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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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

항목명

  • 한글: 정약용
  • 한자: 丁若鏞
  • 영문: Jeong Yak-yong

범주

속성

  • 시대: 조선
  • 성격: 학자
  • 성별: 남자
  • 본관: 나주(羅州)
  • 생몰년: 1762.06.16(영조 38)~1836.02.22(헌종 2)
  • 출신지: 경기도 양근(楊根)

설명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1762년(영조 38) 6월 16일 경기도 양근군(지금의 양평군 및 가평군, 광주시, 남양주시 일부)에서 태어났다.

1789년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1801년의 신유사옥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는 강진 유배기 동안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1836년(헌종 2) 2월 22일에 향리에서 졸하였다, 남양주시 조안면에 그의 묘소가 있다. ( 출처: '정약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 항목

Domain relation Range
정약용 ~에_살았다 강진 정약용 유적
정약용 ~을_겪었다 신유박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을_담았다 정약용

지식 관계망

웹자원

'정약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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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