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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개로왕(蓋鹵王, ? ~ 475년 9월)은, 백제의 제21대 국왕(재위: 455년~475년)이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諱]은 경사(慶司)로 《위서(魏書)》에는 성과 이름을 합하여 여경(餘慶)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불렸으며,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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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455년 9월 비유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 아들인 문주(文周)에게 정사(政事)를 보필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상좌평(上佐平)으로 임명하였다. | ||
− | + | 개로왕(蓋鹵王)은 신라(新羅), 왜(倭), 남조(南朝)의 송(宋) 등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와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는 469년(개로왕 15)에 장수를 파견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세우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세워 고구려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472년(개로왕 18)에는 북위로 사신을 보내 함께 고구려 침공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개로왕은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중단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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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고구려 군이 침공해오자 개로왕은 아들인 문주(文周)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성을 지키며 고구려 군대와 싸웠으나 7일 만에 북성(北城)이 함락되고 남성(南城)도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성을 탈출하려다가 고구려 군대에 사로잡혔다. 당시 고구려 군대는 대로(對盧)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의 장수가 이끌고 있었는데,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고구려 장수가 된 인물들이다. 개로왕을 사로잡은 걸루 등 고구려 장수들은 말에서 내려 왕에게 절을 하여 예를 갖춘 뒤에 그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으며 죄를 열거했다. 그리고 묶은 채로 [[아차산성]] 아래로 보내서 개로왕을 죽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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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문헌== | ||
+ | *《삼국사기》 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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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8일 (목) 13:20 판
개로왕(蓋鹵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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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 |
범주 | |
정의 | |
특징 |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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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
URL | |
편찬자 | 정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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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개로왕(蓋鹵王, ? ~ 475년 9월)은, 백제의 제21대 국왕(재위: 455년~475년)이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諱]은 경사(慶司)로 《위서(魏書)》에는 성과 이름을 합하여 여경(餘慶)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불렸으며,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생애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455년 9월 비유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 아들인 문주(文周)에게 정사(政事)를 보필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상좌평(上佐平)으로 임명하였다.
개로왕(蓋鹵王)은 신라(新羅), 왜(倭), 남조(南朝)의 송(宋) 등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와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는 469년(개로왕 15)에 장수를 파견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세우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세워 고구려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472년(개로왕 18)에는 북위로 사신을 보내 함께 고구려 침공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개로왕은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북위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한 사실은 오히려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을 불러왔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1)은 475년(개로왕 21) 9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기습적으로 남하하여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시 장수왕이 승려인 도림(道琳)을 첩자로 파견하여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과 바둑을 두어 환심을 사게 한 뒤에 토목사업을 벌이도록 개로왕을 꼬드겨 백제의 국력을 미리 소진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 군이 침공해오자 개로왕은 아들인 문주(文周)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성을 지키며 고구려 군대와 싸웠으나 7일 만에 북성(北城)이 함락되고 남성(南城)도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성을 탈출하려다가 고구려 군대에 사로잡혔다. 당시 고구려 군대는 대로(對盧)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의 장수가 이끌고 있었는데,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고구려 장수가 된 인물들이다. 개로왕을 사로잡은 걸루 등 고구려 장수들은 말에서 내려 왕에게 절을 하여 예를 갖춘 뒤에 그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으며 죄를 열거했다. 그리고 묶은 채로 아차산성 아래로 보내서 개로왕을 죽였다.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文周)는 신라에게서 1만여 명의 원병을 얻어 돌아와 고구려 군대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성은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은 뒤였으므로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제22대 문주왕), 그해 10월에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개로왕에게는 맏아들인 문주왕(文周王) 이외에 곤지(昆支)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곤지는 문주왕 때에 내신좌평(內臣佐平)을 지냈으며, 문주왕의 아들인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이 죽은 뒤에는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東城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관련 문헌
- 《삼국사기》 열전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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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 isRelatedTo | 아차산,아차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