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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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허균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강릉에 와 외가에 머물면서 <애일당기><ref> "愛日"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노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7&gunchaId=av007&muncheId=01&finId=001&NodeId=&setid=2563959&Pos=0&TotalCount=2&searchUrl=ok 한국고전번역원 | + | * 허균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강릉에 와 외가에 머물면서 <애일당기><ref> "愛日"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노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7&gunchaId=av007&muncheId=01&finId=001&NodeId=&setid=2563959&Pos=0&TotalCount=2&searchUrl=ok 한국고전번역원(허균 저, 김명호 역, 「애일당기」『성소부부고』권7 문부 4) 참조]</ref>를 지었다. 이때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angneung&dataType=01&contents_id=GC00302428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인 교산을 호로 사용하였다.<ref> 허경진, 『허균평전』, 돌베개, 2002</ref> |
* 1603년 벼슬길에서 밀려난 허균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다가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강릉부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758 유인길(1554-?)]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허균에게 인삼 서른두 냥을 넘겨주었다. 허균이 사양하자 가지고 돌아가 중국 사신 편에 구입한 서적을 향교로 보내왔다. 허균은 "경포호 별장(湖上別墅)"의 누각 하나를 비워서 서각으로 만들고 강릉 선비들과 공유하였다.<ref>허경진, 『허균연보』, 보고사, 2013 </ref> "경포호 별장"이 초당이 아닌가 짐작된다. | * 1603년 벼슬길에서 밀려난 허균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다가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강릉부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758 유인길(1554-?)]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허균에게 인삼 서른두 냥을 넘겨주었다. 허균이 사양하자 가지고 돌아가 중국 사신 편에 구입한 서적을 향교로 보내왔다. 허균은 "경포호 별장(湖上別墅)"의 누각 하나를 비워서 서각으로 만들고 강릉 선비들과 공유하였다.<ref>허경진, 『허균연보』, 보고사, 2013 </ref> "경포호 별장"이 초당이 아닌가 짐작된다. |
2017년 4월 6일 (목) 11:09 판
허균·허난설헌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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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80px]] | |
지정 번호 |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 |
지정일 | |
지정 명칭 | |
한자 명칭 | 許筠·許蘭雪軒 生家址 |
영문 명칭 | |
분류 | 문학공원 |
건립·제작 | 2007년 2월 1일 개관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초당동 477] |
위도 | 37.792624 |
경도 | 128.909667 |
웹사이트 |
위치
정의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과 그의 동생인 문신 허균(1569-1618)이 태어난 집이다.
개요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면서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5년에 걸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자료 및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는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릉 관련 일화
- 본래 허씨 남매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의 본가는 서울 건천동(乾川洞)[1] 이다. 건천동은 서울의 동부에 해당되므로, 이곳에 거주하던 김효원, 허엽 등을 "동인"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 허엽의 두번째 아내는 예조참판 김광철(1493-1550)의 딸로, 그녀에게서 난 허봉(1551-1588), 허난설헌, 허균이 외가인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 허균은 자신의 출생지 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2]
-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잠시 살았으나 허엽은 곧 경주부윤이 되어 떠났고, 7세 무렵 일가가 서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3] 허균 역시 강릉에서 태어났으나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난설헌은 1585년 모친상을 당해 강릉 외삼촌 집에 머물렀다. 이때 선계인 광상산(廣桑山)에서 노니는 꿈을 꾸고 일어나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그녀가 스물일곱에 죽을 것을 예언한 시참(詩䜟)으로 알려져 있다.
푸른 바다가 구슬바다 침범하고 碧海侵瑤海 푸른 난새가 채색 난새 의지하네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꽃송이가 芙蓉三九朶 붉게 지니 달과 서리 서늘하구나 紅墮月霜寒
- 1603년 벼슬길에서 밀려난 허균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다가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강릉부사 유인길(1554-?)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허균에게 인삼 서른두 냥을 넘겨주었다. 허균이 사양하자 가지고 돌아가 중국 사신 편에 구입한 서적을 향교로 보내왔다. 허균은 "경포호 별장(湖上別墅)"의 누각 하나를 비워서 서각으로 만들고 강릉 선비들과 공유하였다.[6] "경포호 별장"이 초당이 아닌가 짐작된다.
생가 터 확정 경위
- 생가 터의 확정은 후손 허연(許連, 명주군 사천면 판교리) 씨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는 강릉시 초당동 575의 3에 소재한 고가를 생가로 지목하였다. 소유주가 김씨, 정씨 순으로 바뀌었고, 정병선(鄭炳善)씨로부터 이 모씨가 매입하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7]
- 허균이 편집하여 중국에 보낸 <난설헌집>에 실린 죽지사 제 3수에 강릉이 언급되어 있다. "문 앞에 시내"가 있었다는 구절이 초당의 터를 확정하는 전거로 일컬어진다. 시는 다음과 같다.
강릉의 돌쌓인 물가에 살면서 家住江陵積石磯。 문 앞에 시내에서 비단옷 빨았었네 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주 노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듯 쳐다봤네 貪看鴛鴦相伴飛
주석
- ↑ 현재 중구 인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 ↑ 허균 저, 신승운 역, 「학산초담」『성소부부고』권26 부록1, 한국고전번역원
- ↑ 장정룡, 『허난설헌과 강릉』, 강릉시 발행, 1998, 19면
- ↑ "愛日"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노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고전번역원(허균 저, 김명호 역, 「애일당기」『성소부부고』권7 문부 4) 참조
- ↑ 허경진, 『허균평전』, 돌베개, 2002
- ↑ 허경진, 『허균연보』, 보고사, 2013
- ↑ 중앙일보 1975년 1월 30일자 기사 "許蘭雪軒 生家발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