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도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Project Home

역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제주도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1목 2현제가 정립된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년(1274)에 1만 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호, 인구가 6만 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특히 牛馬賊)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한편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출륙한 제주도민, 즉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에 정착하여 사는 제주도민을 두무악(頭無岳)이라 하였다. 이른바 두무악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제주도의 공물과 부역이 증대되고 관부의 수탈이 격심해지면서 발생하였다. 산물의 부족으로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도민들이 과중한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상 전라 연해지역으로 출륙하여 정착한 두무악들은 언어와 습속 등 생활양식의 차이로 그곳 주민들로부터 기피되었고, 또 정부로부터도 치안상 우려되어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이리하여 두무악들은 전복을 따는 일과 같은 진상용 해산물을 채취하여 납부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육지인과는 격리된 가운데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이들 두무악들은 수시로 원주지인 제주도로 추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육지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여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군역을 지면서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제주도는 조선왕조 약 500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유형지로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죄인을 먼 곳에 격리시킨다는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조 약 500년을 통하여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유배인들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다. 그 신분도 위로는 광해군과 같은 폐왕이나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승려와 환관ㆍ도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었다.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의 3남 이건(李健)도 인조 때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풍토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라고.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 주는 글귀다. 유형은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신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정세 변화에 따라 방면되거나 사면된 뒤 재환의 길이 열려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사사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사면 후 아주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주도청 홈페이지]


1. 조선의 건국과 행정 제도의 개편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운뒤에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 정책은 제주도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성주 고 봉례와 왕자 문충세는 태종 2년인 1402년 10월에 새 왕조에 입조하여 비록 이름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때까지 써온 나라 이름과 성주와 왕자의 작호를 스스로 내놓았는데 조선 왕조는 이를 거두어 들이고 이때부터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주와 왕자의 직책을 세습하던 제도도 폐지하였다. 그 대신에 성주에게는 좌도지관의 벼슬을, 왕자에게는 우도지관의 벼슬을 내려 얼마쯤 명예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세종 27년인 1445년에 이르러서는 ?진무?와 ?부진무?로 바꾸어 부르고 그 뒤에 다시 부진무의 벼슬을 ?유향?으로 고쳤다. 태종 16년인 1416년에 안무사 오 식이 올린 장계에 따라 한라산 남쪽 지역을 東과 西로 나누어 동쪽에 ?정의현?을, 서쪽에 ?대정현?을 두었다. 이미 제주목이 한라산 북쪽에 있었으니 이로써 이른바 삼읍 제도가 처음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제도는 광무 10년인 1906년까지 계속되어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에 제주도의 고을을 나눈 행정 단위가 되었다.

제주도는 특히 태종 시대와 세종시대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새로운 질서와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앞에서 말했듯이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와 왕자의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구역을 삼읍제도로 개편한 것말고도, 첫째로 고려 충렬왕 3년인 1277년에 원나라가 설치했던 동서아막을 철폐하였으며, 둘째로 마필의 등급을 매겨 공부제도를 확립하고, 세째로 관리들이 마음대로 전세 곧 농지세를 거두는 일이 없도록 한 수조법을 제정하였으며, 네째로 향교와 교수관을 두어 교육제도를 마련하였으며, 다섯째로 홍화각같은 문화시설을 세웠으며, 여섯째로 감귤나무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일곱째로 방호소, 봉화둑, 수어소 같은 것을 설치하여 방위 시설을 강화하였으며, 여덟째로 김 위민이 지적한 공사적폐 십개조를 받아들여 오랫동안 백성의 원망을 사 온 공사 적폐를 쇄신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에는 동서방리 를 설치하고 지방 관리인 약정을 두었다. 그러니까 제주 본주 곧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에 중면과 좌면과 우면을, 정의현에 좌면과 중면과 우면을, 대정현에 우면과 좌면을 두고, 그 뒤에 제주본주에 신좌면과 신우면을, 정의현에 동중면과 서중면을, 대정현에 중면을 더했으며 면에는 존위, 경민장, 동장, 기실장 같은 관리를 두어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2. 왜구의 침입

제주도는 일본에 가까이 있으므로 고려 중엽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선 왕조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더 심하였다. 명종 7년인 1552년 5월에 정의현 천미포 듣 지금의 남제주군 표선면 천미천 앞바다에 왜선 여덟채가 정박하고 몇십명이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다가 관군과 충돌하였다. 배에 남아있던 왜구 몇백명도 모두 상륙하여 완강하게 대항하므로 조정에 급히 원병을 청해다가 겨우 격퇴하였는데, 왜구들은 고깃배를 빼앗아 도망쳤으나 미처 내빼지 못한 서른명쯤은 산 속에 숨어 끝까지 항거하다가 마침내 소탕되었다. 그로부터 세해가 지난 명종 10년인 1555년 6월 21일에는 왜선 예순채가 화북포 곧 지금의 제주시 동쪽 2 킬로미터쯤에 있던 포구의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천명쯤이 상륙하여 제주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이때에 목사 김 수문과 판관이 선원은 전에 왜구가 천미포에 침범한 것을 잊지않고 평소부터 잘 대비해 두었으므로 군사와 주민들을 격려하여 철통같이 성을 지켜 적 한명도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에 제주에 침입한 왜구는 잘 훈련된 사나운 무사들이었지만 관군과 백성이 굳게 뭉쳐 잘 싸웠으므로 그들이 사흘 동안 줄기차게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병력을 거두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목사 김 수문은 날랜 용사 일흔명을 골라 특공대를 편성하고 퇴각하는 적을 역습하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또 적선 다섯채를 빼앗는 큰 전과를 올렸다.


3. 조선 시대의 출륙 금지령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에 걸친 제주도의 인구 동태를 보면 초기에 해당하는 세종 때에는 2,569호에 18,89명이던 것이 현종 13년인 1672년에는 8,490호에 29,578명으로 늘어났고,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6,700호에 39,762명으로 인구는 늘어났지만 가구 수효는 오히려 줄어들었으며, 순조 16년인 1816년에는 10,305호에 61,795명으로, 현종 2년인 1836년에는 15,760호에 75,120명으로 늘어났는데, 철종 1년인 1859년에는 다시 가구수효는 11,124호로 줄어들었고 인구는 79,910명으로 늘어났으며, 철종 14년인 1863년에는 7,258호에 49,766명으로 가구와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11,887호에 85,778명으로 되었다. 이와같은 과정은, 통계가 맞다고 치면, 출륙금지령 같은 특별한 주민 통제 정책을 폈음에도 아랑곳없이 거주 인구가 매우 들쭉날쭉했던 양상을 보여준다. 제주도민이 뭍으로 나가 살 수 없게 법으로 막은 이 출륙 금지령은 제주도 사람이 그때에 겪었던 고초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리들의 수탈과 왜구의 노략질과 해마다 닥치는 흉년으로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제주도 사람들은 기회가 닿고 틈만 생기면 뭍으로 내빼려고 들었고 또 관리들은 이를 막으려 들었다. 김 상헌의 <<남사록>>에는 ?주민들이 서울에 가서 이 딱한 사정을 전하고자 하나 수령은 제 잘못이 임금에게 알려질까 봐 진상하려 가는 자 말고는 아무도 섬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 육지 사람들은 제주에 오는 것을 마치 죽을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하여 모두 피하고, 섬 사람들은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육지에 나가기를 마치 천당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고 적혀 있어 그때의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뭍을 그리워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제주도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방을 떠돌며 고기를 잡고 해물을 따며 살았는데 그 수효가 점차로 늘어나 몇천명에 이르자 나라에서도 이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들의 무리를 두모악, 도독야지, 두무악 같은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는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종 2년인 1477년에 임금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내린 유시에, 이들을 내쫓으면 놀라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될지도 모르니 잘 달래어 살게 하되 드나듦을 엄중히 하라는 말이 들어있다. 이들은 그 지방에 눌러살면서 그 지방에서 진상해야 하는 해물을 대는 역을 맡기도했고 더러는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역을 주어 한곳에 모아 정식 주민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섬을 빠져나오는 사람의 수효가 많아지자 새로 도망쳐 오는 자들은 ?아 무거운 벌을 주고 조천과 별방을 뺀 모든 항구를 폐쇄하여 불법으로 드나드는 것을 엄하게 막았다. 그래도 이들은 죽기를 마다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갔다.


4. 조선 시대의 물산

역사에 나타난 제주도의 생산품을 살펴보자. 우선 감귤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문헌을 더듬어 보면, 감귤이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재배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 <<탐라지>>, <<읍지>> 그리고 여러 문집에 나타나는 품종만 보아도 감, 유, 금귤, 왜귤, 병귤, 소금귤, 석금귤, 선귤, 소감자, 당귤, 소귤, 청귤, 동정귤, 동자귤, 대귤, 하귤, 소유자 같은 20여가지나 되는 감귤이 생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마는 영조 39년인 1763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 사수나포에서 보내와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시험재배를 한 뒤로 이곳의 중요한 산물에 들게 되었다. 이밖에 콩, 보리, 조, 밭벼, 돌피, 메밀, 무명 같은 것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주식거리인 논벼가 이 고장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쌀을 육지에서 들여와야 했으며, 밀, 감자, 삼, 사과, 배, 포도같은 것도 전혀 생산되지 않거나 생산되어도 그 양은 매우 적었다.

조선시대에 한 농가의 경작면적 평균치는 2정보 2단보로 육지에 견주어 넓은 셈이었으나 워낙 토질이 척박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특이한 풍토이므로 복토법, ?재법 같? 특수한 농경법이 도입되었다.

또 목마장은 열 소장으로 나누었으나 山馬場과 牛場을 따로 두어 열네 소장이 되었으며, 監牧官을 따로 두어 목마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판관으로 하여금 감목관을 겸하게 하였으나, 효종 9년인 1658년에 이르러 목사 이회의 장계에 따라, 그전에 김만일이 말 오백 마리를 나라에 바쳤고, 그 아들 김대길이 이백 마리를 바쳤으므로 그들의 후손으로 하여금 감목관 자리를 세습케 하였다.

제주의 말은 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고려때에도 조정에 헌상하였으며,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명나라가 말을 바치라고 해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貢馬제도를 만들고 해마다 백 마리씩 바치게 하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5백마리씩 바치게 하였다.


5. 貢物과 조세수취

제주도는 현무암과 화산재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다. 비가 내려도 땅속으로 스며들어 해안에 가서야 솟아나오기 때문에 地表水를 보기 어렵다. 따라서 논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밭농사 마져도 힘든 곳이었다. 주작물은 보리.조.메밀.피.콩.밭벼.고구마 등이었는데, 보리밭이고 조밭이고 간에 7-8차를 갈아서 파종하고, 파종후에도 마소를 끌고가 4-5차 두루 밟아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토성이 메말라서 싹이 튼 후에 말라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힘든 농사가 제주도민의 생업의 기반이었다. 대개 바닷가 사람들은 농업 반, 어업 반으로 살아 갔고, 산골의 사람들은 농업 반, 목축 반으로 살아 갔다. 그리고 갓양태와 말총물의 제작도 제주도민의 중요 생업이었다.

제주도가 육지에 來朝한 것은 신라 때였다. 그 이후로 제주도민은 막중한 진상물.공물을 중앙정부에 바쳐 왔다. 제주도민이 중앙에 내는 조세는 쌀도 布도 아닌 바로 특산물이었다. 이 진상.공물은 말을 비롯한 목축물, 미역.전복 등 해산물, 표고.약재 등 임산물, 감귤.동정귤 등 과실이었다. 이 특산물을 조달하고 운반하기 위해 말을 지키는 牧者, 바다에 들어가 전복.미역을 따오는 鮑作, 潛女, 과원을 지키는 과원지기(果園直), 배를 몰아 공물을 바다 건너 육지로 옮기는 船格을 정해 놓았다. 이들에다가 官畓을 경작하는 畓漢을 합쳐서 6苦役이라 불렀다. 이들 고역 담당자 외에도, 그 奴婢貢으로 서울의 각 아문에 보내는 공물을 마련하는 시노비(寺奴婢)가 존재하였다. 1652년의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목에만도 1만 4천여 명의 시노비가 있었다. 주로 시노비공에 의하여 마련하는 공물은 제주목.대정현.정의현 3읍이 각각 책임을 졌고, 그외의 대부분의 공물은 목사가 직접 관장하여 3읍에 배정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고역을 담당했던 특정인의 부담이 제주도 男丁 일반의 부담으로 바뀌어 갔다. 또 1801년 시노비가 혁파됨으로써 그 부담도 일반 남정에게 전가되었다. 처음에는 일반 남정에게서 平役米를 거두어 고역을 진 사람들의 물품 마련을 보조하였다. 그러나 점차 관이 직접 진상물품을 마련하고 뱃사공도 고용하여 쓰게 되었다.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1862년 당시에도 제주도의 평민.천민 남정들은 봄 가을에 3두씩 1년에 6두의 평역미를 내고 있었다. 이처럼 중앙정부에 바치는 진상.공물(그외에 중앙정부에 바치는 다른 조세는 없었다)이 전적으로 人丁에 부과되고 있었다는 점이 제주도 조세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반면에 토지세는 국가에 바치는 정규조세가 아니라 제주도 내의 관아재정에 충당되었고 그 액수도 극히 적었다. 제주도에는 토지대장에 등록된 토지 자체가 매우 적었다. 정조 초년에 만들어진 <<제주읍지>>를 보면, 제주의 경우 밭이 3,991결 92부 9속이었으나 조세가 부과되는 實結數는 24결 69부 8속이고, 논은 305결 83부 9속인데 그 가운데서 조세를 부과하는 民畓은 29부 1속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畓漢을 따로 정해 농사를 짓는 官畓이었다. 대정의 경우도 밭의 실결수는 21결 5부 6속이고 논은 민답.관답을 합쳐 93결 45부 2속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정의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밭의 실결수가 28결 24부 8속, 논은 5결 46부뿐이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정조 17년의 <<제주.대정.정의읍지>>는 토지의 조세가, 제주는 아예 풍작에는 쌀로 쳐서 25석, 평년에는 12석, 흉년에는 1석 3두, 대정은 각각 50석.32석.15석, 정의는 31석.19석.7석으로 고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리 제주도의 땅이 척박하다고는 하지만 겨우 이정도의 땅만이 경작되고 있었을까? <<朝鮮水産誌>> 제주도조에 따르면 1908년 현재 제주도 총면적 약 189,710정보중 삼림지 15,550정보, 無木地 31,100정보, 경지 139,950정보, 기타 약 3,100정보로 경지면적이 73%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생산량은 보리가 28만석, 조 20만석, 메밀 2만 3천석, 피 8천석, 콩 6천석, 밭벼 6천석 등이었다. 17세기에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제주도에 토지가 적은 것은 정말 경작토지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토지를 광점하고 있는 토호들이 토지가 파악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양전을 통해서 그 토지들을 파악하여 조세를 보과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본래 토지에 부과되어야 할 대동세마저 전결이 적다는 이유로 인정에 부과되었다. 바닷가 마을의 남정에게서 참깨 8홉, 산촌의 남정에게는 들깨 한 되, 그리고 모든 남정에게 菜種 한 되를 징수하였다.

大同法은 人丁.戶.土地 등에 잡다하게 부과되던 각종 진상과 지방관아의 잡세의 주요부분을 토지에 대한 부과로 일원화한 것으로서 조선국가의 조세수취 체계의 중요한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16세기 이래로 농민층분해가 격화되면서 농민들의 조세부담 능력에는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의 조세부담 능력이 대강 비슷한 것을 전제로 하면서 신분에 따라 특혜가 주어졌던 남정.호에 대한 조세부과는 점차 빈부의 차이를 반영하는 토지세로 옮아갔다. 군역세나 환곡세, 일반잡세가 토지에 전가됨으로써 토지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제주도는 토지세의 비중이 매우 낮고 男丁.戶에 부과되는 세부담이 높은, 육지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조세수취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같은 제주도의 독특한 조세수취 구조는 1862년 제주도 농민항쟁의 요구조건을 통해서 드러나며 봉기조직에도 반영되었다.

참고문헌

1. 홍순만, 제주도의 역사1. 신화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발견 - 제주도->>, 1987년도판

2. 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농민항쟁연구분과,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출처: http://mahan.wonkwang.ac.kr/source/jea-ju/11.htm


풍요로웠지만 수탈과 유배의 역사로 현대사 못지않은 슬픔과 눈물의 섬 [1]

조선 초 태종 때 탐라국 체제를 폐지하고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세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구역으로 되었다.[1] 하지만 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악명높은 유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 됐다. 왕족들이나 유력 정치인의 단골 코스로 대표적으로 광해군, 소현세자의 아들들, 송시열, 최익현이 있다.

또한 전통시대 공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말이 있었으며 해산물 또한 주요 공물품이 되었다. 귤 같은 작물의 경우 제주도에서 나는 최고의 산물로 평가되어 왕족들을 위한 진상품으로 엄청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귤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마다 기록해서 그 물건들을 다 바치라 했다 하는데 태풍이라도 맞으면 내야될 공물은 그대로인데 수확물은 토막토막난 상태이니... 정작 그래놓고 가는 길에 썩어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하여튼 그 때문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귤나무를 없애려 시도도 했다.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 가능. 봉수는 먼 거리를 감시하는 데에 연대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봉화대 같은 통신시설이었다.

탐관오리들에게 인기인 지방이었는데 본토와 떨어져 있어 중앙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백성들 쥐어짜서 부정축재하기에 좋고 경치가 좋으니 놀러다니기도 좋고 또 소 목장이 있어서 쇠고기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농본국가라 소 금살령이 자주 내려져서 벼슬아치들도 쇠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 소는 정부 소유라 함부로 잡으면 안되지만 법 지키면 탐관오리가 아니지 자연사한 소라고 허위보고하고 몰래 잡아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귀한 한약재였던 우황 역시 짭짤한 부수입 거리였다. 더군다나 주로 기르던 소는 제주 토종 흑우로 진상품이었다.

상당히 전투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전라도로 가는 왜구들이 자주 들렀을테니... 말도 많아서 기병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성도 예청(제주어다. 한자로는 女丁이라고 쓴다)이라 하여 군역을 졌다. 그런데 막상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제주도는 건드리지도 않아서 조선 영토 중 유일하게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 명분이 중국으로 가는 육상 통행권이라서 일본이 제주도를 점령할 이유가 없었던것으로, 나름 조선과 협상할때 유리한 주장이라도 하려던 정치적인 계산을 한걸로 보인다. 물론 그전에 명나라가 개입해서 패전했지만, 그래서 임진왜란 내내 제주도는 본토에 대한 식량 등 물자 지원에 집중하였다. 당시 제주 목사인 이경록이 제주도 병력을 본토에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조정에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뜻은 좋지만 제주도의 방어도 중요하다며 이를 반려시켰다.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도민은 아예 본토로 이주가 금지되었다. 배를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선 대신 뗏목인 테우를 써야했고, 때문에 과부 숫자가 더더욱 늘어나게 된다. 멀쩡한 어선도 툭하면 안돌아오는데 뗏목타고 나가면 퍽이나 안전하겠다. 정조 때 최초로 김만덕이 흉년에 재산을 내어 제주도 사람들을 구휼한 공로로 국가에서 육지여행을 허락한 바 있다.


도서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푸른길) 소개 기사

“7월21일(양력 9월10일) 갑자기 동남풍이 크게 불어 비까지 퍼붓는 바람에 기왓장이 날아가고 돌이 구르고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뽑혔습니다. 오래된 관아 건물은 기울어져 무너지고 낡은 민가들은 떠내려갔으며, 곡식도 온통 결딴이 나서 온 섬이 허허벌판이 돼 버렸습니다. .… 이런 혹심한 재해를 당하여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어 시체가 고랑을 메우는 탄식을 면치 못할 것 같아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조선 고종 때 제주목사 양현수는 1865년 9월 고종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목사는 초가을 태풍으로 황무지가 된 제주에서 수만 명이 굶어 죽어 시체가 고랑을 메울 정도라고 탄식했다.

김오진(57) 제주시 세화고 교감이 펴낸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푸른길)에는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일어난 각종 기후 재해와 도민들이 굶주린 실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기후재해는 기근과 전염병 확산, 사망률 급증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내내 재해가 끊이지 않았지만, 제주도 3대 기근으로 불리는 경임대기근(1670~1672년), 계정대기근(1713~1717년), 임을대기근(1792~1794년)은 재앙의 수준을 넘어섰다. 계정과 임을대기근 땐 각각 제주 인구의 30%와 23%가 떼죽음을 당했다. 경임 때 <현종실록>(1671년 4월3일)에는 당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목사 노정이 현종에게 보낸 전문에는 “제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260여명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다. .… 사람끼리 잡아먹을 순간이 닥쳤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김 교감은 이번 작업을 위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과 제주도에 왔던 목사와 어사, 유배인 등이 남긴 개인 사료들을 활용했다. 그가 분석한 15~19세기 제주도 이상기후를 보면, 인간과 동식물에 피해를 준 이상기후 건수는 모두 107건이다. 도는 이런 기후변화에 대응해 돌담을 쌓고 방풍림을 만들었다. 가뭄에는 소나 말이 밭을 밟도록 하는 밧볼림을, 폭우는 가로밭갈기 등으로 대응했다. 방사탑 설치나 영등제 등의 민간신앙도 재해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난사고도 많았다. 제주 기점 왕래자들의 해난 사고는 모두 152건으로, 18세기에 58건으로 가장 많았고, 17세기가 14건으로 가장 적었다. 그는 17세기가 제주도에서 이상기후가 가장 빈번했지만, 중앙정부가 제주인들의 도외 출륙과 해상활동을 통제해 해난사고가 적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제주인들이 표류했던 일본 오키나와 중국, 베트남 호이안도 답사했다.

세종이 농업이나 구휼제도 개선보다는 계속되는 기근과 식량 부족, 국영목장 경영을 이유로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제주인들을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대목도 관심을 끈다. 성군으로 불리지만 제주도민에겐 가혹한 군왕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게 기후다. 선인들이 어떻게 기후를 인식했고 대응하면서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특히 제주도는 해수면 상승 등 기후변화가 직접 감지되는 곳이어서 제주로 좁혀 연구했다”고 말했다. “제주인의 문화와 정체성은 혹독한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죠. 기후재해를 극복한 제주 선인들의 생명력과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53524.html#csidxc3ce12fe5813e4584a7d8100b6a4178


지리적·인위적 단절…고통 있었지만 제주 나름의 독특한 문화 형성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한 제주도로의 이주 열풍이 뜨겁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서 어느새 제주에 산다는 것은 부러움의 상징이 됐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지금으로부터 38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는 관청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떠날 수 없었던 '창살 없는 감옥'이자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약 200년간 화산섬 제주를 철저히 외부와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여다(女多)의 섬'이 된 제주

옛날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화산섬 제주는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왜적의 침입, 태풍과 같은 각종 자연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노역과 군역, 공납의 폐단이었다. 좁은 면적과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은 공마(貢馬)와 귤, 약재, 해산물, 산짐승 등 다양한 진상 공물을 바쳐야 했고, 갖은 노역을 감당했다.

특히 진상을 위해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했던 잠녀역(潛女役·해녀역), 전복을 잡던 포작역(鮑作役), 말을 기르던 목자역(牧子役), 귤을 재배하던 과원역(果員役), 진상품을 운반하는 선격역(船格役),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역(畓漢役) 등은 모두가 맡지 않으려 했던 괴로운 '6고역'(六苦役)이었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이 너무나 과중했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떠돌면서 해적질을 했다. 부역과 진상을 피해 수많은 남자가 섬을 떠나면서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제주는 '여다(女多)의 섬'이 됐다. 그나마 있던 남자들도 뱃일하러 나갔다가 폭풍우에 휩쓸려 죽어갔다. 인구가 줄어도 부역은 줄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들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여자들이 채워야 했다.

1600년대 간행된 김상헌의 제주 기행문인 '남사록'에 기록된 당시 제주 인구가 2만2천990명으로, 남녀의 성비를 보면 남자가 9천530명인 데 비해 여자는 1만3천460명으로 남녀 성비가 0.7대 1로 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들이 주로 했던 전복을 잡아 올리는 포작역을 해녀들이 떠안아야 했고, 남자들이 도맡았던 군역을 여자들이 대신 지면서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정(女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남사록'에는 당시 남정(男丁)의 수는 500명이지만 여정의 수는 800명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특단의 대책을 빼 들었다.


왕족도 피해가지 못한 출륙금지령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결국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놨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륙금지령은 유배 온 왕족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인조 6년인 1628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가족들이 제주로 유배 왔다. 오랜 세월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성군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장남 이길과 차남 이억, 사남 이급이 제주 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인조 13년 이들의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출륙금지령 때문에 처자식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후 사면돼 죄인 신분을 벗어나자 이들은 제주에 남아있는 처자식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청원을 받아들이려 해도 조정 대신들은 "제주의 인물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한 것은 곧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내려온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아무리 친족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결코 그 어미들까지 육지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 말하며 반대했다. 결국, 제주에서 얻은 자식들만 어머니 없이 제주를 떠나 한양의 아버지 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족과 혼인한 여성들의 발까지 묶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일반 백성들에겐 가혹하리만치 더 엄격했다. 조선은 혼인을 통한 여성의 이주를 막기 위해 제주 여성의 경우 육지 남자와 혼인하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다.


독특한 제주문화 명맥 이어

출륙금지령은 제주를 철저히 외부와 격리해놨다. 발달한 다른 지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고, 순조 25년(1825년) 출륙금지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쉽게 변화하지 못했다. 심지어 근세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유배지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깔려 있어 오늘날처럼 '가보고 싶은 섬'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변방'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나긴 '고립'이 제주에 해(害)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주의 문화를 보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언어와 해녀문화 등은 제주가 육지와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아래아(ㆍ)와 쌍아래아(‥) 등 한글 고유의 형태가 남아있어 '고어(古語)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제주어'(제주 사투리) 명맥이 근근이 흐르고 있다. 'ㅎ+ㆍ+ㄴ저 옵서예'(어서오세요), 'ㄸ+ㆍㄸ+ㆍ+ㅅㅎ+ㆍ다'(따뜻하다) 'ㅇ+‥망지게'(야무지게) 등이 그 예다. 또 다른 지역 사투리에서도 나타나는 단순한 억양·리듬의 차이만이 아닌 전혀 다른 어휘가 존재하는 제주어의 형성 배경에는 '섬'이라는 한반도와 단절된 지리적 환경이 주요했지만, '출륙금지령'과 같은 인위적 단절이 제주어의 독자성을 더욱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당시 제주에 '탐라총관부'가 설치돼 100년 이상 언어와 목축업 등에서 몽골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지리적·인위적 단절로 인해 다른 지역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제주 나름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해녀 문화에도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출륙금지령이 200년 가까이 지속하는 동안 제주 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싸우며 밭에서 일하다가도 물때가 되면 손에 든 호미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강인한 제주 여성, 해녀들의 생명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이해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새로 쓰는 제주사, 이야기 제주사, 제주도,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을 참고해서 제주의 출륙금지령과 문화에 대해 소개한 기사입니다.]


사진

출처

  1. 출처 : 나무위키

관련 사이트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오진희 한국문화학
편집 최여명 한국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