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47번째 줄: | 47번째 줄: | ||
*뉴스 영상 | *뉴스 영상 | ||
+ | <10.26 사태 당시 뉴스> | ||
<html> | <html> |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polfHUybG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polfHUybGc"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
2019년 6월 26일 (수) 04:17 판
인물 | |
---|---|
인물명 | 전두환(全斗煥) |
성별 | 남 |
출생일 | 1931년 3월 6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
사망일 | |
사망지 |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육군사관학교 학사 |
직업 | 군인, 정치인 |
활동기간 | |
소속 | 민주정의당 (1980-1988) 무소속 (1988- ) |
종교 | 불교 |
가족사항 |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배우자 이순자 아들 3명 딸 1명 |
목차
정의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이다.
생애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형 전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학하지 않았고,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다.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정변가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총애을 받았다.
1969년 4월 14일, 전두환 중령은 육사11기 이후의 동창회인 북극성회(北極星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일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태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태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태 수사를 맡았다. 그러던 중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고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킨다.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
취임하자마자 연좌제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금지, 심야영업금지령을 해제했다.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다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킨 후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7년단임 대통령제). 그리고 1981년 1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그 후 새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두환은 취임 후 허문도가 주장하는 3S 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Sports), 성 개방(Sex), 영상 산업 진흥(Screen)을 3S 정책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있었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가 강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간선제의 여당후보로 노태우를 내세웠다.
1987년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자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관련 사건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임시적 군정 실시를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 혁명이다.[2]
주동자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 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였으며, 전두환은 주동자 박정희를 도우면서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이다.
10.26 사태 직후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의 폐기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3]
- 뉴스 영상
<10.26 사태 당시 뉴스>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 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신군부)이 기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하게 되었던 것이다. 12.12 군사반란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 군사반란은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 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하였으며,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등 5.18 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하였다.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 벌금 2626억 원 추징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양인 등은 석방되었다.[4]
3S 정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및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성 풍속, 영상이라는 수단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배기"정책의 통칭이다. "3S"는 스포츠 (Sports), 섹스 (Sex), 스크린 (Screen)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전두환 정부 포함)가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돌려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여러 우민화 정책들을 묶어 이르는 표현이다.[5]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이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가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198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6년부터 직선제 개헌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시국 혼란을 이유로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전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대규모 집회를 성공적으로 주도하자 결국 6월 26일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철회했으며,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6]
관련 작품
강풀이 그린 만화 작품이다.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은 지 26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가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했던 대기업 회장 김갑세는 26년이 지난 후 당시 죽어간 광주시민의 자녀들과 규합하여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위의 26년(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조근현 감독이 연출하고 한혜진, 진구 등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장훈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 유해진 등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택시운전사인 송강호가 독일 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로 간다. 그 곳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열사의 죽음과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도화선이 되어 벌어진 6월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