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의 전통 머리모양(가계를 중심으로)과 장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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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겟대상 : 영화, 드라마등 각종 미디어매체의 미술감독, 다큐멘터리 감독을 비롯해 캐릭터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헤어디자이너등 전통머리의 컨텐츠를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의 직업군
*타겟 메시지 : 전통머리는 K-뷰티의 원형으로써 한복과 더불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응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문헌이나 유물, 회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가계를 시대별, 유형별로 정리해 봄으로써 우리나라 여성의 머리모양이 어떤식으로 변화해왔는지
               보여주고,전통머리와 관련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머리모양의 원형을 재해석하는 사례들을 소개해
               복식연구에 비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두식(頭飾) 연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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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전통 머리모양(가계를 중심으로)

가계(加髻)의 정의 [1]

가계(加髻)는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 중 개인의 두발에 다른 소재를 부가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한 전통 머리모양을 칭하는 용어이다.
가계는 매우 다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별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또한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맨머리를 드러내지 않고 반드시 관모를 착용하였던 남성의 차림새와 같이 여성의 중요한 머리 차림새였다.
가계는 여성의 미적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관모와 같은 사회적 약속을 지켜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가계(加髻)의 분류[2]

  • 가계(假髻)

가계(假髻)는 시대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렸고, 재료도 사람의 두발, 흑사, 지질, 목재, 직물 등으로 다양했다.
가계의 형태와 기능의 차이는 한국복식사에서 연구자에 따라 가계를 관모로 간주하거나 쓰개류나 수식(修飾)류 혹은 단순히 가체로 분류하는 등 다양한 이론이 제기됐다.

  • 체계(髢髻)

체계(髢髻)는 체를 더해 꾸민 전통 머리모양이다.
이때의 체(髢)는 월자(月子), 다리, 다래, 달비라고도 불렸으며[4] ,주로 머리숱이 적은 여자들이 두발에 덧드려 맸던 것으로 가계의 가장 중요한 소재이다.
그런데 체(髢)를 이용한 가계(加髻)의 하나인 '체계(髢髻)'와 소재로서의 '체(髢)'를 뜻하는 유사용어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많은 고문헌에서 '체계'라는 용어가 '체'를 뜻하는 유사용어인 수체(首髢),체자(髢子),가발(假髮),가체(加髢) 등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자면, '체'는 가계의 소재를 의미하고, '체계'는 '체'로 만들어진 가계를 의미한다.[5]


상위개념
가계(加髻)
다른 소재를 더한 모든 두발양식
하위개념 하위개념
가계(假髻) 체계(髢髻)
다양한 소재를 덧붙여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양식 체로 이루어진 양식

한국 가계(加髻)의 기능

시대에 따라 가계에 부여되는 의미와 요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가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재와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또한 가계에 어떤 역할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가계의 기능이 달라지기도 했다.[7]

  • 의례적 기능
옛날은 오직 훌륭한 옷차림을 할 때만 이 가발을 사용하게 되었는데,〈이는 바로 왕후로서 왕을 따라 종묘(宗廟)에 제사 지낼 때라는 것이다.〉
이런 일 외에는 왕후로부터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풍속에서 늘 쓰는 것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남의 머리칼을 취하지 않고 자기의 머리만 갖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익,『성호사설』, 권6, 「만물문」 , 발개(髮䯰)

위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가계를 처음 사용하게 되었을 때는 의례적 기능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내외명부들이 착용하였던 거두미(떠구지머리, 큰머리, 머리틀)와 어유미(어여머리, 어여미, 어염머리, 어임머리)를
민가의 혼례시에 사용할 수 있게 한 것 역시, 가계가 의례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을 나타낸다.[8]

  • 사회적기능

가계의 사회적 기능이란 가계가 혼인여부 표식, 신분구별 또는 계층의 표현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어유미는 궁중이나 양반집 부녀자들만 할 수 있는 예장용 머리로, 서민에게는-혼례 시 예외-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가계는 부(富)를 상징하는 기능도 했다. 특히 가체는 그것을 소비할 만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 소비되던 사치품이었다.
따라서 주로 상류층에서 소비되었고, 조선시대 가체 사용 또한 왕실에서 비롯되었다.

  • 미적 기능

여성의 가계는 복식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복식의 아름다움을 보충하거나 더욱 강조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한국 복식은 ‘예의관(禮義觀)’을 통해 형성된 면이 있기 때문에 격식미, 단정미, 정적미라는 특징을 지닌다.[9]
이러한 복식의 특징들은 신분의 계층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하지만 가계는 다른 복식요소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미적 감각을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의례적으로 격식을 차리는 것과 사회계층의 구분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계는 타인을 모방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계층간의 이동이 존재했다.[10]

옛사람이 다리를 높였다는 기롱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궁중에서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곧 국인(國人)들이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영조33년(1757년) 12월 16일(갑술) 첫 번째 기사

위의 기사처럼 민가의 가계양식이 궁중에 퍼지기도 했으며, 궁중의 가계양식이 민가에서 유행하기도 하고 기녀의 가계양식이 일반 부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처럼, 복식사에서 가계는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신분의 계층을 뛰어넘어 미적 측면에서의 모방과 모종의 동조심리가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가계의 변천배경

외적요인 : 복식문화 교류

  • 청사관복
  • 체(髢)의 조공

내적요인

흥덕왕 복식금제(신라 하대)
<여성 가계에 관한 흥덕왕 복식금제>[11]
품계 규정 내용
진골 빗(梳)에는 슬슬전(瑟瑟鈿)[12]과 대모(玳瑁)[13]를 금한다.

비녀(釵)에는 무늬를 새기거나(刻鏤) 구슬 다는 것(綴珠)을 금한다.

6두품 빗(梳)에는 슬슬전(瑟瑟鈿)을 금한다.

비녀(釵)는 순금(純金)에 은(銀)으로서 새기는 것과 구슬로 꿰는 것을 금한다.

5두품 빗(梳)은 소대모(素玳瑁)[14]이하를 사용한다.

비녀(釵)는 백은(白銀) 이하를 사용한다.

4두품 빗(梳)은 소아(素牙), 뿔(角), 나무(木)를 사용한다.

비녀(釵)는 아로새긴 것과 구슬 꿴 것 및 순금(純金)을 금한다.

평민 빗(梳)은 소아(素牙)와 뿔 이하를 사용한다.

비녀(釵)는 유석(鍮石)[15]이하를 사용한다.

가체 금지령(조선시대)
  • 영조: 가체금지령 반포
<가체금지령 전개과정>
시기 시기 시기 논의내용
32(1756) 1 16(갑신) 사족의 부녀자들의 가체를 금하고 속칭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할 것.
33(1757) 11 1(기축) 나라의 법제로 정한 뒤에 금할 수 있다.(홍봉한)족두리 또는 화관 또한 꾸미는 정도에 따라 폐단이 될 수도 있다.(윤득양)
33(1757) 12 16(갑술) 중앙과 지방의 부녀자들은 다리 대신 쪽을 만들어 궁중 양식을 착용하고,상천인은 다리를 그대로 사용할 것.
34(1758) 1 13(경자) 체계를 금하고 족두리를 쓸 것.
38(1762) 7 12(임신) 사헌부에서 민가의 다리를 금하도록 청하다.
39(1763) 11 9(임술) 체계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고 명하다.

위의 표는 영조대에 반포된 가체금지령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사를 기반으로 하여 정리한 것이다.
영조 32년(1756), 가체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몽고의 제도" 이며, "사치가 심하다" 라는 이유로 족두리로 대체된다.
하지만, 족두리 또한 몽고의 제도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고, 꾸미기에 따라 가체와 같이 사치를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조대에 반포된 가체금지령은 '가체를 금한다' 라는 명령만 있을 뿐,법령을 어길 시,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금지령은 실효성이 없었다.

  • 정조: 『加髢申禁事目(가체신금사목)』제정

가체신금사목

시대별 분류

상고시대

우리나라 가계에 관한 최초의 문헌상 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쓰인 “단군원년(B.C.2333)에 머리를 땋고 개수(모자를 쓰다)하는 법을 가르쳤다” 는 기록이다.[16]
당시의 정확한 머리모양새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은 상고시대 가계의 일례를 보여준다.

삼한(三韓)의 부인들은 머리를 또아리 틀어서 장식하며, 나이 어린 여자들은 꼬아서 뒤로 늘어뜨린다. 그러나 모두 아계(鴉髻)를 만들며, 나머지는 아래로 드리운다.
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0, 「예지(禮志)」3, 의물(儀物), 장복(章服)

여기서 아(鴉)는 까마귀와 검은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계(鴉髻)는 까마귀가 날개를 펼쳐 날고자 하는 형상을 나타내는 두발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를 통일하기 위해 친당정책을 쓰면서부터 중국풍의 머리모양과 복식이 들어와, 상류계급은 당제도를, 하류계급은 국제(國制)를 답습하는 복합구조를 보이게 된다.

  • 환계형(環髻形)


  • 쓰개형


  • 고계형(高髻形)

감신총합수부인상

  • 다계형(多髻形)

덕흥리벽화시녀상

  • 얹은머리형

삼실총벽화

  • 기타

주채로 장식한 머리

고려시대

고려시대 가계는 신라시대의 가계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당, 송, 원의 문화를 다각적으로 흡수하여 받아들였다.
고려시대의 가계는 크게 원간섭기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원간섭기 이전

고려 건국 초기에는 사회전반의 모든 분야에서 삼국시대의 제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즉, 고려초기의 가계는 삼국의 고유한 양식에 <청사관복>과 <흥덕왕 복식금제>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삼국시대 가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시대 복식에 대해 현존하는 문헌자료와 유물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하기 어렵다.

  • 환계형(環髻形)

고려시대 환계형 가계는 불교의 성행으로 인해 매우 발달한 불화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불화의 대부분이 14C 이후 고려말기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고려초기의 가계를 살피는데 어려움이 있다.
고려초기의 가계를 단편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고려 숙종3년(1098)에 제작된 불화의 일종인 목판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이다.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80권 중 75권에 그려진 왕비는 환계형의 가계를 착용하고 있는데, 환계가 나비의 형태를 하고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환계형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왕비.jpg

  • 다계형(多髻形)

고려시대 다계형 가계는 <후동국이상국집> 과 <동문선> 등에서 “계아(髻丫)”나 “관(丱)”,“쌍각기아록계아”(雙角岐丫綠髻峨)라는 명칭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다계형 가계는 문헌의 내용상 삼국시대와 달리 어린아이나 특수계층의 가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체를 비롯한 다른 소재가 더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간섭기 이후

원간섭기 이후의 고려시대 가계양식은 불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고계형(高髻形)


  • 다계형(多髻形)

박익 묘 벽화 인물도.png

  • 기타

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도 추마계.png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가계의 규모가 확대되고 장식이 과다해졌다는 점과 <가체금지령>이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가계의 최고 성행기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체’를 이용하여 확대된 가계는 확대와 과장이라는 표현방법으로 당대의 미적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계유형은 가체의 유행이 절정에 달했던 <가체금지령>시행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가체금지령 이전
  • 쓰개형

대수머리는 조선시대 왕비가 큰 잔치 때 대례복에 하던, 매우 화려하고 웅장한 가체머리이다.
대수는 체를 이용하여 긴머리를 어깨까지 말아 올린 후 양 끝에 봉잠을 꽂으며, 뒷머리 가운데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자주색 댕기를 늘이고,
머리의 앞부분에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자주색 댕기를 늘이고, 머리의 앞부분에 떨잠과 봉잠으로 장식한 양식이다.유물로 조선말기 영왕비의 대수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궁중에서는 새채방(아리고 阿里)이란 곳에서 일생동안 대수머리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상궁이 있어, 공출되어온 다리를 가지고 머리같이 땋아서 밀초로 붙였다고 한다.

영왕비 대수머리.jpg

  • 고계형(高髻形)

조선시대의 고계형 가계는 고려시대의 양식이 잔존하면서 조선 초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물자료에서 쉽게 살필 수 없으며,조선초기 이후에는 착용이 줄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다계형(多髻形)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아계’ 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아계는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계가 두 개인’ 다계형의 일종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가계양식을 이루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관을 착용할 때에 관을 머리에 고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즉, 궁중에서 관모 착용을 비롯하여 화관과 같은 가계를 고정하기 위해 아계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얹은머리형

얹은머리형은 앞서 말했듯이, 체를 땋거나 땋지 않은 상태로 두상에 얹고 양쪽으로 여발을 늘어뜨린 형태의 가계이다.
신말주(조선전기 문신)의 계회도와 진재해(조선후기 화가)의 숙종어제잠직도에서 가체금지령 이전의 얹은머리형 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가체금지령 이후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가계에 체를 이용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어 당시 부녀자들 사이에서 매우 성행하였다.
하지만 체계의 크기가 갈수록 과장됨에 따라 각종 폐단을 야기하게 되었고,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시행된 가체금지령은 조선시대 가계에 영향을 미쳤다.

  • 환계형(環髻形)

조선시대 환계형 가계로는 거두미(큰머리, 떠구지머리라고도 함)가 있다. 거두미는 정조대에 제정된 <가체신금절목>에서 명부의 가계로 기록되어 있다.
쪽진머리의 앞가르마에 첩지를 놓고 그 위에 어염족두리를 올리고, 체를 일곱꼭지로 땋아 올리고, 양끝을 둥글게 구부려 만든 환계를 덧붙인 형태이다.
거두미는 <가체금지령> 이후 형태적 변화를 보이진 않았지만, 소재에 변화가 있었다.조선 중기 조선 중기 이전에는 두발로 만들어졌으나, 후기에는 목재로 대체되었다.
거두미의 환계가 목재로 대체되면서 체의 사용량이 줄게 되었고, 무게가 매우 가벼워졌다.

거두미(떠구지머리).jpg

  • 쓰개형

쓰개형 가계는 궁중에서 의례시 비와 빈이 착용하였던 대수와 어유미, 화관, 족두리, 차액 등이 있다.

  • 다계형(多髻形)

1)사양계
사양계는 생머리라고도 하는데, 주로 궁중 아기나인 중 지밀이나 침방, 수방궁녀의 머리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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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낭자쌍계
낭자쌍계는 형태에 있어서는 사양계와 같지만, 궁중에서는 댕기로 고정하였고, 반가의 부녀자나 일반 서민들은 비녀를 꽂아 고정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조선후기에 가계가 한참 성행하였을 때에는 체를 더해서 착용되기도 했다.

선조조기영회도 관기 낭자쌍계.jpg

  • 얹은머리형

조선시대 얹은머리형에는 얹은머리, 첩지머리, 조짐머리, 후계가 있다. 특히 조선후기는 체에 의한 얹은머리가 매우 발달하였는데,
반가의 부녀자를 비롯해 일반 부녀자 그리고 기녀에 이르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매우 성행하였다.

1)얹은머리
얹은머리는 신분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크기와 장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을 뿐, 가체 금지령 이후에도 성행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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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첩지머리
첩지머리는 첩지를 가르마 가운데에 두고 두발을 양쪽으로 땋아서 뒤에 함께 묶어 쪽을 지은 형태이다.
첩지는 장식과 형태, 재료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고, 예장할 때 쓰던 화간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왕후는 용첩지, 왕비와 세자빈은 광금 황첩지, 상궁은 은제 개구리 첩지, 정경부인은 광금 개구리 첩지, 정부인은 후미만을 광금한 개구리첩지, 상궁은 흑색 개구리첩지를 달아 신분의 상하를 표시했다.

첩지머리.jpg

3)조짐머리
조짐머리는 종친이나 외명부가 궁중에 출입할 때 하던 전통 머리모양이며, 가장 약식의 머리모양이다.또한,머리카락에 체를 더해서 땋아 비튼 후 소라껍질 같은 형태로 붙이는 머리이다.
정조 시대 <가체신금사목> 이후에 얹은머리 대신 쪽진머리 모양새를 하게 함으로써 쪽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짐머리.jpg

4)후계
후계는 쪽머리, 낭자머리라고도 하며, <가체금지령>이후 얹은머리를 대신하여 순조시대때 정착되었다.
아래의 작자미상의 미인도와 같이 후계는 가체를 드려 땋은 머리를 뒤통수 아래로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시킨 형태이다.
이 후계의 위치는 점점 내려와서 조선말기에는 저고리 위에 있게 되었고, 개화기때 다시 뒤통수쪽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이 머리형태는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왕비까지도 평상시에 착용하였고, 소례복차림의 의식에는 후계에 화관을 착장했다고 한다.

작자미상 미인도 후계.jpg

유형별 분류

형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가계를 가장 대표적인 유형들로 분류하자면 환계형, 쓰개형, 고계형, 다계형, 얹은머리형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가계를 유형별로 분류하는데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아래의 분류는 호남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교수인 임린의 견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 환계형(環髻形)

철사나 기타 소재를 이용하여 두상의 양쪽으로 고리 모양을 만들고 체(髢)를 더한 형태. 궁중을 비롯한 상류 계층에서 착용. 환계는 목재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음.

  • 쓰개형

관모와 같이 일정한 양식을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탈부착이 비교적 자유로움. 수식(修飾)적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관모와 구별.
체(髢)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을 머리에 쓰는 것을 말함.

  • 고계형(高髻形)

땋지 않은 체를 이용해 높게 올리는 형태. 주로 정수리 부분에 머리카락을 모아 높게 함.

  • 다계형(多髻形)

두발에 체를 더해 두 개나 세 개의 계를 만든 형태.

  • 얹은머리형

체를 더한 두발을 머리에 얹어 고정하는 양식.

형태의 변천과정과 특성[20]

  • 환계형 : 삼국시대엔 주로 두상 위에 누운 타원형태였고, 고려시대에는 나비형태였음. 조선시대에 와서는 목재로 대체됨.
  • 쓰개형 : 삼국시대엔 주로 건귁을 착용하는 형태로 대표됨. 고려시대에는 기록을 통해 화관과 족두리의 원형으로 알려진 고고(姑姑)의 착용을 확인할 수 있음.

조선시대에는 대수, 족두리, 어유미, 차액 등 다양한 형태의 쓰개형 가계가 나타남.

  • 고계형 : 삼국시대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 착용되었던 양식임. 조선초기 이후로는 퇴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조선시대 이전까지 매우 성행하였던 불교와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고계형 가계는 불상의 머리모양과 유사성을 보임.

  • 다계형 :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착용하였던 가계. 상고시대에는 아계(鴉髻)의 기록으로 착용을 확인할 수 있고, 삼국시대에는 <청사관복>에 의한 당(唐)의 가계가

한국의 다계형 가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음. 하지만 한국 다계형 가계는 2~3개의 계(髻)가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형태를 이루는 반면에
중국 다계형 가계는 하나로 묶어진 계 위에서 여러 개의 계로 분화된다는 차이점이 있음. 고려시대 이후에는 어린아이를 비롯한 기녀, 무녀와 같은 특수계층의
착용양상이 두드러졌고, 조선시대에는 사양계나 낭자쌍계등 미혼녀의 두발양식에서 살펴볼 수 있음.


<당대의 가계>[21]

  • 얹은머리형 : 얹은머리형 가계는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착용되어 왔음. 삼국시대에는 주로 땋지 않은 체를 올리고 옆으로 늘어뜨린 형태로 착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땋은 체와 땋지 않은 체를 올린 형태가 공존하였음. 조선시대에 와서는 땋은 체에 의한 얹은머리의 형태가 정착되어 매우 성행하였고,
<가체금지령> 이후로는 첩지머리와 조짐머리를 비롯한 후계로 간소화 되는 특징을 보임.

착장

  • 화관
  • 족두리
  • 어염족두리

조선시대 왕비나 상궁이 큰머리나 어여머리로 예장할 때 첩지를 한 위에 쓰던 족두리로, 솜족두리라고도 함.
어염족두리.jpg

  • 민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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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립
  • 건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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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건을쓴여인.jpg

  • 머리수건
  • 남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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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바위
  • 풍차
  • 아얌
  • 가리마(차액)

장식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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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잠
첩지
뒤꽂이
귀이개
비녀

봉잠,매죽잠,용잠 국화문잠 용잠

댕기
  • 말뚝댕기
  • 고이댕기

고이댕기.jpg

  • 도투락 댕기
  • 앞댕기
빗치개
떠구지

통일신라_장식빗

전통머리(가계)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

  • 가체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

19세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에 보면 ‘월자장(月子匠)’, ‘모태장이’ 라는 화제(畵題)가 보인다.
두 그림 모두 다리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평민계층 중에서도 다리를 만드는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그림의 제목처럼 장인의 명칭이 다른 이유는 민간의 장인들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직업의 이름보다는 하는 일을 보고 편의상으로 불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 가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체발 10단을 다시 물들이고 묶는 데 소요되는 물품
당주홍 1냥. 홍합사 1냥. 황밀(黃蜜)3냥. 송진[松脂]2냥. 주사(朱砂) 1냥. 마사(麻絲) 5냥. 홍향사 5돈, 소금 1말. 질통[擔桶] 1좌.
참깻묵[眞荏糠] 10말. 숯 5말. 참기름[眞油] 4되. 나무빗[木梳] 10개. 초성(草省) 10개. 단풍나무[楓木] 반 동(同).녹반(碌磻)5되.
땔나무 30단. 후유지(厚油紙) 3장. 파유둔(破油芚) 5번.큰 목표자[木大瓢子] 2개. 과표자(果瓢子)2개. 수건용 베[布] 6자. 중치 가마솥 3좌.
물동이[水瓮] 2좌.목파조(木把槽)2좌. 행주용 베, 치마[赤亇] 2건. 빈 섬 5닢. 궤(樻) 1부, 자물통을 갖춤.
『가례도감의궤 영조정순왕후(嘉禮都監儀軌英祖貞純王后)』 ,일방 의궤(一房儀軌) ,품목질 (稟目秩), 기묘(1759, 영조35) 5월 일
  • 가체, 사치의 폐단이 되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웅황판(雄黃版)ㆍ법랑잠(法琅簪)ㆍ진주수(眞珠繻)로 꾸며
서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그 가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으므로 부녀들은 더욱 사치스럽게하여 행여 더 크게 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이덕무,『청장관전서』,「청장관전서,제30권,사소절 6(士小節六),복식(服食)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다리는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니 오늘에 미쳐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날 막대한 폐단 중에 다리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유생의 집이라 하더라도 60, 70냥의 돈이 아니면 살 수가 없고,
만약 모양을 갖추고자 하면 수백냥의 돈을 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전지와 집을 팔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아들을 둔 자가 며느리를 보아도
다리를 마련하지 못하여 시집온 지 6, 7년이 넘도록 시부모 뵙는 예를 행하지 못하여 인륜을 폐하는 데 이른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정조12년 무신(1788) 10월3일 세 번째 기사
  • 가체단속을 빙자해 돈을 뜯어낸 사기꾼, 이기성
 형조가 아뢰기를,
죄인 이기성(李基成)에게 추문하니,‘저는 본래 빈한한 사람으로 빚 독촉을 받아 마음이 몹시 궁박하였는데, 마침 저의 7촌 숙부 이언로(李彦潞)의 처가
본발(本髮)로 가체(加髢)한 것을 가서 보고는 갑자기 공갈하여 돈을 뜯어낼 마음이 생겼습니다....(중략)...제가 당시 이언로의 처부(妻父) 송환규(宋煥奎)를 보고,
「만일 4, 5십 냥이 있으면 별탈없이 무마할 수 있다.」 하니, 송환규가 먼저 20냥을 주었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범한 바가 없습니다.'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아침에 본조의 초기를 보고 매우 놀라서 이렇게 구초(口招)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원범(元犯) 이기성의 죄는, 용서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고 할 만하다.
그는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평민으로서 가체(加髢)를 적간(摘奸)한다고 거짓으로 핑계 대고, ...(중략)...
이 일로 미루어 보면, 또 이기성과 같은 무리가 백성들을 속여 빼앗고 미혹시키는 일이 없으리라고 어찌 단언하겠는가..(중략)...
이후로 다시 가체를 금지하는 것을 빙자하여 일을 꾸며대는 자에 대해서는, 포청(捕廳)에 엄히 신칙하여 남자이건 여자이건 따질 것 없이 듣는 대로 잡아와
곧바로 도적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한 다음 법사(法司)에 이송(移送)하여 법률에 비추어 통렬히 다스리도록 하라.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정조 13년 기유(1789) 1월 30일 일곱 번째 기사
  • 꿩 대신 닭, 조정과 여성들의 눈치게임

(1) 가체가 안 된다면 족두리로!
(2) 쪽진 머리를 더 높게! -새로운 유행의 시작(feat. 정조의 절레절레)

 가체(加髢)를 금한 것은 또한 요즘에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 엄하게 법조문을 세워
정해진 규격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반드시 행해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규중에 있는 부녀자의 뒷머리가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아내서 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굳이 계속해서 거듭 금할 것 없이 지금 여기 연석에 오른 신하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정해진 제도를 어기지 않게 다스리고 신칙한다면
사서인들도 반드시 서로 본받게 될 것이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정조 18년 갑인(1794) 10월 5일 첫 번째 기사


전통머리를 재해석한 사례

만화 '궁', 박소희 작

만화 '하백의 신부', 윤미경 작

디자인하우스 [LUXURY 2010년 2월호]

[24]디자인하우스에서 발행한 잡지인 LUXURY에 헤어 아티스트들이 한국 전통머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아티스들은 가체를 활용하거나, 얹은머리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첨가하기도 하고 화관을 형상화한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다.

2014 ICD(INTERCOIFFURE MONDIAL) PARIS HAIR SHOW

ICD(Intercoiffure Monidal)는 1925년 스위스, 독일, 영국의 미용 대표가 독일 함부르크에 모여 이상, 인내, 인간성, 우정, 국제성을 이념으로 만든 세계적인 헤어 패션 네트워크로
연 1회 프랑스 파리에서 월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ICD에 가입한 각 나라에서 헤어 패션 업계를 선도하는 살롱 수는 3,000여곳, 참여 국가는 55개국에 달한다.
ICD KOREA는 2013년 이철(이철헤어커커) 초대 회장에 이어 2015년 고정현(고헤어)회장, 2019년 윤상미(모노헤어) 회장이 4대 회장을 맡고 있다.

  • 오프닝 영상

지난 2014년에는 한국팀이 아시아를 대표로 참가해‘KOREAN WAVE’ 라는 테마로 쇼를 선보였다.


헤어쇼 오트쿠튀르 샹그릴라 파리, 소빈우 디렉터

2019년 3월2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헤어쇼 ‘오트쿠튀르 샹그릴라 파리’ 현장에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은 헤어 디자인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미’를 주제로 하여 프랑스를 사로잡은 주인공은 프랑스의 럭셔리 헤어 살롱 알렉산드르 드 파리 한국 지점 대표이자 아트 디렉터인 소빈우(소정섭)다.
미셀데르방 그룹과 로레알 파리의 주최로 펼쳐진‘오트쿠튀르 샹그릴라 파리’에는 아시아에선 한국이 유일하게 참여했으며,
해외에서 한국의 헤어 디자인으로 헤어쇼가 진행된 사례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소빈우 디렉터의 무대가 선구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28]


출처

  1.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민속원,2009년), 27쪽
  2. 위의 책, 28쪽
  3.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27&content_id=cp041300270001&search_left_menu=2
  4. 배정룡,『조선조 중·후기 부녀두발의 양식고』,「아시아여성연구」,1982
  5.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민속원,2009년), 34-35쪽
  6.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25&content_id=cp041300250001&search_left_menu=2
  7.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민속원,2009년), 36쪽
  8. 위의 책,38쪽
  9. 김영자, 「한국복식미의 연구 - 예의관과 표현미를 중심으로-」, 『복식』16(한국복식학회,1991)
  10.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민속원,2009년), 41-43쪽
  11. 『삼국사기(三國史記)』, 제33권, 「잡지(雜志)」2, 색복(色服)
  12. 슬슬(瑟瑟)은 에메랄드를 뜻하고,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 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이기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상) : 사치향락에 빠진 9세기 신라」, 경향신문, 2013년 5월 26일)
  13. 바다거북과에 딸린 거북의 하나. 등딱지를 대모(玳瑁)또는 대모갑(玳瑁甲)이라고 하며 공예품·장식품등에 쓰임. (네이버 한자사전)
  14. 조각을 하여 꾸미지 아니한 대모.(네이버 한자사전)
  15. 놋쇠를 일컬음.
  16. 문화컨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02&content_id=cp041300020001&search_left_menu=2
  17.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05&content_id=cp041300050001&search_left_menu=2
  18.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55&content_id=cp041300550001&search_left_menu=3
  19.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5&cp_code=cp0413&index_id=cp04130030&content_id=cp041300300001&search_left_menu=2
  20.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민속원,2009년)
  21. 이순자, 「당대와 송대의 여자장식에 관한 고찰」, 『복식』, 35(1997.11) 1 : 67-89
  22. 김주영,『조선시대 여인의 신분별 머리모양 변천에 관한 연구』,남부대학교산업정책대학원,2007
  23. 김주영,『조선시대 여인의 신분별 머리모양 변천에 관한 연구』,남부대학교산업정책대학원,2007
  24. http://luxury.designhouse.co.kr/in_magazine/sub.html?at=view&info_id=50975
  25. https://blog.naver.com/fb_woman/221534259568
  26. https://blog.naver.com/fb_woman/221534259568
  27. https://blog.naver.com/fb_woman/221534259568
  28. [우먼센스 뷰티] 파리지앵을 사로잡은 한국인 헤어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드 파리 소빈우 디렉터|작성자 우먼센스 https://blog.naver.com/fb_woman/221534259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