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로서의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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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로서의 정몽주

관료 생활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그 뒤 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후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전농시승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사직했다가 복직하였는데,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그 뒤 복직하여 예조 정랑성균관 박사·성균관 사예, 1367년 통직랑(通直郞) 전공정랑(典工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성균관 박사, 1368년 명나라가 처음 건국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년)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 겸 성균관직강(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 등을 거쳐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실제로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논어(論語)’등 사서에 관한 주자의 주석서)》밖에 없었으나 정몽주의 강의에는 막힘이 없었다.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다. 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성리학의 중시조로 보게 되었다.

신돈의 죽음과 정치적 위기

신돈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된다.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일 그는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복귀와 정치적 변신

몸을 돌보지 않는 노력과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 덕분에 정몽주는 1375년 쫓겨났던 다른 동료들에 비하여 꾸준히 정치적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장에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달라진 정치관이었다. 그해 3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공민왕 대와 달리 우왕 대에 관직에 복귀한 이후에는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들의 뜻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는 쪽으로 처신하였다. 그리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왜구의 침입과 노략이 심하여 그는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으나 성과없이 감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에 보빙사(報聘使)로 건너갔다. 그가 직접 사신으로 파견돼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왜(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일본과 외교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때 학문적 소양이 있던 왜의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대화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마가와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 한다.

규슈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규슈 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우왕 5년) 우산기상시를 거쳐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전법판서(戰法判書)·판도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한탄하는 시를 짓는다. 그 뒤 밀직제학(密直提學)·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우왕 7년) 초 첨서밀직사로 승진했다.

위화도 회군 찬성

1388년 5월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 1388년 최영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왕위에 올랐다. 국가 운영은 이성계가 주도했고, 정몽주는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결합한 신진사류 대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였지만 정몽주는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이성계가 매번 출전할 때 정몽주와 함께 나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할만큼 이성계와 정몽주는 가까운 사이였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름을 빛낸 1380년 전라도 남원군 운봉(지금의 남원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데 동의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에 반대했다.

이성계와의 협력과 공양왕 추대

1388년(창왕 1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1388년 동년 도당(都堂)에서의 개인이 사사로이 보유한 토지들이 문제가 되어 사전혁파(私田革罷)를 논의하였으나 그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 해 문하찬성사·지서연사(知書筵事)를 거쳐 1389년(창왕 2년) 6월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그해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공양왕으로 영립(迎立)했다.

1389년(창왕 1년) 말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괴뢰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지어서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였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 뒤를 이어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조준(趙浚) 등 아홉 명과 함께 공양왕 옹립 공신에 책봉되어, 동년 8월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에 올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겸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된 뒤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었다.

역성 혁명에 저항

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바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하여가》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단심가》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종묘와 사직을 엎을수 없다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참고자료

  • 정몽주:daum
  •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4페이지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99
  • 위키피디아-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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