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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와 테일러 가족 이야기

Synopsis

1923년 인왕산 자락 은행나무골에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 ‘딜쿠샤’와 그 집의 주인이었던 테일러 부부가 경험한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와 문화 이야기. 4대 130년에 갈친 테일러 가문과 한국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떠한 유산으로 남았는가?

Storyline

Episode 1: 테일러 가족의 가계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로 1886년 한국에 온 조지 테일러,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와서 생활한 두 아들 앨버트와 윌리엄, 1917년 앨버트와 결혼해서 특별한 삶을 개척한 영국 여인 메리, 1919년 한국에서 태어났고 1992년 메리의 유고를 편찬•간행한 브루스, 테일러 가문의 유물을 정리해 서울시에 기증한(2016~2017) 브루스의 딸 제니퍼. 테일러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

Episode 2: 운산금광과 테일러 부자

테일러 가문의 한국과의 인연은 평안북도 운산에 있었던, 세계적인 규모의 금광 개발 사업에 기인한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구한 공으로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미국인 의사 알렌은 운산금광의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를 끌어들여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하게 하였다. 모스는 1985년에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and Development Co.)를 설립하고 1986년에 조지 테일러를 광산기술자로 초빙하였다. 1897년 다른 미국인 사업가 헌트(Leigh S. J. Hunt)와 파세트(J. Sloat Fasset)가 모스로부터 운산금광에 관한 권리를 인수하여 동양합동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설립하고 광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였다. 그러자 운산금광의 기술책임자였던 조지 테일러는 첨단 광업 장비인 쇄광기를 도입하기로 하고 미국에 있던 아들로 하여금 그 장비를 운송해 오도록 하였다. 1987년 앨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한 쇄광기를 운송 가능한 부품으로 해체한 후 이것들을 인천을 거쳐 운산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살이었던 동생 윌리엄도 이 때 형과 동행했다.

Episode 3: 메리 테일러와 딜쿠샤

메리 린리 테일러는 영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향 첼트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의 예비신부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만두고 나와 연극 배우가 되었다. 1916년 메리는 극단을 따라 아시아 순회공연을 가게 되었고, 공연지 중 한 곳이었던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국에서 온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를 만났다. 열 달 후 앨버트는 인도에서 공연중이던 메리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봄베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17. 6. 15)
앨버트와 결혼하여 한국에 온 메리는 서대문 인근에 살면서, 남편과 함께 자주 인왕산 인근을 산책했다. 그러던 어느날 산 아래 마을의 우물가에서 노거수 은행나무를 발견하고, 훗날 집을 짓게 되면 이 나무 옆에 지으리라 결심한다. 몇 해를 기다란 끝에 테일러 부부는 그곳의 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1923년에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의 이름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 순회공연 도중에 가 보았던 러크나우 지역의 유적지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인도의 딜쿠샤는 인도에 사는 영국인들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메리의 할아버지가 인도인들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곳이기도 했다. 메리가 그곳에 갔을 때 건물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힌디어 ‘딜쿠샤’의 뜻이 마음에 들었던 메리는 자신이 집을 짓게 되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Episode 4: 테일러 형제와 3.1 운동

운산금광 직원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테일러 형제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개척해 가기 시작했다. 형 앨버트는 운산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충청도 직산(현재 충남 천안)에서 광산을 개발했고, 한국의 골동품을 수집•판매하는 골동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업 수완이 좋은 동생 윌리엄은 자동차와 각종 잡화를 수입•판매하는 무역 회사 ‘테일러상회(W. W. Tayler Complaty)’를 경영했다.
이들의 본업은 사업가였지만, 뜻하지 않게 한국의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세계에 알리는 언론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 앨버트는 미국 연합통신사(Associated Press, AP)의 특파원 자격으로 장례를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때 그의 아내 메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을 위해 입원 중이었는데, 간호원 한 사람이 메리의 침대에 문서 다발을 숨기는 일이 벌어졌다. 3,1 운동의 주동자들이 세브란스 병원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는데 일본 경찰이 이를 알고 압수하러 오자, 그 증거를 감추려 한 것이다. 앨버트는 이 문서가 독립선언문임을 알게 된 즉시 특종이 될 기사를 작성했고, 동생 윌리엄으로 하여금 기사와 선언문을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으로 반출하고, 그곳에서 미국 AP로 타전하게 했다.
앨버트가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할 때 찍은 사진들은 아들을 브루스를 거쳐 손녀 제니퍼에게 전해졌고, 제니퍼는 이것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pisode 5: 호박목걸이

메리는 어렸을 때부터의 어머니의 호박목걸이를 좋아했고. 그녀가 가정에서 독립 할 때 어머니는 그 목걸이를 메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메리는 아시아 순회 공연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 목걸이의 구슬들을 잃어버렸고, 몹시 서운했던 마음을 일본에서 만난 미래의 남편 앨버트에게 이야기 했다. 앨버트는 며칠 후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호박에 대한 한국인들의 각별한 애정을 이야기해 주면서....... 메리는 일생 동안 이 목걸이를 간직했고, 노년에는 이것을 그녀의 한국에 대한 추억의 표상으로 삼았다. 메리가 그녀의 한국 생활을 기술한 자서전을 썼을 때 책의 제목을 ‘호박 목걸이’라고 했으며 책에 담은 이야기 하나 하나를 목걸이의 구슬에 대응시켰다. 1982년 메리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남긴 ‘호박 목걸이’ 유고를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정리하여 1992년에 출간했다. 메리가 목에 걸었던 호박 목걸이는 그녀의 손녀인 제니퍼가 테일러 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2016년에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 호박 목걸이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며, 딜쿠샤(앨버트 테일러 가옥)에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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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tual Classroom: 딜쿠샤와 테일러 가족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