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북문(北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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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松門下久徘 (진송문하구배)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山自高麗屈曲 (산자고려굴곡)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眼下一千茅瓦屋 (안하일천모와옥)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烟火影裡半塵 (연화영리반진)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 강화부의 북산(北山)을 송악(松嶽)이라 하고 북문으로 진송문(鎭松門)이라고 하였다. ○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留守) 김노진이 다음과 같은 기문을 지었다.

“강화도는 산을 빙 둘러 성을 쌓은 것이, 또한 10 리이다. 무릇 4문을 설치하였는데 동문 서문 남문에는 모두 누각이 있으나 유독 북문만 누각이 없으니 어찌 북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는가. 대개 미처 누각을 쌓을 겨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절도사직을 제수 받고 송정에서 전함을 사열하였는데, 길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벗겨진 첩과 짧은 구릉이 어슴프리 쑥대밭 사이로 보였다. 이어 좌우에 있는 수행원에게 ʻ아, 이와 같은데 방어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ʼ 라고 말하였다. 이 문은 송악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송악과 대치하고 있으니 옛 서울과 접하는 것이다. 송정에 임하여 굽어 살펴보니 전함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들이 담장 밖에서 지나가는데 그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투가 보이는 것과 같다. 돈대와 섬들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고, 날개 모양으로 숲 사이로 드러난 것이 연미정이다.

호서와 영서의 조운선이 경유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짝 지어 경작하는 볼만 하다. 갓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있으니 편안한 날로 교화할 수 있고, 빗장을 단단히 잠가서 폭도를 막을 수 있으니 이 가운데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누각이 없을 수가 없다. 하물며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데 누각이 없어서 되겠는가. 이에 누각을 지어 앞선 사람들이 남긴 나머지를 대신하면 좋지 않겠는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ʻ좋다ʼ라고 하였다. 돌을 캐고 재화를 모아서 축조를 시작하니 얼마 안 되어 완성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누각에 편액을 달아 ʻ진송ʼ이라 이름을 명명하고 그 대략을 이와같이 기록한다. 계묘년(1783) 초여름 하순에 유수 김노진(金魯鎭)은 기록한다.”

기행지도

인물

  •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