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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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유수부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내려오면서 조선후기 수도 서울로부터 100리 안 4곳에 설치 되었다. 4개의 유수부에는 각각 별도의 군영(軍營)이 설치되었다. 개성의 관리영(管理營), 강화의 진무영(鎭撫營), 수원의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광주의 수어청(守禦廳)이 그것으로, 유수부의 책임자인 유수(留守)가 그 대장의 직책을 겸직하였다. 군영의 일반적인 군사 행정은 군영 자체의 판단 하에 수행하지만, 유사시의 군사 이동 등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명령없이 4개의 유수부가 연합작전을 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1]
  •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하였을 때 군영은 중앙정부의 지휘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국왕의 주재 하에 중앙정부의 최고위 관청인 비변사(備邊司) 회의를 통해 대응 방법이 결정되면 이를 각 유수부의 군영에 전달하고 각 군영은 이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였다. 중앙정부의 비변사병조(兵曹)에서 각 유수에게 명령서를 전달하는데, 이때 국왕이 보관하고 있던 밀부(密符)의 한 쪽도 명령 전달자인 선전관(宣傳官)에게 주어 틀림없는 국왕의 명령서임을 입증하게 하였다. 선전관이 밀부를 가지고 군영에 도착하면 유수가 임명될 때 받았던 밀부 반쪽과 합쳐 보아 꼭 들어맞아야만 국왕의 명령임이 입증되었다. 명령서에 관인(官印)이 찍혀 있음에도 이와 같은 이중 장치를 고안한 것은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이 국왕의 명령을 빙자하여 정규 병력을 반란에 동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2]

멀티미디어

스틸

파노라마

주석

  1.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주제별문화원형, 군사/외교, 조선의국왕경호, 4유수부의 지휘체계
  2.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주제별문화원형, 군사/외교, 조선의국왕경호, 4유수부의 지휘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