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다산초당 | |
---|---|
지정 번호 | 사적 제107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지정 명칭 | 강진 정약용 유적 |
한자 명칭 | 康津 丁若鏞 遺蹟 |
영문 명칭 | Jeong Yak-yong Historic Site, Gangjin |
분류 | 유적건조물 |
건립·제작 | 건립: 19세기 초반 / 폐허화: 1930년대 / 복원: 1957~1959, 1970년대 |
주소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103-2번지 |
위도 | 34.581733 |
경도 | 126.745075 |
웹사이트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070000,36 |
목차
Introduction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Korea Tourism Organization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재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이 있다.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산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구태익 교수 홈 갤러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에 위치한 이 정자는, 조선조 후기 실학사상가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선생이 辛酉사옥(1801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와서 외가(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마련한 초당이다.
'茶山'이란 이름은, 본시 이곳이 정약용이 기거하기 전부터 차밭이 만산(滿山)하여 [茶山]이라고 불렸다는데 그는 이곳에서 그의 호를 '다산'이라 고쳤다. 해남의 외가쪽 사람들은 尹孤山이래 家傳되어오던 천여권의 장서를 제공하였으므로, 다산은 이곳에서 실학사상과 관련된 다양한 독서와 사색을 통하여 수많은 저술을 하였다.
즉 다산은 이곳에서 마음놓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눌린 자의 억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하여 수많은 저서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산은 여기서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쳐 모두 학자로 키웠다. 원래 15,6평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0년대에 폐허화했는데 1959년 해남윤씨의 주도로 결성된 '정다산유적보존회'에 의해 우선 초당이 복원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강진군이 중심이 된 '다산유적복원위원회'에 의해 다산 동암과 서암, 유적비 등이 복원 · 건립되었다. 초당 동편 백련사로 가는 길목 잔등은 흑산도에 있는 약전 형과 고향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이런 선생의 심회를 되살리기 위해 그 자리에 천일각을 지었다 :
Diagram
강진 정약용 유적 일원 도면
강진 정약용 유적 건조물 도면
Gallery
Map
Related Pages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
다산초당 | ~에 그려져 있다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다산초당 | 관련 인물 | 정약용 |
다산초당 | 관련 공간 | 백련사 |
다산초당 | 관련 행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과 2016 가을 학술답사 |
Contributors
- 린지 처음 작성
References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 여행
- ↑ 구태익 교수 홈 갤러리
- ↑ 이재근(1991). <조선시대 별서정원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 ↑ ds2hcg님의 블로그 다산초당(茶山草堂)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070000,36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 강진 정약용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