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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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place of Heo Gyun and Heo Nanseolheon

This is the birthplace of Heo Gyun (1569-1618), the author of Hong Gil-dong jeon,and his sister Heo Namseolheon(1563-1589), also a renowned poet. The house has features of traditional residence for the Joseon period nobility.

정의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과 그의 동생인 문신 허균(1569-1618)이 태어난 집이다.

내용

현황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면서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5년에 걸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자료 및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는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릉 관련 일화

  • 본래 허씨 남매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의 본가는 서울 건천동(乾川洞)[1] 이다. 건천동은 서울의 동부에 해당되므로, 이곳에 거주하던 김효원, 허엽 등을 "동인"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 허균은 자신의 출생지 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2]

  •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잠시 살았으나 허엽은 곧 경주부윤이 되어 떠났고, 7세 무렵 일가가 서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3] 허균 역시 강릉에서 태어났으나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난설헌은 1585년 모친상을 당해 강릉 외삼촌 집에 머물렀다. 이때 선계인 광상산(廣桑山)에서 노니는 꿈을 꾸고 일어나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그녀가 스물일곱에 죽을 것을 예언한 시참(詩䜟)으로 알려져 있다.
 푸른 바다가 구슬바다 침범하고 碧海侵瑤海
 푸른 난새가 채색 난새 의지하네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꽃송이가 芙蓉三九朶
 붉게 지니 달과 서리 서늘하구나 紅墮月霜寒
  • 허균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강릉에 와 외가에 머물면서 「애일당기」[4]를 지었다. 이때 애일당 뒷산의 이름인 교산을 호로 사용하였다.[5]
  • 1603년 벼슬길에서 밀려난 허균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다가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강릉부사 유인길(1554-?)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허균에게 인삼 서른두 냥을 넘겨주었다. 허균이 사양하자 가지고 돌아가 중국 사신 편에 구입한 서적을 향교로 보내왔다. 허균은 "경포호 별장(湖上別墅)"의 누각 하나를 비워서 서각으로 만들고 강릉 선비들과 공유하였다.[6] "경포호 별장"이 초당이 아닌가 짐작된다.

생가 터 확정 경위

  • 생가 터의 확정은 후손 허연(許連, 명주군 사천면 판교리) 씨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는 강릉시 초당동 575의 3에 소재한 고가를 생가로 지목하였다. 소유주가 김씨, 정씨 순으로 바뀌었고, 정병선(鄭炳善)씨로부터 이 모씨가 매입하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7]
  • 허균이 편집하여 중국에 보낸 허난설헌의 시집『난설헌집』에 실린 「죽지사」 제 3수에 강릉이 언급되어 있다. "문 앞에 시내"가 있었다는 구절이 초당의 터를 확정하는 전거로 일컬어진다. 시는 다음과 같다.
 강릉의 돌쌓인 물가에 살면서 家住江陵積石磯。
 문 앞에 시내에서 비단옷 빨았었네 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주 노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듯 쳐다봤네 貪看鴛鴦相伴飛

위치

주석

  1. 현재 중구 인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2. 허균 저, 신승운 역, 「학산초담」『성소부부고』권26 부록1, 한국고전번역원, 2017년 4월 6일.
  3. 장정룡, 『허난설헌과 강릉』, 강릉시 발행, 1998, 19면
  4. "愛日"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노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고전번역원(허균 저, 김명호 역, 「애일당기」『성소부부고』권7 문부 4, 2017년 4월 6일.) 참조
  5. 허경진, 『허균평전』, 돌베개, 2002
  6. 허경진, 『허균연보』, 보고사, 2013
  7. 『중앙일보』 1975년 1월 30일자 기사 "許蘭雪軒 生家발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