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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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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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삼국시대 |
발견지 | 아차산 4보루 |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
개관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에서 후부(後部)는 당시 5부로 나눈 고구려 수도 행정구역 중 하나로, 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을 알려준다.
'○兄'에 대해서는 고구려에서‘兄’이 관등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관직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아차산 4보루에서 함께 발견된 명문 토기편들의 ‘支都兄(지도형)’‘冉牟兄(염모형)’의 관직명은 확인된 바 없으므로, 兄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과 평양성석각
아차산 4보루 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병술년(566)의 평양성석각에서 이와 같은 용례가 보인다.
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步之 병술년 12월에 한성 하후부의 소형 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두 유물의 시차가 크지 않은 점과 한강유역의 한성이 551년 이후 황해도 신원지방으로 옮겨진 것을 고려한다면 아차산 4보루의 '후부'도 한성의 '후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한강유역이 도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小兄'은 고구려 관직명으로, 일명 ‘실지(失支)’라고도 한다. 고구려 후기의 14관등 가운데 제 11위의 관등이며, 중국의 정7품직에 비정된다.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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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 4보루 |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 | 고구려 |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 A는 B와 관련된다 | 평양성석각 |
갤러리
아차산 4보루‘後部都○兄’명 토기편[2]
주석
- ↑ 아래 사진출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
- ↑ 사진출처: 앞의 기사
참고
- 최종택, <아차산 보루와 고구려 남진경영>, 서경문화사, 2013년.
기여
- 김지선: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