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미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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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1일 (금) 10:2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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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한국군대(강화진위대) 강제해산으로 강화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주모자로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 김동수 권사, 동생 김영구와 그의 4촌 김남수 권사를 주모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 이유는 김동수 권사가 기독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등과 항일민족운동에 앞장섰다는 것과 교회에서 강론할 때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였으며, 태서신사라는 서양 역사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8월 21일 일본군은 김동수 권사 일행을 재판에 회부한다면서 끌고 나갔다. 재판을 받으려면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야 하는데 갑곶나루 남쪽 1킬로미터 쯤 되는 더리미 해안으로 끌고 가 후미진 곳에 이르러 살해했다. 그때 김동수 권사 나이 45세, 김남수 44세, 김영구 23세였다. 의병에 참가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희생을 계기로 강화 주민들 사이에 '기독교는 나라 사랑하는 종교'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교인들이 늘어나 1년 만에 30개 교회에 5천여 명 교인이 출석하게 되었다. 당시 강화와 인천 지방을 관리하던 데밍 선교사의 1908년 선교 보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강화 사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강화 교회는 독자적으로 장로사(지금 감리사) 한 사람이 주재하며 일을 보아야 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는 피의 세례(baptism of blood)의 결과입니다." 의병운동 이후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한 강화 지방 교회의 성장 원인을 데밍 선교사는 김동수 권사 삼형제가 흘린 '피의 세례'에서 찾았던 것이다.

위치

선원면 더리미는 강화 갑곶에서 남쪽으로 약 1km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강화외성이 있는 자리와 일치한다. 인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344다.

시각자료

참고 사이트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6. 편집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