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화포지(花浦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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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화포선생집터(花浦址)

花浦舊基問在 (화포구기문재)     화포선생 옛 집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居人尙指一雲 (거인상지일운) 구름 낀 언덕을 그곳 주민이 가리키네.
大江流去碑猶立 (대강류거비유립) 큰 강물은 흘러가도 아직 비석 서있으니,
到此踟躕不忍 (도차지주부인) 여기 오면 머뭇거리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465) 학사(學士)의 집터는 흥왕동(興旺洞)에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김종후(金鍾厚)가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인물

  • 홍익한(1586∼1637)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이정구(李廷龜)의 문인다. 162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35년 장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른바 ʻ삼학사ʼ의 한 사람이다. 강화의 충렬사,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花浦集)≫이 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

  • 화포 홍익한의 집터는 흥왕리 큰말 서북쪽 골말(고른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