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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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ref>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7&gunchaId=av026&muncheId=02&finId=002&NodeId=&setid=2420147&Pos=9&TotalCount=37&searchUrl=ok 한국고전번역원 성소부부고 권 26 부록 학산초담 번역에서]</ref> | ||
+ | * 허균이 편집하여 중국에 보낸 <난설헌집>에 실린 죽지사 제 3수에 강릉이 언급되어 있다. | ||
− | + | 강릉의 돌쌓인 물가에 살았었지 家住江陵積石磯。 | |
− | + | 문 앞에 시내에서 비단옷 빨았었네 門前流水浣羅衣。 | |
− | + |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주 노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棹。 | |
+ |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듯 쳐다봤네 貪看鴛鴦相伴飛 | ||
== 주석 == | == 주석 == | ||
<references/> | <references/> |
2017년 4월 5일 (수) 15:10 판
허균·허난설헌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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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80px]] | |
지정 번호 |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 |
지정일 | |
지정 명칭 | |
한자 명칭 | 許筠·許蘭雪軒 生家址 |
영문 명칭 | |
분류 | 문학공원 |
건립·제작 | 2007년 2월 1일 개관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초당동 477] |
위도 | 37.792624 |
경도 | 128.909667 |
웹사이트 |
위치
정의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과 그의 동생인 문신 허균(1569-1618)이 태어난 집이다.
소개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면서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5년에 걸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자료 및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는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일화
- 허씨 남매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의 본가는 서울 건천동(乾川洞)[1] 이다.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는데, "동인"은 그의 집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 허엽의 두번째 아내는 예조참판 김광철(1493-1550)의 딸로, 그녀에게서 난 허봉(1551-1588), 허난설헌, 허균이 외가인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 허균은 자신의 출생지 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2]
- 허균이 편집하여 중국에 보낸 <난설헌집>에 실린 죽지사 제 3수에 강릉이 언급되어 있다.
강릉의 돌쌓인 물가에 살았었지 家住江陵積石磯。 문 앞에 시내에서 비단옷 빨았었네 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주 노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듯 쳐다봤네 貪看鴛鴦相伴飛
주석
- ↑ 현재 중구 인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 ↑ 한국고전번역원 성소부부고 권 26 부록 학산초담 번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