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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항쟁

광주민주화항쟁은 예전에는 ‘광주 사태’로 불렸었고. 지금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 등으로 불리고 있다. 5・18은 처음 발발 때 계엄사에 의해 ‘무장폭동’, ‘난동’으로 규정되었으나 노태우 정부 이후 국가가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고 민주 진보진영에서는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약 10일 동안의 약 2만 5천 명의 군인들이 동원된 무력 폭력 진압으로, 정부 공식발표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발생했다. 옛 전남도청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해서 노력하던 시민군이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임박한 5월 26일 어린 학생들과 여자들을 귀가조치 시킨 후 자신들은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 목숨을 걸고 항전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공수 여단 특공대가 도청에 남은 마지막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종결되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에 영향을 주었다.

독침 사건

1980년 5월 25일 아침 8시 쯤 전남도청에서 경비를 맡고 있던 무장시위대원 장계범(23)은 갑자기 ‘독침이다’고 소리쳤고 옆에 있던 무전사 정한규(23․운전사)가 장계범의 등을 빨아대는 시늉을 하면서 진짜 독침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긴급히 전남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 날 도청 안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누군가 뒤에서 오른쪽 뒤 어깨부분에 침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장계범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척 하고 그 날로 퇴원했다. 처음에 독침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항쟁요원들은 도청 안에 정보요원이나 프락치가 많이 들어왔을 것이고 간첩도 없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으나, 막상 독침사건이 발생하자 진짜 간첩이 들어와 독침을 찌른 것으로 여기고 불안해 했다. 뒤에 이 사건은 뒤에 프락치로 들어온 두 사람이 짜고 조작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항쟁본부 측은 독침사건을 계엄사의 정보요원들이 내부 소동을 일으키고 5․18이 ‘북괴간첩들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에 의한 폭동’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5·18 광주항쟁의 희생자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에서 광주 재진입 작전(상무충정작전)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5·18 왜곡 시도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군의 체험수기, 간첩사건 등을 조작해 광주학살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여러 개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침사건, 검거 간첩 손성모 사건, 검거 간첩 이청룡 사건, 북한군 개입설 유포 등이다.



상무충정작전

‘광주 재진입 작전(光州再進入作戰)’은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공수부대 특공조가 광주 시내의 주요 건물에 은밀히 침투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뒤따라 온 보병부대와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전이었다. 계엄군 측의 공식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尙武忠正作戰)’이다. 27일 0시 01분 광주 재 진입 상무충정작전은 개시됐고, 대한민국 최정예 3공수 특공조 80명, 11공수 특공조 37명, 7공수여단 특공조 262명이 투입됐다. 5월 27일 새벽 3시 30분 경 광주 시내 주요 지점으로 진입하여, 옛 전남도청에서 3공수여단과 시민군은 새벽 4시 5분에 처음으로 교전이 시작되어 새벽 5시 21분 작전이 완료된다. 이 작전으로 시민군 17명이 사망하고, 수 십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작전 중 계엄군 3명도 숨졌다.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에서 광주 재진입 작전(상무충정작전)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