인데 이는 과반 미국회에서 다액의 조선 경영비를 획득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을 강화할 계획은 방금 강구 중이다. 하지 중장도 조선인 교육자 및 교육 관리자의 강력한 훈련을 위한 기관을 서울에 창설하려는 육군성 계획을 승인하고 있다.
우리는 가급적 속히 이러한 계획을 수행할 ○○○○ 요구 중인 동시에 더욱 증○된 사○○○를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일방 교육사절단은 3십만불의 비용을 필요로 할 것이 예측되는데 그중 대부분은 ○○, 기록영화, 라디오 및 ○○ 교육 및 정보 관계 원조용으로 사용될 것이다.
  • 1947년 10월 4일 <독립신보> 柳 교원 등 8명 기소

@실제날짜:471003

안산국민학교 유경봉(26)외 17명의 교원이 관련된 포고령 22호 위반 사건은 그간 서울지검 오제두 검찰관이 취조 중이었는데 작 3일 각각 다음과 같이 처결하였다. 
   ▲기소: 유철재(28), 김희중(30), 윤은근(29), 박상기(24), 윤종선(26), 김철로(23), 노숙인, 이정자
   ▲기소유예: 이정 외 6명
  • 1947년 10월 4일 <한성일보> 넓어지는 學窓-중등교 408교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금년 8월 현재 남조선 중등학교 총수는 406교(사범중학교 및 사법대학부속중학교를 포함)이던 바 9월 1일 이후 말일까지 전남화순공업초급중학교와 경북산○초급중학교의 2교가 신설되어, 결국 408교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10월 5일 <독립신보> 한성중학 敎論 등 7명을 기소

@실제날짜:471004

조선교육자협회에서 "남조선 교육계의 정세와 당면 대책 수립"이라는 팜플렛을 발포하여 군정 방해 협의로 지난 20일 검거되어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함은 기보된 바와 같다. 이와 관련되어 검거 송청된 한성중학교 교유 7명도 작 4일 기소되었는데 그중 변○명 외 1명은 공판에 회부되고 주진구, 이병래, 한병창, 이효연 외 4명은 과료 1만 원의 약식 처분이 있었다 한다.
  • 1947년 10월 5일 <동아일보> 過大한 學父兄 負擔 是正- 文敎部서 後援會 聯合會 設置
장래 우리 조선을 맡아 나갈 제2국민을 길으는 교육 기관에서는 신입생 또는 보결생들의 학부형을 졸라서 얻은 기부로써 학교를 운영하려는 것이 오늘의 남조선 교육 현상이라 하겠거니와 학부형들의 성의와 실력에 따르는 각 학교에의 후원 정도 여하에 의하여 교육자들의 이동이 빈번하고 학교와 학교와의 감정적 대립 등을 빚어내어 교육상, 사회 생활상, 커다란 영향을 갖어오게 한다. 문교 당국에서도 그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학교 단위로부터 한 도시나 한 지역을 단위로 학교 후원회 연합회와 같은 기관을 설치하고 교육자들의 대우를 균일한 정도로 하고 학부형들의 부담을 절감할 수 있도록 지난번 학무국장회의에서도 논의되어 앞으로는 이러한 총체적 연합기관을 통하여 각 학교 후원회도 체계있는 유기적 활동을 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文敎部 普通敎育課長 朱基瑢 씨 談 각 학교마다 교원들의 대우가 다르므로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연합기구를 새로 설치하기로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학교 단위로 경쟁적 우대 방법과 학부형들의 부담도 경감될 것이다.
  • 1947년 10월 7일 <독립신보> 군사 교련 절대 반대 - 민주 학생 단체서 반박 성명 발표

@실제날짜:471006

지난 3일 한민당에서는 남조선 중등학생이상에 군사 교육을 실시하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작 6일 民主學聯과 서울學統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반박담화를 발표하였다. 
한민당의 담화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교육 정책을 방불케 하는 학원 팟쇼화의 음모의 표현이다. 일제가 우리 학도에게 군사 훈련을 강요하여 쓰라린 경험이 아직도 뼈에 사무쳐 있는데 이런 담화를 발표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 1947년 10월 10일 <한성일보> 渡美 獎學金- 布硅 同胞 萬餘弗 醵出
외무처 발표에 의하면 도미 중에 있는 외무처장 문장욱 씨는 최근 하와이를 방문하였다는 데 하와이 재류 조선인 각 단체에서는 조선인을 미국 학교에 유학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12,800불을 거출하여 주었다 한다.
  • 1947년 10월 10일 <한성일보> 미국 유학도 11일 19명 출발

@실제날짜:471011

향학에 타오르는 조선학생들은 다대한 희망을 품고 벌써 수차의 미국 유학생이 도미하였는데 그 후 미국유학생들 중에는 무명회를 조직 회장에 김상용 씨를 추대 유학생의 편리를 도웁고 있는데 오는 11일도 미주의 각 대학으로 편입되어 19명의 남녀 학생이 인천항을 출발하기로 되었는데 그 성명과 편입학교명 그리고 전공 과목은 다음과 같다.
김상용(보스톤대학대학원-영문학), 임한영(애모리대학-교육학), 신화○(헤이스팅스대학-국제법), 이규엽(미시간주립대학-농학), 홍순철(씨아틀 퍼시픽대학-정치학), 김성선(미시간주립대학-수의학), 송영복(로스엔젤스 신학원-신학), 이○옥(무-다 신학원-신학), 윤병수(뉴욕의과대학원-의학), 윤○희(웨스리안대학-음악), 고영희(구린·마운탠대학-음악), 박은순(태프트·주니어대학-사회학), 강○○(시캐릿대학-종교교육), 김○○(코로라도주립대학-교육학), 전○연(푸리스톤 신경원-신학), ○○○(씨아틀·퍼시픽대학-음악), 남궁애달(씨아틀·퍼시픽대학-음악), 현○○(버지니아의과대학-의학), ○○○(리-틀러대학-법학)
  • 1947년 10월 11일 <독립신보> 국대 총장 인준, 입의에 재 심사 요구- 헬믹대장 담

@실제날짜:471010

지난 번 입의에서 국대 신총장 이춘호 씨에 대한 인준 거부가 있은 후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었 오던 바 군정장관 대리 헬믹대장은 이에 관한 기자단의 질문에 10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관은 금주 초에 입의에 보낸 서안 중에 국대 총장을 시급히 선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또 총장으로서 이씨의 인준을 재심사할 것을 입의에 요청하였다. 이씨는 국대 이사회에서 만장 일치로 총장에 선출되었으므로 본관은 입의에서 최후 결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여 사무를 취급할 것을 동 씨에게 부탁하였다.
  • 1947년 10월 11일 <동아일보> 서울大學 總長 急速 選定 要請 - 헬믹代將 問答

군정장관 대리 헬믹대장은 10일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회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問 : 입법의원에서 인준이 부결된 국립서울대학 총장 관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答 : 이번주 입법의원에 서한을 보내어 총장을 급히 선택할 필요를 지적하였으며 또 총장으로써 이춘호 씨의 인준을 재심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씨는 국대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장에 선출되었으므로 입의에서 최후 결정이 내릴 때까지 계속하여 사무를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다.
  • 1947년 10월 11일 <한성일보> 國大 總長 認准 再審査- 헬믹 軍政長官代理 立議에 요청
군정장관대리 헬믹 대장은 작 10일 서울국대 총장 인준 문제 등에 관한 기자단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국대 신총장 이춘호 씨의 인준을 입의에서 거부하였다는데 국대의 사명 중대성에 비추어 빨리 총장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답: 본관은 금주 초에 입의에 보낸 서한 중에 국대 총장을 조급히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또 총장으로서 인준을 재심사할 것을 입의에 요청하였다. 이씨는 국대 이사진에서 만장일치로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므로 본관은 입의에서 최후 결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여 사무를 취급할 것을 동 씨에게 부탁하였다.
  • 1947년 10월 12일 <독립신보> 국대 이총장 인준 遂 가결

@실제날짜:471010

지난 번 입의에서 인준을 거부당한 국대 신총장 이춘호 씨에 대한 인준 재고려를 군정장관 대리 헬믹대장이 입의에 요청하여 그 귀취가 자못 주목된다 함은 작보한 바와 같거니와 10일 입의 본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자격심사위원회의 "서울대학 총장 자격 심사의 인준 표결에 관한 수속은 이미 공포 실시된 원법에 의한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처리이므로 군정장관 대리의 삼분지 이 이상의 투표를 얻어야 한다는 원법 때문에 대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으로 말미암아 지배된다는 말은 옳치 못하고 또 관리 임면 인준에 관하여 이미 원의로서 결정된 안을 재고려 한다는 악례를 용인할 수 없으나 이상의 이 조건으로서 본 안만은 다시 본 회의에 부함이 타당하다"는 요지의 조건부의 불철저한 보고가 있자, 장내는 일시 소란하여 물의가 분분하였으나 결국 재표결을 한 결과 45대 40으로 신총장의  인준이 가결되었는데 이 자격심사위원회의 극히 애매한 보고와 저번에 45대 25라는 다수로 인준이 거부된 본 건이 하등의 명백한 이유도 없이 이와 같이 급변함은 입의의 권의에 관한 문제라고 물의가 자못 분분하고 있다.
  • 1947년 10월 13일 편수국 미국에서 보내올 교과서 목록을 통보

문교부 편수국의 Paul Anderson 고문은 미국에서 Civilian Supply Program에 의해 한국에 보내올 교과서 목록을 관련 부처에 전달하였다.[179]

  • 1947년 10월 15일 <독립신보> 인천교협사건 서울地審서 취조 중
한동안 말썽이 많던 인천교육자협회 사건은 인천상업학교 교유 고인석 씨와 18명이 지난 10일 서울지방 검찰청에 송청되어 오제두 검찰관의 취조를 받고 있다.
  • 1947년 10월 16일 군정청 정치고문 군정청 교육 관계자들의 불화 보고

군정청 정치고문 Joseph E. Jacobs는 국무장관에게 주한 미군정청 미국인 교육자 집단내에서의 불화에 관해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두가지 이다.

    1. 미군정은 한국에서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다. 만일 이런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주주의 정신과 무관하게 나타날 것이다. 군정청은 정치나 경제에 비해 교육에 너무 적은 관심을 보이고있다. 북한에서는 교사의 러시아 유학이나 일제 잔재의 청산 등을 통해 교육 분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상무부에 400명의 미국인 고문이 있는 반면에 문교부에는 20명에 불과하다. 학교의 등록금은 정부 예산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계속 인상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 사이에는 미국식으로의 교육 개혁에 대한 저항감이 생기고 있다. 서울대학 총장 인준과정에서 군정청에서 추천한 인사(이춘호 씨)가 부결된 것도 이런 것과 관련있다. 한국인 학생이나 교사의 미국 파견을 위한 기금 같은 것도 현재는 없다.
   2. 이러한 비판은 개인적인 적대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군정청의 Chief Advisor인 Edgar A. J. Johnson 박사는 한국 교육계에서 언더우드 박사가 해온 것과 같은 기독교의 영향에 반대하여 언더우드 박사를 고 Lerch장관이 내정했던대로 OAF 15 rating으로 승진시키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쨋든 Acting Military Governor는 언더우드 박사의 사임에 반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180]
  • 1947년 10월 16일 <독립신보> 부정규 학교에 주의 - 남조선에 인가된 대학 17교
요즈음 서울을 비롯해 경향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학원 모리배의 조량은 날로 심하여져 내용도 없이 간판만 걸어놓고 향학열에 불타는 청소년을 울리는 희비극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서울 장안만 해도 XX대학이니 00대학이니 하는 간판수를 헤아린다면 마치 무수히 난립하고 있는 정당 단체의 발호와도 같은 감을 일반에게 주고 있는데 실은 정규 대학으로써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맡은 것은 남조선 전체에 17개 밖에 안되며 대학으로서 승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전문학교가 3교, 이밖에 특수 고등교육 기관이 6개 밖에 안된다 하여 당국에서는 일반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더욱 문교 당국의 정식 인가를 맡은 남조선의 고등교육 기관은 다음의 26개 교라 한다.
  ◉ 정규대학
국립서울대학교,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고, 이화여자대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 동국대학, 성균관대학, 성신대학, 
중앙여자대학, 국립부산대학교,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대학, 제주의과대학, 청주상과대학, 춘천농업대학
  ◉ 승격준비교
구경의전, 구경성여의전, 숙명여전
  ◉ 특수고등교육기관
국민대학관, ○학○교, 건국기술학교, 경성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조선신학교
  • 1947년 10월 17일 <동아일보> 中等學生 以上에 急速 軍事訓練시키라

@실제날짜:471014

全國學生總聯盟 聲明
전국학생총연맹에서는 지난 14일 현하의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의 움직임에 비추어 남조선 중등이상 학교에 시급히 군사 훈련을 실시할 것을 요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만주에서 쏘련군이 철퇴하였다 함은 명목뿐이고 그들은 다수의 중공군을 조종하여 중국내란을 확대 조종케하여 민중을 교란속에 들게 하는 상황이다. 저번 쏘련측에서 조선에서 미쏘 양 군이 동시 철퇴하려고 제의한 숨은 의도가 어디 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남조선에서 군정의 원만한 정책에 불만의 뜻을 표명하는 동시에 조선이 쏘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단연 방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조국 방비의 수단으로 남조선 각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 생도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주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 1947년 10월 18일 <동아일보> 朝美 學藝交煥會- 오늘 德壽校에서
조선학교와 미인아동학교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오는 18일 서울시 용산에 있는 미국인 학교의 교사와 아동 일동을 서울시 덕수국민학교에 불러다 조선아동들의 수업 상황을 견학케하고 서로 학예교환회도 열기로 되었다고 한다.
  • 1947년 10월 18일 <동아일보> 學生에 洋服 한벌씩 - 來月 京畿道에서 配給
價格은 單 七百圓也
상무부에서는 남조선 중등학교 이상 각 학생에게 값싼 동복을 제공하기 위하여 방금 約 19만 착을 각 피복공장에서 제조 중이라는데 서울시와 경기도 활당량인 約 5만착은 이미 제복이 완료되어 가격이 사정되는대로 각 학교에 배급되리라 하며 지방에서도 1월 상순경에는 배급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물자의 배급 경로는 중앙 代行 機關을 거쳐 생산 가격의 2할 5부를 가산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입수되었던 것인데 이번 양복 배급은 중간 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생산자 가격으로 학생들에게 배급되리라는 바 기지는 흑색 능단으로 가격은 한벌에 約 七百원 내외라 한다.
  • 1947년 10월 22일 <동아일보> 京畿道 主催 敎育 展覽會 21日부터 仁川에서

@실제날짜:471021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의 교육전람회를 인천 신흥국민학교에서 오는 21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동 전람회는 33관의 대설비로 교원과 학도들의 작품은 물론 문화계의 귀중한 사적 발명품 등도 수천 점 진열될 것으로 이미 참관 희망자가 각 도로부터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 일반의 참관도 환영한다고 한다.
  • 1947년 10월 23일 <동아일보> 學窓에 不祥事 - 高大 商大 兩校生 衝突

@실제날짜:471020

지난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올림픽경기의 고대와 상대 럭비전에서 사소한 원인이 동기가 되어 양교 학생간에 충돌한 사실이 있었는데 20일 상오 11시경 돌연 일부 고대 학생이 상대 교사를 습격한 후 동교 학장 朴容夏 씨외 수명의 교수와 동교 학생을 돌, 장작 등으로 구타하여 중경상자 50여 명을 내었는데 방금 19명은 경성여자의대 병원에 입원가료 중이다. 한편 고대생 40여 명은 성북서에 유치 취조를 받고 있다. 그리고 상대에서는 유리창 그외 교구의 파손으로 22일까지 교내 정리를 하기 위하여 휴교하였다 한다.
金 地方檢察廳長 談
이번 고대 상대의 불상사에 대하여 김용찬 서울지방 검찰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를 창건하고 있는 오늘 학생들이 집단적 행동을 취하여 교사 파괴와 아울러 학생들을 구타한 행동은 실로 학생의 素行이 아니라 폭도들의 행위라고 본다. 그러니만치 이에 대한 조사를 관계 경찰서에 엄명하는 한편 송청되는 대로 엄중한 처단을 가할 작정이다."
兪文敎部長 談
대체 이와 같은 사건의 발생은 조선 교육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에 대하여 불상사며 불명예다. 나도 상대에 가서 현장을 보았는데 참 눈으로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에 대하여 문교부로서는 당사 학교에 재조사를 철저히 시키고 있는 중이며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당사 학교 책임자와 리사회를 소집하여 구체적 대책을 강구 예정이다.
  • 1947년 10월 24일 <한성일보> 新朝鮮 敎育 建設에 貢獻- 道學務局 主催로 2대 展覽會
경기도 학무국, 경기도 각 부군 공동 주최로 조선 교육 건설에 공헌하고자 제2회 경기도 교육전람회를 인천 신흥공립국민학교에서 오는 26일부터 31일까지 제1회 경기도 교육연구발표회를 인천 창영공립국민학교에서 오는 28일, 29일 양일에 걸쳐 각 각 그의 전람회가 있으리라는 데 이 부대 행사로 인천 부내 각 초등학교의 학예회, 아동문화생활 등의 시찰이 있으리라 한다.
  • 1947년 10월 25일 <독립신보> 교육전람회 각도에서도 개최
문교부에서는 금년에 들어 대중 교화와 교육 건설을 위하여 남조선 각도에서는 10월 부터 11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일제히 교육전람회를 개최하게 되어 이에 대한 일반의 기대는 자못 크다.
  • 1947년 10월 25일 <독립신보> 알바 기브슨 씨 문교부 고문에 취임
문교부 고문 원환경 박사는 최근 현직을 사임하고 연희대학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임에는 경기도 학무국 고문 알바 기브슨 씨가 임명되었다 한다.
  • 1947년 10월 25일 <동아일보> 兒童 돈 450萬圓 먹은 學生服 詐取漢 逮捕

@실제날짜:471022

국민학교 아동을 속인 사기한 - 시내 을지로 1가 168 東邦被服공사 洪鐘鳴(37)은 경기도내 60여 국민학교를 돌아다니며 아동용 동복을 1착 5백 70원에 배급하겠다고 하고 상부 직인을 위조한 공문서를 들고 다니며 450만 원을 사취하였는데 22일 수원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 1947년 10월 26일 <독립신보> 인천교협 사건 기소

@실제날짜:471025

서울지방검찰청 오제두 검찰관은 그간 인천교협 사건 관계자 고인석 씨외 18명을 취조 중이였는데 작 25일 포고 2호 위반으로 다음과 같이 처분하였다. 
   기소: 고인석, 손희일, 한남수 외 1인
   기소유예: 이기호 외 14명
  • 1947년 10월 26일 <한성일보> 京畿敎育展覽會에 敎文館 特設
금 26일부터 6일 간 인천에서 개최되는 경기도 교육전람회에는 "교육문화관"을 특설하게되었는데 동 회관은 서울의 저명한 50여 출판사에서 그 설치비를 거출하여 시설한 것으로 여러 가지 문화자재, 도서, 문헌 등을 전시하여 조선의 출판 문화 실정을 보이고 부설 즉매관(卽賣館)에는 해방 후 출판된 각종 도서를 설치하여 그 동안 출판계의 비약적인 활동을 나타내어 일대 호화판을 이루리라는데 벌써부터 인기와 기대는 매우 높다 한다.
  • 1947년 10월 26일 <한성일보> 洪川中學校 建立 美談
강원도 홍천에는 중학 건설 문제에 기지와 기금 문제로 우울에 싸여 있던 중 마침 홍천 읍내 독지가 엄만봉 씨가 가장 적당한 기지인 홍천면 이방리에 있는 시가 50만 원의 과수원을 제공하여 일반의 칭송이 자자하다 한다. (홍천지국)
  • 1947년 10월 28일 <독립신보> 교육연구회 개최

@실제날짜:471031

문교부에서는 국민교육 계획안의 실시에 관하여 각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져 오는 31일 부터 2일간 각도 학무 당국 관계자를 소집하여 교육연구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2개월 만에 한번 씩 이러한 연구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 1947년 10월 28일 <동아일보> 새敎育의 金子塔, 多彩로운 敎育展覽會
26일부터 인천에서 개최
36년간의 몸서리치는 왜정의 침략 교육을 이땅에서 물리치고 우리 새 조선에 적합한 민주주의적 교육 재건에 노력하여온 지 2년여, 그동안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도가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애로를 무릅쓰고 분투하여 새교육 건설에 이바지 하여온 그 업적이야말로 거대하다 할 수 있다.
이 때를 맞이하여 이번 경기도에서는 인천 新興國民學校에 진열하고 지난 26일부터(31일까지 6일동안) 일반에게 전시하기로 되었는데 그의 성과는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1947년 11월

  • 1947년 11월 1일 <동아일보> 各大學 獨自性 容忍하는 國大 機構 改革 成案乎
서울대학 기구 개혁에 관하여 금년초부터 교내 14부국 사무책임자들이 사무의 중복과 교통 통신 등으로 생기는 물적 심적 손실을 초래하는 종래의 기구의 모순을 지적하고 개혁을 요로 당국에 요청하여 오던 바 입의에서도 이 문제에 관하여 각 분과 대학의 독자성을 충분히 고려할 것을 당국자에 진언한 바 있는데 조선인 이사회와 교무위원회에서는 학장회의 의견과 기외 각 방면의 의견을 신중히 토의, 첨삭하여 성안을 얻어 근일내로 이사회에 정식 상정케 되었다 한다.
  • 1947년 11월 1일 <동아일보> 不正 專門大學 文敎 當局서 調査
배움에 불타는 학도를 상대로하여 문교 당국의 정식 인가도 없이 소위 사설 전문대학원의 간판을 붙인 학원이 범람하여 교육계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에 비추어 문교 당국에서는 방금 조사를 촉진 중이거니와 현재 서울시내에서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는 최근의 한국대학원을 추가하여 27교 밖에 안되며 소위 전문대학의 간판을 내건 부정 학원이 14교나 된다고 한다.
  • 1947년 11월 1일 <한성일보> 敎育展 盛況
해방 후 2년 간의 민주 교육의 총결산을 자랑하고 총경비 196만 원을 들여 경기도 학무국 주최로 인천서 교육전람회가 개최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대성황을 이룬 동 전람회의 출품 작품 총 점수는 무려 31,757점으로 이 작품은 35관에 나누어 진열되었는데 회기는 명 2일까지 연기하였으며 동 전람회의 심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초등교 1등 인천신흥교, 수원○○교, 개성고려교
   ▲ 중학교 1등 인천공업교
   ▲ 부군별 전람회 1등 인천 ; 2등 개성, 수원 ; 3등 ○○, 광주, ○○
  • 1947년 11월 2일 <한성일보> 檀國大 設立- 趙喜在 女史 1억원 喜捨
시내 돈암동 471의 47에 거주하는 조희재 여사는 그 따님 박정숙 씨와 더불어 고인이 된 남편의 유지를 계승 실천하고자 시가 1억만 원의 토지를 희사하여 단국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는 데 동 대학은 문리학, 법학 두 학부로 물리학과, 수학과, 정치학과, 사학과, 법학과의 다섯 과를 두어 근일 중 개교를 보게 되었다는 바 교육계는 물론 사회 일반의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한다.
조여사 病中 談
박기홍(朴基鴻) 씨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는 70 노령으로 병석에서 단국대학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변치 못한 나로서 고인의 뜻을 두고 못하신 사업을 오늘에 이루게 되니 나로서는 감회가 깊으나 이것을 잘 육성하여 문교 당국과 사회 여러분의 협력으로 크게 발전하기만 바란다.
  • 1947년 11월 2일 <한성일보> 李 國大 總長 就任
국립서울대학교 총장 이춘호 씨는 지난 10일 입의 본회의에서 동 씨의 총장 임명이 정식으로 결정되었으므로 헬믹 대장은 동 씨를 정식 임명하였다 한다.
  • 1947년 11월 4일 <한성일보> 美國도 入學難
華盛頓 3일발 共立 전국 1,778개의 고등교육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금추의 전문대학 입학자 수는 2백 30만 명의 기록적 숫자를 내고 있다. 이는 전쟁 전의 등록 숫자에 비하여 백만 명의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작년도에 비하면 20만 명의 증가이다. 이로 인하여 각 학교 당국은 경영과 교육 방면에 있어 중대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고 입학자 수가 가장 많은 학교는 다음과 같다.
▲ 紐育대학 46,412명   ▲ 加州대학 42,000명    ▲ 미네소타대학  28,312명
▲ 일리노이대학  26,729명
  • 1947년 11월 5일 <동아일보> 敎育展에 出品된 新案發明 表彰
지난 26일부터 동 31일까지 인천에서 열리었던 경기도 교육전람회는 11월 1일까지 연기를 보아 대성황리에 막을 내리었는데 이번 전람회에 출품된 것은 공예품 등 도합 3만 4천여점으로 그중 특기할 것은 신안 특허를 맡을 만한 우수한 공예품이 두 가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2등상을 탄 자동식 계수기로 이것을 고안한 이는 경기도 용인군 용인교 4학년생 金昌永 군이고 다음은 인천 공업학교 생도의 목판 선반기, 이것은 나무로 나무를 깍아 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製麵機로 인천공업학교 생도 제품, 다음은 일등 상을 탄 南漢山 西將台를 모형한 공예품으로 이것은 광주 남한산국민학교 교사 일동이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문교부 전람회에도 계속 출품 후 박물관에 보내기로 되었다 한다.
  • 1947년 11월 6일 <독립신보> 교원 부족치 않다. 서울시청 이학무국장 담

@실제날짜:471105

서울시 이학무국장은 5일 출입 기자단과 회견하고 현재 공립만 61교 20만 명의 아동을 수용하고 있는 시내 국민학교 제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신학기부터 국민학교의 2부제 또는 3부제 실시로 인한 실정은 여하 
답: 시 국민학교는 특수한 학교에 한하여 약간 2, 3부제를 실시하고 있을 뿐이고 원칙적으로 실시를 인정치 않고 있다. 더욱이 상급생은 일반적으로 2부제 실시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저학급생들은 학력 양성과 동시에 학교 초보 생활인 훈련에 치중하고 있다. 
문: 엄동 추위를 앞두고 시내 각 학교 연료 사정은 여하 
답: 관계 기관과 긴밀한 연락을 하여 학교 수업에 지장에 없도록 유의하며 우선적으로 학교에 배급하도록 계획을 추진 중이다. 
문: 국민학교 교원 부족과 아울러 신교원 채용으로 질적 저하가 현저하다는데 
답: 현재 국민학교 교원 부족도 없고 질적 방면에는 다소 저하가 된 점도 있으나 이것은 교원 재교육, 강습 등을 통하여 질적 향상에 치중하고 있다. 
문: 일반 학부형의 불만이 많은 돈암국민학교에서 증축기금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교정에서 저속한 흥행 극단 가설 무대를 설치하고 아동들에게 입장권 등을 팔게 한 사건은 여하 
답: 그것은 학부형들의 열렬한 애교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적극적 행동도 있었으나 장래에는 교육적으로 보아 탈선되는 경향이 없도록 단속할 방침이다. 그밖에 지난 교협 사건으로 인하여 자진 사직한 사람은 약간있으나 정식 파면한 사람은 한명도 없고 앞으로 신중 조사하여 처리하겠다. 또 수학 여행에 대하여는 교통 기관 혼잡으로 당일 귀환할 수 있는 원족만을 인정키로 되었다.
  • 1947년 11월 6일 <독립신보> 국대 학생처장에 이선근 씨 취임
한성일보 주필, 대동청년당 부단장인 이선근 씨는 이번 국립서울대학 학생처장에 취임하였다.
  • 1947년 11월 6일 <한성일보> 國大 學生處長- 李 本社 主筆 就任
본사 주필인 한편 해방 이후 청년 운동에 헌신 노력하여 오고 역사학자로도 이름이 알려진 이선근(李선根) 씨는 이번 서울국립대학 학생처장에 취임하여 앞으로 한동안 말썽많던 국대 학생 훈육에 커다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 부처장에는 박철재(朴哲在) 교수가 결정되었다. 
  • 1947년 11월 8일 <동아일보> 文盲退治에 全力 - 總選擧 앞두고 京畿道서
경기도에서는 총선거를 앞두고 문맹퇴치의 중요성에 비추어 사회교육과에서는 총역량을 이에 집중, 대대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도내 총인구 2,404,238명 중 국문을 해독치 못하는 사람이 311,098명밖에 안되고 그중 13세 이상의 미해독자가 23퍼센트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데 현재 성인교육의 실시 상황은 학교는 도내 151교, 교원 총수 287명으로 취학 중인 사람이 21,232명이나 된다. 앞으로 11,2월 두달 중으로 완전히 13세 이상 문맹은 일소할 계획으로 되어있다 한다.
  • 1947년 11월 9일 <동아일보> 高大, 商大 衝突事件 1名 起訴, 其他 起訴 猶豫

@실제날짜:471106

고대와 상대 충돌 사건의 피고인 고대 姜華永(22)외 23명에 대하여 서울지방검찰청 金炳華검찰관은 그 후 엄중한 취조를 하여어던 바 지난 6일 전기 강화영은 기소키로 하고 나머지 趙炳厚외 22명은 기소 유예로 즉시 석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 사건에 대하여 양 교측에 원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서울지방검찰청에서는 지난 3일 전기 양 학교 책임자들을 초청하여 오해없는 원만한 해결을 짓고 4일은 양교 학생 대표들 20명이 모여서 동 사건에 대한 사과를 통하여 금후로는 또 다시 이같은 불상사가 없도록 노력할 뿐만 아니라 최고 학교의 명예를 다하여 화목을 지킬 것을 굳게 約束하고 원만한 해결을 보았는데 고대에서는 상대에 파괴된 유리창 전부를 변상하기로 하고 파손 수리금으로 25만 원을 지불키로 하였다 한다.
  • 1947년 11월 11일 <독립신보> 단국대학 등에 정식인가 하부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월 한달 동안에 남조선에 대학 2교와 중학 5교가 신설되었다는데 교명은 다음과 같다. 
도립이리농대, 단국대학, 강릉공립수산초중, 원주공립초중, 평택공립초중, 호서공립원예고중, 방어진초중
  • 1947년 11월 11일 <독립신보> 문교부장 유억겸 씨 서거

@실제날짜:471108

과도정부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8일밤 10시 30분 가회동 9번지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하였는데 향년은 53세, 영결식은 12일 오전 10시 군정청앞 광장에서 거행하기로 되었다. 씨는 고 유길준 씨의 이남으로 1920년 동대 법과를 마치고 돌아와 중앙중학과 연희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년간 미국에 가서 교육시찰을 한 후 연대 학감을 걸쳐 1946년 2월 문교부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지난 9월에는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른 바 체육회에서는 장의일까지 일체 경기 행사를 중지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되었다 한다.
  • 1947년 11월 11일 <독립신보> 아직도 倭말 교과서
해방 후 3년이 지나도록 일부 중학교에서는 아직도 일본말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문교부에서는 종이 등 기타 관계로 일정한 통일 교과서는 없으나 그대신 통일 교재 요목을 중심으로 검인정제를 사용하여 지난 달 10월 26일 현재까지 검인정을 받은 교과서의 수는 과학 교과서 9권을 합하여 합 57권이라고 한다. 한편 서울시내 여러 중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과학 교과서 중 특히 유기화학 또는 분석화학 등에 관한 것을 보면 아직도 일부 중학교에서는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국어의 비약적 발전과 창조를 요하는 교과서 편찬과 그 번역은 물론 어려운 일일것이나 그렇다 하여 교수에 다소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아직도 일본말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해방 조선 교육에 다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물의가 분분하다.
  • 1947년 11월 11일 <동아일보> 南朝鮮 中等校 413個校
확충되어가는 남조선의 교육 시설 - 지난 10월 중에 전라북도 이리농과대학과 단국대학을 비롯하여 기타 중등학교 3개교가 증설되었는데 이로써 10월말 현재 남조선 중등학교 총수는 413개교라 한다.
  • 1947년 11월 11일 <동아일보> 文敎部長 兪億兼氏 逝去

@실제날짜:471108

永訣式은 12日 中央廳서 執行
과도정부의 문교부장인 동시에 조선체육회 회장인 유억겸 씨는 지난 8일 밤 열시반 시내 가회동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하였는데 향년은 53세이며 유가족에는 嗣子 명덕 군과 미망인 尹씨가 있다.
씨는 고兪吉濬 씨의 2남으로 1920년 東大 법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중앙중학과 연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년간 미국에 유학한 다음 귀국하여 연대학감과 부교장으로 있다가 光新工業學校長을 거쳐 1945년 10월 연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과도정부의 초대 문교부장으로 있으면서 한편 지난 9월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른 바 그 반생을 교육계와 체육계를 위하여 헌신한 바 그 별세는 각 방면에서 애석히 여기고 있다.
그런데 영결식은 12일 상오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執行하기로 되었는데 장지는 광주군 동부면이다. 그리고 조선체육회에서는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의일까지 일체 경기 行事를 중지하기로 되었다.
  • 1947년 11월 11일 <한성일보> 兪 文敎部長 急逝- 12일 中央廳 廣場서 合同葬
문교부장 유억겸 씨는 뇌일혈로서 지난 8일 오후 10시 시내 가회동 9번지 자택에서 급서하였다. 향년 52세. 동 씨가 생전에 연희전문 교수· 학감· 교장. 또는 8.15 이후 2년동안 문교부장으로서 반생을 바쳐서 조선 교육계에 쌓아온 공적의 탑은 찬연히 빛나며 한편 체육계에 대한 공헌도 불멸의 광채를 발하고 있어 그의 청렴 공정한 인격과 아울러 일반 사회의 애도를 받고 있다.
동 씨의 유가족으로는 嗣子 병욱 군과 미망인 윤희섭 여사 뿐으로 장의는 과도정부, 조선체육회, 문교부 등 합동장으로 오는 12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한 다음 광주군 동부면 덕중리에 있는 선영에 안장하기로 되었다. 동 장의에는 각방면으로부터의 화환은 일체 받지 않고 간소한 생화의 꽃다발만 장식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동 합동장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위원명단 생략- 편자)
  • 1947년 11월 12일 <동아일보> 在職敎員 再訓練 - 高度 敎授標準 維持
朝美共委에서 決定
남조선의 민주 교육을 담당할 교원들의 자격에 대한 일정한 표준을 세우기 위하여 지난 4일 조미공동위원회를 열고 신중히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침을 결정, 발표하였다.
一. 재직 교원의 일정한 재훈련을 실시하여 고도의 교수표준을 유지하도록 할 것.
二. 임시 자격과 정식 자격에 대한 두 가지 증명서를 부여할 것으로 임시 자격을 가진 교원에 정한 횟수의 재훈련을 시켜 정식 자격을 부여 할 것.
  • 1947년 11월 13일 <독립신보> 교실과 교원 태부족
의무교육제 실시를 앞두고 취학 아동이 늘어가는 반면에 교사와 교원이 부족하여 초등교육 발전에 커다란 암초가 되어 있다.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들어서 69,159명 신입 아동을 포섭하게 되어 학급수도 616이나 증급하여 총학급수 5,257에 355,079명이나 수용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민학교 아동을 수용하기에는 약 7,000여 교실을 필요로 하는데 현 교실수는 3,300여에 불과하며 이것을 이부제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또한 그보다도 긴급한 문제는 교원 보충 문제인데 금년도 문교부 예산에 비추어 보면 현재 경기도내 현 교원수 5,353인에 대하여 겨우 3,300여 명 분의 예산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니 서울과 같이 후원희 조직이 강력하지 못한 지방 및 농촌 학교에서는 이 부족 교원 보충 문제로 크게 부심하고 있어 초등교육계의 위기를 고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11월 13일 <동아일보> 兪文敎部長 告別式 - 昨日 中央廳에서 執行

@실제날짜:471112

고 문교부장 유억겸 씨의 영결식은 12일 상오 10시부터 과도정부 중앙청광장에서 중앙청 직원과 체육단체 남녀 중등 대학 대표학생 등 5천여 명의 참석으로 엄숙하게 執行되었다.
먼저 鄭一亨 씨의 사회로 개식, 수도경찰청 악대의 주악과 애국가 봉창이 있은 후 최규동 씨의 略歷 소개, 金우현 씨의 기도, 이화여자대학생의 조가합창, 金鐘大목사의 성경낭독, 梁柱三 씨의 예문 낭독이 있고 딘 군정장관, 안민정장관, 최현배 씨, 백낙준연희대학총장, 이춘호국립서울대학총장, 신기준 조선체육회 부회장, 변성옥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의 마디 마디 눈물을 머금은 조사와 양주삼 씨의 기도, 수도경찰청 악대의 주악으로 상오 11시 반 폐식하였다.
그리고 이어 생화에 쌓인 고인의 영구는 첩열 조직들의 서글퍼하는 가운데 운구위원들의 손으로 영구차에 옮겨 일로 광주군 동부면 덕중리 장지로 영원히 떠났다.
  • 1947년 11월 14일 <독립신보> 오늘은 국제학생 데 - 민주학연 담화
오늘 14일은 국제학생의 날이다. 이 날은 전세계의 민주 학생들이 친선과 단결을 굳게 하여 팟시즘 타도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맹서하는 날인 것이다. 이 날 세계 각국의 민주 학생들은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한 학생의 사명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자유를 달라고 호화스런 행사를 베풀게 되었다. 이날을 맞이하여 민주 학생 연맹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민주 학원 건설하자
1. 우리 조선 민주 학생은 세계 민주 학생에게 뜨거운 악수를 보내는 대신에 그들과 더불어 일층 동지적 결합을 굳게 하여 이차대전에 있어 연합국 인민 특히 청년 대중의 피로써 얻은 고귀한 열매 평화와 민주를 죽음으로써 수호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2. 현하 우리 조국 조선은 새로이 대두하는 팟시즘 세력과 위탁한 친일 반동 세력의 조량으로 말미암아 자주 독립은 지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으며 과학의 전당이어야 할 학원은 사이비 교육자로서 충만되어 있다. 이에 우리들은 이러한 음참한 현실을 방관할 수 없어 조국의 민주 독립과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총궐기 할 것을 재차 언명하는 동시에 조국 완전 독립을 위한 양 군 동시 철퇴를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 1947년 11월 14일 <한성일보> 就學兒童은 增加- 敎室, 敎員 不足에 當局 對策은?
의무교육제 실시를 앞두고 취학 아동이 늘어가는 반면 교사와 교원의 부족으로 초등교육 발전에 큰 암초가 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 69,159명의 신입아동을 포섭하게 되어 학급수도 616이나 증급하여 총 학급수 5,257에 355,079명이나 수용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민학교 아동을 수용하기에는 약 7,000의 교실이 필요한데 현유 교실 수는 겨우 3,003개에 불과하며 이것을 이것을 2부제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라 한다. 또한 그보다 더 긴급한 문제는 교원 보충 문제인데 금년도 문교부 예산에 비추어 보면 현재 경기도 내 현유 교원 수 5,353명에 대하여 겨우 3,200여 명 분의 예산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니 서울과 같이 후원회 조직이 강력하지 못한 지방 급 농촌 학교에서는 이 부족 교원 보충 문제로 크게 부심하고 있어 초등교육계에 위기를 고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11월 15일 <독립신보> 문맹퇴치 운동 주효 - 경기도서만 40% 감소
해방 후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의 향학열과 문맹퇴치 운동은 방방곡곡에서 불타듯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경기도에 한하여 보더라도 총인구 2,404,238명 중 13세 이상의 인구는 1,412,534이라 하는데 그중 1947년 5월 말 현재까지 국문 해득자와 현재 수강자 수를 보면 1,151,979명이라 하며 미해득자는 겨우 260,555이라 한다. 이것을 13세 이상 인구 비율로 보면 해방 후에 있어 6○%였던 것이 5월말 현재에 이르러서는 22.5%로 저하되었다 한다. 그리고 미해득자에 대한 성인 교육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곧 시작되리라 하며 그에 대한 성과도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 1947년 11월 18일 <독립신보> 초등교원자격시험
오는 26일부터 경기도 학무과에서 시행하게될 초등교원 자격 심사 시험은 시험 기일이 변경되어 12월 4일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시험 과목은 저번 발표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 1947년 11월 19일 <동아일보> 敎員試驗 延期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오는 26,7,8 3일간 실시하려던 초등교원 자격시험을 사정으로 말미암아 12월 4,5,6일로 연기하였다.
  • 1947년 11월 19일 <동아일보> 敎員이 半數以上 不足- 義務制앞두고 國民校에 赤信號
의무교육제 실시를 앞두고 취학 아동이 늘어가는 반면 교사와 교원이 부족되어 국민교육 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주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금년도 신학기에 아동 총수 69,159명을 수용하여 취학시키고 학급수도 616 학급을 중설하여 총 학급수 5,257 학급에 아동 총수는 355,719명을 마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이 국민학교 아동을 수용하는데는 約 7천여 교실이 필요하나 현재 교실수는 불과 3,300밖에 없어 2부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긴급한 문제는 교원 보충 문제로 금년도 문교부 당국의 예산에 비추어 보면 겨우 3,300여 명의 예산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니 적어도 5천여 명이 필요한데 나머지 부족한 교원은 어찌 해결할 것인지 앞으로 주목되는 바이다.
  • 1947년 11월 19일 <동아일보> 弘文大學에 一億萬圓 寄附 - 李興秀氏 美擧
世日鑛業會社 사장 이흥수 씨는 시내 저동 대종교 총본사에서 경영하고 있는 홍문대학관에 동 씨의 소유 시가 1억만 원의 산림을 요지음 기부하여 관계자들을 감격시키고 있다.
  • 1947년 11월 21일 <독립신보> 기부 안낸다고 교원이 학동을 구박!
이럴 수가 있나? 최근 시내 齋洞國民學校를 비롯하여 일부 중등학교에서는 교장 사택 구입비 등을 빙자하고 학동 1인당 수백 원 내지 수천 원의 기부금 또는 후원회비 등을 수시로 요구하여 가뜩이나 생활난에 쪼들리고 있는 일반 학부형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허락하지 않아 이를 납부하지 못하는 학동에게는 학교 당국의 유형 무형의 압박, 차별 대우가 있어 순진한 학동의 동심을 괴롭히고 있어 이는 교육계에 적지 않은 암영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서울지검 차석검찰관 엄상섭 씨는 작 20일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교원의 생활비 보조면 어느 정도까지 묵인할 수 있으나 한계가 지나치는 과분한 기부금 특히 교원의 사택을 산다는 등의 명목으로 엄청난 요구를 하는 것은 학부형을 곤경에 빠트리고 생도들의 순진성을 유린하기 쉬운 행위임므로 검찰 당국으로서는 기부금 취채 규칙 위반으로 적발되는 대로 처단할 것이며 일반 학부형에게 요망하는 바는 이런 종류의 기부금 모집에는 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 1947년 11월 21일 <독립신보> 스미드의 국부론까지- 좌익서적 압수의 넌센스
야만적인 일제의 탄압! 그중에서는 민족 문화의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언론 출판에 대한 억압이었다. 40년동안의 식민지 노예 생활에 향학열에 불타는 청년학도들은 진리 탐구를 위한 모든 진보적 과학적 이론으로부터는 눈과 귀를 가리우고 다만 관제적이고 신화적 우상적인 식민지 탄압과 착취에 이용될 만한 것이 용허되어 왔었다. 8.15 해방을 맞이하던 날 이 강산의 모든 지식인과 청년 학도들이 무엇보다도 기뻐한 것은 일제로부터 민족 해방과 아울러 완전한 언론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뒤떨어진 출판 문화를 적극적으로 육성 강화함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당면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수일전 단행된 좌익 서적 압수 사건은 출판계는 물론 독서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있어 각 서점의 실정을 조사한 바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지난 19일 장수도청장의 담화에 의하면 금번 조치는 절대로 좌익 서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허가 출판물에 대한 취체라고 하였는데 현재의 출판 제도는 납본제로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납본유무를 물론하고 좌익 서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전부 압수되어으며 그중에도 좌익 서적이 아닌 민성, 조선경제 등 정기간행물도 다수 섞여 있다. 더욱 헌책에 대해서는 출판허가 유무가 문제도 않될 터인데 동대문서 관내 각 헌책사에서 좌익 교본도 다수 압수되었으며 그중 웃지 못할 현상으로 자본주의의 시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괴테의 파우스트도 좌익 서적인지 이것도 역시 봉변을 당하였다 한다.
  • 1947년 11월 21일 <독립신보> 추워서 공부할 수 없오-겨울 방학 연기설까지 대두
서울시내 금동 연료 부족은 각종의 중대한 영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가장 큰 타격을 받아 널리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의 연료난이라고 한다. 서울시에서는 그간 각 학교로부터 석탄 배급 신청을 받고 이미 그 배급을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 배급량은 1학급에 1톤으로 시내 초등, 중등, 대학 175교에 대한 배급 총량은 30만톤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이 연료 공급이 극히 우려되고 있으며 배급 석탄으로는 도저히 수요량을 충당할 수 없으므로 각 학교에서는 동기 휴가를 장기간으로 연장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립대학 등 재정이 부족한 곳에서는 3개월 휴가설이 입에 오르고 있으며 다른 학교에서도 동기 휴가의 상당한 장기한의 연장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 그렇지 않아도 해방 이후 학생의 학습력이 심히 저하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연료 부족으로 말미암은 휴가의 장기화는 더욱 학도의 자질과 학력을 저하시킬 것이므로 연료의 시급한 공급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11월 21일 <동아일보> 國民校 敎員 多數 被檢
論山지난 5일 부여 경찰서에서는 돌연 활동을 개시하여 군내 각 국민학교를 일제히 검색하고 그중 교원 約 40여 명을 검거하여 엄중 취조 중, 일부 교원은 일건 서류와 함께 강경검찰지청에 송청하고 나머지 교원은 방금 엄중 취조 중인 바 사건 내용은 전기교원들은 금춘이래 남로당에 가입하고 동당 직속인 교육자협회에 가담하여 교내 적화와 나아가서는 파괴 음모의 적극 행동을 전개할 대 계획이 탄로된 것이라 하는 바 동 경찰서에서는 전기 취조에 따라서 다른 관공서까지 검거의 손이 뻗치지 않을까 일반은 주목하고 있다 한다.
  • 1947년 11월 21일 <동아일보> 文敎部 主催 新敎育建設展
서울시에서는 민주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문교부 주최 신교육건설 전람회 개최를 계기로 하여 서울시 교육특별관을 동화백화점에서 21일부터 30일까지 열고 23, 4일에는 배재중학교에서 남녀중학 학예회, 그리고 26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시내 남녀중학 음악회를 열기로 되었다.
  • 1947년 11월 21일 <동아일보> 前平壤大成中學 서울서 再建
허다한 영재를 길러내인 역수많은 평양대성중학교를 다시 남조선에 재건하고자 월남 동포 유지들은 그동안 활동 중, 마침내 미국 선교부의 원조와 한경직목사의 진력으로 시내 서대문동 2가 전 피어선 성경학교 자리르 교사로 잡고 근근 개학을 하게 되었다.
  • 1947년 11월 21일 <동아일보> 學父兄과 學徒울리는 過分한 寄附 强要

@실제날짜:471120

今後 摘發되면 嚴罰 : 嚴檢察次長 談
시내 모 국민학교를 비롯하여 수 개소의 중등 또한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엄청난 기부금을 졸으는 곳이 있어 학부형들로 하여금 이중 삼중의 고통을 주는 폐단이 빈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조치로써 20일 서울지방검찰청 차장 嚴祥燮 씨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 바 있다.
"교원들의 생활 문제로 부득한 사정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기부를 받는다는 것은 묵인할 수 있거니와 한계를 벗어난 과분의 기부금을 강요하고 특히 교원들에 주택을 사준다는 등 매인당 수천 원이나 되는 거액의 기부를 무시로 요구한다는 것은 실로 생활난에 처하고 있는 학부형들에 크나큰 위협을 줄뿐만 아니라 뻗어나는 동심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에 서울지방검찰 당국으로서는 금후에 있어서 직접 허가가 없이 어떠한 명목의 기부금을 강요한다는 점이 있으면 기부금 취체위반으로써 적발되는 대로 엄중한 처단을 가할 것이므로 학부형도 이점을 잘 고려하여 기부금 강요에는 응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 1947년 11월 21일 <한성일보> 新敎育 建設 展覽會- 다사 다난했던 교육문화를 전시
문교부와 각도시 학무국 공동 주최의 신교육건설전람회가 드디어 많은 기대속에 금 21일 ○○○ 서울중학에서 개막하게 되었다. 즉 금 21일에는 오후 2시 개막식을 거행한 다음 초대일로 하고 명 22일부터는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되었는 바 조선에 있어서는 처음보는 바 ○○○○○○○○○ 학생 단체는 무료고 일반에게는 입장경○비로 일인 10원씩을 받게 되었으며 총 출품점수는 약 35점으로 남조선에 있는 ○○○이 총동원되고 있어 오는 30일까지 15일간에 ○○○ 되었다. ○전람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전람관 내용소개 생략- 편자)
  • 1947년 11월 23일 <독립신보> 교원 훈련소 신설
현재 뭣 보담도 긴급히 요구되는 기술 방면의 교육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한 교육훈련소는 원안대로 명년 4월경 서울에 설립되리라고 한다. 동 안에 의하면 우선 미국으로부터 25명의 저명한 기술교육가들을 초빙하고 문교부에서 선발한 900명의 교원을 6개월간 8주일 교대로 작업장안과 미국 학교의 우수한 교육법을 강의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11월 23일 <독립신보> 대학연합회 조직
금번 해방 조선에서 처음보는 대학연합을 조직하기 위하여 남조선 19개 정규 대학이 회원이 되어 오는 11월 28일 오전 10시부터 과도정부 제1회의실에서 19개 대학 학장회의를 열고 동회에 대한 발기인 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한다. 이로써 각 학교간의 친목을 도모하여 과거와 같이 간혹 발생하던 학교간의 불상사를 없이 할 것이며 각 대학 교육 내용 충실을 더할 것이라고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1947년 11월 23일 <한성일보> 敎員訓練所 設置
민주 사회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교원을 훈련하여 조선의 교육 계획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교원훈련소를 설치하여 명년 4월에 개소하게 되었다는데 교수는 미국서 저명한 교육가 25명이 초청될 것이라고 한다.
  • 1947년 11월 23일 <한성일보> 師大 敎頭 愼驥範 씨 被殺
서울사범대학교 敎頭 신기범 씨는 21일 오후 9시 경 동 대학의 야학을 마치고 동 대학 후문으로 나와 이화동에 있는 자택으로 귀가하는 도중에서 정체 불명의 괴한에게 곤봉으로 후두부를 난타 당하여 겨우 자택에 이르러 문간에 은도하였는데 즉시로 종로 3가 이○○병원에 입원 치료하였으나 22일 오전 11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절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신기범 씨는 京都帝大를 마치고 난 후 교육계에 헌신하여 왔으며 사범학교 때부터 15년 간이나 근속하여온 석학이라 하는 바 동 씨의 불의의 죽음은 각 방면에서 애석히 여기고 있다.
  • 1947년 11월 25일 <독립신보> 교장 몰아내려다 도리어 쫓겨난 송도중학교 교원

@실제날짜:471121

개성 송도중학교장 황석주 씨를 김제도 씨 등 4명의 교유와 함께 좌익이라고 몰아내려는 모략적 동맹 휴학의 인연이 탈로되어 교육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즉 21일 동교에서 일어난 전기 교장 배척 운동은 홍원식, 장익상의 양교유가 허위사실로 교장을 중상하여 생도들을 선동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한편 뇌물을 먹고 교장에게 책임을 돌리였던 오세용 교유도 검찰 당국의 문초를 받고 죄상을 자백하였으므로 홍·장·오 3 교유는 파면시키고 생도 주모자는 무기 정학에 처하였다 한다. (개성발 조선)
  • 1947년 11월 26일 <한성일보> 平澤中學 開校

@실제날짜:471201

(평택지국) 평택 군수 장범교(張範敎) 씨외 기상회 역원 제씨의 노력과 군민의 절대 찬조로 시난 10월 23일 평택공립초급중학교의 인가를 받아 그간 제1학년생 백여 명과 ○○학원으로부터 2학년에 편입한 백오십 명 학생의 신입학생을 신임교장 안익선(安益善) 씨를 맞이하여 12월 1일 정동국민교 가교사에서 개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하며 신교사는 명년 2월말 경 준공될 것이라 한다.
  • 1947년 11월 27일 <독립신보> 京畿道內 初中等校-겨울放學을 延長
추위는 닥쳐 오고 연료는 부족하여 각 학교 간에서는 그 정상수업에 큰 지장을 보이고 있어 다만 겨울 방학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요즈음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대개 예정대로 방학을 시작할 방침이라 한다. 동기 방학에 관한 문교부 방침은 1년 간에 일정한 수업기준일이 있어 이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지방 급 학교 사정에 비추어 적당히 하게 되었다 한다. 그 수업 기준일은 국민학교는 1년에 230일이고 중등학교는 1년에 210일이라 한다. 경기도에 있어 금년도 겨울 방학은 대개 전년대로 국민학교에서는 12월 25일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며 중등학교도 대개 그와 같을 것이다. 학교에 따라 좀더 일찍 시작할 곳도 있을 것이라 한다. 개학은 대개 혹한기와 연료 문제로 작년보다 늦게 시작될 것이라 하며 국민학교는 40일 간 방학에 2월 5일 경에 개학할 것이라 한다. 중등학교도 대략 이와 같으리라 한다.
  • 1947년 11월 27일 <독립신보> 國學大學校- 正式 認可 下附
국학전문학교에서는 그 동안 동 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승격 기금을 확립코자 활동 중이든 바 금번 전기 학교 재단 창설자인 작고한 鄭鳳鉉先生 부인 金女史는 고인의 유지를 계승하여 전재산 약 1억만 원여에 해당하는 토지를 희사한데 이어 또 시내 昌成洞에 거주하는 高鳳基 씨로부터 략 4000만 원에 해당하는 토지의 기부가 있었다 하는데 동 학교 재단은 전기 기부 토지를 합치면 1억 7천만 원이 되었고 신청 중에 있던 문교 당국의 정규대학 인가도 지난 25일 불하가 되었다 한다. 그리고 앞으로 동 대학에는 국문, 사학 양부를 두고 학장 鄭寅普 씨 주도 아래 인재 육성에 노력하리라 하는데 장래의 기대는 크다
  • 1947년 11월 27일 <동아일보> 民主敎育 促進코자 大學聯盟을 結成

@실제날짜:471128

남조선에 고등교육 제도를 일층 민주주의적으로 개혁 운영하고자 문교부 고등교육국에서는 남조선내의 4년제 각 대학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학연맹을 결성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금 28일 상오 10시 중앙청 회의실에서 각 대학 학장이 회합하여 대학연맹 조직 문제와 각 대학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 문제를 토의, 결정하고 이것을 정리하여 과도정부 당국에 각 대학의 총의를 제출할 것으로 이 대학연맹의 건의와 요망을 참작하여 남조선 고등교육 방침을 결정하고 또한 새로운 민주 교육의 시책을 운영할 것이라고 하는 바 그 성과는 장래할 조선의 주인들인 청년 학도들의 질적 도야와 품위 향상에 이바지 하는 바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1947년 11월 27일 <동아일보> 學童 울린 東邦被服 洪鐘鳴 26일 起訴

@실제날짜:471126

서울시를 비롯하여 남조선 각지에 있는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교복을 배급하여 준다는 구실로 수십만 원을 사취한 시내 을지로 1가 168 東邦被服公司 아동 책임자 전과 2범 홍종명에 대한 사건은 그 후 서울지방검찰청 오주영 검찰관의 손으로 취조 중 지난 26일 사기죄로 기소되었다.
  • 1947년 11월 27일 <한성일보> 國學大學 昇格 認可- 1억 7천만 원 財團 確立
화산재단 국학전문학교에서는 국학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승격 기금을 수립코자 활동 중이었다는데 동재단 창설자 고 鄭鳳鉉 씨의 미망인 김씨와 그 자부(子婦) 고대복 여사 맏형 손정의 제씨의 합의로 고인의 유지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전재산 약 1억여만 원에 해당하는 토지를 희사하였다는데 이에 감동되어 시내 창정동에 거주하는 고붕기 씨로부터도 약 4천만 원의 토지를 기부 받아 ○○재단 도합 1억 7천만 원의 재단이 확립되어 문교 당국에 정규 대학으로 정식인가 신청하였던 바 지난 19일부로 인가되었다는데 동 대학은 국문학부와 사학부를 두고 학장 위당 정인보 선생 주도하에 인재 육성에 노력하리라는 바 동 대학의 발전에 일반의 기대는 자못 크다고 한다.
  • 1947년 11월 28일 <동아일보> 國學大學 昇格

@실제날짜:471119

故鄭氏家와 高氏 一億四千萬圓 寄附
접종하는 남조선 교육계의 낭보 - 화산재단 국학전문학교에서는 그동안 대학 승격 기금을 조성 중이던 바 동 재단 창설자 고 鄭鳳鉉 씨 가의 절대적인 협력을 얻어 일억만 원의 토지 기부와 유지 高봉기 씨의 사천만 원 토지 기부로 확고한 재단을 이룩하게 되었으므로 문교 당국에 대학 승격 인가를 신청 중 지난 19일부로 정식 인가되었다.
  • 1947년 11월 29일 <동아일보> 國民校 겨울放學 40日동안 延長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연료 관계로 금년도 초중등학교의 동기 방학을 연장하기로 되어 초등학교만은 오는 12월 25일부터 내년 2월 5일까지 방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등학교도 연장하리라고 하는데 아직 결정을 못 보았으나 초등과 대동소이 하리라고 한다.
  • 1947년 11월 29일 <동아일보> 國民校 新築費 面稅 增收說은 無根 - 京畿道 淡
해방 이후 교육열이 비등하여 각 지방의 국민학교의 新築, 增築 등을 하고 있는데 新築, 增築에 있어 그 기금을 面稅로 증수하는 일이 있어 일반의 물의가 있는데 대하여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 지방제도로 본다 해도 읍면으로서는 초등교육을 처리할 권한이 없다. 다만 지방민이 신영비에서 자기들이 부담하여 增築사업에 착수하였으나 부담이 너무 과중하여 처리가 안되어 읍면이 기부 행위로써 기부금을 거두는 수는 있으나 이것도 도 당국의 인가가 있어야 한다. 면세 운운은 오해가 아닌가 추측된다.
  • 1947년 11월 29일 <동아일보> 東國大學 校舍 新築
해방 이후 조선 불교의 중흥과 교육의 재건에 크다란 힘을 이바지 하고 있는 조선불교 총무원에서는 지난번 대고사에서 불교중앙교무회의를 열고 교사 확장과 교육 사업의 강력한 추진 등 현하 긴급 문제를 토의한 바 있는데 동 회의 석상에서 현재 남조선 사찰의 산림 중 2할을 제공하여 동국대학교 교사를 시내 필동에다 建築할 것을 결의하고 근근 1억 5백만 원의 공사비를 먼저 착공하리라 한다.
  • 1947년 11월 30일 <독립신보> 敎育展覽會 延期
문교부 주최로 방금 서울중학교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는 신교육건설전람회는 11월 30일까지로 마감 예정이었던 바 참관 해당자가 답지하고 있어 12월 5일까지 회기를 연기하기로 되었다 한다. 한편 30일 오후 2시부터 시내 덕수국민학교에서 출품자에 대한 수상식이 있으리라고 한다.


1947년 12월

  • 1947년 12월 3일 <독립신보> 市內 初中等學校 休暇 40일로 延長
서울 시내 초중등학교의 동기 휴가는 연료 부족으로 말미암아 10일을 연장하여 오는 25일부터 명년 1월 24일까지 40일간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그 대신 국민학교는 여름 방학을 5일간 단축한다고 한다.
  • 1947년 12월 4일 <독립신보> 大學聯盟 正式 發足
지난 11월 28일 결성된 남조선 각 대학연맹은 이미 인가된 각 대학과 전문대학 30교 대표가 참석하여 정식 발족을 보게 되었는데 동 연맹은 앞으로 중앙과 지방과의 연락, 고등교육 각 분야의 통일 운영, 신문, 잡지, 연구, 기획, 문교부와의 협력 등을 목적으로 활동할 것이며 임원에는 李春昊 씨 이하 8씨가 피선되었다 한다.
  • 1947년 12월 4일 <독립신보> 민족의 앞날이 심히 우려되는 우리 學徒의 實力低下
학원의 비민주성도 원인의 하나. 해방 이후 우리 학도의 학력 저하와 학습열의 결핍은 일본 학생의 맹렬한 분발과 대조되어 뜻있는 사람의 중대한 관심을 많이끌어 수차 지적된 바 있거니와 이즈음 서울 시내의 학동의 학력 저하는 극히 우려할 상태라고 한다.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저간 시내 남여 중등학교 65교 44,712명에 대한 해방 이후 3개년 간의 성적을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평균 3할이라는 막심한 성적의 저하를 보이고 있으며 학교에 따라서는 5할 정도의 저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 원인을 살펴보면 해방 이후 교원 자질의 급격한 저하, 학교 시설 특히 물리·화학 실험 시설의 불비, 교과서의 부족 등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사회 혼란에서 오는 학습열의 냉각도 주요한 원인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시설 이외의 원인으로서는 학원의 민주화 문제가 절대적인 결함으로 되어있으며 교장 여하에 따라 우수한 교원이 학교를 떠나는 등의 사태가 학원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교육제의 채용 이후 중등학교에서는 고급중학에 올라감에 따라 생도수가 현저히 체감되고 있어 고급중학 1년에 약 3분의 1이 감하고 2년에는 반감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나 특히 여학교에서는 소위 간판이 문제가 되어 고급중학의 간판보다는 대학 간판이 모든 좋은 조건이 됨으로 생도수의 감소율은 여학교에서 더욱 심하다고 하여 신교육제도 실시에 대한 좋은 반성 재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독립 후의 중견 국민인 이땅의 남여 학도의 자질이 급속도로 몰락하여 가고 있음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실 중의 하나로서 교육 당국은 물론 사회 인사의 깊은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다.
  • 1947년 12월 4일 <동아일보> 檀國大學 三日 入學式

@실제날짜:471203

고 조희재 박사의 1억원 재단으로 지난 11일 1일부로 인가된 단국대학에서는 오는 3일 하오 2시 시내 휘문중학교에서 입학식을 擧行하기로 되었는데 오는 8일부터 개강하기로 되었다.
  • 1947년 12월 4일 <한성일보> 南朝鮮中等校 전부 415교
3일 문교부 발표에 의하면 10월 현재 남조선 중등학교 총수는 413(사범중학 또는 사범대학 부속중학을 포함)교이든바 11월 말에 이르기까지 새로히 다음 두학교가 신설되어 11월 말일 현재의 중학교 총수는 415교이다.
▲대광중학교(사립) ▲ 전북 김제초급중학교(공립)
  • 1947년 12월 4일 <한성일보> 檀國大學 開校

@실제날짜:471203

고조재희여사의 1억만 원 재단으로 지난 11월 1일부로 인가된 단국대학교에서는 3일 하오 2시 시내 계동 휘문중학에서 입학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는데 오는 8일부터 1부를 개강하기로 한다.
  • 1947년 12월 12일 <독립신보> 敎員의 移動이 頻繁-質的 問題에도 影響이 莫甚
남조선 교육계에 커다란 암영을 던지고 있던 교원 파면 문제는 그러지 않아도 걱정되는 교원의 질적 향상 문제와 아울러 남조선 사회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고 있었는데 11월 말일 현재로 경기도내 초등 교원의 이동 상태를 살펴보면 지난 7월 현재 초등 교원 총수는 4,200명이었는데 그 후 1,090명이 퇴직하고 그중에는 사상 불순 문제로 91명의 파면 혹은 정직 처분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량의 퇴직 교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1,959명의 신교원을 채용하였다 하는데 신교원들의 실력 여하 문제는 새조선을 건설할 초등 교육의 중대성과 함께 일반 인사의 큰 관심이 되고 있다.
  • 1947년 12월 13일 <독립신보> 敎科書도 모자라는데 不良 參考書만 氾濫
교과서도 제대로 얻어 볼 수 없는 이 때 참고서만이 범람하여 초등교육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현재 문교 당국에서 발행한 초등용 교과서는 지류 부족으로 각 과목을 통털어 7종에 불과하며 검인정을 받은 서적도 17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류난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서점에 각종 서적이 산적하고 있는 가운데 소위 교과서 또는 참고서용 도서가 공보부에 등록된 것만으로 교과서용 111종에 참고서용 113 총합하여 물경224종 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잡종 도서 중에는 영리에 눈이 어두어 내용적으로 보아 비과학적이고 교육적 양심을 상실한 영리 서적도 적지 않아서 교육계에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한다. 이에 대하여 일반은 이와 같은 서적에 소비되는 지류를 조속히 교과서 편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 1947년 12월 13일 <독립신보> 文敎部長 後任에 吳天석 씨 內定
정부회의에서는 지난 9일 제128차 회의에서 방금 결원 중에 있는 문교부장에 현문교부 차장 오천석 씨를, 중앙물가행정처장에 현민정장관 보좌관 이교선 씨를 각각 등용하기로 결정하여 지난 11일 입의에 임명 인준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입의에서는 이날 본회의에 이 안건이 보고 되자 崔鳴煥 씨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은 지난번 인준을 거부당한 강원, 충남 양도지사의 예를들어 "입의에서 인준을 하지 않아도 행정부에서 임명하는 이상 입의로서는 인준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일시 논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자격심사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의하기로 되었는데 입의에서는 이날의 논쟁을 계기로 이후로는 인사 임명에 관한 것은 직접 본회의에 보고할 것 없이 우선 자격심사위원회에 회부 심사한 후 이 위원회의 보고를 본회의에서 토의하기로 되었다.
  • 1947년 12월 13일 <동아일보> 無許可 私設 學校 一般 學父兄 注意하라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뜻있는 학생과 학부형에 대하여 무허가 학교에서 수업료와 수험료를 징수하는데 주의할 것을 경고한 바 있었다.
요지음 신용할 수 없는 무허가 학교 경영자에 의하여 학생과 학부형이 사기당하고 있는 예가 있으므로 시학무 당국에서는 학부형과 학생에 대하여 수업료 납입을 하기전에 사설 교육 기관의 진위와 자격에 관하여 당국에 문의할 것을 요망하고 있다.
  • 1947년 12월 13일 <동아일보> 文敎部長에 吳氏 立議에서 檢討中
딘 군정장관은 立議에 문교부장에 오천석 씨를 임명하고자 하니 인준하여 달라는 서한을 보낸바 있었는데 동 의원에서는 11일 이를 자격심사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보고케 하기로 하였다 한다.
  • 1947년 12월 14일 <독립신보> 數만 늘고 實速없는 敎育界의 發展 狀況
일제의 반노예적인 식민 교육 정책에서 벗어난 조선의 교육계는 8.15 이후 어느 정도 자유로운 발전을 보이고 있어 학교 수에 있어서나 학생 수에 있어서 상당한 飛躍을 거듭하고 있다. 즉 지난 10월 현재의 남조선 국민학교는 3,354교에 아동수가 249만3천462명에 달하고 있고 중등학교는 393교에 21만7,882명의 생도를 수용하고 있으며 사범학교는 16교에 9,567명, 전문대학은 29교에 1만8,607명 이 밖에 국립서울대학교에서는 7,206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어 도합 3,793교에 학생 수가 274만6,724명이라는 방대한 숫자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작년도 동기에 비하면 학교 수에 있어서 국민학교 139, 중등학교 50, 전문대학 6교가 증설된 좋은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교실 부족과 교원의 질적 전하는 여전히 해결할 길이 없어 결과에 있어서 학도들의 학력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반갑지 않은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물론 교실 부족은 충분한 예산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이것을 해결할 길이 있겠으나 교원의 질 문제는 하루 이틀에 이를 양성할 수 없는 만큼 문교 당국으로서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하여 명실 상부한 민주 학원 건설에 시급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요망되고 있다.
  • 1947년 12월 14일 <동아일보> 文敎部長 後任으로 吳天錫氏 昇進

@실제날짜:471209

고 유억겸 씨의 급서 후 결원 중에 있던 남조선 과도정부 문교부장으로 9일 동부 차장 오천석 박사가 취임하게 되었다.
동 박사는 1919년 3월 일본 동경 청산학원(靑山學園)을 졸업하고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 "고-넬"대학을 비롯하여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 "뉴-요크"주 "컬럼비아"대학 등을 거쳐 1932년 4월 귀국 후 보성전문교수, 경성보육학교 교수, 화신무역회사 사원, 상해경화(京華)회사 지배인 등을 거쳐 1945년 9월 문교부 차장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렀던 것으로 왕방한 기자에 웃음을 띠우고 다음과 같은 포부를 피력하였다.
   吳部長 談
"새교육 건설을 위하여 과거 3년간의 시일은 기구의 정비에 힘써왔으나 앞으로는 내용의 확충에로 교학 방침을 쇄신 강화하여야 하겠다. 참으로 이제까지는 양적으로 치중하여 왔으나 금후로는 세계의 교육 수준을 목표로 질적 향상을 꾀하지 않을 수 없다."
  • 1947년 12월 14일 <동아일보> 學校 衛生 施設 强化
경기도에서는 학도들의 보건을 위하여 학교 보건 시설을 확충시키기로 되었는데 우선 예산 관계 등으로 도내 남자중학 3개교와 여자중학 3개교에 미국에서 온 醫藥品, 모포 등을 배급하여 학교 위생 시설을 충실히 하기로 되었는데 앞으로 각 학교의 시설을 확장시키기로 되었다.
  • 1947년 12월 16일 <독립신보> 저물어가는 丁亥- 敎授없는 學園에서 眞理를 探求하는 學生의 悲哀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 씨가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중세기적 교육이 감행되고 있는 남조선의 학원은 실속없이 저물어가는 이 해에 무엇을 남기고 가려 하는가. 이에 우리는 학원의 민주화 운동에 봉화를 드높이 들고 일어선 국대 투쟁을 다시 한번 돌아봄으로써 남조선 교육계의 움직임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괴로운 억눌림에 시달리었던 기나긴 36년 간의 어둠의 장막이 걷히었을 때 벅차는 희망에 우리는 천지의 광영을 가득히 안고 새조선 건설에 위대한 책무를 다하려고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이 강산의 앞날을 축복하며 연구, 설계하는 학도들은 식어가는 정열을 다시 가다듬고 강탈된 지성을 다시 일구어 찾으며 억압당했던 도를 마음껏 펴보려고 학원으로 학원으로 물밀듯이 드리밀렸다. 배우고 읽자! 그리고 토론하자 자유스럽게! 하고 덤비는 성스러운 자태는 날로 우렁찬 대열을 이루었다. 그러나 갸냘픈 이 어린 꽃들의 희망을 짖밟는 차디찬 현실은 이를 비바람 속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이는 곧 작년 8월 갑자기 불어온 국대안 폭풍으로서 드디어 표면화하게 되었다. 작년 여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조선이 당면한 실정을 무시하고 발표된 국대안이 실시에 옮겨진 이후 400여 교수는 재빠르게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동안 실시를 반대하다 못해 대부분이 학원을 등지게 되자 교수 없는 교실을 지켜야 할 운명에 빠진 학생들의 공기도 자못 동요의 빛을 보이여 "교수를 다오", "강의를 듣게 하라"는 소리가 날로 높아오던 중 지난 2월 춘기 개학을 계기로 곪았던 종기는 드디어 터지고 말아 민주 교육 건설의 선결 조건인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8,000여 학도가 제네스트를 단행하였다. 이를 도화선으로 민주 학원 건설을 지향하는 일대 학생 운동은 요원의 불꽃과 같이 삽시간에 경향 각지를 휩쓸어 맹휴에 호응한 대학이 16개교, 중학이 40여교, 참가 인원은 50만 명을 돌파하여 일ㅉ직이 세계적으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대규모의 맹휴로 발전하였다. 이 항쟁의 결과는 8,000여 국대생 중 5,000여 학생을 학원에서 몰아내는 비극을 자아 내었으나 뜻한 바를 굽히지 않고 끝끝내 등록을 거부한 제적 학생 일동의 비극이야말로 이 나라 학생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기록을 남기였으며 또한 진리가 얼마나 그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은 바 있다. 이와 같이 국대 투쟁은 경농의 십수차례에 걸치는 맹휴 선풍과 메데 사건을 계기로 하는 배화여학교의 농성 사건과 더불어 지나간 해 동안에 일어난 학생 운동으로서 문자 그대로 행로를 밟았는데 이 발자국은 반드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상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역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 1947년 12월 16일 <동아일보> 幽靈學園을 一掃 - 文敎部 一般에 注意 喚起

@실제날짜:471215

靑雲에 뜻을 둔 청년들의 향학열을 이용하는 학원 모래배가 속출하여 새교육 건설에 허다한 지장을 가져오고 있으므로 문교부에서는 15일 공보부를 통하여 현 남조선의 정규 고등교육 기관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금후 신문 기타 공고를 통하여 선전하고 있는 유령 학원의 학생 모집 등에 일반의 주의를 환기한 바 있다.
   一. 국립서울대학교       국립
   二. 연희대학교           사립
   三. 고려대학교            동
   四. 이화대학교            동
   五. 성균관대학            동
   六. 동국대학              동
   七. 세부란스의과대학      동
   八. 중앙여자대학          동
   九. 경성성신대학          동
   十. 국학대학              동
   十一. 청주상과대학        동
   十二. 대구의과대학       도립
   十三. 대구치과대학       국립
   十四. 대구사범대학        동
   十五. 대구대학           사립
   十六. 국립부사대학교     국립
   十七. 광주의과대학        동
   十八. 춘천농과대학        동
   十九. 이리농과대학        동
   二十. 단국대학           사립
   경성여자醫學전문학교
   경성여자藥學전문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
            이상대학인가 수속 중
   한양공과대학교
   경성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조선신학교
   건국대학교
            이상 대학령에 의한 각종학교
   이외에 각도에 11개의 경찰학교가 있고 형무부 소속의 국립경찰전문학교 1교, 통위부 소속의 조선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조선상선학교 등이 있다.
  • 1947년 12월 16일 <한성일보> 大學만 南朝鮮에 20교
○○신성한 학원을 무대로 사욕을 노리는 뿌로커가 적지 않게 발호하고 있어서 건국 도정에 있는 교육계에 커다란 관심사로 되어 있다. 특히 8.15이전에 있어서 좁은 문에 억눌리어 소위 각모를 동경하던 청년 학도들을 울리고 있는 모호한 대학 간판을 부친 곳도 적지 않은 바 작 15일 현재로 문교 당국으로부터 대학교로서 정식 인가를 받은 것이 20교이며 한편 아직 정규 대학으로 인가는 되지 않았으나 문교부 승인을 받은 곳이 7교, 그리고 각종 전문학교로서 대학 승격 수속 중에 있는 곳이 3 교로서 교명은 다음과 같다.
▲ 정규대학
 국립서울대학교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대학교 성균관대학 동국대학 세부란스의과대학
 중앙여자대학 경성성신대학 국학대학 청주상과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치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대학 국립부산대학교 국립광주의과대학 춘천농과대학 이리농과대학
 단국대학
▲ 수속 중인 대학
 경성여자醫學전문학교    경성여자藥學전문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
▲ 대학령에 의한 각종 학교
 한양공과대학교 경성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조선신학교 건국대학교
이외에 각도에 11개의 경찰학교가 있고 형무부 소속의 국립경찰전문학교 1교, 통위부 소속의 조선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조선상선학교 등이 있다.
  • 1947년 12월 21일 <독립신보> 오늘부터 중등교 放學- 國民學校는 25일에 시작

@실제날짜:471220

작 20일부터 서울 시내 각 남여 중등학교의 동기 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번 방학은 심각한 연료 문제를 고려하여 명년 1월 말일까지 40일 간에 걸쳐서 실시하기로 되었는데 특히 오랜 방학동안 교원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자 교육문화협회에서는 중등교원들에 대하여 국어, 사회생활, 율동, 음악 등 각 전문과에 대한 강습을 실시하리라고 한다. 한편 국민학교 아동의 방학은 25일에 시작할 터이라고 한다.
  • 1947년 12월 24일 <한성일보> 愼 敎授 殺害한 學生 5명 起訴
기보한 바 사범대학교수 신기범(愼驥範) 씨를 살해한 사대부속중학 학생 이기흥, 전광원, 원광원, 이순의, 이조욱 등은 그간 서울지방검찰청 이원희 검찰관의 담당 취조 중이던 바 22일 기소 처분을 하였다 한다.
  • 1947년 12월 26일 <독립신보> 學習參考書가 首位- 圖書出版의 지난 1년간 統計
금년 1년 간 남조선 출판 도서 경향을 보면 일반적 지류난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및 지방을 합하여 11월 말 현재까지 발행 부수는 943책에 달하고 있는데 그 분포 상황을 보면 대체로 서울을 중심한 경향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출판물의 대부분은 저속한 것이며 특히 일부 출판업자들의 영리주의적 소산이 많다 한다. 이것을 서울 및 지방 구분으로 보면 서울에서 출판된 것이 864책이고 지방은 서울의 10분의 1도 못되는 83책에 불과한 한심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 출판 경향을 도서별로 보면 학습참고서가 160책으로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제2위는 교과서며 책수는 134책이며 제3위는 정치서적이 100책, 제4위는 소설 희곡이 70책, 제5위는 역사 서적이 52책 등으로 출판되고 있다. 이것을 월별로 보면 9월에 124책이 출판된 것이 제1 기록이었고 제2위는 11월의 117책이었고 제3위는 6월에 100책으로 되어있다 한다.
  • 1947년 12월 26일 <한성일보> 敎學 熱意는 高調- 施設의 簇出 學徒의 增加
해방 후 지난 날 일인들이 가로 막고 있던 학원으로 통하는 좁은 문은 넓어지기 시작하여 무엇보다 교육열을 자아 내었다. 이 교육열은 이해에 들어서는 더욱 ○○ ○○○거닐어 왔다. 정신적 구각을 하루 바삐 깨끗이 탈출하고 민주주의에 입각된 방향으로 새출발하게 하는 교육의 중요성은 새삼스럽게 조선 교육의 현실은 저으기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야.
이제 지난 10월 현재로 남조선 교육의 현황을 일별하면 우선 초등학교는 2,254교로 동 재적 학생이 2,493,462명이며 교원은 36,382명으로서 작년 동기에 비하여서 139교 학생 238,166명 교원 5,938명의 각각 증가를 보이고 있다. 다음에 중등학교는 393교, 재적 학생 217,882명, 교원 7,568명으로서 작년 동기에 비해서 50교, 학생 69,761명, 교원 2,147명이 각각 증가되고 있다. 그리고 전문대학은 30교 동 재학생 25,813명 교수 2,775명으로서 작년 동기에 비해 보면 6교, 재적학생 11명, 교수 1,235명이 각각 늘었다.
한편 성인교육도 상당히 실천되어서 지난 8월 현재 공민학교가 14,261교, 국문해독자가 850,○12명으로서 작년 동기에 비하여 공민학교 11,165교, 국문해독자 822,587명의 대량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엄청난 물가고와 정비례로 교육 재정이 병진되지 못하여서 앞길에 애로가 복재하게 하고 있다. 즉 금년도 문교부 예산은 16억 5천 9백여 만 원으로 작년도에 비하여서 ○억 5천여만 원이 증가되기는 하였으나 건국 전야의 문교비로서는 극히 빈약하다. 따라서 ○○○○○ 학교증설이 여의치 못하여서 현재 부족 교실이 초등학교 13,025, 공립중등학교 526, 사범학교 49씩이나 된다. 이에 따라 의무교육도 대도시에만은 2부 교육으로 간신히 실시를 보고 있으나 농촌에 있어서는 많은 실시가 못되고 있다.
그리고 교과서 발행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어서 금년도 발행 부수가 초등학교 5,048,65부 중등학교 92,525부로서 작년 동기에 비하여서만도 초등학교 167,475부의 발행 감소를 보이고 있는 것은 원인의 대부분이 심각한 용지난에 있다 할지라도 교재의 부족으로 동심의 불붙는 향학열에 던지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강력한 타개책의 급속 강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제 문교부의 정해년을 회고하여 볼 때 역시 다난하였다는 느낌이 굳세게 떠오른다. 8.15 이후 조선 교육계를 위하여서 심혈을 기울이던 문교부장 유억겸 씨가 급서하고 동 수석 고문으로 조선교육을 위하여서 헌신하던 원한경 박사가 성명을 던지고 퇴진하였으며 문교부청사가 일부이나마 祝融亂舞의 세배를 닫은 것 등 서글픈 사실의 한토막들이 있다.
  • 1947년 12월 27일 <한성일보> 敎科書 難이 尤甚- 出版業者에 協力 要請
용지난과 아울러 인쇄계의 애로에 가로 눌려 금년도의 중등학교 교과서 출판은 겨우 9만여부로서 중등 교육 팽창에도 불구하고 작년도 동 출판 25만 9천부의 3분지 1에 지나지 못하는 형편인데 특히 실업 중등학교 교과서는 전혀 출판이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건국 도정에 있어서 실업 교육의 중요성에 비추어 문교부에서는 24일 오후 2시 시내 출판업자 30여 명을 동 회의실에 초청하여 문교부장 오천석 편수국장 최현배 양 씨 임석아래 실업 교과서 출판 촉진책을 토한 바 있었는데 우선 다음의 8 출판사를 위원으로 선정하여 구체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동 6시 폐회하였다 한다.
정음사, 문화당, 동방문화사, 박문서관, 교학도서, 동지사, ○○사, 국제문화협회
  • 1947년 12월 31일 <동아일보> 學究에 불타는 苦學生의 生活 - 갈돕會宿舍 訪問記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서울시가의 시위 行進 등 3.1운동의 주도권을 가졌던 것이 학생이었고 6.10만세사건 역시 그러하였고 앞으로 건국 운동을 추진하고 또 국력의 선봉이 될 것이 또한 조선의 학생일 것이매 건전한 민족적인 정신을 가지고 조국애에 불타는 정열의 청년 학도를 기르는 것이 명일의 발전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고 그러므로써 교학의 쇄신, 교육자의 인격도야, 학생기풍의 시정, 장학사업의 발전 등이 오늘과 같이 절실이 요청되는 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외세의 制約으로 혼란에 빠지고 세계적인 인푸레 민생을 울게하는 조선의 오늘 이 중대한 문제와 이 절실한 요청이 그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판국이니 어찌 슬프다 하지 않으랴? 민주 교육이란 제자가 스승을 죽게하고 선생이 학생을 선동하여 착함을 있게하려는 것이 아닐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 교육의 압박과 굴욕에서 갑자기 무제한 자유를 가져온 이땅의 풍조는 자못 한심한 바 있다 하려니와 자본주의 경제 조직의 필연적 결과로 극장과 요리집을 이웃집 다니듯 하는 청년 학도가 있는가 하면 뜻은 청운에 두었으되 주림과 추위에 진학의 길이 막힌 학도 서울에만도 4천여 명이 있어 긴- 한숨을 쉬면서 다음날 사회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의 외로움과 슬픔을 위로하고 돌아 보아줄 이 누구리오?
기자는 황혼과 함께 짙어가는 정해년을 그래도 도야지와 같은 요기로 싸워오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는 젊은 학도들의 집, 고학생 "갈돕회" 합숙을 찾아 그들의 초인간적인 고투의 살림과 그들의 사정을 들어 만천하 독자와 함께 그들의 장래를 기대하려 한다.
1920년 6월 22일 당시 중앙고보 4학년생이던 崔鉉 씨외 10여 명이 황해도 사람 朱秉祚 씨의 기부금 백 원을 기본으로 하여 고학생들의 상조기관으로 조직한 것이 고학생 "갈돕회"로 이제 28년, 그동안 일본의 압정 밑에서 가진 풍상과 파란을 겪고 지금은 동숭동 합숙에 40여 명, 충정로 제2합숙에 50여 명의 중등, 대학생이 들어 특별위원회 최현 씨를 비롯하여 의학박사 현규환 씨의 도움을 얻어 모든 고난을 이기어 가며 학구의 건전한 단체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영하 15도의 혹한이 지속되는 때에도 그들 고학생은 구두수선공으로 담배장사로 신문배달로 학자와 생활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을 낮에 하고 밤에는 冷突과 다다미방에서 이를 악물고 떨면서 그날의 공부를 마치는 것이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정열과 조국을 보다더 빛내려는 참된 노력이 아니었던 들 감히 맘먹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28년동안 '갈돕만주"로 유명하던 고학생 갈돕회의 문을 통하여 사회에 나온 사람이 한 천여 명, 그들 중에는 의학박사도 있고 문학가, 예술가, 학자, 상급관리 등 지금 이시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도 상당히 많으나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을 못한다"는 속언과 같이 추위에 떨고 주림에 우는 고학생들의 형편을 돌보아 주는 이가 적은 것은 비단 그 분들의 성의 여하보다는 사회 제도의 결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四海에 뛰어나 국위를 선양할 젊은 학도들의 장래를 위하여 조선 사회는 마땅히 뜨거운 원조와 깊은 동정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지난 날을 돌보는 지혜를 가지고 부러운 헤아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48년

1948년 1월

  • 1948년 1월 1일 <동아일보> 國民大學을 逐出 - 市當局 處事에 非難
시내 남산동에 있는 전 東本願寺를 교사로 쓰고 있는 국민대학관을 서울시에서 사용한다 하여 30일 상오 10시경 축출명령을 당하였는데 시에서는 동 교사를 관현악단의 연습장과 후생기관에 사용하리라고 하는데 시로서는 교사까지 뺏어서 쓰려는 것은 이해치 못할 시당국의 처사라고 물의가 분분하다.
  • 1948년 1월 15일 <동아일보> 國民大學生 三名 軍栽에

@실제날짜:480112

국민대학관 명도형 사건에 의하여 그동안 중부서에 구금, 문초를 계속 중이던 동 대학 학생 鄭준환, 白시원, 申鉉澤 3명은 12일 군정재판에 회부되었다 한다.
  • 1948년 1월 20일 <동아일보> 牛乳가루 大量 入荷 - 各學校에 配給
이땅 아동들의 보건 위생과 영양 확보를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392만 폰드의 우유가루가 들어와 각 학교를 통하여 적당하게 배급하기로 되었다.
이번 들어온 가루 우유는 지난번 미국의 세계 기독교협회의 손으로 사들여 최근 후생부를 통하여 배급된 6만 폰드의 물자와 한마디로 아세아 구제회를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아동 보건을 위하여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1948년 1월 20일 <동아일보> 學生指導 座談會

@실제날짜:480117

자칫하면 문란하기 쉬운 남녀 중등학생들의 교외 생활을 선도하기 위하여 앞서 발족을 본 서울시 중학생 교외지도연맹에서는 17일 정오부터 제2여자중학교에서 문교부, 각신문사 그외 각계 대표 다수 참석아래 좌담회를 개최하여 고학생 구호대책, 중학생 교외지도, 중학생의 가정교육 등에 대한 토의가 있고 하오 4시경 폐회하였다.
  • 1948년 1월 21일 <동아일보> 國民大學生 釋放
국민대학 교사 철거 문제 당시 경찰에 항거하다 중부서에 구치된 동 대학 학생 3명은 지난 15일 군정재판에서 60일간 체형에 60일의 執行猶豫 언도로 석방되었다.
  • 1948년 1월 21일 <동아일보> 盲啞學校 文敎部에 移管
1912년 창설이래 보건후생부 소속으로 운영하여 오던 맹아학교는 1월 17일 문교부에 이관하여 운영하기로 되었는데 현재 317명의 不幸한 맹아소년을 수용하고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동시 초등학교도 새로이 설치하여 조선의 不幸한 소년들의 장래에 커다란 광명과 희망을 가져오게 되었다.
  • 1948년 1월 21일 <동아일보> 全國學聯 啓蒙隊 15萬 文盲을 退治
총선거를 앞두고 문맹퇴치를 절규하는 전국학생총연맹에서는 동기 방학을 이용하여 동연맹 위원장 이철승 씨를 단장으로 한 호남반과 동연맹 감찰위원장 조병후 씨를 단장으로 한 영남반의 계몽대를 조직하여 지난 12월 20일부터 1천 5백여 명의 맹원이 양 지방의 농촌에 들어가 벌써 연인원 15만 명의 어두운 눈을 띠워주었는데 동연맹에서는 이달 말일까지에는 대원의 상경을 요망하고 있다.
  • 1948년 1월 22일 <동아일보> 兒童의 入試準備敎育 民主主義敎育에 背馳

@실제날짜:480121

李市學務課長 廢止를 警告
중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로 말미암아 한창 발육기에 있는 어린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폐단이 적지 않아 서울시 이(李承宰) 학무국장은 21일 시내 각 국민학교 직원, 생도, 일반 학부형에게 다음과 같이 입학시험 준비교육의 폐해점을 지적하여 이의 폐지를 경고하고 있다.
첫째 발육기에 있는 아동으로 하여금 막중한 부담을 받게하여 신체가 虛弱해질 염려가 있고
둘째 준비교육에 있어서는 특수 과목에 한하여 그것만을 암기식, 해답식으로 치중지도하게 되는 한계상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학교 교육을 완전히 못하게 되며
셋째 개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교육에 배치되는 주입식 교육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부모의 명예와 욕망을 위하여 무리로 준비를 시키어 아동 개성에 맞지 않는 학교로 진학시키어 그 장래를 그릇치게 하며 한편 6학년 담임에 대한 부형의 특수한 사례 등으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학무 당국으로서는 입학시험 제도에 대하여 방금 각 관계 당국과 연락을 하여 가장 적합한 고사방법을 연구하여 준비교육이 무용이 되도록 최선의 방법을 강구 중에 있다.
  • 1948년 1월 24일 <동아일보> 美國留學生을 援助 - 朝美 캘大學同窓會에서
금월 초순경 띤 군정장관 관저에서 남조선내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 졸업생 15명이 출석하여 동 대학동창회를 개최하였는데 그중 조선인 졸업생 5명도 포함되었다 한다. 새로 출발할 동 동창회의 위원에는 전문적 기술 방면을 전공한 졸업생이 대부분이므로 조선인 기술자의 교육과 훈련에 전력을 다할 것으로 도서와 유학생 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그 비용도 동 동창생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 회의에서 선발된 역원은 회장에 黃鎭南 씨 부회장에 대나리-크여사, 간사에 칼 벤센 씨 등이다.
  • 1948년 1월 28일 <동아일보> 不必要한 出版物 統制코 敎科書 出版하라
민주조선의 건설은 민주주의 교육정책의 적극적 추진에 있을 것이면서 혼란 조선의 현실은 이 중대한 과업을 과감하게 실천할 용기와 방략이 부족하여 허다한 폐단을 교육계에 미치게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국민학교와 중등학교의 교과서가 부족하여 완전한 교수를 進行할 수 없고 동시에 민주 교육 이념이 투철하게 반영될 수 없는 형편으로 과거 3년간의 교과서 출판 실적으로 볼 때 예정 수량의 2퍼-센트 내지 5퍼-센트 밖에 안되고 그 원인으로는 종이 부족을 들고 있으나 시정에 범람하는 유해무익한 출판물들을 적당히 통제함으로써 종이 부족을 완화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문교 당국자들은 현실을 솔직하게 인식하고 최선의 방책과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을 조선교육연합회에서 과도정부에 진정한 바 있었다 한다.
  • 1948년 1월 29일 <동아일보> 憂慮되는 學生 風紀
男學生은 술집 出入, 女學生은 映畵館으로 : 懲戒와 善導의 緊要 對策 要望
민주조선의 건설은 삼천만 동포의 민주역량 가중과 아울러 민주 교육의 향상 발전에 기대하는 바 크거니와 해방 이후 정치 이념의 분열과 사회 생활의 복잡한 움직임은 각 방면으로 퇴폐한 기분만 남기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다음 시대의 조국 중흥의 역군이 될 청년 학도들의 풍기가 문란하여져 뜻있는 인사의 가슴을 몹시도 아프게 하고 있다.
이제 수도경찰청의 단속 그물에 걸려든 남녀 학생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지난 10월부터 1월까지 4개월 동안에 1백 수십건으로 대학생은 술집과 요리집 출입을 이웃집 다니듯 하고 사춘기의 여학생들은 허영에 들떠 "헐리우드" 배우 구경을 일삼고 있으니 교과서도 없이 공부하여야 할 오늘, 조선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이 된 오늘의 민주 교육의 貧弱한 교육체제를 슬퍼하는 동시에 바람없는 자유의 바람이 얼마나 조선의 가족주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당로자들의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 청춘남녀 학생을 가진 가정에서도 새로운 관심과 지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들을 위한 사회시설의 확대가 더욱 요망되는 바이다.


1948년 2월

  • 1948년 2월 6일 <동아일보> 學生 敎化善導코자 兒童 映畵 常設館 設立

@실제날짜:480201

香隣園 市當局에 陳情
요즈음 특히 남녀학생 풍기문제가 시회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바 이번 학생들의 풍기를 철저히 단속함과 아울러 이들을 위한 건전한 교육적인 사회시설이 긴급히 요망되는 이때 이미 이 방면에 도움을 주고자 아동예술운동과 교육영화 제작에 착수한 향린원에서는 지난 1일 아동영화 상설관을 설립하여 줄 것을 서울시장에게 진정하였는데 부랑아가 발생하는 이유의 하나로 좋지 못한 영화 또는 연극을 봄으로써 그 영향되는 바 많다는 사실에 미루어 아동영화관의 시급한 설립에 일반은 또한 기대하는 바 많다고 한다.
  • 1948년 2월 7일 <동아일보> 國民大學館 建議案 通過
建物은 大學館으로, 拷問 警官은 處斷
지난 3일 입의에서는 방금 항간에 물의가 분분한 국민대학관 건물 양도 문제에 관하여 건의안을 작성하기로 하였던 바 5일 입의 202차 본회의에서 동 건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 통과되었는데 건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시 남산동에 있는 東本願寺는 지체없이 국민대학관 교사로서 사용을 허가하는 동시에 동 교사를 부당하게 명도케한 서울시 당국과 학생을 난타 고문한 경찰서원을 조사하여 적당한 처단을 할 것을 건의함.
  • 1948년 2월 8일 <동아일보> 寒心한 敎科書 出版 - 時急한 對策이 必要
光復朝鮮에 있어서 민족의 사상을 통일하고 총역량을 집중하여 국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도 긴급을 요한 명제이거니와 그와 아울러 중흥 조국의 장래 건설과 번영을 꾀할 제2세 국민의 人材養成이 또한 等閑에 부칠 課業이 아니라 할 것이어든 국내외 정계의 혼란과 민족이념의 분열, 경제생활의 파산 등 갖은 악조건에 制約되어 소기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근심됨이 아닐 수 없다.
왜정 40년에 문자와 언어까지도 잃고 소위 황민화 교육을 실천하던 교원과 그 교육으로 자라난 사람들이 그 민족의 장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계승한 혼이야 잊었으랴마는 새로운 민주이념과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스스로를 반성 회오하고 참다운 노역을 국가 발전과 사회의 복리를 꾀하여 오로지 기울여야 할 것이 가장 요청되어 있으나 그러나 道義히 무너진 오늘 통일된 국가 이념을 파악하지 못하고 騷然한 잡음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을 하는 자가 많이 그 미치는 바 ○○이 자못 크거니와 제2세 국민을 교육하는 마당에 선 교육자들이 교육목표와 지침이 될 교과서도 없이 함부로 교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작년말까지에 국민학교용 교과서를 43종 10,861,766부와 중등학교용 6종 1,618,822부를 支敎部에서 편수 발행하여 배급하였다고 한다. 우후죽순같이 자라나는 이땅의 어린이들에게 실로 紅爐點雪的 자료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슬픈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작년 중 교과서 출판사정을 살펴보면 국민학교용 5,831,662부를 印刷배포하였으나 소요 수량의 25% 불과하였고 중등학교용은 230,510부를 발행하였으나 이또한 소요 수량의 6%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후략)
  • 1948년 2월 15일 <동아일보> 國民學校 轉入學金 認可한 일 없다 - 金市長 談

@실제날짜:480214

國民大學館은 旣定 方針 嚴守
金 서울시장은 14일 시청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시정 제반 문제에 대하여 다음같이 말하였다.
 ▲ 國民學校轉入學金 :
  외지로부터 전입할 때는 물론 시내에서 전거할 때마다 따르는 아동의 전입학 때에 교육 찬조금 등의 명의로 금액을 징수하는 것은 시 당국이 인가한 것이 아니다. 폐해가 없도록 성의껏 시정하겠다.
 ▲ 國民大學館問題 :
  시에서는 기정 방침대로 현 국민대학관인 구同本寺를 사용하겠다. 이것은 입의결의전에 결정된 것이다. 입의에서 시장의 의견을 들은 다음 어떠한 결의를 했음은 좋은 일이었다.


1948년 3월

  • 1948년 3월 2일 군정청 정치고문 미국유학생 통계를 국무성에 보고

군정청 정치고문 William Langdon은 국무장관에게 1945년 9월 이후의 미국내 한국인 유학생 통계 및 그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문제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현재까지 한국의 유학생 정책은 한국의 미래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지원 정책도 없는 실정이다.
2. 유학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이 받는 재정적 지원금은 세 곳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첫째는 교회 선교단체, 둘째는 교육 기관, 셋째는 개인 후원자이다.
3. 현재는 유학생 선발과 관련된 어떤 통제 기관도 없다. 따라서 국무성에서는 "Committee on Education and Training in the United States"를 설립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4. 한국의 대학은 교수 수준에서 문제가 많다. 현재 공립대학 교수의 경우에 $11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유능한 교수들은 교수직을 포기하고 사기업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경력있는 교수도 부족하고 교재도 부적합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열악한 교육환경속에서 유능한 학생을 양성해 낼 수 없다. 
5. 이러한 점에 유의해서 유학생 선발의 철저를 기할 필요가 있다.(첨부된 자료)
   미국내 한국인 학생 통계표
   한국인 학생들의 연령별 구분 표
   한국인 학생들의 전공 분야별 통계
   관련된 후원자의 소득 수준
   후원자의 형태 및 개인 후원자의 직업별 분포도
   한국의 대학수준 교육기관 명단[181]
  • 1948년 3월 5일 <동아일보> 兒童敎育에 朗報!! 國民校 授業料 廢止
今年度 五千學級 增加
말과 글을 도로 찾은 이 나라의 국민교육을 확충 강화함으로써 국민문화를 향상 발전케 하여야 할 것이 해방 조선에 있어서 긴급히 해결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이면서도 우유부단한 위정 당국자들의 미온적인 시책으로 말미암아 아직 의무교육제도 그 실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이 함께 통탄하는 바이거니와 과도정부 문교부에서는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오는 4월부터 초등학교의 수업료를 일제히 폐지하고 중등학교는 종래의 3배인 150원으로, 대학, 전문학교는 3백 원으로 올리기로 방침을 세우고 있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 수업료 연액 2,500만 원이 없어지는 대신 상당한 정부의 보조금이 교육비로 보급될 것이며 한편 중등, 전문대학수업료 증액으로 1억 7천 3백 17만 8천 원이 증수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년부터는 미취학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5천 학급을 증가할 것이며 종래의 6천 학급을 가산하여 1만 1천 학급에 80여만 명의 아동을 수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민학교의 수업료는 종래 1원으로 학부형들의 부담을 무겁게하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후원회비가 수백 원 또는 수천 원에 달하여 학부형들의 머리를 앓게 하였던 것으로 문교부에서도 아직 이에 대한 하등의 대책도 없이 있으므로 학부형들의 불안과 우울을 더하게 하고 있다. 
  • 1948년 3월 12일 <동아일보> 京畿道內 未就學 兒童 12萬名 突破
의무교육을 앞두고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1950년까지의 초중등학교의 대확충 계획을 세우고 있다. 즉, 현재 도내 교육 시설을 보면 초등학교 396교에 32만 392명이 취학하고 있으며 중등학교는 50교에 2만 618명이 취학하고 있다. 금년도 초등학교 증설 계획은 37교 4백여 학급으로 수용력은 26,233명이라고 한다. 중등학교로는 금년도에 신설할 것이 개풍, 포천, 가평의 3교이며 경기도는 서울이 가까운 관계로 중등학교 지원자가 서울로 집결되어 실상 지원자가 모자라는 형편이라 한다.
초등학교는 1950년까지 91교를 증설할 예정으로 만 6세 이상은 금년도 내로 전부 수용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학령기 미취학 아동이 현재 도내에 12만 가량이 있는데 이들은 학교 등교를 권하여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취학을 거부하는 형편이므로 앞으로는 전부 수용되도록 그 방책을 강구 중이다.
그러나 학교를 세우기에는 1학급에 11만 원의 보조가 있으니 금년도 404학급의 증설에도 81만 원이라는 지방부담이 있어야 할 형편으로 고난을 예측하고 있다.
  • 1948년 3월 13일 <동아일보> 敎科書 用紙難 解消, 不遠 六千톤 購入 - 吳文敎部長 談

@실제날짜:480312

문교부장 오천석 박사는 12일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회견한 석상에서 과거의 敎育 行政과 금후의 교육 방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었다.
작년에 벌써 초등교 입학 지원자 9만을 수용하고 또 만 6세로부터 12세까지의 학령 아동의 7할이 통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해방 이후 초등교육 시설 수배로 확충되고 중등교육 기관도 배로 늘어 초등학교 아동이 290만, 중등학생이 20만을 헤아리며 대학도 상당히 증가되고 있다.
앞으로는 민주 교육 이념의 철저화, 교원들의 재교육, 교과서의 확충, 실업교과서의 發行, 과학교육의 진흥, 성인교육의 철저화 등 민족 장래의 발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과 성의를 기울여 진정한 시책을 강구할 것이다.
해방 이후 교과서의 부족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으나 점령 당국의 정책이 식량 생활의 안정, 치안의 확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50만 련(連)의 종이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겨우 2만 4천련의 종이를 배급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문교부로서는 비상 수단을 강구하고 있지만 특히 미군 육군으로부터 150만 달라로 6천톤의 종이를 구입하기로 되었는데 이것으로 2천만부의 교과서를 박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아 성립될 중앙정부의 문교 당국에 사무를 이관하기 위하여 교육관계 법안을 기초하는 동시 문교총람을 편찬하여 과도정부의 문교 行政 전반을 기록인계하기로 사무를 추진하고 있다.
  • 1948년 3월 13일 <동아일보> 美敎育界 權威 招聘 敎育者 再訓練
과도정부 문교부에서는 민주 교육의 철저화를 도모하고 민족의 만대 발전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교육자들의 질적 재교육을 하기 위하여 민주국가의 교육 行政과 교육 시설을 시찰하게 하고 또 실제 교육을 받기 위한 유학생 파견 등을 계획하였으나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오늘의 현실이 그 실천을 볼 수 없게 되었던 바 지난번 미국으로부터 셀러 박사가 내조하여 조선교육의 현실을 시찰 연구한 결과 미국으로부터 특별히 33만 5천달러의 보조를 얻어 미국교육계의 권위자 25명을 초빙하여 오는 7월부터 초등, 중등, 대학 등 각급 교육자들 중에서 8백 명을 재훈련, 재교육하리라고 한다.
  • 1948년 3월 19일 <동아일보> 文理大學生會 總長排斥 決議

@실제날짜:480317

법대 교사 문제로 분규 중에 있던 문리대 학생회에서는 17일 하오 1시부터 학생회를 열고 이사회에서 결의한 법대 교사 문제를 철회하는 동시에 연구실 반환건과 현 서울대학총장 배척을 결의하고 학생대표가 18일에 총장을 면회하여 결의를 전달하였다는데 앞으로의 해결이 크게 주목된다.
  • 1948년 3월 30일 <동아일보> 東洋醫學館을 大學館으로 昇格

@실제날짜:480324

종래의 동양의학관은 지난 24일부로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얻어 동양대학관으로 재출발을 하기로 되었다. 동 대학관은 4년제로 인문과에 280명, 동양의학과에 14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되었는데 지원서 기타 수속은 재단법인 향림(香林)학원에서 접수하리라 한다.
  • 1948년 3월 30일 <동아일보> 豫科 敎授會서 四條項 決議 - 綜大 中央部 肅淸 要望
문리과대학장 이태규 박사를 권고 사직케한 이춘호총장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문리과대학 예과 교수진에서는 얼마 전 전체회의를 열고 선후책을 강구한 결과
 一. 이계원 사무장을 파면시킬 것.
 二. 대학교 예산을 각 대학에 이양할 것. 
 三. 구매과와 관재과를 폐지할 것. 
 四. 行政權 일부를 각 대학에 이관케 할 것 등 4개의 요구 조건을 이 총장에게 제출하는 동시 4월 1일까지에 확답을 요망하였다 한다.
  • 1948년 3월 30일 <동아일보> 初中等校 敎科書 47萬部 製作 配付
문교부에서는 지난 1월 1일부터 3월 25일까지에 초등셈본 25만 2,732부, 초등국어 21,139부, 습자 30,430부, 사회생활 563부, 과학 1만 5천부, 농사짓기 1만 5천 50부 등 총계 47만 3,364부를 發行하여 각도에 배포하는 동시 계속하여 각종 교과서를 刊行하여 초중등 교육에 지장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 한다.
  • 1948년 3월 31일 <동아일보> 今年 中等校 入試 新方法을 立案中
오는 7월에 실시될 중등학교의 입학 자격고시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결정하고자 그동안 문교부에서는 각도 교육국장회의를 소집하고 또한 전문적으로 예의 연구하여오던 바 대체로 종래 임의적 해답을 요구하는 일반적 성질의 문제를 제출하던 주관적인 방법을 개선하여 아동의 정신적 능력과 소질을 시험하는 객관적인 방법을 채용하기로 하고 방금 안을 작성 중으로 불원 각도 학무국에 지시될 것인 바 새로운 방법으로 하면 과거 시험관의 임의적 채점을 하여오던 방식도 개방되어 통일적인 채점으로 공평하게 시험을 보게 될 것으로 기대되어 있다.


1948년 4월

  • 1948년 4월 1일 미육군성 "Educator's Guide to Korea" 배포

미육군성(Dept. of Army)은 주한미군정청 문교부 교원양성 고문인 Richard Werth가 마련한 교육자를 위한 한국안내서 "Educator's Guide to Korea"를 배포하였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I. General Information
   1. Geographical
   2. Historical
   3. Cultural
   4. The Government
   5. Occupation Troops and Military Government
   6. Daily Life
   7. After Work
   8. Social Life with Koreans
   9. What to Bring
II. Educational Information
   1. Brief History
   2. Department of Education
   3. Korean Schools
   4. The Advisory Staff
   5. Working Conditions
   6. Speaking to Korean Audiences
   7. Korean Standards
   8. In Conclusion
III. List of Advisory Staff
IV. List of Military Government Agencies
V. Attached Charts[182]
  • 1948년 4월 14일 <동아일보> 朝鮮人 學校 閉鎖코 韓日共學을 强要
日本 山口縣 敎育部의 怪處事
재일 조선인 학교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간섭에 대하여 재일동포들은 분개를 금치 못하는 바인데 이번 하관(下關) 조선인학교에 폐쇄령이 내렸다. 산구(山口) 현 지사와 동현 교육부장의 명의로 3월 20일부로 폐쇄령을 시달하여 왔는데 그 내용은 "3월 31일까지 조선인학교를 폐쇄하고 아동은 전부 일본인학교에 수용할 것. 만일 이에 위반하는 자는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혹은 1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또한 취학시킬 의무를 가진 보호자도 그 의무를 履行치 않는 경우에는 1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인들은 산구현 투쟁위원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의 탄압에 의한 형무소 수감을 각오하고 학원 유지와 외지에 있어서의 조선 고유문화의 육성을 지키는 투쟁을 개시하는 한편 조선정보사 하관지부를 비롯한 각 언론 기관도 이에 협력하여 조선 전국을 위한 조선문화 고유성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폐쇄령의 이유는 일본 정부의 교육법과 施行規則에 의한 설치 기준, 교원 자격, 교과과정, 교재 등이 극히 적합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며 또한 취학 아동은 일본 정부의 교육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당한 견해를 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하관 조선인 단체와 재일본 조선인 교육 기관은 일본문부성과 맥아더사령부에 탄원문, 항의문을 전달하여 맹렬한 투쟁을 개시하고 있다.
  • 1948년 4월 15일 <동아일보> 在日 朝鮮人學校 閉鎖 問題 當局 對策을 講究中
최근 일본에 있어서 조선인 교육 기관을 강압적으로 탄압하고 또 각지에서 충돌 사건도 일어나 조선 사람들의 울분을 풀길이 없다는 흥분된 의견이 고국에 전하여져 국내 동포들의 일본 정부의 부당한 탄압을 타파하는 여론이 연일 비등하여가고 또 과도정부로서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수립할 필연적인 단계를 가지게 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約 50여 개의 우리의 초등교육 기관이 있어 각각 학교 관리조합에 의하여 운영되어 왔던 것이며 그중에는 30여 학교가 우리 자제들의 전용 학교이며 기타는 일본인의 것을 빌어 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로 되어 있는 것이 교재로 이는 조선인연맹 일본 총본부가 편찬한 좌익적인 색채가 농후한 내용의 것으로 되어 말썽을 자아내고 있다 한다. 그리하여 지난 3월 재일본 조선민중대회를 소집하고 결의안을 작성하여
一.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의 자주성에 일임할 것.
二. 조선인 교육은 일본에서 특수기관으로 할 것.
三. 조선인 교육비는 일본 정부에서 보조할 것.
四. 교육용 교재를 일본인 시설과 차별없이 배분한 것.
五. 점령군 당국에서 조선인 교육 기관에 주는 자재 배급을 공평하게 할 것.
六. 조선인 교육에 대하여서는 일절 간섭하지 말 것.
등을 일본 정부에 건의하였던 바 일본 문부성 차관으로부터 一, 二 항목은 1945년 12월 20일 총사령부에서 공포한 교육법을 준용할 것과 조선인 설치 교육 기관은 사립으로 인가를 받아야 하며 일반 일본 법령을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과 三항은 일본 문부성에서 결정한 범위 내에서 사립학교로의 대우를 하게 되며 四, 五항은 일본인 경영의 사립학교와 같은 대우를 할 것. 六항목은 사립학교로서 받는 감독 이외의 간섭은 하지 않을 것을 언명한 바 있었다.
그 후 3월 20일경 일본내에 있는 조선인 교육 책임자들이 모이어 대책을 강구 중에 있으며 과도정부 문교부와 외무처에서도 요즈음 연일 계속하여 대책을 강구 중에 있다.
그러나 지금 문교 당국과 외무처의 안으로는 조선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동경과 대판의 주일공관내에 敎育公署를 새로이 설치하고 문교부의 교육 방침을 그대로 재일동포 자제들에게 철저하게 하며 세계 각국에 있는 거류민 자제 교육 기관에 대한 세계 각국의 공통적인 교육 기관으로써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모국 정부의 시책에 의한 교육 기관의 운영을 하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 1948년 4월 16일 <동아일보> 文理大 學生會 決議 - 總長 理事 辭職

@실제날짜:480415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간에 옥신각신하던 교사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하여 분규를 자아내게 하던 바 지난 15일 상오 11시 문리과대학 학생회 사무실에서 문리과대학 학생회 중앙위원회와 교사대책위원회가 공동회의를 열고 신중 협의한 결과 대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작성하여 학교 당국에 제출한 바 있었다.
 一. 단과대학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므로 오늘의 무질서를 가져온 것.
 二. 학교 行政에 소양이 없는 것.
 三. 학생의 건의를 무시하고 문리과대학 이사를 보증하지 않은 것 등으로 대학 이사는 전부 사직할 것과 총장 명령이 그대로 실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조변석개하는 태도의 소치이므로 책임을 지고 총장이 사직할 것을 원한다.
  • 1948년 4월 16일 <동아일보> 在日 朝鮮人學校 問題 三條項에 걸친 交涉
재일동포자제 교육 문제에 관하여 일본 정부의 부당한 조치로 삼천만 겨레의 격분을 사고 있는데 이 문제를 토의하고자 문교부와 외무처는 지난 13일 연석회의를 열었고 문교부와 외무처, 미인 고문측도 이에 대한 협의가 있었거니와 정무회에까지 이 문제를 상정하여 재일 한인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연구 중에 있는데 다음과 같은 3조목의 요강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一. 재일 한인의 교육이 일본정부 관하에 있는 것은 한인으로 하여금 가장 곤란한 일이니 맥아더사령부에 요청하여 이를 폐지시키도록 하고 사령부 직접 지도, 원조하에 한인 자신에 의하여 교육이 운영되도록 할 것.
 二. 그 行政은 남조선과도정부가 파견하는 관원에 의하여 施行할 것이며 또 이에 필요한 재정 계획이 수립되어 남조선 정부에서 허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
 三. 이 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하여 문교 당국은 재일한인 교육에 관한 ○○○○○○○○○ 관원을 파견하고 제1조의 목적 달성을 위한 제반 계획을 수립 施行케 할 것.
  • 1948년 4월 23일 <동아일보> 文敎部 制定 敎科書 使用한 在日同胞學校에는 干涉없다
朴烈氏秘書 朴成鎭 씨 談
재일동포 교육 문제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몰라 일반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중 이번 재일 60만 동포를 대신하여 재일본 조선인 거류민단 박열 씨 비서 박성진 씨는 국내의 소식을 조사하고자 지난 16일 입국하였는데 씨는 왕방한 기자에게 해방 후 재일동포의 사정과 패전 후 일본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日本의 우리 同胞 敎育問題의 眞相
나는 본국에 돌아오기 전에 이번 대판에서 일어난 일본 정부에서 탄압을 가한 우리 동포 교육 문제에 대하여 대판에 들러 당시 교육회장 崔씨와도 만나 실정을 듣고 보았다. 이번 일본 정부에서 우리 조선인 학교에 탄압을 가하였다는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포되어 오던 문제가 이번에 촉발된 것이다. 발단은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대판사범학교에서 폭발된 것인데 즉, 해방 후 일본에는 조선인의 경영으로 703교가 있다. 그중 정식으로 연합국사령부와 일본정부 당국에 인가를 얻어 남조선 과도정부 문교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로 교수하는 학교는 불과 3할밖에 안된다. 그 나머지 7할이라는 것은 좌익단체인 조선인연맹이란 단체 산하에 속하여 정식 인가도 없이 교육을 시키는 학교들이다.
그러면 이 조선인연맹 산하에 있는 7할이란 학교는 교육은 제2요 좌익사상 선전기관으로 북조선과 연락하여 검정도 없는 교과서를 사용하고 국가대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교학기관이라기보다 좌익 선전 기관화 하고 있다. 한말로 말하면 일본 정부는 그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필경 이번과 같은 조치로 나오게 된 것이다.
거론한 우리 동포의 교육 기관이 좌익사상적 침해로 말미암아 교육이 침해당하고 민족이 박해를 당하게 된 큰 원인이다. 다만 한 가지 국내 동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우리의 국어를 사용 못하게 한다던가 우리의 역사를 잘못 가르치게 하는 등 명령을 내린 사실은 없다. 정당히 당국에 허가를 받고 남조선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한다면 이런 폐단은 없을 것이다. 그의 한 예로는 조선교육회 경영인 경도의 조선공업학교라든가 조선중학교같은 것은 일본인도 놀라고 찬사를 하고 있을 만큼 훌륭한 조선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제는 재일동포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던 본국에서 교본과 충실한 교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재일 조선인 교육 기관을 개편하면 문제는 해결될 줄 안다.(계속)
  • 1948년 4월 23일 <동아일보> 在日同胞 敎育問題 不祥事 - 政治的 宣傳, 敎育이 原因

@실제날짜:480422

딘장관 言明
중앙청 출입기자단은 22일 딘 군정장관과 정례 회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 응답이 있었다.
 문 : 일본 정부의 재일 조선인 교육 기관에 대한 탄압이 심하다고 굉장히 전하여 지고 있는데 장관에게 들어온 정보는 어떠하며 그 대책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답 : 일본 문부성은 교육제도를 개혁하여 4월 1일부터 실시하고 있다. 조선인 교육 기관은 전부 634개소인데 그중 527개소가 불완전한 설비를 가지고 또 정치사상을 선전 교육하는 기관이란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조선말 교과서 이외의 모든 교과서와 교육용어는 일본어를 쓰기로 되고 또 사립학교로서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 1948년 4월 28일 <동아일보> 在日同胞 敎育問題 眞相 調査- 政務會議서 軍政에 建議

@실제날짜:480427

26일 일본 신호(神戶), 대판(大阪) 등지에서는 우리 동포들이 자주교육 등 구호를 부르짖고 현청들을 습격하여 주둔 미군까지 출동하는 등 사태는 심상치 않으므로 모국 동포로써 이에 대한 대책 강구가 요청되던 바 27일 과도정부 정무회의에서는 중요 안건의 하나로 이 문제를 신중 토의한 바 재일 동포 대책으로 5개조를 딘장관에 건의하여 맥사령부에 전달하도록 결의하였다. 즉, 재일동포의 교육은 현 남조선 문교부 교육 방침대로 하게 할 것과 재일 동포의 생활 조사와 이번 사건 진상 조사단 파견, 재일 동포의 위법자는 일본 정부에 맡기지 말 것 등을 건의하기로 한 것이라 한다.
  • 1948년 4월 29일 <동아일보> 在日同胞 敎育問題 擴大 -東京 12個 學校長 檢擧
동경 28일발 UP통신수도경찰 당국은 교육령에 의하여 학교를 등록하라는 일본 정부 명령에 복종치 않는 13개 조선인 학교장을 검거하였다. 동경도내에는 15개 조선인 학교가 있다. 다나까 경시총감은 잔여 학교장도 수사 중이라고 말하였다. 이 탄압에 앞서 27일 재동경 조선인들은 모리도 문상에게 자제의 학교 자유경영을 응허하라는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모리도 문상은 29일 오후까지 서면으로 해답을 約束하였다. 한편 조선학교 위원회 위원장 최용권 씨는 고-베(神戶)사건을 유감시하는 동시에 "우리는 평화적 수단으로 우리의 목적을 달할 결심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일본 경무부 본부에서는 전국적으로 장차 폭력과 공갈에 대하여서는 엄중한 대책을 취하라고 훈시하였다.
大阪警察廳 同胞 射殺 認定
대판부 경찰청본부에서는 지난 26일 부청 앞에서 일어난 데모에 참가하였던 16세의 조선 소년을 사살하였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경찰은 불끈는 호-스로 물을 뿜어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물러가지 않는 3백여 명의 조선인을 해산시키고자 공중 발포령을 내렸는데 일 경관이 권총을 군중속에 발사하여 소년의 가슴을 뚫어 사망케하였다. 그리고 경찰총화로 8명의 부상자가 생기었다고 한다.
冷靜한  判斷 必要 : 吳 文敎部長 談
최근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 교육 기관에 대하여 부당한 탄압을 가하여 수많은 재일 동포 자제들이 배움의 동산에서 쫓겨나고 있으므로 국내 관계 당국에서는 물론 학생층에서도 일본 정부의 교활한 교학정책을 공격하는 부르짖음이 높아가고 있는데 과도정부 吳문교부장은 이 문제에 대하여 28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국내 동포들의 냉정한 판단이 있기를 요망하였다.
"재일 조선인 학교 수십개가 일본 정부로부터 폐교당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우리 국민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교부에서도 수개월 동안 외무처와 연락하여 대책을 강구하여왔고 또 정무회로서도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대책을 세워 관계 당국에 교섭하게 되었다.
이번 문제는 단지 교육 문제가 아니며 일본 정부로서도 어느정도 조선인 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정당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학교에는 하등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 특히 학생들은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고 지나친 감정에 치우침이 없이 당국을 신뢰하고 정당한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노력하는데 기대를 가져주기 바란다."
  • 1948년 4월 30일 <동아일보> 京畿道內 37校에 435學級 增設
의무교육 실시에 만전을 기하고자 경기도 학무국에서는 금년도 국민학교 교육 확장안을 다음과 같이 실시하기로 되었다. 즉, 현재 도내 공립국민학교는 395교 5,223학급으로 아동 총수는 32만 395명이다. 교실수는 3,758인데 현재 부족되는 교실이 1,465 교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금년도 입학 적령 아동은 26,133명인데 그 전원을 수용할 계획으로 37교, 433학급을 증설하기로 되었다. 이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하여서는 2부제를 실시할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 1948년 4월 30일 <동아일보> 美大學敎授 來朝 - 梨大에서 歡迎會

@실제날짜:480501

동양의 가정생활을 시찰하기 위하여 미국 "오리건"주 주립대학 가정학 부장 에바 타이럼 씨가 지난 22일 내조하였는데 이화여자대학에서는 동 씨를 맞아 오는 5월 1일(토요일) 하오 2시 동 대학에서 환영회를 개최하리라 한다.
씨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가정학을 연구하여 학위를 얻었고 특히 동양 연구에 주력하여 자기 학교에도 동양 여자를 위한 장학금 제도를 두어 조선, 중국, 인도, 비율빈 등 각국의 많은 지도자를 키웠다고 하며 이번 재경 중에는 이화대학 가정학부의 발전을 위하여 직접 많은 협조가 있으리라 한다. 


1948년 5월

  • 1948년 5월 10일 <동아일보> 在日同胞 敎育問題 圓滿 解決
시사유신사 보도에 의하면 최근 관서(關西)지방에서 조선인 폭동을 촉발한 외국인 학교 문제는 전 재일본 조선인 단체가 이 문제에 관한 특별 권익을 허용하는 문부성 계획안을 수락함으로써 완전히 해결되었다. 동 계획안은 조선인 거류민은 일본 법률을 준수한다면 사립학교에 허용된 자치 범위내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특별 교육을 실시할 권리를 사유할 것을 규약 한 것으로 재일본 조선인거류민단과 조선 독립촉성청년연맹이 수락할 것을 발표한 결과로 최후적으로 결정되었다 한다.
  • 1948년 5월 21일 <동아일보> 今年度 中等入試案 決定
從來의 學課試驗 廢止- 智能, 身體檢査만 施行
어린이들의 등용문인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7월 2일부터 전국적으로 일제히 개시된다. 그런데 입학시험은 2회로 나누어 제1회는 7월 2일부터 6일 사이에 끝마쳐야 하고 제2회는 7월 8일부터 12일까지에 마쳐야 하는데 제1회 입학시험 합격자가 제2회 이학시험에 수험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하여 제1회 합격자를 7월 7일에 발표하고 제2회 입학시험이 시작되는 7월 8일에 수험교에서 소집하기로 되었다. 그래도 치열한 입학경쟁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발생한 모-든 폐해를 없애는 동시에 민주주의 교육의 건실한 발전을 꾀하여 입학시험 준비공부를 위한 학과시험을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지능검사와 신체검사만을 施行하기로 되었다. 따라서 종래와 같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한 학과시험과 시험관의 정실 관계에 달리기 쉬운 구두시험도 일체 폐지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체검사에 있어서도 종래와 같이 엄격히 하지 않고 비록 불구자일지라도 학업에 지장이 없다면 통과를 시키는 것을 주안점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출신 국민학교의 성적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출신 국민교에 있어서의 성적 결정은 교장, 담임선생 등 전교원으로 구성된 성적심사위원에서 작성한 다음 성적순을 전 학부형에 발표하기로 되었다.
  • 1948년 5월 21일 <동아일보> 師範進學은 推薦制 - 京畿道學務局 發表
경기도내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관한 방침이 수립되었다. 즉, 오는 7월 도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아동수는 28,928명으로 그중 상급학교 진학을 지원하는 아동이 10,964명이라 하는데 도내 중등학교 수용력은 7,500명, 즉 지원자의 75퍼센트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서울에 입학을 지원하여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그래도 금년에 施行되는 시험은 1회, 2회로 나누어 제1회가 7월 2일부터 6일까지에 끝마치고 2회는 8일부터 시작하여 12일에 끝나기로 되었다.
시험방법은 문교부 요감과 다름이 없는데 사범학교 진학 아동은 각 군에 추천위원회를 두고 추천된 아동은 무시험으로 입학하게 된 것 등이다.
  • 1948년 5월 21일 <동아일보> 市內 中等入試 7月 2日부터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문교부에서 지시한 입학시험 요감에 의하여 2회로 나누어 7월 2일 부터 일제히 실시하기로 되었는데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개 학년간의 출신국민학교의 성적일람표를 제출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입학시험의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20일 시내 중초등학교 교장회의가 있었다.
  • 1948년 5월 22일 <동아일보> 中等入試 智能考査 文敎部서 創案 發表
"가려잡기" "메우기" "짝맛추기"
금년도 중등학교 입학 자격고사 방법은 경쟁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1개교 이상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된 대신 새로운 지능고사를 실시하기로 되었거니와 문교부에서 방금 국민학교 졸업 아동들에 대한 학력고사 용지 10만장을 인쇄하는 중으로 고사 문제는 廉光燮 박사가 안출한 네 가지 종류를 채택하였다.
즉, 여럿 가운데서 가려잡기, 메우기와 둘에서 가려잡기, 짝맛추기 등인데 이들 질문의 해답 완성 소요 시간은 각각 세시간반이며 또 동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최초 해답 완성 소요 시간은 두 시간이다. 그리고 네가지 종류의 각각 다른 질문 양식을 서로 바꾸어 실시하게 됨으로 아동들이 그 답안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폐단을 없게 만드는 방법으로, 과도정부 직원을 채용하는 데도 학력과 지능고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하여왔던 것이라고 하므로 금년 중등교 입학지원 아동의 좁은 문 등용은 아동들과 함께 학부형, 그리고 일반과 교육자들의 많은 흥미를 집중시키고 있다.
  • 1948년 5월 23일 <동아일보> 敎師資格規定 公布 - 中初等敎員에 資格證 授與

@실제날짜:480522

문교부에서는 사범교육과를 중심으로 초중등학교 교사 자격규정에 관하여 일년 동안에 걸쳐 신중 토의하였는데 지난 5월 10일부로 동 규정이 결정되어 22일 이를 공포하였다.
동 규정에 의하면 초, 중등 교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교사는 일정한 기한내에 교육학을 비롯한 필수 과목을 일정한 기간에 강습을 받게 하고 또 교사자격증을 정교사, 준교사, 특수교사, 학교장, 교감의 5종으로 나누어 동 교사에게는 각각 자격증을 수여하되 반드시 재교육을 받아야만 정교사, 학교장으로 승진될 것이라 한다.
  • 1948년 5월 25일 <동아일보> 今年度 中等校 入學 選拔 細則 市學務局서 制定 發表
문교 당국과 서울시에서는 앞서 중등학교 입학시험 요강을 발표한 바 있었거니와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그 요강에 의하여 입학자를 선발할 세측을 거듭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중등학교 입학자 선발은 출신교의 4, 5, 6학년 학업성적 3백점과 수험학교의 지능고사 성적 3백점, 즉 총점 6백점을 만점으로 하되 신체검사의 결과를 참작하여 선발을 사정하기로 되었는데 서울시에서는 출신학교 성적을 3백점으로 하되 출신교 졸업 기본점으로 그 6할 즉 180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기로 하고 그 나머지 120점은 본인의 3개년 학업 성적(석차)에 의하여 결정하여 석차에 대한 개인차를 적게 하는 것이 서울시의 특수한 방침이다. 그 성적사정은 각 학년 학급별 학년말 성적 일람표에 의하여 학년별로 석차 점수를 산출한 뒤 이를 평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20 x {학급총인원 - (석차 - 1)} ÷ 학급인총인원수 + 180(졸업기본점)
그리고 지능고사의 성적은 3백점을 만점으로 하되 반드시 3회에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으며 1회의 소요시간은 1시간 이내로 하고 문제수는 50점 이상으로 하게 되었다. 문제 내용은 국민학교 교육정도를 표준으로 아동의 실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시험기일은 2회에 나누어 실시하되 제1회는 7월 2일부터 6일까지, 제2회는 8일부터 12일까지로 하여 수험아동에게 2회의 수험할 기회를 주되 1회 합격자는 합격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제2회에 수험할 수 없게 된다.
李 學務局長 談
"부형되시는 분은 아동의 개성과 재질에 따라서 적합한 학교를 선택할 것이며 될 수 있는대로 거주 근처의 학교를 선택하기 바란다."
  • 1948년 5월 25일 <동아일보> 師大附屬國民校 生活硏究發表會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에서는 "생활의 발전"을 목표로 한 국민학교 교육의 모든 문제를 주제로 하여 연구발표대회를 오는 6월 10, 11, 12의 사흘동안 동교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 하는데 뜻있는 교육자의 많은 참가를 기대하는 바 희망자는 6월 8일까지 동 대학 부속국민학교로 청원하도록 되었다.
  • 1948년 5월 28일 <동아일보> 文敎部 移轉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할 국민의회의 소집을 앞두고 중앙청의 살림살이는 새로이 벌여서 중앙청 3층은 전부 국회의원이 사용하기로 되었으므로 농무부는 열관 문교부건물로, 문교부는 창덕궁으로 각각 살림살이를 정리하여 27일부터 이사짐짝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다.
  • 1948년 5월 28일 <동아일보> 淑明女專 大學 昇格

@실제날짜:480522

시내 청파동 숙명여전은 그동안 재단 확충에 노력한 보람이 있어 지난 22일부로 대학 승격인가가 문교 당국으로부터 교부되었다.
동 대학은 원래 구왕궁에서 보조하여 왔던 것으로 앞으로도 1년 3백만 원씩 보조하기로 되었으며 문학, 이학 두 부에 국문, 영문, 가사, 음악, 미술, 이과 등 6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초대 학장은 任淑宰여사가 취임하였다.
  • 1948년 5월 32일 William Hayes 한국교육재정 확충 방안 제출

University of California의 William Hayes교수는 육군장관의 특별 고문(Special Consultant)으로서 "The Financial Support of Korean Education"을 작성하여 육군장관과 주한 미군정 사령관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Letter of Transmittal
Introduction
Chapter I   Taxation in Korea: National
            Direct Taxes
            Indirect Taxes
Chapter II  Taxation in Korea: Provincial and Local
            Direct Taxes
            Indirect Taxes
Chapter III Administration of National, Provincial and Local Taxes
            Assesment
            Collection
Chapter IV Organization of Education in Korea
            Elementary Education
            Secondary Education
            Higher Education
            Department of Education
            Provincial Bureaus of Education
            Gun Educational Organization
            General
Chapter V  Present System of Financing Education in Korea
Chpater VI Factors Underlying the Financial Support of Korean Education
Chapter VII Proposals for Financing Education in Korea[183]

1948년 6월

  • 1948년 6월 6일 <동아일보> 서울大學 人事問題 一段落
한동안 말썽이었던 국립서울대학에서는 지난번 총장 이춘호 씨가 문교부차장으로 전직케됨에 따라 사범대학학장 張利郁 씨가 새총장으로 임명되고 朴俊燮 씨가 사무국장 李종수 씨가 교무처장, 전교무처장 崔奎南 씨는 대학원 부원장으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한편 문리과대학과 법대 사이도 호양정신으로 잘 협조되어 민주 학원 건설에 명랑한 진전을 보이고 있으므로 일반의 신뢰는 자못 깊어가고 있다.
  • 1948년 6월 11일 <동아일보> 어린이 敎育을 硏究 -어제 一千餘 敎育者 一堂에 會合

@실제날짜:480610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 주최의 전국 초등교육연구발표회는 10일 상오 9시 10분부터 사범대학 강당에서 전국 초중등학교 직원과 관계 행정관 등 1천여 명의 참석으로 성대히 막을 열었다.
먼저 蔡 사범대학장의 인사가 있고 張서울대학교 총장, 吳문교부장의 祝辭가 있은 다음, 김기서 강사 이하 각 교사의 연구발표와 연구수업이 시작되었는데 11일도 계속 발표할 것이며 제3일은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 용두동 분교에서 열기로 되었다.
이번 초등교육연구발표회는 해방 후 처음 열린 것으로 우리의 생활을 중심으로한 교육을 실시하는 데 중대한 진전을 보이게 하는 모임으로 금후 조선 교육의 혁신과 발전에 이바지 할 바가 클 것으로 주목되는 바이다.
  • 1948년 6월 22일 <동아일보> 今年도 入學地獄 - 就學 19萬名에 中等校 收容 7萬
금년도의 중등학교 입학 경쟁율도 여전히 심각하다. 문교부 조사에 나타난 1948년도 국민학교 졸업자 수는 19만 4천 명이고 이에 대한 중등학교 수용력은 1천 29학급으로 約 7만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금년도 국민학교 졸업자의 60퍼센트가 상급교 지원자이므로 내월 초로 임박한 입학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중등 교문에 들어설 수 있는 자는 실로 전체의 36퍼센트에 불과하다 한다.
  • 1948년 6월 25일 <동아일보> 學父兄 울리는 入學金 - 學務 當局의 適切한 措置 要望
二萬圓 徵收는 苛酷
입학기를 앞두고 어린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어린아이와 학부형을 상대로 학교에 넣어준다고 하는 사기한들로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한데 시험의 난관을 돌파하더라도 학교에 기부금이니 혹은 수속금 등으로 취학을 못하게 될 우려가 농후하다. 즉, 최근 시내 모 사범학교에서는 추천으로 입학된 아동들에게 기부금 만 원에 수속금 기타 이것 저것 합하여 2만여원에 가까운 돈을 징수하고 있다 한다. 이는 적어도 이것이 공립학교에서 받는 수속금이니 앞으로 사립 수속하는데는 얼마나 들까? 벌써 학부형들의 초조와 물의는 분분한 바가 있다. 아무리 물가가 비싸고 돈의 가치가 없다기로서니 중등교 입학에 2만 원 가까운 돈이 든다고 해서야 선선히 學資를 댈 부형이 얼마나 될까? 학무 당국에서는 시급한 입학금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가 있기를 일반은 요망하고 있다.
  • 1948년 6월 26일 <동아일보> 入學兒童에 寄附金 徵收 - 摘發 處斷할 方針

@실제날짜:480625

嚴檢察廳 次席 談
입학기를 앞두고 학교 당국자들 간에는 무리한 거액의 기부금 또는 수속금을 강요하는 현상이 적지 않음에 비추어 25일 검찰청차석 엄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울시 학무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각급 학교의 입학기를 맞아 교직원측의 부정 사건이 불소할 뿐더러 심지어는 입학 허가와 교환 조건으로 다액의 기부금을 받는 사례가 盛行하여 학무 당국으로서도 두통거리라고 하는데 청소년의 사표인 교육자인 만치 그들의 부정 행위가 있다면 그 적발에 정력을 다할 것이고 기부금 징수도 적발 처단할 것은 물론이다. 학교 당국의 입장에서도 부족한 예산으로 학교 경영은 용이치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나 어려운 가운데 子女敎育을 하고 있다는 이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종전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고쳐 신성한 교육 도덕에 의거하여 금후 이같은 부정자가 없도록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1948년 7월

  • 1948년 7월 4일 <동아일보> 入學시켜 준다고 某 大學生이 十萬圓 詐取
입학난에 신음하는 학부형을 이용하여 사기 사건이 요즈음 항간에 빈발하는 이때 시내 모대학에 재학 중인 정재영(가명 21)은 동국대학에 입학시켜 준다고 교묘한 수단으로 감언이설로 학부형으로부터 4, 5차례에 걸쳐 10여만 원을 사취하다가 검경 수사대에 체포되어 목하 엄중 취조 중인 바 여죄가 상당히 있는 모양으로 동 수사과에서는 이와같은 피해를 당한 자는 신고하기를 요망하고 있다.
  • 1948년 7월 17일 <동아일보> 手續金 많아 就學不能 - 地方道內 中等校 志願者 激減
어려운 입학시험의 관문을 통과하여도 엄청난 입학 수속금으로 취학을 못시킬 지경이라는 서울의 중학 입학사정을 보고 단명을 하였는지 경기도내의 중등학교 특히 도회를 제외한 지방 중등학교에는 입학지원을 하여오는 생도가 예년에 비하여 숫자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라고 하는 바 이유는 서울의 고급중학교 입학을 지원하는 관계라고 한다.
  • 1948년 7월 17일 <동아일보> 新入生募集 問題로 京畿中學서 亂鬪劇
신입생 모집 문제로 교장과 교원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시내 경기중학에서는 16일 오전 9시 조회시간 직후 동 사건의 실마리는 드디어 전교생들간의 일대 난투로 벌어지고 말았다 한다. 즉, 이번에 교장측의 독재적인 처사에 분개한 50여 명의 동교 교직원은 교장의 단호한 재고려 없이는 계속 근무할 수 없다고 하여 지난 14일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등교를 거부하고 있던 바 돌연 16일 조회시간에는 일부 학생들이 교직원은 모두 불순분자라는 이유 밑에 교직원을 배척하고 맹휴를 斷行한다고 선언하여 결국 50여 명의 교직원을 지지하는 학생과 교장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직원을 옹호하는 학생 두패로 노나져 단도, 비루병, 곤봉을 가지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5년생 조영동 군이 안면에 중상을 입는 등 전교 학생들은 공부도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한다. 이 급보에 접한 종로경찰서에서는 형사대를 동교에 파송하여 동교 난투 장면을 수습하였는데 동 형사대는 양측 학생들의 선동자로 지목되는 김윤, 조병동과 박삼봉, 李丙均 등 4명, 그밖에 모 청년단원 7명을 체포하여 방금 엄중 취조 중이라고 하는데 동서에서는 이와 같이 청년단들이 백주에 학원 간섭을 하는 사태는 간과치 못할 사건이라고 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번 난투 사건을 계기로 한 동 교의 사건 수습 여하가 자못 주목되고 있다.
  • 1948년 7월 20일 <동아일보> 續出하는 幽靈學園 八個所 閉鎖를 命令
국민된 의무로써 배워야 할 국민학교를 졸업한 어린이들의 가슴을 조리게 하던 중등학교의 입학시험도 이미 한 고비를 넘어 이제는 기부금이니 수속금이니 하여 학부형들을 울게하고 있거니와 요지음 불행히 입학시험이 치러진 아동들의 불안한 심리를 통하여 모리하려는 사람, 또 학원의 비양심적인 교육자가 속출하여 저간의 많은 물의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중에는 허가도 없이 학생 모집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하고 거액을 수험료로 받아 먹으려던 것과 또 남의 학원 명칭을 참칭하여 학생 모집을 하고 있는 엉터리 학원도 있는 것으로 혼란한 오늘의 현실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 학무국에서는 불량 학원과 무허가 학원으로 ○○○○ 등 4개 학원은 적발하여 폐쇄명령을 내리고 남의 학원 명칭을 참칭하던 ○○○○ 등 4개 학원은 行政處分을 명령하기로 결정하였다.
  • 1948년 7월 20일 <동아일보> 入學은 됐어도 手續金이 問題 - 學父兄들이 悲鳴
當局의 適切 措置 要望
국민학교 아동들을 가슴졸이게 하던 중등학교 시험은 대체로 끝났으나 입학금과 시설비의 과중한 부담에 수많은 학부형들은 울고 있다. 어려운 살림속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공부한 보람이 있어 입학도 되었으나 수만 원을 넘는 금전의 부담에 도로 아득한 실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으로 자제의 공부를 위하여서는 가정 집기를 방매하고 패물등속을 정리하여 버리는 심정을 학교에 하소연 하는 부형이 있는가 하면 수만 원을 기부할 터이니 성적이 나빠 떨어진 자기 아들을 보결로라도 입학케하여 달라는 권력파와 모리배도 있어 한국이 당면한 명암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틈에 허가 없는 학원이 문을 열고 남의 학원 이름을 빙자하고 학생을 모집하는 유령 기관이 생겨나는 판국으로 진정한 교육자와 일반 사회의 커다란 관심을 기우리게 하는 바이거니와 요지음 시내 각 중등학교의 입학금과 시설비 등 학부형의 부담을 살펴보면 공립학교는 균일치 않고 사립학교는 각각 달라 최하 1만 4천 5백 원으로부터 최고로는 수십만 원에 달하는 바 이에 대해서 당국과 학교와 학부형이 삼위일체가 되어 시급한 대책의 수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 1948년 7월 26일 Richard Werth고문 교원양성의 역사(45-48) 보고

군정청 문교부의 교원양성 담당 고문인 Richard Werth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교원 양성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보고서 "Outline History of Teacher Training, 1945/48"을 작성하여 문교부장 고문에게 제출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군정 초기의 교원 양성
 - 일제하에서는 초등교육계의 한 기능이었다.
 - 군정초기에는 Teacher Training Section이 Bureau of Higher School에 생겼다.
 - Captain Farky가 첫번째 Chief였고 한국인 상대역은 사공 환 씨였다.
 - 46년 5월에 Richerd Werth가 Chief에 임명되었다.
2. Normal Schools and Colleges
 - 1945년 당시 3개 사범학교가 있었다: 대구사범, 서울사범, 서울여자사범학교. 곧 사범대학으로 격상되어 중등교사 양성을 담당하였다.
 - 46년 8월에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으로 서울사범대학과 서울여자사범대학은 국립서울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통합흡수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인 교사가 봉사를 하고 있다.
     ; Miss Verda Sanders
     ; Miss Shila Wiley
     ; Dr. James Fisher
     ; Mr. Richard Werth
 - 45년 당시 초등교사 양성 학교는 7개가 있었다. 수준은 중등학교 정도였다. 1946년도에 9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각도에 2개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방침에 따르고 있었다.
 - 46년 2월 12일에 사범학교의 관할 책임을 각 도로 이관하는 법률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47년 3월 31일부터는 재정지원도 각도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사범학교 자체, 중앙정부, 각도 등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48년 7월 현재는 관할은 각도에서 그리고 재정 지원은 국가에서 하고 있다.
3. Teacher Certification
 1946년 9월에 교사의 자격에 관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였다. 곧 일본식의 교사자격 규정을 마련하였으나 폐기되었다. 1947년초에 문교부 미군고문 중심의 위원회가 조직되어서 교사자격 규정을 4개월간 심의하였다. 그 결과를 한국인 위원회에 넘겨서 수차의 회의를 거쳐 수정하였다. 1948년 초에 합동회의가 열려서 합의를 보았다. 결국 1948년 5월 10일에 교사자격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는 한국 교육의 발전을 위한 큰 진전이었다.
4. Re-education Programs
 1946/47년도 예산에 교원 재교육을 위한 자금은 전혀 없었다. 타 예산을 일부 전용하여 46년 여름 방학 동안 일주일씩 교원 하계 강습을 두차례 실시하였다. 여기에 500명 정도의 교사가 참가하였다. 각 지방에서는 70회 정도의 강습이 열렸고 여기에 대략 21,000명 정도의 교사가 참가하였다. 그리고 서울사범대학과 서울여자사범대학에서 하계대학이 열려 250명의 교사가 참가하였다. 대부분의 강습은 국가보조에 의해 발단이 되고 실제 실시는 지방정부에서 하였다. 경상북도의 경우에 45/48기간에 約 60회 정도의 교원강습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다른 지역도 비슷한 정도의 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1947/48회계년도에는 400만 원의 예산이 교원 재교육에 배정되었다. 비록 적은 예산이지만 8차례의 전국교사 모임을 개최할 수 있었고 중등교사를 위한 대학 수준에서의 여러 강좌를 후원할 수 있었다. 전국 교사 모임은 통신과 교통 장애로 인해 쉽게 기회를 얻기 어려운 벽지 소규모 학교 교사들에게 유명한 교육자들을 접할 기회를 주도록 계획되었다. 평균 350명정도의 교사가 참가하였다. 1947년 하계 강습회(Summer Institute)는 서울에서 300명의 교사가 참석하는 일주일 과정으로 시작해서 각 지방에서 100회 정도가 열려 거의 모든 공립학교 교사가 참가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변경된 교과과정에 대한 설명과 토론이 있었다. 1947년 동계 강습(National Winter School)은 Frank Eversull 박사의 지도하에서 미국인 스탭들에 의해 열렸다. 영어 강습 이외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언어 장벽에 대한 이해 부족, 기획의 부족, 그리고 한국인 스탭들과의 협조 부족 등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이번 회계년도에는 교사 재교육에 900만 원이 배정되었다. 사범학교에서 열리는 여름 강습회에는 7,500명 정도의 교사가 참석할 예정이다.
5. Teacher Training Center
 1947년 6월에 방한했던 교육 및 정보 조사단에서 교사교육센타의 설립을 건의했다. 의회의 예산 통과로 이 기관이 설립될 수 있게 되었다. 8주 과정의 전후기 2회의 교육을 통해 800명의 교사가 훈련을 받게 된다. 48년 8월에 첫 교육이 시작된다.[184]
  • 1948년 7월 28일 <동아일보> 國民學校 敎員들이 學父兄會 公金 橫領
국민학교 교원이 학부형회 공금을 부정 횡령하여 세인의 비난을 받고 있다. 부산부내 남부국민학교 학부형회에서는 작년 10월부터 금년 4월까지 約 1백 90만 원의 세입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교직원 후생비와 기타 학교 후원회비로 지출되고 지난 5월 초 현재에는 의외에도 約 10만 원 정도의 부채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계 관계 장부에는 정당한 기입이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그 교원은 장부에 2중 기입을 하여 約 7만 원을 부정 지출하여 사용하였으며 그밖에도 수명의 교원은 채용 증서를 담보로 約 5만 원의 금액을 횡령하였다 하는데 항간에는 이밖에도 학교 당국의 부정 사실이 많다고 물의가 분분하다.
  • 1948년 7월 28일 <동아일보> 大學基金 蕩盡 - 大邱農大 幹部들의 非行 綻露
존폐의 기로에 선 대구농과대학 기성회 기금을 집어 먹은 이 사건 -
탐문한 바에 의하면 대구농과대학 학장을 비롯하여 이미 구속 중인 동 대학 기성회 상무이사 이희원 등 간부는 동 대학 기성회 기금을 요정 유흥 주식대 또는 허위 지출 등으로 무려 120만 원의 다액의 금액을 부정 횡령하였다 하며 기타 자동차 2대 수선 비용의 구실로 일년 동안에 110만 원이라는 돈을 지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허위 신고로 받은 휘발유 50여 드럼을 부정 처분한 사실이 탄로되는 등 사건은 날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22일 대구지방 검찰청에서는 행동을 개시하여 부내 낙천, 금호관, 무궁화 요정주 등 10여 명의 사건 관계자를 소환 취조하는 한편 농대 기성회 부회장 金準○, 金聖在 양 씨도 소환 취조 중이라 하는데 그 귀추 여하가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번 사건에는 도 학무국장 李圭元 씨도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동 씨는 중앙청 문교부와 사개 국립대비로 7만 원을 쓴 것 밖에 없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 1948년 7월 28일 <동아일보> 美國留學生 理工科系 募集
문교부에서는 이공과 계통의 미국 유학생을 다음 요항에 의하여 모집하기로 되었다.
 一. 19세 이상의 남자로 전문대학 졸업자.
 二. 旅費 及 經費로 1,000원 이상 자급할 능력이 있어야 함.
 三. 귀국 후 2년간 교육 기관에 봉직할 것.
 四. 7월 30일까지 신청마감.
 五. 8월 2일부터 3일간 시험.
  • 1948년 7월 30일 Bureau of Common Schools의 활동 보고서 제출

문교부의 Common Schools 고문인 Leo B. Hart는 1947년 10월 이후의 활동을 要約하여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교과서 문제, 교원 재교육 문제 등이다.[185]

  • 1948년 7월 31일 <동아일보> 學校財團 農地 問題로 法人聯合會의 結成을 準備
헌법의 실시로 말미암아 교육 교화사업에 종사하는 재단법인 소유 농지 처리 문제는 중대한 사회 문제이다. 이 문제의 처리 여하에 따라서는 2백여개 교육 기관이 폐쇄의 비운을 맞지 않을 수 없는 터이므로 문교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여 오던 바 지난 27일 서울에 있는 주요 재단 대표 10여 명을 초청하여 대책을 협의한 바 재단법인 연합회를 창설할 것이 결의되었다. 그리하여 오는 3일 하오 3시 휘문중학에서 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1948년 8월

  • 1948년 8월 1일 <동아일보> 民主敎育에 協助 - 敎育者 懇談會 席上 핏氏 强調

@실제날짜:480730

지난번에 미국에서 한국에의 교육사업을 위해서 초청되어 온 미국교육사절단 一行은 지난 30일 하오 1시부터 미국공보원내에서 한국 교육계의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새로운 한국 민주적 교육 문제에 관하여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날 핏트맨 박사는 왕방 기자에게 대략 다음과 같이 금후 이땅에 있어서의 민주 교육의 건설 방향을 말하였다.
"나의 교육 방책은 어떠한 기정 방침에서 특수한 조선 교육을 강요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민주주의적인 교육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앞으로 우리들 一行과 더불어 조선교육자들의 의견을 신중히 고려하여 많은 성과를 얻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 방책이란 금후의 문제로써 조선교육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요청될 뿐이다.
  • 1948년 8월 6일 Bureau of Research and Special Subjects의 역사

문교부의 Research and Special Subjects 고문인 염광섭 씨는 문교부장 고문 Robert E. Gibson 씨에게 Bureau of Research and Special Subjects의 역사와 업무에 관해 보고하였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Origin and Work of Research and Special Subjects
2. Late Development of the Section of Research and Special Subjects
   (1) Organization
       a. administrative branch
       b. Branch of Tests and Measurements
       c. Branch of Child Development
       d. Branch of Special Subjects
   (2) Projects Completed
       a. Systematic Compilation of School Statistics
       b. Publishment of "The Achievement Text on Common School Education"
       c. Publishment of "Methods for Constructing Objective Tests"
       d. Educational Research
       e. Providing Lectures
   (3) Projects in Progress
       a. A Non-language Intelligence Test
       b. A Book on "Mathmatical Basis of Mental Testing"
   (4) New Projects
       a. An Elementary Text on Psychology for Sixth Grade of Middle School
       b. An Introduction to Psychology for College Students
       c. Social Psychology
       d. Educational Psychology
       e. Educational Appraisals and Evaluations[186]
  • 1948년 8월 6일 <동아일보> 土地中心으로 運營턴 育英財團 危機
文敎財團聯合會서 對策 講究
토지와 임야를 기본으로 하여 경영하여 오던 육영기관은 신년부터 토지 정책으로 일조에 몰락 폐지될 중대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번 128개 재단을 규합한 문교재단연합회는 성균관대학 재단 대표 오동식 씨를 회장으로 구체적인 사업을 수행하기로 되었거니와 동 재단 조사에 나타난 사업 내용을 살펴보면 초등 5, 중등 95, 고등 22 총계 122교로 전체 생도수는 56,792명, 교원 2,835명으로써 관공립학교에 비하면 중등은 21%에 불과하나 고등교육 기관은 실로 198%(국공립 8,524명, 사립13,652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까지의 한국 교육 대세가 결국 민간의 힘으로 유지 운영되어 온 것을 짐작할 수 있고, 그리고 128개 단체의 소유 전답은 56,889,929정보로 이밖에 과수원, 대지 등을 합치면 2만여 정보가 훨씬 넘을 것으로 시가로 환산하여도 수십억원에 달할 것이며 금후 정부의 시책에 따라 문교재단연합회의 교육 운영은 어떻게 움직여 갈 것인지 커다란 주목과 관심을 모으게 하고 있다.
  • 1948년 8월 8일 <동아일보> 過政 施策의 回顧 - 敎育篇
民主敎育 漸進 : 施設, 人材에 刷新의 未洽
국가 건설에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국민들의 교육 교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는 40년간의 피의 억압 아래서 맥을 잃고 빈사 지경에 빠져 있었던 만큼 그의 자주 발전에는 크나큰 기대를 가졌고 또 일반의  관심도 이에 따라갔다고 하겠다.
군정하 문교부에서는 남한 교육의 특수성에 유의하여 민주 교육이란 대기치를 내걸고 첫째 우리나라를 인식하고 우리나라의 국어를 도로 찾자는 이념 아래 의무교육제 실시와 성인교육을 추진하여 문맹퇴치에 힘써와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확인하는 바이다.
國民校 增設이 當面한 問題
그러나 이와 같이 향학열이 늘은 관계로 학교수도 많은 확충을 보고 의무교육도 확장, 進行을 보았다 하였으나 아직도 적령아동의 2할은 수용치 못하고 있어 이를 위하여서는 9백의 국민교를 더 증설할 것이 요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만만치 않는 문제는 예산 문제라 하겠는데 현재 1년예산 17억원 가지고는 도저히 이에 충당할 수 없고 적어도 30억원은 있어야 충분한 목표 달성을 보게 될 것으로, 앞으로의 국고 보조가 극히 주목된다 하겠다.
다음은 국어문제와 교과서 문제이다.
過政 문교부에서는 문맹퇴치를 꾀하고 "한글"강습회, 간이학교 설립 등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문맹자의 7할은 모다 우리의 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잊지 못할 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묵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한글"마춤법의 통일이라는 것이다. 표준어라는 조선어학회의 마춤법이라 하여도 학설이 구구하여 어느 것을 좇으면 좋을 지 그 善否를 선택하는데 당황하는 것이 누구나 한글 마춤법에 뜻을 둔 인사들의 고초일 것이다.
發達된 國語는 文法에 正確
"문법이 정확한 국어가 제일 발달된 국어이다"라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거니와 앞으로 새 문교부에서는 이점에 유의하여 국민들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마춤법을 통일 제정하여 해마다 변하는 철자 내용에 학동들이 당황치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敎科書의 刷新 增刊
교재는 해방 후 사계의 권위자들이 그간 많은 애로를 극복하고 구(○○)하여 훌륭한 교과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가상치 않을 수 없으나 앞으로는 좀더 연구를 거듭하여 배우는 사람들에게 좀더 신뢰감을 줄만한 권위있는 체제와 내용을 갖출 것이 요청된다. 그런데 이 교재는 도회지의 학생들은 얻어 볼 수 있지만 지방 학생들은 교과서조차 얻어 볼 수 없는 딱한 사정에 있다는 것을 당국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敎員의 質的 向上
다음에 언급할 문제는 교사 양성 문제이다. 해방 후 학교는 증설되어가는 한편 교사는 이에 충당하기에 급급하였던 때문에 교사들의 질이 저하하였다는 것은 필연적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도정부 문교부에서는 이점에 유의하여 교사 재교육 문제를 채택하고 그 방면에 힘써온 바 있었으나 그 성과는 미지수이며 한편으로는 消耗적 경향이 높은 느낌을 받는 것은 오직 기자만의 소감일까? 교육의 중요 요소인 교원의 질적 향상은 긴급사중의 긴급한 일이며 국민교육에 유감이 없도록 국가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이 방면에 노력할 것이 요망되고 있다.
  • 1948년 8월 12일 "공립학교 재정경리"에 관한 법령 공포

군정장관 William F. Dean은 공립학교 재정에 관한 법령을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218호로 공포하였다.[187]

  • 1948년 8월 12일 교육구의 설치에 관한 법령 공포

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교육구의 설립"에 관한 법령(남조선 과도정부 법령 제216호)을 공포하였다.[188]

  • 1948년 8월 12일 교육구회(District Board of Education)설치법 공포

군정장관 William F. Dean은 법령 제217호 "敎育區會의 설치에 관한 法令"(Establishing Boards of Education)을 발표하여 교육구회의 설치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189]

  • 1948년 8월 14일 <동아일보> 登校中 小學生 18名 溺死

@실제날짜:480729

배를 타고 등교하는 소학생들이 10여 명이나 익사한 이것도 장마가 빚어낸 한토막 비극-
지난 7월 29일 오전 여덟시경 夫餘郡 玉山國民學校 아동 45명은 동교 교사 한 명에게 인솔되어 玉山水利組合 저수지를 배로 건너고 있었는데 저수지 吐口에 다다르자 급격한 누수로 배가 파산되어 그중 18명은 애처롭게도 익사하고 나머지 27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한다.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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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건설 제1호
  3.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11 Sept. 1945 - 28 Feb. 1946
  4.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11 Sept. 1945 - 28 Feb. 1946
  5.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11 Sept. 1945 - 28 Feb. 1946
  6.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11 Sept. 1945 - 28 Feb. 1946
  7. 건설 제1호 "해방 이후의 각계 건설 전망 -교육편-"
  8. 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11 Sept. 1945 -28 Feb. 1946
  9. 건설 제1호, "해방 이후의 각계건설전망 –교육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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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9월 14일 기사와 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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