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동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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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일) 17:47 기준 최신판
개관
- 정의
- 내용
역사적 배경
최초 나제동맹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초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요동(遼東)방면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의 팽창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당시 북진정책을 전개하고 있던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한편,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호(和好)를 도모하였다.
경과 및 결과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특히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을 전사시키는 등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내물왕 말기에 이르면서 신라가 다시 고구려에 접근하게 되는 상황변화로 인해 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는 왜(倭)·가야 등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 413∼492)은 427년(장수왕 15)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추진하였다. 고구려 남진의 적극화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군사적 보호 하에 있던 신라에게도 커다란 위협이었다. 백제는 신라 및 북위(北魏)에게 접근했는데, 북위와의 접촉은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고구려 주둔군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던 신라와의 접촉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433년 백제의 비유왕(毗有王, 427∼455)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 417∼458) 사이에 맺어진 것이 제2차 나제동맹이다. 이 동맹은 필요할 때 상호 원군을 파견하도록 한 군사적 공수동맹(攻守同盟)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공수동맹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漢城)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문주왕(文周王, 475∼477)은 신라군의 도움을 받아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천도해 나라를 보존하였다.[1]
클래스
- 개념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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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 A는 B를 결성하였다 | 나제동맹 |
장수왕 | A는 B를 야기했다 | 나제동맹 |
나제동맹 | A는 B가 멤버였다 | 백제 |
나제동맹 | A는 B가 멤버였다 | 신라 |
아차산과의 연관성
나제동맹을 결성한 개로왕이 전사한 곳이 아차산성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기여
- 강원규: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