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독립운동가
유관순[柳寬順 ]
3.1만세운동의 상징 출생 - 사망 1902.12.16. ~ 1920.9.28.
유관순(柳寬順)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양력 기준, 제적등본의 기록에는 음력인 11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柳重權), 모친은 이소제(李少梯)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선생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 봄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의 발판 마련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과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인 이승훈(李昇薰), 양전백(梁甸伯)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 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게 된다.
3.1운동의 시작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학생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 시위에 참가
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갔다. 이로써 선생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 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더욱 고취된 만세 운동의 열기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 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중 부친과 모친을 눈 앞에서 모두 잃어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됨에 따라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 참여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 옥중에서 만세 항쟁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 3.1만세운동의 상징 (독립운동가)