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하일동(霞逸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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霞峴西南谷谷 (하현서남곡곡)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山中宰相古今 (산중재상고금)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二公宅址三公墓 (이공댁지삼공묘) 두 정승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 있어,
云是江州第一 (운시강주제일) 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라고 부른다네.


○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은 연일 정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 데, 선원면(仙源面) 연동(烟洞) 부분의 주(註)에 보인다. 현종 때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묘는 하일리 (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 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霞谷) 선생이라고 불 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 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霞峴)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가 와서 살고 있다.

○ 영의정을 지낸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 해주 최씨인데 이 집이 진강산 서쪽에 있었다. 집이 매우 허름하여 경상(卿相)의 집 같지가 않았으며 거실에 편액하기를 수운헌(睡雲軒)이라고 하였다. 9언4구의 시가 전해진다.

雲在峀 捲復舒 舒復捲 (운재수 권복서 서복권)     구름이 산에 있을 때에는 말렸다가 펴지고 펴졌다가 다시 말리고, 
人在欄 睡復醒 醒復睡 (인재란 수복성 성복수) 사람이 난간에 있을 때에는 잠자다가 깨고 깼다가 다시 잠드네.
捲則睡 人在峀 雲在欄 (권즉수 인재수 운재란) 말리면 잠드는 것은 사람이 산에 있고 구름이 난간에 있을 때이고,
舒則醒 人在欄 雲在峀 (서즉성 인재란 운재수) 펴지면 깨는 것은 사람이 난간에 있고 구름이 산에 있을 때라네.


당시 심은 자단(紫檀)나무와 측백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

○ 안동권씨 권개(權愷)는 강정(康定)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관직은 호조좌랑을 지냈고, 묘는 하곡에 있다.


인물

  •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 정제두(1649∼1736)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 정원하(1855년 출생)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성조(聖肇). 아버지는 연안도호부사 기석(箕錫)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이다.
  • 최규서(1650~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

임하였다.

  • 권적(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며, 율(慄)의

아버지이다.



참고

  • 상도면(上道面) : 원본에는 ʻ상도면ʼ이 빠져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상도면은 오늘의 양도면에 편입되었다.
  • 二公宅址 : 정제두와 최규서의 집터를 말한다.
  • 三公墓 : 정유성, 정제두, 권개의 무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