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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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 행세를 하여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면서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승하하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민생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천주교도 박해를 비롯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집함으로써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초래하는 등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으로 은퇴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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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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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A은 B와 관련이 있다. 남연군의 묘(南延君―墓), 남연군묘 도굴 사건

기여

출처

  1.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